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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의 역사 인물」8.삼한통일(三韓通一)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신라의 대표적 명장 김유신(金庾信)

회기로 2010. 1. 26.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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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金庾信)은 신라가 당나라와 합세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이른바 삼국통일을 이룩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로서 신라 천년역사의 대표적 명장으로 손꼽힌다. 이는 김부식(金富軾)이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 10권 중 3권에 걸쳐 김유신전(金庾信傳)을 엮었다는 사실만 보아도 잘 알 수가 있다. 김부식이 김유신을 평가한 비중이 신하는 말할 나위도 없고 그 어떤 제왕보다 높았던 것이다.

특히 김부식은 삼국사기 김유신전(金庾信傳)의 끝에 "지략이 특출한 을지문덕(乙支文德)과 의협심을 가진 장보고(張保皐) 같은 사람이 있었지만 중국의 사서가 없었다면 그들의 사적이 사라져 후세에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김유신과 같은 분은 이 땅 사람들의 그에 대한 칭송의 소리가 오늘까지 끊이지 않고 있다."는 극진한 찬사를 바쳤다.

김유신에 관한 평가는 용장(勇將)과 지장(智將)의 면모를 두루 갖춘 한국 역사상 최고의 명장이란 찬사가 있는가 하면, 필요에 따라서는 암수(暗數)와 흉계(凶計)도 마다하지 않은 음흉하고 사나운 모략가란 부정적인 혹평도 있다. 어쨌든, 그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가장 많이 나오고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나오며, 오랫동안 실전되었다가 근래 필사본이 나타난 김대문(金大問)의 화랑세기(花郞世記)에도 제15세 풍월주를 역임한 것으로 나온다. 이런 기록들을 바탕으로 김유신의 일대기를 재구성해 본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김유신은 서울(서라벌) 사람이다. 12대 선조 수로왕(首露王)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그는 후한(後漢) 건무(建武) 18년 임인에 구봉에 올라 가락의 9촌을 바라보고 마침내 그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가야라 했는데 뒤에 금관국(金官國)이라고 고쳤다. 그 자손이 계승하여 9세손 구해(仇亥) 또는 구차휴(仇次休)에 이르렀다. 구해는 유신에세 증조가 된다. 신라 사람들이 스스로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손이라 했으므로 성(姓)을 김(金)이라 했는데, 유신의 비문에도 또한 헌원(軒轅)의 후예요, 소호(少昊)의 자손이라 했으니 남가야(南加耶; 金官加耶)의 시조 수로왕은 신라와 성이 같다.'

● 신라에 항복한 금관가야 왕족의 후손

여기에서 김수로(金首露)라는 인물이 가락국을 세운 후한(後漢) 건무(建武) 18년은 서기 42년이며, 김부식은 지금은 없어진 김유신의 비문에 그의 선조인 가락(김해) 김씨 시조 김수로나 신라(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金閼智)가 모두 중국의 전설상의 인물인 황제(黃帝) 헌원(軒轅)의 아들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손이라고 새겨져 있었다고 전한다. 그 동안 사학계에서는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 이야기는 전설에 불과하고,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에 제작된 이 비석의 내용도 사대주의 모화사상에 따라 윤색된 것이라고 간주해왔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 결과 경주 김씨나 김해 김씨가 모두 문무대왕비문(文武大王碑文)이 전하는 것처럼 소호금천씨 후손설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추세다.

김해 김씨와 경주 김씨의 뿌리가 같은지 여부는 여기에서 더 깊이 다룰 문제가 아니고, 어쨌든 김유신은 가락국의 초대 국왕인 김수로(金首露)의 후예로서 신라에 항복한 금관가야(金官加耶) 왕족의 후손이었다. 그가 젊은 시절에 일찍 출세하지 못한 까닭도 신라의 정통 귀족이 아니라 가야계라는 출신성분이 불리하게 작용한 탓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김유신은 순수한 혈통의 가야인도 아니었다. 화랑세기(花郞世記)에 따르면 그의 6대조 취희왕(吹希王)부터 신라인의 피가 섞인 것으로 나타난다.

화랑세기에는 김유신의 가계가 비교적 상세히 나온다. 취희왕의 아버지 좌지왕(坐知王)은 여색(女色)을 밝혀 각국의 여자를 부인으로 맞아들였는데, 그 가운데 신라 아찬 도령(道寧)의 딸린 복수(福壽)도 있었다. 복수는 취희왕을 낳았고, 취희왕은 신라 각간 진사(進思)의 딸 인덕(仁德)을 아내로 맞아 질지왕(蛭知王)을 낳았다. 질지왕은 가야 여인 방원(邦援)에게서 감지왕(紺知王) 등 5형제를 두고, 또 신라 각간 출충(出忠)의 딸 숙씨(琡氏)에게서 구충왕(仇忠王)을 낳았다. 구충왕은 가야인 계봉(桂鳳)의 딸 계화(桂花)에게서 무력(武力)과 무득(武得)을 낳았다. 이어서 화랑세기는 이렇게 기록했다.

'모두 우리나라(신라)에서 왔는데 조정에서 예로써 대접했다. 무력은 진흥제(眞興帝)의 딸 아양(阿陽)을 아내로 맞아 서현(舒玄)을 낳았다. 서현은 만호태후(萬呼太后)의 딸 만명(萬明)을 아내로 맞아 유신을 낳았다.'

