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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의 역사 인물」9.등주(登州)를 기습공격한 발해의 무장 장문휴(張文休)

회기로 2010. 1. 26. 20:27
● 질풍노도(疾風怒濤), 전광석화(電光石火) 같은 전격 기습작전

장문휴(張文休)는 발해국(渤海國)의 대장군이다. 그의 이름과 행적은 국내 사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중국의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에만 겨우 한두줄 정도가 나올 뿐이다. 따라서 그의 가계가 어떻게 되는지, 그가 언제 어디에서 태어나 어떻게 발해의 장수가 되었는지 하는 점은 역사의 수수께끼다. 다만 알려진 것은 장문휴가 인안(仁安) 13년인 서기 732년 9월에 발해의 두번째 황제인 무제(武帝) 대무예(大武藝)의 명령을 받고 군사들을 인솔하여 압록강구를 출발, 해로로 당나라의 등주, 오늘날의 산동성 봉래시 동남부를 기습 공격하여 초토화시켰다는 사실이다.

당시 등주는 당나라 동해안의 중요한 경제적, 군사적 요충지였으므로 수많은 수군과 육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군은 장문휴가 이끄는 발해군의 공격이 너무나 신속하고 강력했으므로 제대로 대항하지도 못한 채 궤멸되고 말았다. 장문휴는 전격적인 기습작전으로 당나라의 방어군을 섬멸한 뒤 곧바로 등주성을 공격하여 등주자사(登州刺使) 위준(韋俊)을 잡아 죽이고 숱한 당나라 군사를 참살했다. 그리고 처음 공격할 때와 마찬가지로 신속하게 철군했다. 그야말로 질풍노도(疾風怒濤) 같고 전광석화(電光石火) 같은 기습작전(奇襲作戰)이었다.

당시 당나라의 황제 현종(玄宗)은 장문휴가 지휘하는 발해 군사들의 공격을 받아 등주가 쑥대밭으로 변하고 자사가지 죽었다는 패전(敗戰) 보고를 받자 노발대발(怒發大發)하여 우령군장군 갈복순(葛福順)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발해군을 토벌하라고 명령했지만 갈복순이 등주로 달려갔을 때 발해군은 이미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린 뒤였다.

현종은 등주의 패전을 잊지 않고 보복할 날만 기다리다가 그 이듬해 1월에 발해의 반역자 대문예(大門藝)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발해를 치게 하는 한편, 그때 당나라에 숙위(宿衛)로 가 있던 신라의 왕족 김사란(金思蘭)을 급히 귀국시켜 신라로 하여금 발해를 공격하도록 했다. 당시 신라의 국왕은 성덕왕(聖德王)이었다. 발해를 양면에서 협공하려는 현종의 이 기도는 결과적으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당시 신라는 당나라의 힘을 빌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이른바 삼국통일을 이룬 뒤 대동남 이남을 지배권으로 하고 있었기에 발해의 건국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신라가 사대주의로 섬기던 당나라도 형식적이나마 고제(高帝) 대조영(大祚榮)에게 사신을 보내 발해군왕(渤海郡王)이라는 칭호를 내렸지만, 신라는 고제가 사신을 보내 건국을 통보하고 양국이 우호관계로써 협력하기를 청했을 때 고제에게 신라의 5품관에 불과한 대아찬(大阿贊) 벼슬을 주는 오만방자하고 주제넘은 짓을 자행했던 것이다. 이야말로 참으로 모욕적인 처사였다.

대문예(大門藝)를 앞세운 당군은 발해를 향해 유주를 출발하긴 했지만 처음부터 승산이 없는 싸움이라 군사들의 사기가 엉망이었다. 게다가 당시 당나라는 동쪽, 서쪽, 북쪽 삼면에서 해(垓) 거란(契丹), 돌궐(突厥), 토번(吐蕃) 등의 끊임없는 공격을 받고 있었으므로 강성한 발해를 침공할 형편도 못 되었다. 결국 발해 정벌은 군량과 마초 등 충분한 보급이 이루어지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계절도 엄동설한(嚴冬雪寒)인지라 싸우다 죽기보다는 얼어서 죽고 굶어서 죽는 군사가 더 많았다. 그리하여 당나라 군사들은 발해군과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저절로 무너져 중도에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김유신(金庾信)의 손자 김윤중(金允中)을 비롯한 4명의 장수가 이끌고 북상하던 신라군도 길이 험한데다가 눈까지 한 길이 넘게 내리는 바람에 절반이나 얼어 죽자 중도에 포기한 채 되돌아가고 말았다.

