字는 자정(子正), 號는 운곡(耘谷), 本貫은 원주(原州)로서, 윤적(允迪)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고려말의 忠臣이자 忠義의 人物이다. 高麗에서 국자진사(國子進士)를 지낸 그는 문장이 풍부하고 학문이 해박하며 忠義가 대단했던 사람으로 고려말에 국정이 문란하여지자 原州 치악산으로 들어가 農事를 지으며 부모를 공양하는 한편 이색(李穡)등과 교재 하면서 시사(時事)를 개탄하였다.
일찍이 조선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을 가르친바 있어 태종이 즉위하자 자주 벼슬할 것을 권유 받았으나 끝내 응하지 않고 한 임금만을 섬긴다는 절개를 지켰다. 작품으로 망국(亡國) 고려를 회고(懷古)하는 시조(時調)한수가 전해지며 야사(野史) 6권을 저술하였으나 증손대에 이르러 국사 (國史)와 저촉된다는 점이 많아 후손의 화가 두렵다 해서 모두 불살랐다고 한다. 원주 칠봉서원(七峰書院)에 제향되고 있으며, 저서로는 운곡시사(耘谷詩史)가 전해진다.
특히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수록되어 있는 時調
" 흥망(興亡)이 유수(有數)하니 만월대(滿月臺)도 추초(秋草)로다.
오백 년(五百年) 왕업이 목적(牧笛)에 부쳤으니
석양(夕陽)에 지나는 객(客)이 눈물겨워 하노라".
라는 회고가<懷古歌>의 작자로 유명하다.
꿩의 報恩 傳說에서 보여지듯 예로부터 義와 禮, 그리고 소박한 인심을 자랑하는 태백산맥의 허리에서 남쪽으로 뻗은 차령산맥 남쪽끝에 자리잡고 있으며 골짜기가 깊고 험하다고 하여 " 치가 떨리고 악이 받치는 산 " 이라는 우스갯소리의 치악산국립공원 비로봉아래, 친구 無學大師가 所點했다는 소박하고 예쁜 봉요혈(蜂腰穴)은 太宗 이방원(李芳遠)의 스승 耘谷 원천석 先生의 墓다.
[形氣論]
龍脈과 주룡(主龍)을 살피기 위해 내용(來龍)을 따라 올라 보니 기복(起伏)의 고저(高低)와 행룡(行龍)의 폭에도 힘이 넘치는 생룡(生龍)으로 입수도두 旺盛하고 아름답고 貴한 돌이 穴氣를 받쳐준다. 현무봉(玄武峰)을 바라보니 우뚝 솟은 탐랑성(貪狼星)으로 위풍당당하며 좌우(左右)로 뻗어 내려간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 기세(氣勢)도 대단하고, 관쇄(關鎖) 또한 잘 되어 있다.
겹겹이 감싸준 外靑龍 外白虎는 은둔자(隱遁子)의 神仙界라 하기에 충분하다. 순전밑으로 봉요형(蜂腰形)이 되어있어 단순하면서도 예쁜 모양은 山形을 君子形으로 만들었다.
선생의 묘(墓) 앞으로 길게 뻗은 순전(脣前)과 같은 능선이 있어 그 끝에 선생의 부인 묘(墓)가 있는데 그 곳이 혈처(穴處)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중간쯤에 혈처(穴處)가 있다는 사람도 있다.
그 곳 역시 양쪽 골짝이 너무 깊고 혈(穴)을 보호(保護) 해주는 보호사(保護砂)가 없어 혈처(穴處)로 보기엔 현재의 墓 形態가 보는 자에게 시사해준다.
傳하는 말에는 生存時에 교분이 있었던 無學大師가 墓所를 잡아주면서 " 현재 墓가 있는 위 지점은 삼대정승이 나서 부귀영화를 누릴 곳이고, 아래지점은 백대자손이 번영할 곳이다 "라고 하니, 耘谷 선생은 후손을 위해 아래 지점인 봉요혈(蜂腰穴)로 定하였다고 한다.
유언(遺言)에 따라 모셔진 선생의 묘(墓)는 정혈지(正穴地) 아래지점을 擇하여 蜂腰穴 자리에 썼다.
“ 이곳에 신후지지(身後之地)를 정(定)해야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지 않고 손(孫)이라도 이어져 갈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는 선생은 이미 자연(自然)의 이치(理致)를 깨닫고 하늘의 뜻을 간파한 분이었다고 생각된다.