김유신의 어머니인 만명부인은 진평왕(眞平王)의 모후(母后)인 만호태후의 딸이다. 만호태후가 본남편인 동륜태자(銅輪太子)가 먼저 죽자 갈문왕(葛文王) 김입종(金立宗)의 아들이며 진흥왕(眞興王)의 동생인 숙흘종(肅訖宗)과 사통하여 낳은 딸이다. 近親婚은 물론 近親相姦까지 보편시되던 신라 왕족, 귀족 사회에서 이렇게 정식 혼인에 의하지 않고 사통하여 낳은 아들딸을 사자(私子), 사녀(私女)라고 불렀다. 만호태후의 사녀인 이 김만명(金萬明)이 길에서 김서현(金舒玄)과 눈이 맞아 야합(夜合)한 끝에 김유신을 낳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 가락국기(駕洛國記)는 신라 제30대 국왕인 문무대왕(文武大王) 김법민(金法敏)이 김수로(金首露)의 제사에 관한 조서를 내린 사실을 전하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가야국(加耶國) 시조의 9세손 구형왕(仇衡王)이 우리나라에 항복할 때 거느리고 온 아들 세종(世宗)의 아들이 솔우공(率友公)이요, 그 아들 서운(庶云) 잡간의 딸 문명황후(文明皇后)께서 나를 낳으셨다. 때문에 시조 수로왕(首露王)은 나에게는 15대조가 된다. 그 나라는 이미 없어졌지만 그 묘는 아직 남아 있으니 종묘에 합사하여 제사를 계속하도록 하라.'

● 김서현(金舒玄)과 김만명(金萬明)의 야합(夜合)으로 진천에서 출생

문무대왕(文武大王) 김법민(金法敏)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金春秋)의 아들로서 경주 김씨이다. 그런데 그가 김해 김씨 시조인 김수로(金首露)가 자신의 15대조라고 한 것은 가야의 마지막 임금 구형왕(仇衡王)의 증손 서운(庶云)의 딸이 자신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서운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오는 김서현으로 김유신의 아버지이며 김유신의 묘비문에는 소연(消衍)으로 나오는 사람이다. 솔우공(率友公)은 졸지공(卒支公)이라고도 하고 구형왕과 세종(世宗)은 삼국사기에는 각각 구해왕(仇亥王)와 노종(奴宗)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구형왕을 화랑세기(花郞世記)에서는 구충왕(仇衝王)이라고 했다. 문무대왕(文武大王)의 어머니 문명황후(文明皇后)는 김서현과 만명부인의 둘째 달이며 김유신의 누이동생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열전과 화랑세기에는 김유신의 할아버지가 세종도 노종도 아닌 무력(武力)이라고 나온다. 삼국사기 열전은 김유신의 출생에 대해 이렇게 전하고 있다.

'처음에 서현이 길에서 갈문왕 입종의 아들인 숙흘종의 딸 만명을 보고 마음에 들어 그에게 눈짓해 중매도 없이 야합하게 되었다. 서현이 만노군 태수가 되어 만명을 데리고 함게 가려 하니 숙흘종이 그제야 자기 딸이 서현과 야합한 줄 알고 그를 미워하여 딴 집에 가두고 사람을 시켜 지키게 했다. 그러자 갑자기 그 집 대문에 벼락이 쳐서 지키던 자가 놀라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 만명이 구멍으로 빠져나와 곧 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달아났다.'

갑자기 대문에서 벼락이 쳤다는 것은 아마도 서현이 만명을 구출하기 위해 대문을 때려 부수었거나, 숙흘종이 하늘의 조화를 핑계삼아 신라 귀족들의 비난을 사지 않고 두 사람을 도망치게 하려고 꾸민 행위일 것이다. 그렇게 해서 오늘의 충북 진천인 만노군에 가서 만명은 김유신을 낳게 되었다. 김유신이 탱나기 전에 두 부부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김서혀은 화성과 토성이 자신에게 내려오는 꿈을 꾸었고, 만명은 황금 갑옷을 입은 동자가 구름을 타고 방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하여 스무 달 만에 김유신을 낳으니 대는 서기 595년이었다. 현재 진천에는 김유신의 생가터에 길상사라는 사당이 세워져 있고, 그가 소년시절 말 달리고 활쏘기 연습을 했다는 치마대와 연보정이란 우물이 있다. 또 그 뒤의 태령산은 김유신의 태를 묻은 산이라고 한다.

만명이 서현을 따라 만노군으로 도망친 뒤 만호태후는 오래도록 서현을 사위로 인정하지 않다가 둘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문을 들었다. 또 그 아이가 잘생겼다는 말도 들었다. 외손자가 보고 싶은 만호태후는 아이를 데려오라고 하여 안아보니 과연 생김새가 영특한지라 "참으로 너는 나의 외손자로다!"하고 좋아했다. 그리고 비로소 서현을 사위로 인정했다. 김유신은 자라면서 자신이 만호태후의 핏줄을 이어받은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자신의 출신 성분이 신라 중앙 정계에서 아직도 정치적 세력이 약한 가야계였으므로 신라 왕실의 피를 받아 태어났다는 사실에 커다란 자부심을 가졌던 것이다. 화랑세기는 15세 풍월주 유신공 조에서 이를 반증하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전해준다. 그가 화랑이 되었을 때 가야파 낭도 가운데 승진을 원하는 자가 있었는데 유신이 그의 청탁을 들어주지 않자 이렇게 항의했다고 한다.

"공은 가야 정통으로서 어찌 저를 사적으로 돌봐주지 않습니까?"

그러자 유신이 정색을 하고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곧 태후의 손자인데 너는 무슨 말을 하는 거냐? 공이 있으면 비록 미천하여도 승진을 할 것이다. 어찌 공을 세우려 하지 않는가?"