● 고구려의 판도와 성세(聖勢)를 회복한 '해동성국(海東聖國)' 발해.

그 이듬해인 인안(仁安) 15년(734년) 1월에 또다시 신라의 숙위 김충신(金忠信)이 현종(玄宗)에게 글을 올려 발해를 치겠다고 자청하여 현종이 이를 허락했으나 아무 성과도 없이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 뒤부터 당나라와 신라는 발해를 치려는 생각을 다시는 먹지 못했다. 이렇게 서쪽으로 당(唐)의 침략 야욕을 철저히 깨뜨리고 남쪽으로 신라의 도발 의도를 확실히 꺾어놓은 발해는 이후 8세기 초까지 흑수말갈(黑水靺鞨)을 비롯한 동쪽과 북족의 여러 종족을 굴복시켜 광대한 영토를 개척하고, 일본까지 복속시킴으로써 동북아시아에서 당나라와 대등한 대제국의 위세를 널리 떨칠 수 있었다.

비록 발해사(渤海史)에 관한 기록이 빈약하여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복원할 수는 없지만 발해가 이처럼 '해동성국(海東聖國)'의 위세를 떨칠 수 있었던 것은 장문휴(張文休)와 같이 출중한 장수의 전공(戰功) 덕분이요, 또한 그와 같은 명장을 발탁한 발해의 위대한 제왕인 무제(武帝)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장문휴가 어느 정도의 병력을 거느리고 당나라를 공격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또한 발해군의 규모와 마찬가지로 등주를 지키던 당군의 병력이 얼마였는지도 알 수가 없다. 전혀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추측은 가능하다. 필자는 장문휴가 이끄는 원정군의 규모가 1만여명 안팎이라 보고 있다. 왜냐하면 당나라의 수비군이 최소한 수만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볼 때 1만명 이하는 너무나 위험부담이 컸으리라는 점이다. 아무리 전광석화(電光石火)와 같은 기습공격이라도 절대적인 병력의 열세는 위험부담이 반비례로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사대 성격의 원정군이라 하더라도 1만명을 밑돌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면 3만명 이상이라면 이러한 대군을 수송할 함대의 규모가 수백 척에 이르고, 또 군량과 마초 등 이들 병력을 뒷받침할 군수부대까지 고려할 때 신속 정확할 기습작전이 불가능했으리라는 추측이 나온다.

또한 작전기간에 관해서도 필자는 압록강구에서 등주까지 왕복 소요시간까지 포함하여 5~10일의 단기전이라고 추측한다. 현종(玄宗)이 낙양에서 보고를 받고, 현종의 황명을 받은 갈복순(葛福順)이 군사를 거느리고 등주로 달려갔을 때 발해군이 이미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작전기간이 결코 10일을 넘지 않은 단기전이었음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또 한 가지 배놓을 수 없는 사실이 있다. 발해의 당나라 원정은 장문휴의 산동반도 기습 한 가지 작전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장문휴의 수군을 이용한 기습작전 외에도 무제(武帝)가 직접 군사들을 거느리고 요하와 대능하를 건너 당나라 영주와 평주지방을 점령하고 오늘날의 북경과 가가운 만리장성까지 진격했다는 것이다. 이 설의 근거는 신당서(新唐書) 오승자열전(吳承資烈傳)에 "발해의 대무예(大武藝; 武帝)가 군사를 거느리고 마도산(馬道山)에 이르러 성읍을 점령했다."는 기록이다. 마도산은 요동과 요서의 경계를 이루는 요하 서쪽 요서지방에 있는 산이다. 이에 따라 당군은 발해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4백리에 걸쳐 요소의 길목을 막고 큰 돌로 참호를 만들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자치통감(資治通鑑)에도 "대문예(大門藝)를 유주로 보내 군사들을 징발해 싸우게 하는 한편, 유주절도사로 하여금 하북체방처치사를 겸하게 하고 상주, 낙주, 패주, 기주, 위주 등 모두 16개에 이르는 주와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의 병력까지 통솔하게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따라서 수륙 양면을 통한 당시 발해의 원정이 단순한 소규모 기습작전의 범위를 넘어 전면전의 성격을 띤 대대적인 대당정벌전(對唐征伐戰)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 발해는 고구려를 이은 당당한 대제국

