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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서애집(西厓集)

회기로 2010. 1. 24. 20:20

서애집(西厓集)
형태서지 | 저자 | 가계도 | 행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형태서지
권수제  서애선생문집(西厓先生文集)
판심제  서애선생문집(西厓先生文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  1894년 간행
권책  원집(原集) 20권, 별집(別集) 4권, 연보(年譜) 3권 합 14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1×17.2(㎝)
어미  上下 二葉 花紋 魚尾
소장처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도서번호  D1-A209C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52
 저자
성명  류성룡(柳成龍)
생년  1542년(중종 37)
몰년  1607년(선조 40)
 이현(而見)
 서애(西厓), 운암(雲巖)
본관  풍산(豐山)
봉호  풍원부원군(豐原府院君)
시호  문충(文忠)
특기사항  이황(李滉)의 문인(門人)
 가계도
 柳公綽
 간성郡守
 柳仲郢
 황해도觀察使
 安東金氏
 진사金光粹의 女
 柳文龍
 早歿
 柳雲龍

 牧使
 겸암집

(謙菴集)

 고성 李容의 女
 
 柳成龍
 
 全州李氏
 李坰의 女
 柳褘
 早歿
 柳袽
 察訪, 早歿
 柳褍
 洗馬
 柳袗
 正郞
 權采의 女
 충재 증손녀
 女
 
 李文英
 察訪,子 수은 이홍조,5대손 대산 이상정
 女
 
 趙稷
 縣監
 側室
 
 柳初
 柳川
 柳襜
 
 女
 
 邊應篁
 
 女
 
 창암 李潤壽
 용궁 무이
 女
 
 선산金宗武
 察訪,선산 원호리 평성 들성
 女
 
 鄭好仁
 縣監

기사전거 : 行狀(鄭經世 撰), 柳仲郢行狀(柳成龍 撰) 등에 의함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중종 37 1542 임인 嘉靖 21 1 10월 1일, 義城縣 沙村里 外家에서 태어나다.
명종 9 1554 갑인 嘉靖 33 13 東學에 가서 「大學」과 「中庸」을 講하다.
명종 12 1557 정사 嘉靖 36 16 가을, 鄕試에 합격하다.
명종 13 1558 무오 嘉靖 37 17

廣平大君의 5세(대)손 李坰의 딸

全州李氏와 혼인하다.

명종 14 1559 기미 嘉靖 38 18 5월, 祖父喪을 당하다.
명종 15 1560 경신 嘉靖 39 19 10월, 冠岳山에서 「孟子」를 읽다.
명종 16 1561 신유 嘉靖 40 20 고향으로 돌아가 「春秋」를 읽다.
명종 17 1562 임술 嘉靖 41 21

9월, 陶山에서 退溪先生을 배알하고

「近思錄」 등을 배우다.

명종 19 1564 갑자 嘉靖 43 23 7월, 生員試와 進士試에 합격하다.
명종 20 1565 을축 嘉靖 44 24 太學에 들어가다.
명종 21 1566 병인 嘉靖 45 25

봄, 牧使로 부임하는 부친을 모시고 定州로 가다.

○ 10월, 文科에 급제하다.

○ 11월, 承文院 權知副正字가 되다.

명종 22 1567 정묘 隆慶 1 26

봄, 正字가 되다. ○ 4월, 예문관 검열이 되다.

○ 8월, 退溪先生을 송별하다.

咨文馬의 점검을 위해 義州에 다녀오다.

선조 1 1568 무진 隆慶 2 27

2월, 定州로 부친을 뵈러 가다. ○ 가을,

星州史庫에 曝曬하러 가다. ○ 待敎가 되다.

선조 2 1569 기사 隆慶 3 28 상소하여 仁宗을 延恩殿에 모시는 것은 禮가 아니라고 논하다. ○ 성균관 전적, 공조 좌랑이 되다. ○ 10월, 감찰로서 聖節使 李後白의 書狀官이 되어 燕京에 가다. ○ 明의 太學生들이 王陽明과 陳白沙의 학문을 주장하자, 薛文淸이 宗主라고 주장하다.
선조 3 1570 경오 隆慶 4 29

3월, 돌아와 부수찬 지제교를 거쳐 수찬이 되다.

○ 가을, 賜暇讀書하다. ○ 정언이 되다. ○ 12월,

退溪先生을 哭하다. ○ 이조 좌랑이 되다.