옛날 어느 현인(賢人)도 “ 도(道)는 그 곳에 있는데 인간(人間)이 깨닫지 못할 뿐이다 ”라고 탄식(歎息)하였다고 하지 않았는가..........
耘谷先生은 정혈지(正穴地)가 있음을 알고 있었으나 자신은 주인(主人)이 아니며, 때가 이르지 못하였음을 알고 있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처럼 하늘의 뜻을 깨달은 선생이라면 자연(自然)의 이치(理致)는 통달(通達)한 분이었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이 찾아 올 것을 미리 알고서 만나주지 않은 것도 인간사(人間事)를 미리 간파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진실로 조상(祖上)의 묘(墓)를 명당(明堂)에 모시고 음덕(陰德)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경종(警鐘)을 울려주는 교훈이라 하겠다..
선생은 이미 이세상의 도(道)를 깨닫고 가신 분으로서 후세(後世)에 찾아온 풍수학인(風水學人)에게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실까............ 꾸밈없이 소박하고 청초한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살려 일생을 淸高하게 살다간 선생의 선비정신을 후세에 傳하고져 하였으니 許穆先生은 碑文에서 백이 숙제(伯夷 叔齊)가 절개를 지킨 고사에 비유 함이다.
原州市內서 동쪽으로 강을 건너 시립박물관 방향으로 가면 치악산 아래 마을 " 황골쉼터 및 먹거리단지" 로 가는 道路를 이용하여 가다보면 석경사(石逕寺)라는 푯말 옆에 里程表가 보인다. 우측 길따라 몇구비 돌면 墓所入口가 보이며 도로및 주차장 시설정비에 한참 바쁘다. 墓所로 가는 山道에는 先生에 관한 이야기를 圖 .書로 짜임새 있게 羅列시켜놓은 것은 他의 模範이라 하겠다. 옛날에는 耘谷선생의 墓所가 있는 이곳을 石逕이라하여 석경촌(石逕村)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理氣論]
이곳은 입수도두처(入首倒頭處)에서 경사지는 곳에 타원형의 유두혈(乳頭穴)을 맺어 놓고 있다.
탐랑성(貪狼星)은 대부분 좌우(左右)로 개장(開帳)하여 청룡(靑龍)·백호(白虎)를 만들고 개장천심(開帳穿心)으로 내려온 주룡(主龍)은 기복(起伏)하여 행룡(行龍)하는데 용진처(龍盡處)에서 혈(穴)을 맺고자 할 때는 일반적으로 유두혈(乳頭穴)을 맺는 곳이 많다.
後龍이 乙辰龍으로 乙入首에 진좌술향(辰坐戌向)하고 물은 左水到右하여 巽巳方 臨官水와 丙午方 帝旺水,丁未方의 巨門水와 같이 우측의 艮寅長生水가 乾亥의 絶位에서 합하여 나가면 火局의 正墓向이다. 辛入乾宮百萬庄이라 辛向을 하고 乾方으로 물이 흘러나가면 大富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發富發貴하고 人丁旺盛하고 福壽雙全한다고 하니 일찌기 唐나라의 양균송(楊筠松) 先生께서는 八十八向法을 바르게 作局할 수 있다면 天地에 버릴 땅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만약 물이 右水到左하였다면 生水到沖絶位되어 극히 凶하다.
또한 乙入首에 戌向이라. 入首가 陽이면 向도 陽이 되어야 하는 정음정양법(淨陰淨陽法)과 포태법(胞胎法)에도 합당되는 法術이다. 墓所를 向하여 우측아래 쪽 떨어진 자리에 당대의 仙人 미수 허목(許穆)이 글을 짓고 이명은(李命殷)이 글씨를 섰다는 아담하면서도 마음을 끌어당기는 碑石이 있다.
[묘갈(墓碣)]
선생은 원주 사람으로 성은 원(元)씨요. 이름은 천석(天錫)이고, 자는 자정(子正)이며, 고려국자진사(高麗國子進士)이다. 고려(高麗)의 정치(政治)가 어지러워지자 세상과 인연을 끊고 숨어살면서 호(號)를 운곡(耘谷)이라 하였다. 선생은 고려(高麗)가 망하자 치악산에 들어가 종신(終身)토록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태종(太宗)이 여러 번 벼슬길에 나오라고 불렀으나 나오지 않자 그 절의(節義)를 높이 추앙(推仰)하여 선생의 초막을 찾았을 때 선생은 이를 피하고 만나지 아니하였다. 태종(太宗)이 계곡 바위에 올라 선생의 거처를 지키는 노파를 불러 후사하고 선생의 아들 형(泂)에게 기천현감(基川縣監)의 벼슬을 내렸다.