필자가 기록이 매우 빈약함에도 불구하고 장문휴(張文休)에 관한 역사인물록(歷史人銘物錄)을 쓰는 것은 한국 역사에서 발해사(渤海史)를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얼빠진 자가 아니라면 한국인으로서 발해가 고구려를 이은 나라요, 따라서 발해사(渤海史)는 당연히 우리 민족의 역사 중 일부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중국은 정부차원에서 고구려사(高句麗史)와 발해사(渤海史)를 중국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음모를 공공연히 자행하고 있다. 이야말로 역사 왜곡을 넘어서 파렴치하고 몰염치한 역사 탈취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이 고구려사(高句麗史)와 발해사(渤海史)를 자기네 역사라고 우기며 배앗아가려는 저의는 어디에 있을까. 몇 가지 분석이 가능하지만, 필자의 추측으로는 남북통일 이후에 제기될지도 모를 만주에 대한 연고권 주장에 미리 쐐기를 박자는 심산인 듯하다. 이와 아울러 현재 우리 동포가 많이 살고 있는 만주, 곧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등 중국 동북삼성 지방에서 만에 하나라도 일어날지 모를 독립운동을 일찌감치 막아볼 저의를 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만주는 한국 땅'이란 소리를 꿈에도 하지 말라는 뜻이다.

중국은 이러한 역사 탈취 작업을 위해 2002년 2월부터 이른바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대형 연구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중국은 이 동북공정을 위해 5년간 우리 돈으로 3조원이라는 막대한 자금을 투입한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아무리 돈을 많이 들여 역사를 왜곡하고 탈취한다고 해도 남의 나라 역사, 다른 민족의 역사를 쉽게 저희 것으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제 조상을 바꾸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짓이다.

만주 대륙은 환웅(桓雄) 거발환(居發桓)과 단군(檀君) 왕검(王儉)이 개국한 배달국(倍達國)과 고조선의 성스러운 발상지요, 고조선이 망한 뒤에는 해모수(解慕漱)가 세운 부여, 주몽(朱蒙)이 세운 고구려, 대조영(大祚榮)이 세운 발해가 차례로 일어났던 우리 고대사의 중심지였다. 비류(沸流)와 온조(溫祚) 형제가 남하해 세운 백제는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에서 갈라져 나왔고, 서라벌에 선주하던 여섯 씨족이 모두 고조선의 유민이었으며,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중심으로 한 신라 건국의 주체세력도 만주에서 남하했으니 결국 민주는 우리 민족사의 모태요, 요람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어용학자들은 고구려와 발해가 현재 자기네 영토에 있었다는 사실로 고구려사(高句麗史)와 발해사(渤海史)는 중국 역사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는 참으로 단순하고 어리석고 유치하기 그지없는 억지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이 이처럼 어처구니없는데도 그냥 두고 보고만 있을 작정인가. 앞으로 고구려사(高句麗史)도 빼앗기고 발해사(渤海史)도 빼앗긴 다음에는 부여와 고조선의 역사도 중국 역사의 일부라고 생떼를 쓰고 나올 것이 뻔하지 않은가.

그런데 정작 문제는 한국 정부와 제도권 역사학계의 태도가 너무나 안이하고 미온적이라는 점이다. 역사의 교훈, 역사 교육의 중요성을 광복 60년이 되도록 역대 위정자가 망각하고, 교육 당국이 홀대하고 천대해온 결과가 이렇게 나타나고 있는데도 중국에 대해 항의 한번 못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러니까 민족적 정체성이 희미해지고 민족적 자존심과 긍지도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그 다음에 올 것은 나라와 겨레가 또 다시 망하는 길밖에 없다는 역사의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 귀중한 혈세를 엉둥한 곳에 낭비하지 말고 3조원이 아니라 3백억원이라도 우리 역사를 지키는 사업에 투자했으면 좋겠다.