● 15세에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龍華香徒) 거느려

김유신이 화랑이 된 것은 15세 때였다. 당시 사람들이 그를 따르는 낭도를 가리켜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불렀다. 화랑세기는 김유신이 그해에 만호태후의 명에 따라 11세 풍월주 하종(夏宗)의 딸 영모(令毛)를 아내로 맞았다고 한다.

삼국사기 열전은 김유신이 17세에 고구려, 말갈족, 백제가 신라의 강토를 침범하는 것에 비분강개하여 외적을 물리칠 뜻을 품고 중악에 들어가 석굴에서 수련했다면서, 이대 난승(難勝)이란 이인을 만나 비법을 받았다고 하는데, 난승은 그 비법을 전해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부디 함부로 퍼뜨리지 말라! 그리고 만일 옳지 못하게 사용하면 도리어 그로 인해 재앙을 당하리라."

그 이듬해에 김유신은 홀로 보검(寶劍)을 지니고 인박산에 들어가 향을 피워놓고 적국을 물리칠 힘을 달라고 기도한 뒤 이렇게 빌었다.

"천관(天官)은 빛을 드리워 이 보검에 영험을 내리소서!"

그러자 사흘째 되는 밤에 허성과 각성 두 별의 환한 빛이 내려뻗쳐 칼이 저절로 움직이는 듯했다. 중악에서 이인을 만나고, 인박산과 단석산에서 수련했다는 이런 설화는 김유신이 일찍부터 삼국통일의 대망을 품었다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에는 김유신이 한때 천관이란 여인에게 빠졌다가 어머니의 엄한 훈계로 애마(愛馬)의 목을 치면서 매정하게 천관과의 인연을 끊었다고 전해준다. 천관은 오랫동안 기생이라고 알려졌지만 최근의 연구 결과 신궁(神宮)의 여제관이라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김유신이 화랑 중의 화랑인 풍월주가 된 것은 입산수도를 마치고 하산한 18세 때였다. 비록 외할머니 만호태후의 후광으로 풍월주가 되기는 했지만 가야 출신이라는 성분 때문에 신분상승에 많은 제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할아버지 김무력의 벼슬이 신라 17관등 가운데 으뜸인 각간이었으나 아버지 김서현은 제3위인 소판에 그친 것만 보아도 그의 가문이 쇠락해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세운 계획이 누이동생을 김춘추에게 시집보내는 일이었다. 김유신에게는 보희(寶姬)와 문희(文姬) 두 여동생이 있었다. 언니 보희가 어느날 밤 이상한 꿈을 꾸었다. 서악에 올라가 오줌을 누었는데 그 오줌이 흘러내려 서라벌이 모두 잠긴 꿈이었다. 이튿날 문희에게 그 꿈 이야기를 했더니 문희가 비단치마를 주고 언니의 꿈을 샀다. 그리고 열흘 뒤 김유신이 김춘추를 불러 자기 집 앞에서 공을 차고 놀다가 일부러 김춘추의 옷끈을 밟아 찢어지게 했다. 그리고 집안으로 불러들여 누이동생에게 옷을 꿰매주게 했다. 보희는 부끄러워 나오지 않고 문희가 그 옷을 꿰매주었다. 그렇게 해서 김춘추는 문희와 상관하여 마챔내 임신을 시켰다.

● 누이 문희를 김춘추에게 시집보내고 입지 강화

김춘추는 폐위당한 진지왕(眞智王)의 손자로서 김유신보다 9세 연하였다. 하지만 김춘추에게는 이미 정부인인 보량(寶良)이 있어서 이 誤入事件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난감했다. 보량은 아들이 없고 딸 고타소(古陀紹)만 낳고 죽었는데, 고타소는 바로 뒷날 백제군이 대야성(大耶城)을 함락시킬 때 남편과 함께 죽은 김품석(金品釋)의 아내가 된다. 일이 잘 안 풀리자 김유신은 하루는 집에 나뭇단을 싸하놓고 문희를 불태워 죽이겠다고 나섰다. 마침 남산에 올라갔다가 이 연기를 본 덕만공주(德曼公主)가 주변을 둘러보며 어찌된 일인지 물었다. 수행했던 김춘추의 얼굴이 붉어지며 사실대로 고했다. 그러자 공주가 "네가 한 일인데 빨리 가서 구해주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김춘추는 문희를 둘째 부인으로 맞아들였고, 얼마 뒤 보량이 아이를 낳다가 죽자 그 뒤를 이어 정실부인이 되었다. 문희는 뒷날 문무대왕이 되는 법민을 낳았다. 한편 동생에게 꿈을 판 보희는 이를 후회하여 시집을 가지 않다가 김춘추의 첩이 되어 두 아들을 낳았다고 화랑세기는 전한다. 그런데 당시 문희를 구한 사람이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편(紀異篇) 태종(太宗) 춘추공(春秋公) 조에서는 선덕여왕(善德女王)이라고 했지만, 그때는 아직 국왕으로 즉위하기 전인 공주의 신분이었다는 사실이 화랑세기(花郞世記)의 기록으로 확인된다.

그렇게 해서 김유신은 마침내 신라 왕실과 인척관계가 되는 데에 성공했고, 이를 발판삼아 가야 출신이란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권력의 서열이 바뀔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사실 대장부가 할 짓이 아닌 음흉한 계략으로 볼 수 있지만, 어쨌거나 김유신이 무인(武人)으로서 두각을 드러낸 것은 역시 전쟁터였다. 때는 서기 629년, 김유신이 34세 때였다. 그해 8월에 이찬 임영리(任永里), 파진찬 김용춘(金龍春)과 김백룡(金白龍), 소판 김대인(金大因)과 김서현(金舒玄) 등이 왕명에 따라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의 낭비성을 쳤다. 낭비성은 오늘의 충북 청주. 이때 고구려군의 맹렬한 반격으로 신라군의 사상자가 많았다. 그러자 중당당주로 출전했던 김유신이 적진으로 돌격하여 날쌔게 칼을 휘둘러 수백명의 적병을 무찌르고 적장의 목을 베어 돌아오니 신라군의 사기가 충천, 단숨에 전세를 역전시켜 5천여명의 적병을 죽이고 1천여명을 사로잡아 마침내 성을 점령할 수 있었다.