후인(後人)들이 그 바위를 태종대(太宗臺)라고 하였는데 치악산 각림사(覺林寺) 근방에 있고, 지금 원주(原州)시가지 동쪽 10리쯤 되는 거리인 석경(石鏡, 石經이라고도 쓰고 우리말로는 돌갱이라고 함)에 운곡(耘谷)선생의 묘(墓)가 있으며 선생의 묘(墓) 앞에 있는 묘(墓)가 부인의 묘(墓)라고 한다.
부인 원씨는 선생과 같은 원씨가 아니니 원주(原州)에 두 원씨가 있다는 것이 이것이다. 장남 지(沚)는 직장동정(直長同正)이고, 차남 형(泂)은 기천현감(基川縣監)이다. 선생의 후손(後孫)들이 매우 많으나 기천현감(基川縣監)의 후손(後孫)이 더욱 많다.
내가 듣기로는 군자(君子)는 은둔(隱遁)하여도 세상을 버리지 않는다 하였는데 先生이 비록 세상을 피하여 스스로 숨어 살았으나 세상을 잊어버린 것은 아니며 도(道)를 지킨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몸을 깨끗하게 함이다.
백이(伯夷)의 말에 "옛날에 선비들은 잘 다스려진 성세를 만나면 그 맡은 바 임무를 피하지 아니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면 구차하게 살지 않는다 하였으니 천하가 암울하니 이를 피하여 깨끗하게 내 지킬 바를 지킴만 못하다." 하였다. 이런 탓으로 전(傳)에 이르기를 날이 추어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홀로 푸르름을 알게 되고 세상이 어지러워진 뒤에야 맑은 선비를 알아보게 된다.
맹자(孟子)에 이르기를 " 백이(伯夷)는 그 임금이 아니면 섬기지 않고 그 백성이 아니면 부리지 않고 잘 다스려진 세상에는 나아가고 어지러운 세상에는 물러났으니 백이(伯夷)는 성인(聖人)으로 청백(淸白)한 사람이다." 하였으니 선생은 백이(伯夷)에 견줄만한 사람이다.
미수 허목(1595~1682 許穆)선생은 찬(贊)하여 이르기를 "뜻을 세워 암혈(巖穴)에서 사는 선비도 나아가고 물러날 때가 있고, 세상에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니 그 뜻을 굽히지 않았도다. 그 몸이 욕되지 않았으니 후세(後世)에 모범(模範)이 되어 우직(禹稷)과 이제(夷齊)와도 같으니 선생은 과연 백대의 스승이 되었다고 표현하였다".
한국여성관계자료집 중세편(하)/이화여자대학교 한국여성연구소 편,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86, 도서
백운연(白雲淵) 장로의 시에 차운하노라 보내온 시에 아내를 잃은 뜻이 있다.
서곡(西谷) 원선생의 처인 전씨(全氏) 부인을 곡하노라
모진(母津) 2수
저곡 원씨군군(楮谷元氏郡君)을 곡하노라
조봉선(趙奉善)의 어머니 신부인(申夫人) 만사
판사 정을언(鄭乙彦)의 처 신군군(辛郡君) 만사 4수
원장흥(元長興)의 어머니 조부인(趙夫人) 만사 4수
추석에 어머니 산소에 절하다
백운연(白雲淵) 장로의 시에 차운하노라 보내온 시에 아내를 잃은 뜻이 있다.
어리석은 인생 부질없이 생사를 맴돌지만
현사(賢士)는 마음이 밝아 거유를 뜻대로 하네.
육문(六門)에 얽매여 풀지도 못하고,
삼계(三界)를 왕래한다 하면서 유학을 모르네.
비결(秘訣)을 듣고 도로 돌아오기를 원하였고
진리를 말하여 수심을 씻고자 하였네.
예골1(禮骨)과 편시2(鞭屍)가 모두 잘못이니
항상 달인(達人)과 한가로이 놀기를 생각하네.
이 집안으로 시집와서 가문이 창성하였네.
1녀 5남이 모두 귀해졌고 82세까지 건강하였네.