● 통일신라시대 아닌 남북극시대로 구분해야

중국과 일본이 한국 역사를 의도적으로 축소, 폄하하고 왜곡하고 있음에도 국내의 일부 서양사를 전공한 소위 학자라는 명함을 들고 다니는 얼빠진 작자들은 민족주의 사관을 비난하면서 국사를 해체해야 한다는 극언과 망언을 서슴지 않고 있다. 특히 한국 역사를 전공하고 있는 일부 매국사학자들도 발해의 주민 구성원이 속말말갈인(粟末靺鞨人)이며 건국자인 대조영(大祚榮)도 말갈족이라는 중국 측 문헌 기록이 있으므로 발해를 한국 역사에 포함시키는 것이 불가하다는 궤변을 늘어놓아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에 장단을 맞추고 있다. 만약 중국 측과 국내 매국사학자들의 견해대로 발해가 말갈족의 국가이고 고구려와의 연계성이 없으며 중원 왕조의 지방정권에 불과했다면 건국자인 대조영(大祚榮)도 이 글의 주인공인 장문휴(張文休)도 말갈 사람인 셈이다.

발해의 멸망과 더불어 우리 민족은 드넓은 만주 대륙을 잃어버렸다. 발해가 망한 뒤 우리 역사는 압록강 이남 한반도로 축소되어 버렸던 것이다. 고조선의 뒤를 이어 부여가 일어낫고, 부여의 뒤를 이어 고구려가 일어났으며, 고구려의 뒤를 이어 일어난 나라가 발해요, 그 역사의 무대가 만주 땅인데, 그 발해마저 망하자 우리 민족은 다시는 만주 대륙을 호령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사대주의 식민사관 매국사학자들의 농간 때문에 우리는 아직까지 고조선과 부여 이후의 열국시대를 삼국시대로 부르고 있고, 이른바 삼국시대 이후는 통일신라시대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이른바 통일신라 북쪽 옛 고구려 당에 발해가 있었던 사실을 의도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무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발해사(渤海史)를 빼앗기고 고구려사(高句麗史)도 빼앗길 위기를 맞은 것이다. 따라서 이제부터라도 국사교과서에 발해사에 관한 분량을 늘리고, 시대 구분도 통일신라시대가 아니라 남북극시대라고 고쳐야 마땅할 것이다.

특히 김부식(金富軾)이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찬하면서 중국에 맞선 발해를 아예 우리 역사에서 제외시켜 버린 탓에 발해와 대조영에 관한 연구도 우리 역사서보다는 중국과 일본 측 기록에 더 많이 의존하게 된 것이다. 다만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만은 실전된 신라고기(新羅古記)를 인용하여 "고구려의 구장(舊將) 조영(祚榮)의 성은 대씨인데 남은 군사를 모아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발해라고 했다."는 기록을 남겨놓았다.

무제(武帝)가 장문휴(張文休)로 하여금 당나라 원정을 명령한 까닭은 반역자 대문예(大門藝)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대문예는 어떤 인물인가. 그는 다른 사람도 아닌 무제와 피를 나눈 친동생이었다. 사정의 전말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발해의 건국 과정으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발해는 고구려의 유민들이 건국한 뒤 약 230년 동안 오늘의 중국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 일대를 지배했으며, 황제를 칭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당당한 주체적 대제국이었다.

● 대조영이 고구려 멸망 30년 뒤에 발해 건국

668년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의해 평양성이 함락되고 고구려가 멸망하자 만주를 포함한 옛 고구려 지역은 큰 혼란에 빠졌다. 당나라는 고구려의 부흥운동에 겁을 먹고 수많은 유민을 요서지방과 중국 내륙지방으로 강제이주시켰다. 대걸걸중상(大乞乞仲象)과 대조영(大祚榮) 부자도 이때 대능하 중류 요서지방의 요충인 영주의 치소인 조양에 이주당한 고구려의 유장이었다. 구당서(舊唐書)에 이르기를, "발해말갈(渤海靺鞨)의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었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그는 가솔을 거느리고 영주로 옮겨가 살았다."고 했다.