● 낭비성전투(娘臂城戰鬪)에 출전하여 첫 전공(戰功) 세워

642년 윤충(允忠) 장군이 이끄는 백제군이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김춘추의 사위인 성주 김품석과 딸 고타소를 죽였다. 김춘추가 이에 한을 품고 고구려에 군사를 빌리러 떠나기 전에 김유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와 공은 한 몸과 같이 나라의 팔다리가 되었소. 이번에 내가 고구려에 가서 만일 해를 당한다면 공은 어떻게 하겠소?"

김유신이 대답했다.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나의 말발굽이 반드시 고구려와 백제의 왕궁 마당을 짓밟아버릴 것이오!"

"내가 만일 60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면 우리는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오."

그렇게 떠난 연개소문은 보장왕(寶臧王)과 연개소문(淵蓋蘇文)에게 억류당해 60일이 지나도 돌아올 수 없었다. 군사를 빌려주는 대신 전에 진흥왕(眞興王) 때 신라가 탈취해간 서북쪽 고구려 고토를 반환하라는 요구를 김춘추가 거부하자 감금해버린 것이다. 약속기일이 넘어도 김춘추가 돌아오지 않자 김유신은 정병 3천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와의 국경에 다다랐는데, 그 사이에 김춘추는 돌아가 임금에게 말씀드려 땅을 돌려주겠다는 거짓 맹세를 하고 풀려나 가까스로 돌아왔다. 물론 보장왕이나 연개소문이 그 말을 믿어서 풀어준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고구려가 김유신을 두려워한 것도 아니고, 또 김춘추를 죽여봐야 별 득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게다가 당나라와의 결전을 앞두고 굳이 신라를 자극해서 유사시 협공을 당할 필요는 없다는 전략적 판단을 했던 것으로 추측했다.

김유신은 그동안 오늘의 경북 경산지방인 압량주 군주가 되었다가 644년에는 소판으로 승진했다. 그해 9월에는 상장군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가혜성, 성열성, 동화성 등 7개 성을 쳐서 크게 이겼다. 그 이듬해 1월에 서라벌로 개선했으나 백제가 매리포성을 침공한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김유신은 이번에도 집에 들르지 않고 군사를 훈련시키고 병기를 수리하여 서부전선으로 출전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유신은 이때 집 앞을 지나가다가 잠시 멈춰 물을 떠오라고 하여 마신 뒤, "우리 집 물맛은 옛날 그대로구나!"라고 했다고 한다. 김유신의 이런 행동은 군사들을 감격시켰고, 군사들은 목숨을 바쳐 싸우기로 결심했다. 신라군이 국경에 이르자 백제군이 그 기세를 보고 그대로 물러가 김유신은 전투를 벌이지 않고도 이기고 돌아왔다.

● 비담의 반란을 진압하고 군부 최고 실력자로 부상

그런데 647년 정월에 상대등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이 반란을 일으켰다. 명목은 선덕여왕(善德女王)이 정치를 잘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선덕여왕이 백성들의 곤궁함은 돌보지 않은 채, 자신의 원찰인 분황사(芬皇寺)를 짓고, 첨성대(瞻星臺)를 만들고 황룡사(皇龍寺) 구층탑(九層塔)을 세운 것 등을 구실로 삼은 것이지만, 사실 그들의 목적은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金庾信)을 제거하고 왕위를 차지하려는 데 있었다.

김춘추가 비록 폐위당한 진지왕(眞智王)의 손자로서 진골(眞骨)로 몰락했지만 선덕여왕의 총애를 받고 있는데다가, 김유신의 강력한 무력(武力) 지원까지 업고 있으니 이들을 제거해야만 자신들이 대권을 장악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비담의 군대는 명활성에 진을 치고 김유신이 이끈 관군은 월성에 진을 쳐 열흘간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으나 쉽사리 승부가 나지 않았다. 김유신이 아무리 뛰어난 명장이라도 반란군의 군세가 훨씬 우세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밤 유성이 월성에 떨어졌다. 비담이 이를 보고, "큰 별이 떨어지면 반드시 귀인(貴人)이 죽는다 했으니 이는 여왕이 패하고 우리가 이길 징조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반란군의 함성이 천지를 울렸다. 선덕여왕이 이 소문을 듣고 매우 두려워하자 김유신이 이런 말로 위로했다.

"길흉(吉凶)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람 하기에 달린 것이니 폐하께서는 심려를 놓으소서!"

그리고 그날 밤 불붙인 허수아비를 연에 달아 띄워 올리니 마치 별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튿날 아침 김유신이 군사들에게 "어젯밤에 떨어졌던 별이 도로 하늘로 올라갔다!"고 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그리고 다시 사기가 오른 군사들을 휘몰아 마침내 비담의 반란군을 제압하는데 성공했다.

김유신은 비담의 반란을 평정한 공로로 명성이 더욱 높아지고 군부에서도 최고의 실력자가 되었다. 그런데 그해에 선덕여왕이 재위 16년만에 죽고 신라 왕실에서 남녀를 통틀어 마지막 성골(聖骨)이며 선덕여왕의 사촌동생인 진덕여왕(眞德女王)이 뒤를 이었다. 진덕여왕은 이찬 알천(閼川)을 수상인 상대등에 임명했지만 실권은 이미 이찬 김춘추와 대장군 김유신이 장악하고 있었다.