선조 4 1571 신미 隆慶 5 30

3월, 禮安의 退溪先生 장례에 참석하다. ○ 從叔父

柳景深을 長湍에서 곡하다. ○ 가을, 洛水의

西厓(翔鳳臺)에 서당을 세우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다. 이로 인해 西厓로 自號하다.

선조 5 1572 임신 隆慶 6 31 봄, 수찬이 되다. ○ 李浚慶의 관작 추탈 논의에 대하여 부당함을 주장하다. ○ 9월, 원접사 종사관이 되어 義州에서 頒詔使를 맞이하다.
선조 6 1573 계유 萬曆 1 32

6월, 다시 이조 좌랑이 되다. ○ 7월, 부친상을

당하고, 12월에 天燈山 金溪에 장사 지내다.

선조 8 1575 을해 萬曆 3 34 9월, 부교리가 되고, 이후 이조 정랑이 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다.
선조 9 1576 병자 萬曆 4 35 1월, 遠志精舍가 완성되다. ○ 4월, 헌납이 되어 還朝하다. ○ 검상, 전한, 장령, 부응교가 되다.
선조 10 1577 정축 萬曆 5 36

1월, 검상이 되다. ○ 휴가를 얻어 安東으로 歸覲하다. ○ 여름, 舍人이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 廬江書院의 退溪先生 奉安文을 짓다.

○ 10월, 응교가 되다.

선조 11 1578 무인 萬曆 6 37 군기시 정, 응교, 사간을 역임하다.
선조 12 1579 기묘 萬曆 7 38

봄, 직제학이 되다. ○ 4월, 동부승지 지제교가 되다. ○ 7월, 이조 참의가 되었으나 辭遞하고, 부제학이

되다. ○ 겨울, 다시 승지가 되다.

선조 13 1580 경진 萬曆 8 39 봄, 부제학이 되었으나 상소하여 乞養하니 尙州 牧使에 특배되다.
선조 14 1581 신사 萬曆 9 40

봄, 부제학이 되다. ○ 겨울, 얼음이 얼지 않자

동료들과 〈陳箚十條〉를 올리다. ○ 왕명으로

「大學衍義」를 抄하여 올리다.

선조 15 1582 임오 萬曆 10 41

봄, 대사간이 되다. ○ 우부승지가 되었다가 도승지에 특배되다. ○ 대사헌이 되다. ○ 왕명으로

〈皇華集序〉를 지어 올리다.

선조 16 1583 계미 萬曆 11 42 1월, 부제학이 되다. ○ 휴가를 얻어 安東으로 歸覲하다. ○ 李彥迪 의 「九經衍義」의 跋을 쓰다. ○ 2월, 尼湯介의 난으로 〈北變獻策議〉를 올리다. ○ 7월, 함경도 관찰사가 되고, 9월에 대사성이 되었으나 모두 親病으로 나아가지 않다. ○ 10월, 경상도 관찰사가 되다.
선조 17 1584 갑신 萬曆 12 43

여름, 晉州에서 崔永慶을 방문하다. ○ 7월, 부제학이 되다. ○ 8월, 왕명으로 〈文山集序 〉를 짓다.

○ 예조판서 겸 동지경연춘추관사 홍문관제학이

되다. ○ 9월, 형 柳雲龍이 仁同 縣監이 되어 모부인을 모시니, 이후 누차 省覲하다.

선조 18 1585 을유 萬曆 13 44

3월, 왕명으로 〈精忠錄跋〉을 짓다.

 ○ 왕명으로 「圃隱集」을 교정하고 跋文을 짓다.

선조 19 1586 병술 萬曆 14 45

3월, 휴가를 얻어 還鄕하다. ○ 軍威의 南溪書堂이

완성되다. ○ 玉淵書堂이 완성되다. ○ 吉冶隱

砥柱中流碑陰記를 짓다. ○ 栢潭 具鳳齡을 곡하다.