측천무후(則天武后)가 당나라를 통치하던 696년, 거란족인 송막도동 이진충(李盡忠)과 귀성주자사 손만영(孫萬榮)이 반란을 일으켜 영주를 함락시키고 도족 조문홰를 잡아 죽였다. 이 반란으로 당나라가 혼란에 빠진 틈을 이용해 대걸걸중상은 고구려의 유민 수만명을 거느리고 말갈족의 지도자 걸사비우(乞四比羽)와 더불어 조양을 탈출하여 동쪽으로 요하를 건너 고구려 옛 당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측천무후는 대걸걸중상을 진국공(震國公)으로, 걸사비우를 허국공(許國公)으로 봉해 달래려 했으나 그다위 허울뿐인 명예직이 무슨 소용이랴. 당나라는 회유책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번에는 무력행사를 시도하여 좌옥검위대장군 이해고(李偕固)와 중랑장 색구(索仇)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이들을 추격하여 섬멸토록 명령했다.

당군과 쉴새없이 교전을 벌이면서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족은 계속 요동으로 향했다. 그 동안 이해고와의 전면전에서 걸사비우(乞四比羽)와 대걸걸중상(大乞乞仲象)이 전사하고 최고 지도자가 된 대조영은 출중한 용맹과 지략까지 겸비한 당대의 영웅이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어려서부터 용맹이 뛰어났으며, 말을 잘 탔고 활을 잘 쏘아 고구려의 장수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끈질기게 추격하는 당군을 유인하여 천문령전투(天門嶺戰鬪)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참패한 이해고는 간신히 목숨만 구해 도망쳐 버렸다.

무려 5천 킬로미터의 대장정 끝에 옛 고구려 5부의 하나였던 계루부 지역을 수복한 대조영은 698년 오늘의 길림성 둔화시 서남쪽 22.5 킬로미터 지점, 송화강 건너편의 해발 6백미터 지점인 동모산에[ 오동성을 쌓고 새 나라 대진국(大震國)을 건국하여 제위(帝位)에 올라 연호를 천통(天統)이라고 정했으니, 이는 구국(舊國)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 만의 일이었다. 한편, 근래 일부 학자는 대조영의 성씨인 대씨가 고구려의 왕성(王姓)인 고씨와 같은 뜻으로서 대조영 일가가 고구려 왕족이라는 학설을 내놓기도 했다.

거란과 돌궐의 잇따른 침략으로 대진국을 제압할 여력이 없었던 당나라의 황제 현종(玄宗)은 할 수 없이 713년에 낭장 최흔(崔昕)을 보내 고제(高帝)에게는 발해군왕(渤海郡王)이란 칭호를, 그의 태자 대무예(大武藝)에게는 계루군왕(桂婁郡王)이란 칭호를 주었다. 어쨌든 당나라로서는 마지못해 대진국의 건국을 승인한 것이었다. 발해라는 명칭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 건국 주체세력과 국민 대부분이 고구려 유민

사실 2백여년 동안 사직을 유지한 발해의 영역에는 '발해(渤海)'라는 지명이 없었다. 발해인은 자국의 국호를 '위대한 동쪽나라'라는 뜻에서 대진(大震)이라고 불렀으며, 자랑스러운 고구려의 후신(後身)으로 자처했다. 그리고 도 한가지 바로잡아야 할 잘못 알려진 사실이 있다. 지금까지 제도권 사학계에서는 발해 건국을 주도한 집권층만 고구려의 유민이고 피지배층인 국민의 대부분은 말갈족이라는 설이 정설처럼 굳어져 왔는데, 이는 참으로 잘못된 것이다. 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에 "일본은 동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고, 요양은 서쪽의 장벽이니 두 나라의 거리가 만리가 넘는다."는 구절이 있다. 이를 풀이하면 발해의 서쪽 당과의 접경이 요양이란 말이니, 당연히 그 동쪽 요동은 발해의 영토라는 뜻이 된다.

당시 요동에 살던 주민 대부분은 고구려의 유민이었고, 상대적으로 말갈족은 소수였다. 따라서 발해의 지배층은 대체로 고구려의 유민이고 피지배층은 대부분 말갈족이란 이론은 타당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라. 고구려 유민의 능력이 아무리 탁월하고 무력(武力)이 강력했다 하더라도 극소수의 인원으로 이민족인 수많은 말갈족을 2백년이 넘도록 지배했다는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있겠는가.