648년에 김춘추가 구원병을 청하러 당나라에 사신으로 간 동안 김유신은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했다. 전에 김품석 부부가 죽은 대야성을 탈환하여 김춘추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서였다. 진덕여왕이 적은 군사로 백제의 대군과 맞서 싸우려면 어렵지 않겠느냐고 묻자 김유신은 이렇게 대답했다.

"승패는 군사의 많고 적음에 달린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인심에 달린 것입니다. 지금 우리 백성들이 한마음이 되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고자 하니 백제 군사가 많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김유신이 군사를 선발해 훈련시킨 뒤 대야성으로 진격해 근처 계곡에 군사를 매복시키자 백제군이 공격해왔다. 김유신의 부대가 한참 싸우다가 거짓 패하여 후퇴하자 백제군이 추격하니 복병을 일으켜 앞뒤에서 협공하여 백제군을 크게 무찔렀다. 결국 이 싸움에서 백제의 장수 여덟명을 사로잡고 백제의 군사 1천여명을 죽이는 승리를 거두었다. 김유신은 백제군 진영에 사자를 보내 이렇게 제의했다.

"대야성 도독 김품석과 그의 부인 고타소의 유골이 너희 나라에 묻혀 있다. 지금 우리에게 사로잡힌 너희 장수 여덟명과 그 두사람의 유골을 바꾸는 것이 어떻겠는가?"

살아 있는 장수 여덟명과 이미 죽은 유골 두구와 맞바꾸자는데 백제 측이 싫어할 까닭이 없었다. 교환이 이루어진 뒤 김유신은 승세를 타고 계속 공격을 하여 백제의 악성 등 12개 성을 점령하고 백제의 군사 2만여명을 죽이고 9천여명을 생포하는 대승을 올렸다. 이 전공(戰功)으로 김유신은 이찬 벼슬에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으로 임명되었다. 이어서 그는 백제의 진례성 등 9개 성을 공격하여 적병 9천여명을 참살하고 6백여명을 사로잡는 승리를 거두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이런 기록을 보면 신라는 김유신 혼자 능력으로도 능히 백제를 정복하고도 남았을 것인데 무엇이 부족하여 굳이 당나라 군사를 불러들였는지 이해할 수 없다.

● 백제와의 전쟁에서 백전백승(百戰百勝) 거둬

649년 8월에 백제 장수 은상(殷相)이 석토성 등 신라의 7개 성을 공격하므로 김유신이 죽지(竹旨), 진춘(陳春), 천존(天存) 등과 더불어 군사를 거느리고 출전했다. 김유신 등이 이끄는 신라군은 열흘 동안 백제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지만 승부가 나지 않았다. 김유신이 오늘의 천안 인도살성 아래 군대를 주둔시킨 뒤 다음 전투를 대비하는데 물새 한마리가 동쪽에서 날아와 김유신의 막사를 지나 백제군 진영으로 날아갔다. 신라 군사들이 모두 불쾌한 징조라고 불안해하자 김유신이 이렇게 말했다.

"어허, 쓸데없는 소리! 절대 불길한 일이 아니다. 오늘 밤 적군의 첩자가 와서 염탐할 것이니 너희들은 모두 그를 보더라도 모른 체하라."

그날 저녁 김유신은 장수들을 불러 "구원병이 올 때가지 절대로 나가 싸우지 말고 각자의 진영만 굳게 지키라."고 명령했다. 백제의 첩자가 그 말을 듣고 그대로 돌아가 보고했다. 그 이튿날 김유신은 군사를 몰아 질풍처럼 백제군을 공격했다. 첩자의 보고를 받은 백제군 수뇌부는 과연 신라의 구원병이 온 줄 알고 우왕좌왕하다가 대패했다. 이 전투에서 김유신은 백제의 최고 지휘관인 좌평 은상을 비롯하여 달솔 자견(自堅) 등 적장 10명과 적병 8980명을 죽이고, 달솔 정중(正仲)과 적병 100명을 생포했으며, 군마 1만필과 갑옷 1800벌을 노획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런데 삼국사기(三國史記) 김유신열전(金庾信列傳)은 이 대목에서 또 '돌아오는 길에 백제의 좌평 정복(正福)이 군사 1000명을 거느리고 항복했지만 모두 놓아주어 마음대로 돌아가게 했다.'고 이해할 수 없는 기록을 남겼다. 좌평은 백제에서 으뜸가는 관직으로 재상급인데 그가 1000명이나 되는 군사를 거느리고 항복했지만 모두 놓아주어 돌아가게 했다니! 과연 이것이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는 소린가? 어쨌든 그렇게 빛나는 승리를 거두고 개선한 김유신은 진덕여왕이 몸소 도성 밖까지 나와 맞이하고 위로연을 베푸는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진덕여왕이 재위 8년만인 654년 3월에 죽었는데, 성골(聖骨)의 대가 끊어져 버렸으므로 진골(眞骨)인 이찬 김춘추가 뒤를 이어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으로 즉위했다. 김춘추의 왕위 등극에서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즉 당시 화백회의에서는 수상인 상대등 알천(閼川)을 추대했으나 그가 "나는 나이가 많고 덕이 없으므로 나라를 다스릴 수가 없다. 지금 춘추공만큼 덕망이 높은 이가 없으니 그야말로 세상을 다스릴 만한 영웅이다."면서 왕위를 양보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유신열전(金庾信列傳)에는 김유신이 알천과 상의하여 김춘추를 추대했다고 했으니,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결국 무력(武力)을 앞세워 김춘추를 왕위에 앉혔다는 뜻이니 참으로 환상의 콤비라고 할 수밖에 없다.

