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집(退溪集) |
형태서지 | 저자 | 가계도 | 행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
형태서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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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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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도 | ||||||||||||||||||||||||||||||||||||||||||||||||||||||||||||||||||||||||||||||||||||||||||||||||||||||||||||||||||||||||||||||||||||||||||||||||||||||||||||||||||||||||||||||||||||||||||||||||||||||||||||||||||||||||||||||||||||||||||||||||||||||||||||||||||||||||||||||||||||||||||||||||||||||||||||||||||||||||||||||||||||||||||||||||||||||||||||||||||||||||||||||||||||||||||||||||||||||||||||||||||||||||||||||||||||||||||||||||
李埴行狀草 (李滉 撰), 先妣朴氏墓碣識 (李滉 撰) 등에 의함 | ||||||||||||||||||||||||||||||||||||||||||||||||||||||||||||||||||||||||||||||||||||||||||||||||||||||||||||||||||||||||||||||||||||||||||||||||||||||||||||||||||||||||||||||||||||||||||||||||||||||||||||||||||||||||||||||||||||||||||||||||||||||||||||||||||||||||||||||||||||||||||||||||||||||||||||||||||||||||||||||||||||||||||||||||||||||||||||||||||||||||||||||||||||||||||||||||||||||||||||||||||||||||||||||||||||||||||||||||
행력 | ||||||||||||||||||||||||||||||||||||||||||||||||||||||||||||||||||||||||||||||||||||||||||||||||||||||||||||||||||||||||||||||||||||||||||||||||||||||||||||||||||||||||||||||||||||||||||||||||||||||||||||||||||||||||||||||||||||||||||||||||||||||||||||||||||||||||||||||||||||||||||||||||||||||||||||||||||||||||||||||||||||||||||||||||||||||||||||||||||||||||||||||||||||||||||||||||||||||||||||||||||||||||||||||||||||||||||||||||
朝鮮王朝實錄 등에 의함 | ||||||||||||||||||||||||||||||||||||||||||||||||||||||||||||||||||||||||||||||||||||||||||||||||||||||||||||||||||||||||||||||||||||||||||||||||||||||||||||||||||||||||||||||||||||||||||||||||||||||||||||||||||||||||||||||||||||||||||||||||||||||||||||||||||||||||||||||||||||||||||||||||||||||||||||||||||||||||||||||||||||||||||||||||||||||||||||||||||||||||||||||||||||||||||||||||||||||||||||||||||||||||||||||||||||||||||||||||
편찬 및 간행 | ||||||||||||||||||||||||||||||||||||||||||||||||||||||||||||||||||||||||||||||||||||||||||||||||||||||||||||||||||||||||||||||||||||||||||||||||||||||||||||||||||||||||||||||||||||||||||||||||||||||||||||||||||||||||||||||||||||||||||||||||||||||||||||||||||||||||||||||||||||||||||||||||||||||||||||||||||||||||||||||||||||||||||||||||||||||||||||||||||||||||||||||||||||||||||||||||||||||||||||||||||||||||||||||||||||||||||||||||
저자는 평소에 자신의 저작을 매우 유의하여 정리해 놓았던 듯하다. 생전에 自省錄이라는 책을 편집한 것이라든지, 1807년에 후손 李野淳이 편찬한 「退溪先生年譜補遺」의 범례에 선생의 文集, 逸集, 雜錄, 手本, 日記, 來歷, 草記 등에 의하여 추보하였다고 한 사실, 1869년 이른바 「陶山全書」를 편찬할 때 陶山書院의 光明室에 소장되어 있던 「退陶集」, 「退溪先生集」,「先生文集草本」,「文集草本」, 「退溪先生文集拾遺」 등을 바탕으로 했다는 사실은 저자의 저술의 잘 보전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저자의 高弟인 月川 趙穆을 중심으로 그의 제자들은 1571년부터 易東書院에 모여 유문을 정리하는 한편, 각처에 있던 제자들은 각자 정리한 초고를 易東書院으로 보내왔다.
그리고 1573년(선조 6)에는 宣祖가 柳成龍 등의 요청에 따라 「退溪集」을 校書館에서 印出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따라 1578년(선조 11)에 저자의 손자인 李安道가 어느 정도 정리된 草稿를 가지고 서울로 왔으며, 이 초고는 在京門徒 柳成龍을 중심으로 乙覽을 위한 編輯 및 校正, 그리고 淨寫가 진행되었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완성되지도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乙覽 계획도 무산되었다.