어쨌든 대진국의 건국 초기 세력은 영토가 사방 5천리, 호수가 10여만, 군사가 수만명으로 알려져 있는데, 추산해보건대 인구는 50만명 안팎이었을 것이다. 신당서(新唐書)의 기록은 '백두산의 동북쪽을 확보하고 천험으로 삼았으며 밀림을 벽으로 스스로를 견고히 했다. ...(중국에서) 먼 곳을 믿고서 나라를 세웠다.'라고 전한다.

● 창업 이후 국제적 위상 제고에도 주력

천통(天統) 원년(서기 699년)에 발해는 중앙과 지방의 정치, 군사 기구를 정비하고, 그때가지 복속하지 않고 있는 주변의 말갈족을 회유하거나 굴복시켜 인구와 군사력을 늘리는 한편, 밖으로는 멀리 떨어진 돌궐로 사신을 보내 국제적 위상 확보에도 힘을 쏟았다. 이에 발해를 무력으로 제압할 여력이 없는 당나라도 외교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천통(天統) 7년인 705년에 발해가 사신을 보내 건국을 통보하자 당나라에서도 측천무후에 이어 제위에 오른 중종(中宗)이 발해에 사신을 보내 건국을 축하했다. 고제(高帝)는 국가의 토대를 탄탄히 굳힐 동안 당과 불필요하고 무모한 대결을 피하기 위해 둘째아들 대문예(大門藝)를 답례사절로 보내 양국은 일시적이나마 화평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태조(太祖) 고제(高帝)인 대조영(大祚榮)이 719년에 세상을 뜨고 그의 뒤를 이어 황태자인 대무예(大武藝)가 발해의 두번째 황제로 등극하니 그가 곧 광종(光宗) 무제(武帝)였다. 무제(武帝)는 즉위하자 연호를 인안(仁安)이라고 선포했다.

대문예는 이렇게 하여 당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숙위라는 명칭으로 그대로 머물게 되었는데, 이는 당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인질인 셈이지만 발해로서는 당나라 수도 장안에 심어놓고 당나라의 사정을 알아내는 정보통인 셈이었다. 하지만 이 대문예가 뒷날 친형인 대무예가 무제로 즉위한 뒤 본국을 배반하고 당에 망명하는 반역자가 된 것이다.

발해와 당의 평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그 이유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천하의 주인을 자처하는 당의 제국주의적 야욕에 있었다. 당나라는 오랫동안 골치를 썩이던 거란이 716년에 투항한 데 이어 인안(仁安) 8년에는 흑수말갈가지 항복해오자 옳다구나 하고 이를 좋은 기회로 여겨 그들로 하여금 발해를 공격하도록 부추겼다. 말갈족은 원래 7개 부족이 있었다. 그런데 흑수말갈을 제외한 6개 부족은 이미 발해에 복속하고 흑수말갈인이 따로 떨어져 놀면서 정세를 관망하다가 마침내 더 강한 쪽이라고 판단한 당나라에 붙었던 것이다.

당시 발해는 건국 이후 20여년 동안 오늘의 동경성을 중심으로 한 속말말갈 지역을 비롯하여 말갈족의 땅 대부분과 한반도 북부, 중국 동북지방 등을 복속시킴으로써 남쪽은 신라, 동족은 동해, 북쪽은 흑수말갈, 서쪽은 거란과 각각 국경을 이룬 광대한 영토의 대제국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나라는 이러한 발해의 강성한 기세에 맞서 그 동안 감히 정면으로 맞설 수 없었는데 흑수말갈이 스스로 항복하자 마침내 발해에 대한 침략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던 것이다.

● 당에 망명해 반역자가 된 대문예

흑수말갈이 항복하자 현종은 그들의 지역에 흑수주를 설치하고 당나라 감독관인 장사(長史)를 파견하여 통치하고자 했다. 이에 무제(武帝)가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 흑수말갈이 우리의 길을 빌려서 당과 통했고, 도 다른 대에는 돌궐에 토둔(吐屯)을 요청하면서 우리에게 먼저 알린 뒤에 우리 사신과 동행했다. 그런데 지금은 당나라 관리를 요청하면서 우리에게 알리지 않았으니 이는 분명히 당나라와 공모하여 우리를 앞뒤에서 치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이에 대한 조치로서 당나라에서 돌아와 있던 동생 대문예(大門藝)와 외숙부 임아상(任離相)으로 하여금 군사를 동원하여 흑수말갈을 치도록 명령했다. 무제는 그동안 당나라가 우호적으로 나온 것이 가식이라는 사실에 새삼 분노하여 배신자 당을 응징하기로 결심하고, 이에 앞서 당의 동맹 세력이 되어버린 배후의 흑수말갈부터 징벌하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황제(皇弟) 대문예가  배신을 할 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대문예는 당나라에 숙위로 가 있는 동안 당의 화려한 문물과 군사력 등 강력한 국력에 압도당한 나머지 친당파로 변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어저면 당의 끈질긴 회유와 협박 공작에 넘어갔는지도 모른다. 대문예는 무제의 명령을 받자 이렇게 반대를 하고 나섰다.