무열왕은 52세 되던 즉위 이듬해에 60세의 김유신을 각간에 임명하고 오래 전부터 꿈꾸어오던 삼국통일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그런데 그해 정월에 고구려가 백제, 말갈과 연합하여 신라의 33개 성을 빼앗아가는 일이 벌어졌다. 9월에 김유신은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에 쳐들어가 도비천성을 빼앗았다. 김유신은 군사를 훈련시키고 전투를 벌이는 한편 끊임없이 백제와 고구려에 첩자를 보내 정보를 수집했다.

그해 10월에 무열왕은 자신의 셋째 딸 지소(智炤)를 김유신의 아내로 주었다. 화랑세기(花郞世記)에 나오는대로 그가 15세에 결혼한 첫 부인 영모가 죽은 뒤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삼국사기 열전에 따르면 지소부인은 5남 4녀를 낳았다고 한다. 당시 지소부인이 몇 살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미 나이가 환갑인 김유신은 정력이 비상하게 뛰어났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 지소부인의 어머니는 바로 김유신의 누이동생인 문희이니 지소는 외삼촌에게 시집간 셈이다. 이에 대해 김태식(金泰植) 연합뉴스 문화부 기자는 자신의 저서인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에서 무열왕이 자신의 딸 지소를 김유신에게 시집보낸 것은 '환갑 선물'이라고 주장한다. 삼국사기 열전은 김유신의 아내 지소부인은 이찬 삼광(三光), 소판 원술(元述), 해간 원정(元貞), 대아찬 장이(長耳), 대아찬 원망(元望) 등 다섯 아들과 네 딸을 낳았다고 했다. 또 서자로 아찬 군승(軍勝)이 있었는데 그 어머니는 누군지 모른다고 했다. 뒷날 김유신이 죽자 지소부인은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고 한다. 화랑세기 필사본을 분석해보면 김유신의 아들은 아무도 나오지 않고 네 딸만 등장하는데, 그의 가계까지 살펴보기에는 너무나 번거롭기에 이 정도로 생략한다.

● 상대등이 되어 삼국통일 본격 추진

660년에 김유신은 문무백관의 으뜸인 상대등에 올랐다. 그동안 무열왕의 즉위에 일등공신이었던 김유신이 상대등 자리에 오르지 못한 것은 그의 대선배 화랑이며 가야파의 우두머리였던 문노(文弩)의 아들 이찬 금강이 상대등으로 있었기 대문이다. 문노와 거칠부(居柒夫)의 딸 윤궁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난 금강은 655년 정월에 이찬에서 상대등이 되었다가 그해에 죽자 김유신이 그 뒤를 이어 상대등이 되었다. 몰락한 가야의 왕족이 마침내 신라 최고의 관직에 오른 것이다. 상대등이 된 김유신은 무열왕을 보필하여 어린 시절부터 키워온 삼국통일의 꿈을 실현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유신에게 조미압(租未押)이란 자가 찾아왔다. 그는 오늘의 진해 부근 천산현령이었는데 백제군에게 포로로 잡혀가 좌평 임자(任子)의 종노릇을 하다가 신라로 도망쳐와 김유신을 찾아온 것이었다. 김유신은 조미압을 간첩으로 이용하기로 작정하고 그에게 밀명을 주어 백제로 되돌려 보냈다. 그 밀명이란 임자에게 가서 "만일 신라가 망하면 내가 그대에게 의지하고, 백제가 망하면 내가 그대를 보호해주겠다."는 말을 전하라는 것이었다. 조미압이 백제로 돌아와 임자에게 그 말을 전하니 임자가 이를 수락하여 간첩 조미압은 백제 조정의 실력자 임자와 김유신의 연락책 노릇을 맡았다. 그렇게 하여 백제 내부의 사정을 손바닥보듯 환하게 알게 된 김유신은 마침내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하여 무열왕에게 이렇게 건의했다.

"의자왕(義慈王)이 극악무도하여 그 죄가 걸(傑), 주(紂)보다도 더하니 이는 실로 하늘의 뜻에 순응하여 그를 처벌하여 백성들을 구할 때입니다."

그해 6월에 무열왕은 마침내 백제정벌군을 일으켜 태자 김법민(金法敏)과 함께 오늘의 경기도 이천인 남천정으로 올라가 진을 쳤다. 이는 고구려를 치려는 듯이 보여 백제를 기만하려는 양동작전이었다. 한편 당나라에 구원병을 청하기 위해 갔던 무열왕의 둘째 아들 파진찬 김인문(金仁問)이 당나라의 대장군 소정방(蘇定方), 유백영(劉佰英)과 함께 13만 대군을 안내하여 덕물도에 이르러 수행원 문천(文泉)을 시켜 이를 보고하게 했다. 신라군과 당군은 7월 10일 사비성에서 만나 함께 백제의 도성을 공격하기로 약조했다.

김유신은 김흠순(金欽純), 품일(品日) 등과 함께 5만 정병을 거느리고 백제로 진격했다. 그런데 백제의 도성으로 통하는 마지막 요충인 황산벌에는 백제의 달솔 계백(階伯) 장군이 결사대 5천명을 거느리고 지키고 있었다.