이 草本의 교정과 편찬에 깊이 관여하고 있던 鶴峯 金誠一이 1586년(선조 19)경 趙穆에게 보낸 편지(鶴峯集 續集 권4, 23판)를 보면, 문집의 草本이 趙穆을 중심으로 琴應壎, 琴應㚒 등에 의해 일단락되었다는 위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초본은 저자의 모든 저작을 수록하였으며, 심지어 手錄本의 詩稿에서 저자가 산절한 것까지도 別集 등으로 편차하여 이 草本에 편입하였다.
“편집 원칙은 次第가 분명해야 하고 상세하고 간명한 것이 모두 적당해야 합니다”.라고 하며 删節을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1587년(선조 20) 5월에 趙穆, 柳雲龍, 金誠一이 廬江書院에서 모였다.
그러나 이 회합에 柳成龍이 참석하지 않아 删節에 대한 분명한 방향이 정해지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모임에서는 문집의 草本에 대한 校正의 方案과 分擔이 결정된 것으로 보이며, 删節이 결정된 것은 같은 해 8월 屛山의 會合에서였다. 이때 산절에 부정적인 趙穆과 산절을 주장한 柳成龍의 대립을 金誠一이 仲裁하여 일단 유성룡의 의견에 따라 산절을 하기로 결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柳成龍은 1588년(선조 21) 초까지 산절을 모두 마쳤으며, 이를 다시 繕寫하여 中草本을 만드는 일에 착수하였다. 이 중초본의 작성은 유성룡의 주관하에 진행되었고, 이해 6월 15일에는 병산에서 중초본에 대한 교정 및 편집회의가 열렸으며, 대개 유성룡을 중심으로 교정을 진행하여 조속히 간행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물론 유성룡의 산절본으로 중초본이 작성되는 것에 반대한 趙穆은 참여하지 않았으며, 禹性傳과 같이 선생의 片言隻字라도 버려서는 안된다는 全稿收錄의 원칙을 견지하는 門徒도 상당수 있었다. 그리고 이해 10월 柳成龍이 형조 판서에 제수되어 入京하자 그를 따라 서울에서 중초본의 작업이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중초본의 작성은 1589년(선조 22)에 일어난 기축옥사로 인하여 지지부진해진 것으로 보이며, 1592년 임진왜란 이후에는 완전히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유성룡이 1606년경 李好閔에게 보낸 편지(西厓集 別集 권3, 23판)를 보면 알 수 있는데, “宣城人(趙穆을 가리킴)이 갑자기 草本으로 板刻할 줄은 몰랐다.”고 하여, 조목이 유성룡의 中草本이 아닌 자기가 편집한 草本을 바탕으로 간행하였으며, 간행에서 유성룡이 배제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이 초간본인 庚子本이다. 《庚子初刊本》이 본은 현재 玉山書院 및 계명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다.
빗자루 같아서 개간할 능력이 없습니다.”라고 하여, 경자본에 대한 불만을 강력하게 토로하고 있다. 이러한 개간 의도는 우선 경자본을 교정하는 일로 표현되었는데, 柳成龍의 제자인 鄭經世 등이 이를 교정하기도 하였지만, 실제로 改刊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나누어 볼 수 있다.
따라서 修正이 상당부분 진행된 경자본복각본을 제외하고는 그 유포도 비교적 넓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영인한 「退溪全書」의 일부는 이 경자본복각본을 저본으로 한 것이다.
분명하지 아니한 것과 甲辰本(1724년)과 癸卯本(1843년)이 그것이다.
《甲辰重刊補刻本》癸卯本은 정축보각본 이후 26년 만인 1843년에 간행된 중간본이다. 이 본의 간행 경위에 대하여는 「退溪先生文集重刊時日記」(李謙魯 所藏)가 있어서 상세하게 알 수 있다. 이 본은 癸卯校正重刊本이라고도 불리는데 嶺南의 전체 士林이 완정한 본을 만들기 위해 교정 등 여러 가지 노력을 경주하였고 실제로 문집도 이전본에 비하여 일신되었다.