선조 20 1587 정해 萬曆 15 46 3월, 「退溪集」을 편차하다. ○ 여러 차례 被召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선조 21 1588 무자 萬曆 16 47 10월, 형조판서 겸 양관대제학이 되다.
선조 22 1589 기축 萬曆 17 48 봄, 대사헌, 병조 판서, 지중추부사를 거쳐 다시 대사헌이 되다. ○ 6월, 왕명으로 〈孝經大義跋〉을 짓다. ○ 7월, 부인 李氏가 졸하다. ○ 9월, 예조 판서가 되다. ○ 10월, 鄭汝立 獄事가 일어나자 상소하여 自劾하다.○ 이조 판서에 특배되다.
선조 23 1590 경인 萬曆 18 49 5월, 우의정이 되다. ○ 宗系 改正으로 輸忠翼謨光國功臣 3등, 豐原府院君에 봉해지다.
선조 24 1591 신묘 萬曆 19 50 2월, 특명으로 이조 판서를 겸하다. ○ 좌의정이 되고 이조 판서를 겸하다. ○ 명 나라에 倭情을 통보하자고 요청하다. ○ 형조 정랑 權慄을 義州 牧使, 井邑 縣監 李舜臣을 全羅左水使로 천거하다. ○ 李鎰을 慶尙右水使의 후임으로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다. ○ 鎭管法 실시를 청하다. ○ 7월, 대제학을 겸하다.
선조 25 1592 임진 萬曆 20 51 4월, 申砬과 兵事를 논하다. ○ 특명으로 병조 판서를 겸하고 都體察使가 되다. ○ 世子冊封을 건의하여 光海君을 세자로 삼다. ○ 경상우병사 金誠一의 사면을 청하여 허락받다. ○ 5월, 開城에서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곧 파직되다. ○ 義州에서 啓辭를 올려 時務를 논하다. ○ 9월, 建州衛가 援兵을 보내겠다는 제의를 거절하라고 上箚하다. ○ 12월, 平安道 都體察使가 되다. ○ 明 나라 提督 李如松과 平壤奪還을 의논하다.
선조 26 1593 계사 萬曆 21 52 1월, 三道 都體察使가 되다. ○ 4월, 李如松이 和議하는 것에 呈文을 보내다. ○ 10월, 扈駕하여 還都, 訓鍊都監 설치를 청하다. ○ 다시 영의정이 되다.
선조 27 1594 갑오 萬曆 22 53 3월, 鎭管法 실시를 다시 청하다. ○ 6월, 〈戰守機宜十條〉를 올리다. ○ 겨울, 〈軍國機務十條〉를 올리다.
선조 28 1595 을미 萬曆 23 54 1월, 己丑獄事의 伸雪을 청하다. ○ 10월, 京畿, 黃海道, 平安道, 咸鏡道 都體察使가 되다.
선조 29 1596 병신 萬曆 24 55 1월, 兵士訓練의 규칙을 정하여 四道에 頒行하다. ○ 7월, 委官이 되어 李夢鶴 獄事를 다스리다.
선조 30 1597 정유 萬曆 25 56 1월, 왕명으로 京畿를 순시하다. ○ 9월, 왕명으로 京畿와 湖西를 순시하다.
선조 31 1598 무술 萬曆 26 57 4월, 임금을 모시고 西江에서 習陣하다. ○ 9월, 丁應泰의 誣告事件에 대한 陳奏使가 되었으나, 빨리 출발하지 않는다는 탄핵을 받고 上箚하여 自劾하다. ○ 10월, 진주사와 영의정에서 체직되다. ○ 11월, 파직되다. ○ 12월, 삭탈관직되다.
선조 32 1599 기해 萬曆 27 58 2월, 河回로 돌아오다. ○ 6월, 職牒을 받았다가 다시 환수당하다. ○ 8월, 鄭崑壽가 내방하다. ○ 9월, 형 柳雲龍과 玉淵에서 뱃놀이하다.
선조 33 1600 경자 萬曆 28 59 3월, 退溪先生年譜를 찬하다. ○ 8월, 步虛臺를 증축하고 達觀臺로 改名하다. ○ 11월, 직첩을 받다.
선보 34 1601 신축 萬曆 29 60 3월, 형 柳雲龍이 졸하다. ○ 8월, 모친상을 당하다.
선조 35 1602 임인 萬曆 30 61 2월, 愼終錄을 짓다. ○ 4월, 永慕錄을 짓다. ○ 겨울, 喪禮考證을 편찬하다. ○ 廉謹吏에 선발되다.
선조 37 1604 갑진 萬曆 32 63 3월, 復職되고 府院君이 되었으나 상소하여 사양하고 致仕를 빌다. ○ 7월, 扈聖功臣이 되다. ○ 鄭經世와 학문에 대하여 논하다. ○ 「陽明集」을 읽다.
선조 38 1605 을사 萬曆 33 64 1월, 〈知行說〉과 〈知行合一說〉을 짓다. ○ 3월, 奉朝賀祿을 사양하는 상소를 올리다. ○ 아들 柳袽가 졸하다. ○ 9월, 西美洞으로 옮기다. ○ 姪壻조카사위 金弘微를 곡하다. ○ 帝王紀年錄을 짓다.
선조 39 1606 병오 萬曆 34 65 3월, 西美洞에 草堂 弄丸齋를 짓다. ○ 〈釣名說〉을 짓다. ○ 전후로 받은 批答과 有旨를 모아 聖諭錄을 만들고 跋을 짓다. ○ 8월, 河回로 돌아오다. ○ 9월, 西美洞으로 돌아가다.
선조 40 1607 정미 萬曆 35 66 2월, 草堂으로 거처를 옮기다. ○ 3월, 임금이 內醫를 보내다. ○ 遺疏를 草하다. ○ 병중에 지은 시를 모아 觀化錄을 만들게 하다. ○ 5월 6일, 졸하다. ○ 임금이 승지를 보내 弔問하다. ○ 7월, 豐山縣 壽洞里에 장사 지내다.
광해군 6 1614 갑인 萬曆 42 - 4월, 屛山書院에 位版을 봉안하고 釋菜禮를 행하다.
광해군 12 1620 경신 泰昌 1 - 9월, 屛山의 위판을 받들어 廬江書院의 退溪先生廟에 祔享하다.
인조 5 1627 정묘 天啓 7 - 7월, 鄭經世가 行狀을 짓다. ○ 10월, 軍威의 南溪書院에 위판을 봉안하다.
인조 7 1629 기사 崇禎 2 - 2월, ‘文忠’의 시호를 받다. ○ 3월, 屛山書院에 다시 위판을 봉안하다.
인조 9 1631 신미 崇禎 4 - 10월, 尙州의 道南書院에 위판을 봉안하다.
인조 11 1633 계유 崇禎 6 - 봄, 류진 陝川 海印寺에서 문집을 초간하다.
인조 21 1643 계미 崇禎 16 -