● 당군과 합세, 백제 정복에 성공

5만명의 신라군은 5천명의 백제군과 네차례의 교전을 벌였으나 1만여명의 사상자를 내는 심각한 타격을 받고 패퇴한다. 이에 김유신은 김흠순의 아들인 반굴(盤屈), 품일의 아들인 관창(官昌) 등 두 어린 화랑을 제물삼아 가까스로 백제군을 전멸시키고 사비성으로 진격, 당군과 합세하여 백제 국왕인 의자왕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삼국통일의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백제의 항복을 받아내기 전에 김유신의 성격을 전해주는 일화가 있었다. 황산벌전투(黃山筏戰鬪) 때문에 신라군이 약속 날짜보다 하루 늦게 도착하자 소정방(蘇定方)이 신라의 독군 김문영(金文潁)을 참수(斬首)하려고 했다. 군율을 내세워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고 신라군의 지휘권까지 장악하겠다는 속셈이었다. 이에 김유신이 모욕감을 참지 못해 "그렇다면 당군과 먼저 싸운 뒤에 백제를 치겠다!"고 나섰다. 이에 기가 죽은 소정방은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런 곡절로 사비성을 공격한 것은 예정보다 이틀이 늦은 7월 12일, 의자왕(義慈王)은 겨우 일주일도 버티지 못하고 웅진성으로 달아났다가 그달 18일에 항복하고 말았다.

백제를 멸망시킨 뒤 소정방은 김유신(金庾信), 김인문(金仁問), 김양도(金良圖) 세사람에게 백제 땅을 식읍으로 나누어주겠다고 회유했다. 이에 김유신이 "대장군이 황제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우리 성상(聖上)의 소망을 들어주고 우리나라의 원수를 갚아준 것은 감사하나 어찌 우리만 특별한 대우를 받고 이득을 누릴 수 있겠는가?"라고 거절했다. 소정방은 출전하기 전에 당황(唐皇) 고종(高宗)으로부터 백제를 정복한 뒤 신라까지 쳐서 속국으로 만들라는 밀명을 받고 왔던 것이다. 이를 알아챈 김유신이 당군과 일전을 불사하려고 하니 소정방이 할 수 없이 군사 1만명을 사비성에 주둔시킨 뒤 의자왕과 왕자, 대신 등 2만여명의 포로를 이끌고 회군했다.

김유신은 백제를 멸망시킨 공로로 대각간에 올랐다. 당시까지 신라 17관등 중 최고의 벼슬은 각간이었는데, 각간으로도 모자라 대각간 벼슬을 만들어 김유신에게 내린 것이다. 그런데 무열왕이 삼국통일 대업의 완수를 보지 못한 채 그 이듬해인 661년 6월 재위 8년만에 59세로 죽었다. 그 뒤를 이어 태자 법민이 즉위하니 신라의 서른번째 국왕인 문무대왕(文武大王)이다.

문무대왕은 국상(國喪) 중임에도 당군이 고구려를 공격하며 지원군을 보내라는 바람에 김유신을 비롯한 장졸들을 파견했고 자신도 군사를 거느리고 뒤따랐은 백제부흥군에게 막혀 평양성까지 당도할 수가 없었다. 662년 정월에 김유신은 김인문, 김양도 등 아홉명의 장수와 함께 평양의 소정방에게 군량을 수송하게 되었다. 그는 이미 68세의 고령이었지만 자청하여 이 일을 맡았다. 그러나 소정방이 군량을 받고 그대로 철수하는 바람에 김유신의 신라군도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듬해 5월에 백제의 유장(流將)인 복신(福信)과 도침(道琛) 등이 왜국에 가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扶餘豊)을 모셔와 새 임금으로 옹립하자 백제부흥군은 한때 활기를 띠었다. 하지만 부흥군 내부의 권력투쟁 끝에 도침은 복신에게 죽고, 복신은 부여풍에 의해 살해된데다가 왜국의 지원군까지 백강전투(白江戰鬪)에서 전멸함으로써 백제부흥운동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664년 정월, 70세가 된 김유신은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했으나 문무대왕은 궤장과 안석을 내려주고 그대로 조정에 출사하게 했다.

● 한국 역사상 신하로는 최초로 군왕으로 추봉

신라가 또 다시 당나라와 합세해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은 그로부터 4년 뒤인 668년, 그 지난해에 고구려는 일세의 영걸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죽은 뒤 그의 아들 삼형제가 권력투쟁을 벌이는 바람에 나라가 사분오열되었고, 태종(太宗)의 패전(敗戰) 이후 설욕의 기회만 노리고 있던 당나라가 이적(李勣)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고구려정벌군을 일으킨 것이었다. 신라도 그해 8월에 문무대왕이 친히 대각간 김유신을 비롯하여 30여명의 장수와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향해 북진했다. 하지만 당군이 철군하는 바람에 신라군도 회군했다가, 그 이듬해 6월에 당군의 공격 재개에 맞춰 고구려로 다시 출병했던 것이다.