이 본은 甲辰本처럼 頭註가 첨각되었으며 전체적으로 板式이 嚴格하고 字體도 楷正하여 당시의 노력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 계묘본은 원집 49권, 별집, 외집, 연보 4권의 30책으로 간행되었는데, 연보에는 憲宗 5년(1839)에 내린 致祭文까지를 수록하고 있다. 《癸卯重刊本》 현재 규장각(古3428-482), 성균관대학교 중앙도서관(D3B-1091a) 등에 소장되어 있다.
文集考證에 續集도 포함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1764년에서 멀지 않은 시기에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속집 초간본》 현재 규장각(奎3601)에 소장되어 있다.
따라서 전체는 目錄 1책, 逸書目錄 1책, 原集 66권 49책, 外集 1권 1책, 別集 2권 2책, 續集 8권 6책이고, 遺集은 卷次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의 13책이며 기타 편차가 분명하지 않은 잡저 2책으로 구성되어 있어 편찬이 완성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본집과 비교하면 대략 1000편 정도의 저작이 본집보다 많으며, 동일한 저작에 있어서도 1000여 군데 이상이 본집에서보다 더 첨가되어 있다고 한다. 이 75책은 경비를 전담한 李彙溥가 자신의 樊南家塾에 두었기 때문에 이를 樊南本이라고 한다. 이 본은 1980년 정신문화연구원에서 「陶山全書」로 영인 출간하였다.
遺失되었다고 한다. 규장각장본이며, 文集攷證은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장본이다. | ||||||||||||||||||||||||||||||||||||||||||||||||||||||||||||||||||||||||||||||||||||||||||||||||||||||||||||||||||||||||||||||||||||||||||||||||||||||||||||||||||||||||||||||||||||||||||||||||||||||||||||||||||||||||||||||||||||||||||||||||||||||||||||||||||||||||||||||||||||||||||||||||||||||||||||||||||||||||||||||||||||||||||||||||||||||||||||||||||||||||||||||||||||||||||||||||||||||||||||||||||||||||||||||||||||||||||||||||
구성과 내용 | ||||||||||||||||||||||||||||||||||||||||||||||||||||||||||||||||||||||||||||||||||||||||||||||||||||||||||||||||||||||||||||||||||||||||||||||||||||||||||||||||||||||||||||||||||||||||||||||||||||||||||||||||||||||||||||||||||||||||||||||||||||||||||||||||||||||||||||||||||||||||||||||||||||||||||||||||||||||||||||||||||||||||||||||||||||||||||||||||||||||||||||||||||||||||||||||||||||||||||||||||||||||||||||||||||||||||||||||||
본 문집은 原集 49권, 別集 1권, 外集 1권, 年譜 4권, 續集 8권, 그리고 退溪先生文集攷證 즉 文集攷證 8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原集의 권1~5는 詩이다. 권5에는 續內集이라는 副題가 卷首題의 아래에 붙어 있다. 저자가 自編한 것이 內集이며, 그것의 속편을 續內集으로 편차한 것으로 보인다. 詩는 대개 저작 연대순에 따라 편차되어 있는데, 권1은 1533년(중종 28, 33세)부터 1549년(명종 4, 49세)까지, 권2는 1551년(명종 6, 51세)부터 1559년(명종 14, 59세)까지, 권3은 동년인 1559년(명종 14, 59세) 가을부터 1564년(명종 19, 64세)까지, 권4는 1565년(명종 20, 65세)부터 1567년(명종 22, 67세)까지, 권5는 1568년(선조 1, 68세)부터 1570년(선조 3, 70세)까지의 작품이다. 