몸은 물거품처럼 사그러졌으나 한은 물소리처럼 무한하네.
평생의 행적 어디에서 찾을까.
일월(日月)의 빛만이 황량하네.
작년 가을 어머님을 이별하고서
자나 깨나 그리운 생각 끊이지 않았네.
이 강가에 이르니 슬픈 마음 더하여
흐르는 눈물 훔쳐 강물에 뿌렸네.
누가 이 나루에 어머니란 이름 붙였나.
남북으로 왕래하는 아들된 사람이겠지.
이 물을 어머니의 젖으로 삼아
어버이 여읜 천하 백성 두루 길렀으면.
정량(貞良)한 맑은 자질 잘못이 없으니
부덕(婦德)과 모의(母儀)가 뉘라서 더할소냐.
거안제미3(擧案齊眉) 다시 볼 수 없으니
백란(伯鸞 남편을 지칭함)의 생각이야 어떠하리오.
내가 불행하여 일찍 아내를 잃엇으나 어린 자식들이 불행하게 될 것을 염려하여 다시 아내를 얻지 않고 홀아비로 지낸 지가 21년이 되었는데, 지금은 아들 딸들이 혼인하여 염려의 마음이 놓이므로 이 시 한 수를 지어 스스로에게 주노라
어미 잃은 아이들 앞에 있으니
20 여년 동안 궁함을 참고 분수를 알았네.
서가(書架)에 천 권의 책 쌓이는 것만 알고
주머니에 돈 한 푼 없는 것을 개의치 않았네.
늙기까지 새 생활 계획하지 않고
부질없는 옛 인연만 생각하였네.
자식들의 혼인 끝내어 여한 없으니
이제서야 안심하고 죽을 수 있네.
서쪽 이웃에 한 노파가 사는데 자식이라고는 오직 창기가 된 딸 하나 만이 있을 뿐으로 노파가 늙고 병들자 그 딸이 이웃에서 구걸하여 봉양하였는데, 하루는 그 딸이 악부의 부름을 받아 길을 떠나니 노파는 수족을 잃고 매우 슬피 울었으므로 그 울음 소리를 듣고 이 시를 짓는다
애원한 울음 소리 하늘까지 들리니,
모녀가 이별할 때 하늘마저 컴컴했네.
성색(聲色)은 예부터 한 번의 즐김을 줄 뿐인데,
태평의 기상이 어이 이 속에 있으랴.
백주4(栢舟)같이 맑은 절개 향려(鄕閭)에서 으뜸인데
60평생에 한 가지 꿈을 남겼네.
은택은 이미 말랐으나
눈물 줄기는 효자의 옷깃을 적시누나
슬픈 바람 스산히 호리5(蒿里)에 불고
썰렁한 달은 여전히 초가에 비치누나.
내 어릴 적에 이웃에서 무양(撫養)을 받았으니
그리운 정 전하며 영거(靈車 관을 실은 수레)에 절합니다.
후비[椒蘭]가 될 만한 아름다운 자질이요,
향려(鄕閭)에 으뜸인 완전한 부덕(婦德)이로다.
49세의 젊은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났으니
온갖 삼매(三昧 오직 한가지에 마음을 집중시키는 경지) 만류하기 어려워라.
공규(空閨 남편없이 아내 혼자 있는 방)는 적막하여 원앙금침 썰렁하고
척침(隻枕 독수공방)엔 근심 서려 비취 장막 차디 차네.
우리만 슬퍼할 뿐 아니라
백운(白雲)ㆍ유수(流水)도 모두 비탄에 잠기네.
사천(沙川) 위에서 고개 돌려 뒤를 바라보니
수색(水色)이랑 송성(松聲)이 모두 수심을 일으키네.
자연은 영원하고 인생은 잠시이니, 생각이 끝이 없고
하늘은 높고 땅은 묵묵하니 묻노니, 무슨 이유인가.
항아6는 다시 월궁(月宮)으로 돌아가 살고
왕모7(王母)는 다시 선부(仙府)로 돌아가 노네.
가군(家君 남편)에게 일러 슬픔을 거두게 하소.
늙으신 어머님이 남주(南州)에 계시오.
해맑은 구름 속의 달이요8
깨끗한 눈 속의 소나무일세.9
남편을 도와 높은 벼슬에 오르게 했고
친척과 화목하여 옹용(壅容 온화한 용모)을 보이셨네.