10월, 龍宮縣의 三江書院에 위판을 봉안하다.

○ 中洞으로 移葬하다.

숙종 15 1689 기사 康熙 28 - 10월, 義城縣의 氷山書院에 위판을 봉안하다.
고종 31 1894 갑오 光緖 20 - 가을, 河回 玉淵精舍에서 문집을 중간하다.

기사전거 : 年譜, 行狀(鄭經世 撰) 등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의 시문 가운데 소싯적에 지은 것은 대부분 倭亂의 와중에 유실되고

〈讀史蠡測〉 등 약간 편만 남았으며, 나머지는 대부분 1602년(선조 35)과

1603년 사이에 지은 것이다. (李埈의 跋) 저자는 또한 본집 권18에 실린

〈書亂後詩稿後〉에서 볼 수 있듯이 왜란 이후 자신의 詩를 정리해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저자의 遺稿를 정리, 간행한 것은 아들 柳袗(修巖)이었다.

그는 家藏 草稿를 바탕으로 유고를 수집한 뒤 1619년(광해군 11)경부터 下鄕해 있는

鄭經世, 李埈, 趙靖 등 門人과 함께 편차와 교정을 의논하였다. (修巖集 年譜)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 이후 대부분 관직에 나아가고 1627년 정묘호란 등을 겪느라

문집 간행은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1631년 柳袗이 陜川 郡守로 나가게 되면서

문집 간행을 도모하여 이듬해 착수, 鄭經世와 李埈으로부터 編次에 조언을 받고

廬江書院 원생들이 淨寫를 담당해 주어 海印寺에서 판각, 인쇄하여 1633년 原集 20권,

別集 4권의 목판본을 내었다.