권6~8은 公擧文이다. 권6에는 敎書 3편과 上疏 5편이, 권7에는 箚子, 經筵講義, 啓議가 있다. 그리고 권8에는 辭狀, 啓辭 및 일본과의 외교문서인 書契修答 3편이 있다. 敎書는 1558년 함경도 관찰사 李浚慶, 1542년 경상도 관찰사 李淸, 그리고 1547년 황해도 관찰사 權應挺에게 내린 것인데 편년하지 않은 것을 보면 대개 인물의 高下에 따라 편차한 것임을 알 수 있다. 上疏와 箚子는 대부분 1568년(선조 1) 및 1569년(선조 2)에 걸쳐 올려진 것으로서 선조 즉위 초에 누차 내려진 소명을 저자가 사양한 내용이다. 그중 〈聖學十圖箚〉는 어린 선조를 위하여 지어진 것으로 性理學을 그림으로 설명한 것이다. 經筵講義는 「周易」 乾卦와 〈西銘〉에 대한 것이다. 啓議는 文昭殿의 位次에 대한 것과 宣祖의 私親인 德興君을 大院君으로 추숭하자는 것에 대한 의논으로 모두 擬書이다. 辭狀과 啓辭는 모두 사직을 청하는 글인데 1549년 豐基 郡守를 사직하는 것으로부터 1570년 致仕를 요청하는 것까지 모두 51편이 실려 있다. 권9~40은 書이다. 분량으로 보아 대략 원집의 3분의 2를 상회하는, 따라서 본집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편지는 대략 90여 명에게 보낸 것이다. 이 書簡의 구성은 대략 네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째는 李賢輔 등 官爵을 중심으로 편차한 권9의 한 권, 둘째는 曺植, 盧守愼, 成渾, 李珥, 奇大升 등 저자와 交遊한 인물에게 보낸 것을 편차한 권 10~19의 열 권, 셋째는 저자에게 직접 수학한 李楨, 趙穆, 鄭惟一, 金誠一, 柳成龍 등 弟子에게 보낸 것을 편차한 권21~39의 열아홉 권, 마지막으로 저자의 형 李瀣, 아들 李寯, 손자 李安道 등 가족에게 보낸 권41의 한 권이다. 편지는 모두 인물 중심으로 편차되었으며, 동일한 인물 내에서는 쓰여진 시기순으로 편차되어 있다. 이러한 편차는 기본적으로 인물에 대한 평가를 전제로 가능한 것이며, 이는 대개 본집의 편찬에 주도적 역할을 한 月川 趙穆 계열 문인들의 판단이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서간문의 편차에 대하여는 西厓 柳成龍이 분명한 편찬 원칙을 제시하였는데 그 주된 내용은, 안부를 묻는 閑漫한 편지는 수록대상에서 제외시켜야 한다는 것과 중복된 問目을 정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西厓集 卷10, 與金士純書 및 答南義仲書) 그리고 이러한 원칙에 따라 서애가 초본을 산절하여 중초본을 만들었지만, 판각은 초본으로 되었다는 것은 이미 언급하였다. 그러나 문목의 경우 본 문집총간색인을 통해서 볼 때 중복된 경우가 그렇게 많지 않아서 간행 전에 어느 정도 정리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편집의 방법에 있어 인물 중심의 편찬은 필연적으로 특정 주제를 대상으로 한 편지들에 대한 처리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데, 본집에서는 이런 편지들은 대개 그와 관련된 인물의 아래에 수록하였다. 문목을 제외하고 타인의 글이 수록된 것은 奇大升의 편지가 유일하다. 저자가 奇大升과 四端七情에 대하여 논한 편지 아래에 있는 奇大升의 편지가 그것인데, 「兩先生往復書」에 수록된 것과 비교해 보면 본집에서는 논점과 관련이 없는 부분은 모두 산절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권41은 雜著이다. 이 잡저는 저자의 학문적 경향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저작들이다. 〈天命圖說後敍〉는 鄭之雲의 〈天命圖說〉을 보고 지은 것으로서 朱子의 圖說과 비교하면서 太極, 理氣, 五行 등을 논한 글이며, 〈心經後論〉은 「心經」을 읽은 뒤에 쓴 것으로서 朱子의 心學이 陸象山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설파한 글이다. 