당시 김유신은 대당대총관에 임명되었지만 74세의 고령에 풍질까지 앓고 있었기에 문무대왕이 서라벌에 머물도록 하여 출전하지는 못했다. 그해 9월 21일 평양성이 함락됨으로써 고구려도 마침내 망하고 말았다. 고구려를 정복한 뒤 문무대왕은 그해 10월에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통해 일등공신인 김유신에게 태대각간 벼슬을 내렸다. 대각간이라는 신라 최초, 최고의 벼슬에 태(太)자 한 자를 더 보태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나라에서 신라를 자국의 영토에 편입시키기 위해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를 설치하고 내정간섭을 실시하려고 하자 문무대왕(文武大王)은 이에 반발하여 고구려 유민(遺民)들의 대당항전(對唐抗戰)을 배후에서 부추기고 군사를 보내 옛 백제 영토에 주둔하고 있던 당군을 공격하게 하는 양동작전을 구사하면서 정면 대응했다. 670년 3월에는 신라 군사 1만여명이 고구려 유민 1만명과 연합작전(聯合作戰)을 펼쳐 압록강 부근에서 당군을 공격함으로써 나당전쟁(羅唐戰爭)이 시작되었다. 신라는 당나라와의 전쟁 초기에 평양을 빼앗기고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馬邑城)이 점령되면서 고전(苦戰)을 면치 못하다가 675년 9월 매초성전투(買肖城戰鬪)에서 이근행(李謹行)이 이끈 당나라의 20만 대군이 대패하자 전세는 역전되었다. 결국 676년 11월 설인귀(薛仁貴)가 지휘하는 당나라 수군이 기벌포해전(伎伐浦海戰)에서 패퇴함으로써 7년간의 나당전쟁(羅唐戰爭)은 신라의 승리로 종결되었으며, 그해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가 요동으로 옮겨지고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가 건안성(建安城)으로 이동하여 당나라의 세력은 한반도에서 완전히 물러갔다.

김유신은 당나라와의 전쟁이 한창이던 673년 음력 7월 1일에 노환으로 죽었는데, 그때 나이 79세였다. 그 뒤 835년에는 흥덕왕(興德王)이 김유신은 흥무왕(興武王)으로 추봉했으니, 왕족이 아닌 신하로서 군왕으로 추봉된 사람은 한국 역사에서 김유신이 유일한 경우였다.

● 신라의 나당전쟁(羅唐戰爭) 승리로 삼국통일 완성

김유신(金庾信)도 사후에 신장(神將)으로 민중의 섬김을 받았다. 이는 그가 삼국통일이라는 위업을 이룩한 신라 천년사의 대표적 명장이며 지략과 용맹이 뛰어난 전쟁 영웅이기 때문일 것이다. 삼국사기에 다르면 김유신은 백전백승(百戰百勝)의 명장이었다고 한다. 이따금 전세가 불리할 때도 있었지만 결과는 반드시 빛나는 승리로 막을 내렸다. 백제를 정벌할 때에 계백 장군의 5천 결사대와 맞선 황산벌전투(黃山筏戰鬪)가 대표적인 경우였다. 백제를 정복하기 위해 선발한 최강의 정예병 5만 대군으로 겨우 5천명의 잔병에게 서전(緖戰)에 네차례나 타격을 받았다는 것은 상승장군(常勝將軍)으로 유명한 김유신으로서는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어린 화랑인 반굴과 관창을 희생시키는 교육지계를 썼던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김유신전(金庾信傳)의 기록대로라면 신라는 굳이 당나라 군사를 불러들일 필요도 없이 김유신 한사람의 능력으로 백제도 정복하고 고구려도 정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김유신은 지략과 용맹과 신통력까지 겸비한 하늘이 신라에 내린 명장이 아니었던가?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함에 따라 김유신에 관한 평가도 극단적으로 갈라졌다. 한쪽은 여전히 그가 삼국통일을 통해 민족 일체성을 이룩한 우리 역사상 최고의 명장이라는 찬사를 보내는 반면, 다른 한쪽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김유신의 전공(戰功)은 대부분 과대포장된 것으로서 그는 명장이라기보다 일세의 간웅이요, 음모가에 불과하다고 혹평한다. 그 대표적 인물이 민족주의 사학자인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였다. 그는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서 김유신을 이렇게 평가했다.

'당시에 연개소문(淵蓋蘇文)을 고구려의 대표 인물이라 하고 부여성충(扶餘成忠)을 백제의 대표 인물이라 한다면 김유신은 곧 신라의 대표 인물이라 할 것이다. 고구려, 백제가 망한 뒤에 신라의 사가(史家)들이 그 두 나라 인물의 전기적 자료를 말살해 버리고 오직 김유신만을 찬양하였으므로 삼국사기 열전에 김유신 한사람의 전기가 을지문덕 이하 수십명의 전기보다도 양이 훨씬 많고, 부여성충 같은 이는 열전에 끼지도 못하였다. 그러니까 김유신전에 화려하고 아름다운 말이 많음을 가히 미루어 알 수가 있다..... 삼국사기 김유신전을 보면 유신은 전략과 전술이 다 남보다 뛰어나 백전백승의 명장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대개는 그의 패배는 가려 숨기고 조그만 승리를 과장한 것이 기록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김유신의 전공(戰功)이 거의 거짓 기록이라면 김유신은 무엇으로 그렇게 일컬어졌는가? 김유신은 지혜와 용기 있는 명장이 아니라 음험하고 사나운 정치인이요, 그 평생의 큰 공이 전쟁터에 있지 않고 음모로 이웃나라를 어지럽힌 사람이다.'

결국 신채호를 비롯한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시각은 김유신과 김춘추가 외세인 당(唐)의 군사력을 끌어들여 동족의 나라인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이른바 삼국통일을 한 결과 우리나라 영토가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 당시 고구려의 판도까지 포함하여 75%나 중국에게 빼앗기고 대동강 이남으로 형편없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라. 이른바 통일신라, 즉 후기신라 이후 고려와 조선왕조로 이어진 민족적 통일보다도 국토, 특히 만주 대륙을 포함한 광대한 고구려의 영토를 중국에게 빼앗긴 것을 천추의 한으로 여긴 것이다. 이런 상반된 시각은 최근의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김유신이 5천년 민족사상 최고의 영웅이요, 명장이라는 찬사가 여전한가 하면, 외세를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민족반역자라고 매도하는 사람이 아직도 존재하는 것이다. 김유신은 과연 명장인가, 아니면 모략가에 불과했는가?

참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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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출처 : 한국사의 영웅과 열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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