 

《초간본, 합천본》 현재 규장각(奎1607, 奎1608),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는데, 원집과 별집 모두 11행 21자로 같은 시기에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年譜는 관계 기록이 없어 간행 시기를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현재 河回 宗家에 전해오는

4종류의 年譜草稿本으로 미루어 볼 때, 年譜 역시 柳袗이 초안하였으며(年譜草記 4책)

이를 바탕으로 간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문집의 初刊 당시 李埈이 柳袗에게 답한 편지들(蒼石集 卷10)에서 年譜나 祭文,

挽章의 編修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初刊할 때 年譜와 附錄의 편찬, 간행도

시도되었으나 실제 간행을 보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李惟樟(1625~1701)의 「孤山集」 권1에 〈屛山書院與諸友修正西厓先生年譜〉

詩가 있고, 李玄逸의 「葛菴集」 年譜에 1702년(숙종 28) 士林의 요청으로 저자의 年譜를

刪正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1702년경에 3권의 목판으로 초간한 것으로

추정된다. 《연보초간》 권1, 2는 年譜로 9행 21자이고, 권3은 行狀, 祭文, 挽章 등을 모은

 附錄으로 11행 23자이다.


그 후 후손들이 原集과 別集에 增補된 年譜를 合編하여

河回의 玉淵精舍에서 목판으로 중간하였다.

 

《중간본》 이 중간본에는 原集 권20 끝에 ‘甲午季秋玉淵重刊’이라는 刊記가 있는데,

여기서 甲午는 1894년(고종 31)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중간본 연보 권3의 ‘今上遣前承旨賜祭文’에서 壬辰年 5月 25日 安東 府使 金嘉鎭을

보내어 致祭한다고 하였는데, 金嘉鎭은 1891년(고종 28)부터 安東 府使로 재직하였으며,

또 永慕閣에 高宗의 賜祭文(보물 460호)이 전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중앙도서관(D3B-489),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D1-A209C) 등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 본은 원집, 별집, 연보와 부록까지 모두 10행 20자이다.

 

중간본은 초간본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전체적인 구성과 편차는 같으며

잡저 15, 16권의 내용 중 일부의 순서가 바뀌었고 묘도문자에서 柳景深의 행장이 빠지고

대신 墓碣銘이 들어간 정도이다. 별집의 내용도 큰 차이가 없으며 연보와 부록에서

초간 이후의 書院奉安과 賜祭 관련기록이 추가되었을 뿐이다.


한편 印出 경위가 분명하지 아니한 活字本 別集이 있는데, 현재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18)과

연세대학교에 각각 1부가 소장되어 있다. 이 본은 5권 2책(12행 22자)으로 목판본 별집보다

1권이 많다. 수록 내용을 비교해 보면 詩 약 30여 수와 〈倭情奏文〉, 〈涵虛亭記〉,

〈與李孝彥書〉 등의 散文이 목판본보다 더 수록되어 있다.

또한 〈辭奉朝賀祿疏〉와 〈答李孝彥書癸卯〉, 〈答金士悅別錄〉은 목판본에서는

原集에 수록되어 있다.

 

특히 국립중앙도서관장본에는 글자의 訛誤를 바로잡은 교정사항뿐만 아니라,

‘當刪’ ‘恐不必刪’ 등과 같은 부전지가 상당수 붙어 있어 여러 명에 의하여 校正되고

刪定된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이러한 흔적은 본 활자본이 본집을 편찬할 당시에

校訂 草稿로 사용하기 위하여 몇 부를 인출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게 한다.

 

즉 처음 문집의 편차시 어느 정도 초고가 완성된 후 刪定 및 校正을 위하여

몇 부의 繕寫本을 만드는 대신 이 활자본을 인출하여 그런 목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본 활자본의 상태가 정식으로 인출하여 배포한 것이라고 보기에 어려울 정도로

매우 粗惡하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두 곳의 소장본 두 부분에 동일한 落張이 있는데, 이는 바로 이 부분이 조판되지 않은

소치로 이 활자본이 正本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로도 볼 수 있다.

그리고 교정 및 산정 사항이 모두 본집에 반영된 것은 아니지만 상당수 반영되어 있으며,

특히 문장 중 일부를 산절한 것은 그대로 반영되어 있어 본 활자본이

초간본의 校訂 草稿本이라는 추측을 더욱 뒷받침한다.

1958년에는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초간본을 대본으로 영인하였고,

1991년에는 西厓先生紀念事業會에서 중간본과 永慕閣에 소장되어 있는 草稿本 등을

모두 모아 「西厓全書」를 간행하였다.
본서의 저본은 1894년에 목판으로 간행한 중간본으로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장본이다.