"지금 흑수말갈이 당나라의 보호를 받고 있는데 우리나라가 만일 흑수말갈을 친다면 그것은 곧 당나라와 등지는 일입니다. 당나라는 큰 나라로서 군사가 우리나라보다 만 배나 되니 우리가 당나라와 맞선다는 것은 곧 망국을 재촉하는 것과 같습니다. 옛날 고구려는 전성기에 군사가 30만이나 되어 당나라에 대적했으니 매우 강국이라고 할 수 있지만 결국 당나라에게 망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우리나라는 고구려에 비해 군사가 삼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데 당나라와 싸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 소리를 들은 무제(武帝)가 노발대발했다. 아우가 당나라에 가 있는 동안 간도 쓸개도 다 빼앗기고 얼빠진 자가 되어 돌아왔다고 여긴 것이었다. 무제는 본국인 발해보다도 적국인 당나라의 편을 들어 반대하는 대문예의 제의를 일축하고 다시 한 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흑수말갈을 정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미 친당파, 패배주의자가 된 대문예(大門藝)는 군사를 거느리고 출전하기는 했지만 결국 당나라와 맞서게 될 것이 두려워 흑수말갈의 경계에 이르자 다시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 이번 원정을 중지할 것을 간청했다.

이에 격분한 무제는 더는 참지 못하고 즉시 대문예를 파면시키고, 그 대신 자신의 사촌형 대일하(大壹夏)를 원정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비겁한 동생 대문예를 불러들여 죽여 버리려고 했다. 부국강병의 원대한 꿈을 실현시키는데 걸림돌이 된다면 친동생이라도 죽여 없애겠다는 의지의 발로였다. 그러자 대문예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군사들을 버린 채 허겁지겁 당나라로 망명하고 말았으니, 이에 현종(玄宗)은 대문예의 항복을 쌍수를 들고 환영하며 그에게 우효위장군의 벼슬을 내렸다.

● 무제의 당당한 요구에 우물쭈물한 현종

무제(武帝)는 대일하(大壹夏)로 하여금 흑수말갈(黑水靺鞨)을 정벌하게 하여 마침내 항복을 받아내고 그들을 복속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성격이 불같은 무제의 화가 거기에서 풀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당나라의 현종(玄宗)에게 마문궤(馬文軌)와 물아(勿雅)를 사신으로 보내 대문예(大門藝)의 죄상을 열거하고 그를 잡아 죽일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자 입장이 난처해진 현종은 대문예를 안서로 피신시킨 뒤 마문궤와 물아는 그대로 장안에 잡아둔 채 홍려소경 이도수(李道燧)와 원복(源復)을 발해에 사신으로 보내 이르기를, "대문예가 곤궁에 빠져 우리나라에 귀순했는데 그를 어찌 죽일 수 있으랴. 또 지금 그를 영남지방으로 보냈기에 장안에는 없다."는 궁색한 변명을 했다. 영남은 지금의 중국 남부 광동성 일대 광서장족자치구를 가리킨다. 하지만 무제는 당나라의 속임수를 빤히 꿰둟고 있기에 이렇게 강경히 항의했다.

"당나라가 대국이라면 신의를 보여야 함이 마땅하거늘 어찌 속임수를 쓸 수 있겠는가? 듣건대 우리나라의 반역자 대문예가 아직 영남지방으로 가지 않았다고 하니 반드시 그를 잡아 죽이기 바라노라."