거울 속에는 난새[난조(鸞鳥)]의 그림자 끊겼고10,
진흙 위 두루미만 홀로 서 있네.11
일행에 상복 입은 사람 있으니
어찌 자손 없음을 걱정하리. (부인에게 자식이 없어 질녀가 양자가 되어 상을 주관하였다. 때문에 이같이 말한 것이다. )
정숙한 규범이고
유화한 부인일세.
하루 아침에 돌아가니
온 동리가 슬픔에 잠겼네.
꽃이 지니 봄 경치 담담하고
연기가 엉키니 새벽 빛 더디네.
만가는 처절하여 창자가 끊어지는 듯하나
부인의 지난 행적 다시 찾기 어려워라.
모의(母儀)와 부덕(婦德) 아울러 뛰어나니,
훤당(萱堂 어머니의 거처)이 무성하여 화락한 집이었네.
자손들 창성할 날 곧 닥쳐오는데
어찌하여 먼저 구천(九泉) 사람 되셨는가.
아들 충효하고 딸이 현숙한 것은
삼천(三遷)의 가름침12 전일(專一)한 덕일세.
화려한 복장이 상복으로 변하니,
원근의 보고 들은 사람 하늘에 부르짖네.
길쌈하고 칭상(稱觴 명절 때 어른께 술잔을 올려 축수하는 것)함에 옛 현부(賢婦)를 본받았으니
평생의 정결을 누가 능히 견줄손가.
마을 사람 모두가 눈물 뿌리니
그 눈물 모여서 구천(九泉)까지 넘치겠지.
가로 맨 상여줄과 운불삽13(雲黻翣)에 비풍(悲風) 움직이니
덧없는 인생, 만사가 허무하네.
해로가14(薤露歌)가 끝나 가마도 흩어지니
달빛 아래 무덤만이 홀로 우뚝하련가
촉촉히 내린 이슬 무덤가에 가득한데
무덤가에 부는 바람 또 가을을 알리네.
그리는 생각 속에 몸은 이미 늙었으니
유수(流水)같이 빠른 세월 스스로 한탄하네.
무덤가 풀 쇠하고 경치는 황량한데
자식으로 (추석마다) 무덤에 다닌 지 25년일세.
학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으니15사람이 탄식하고
구름은 무심하게 떠가니 물만 흐르네.
살아서도 뜻이 같더니 죽어서도 한 언덕에 있네.
가을 달은 한 마음인 두 분 무덤 비쳐 주네.
형제들이 올 적마다 함께 절하니
구천에서도 이를 함께 기뻐하시리. 곁에 숙모 원부인의 무덤이 있어 우리 어머니의 자손이 명절 때마다 와서 숙모의 무덤에까지 함께 제사를 지냈다. 이 때문에 위와 같이 말한 것이다.
耘谷行錄序
嘗聞原州人元天錫在麗末隱居著書。言禑,昌父子非辛出事甚悉。逮我朝。閉門終身。其淸風峻節。直可與圃,冶諸公相伯仲。而子孫祕其書久益密。人無得以見者。幷與其名遂泯泯不傳於世。後二百年。余按節到是州。適得其所爲詩耘谷集。雖所紀不多。與向所聞異。要之不失爲特筆也。嗚呼。方禑之嗣王位也。數三元老如崔都統,牧隱,圃隱諸公猶在也。不惟當時上下無異議。牧隱首曰。當立前王之子。及昌之廢也。始曰。禑父子乃旽之子孫。蓋不如是則昌無可廢之道。特爲此以籍之耳。不然。王氏之祀已絶於恭愍之後。而以數公精忠大節。竭誠盡瘁。死而後已者。果爲誰乎。況朝廷綱紀不甚潰裂。而軍國大政。一委之數公。則廢僞君存國姓。必不出他人之後。其所進退取舍。講于中者固已審矣。彼修史輩亦嘗食王氏之祿者。旣不能一死。又以禑父子冒之辛。此猶不足。至記恭愍從屛後觀洪倫等褻行事。至今觀者莫不醜唾。據禑一事。不足知其誣。微公一言。千百載下。必將襲謬不已。可謂東國有史乎。若是乎忠臣義士之有益於爲人國家也。