기사전거 : 序(李敏求 撰), 跋(張顯光, 李埈 撰), 修巖集 年譜, 愚伏集 年譜,

               黔澗集 年譜, 葛菴集 年譜, 答柳季華(蒼石集 卷9, 10) 등에 의함

 구성과 내용

본집은 原集 20권, 別集 4권, 年譜 3권 합 14책으로 되어 있다.
原集은 맨 앞에 目錄이 있다. 초간본에는 李敏求의 序(1633)가 있었으나

무슨 이유인지 중간본에서는 빠져 있다.


권1~2는 詩이다. 220여 題가 詩體의 구별없이 저작 연대순으로 실려 있다.

1566년 25세 때부터 임진왜란(51세) 이전까지의 작품이 60여 수이고, 나머지는 그 이후

졸할 때까지 10여 년간의 詩作이다.

自序와 自註가 붙어 있는 시가 많아 작품 이해에 도움을 준다.

 

초기의 작품에는 부친의 任所인 定州와 형 柳雲龍의 임소인 仁同, 기타 玉淵書堂과

南溪書堂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 많다. 〈戱題壁上〉 이하 후기의 작품은 임란 이후

築城을 건의하여 완성된 婆娑城을 주제로 한 시, 정유재란 때 湖西와 京畿를 순시할 때

지은 시, 1598년 삭탈관직되어 내려오면서 丹陽 등에서 지은 시, 이후 河回와 西美洞에서

지낼 때 지은 시 등이 실려 있다. 특히 河回에서 지은 시 중에는 讀書 후 감상을 적은 시,

玉淵 등의 풍경을 읊은 시, 次韻詩 등이 다수이다.


권3~5는 奏文(4), 疏(12), 箚(15)이다. 각기 저작 연대순 편차이다.

〈乞頒示會典奏文〉은 宗系辨誣와 관련하여 새로 편찬된 《大明會典》을 보내 달라는 것이고,

〈陳倭情奏文〉과 〈陳賊情奏文〉은 두 차례의 왜란을 전후해서 倭國의 상황을 알리는 내용이다.

 

上疏는 경상도 관찰사 등의 辭職 상소가 대부분이고, 己丑獄事와 관련을 해명하는 〈辨誣自劾疏〉, 李彥迪에 대한 비방을 변명한 〈晦齋辨明疏〉 등이다.

 

箚子는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왜란을 겪는 동안 올린 글들로, 당시의 時務와 事宜를

논한 차자와 辭職 차자 등이다.

권6~9는 書狀(25), 啓辭(24), 呈文(5), 書(10)이다. 역시 각기 저작 연대순으로 편차되어 있다.

1584년 경상도 관찰사로서 올린 〈因天旱請決放…〉 외에는 모두 임진왜란 이후 올린 書狀과

啓辭이다. 都體察使와 領議政으로서 왜란의 와중에 조처한 내용들이 자세히 실려 있다.

권9에는 1593년과 그 이듬해에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중국 使臣, 兵部, 李如松 등에게 보낸

呈文과 書만을 모아 놓았다.


권10~12도 書이다. 趙穆과 金誠一, 禹性傳, 鄭經世 등과 주고받은 편지를 인물별 시기순으로

편차해 놓았다. 당시 退溪門人의 인맥과 학문, 저자의 門人 관계 등을 엿볼 수 있다.

 

특히 趙穆에게는 부친상을 당한 뒤 喪禮를 묻는 편지와 退溪先生文集의 편찬, 간행에 관해

묻는 내용 등이 많다. 또한 〈答鄭景任〉 뒤에 붙어 있는 李埈의 識에 의하면,

저자와 鄭經世가 義理를 논란한 편지가 매우 많았으나 鄭經世가 무고를 입어 被逮될 때

모두 散失되었다고 하는데, 실제 4편밖에 실리지 않았다.

권13~16은 雜著이다. 〈讀史蠡測〉은 「宋史」를 읽다가 是非가 혼란하고 去取가

不明한 부분을 보고 견해를 적은 글들이고, 〈喪葬質疑〉에서는 喪禮와 葬禮의 疑問 사항을

조목별로 기록하였다. 〈戰守機宜十條〉는 1594년 영의정으로 있을 때 斥候, 長短, 束伍 등

10조목으로 당시의 戰守에 관한 문제와 방책을 논한 글이며, 〈貢物作米議〉는 貢物을

米穀으로 납부하여 국가의 재정을 넉넉하게 하자는 의논이다.