그러자 현종(玄宗)은 이도수와 원복이 기밀을 제대로 지키지 못해 누설한 책임을 물어 이도수는 조주자사로, 원복은 택주자사로 좌천시켜 버렸다. 그리고 대문예는 정말로 영남지방으로 피신시켰다. 하지만 무제(武帝)는 반역자 대문예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낙양에서 무술이 뛰어난 자객들을 모아 대문예를 찾아내 암살하도록 시켰다. 결국 이 시도도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제가 당나라와 대문예에 대한 원한을 결코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인안(仁安) 9년에 무장한 대규모 사절을 일본에 보내 일본의 복속을 받아낸 뒤, 치밀한 작전계획에 따른 극비의 훈련을 마친 끝에 732년에 마침내 당나라 원정을 단행했다. 이에 앞서 730년에 당의 압제를 받아오던 거란의 추장 가돌칸이 당에 반란을 일으켜 당나라의 꼭두각시놀음을 하던 거란 출신 우두머리 송막도독을 잡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가돌칸은 거란족의 최고 권력자가 되자 돌궐과 동맹을 맺고 해족과 손잡은 뒤 당나라와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 장문휴의 군사 작전은 당나라 응징

당나라가 거란과 해족의 공격으로 정신없게 되자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기회가 왔다고 여긴 무제(武帝)는 당나라 징벌 명령을 내렸다. 그 군사 작전의 총지휘관이 바로 장문휴(張文休) 장군이었던 것이다. 장문휴의 등주 공습이 대성공을 거둠에 따라 산동성 일대는 공황상태에 바지고, 그 뒤 오랫동안 발해의 영향권에 속하게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발해의 두번째 황제인 광종(光宗) 무제(武帝)는 재위 18년만인 737년에 죽고 그의 태자인 대흠무(大欽茂)가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세번째 황제인 세종(世宗) 문제(文帝)이다. 문제는 즉위하자 자신의 연호를 대흥(大興)이라 지었다. 그리고 754년에는 수도를 첫 도읍지 오동성에서 오늘의 흑룡강성 연안시 동경성 발해진 소재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로 옮겼다. 그 뒤 발해는 성장, 발전을 계속하여 중흥조로 불리는 열번째 황제 성종(聖宗) 선제(宣帝) 대인수(大仁秀) 치세에는 고구려 전성기의 강역을 거의 회복하고 5경 15부 62주를 거느리며 해동성국(海東聖國)의 영화를 누리기에 이르렀다.

발해가 멸망한 것은 건국 229년이 지난 926년 열네번째 황제 애제(哀帝) 재위기였다. 발해의 멸망 원인으로는 거란의 공격으로 망했다는 설이 지배적인데, 백두산의 화산 폭발 때문이라는 이설도 있다. 당시 한반도 남쪽에서는 고려의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기울어가는 천년왕국 신라와 견훤(甄萱)의 후백제를 상대로 통일사업을 마무리할 즈음이었다. 발해가 망하자 말갈족은 대부분 거란에 흡수되었지만, 다수의 고구려계 유민은 지속적으로 동족의 나라인 고려로 망명했다.

발해가 칭제건원(稱帝建元)한 당당한 제국이었음을 증명해주는 분명한 증거가 있다. 1980년 길림성 화룡현 서성향 북고성촌 용두산에서 발굴된 문제(文帝)의 넷째 딸 정효황녀(貞孝皇女) 묘비명에 부황을 가리켜 '황상(皇上)'이라교 표현한 구절이 나온다. 또 속일본기(續日本紀)에 따르면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문제(文帝)가 자국인 발해를 가리켜 천손국(天孫國)이라 했고,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유속(遺俗)을 지킨다."고 했으니 어찌 감히 이 같은 대제국을 가리켜 '말갈족의 나라' 라느니, '중국 소수민족의 지방정권' 이라느니 하는 망발을 되풀이하고 중국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터무니없는 역사 왜곡과 탈취 만행을 자행하고 있는가.

그러나 본문의 주인공인 장문휴 장군이 당나라 원정 이후에 어떤 행적을 남겼는지 어떤 사서나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참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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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 들녘 2000년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들녘 2000년
김기홍 '천년의 왕국 신라' 창작과비평사 2000년
박선식 '한민족 대외 정벌기' 청년정신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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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준 '임시정부 활동과 의열투쟁의 전개'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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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출처 : 한국사의 영웅과 열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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