〈心無體用辯〉은 心에 體와 用의 구분이 없다고 한 李球의 이론을 비판한 글이다. 그리고 〈遊小白山錄〉은 1549년 풍기 군수로 재임할 때에 소백산을 유람한 기행문이며, 〈伊山院規〉는 伊山書院의 교과 과정, 공부 방법 등을 규정한 서원 규칙이다. 권42는 序와 記, 권43은 跋, 권44는 箴銘, 表箋, 上樑文, 권45는 祝文과 祭文이다. 序에는 〈朱子書節要序〉, 〈啓蒙傳疑序〉 등 모두 5편의 서문이 있다. 저자는 1543년 43세 때에 처음으로 「朱子大全」을 접하고 그 책을 깊이 탐독하였다. 그는 특히 주자가 제자들에게 보낸 書簡文에 매료되어 이 「朱子書節要」를 편찬하게 되는데, 그 序文에 보면 성리학적 문제를 언급하면서도 현학적이거나 현실과 유리된 논리가 아닌 실제적이며 수용가치가 있는 것을 뽑고, 그 편지 중에서도 불필요한 부분을 과감하게 산절하여 그야말로 精髓만을 모은 것이라고 하였다. 〈鄕立約條序〉는 禮安縣의 鄕約을 직접 마련하고 그 취지를 밝힌 글이다. 記에는 伊山書院, 迎鳳書院, 易東書院에 대한 記文이 들어 있는데, 서원창설운동을 일으킨 저자의 書院觀이 나타난 글이다. 跋文은 書冊에 대한 것은 몇 편 되지 않고 詩帖, 題詠, 書帖, 屛風 등 記念物에 붙인 것이 대부분이다. 서책에 붙인 발문으로는 〈延平答問跋〉, 〈魚灌圃詩集跋〉, 〈傳道粹言跋〉, 〈養心堂集跋〉, 〈新刊啓蒙翼傳跋〉 등이 있다. 箴銘 중에 〈靜存齋箴〉은 李湛의 齋號인 ‘靜存’의 뜻을 풀어쓴 글이다. 表箋은 明 나라 황제에게 보내는 글을 저자가 대신 지은 것, 임금의 誕日이라든지 冬至 등을 축하하는 것, 致仕를 청하는 것 등이다. 上樑文은 東宮의 資善堂과 思政殿에 대한 것이며, 祝文과 祭文에는 祈雨文, 祈雪文, 祈晴文, 告廟文과 서원에 올린 제문, 그리고 南景霖, 洪仁祐 등에 대한 제문이 실려 있다. 권 46~47은 墓碣誌銘이고 권48~49는 行狀이다. 墓碣誌銘은 저자의 先考 李埴, 先妣 義城金氏, 生母 春川朴氏, 叔父 李堣의 것을 시작으로 처외조부 文敬仝, 再娶 夫人의 父 權礩, 初娶 夫人의 父 許瓚 등 親姻戚에 대한 것과 柳成龍의 조부인 柳公綽, 朴承任의 모친인 禮安金氏, 洪仁祐의 부친인 洪德演 등 저자의 門人들의 선조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다. 行狀은 明宗을 비롯하여 李賢輔, 黃俊良, 趙光祖, 李彥迪, 權橃 등에 대한 것이다. 別集과 外集은 모두 詩로서 별집에는 254題 356首, 外集에는 98題 199首가 수록되어 있다. 이 詩가 왜 별집과 외집으로 편찬되었는지는 간행이 종료된 후 李埈이 그의 스승인 柳成龍에게 보낸 편지에 나타난다. 1600년(庚子)에 보내진 이 편지에는 “退陶의 詩 중에서 퇴계 자신이 手錄한 것은 약간 편뿐이며 그 나머지는 모두 刪節된 것입니다. 그러나 宣城人(趙穆)이 이미 删節된 것을 모아서 모두 文集에 수록하여 外集이라 하고 別集이라 하여 모두 三集을 만들었습니다.”(蒼石集 卷8, 上西厓先生)라고 하여 그 경위를 보여 주고 있다. 즉 저자가 이미 산절해 버린 詩를 다시 모아서 만든 것이라는 뜻이다. 별집을 살펴보면 원집과 같이 33세때부터 시작되며 59세까지의 시를 편년하고 간간이 저작 연대를 간지로 표기하였다. 그러나 외집에서는 저작 연도가 표시된 시가 한 편도 보이지 않는다. 또한 3판에 〈挽金綏之〉가 나오는데 5판에 〈寄題金綏之濯淸亭〉이 있어 編年도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같은 저자의 註로 판단됨에도 불구하고 12판의 〈出山明月…〉에는 自註라고 명시하였으나 다른 주석에는 그러한 표기가 없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위의 李埈이 산절한 것을 모았다고 말한 것은 별도로 편차할 것이라는 뜻의 別集으로 보이며, 외집은 內集의 상대되는 개념으로서, 內集이 저자의 초고를 바탕으로 편차한 것이므로 外集은 草稿 外에서 수집한 것을 편차한 것으로 보인다. 續集은 모두 8권이다. 편차는 원집의 그것을 그대로 준용하였으며, 특히 분량에 있어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書簡文의 편차는 원집의 그것을 그대로 잉습하였다. 권1~2는 詩, 권3~7은 書, 권8은 序ㆍ跋ㆍ碣銘ㆍ雜著이다. 