 

또 권15에는 性理學 관계의 雜文, 우리나라와 중국의 人物評, 乙巳削勳 등의 정치 관계 記事

등이 수록되어 있고, 권16에는 壬辰倭亂과 관련하여 지은 記事, 기타 雜文이 실려 있다.


권17~18은 序(6), 記(3), 論(3), 跋(35), 箋(1), 銘(2)이다. 序는 許篈 朝天記의 序,

저자의 저술인 愼終錄, 永慕錄의 序 등이고, 記는 저자가 세운 遠志精舍와 玉淵書堂 등에

대한 記文이다. 跋은 저작 연대순으로 편차되어 있는데, 〈睡軒集跋〉에는 戊午黨籍이

添附되어 있고, 기타 「精忠錄」, 「牧隱集」, 「陽明集」, 「益齋集」 등의 跋文이 실려 있다.


권19~20은 祭文(10), 碑碣(10), 墓誌(9), 行狀(3)이다.

祭文은 廬江書院의 退溪先生 奉安文 외에 具鳳齡, 친족 등에 대한 제문이다.

碑碣은 吉再에 대한 〈砥柱中流碑〉, 高麗太師 權幸, 裵三益 등에 대한 墓碣인데,

柳景深에 대한 碣銘의 경우 초간본에는 실려 있지 않았었다.

 

墓誌는 先考 仲郢, 先妣, 형 柳雲龍, 아들 柳袽 등 주로 친족에 대한 글이고,

行狀도 先考, 先妣, 아들 柳袽에 대한 것이다.

초간본에는 柳景深에 대한 행장이 들어 있었다.


맨 끝에 張顯光의 跋(1633), 李埈의 跋(1632)이 있다.
別集의 체제는 原集과 비슷하다. 卷首에 目錄이 있다.


권1은 詩 150여 題이다. 역시 저작 연대순 편차이다. 그중 1594년 이전의 작품이 50여 수인데,

    원집에 비하여 贈別詩나 送詩, 次韻詩가 많이 실려 있다. 그 이후의 작품에는 원집과

    유사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권2는 疏(3), 箚(4), 啓辭(1), 咨文(1), 呈文(5)이다. 각기 저작 연대순 편차이다.

    疏는 乞郡, 解職, 辭職 상소이고, 箚는 1581년 부제학 때 올린 〈無氷箚〉 외에는 모두

  辭職 차자이다. 咨文과 呈文은 임진왜란 이후 遼東, 중국 사신, 제독 李如松 등에게 보낸 글이다.


권3은 書이다. 〈答華人書〉 등 명 나라 장수들과 주고받은 편지가 앞쪽에 편차되어 있다.

    그 뒤에 趙穆, 金誠一, 禹性傳, 南致利에게 보낸 편지는 원집과 같은 배열이고

    權春蘭에게 보낸 편지 이후는 배열이 다소 달라졌다.


권4는 雜著(34), 跋(3), 銘(1), 祭文(7)이다. 雜著에는 왜란 때 절의를 지켜 죽은 인물들,

        알고 지내는 僧人 등의 행적을 적은 글이 다수 실려 있고, 기타 을축년(1565)의 유생 상소에

        관해 적은 記事 등, 戰守에 관한 雜文 등이 있다. 跋은 「蘭雪軒集」 등에 대한 발문인데,

        잡저의 〈女子能詩〉와 함께 許蘭雪軒의 시를 높이 평가한 글이다.

        祭文은 權好文, 鄭琢 등에 대한 것이다.


年譜는 世系圖와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1~2는 저자의 이력을 담은 年譜이고,

권3은 年譜附錄으로 鄭經世가 지은 行狀, 敎書, 賜祭文, 鄭逑 등이 지은 祭文,

屛山書院 등에의 奉安文, 李恒福 등이 지은 挽詞이다.

 

그리고 鄭經世가 지은 행장의 뒤에 李埈이 지은 행장의 總論이 첨부되어 있고,

諸賢들의 기술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賜祭文은 宣祖, 正祖, 純祖, 高宗 등의 致祭 때 내려진 제문이다.

필자 : 신승운(辛承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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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진성이씨 후손들이여 !
글쓴이 : 松河22翰邦57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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