有牧隱,圃隱諸公而立於朝。則當天命人心已去之後。能有所扶持。至於數十年之久。其隱而在下也有如公者。則吟詠陶寫之間。據實直書。一言一字無非忠憤所激。不但王氏之爲父子者定。麗史中亂言妄書亦將因此。而或有辨證之地。則窮達出處雖不同。其爲邦家之光一也。當時之君。早辨忠邪。終始委任。得以展布所蘊。牧隱,圃隱豈終爲文天祥,陸秀夫之徒。而茹芝餐菊亦豈公之所欲自托者哉。可悲也夫。公之詩二卷。皆公所自書。多與山人釋子所嘗往來酬唱。而其中若干首。卽公之大節所寓以存者。亟當廣布於世。爲之標式。遂抄而爲一冊。編其歲月於其間而名之曰詩史。蓋觀風者之所不可已。而亦以備秉筆者採焉。萬曆癸卯夏。江原道觀察使朴東亮。謹書。
文集序[鄭莊]
先生卽我太宗大王微時師也。見高麗政衰。遯荒於雉嶽山中。及大明建文庚辰。太宗大王纘承寶位。首以大官召。先生不應。翌年。上馳三百里躬臨廬。先生避不見。上知不屈。官其子泂基川縣監。召舊㸑婢語。坐門前石悵然久。後人名其石曰太宗臺。先生隱著詩與文。文則史也。可以繼紫陽筆。而入於火不傳。見存者惟詩集數卷耳。李退溪曰。耘谷詩。史也。詩以史則傳於後無疑。噫。世人以先生比之甘盤,伯夷。此豈先生素所期哉。適會而爲甘盤爲伯夷。亦於先生不幸耳。至若詩文。則先生有意而爲之。期百世後有取焉。文則已不幸而灰矣。詩則藏於巾衍中。迨四百年不行于世。有所諱也。先生十三代孫孝達甫。謀宗人入剞劂。皆言伯夷之歌不諱於周邦。則先生之詩亦何諱於朝鮮耶。詩出於世而高麗五百年統緖爲有光。竊爲先生幸也。夫詩者出於性情。先生稟二氣之正大以爲性情。故發於吟哦者渢渢灝灝。兼詩書典雅之則。千古詩家中一人。謂先生甘盤。謂先生伯夷。無以加矣。自先生視。一浮雲過太虛耳。先生之典刑在詩。先生之肝肺在詩。爲子孫尊慕之道。詩爲重。此子孫之入梓意也。噫噫。先生以德授業。開我朝億萬世基。以節肥遯。立君臣億萬世綱。朝鮮一邦之人咸受賜也。孰不爲幸。而先生之詩又傳之後世。則不但爲先生幸也。使覽者究厥性情之正。敦學術勉節義。則其於作人心化世俗。大有補焉。然則是集之行於世者。豈非一邦後世之幸歟。故愚於先生之之德之節。無容議爲。獨於先生之詩。尤有所敬服感歎也。後學草溪鄭莊。敬識。
耘谷行錄序[丁範祖]
當國初鼎華之際。爲王氏立節。推鄭圃隱,吉冶隱元耘谷三先生尤車偉。譬殷之三仁焉。雖然。圃隱。元老也。佩宗社安危國家興亡。則以一死任綱常之重。冶隱猶是門下注書也。見邦籙將訖。大命有歸。力不能救。則逴然長逝。甘作金鳥逸民。蓋二先生自靖之義。皎如日星。國史書之。後世誦之。而其迹顯。至若元先生。特前朝一進士耳。未嘗立王氏之朝食王氏之祿。而龍潛聖人。卽同學舊契也。乘運攀附。爲佐命勳臣。夫誰曰不可。而特以世祿之裔。義不事二姓。匿伏大山嵁巖之中。與木石同老。而其迹微而隱。其處義視二先生爲尤難。嗟夫。今讀先生遺集。可以規測其心事矣。其謳吟詠歎。與樵歌漁唱鍇出。而有時感念宗國。輪寫胸臆。直指則悲憤慷慨。婉寄則徘徊掩抑。宛然有麥秀採薇之遺音。蓋先生之意。欲襲之巾衍。祕之石室。不欲散落人間。是不徒隱其跡。而又將隱其辭。故曰。其處義視二先生爲尤難已。雖然。天下之理未有貞臣義士伏而不顯者。故車駕臨門。巖號太宗。而其跡一顯。鄕人慕義。祠而祭之。而其跡再顯。嗣是而揄揚乙筆愈出而愈著。將不勝其顯白矣。今範祖之因其子孫之托。猥撰卷首之文。庸詎非闡微之一助也歟。聖上二十四年庚申孟喜。資憲大夫,刑曺判書兼知經筵,春秋館事。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五衛都摠府都摠管。錦城丁範祖。謹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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耘谷行錄跋