속집에서도 분량에 있어 서간문의 비중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詩는 원집과 같이 저작 연대순으로 배열되어 있는데 그 時期도 역시 33세 이후의 것이 대부분이다. 권1은 첫 수와 15세에 지은 〈石蟹〉를 제외하고는 1533년(중종 28, 33세)부터 1548년(명종 3, 48세)까지 지어진 것이며, 권2는 1549년(명종 4, 49세)부터 1565년(명종 20, 65세)까지 지어진 것이다. 서간문의 배열도 원집의 배열을 그대로 준용하였다. 권3은 李浚慶, 李珥, 奇大升 등에게 보낸 것이고, 권4~6은 李楨, 趙穆 등 제자에게, 권7은 아들 李寯 및 손자 李安道에게 보낸 것이다. 권8에는 「理學通錄」과 自省錄의 서문이 있으며, 「伊洛淵源錄」의 발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雜著에는 〈天命圖說〉이 실려 있는데 天命圖와 그 序文은 원집에 수록되어 있다. 이 〈天命圖說〉은 天命圖에 대하여 질문을 하고 그에 대한 답변을 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 질문은 天命의 뜻을 묻는 것으로부터 存養省察에 대한 질문까지 모두 열 개이다. 이 圖說의 末尾에는 月川 趙穆의 발이 있는데 그 내용은 이 도설이 1553년 서울에서 저자가 秋巒 鄭之雲과 함께 완성한 것이나 1555년 귀향한 후에 다시 많은 부분을 수정하였다는 내용으로, 이 도설에 있어서 저자의 역할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목 자신이 간행을 주관한 원집에 이 도설이 실리지 않은 것을 보면 당시에도 이미 저자의 저작 범위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鄭之雲의 天命圖說이 1640년경 이미 간행된 상황에서 續集에 이 圖說을 포함시킨 것은 본 속집이 편찬ㆍ간행될 당시의 상황을 보여 주는 것이다. 끝에는 이 속집의 편찬자인 저자의 6대손 李守淵의 발문이 있다. 年譜는 모두 4권이다. 권1~2는 연대기이며, 권3~4는 부록이다. 연보는 柳成龍이 편찬한 것으로 저자의 宦歷을 중심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특히 1568년(선조 원년)부터 1569년까지 2년간의 기록이 매우 자세하다. 저자는 선조 원년 7월에 累召에 따라 입경하여 8월에 兩館 大提學에 제수되었으며, 이어 六條疏를 올리고 누차 경연에 입시하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 3월 夜對에서 사직을 허락받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연보에는 이 부분의 기사가 매우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부록에는 言行總錄, 墓碣銘, 墓識 등과 祭文, 書院 奉安文 등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중 趙穆이 찬한 墓碣銘은 위의 연보에 비하여 주로 저자의 자질, 학문, 인품, 제자 양성 등 향촌에서의 활동에 치중하고 있으며, 특히 연보에서 중시한 환력에 대하여는 거의 서술하지 않고 있어 둘 사이의 차이점이 드러난다. 부록의 말미에는 柳成龍의 발문이 있다. 文集攷證은 모두 8권으로 그 순서는 原集, 別集, 外集, 續集으로 되어 있다. 범례에 의하면 物名 및 故事를 비롯하여 글자의 訛誤, 해당 저작과 관계된 저자의 이력, 관련 인물의 성명 및 이력 등 참고될 만한 것을 두루 수집하였다고 하였다. 실제로 내용을 살펴보면 표제어의 아래에 여러 가지 문헌에서 관련 구절을 추출하여 기록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權文海의 「大東韻府群玉」과 매우 흡사한 형태이다. 인용문헌은 李白, 杜甫, 蘇軾 등의 詩를 비롯하여 「一統志」, 「文選」, 「宋史」, 「老子」, 「莊子」 등 매우 다양한데 ‘史’, ‘古詩’와 같이 그 출전이 분명하지 아니한 것도 있다. 필자 : 辛承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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