1.耘谷先生事蹟錄後語[鄭亮欽] |
余嘗尙論麗亡時事。竊悲三隱之迹而信其義。以爲圃隱大而任。牧隱正而和。冶隱嚴而晦。是皆自靖以獻。特立萬古。莫或尙之。顧時義錯盭。難知而易疑。雖不以病。亦足以憾。乃歸考耘谷元先生遺事。作而歎曰。先生之與三隱先生。其心一也。迹舛而義兼。抑有光于三隱者非耶。夫身佩五百年王業。存亡▓俱。成仁取義。而社稷爲重地。忍二王之騈首者。圃隱先生之大而任也立子一言。毅然難犯。王綱賴延。而前朝雅望。雍容封伯之新命者。牧隱先生之正而和也。超然遠引。不事二姓。其擇益精。其辭益婉。而彼哉妄男不知。則敢肆詆誣。此以知冶隱先生之嚴而晦也。前人之論述備矣。槩言所遇不同。故曰不以病而以憾。若耘谷先生。見幾玄陵。遯迹荒野。爵祿不加於身。權位不到於手。不拘不係。無責於時。山林一進士耳。乃敬天降衷。憂人爲禽。其心若曰亡國斁倫。吾無如時人何。猶有不亡不斁者。非我扶之而誰也。旣所立光明卓絶。一如錄中所記。噫。匹夫無位。綱常是賴矣。千乘屈節。罔敢臣僕矣。短什巾衍。百世信筆矣。兹可謂任其大和其正而晦其嚴矣。故知兼三隱而無遺憾者。先生一人而已。亦曰所遇不同耳。惟其詩傳而史佚。論者惜之。然陶山李夫子讀先生詩曰。史也。史寓於詩。詩傳而史不亡。何佚之惜乎。然先生之詩。今猶有可諱。況史哉。千秋萬歲。終必有深惜之者。顧余不得不爲是惜也。八溪鄭亮欽謹識
2.耘谷行錄跋[元檃] |
詩以史名。志其直也。從古聖人之徒。信道篤而自知明。故遯世不見是而旡悶。是知純剛至正之氣。高明光大之學。發於言而成章者。非經則史也。吾先祖耘谷先生遭時板蕩。獨秉彝倫。隱居而著詩與文。文則史也。失火無傳。卽海東樂府詞所謂當時著述空勞神者是也。惟詩二卷。尙爲我五百年承家之鍾鼎。卽退溪,寒岡兩先生所謂原城有信史者是也。若稽麗末時事。王氏父子之冤。定妃所命恭讓之令。事在洪武二十二年己巳詩中數三首據實直書者。蓋此時事也。金火遞遷之後。有南行新國奉金尺受寶籙慶贊之詩。可見所諱之不在詩也。先祖以高麗忠肅王十七年庚午七月初八日嶽降。而詩中所係年月。始於辛卯。終于甲戌。其間爲四十四年。萬斛珠璣。豈無遺漏。藏之石室。紙爛蠹蝕。有時擎讀。不覺涕隕。嗚呼。淹中妙鍵。不抽不傳。今也將付剞劂。皆言盧水鼓琴。不害於華夏之功。西山採薇。無損於戎啇之德。故務光之操。伯夷之歌。未聞諱之於殷周之世。況一部詩史爲萬古綱常之重者哉。蓋其造道成德。史纂論斷。可謂知言。至若大節所寓。錦溪朴公序之詳矣。何容贅說。嗚呼。衣冠之藏。在於治東十里石逕之山。州北三十里七峯。卽賜額妥靈之所也。風聲所及。爲之仰慕而歌詠者。亦頗蒐輯。附于卷末。原稿凡二冊。二冊凡三編。摠一千一百有四十有四首。佚於原稿而存乎謄本者。亦在此數。然謄本之入梓者。雖有疑難處。從何質訛。以其簡袠重大。故二冊則分而三之。三編則釐而五之。非有意於其間也。嗚呼。某年月日之逐題縣錄。五六七言之不以彙分。一依親筆次序。不敢改易。刊出若干帙。以備湮沒之歸。亦以竢日後好古之君子。崇禎紀元後四戊午五月上澣。十六代孫檃敬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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