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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의 역사 인물」10.당나라에서 무위(武威)를 떨친 백제의 유장(遺將) 흑치상지(黑齒常之)

회기로 2010. 1. 26. 20:27
비운의 무장 흑치상지(黑齒常之). 그는 본래 백제 부흥군을 이끈 장수였다. 그러나 백제 부흥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당나라에 투항, 당장(唐將)으로서 수많은 전투에서 빛나는 전공(戰功)을 세웠다. 그리고 역모 혐의를 쓰고 끝내 억울한 최후를 맞았다.

그의 일생은 이처럼 간략히 소개해도 파란만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망국(亡國)의 유장(遺將)으로서 한때는 적국이었던 당(唐)에서 대장군 직위까지 오른 흑치상지였지만, 60년에 걸친 그의 일생은 663년을 이어왔던 그의 조국 백제의 역사처럼 험난하기 그지없었다.

우리는 5천년 오랜 역사를 자랑하지만, 그 동안 해외에 진출하여 빛나는 이름을 남긴 인물은 불과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이니 결코 많다고 할 수는 없다. 수차에 걸쳐 일본 열도로 집단이주한 적은 있었지만, 거의 해외 진출로 눈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해외라고 해보아야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과 일본이 고작이었고, 역사적으로 해외에 나가 이름을 남긴 인물도 중국과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예를 들면 일본에 학문을 전해준 왕인(王仁) 박사를 비롯해 백제 멸망 이후 당나라로 건너가 전쟁터에서 크게 활약하는 흑치상지 장군, 그리고 고구려의 유민으로 서역 원정을 통해 동서양의 교역로를 개척한 고선지(高仙芝), 당에서 신라로 돌아와 청해진(淸海鎭)을 세우고 동양 삼국의 재해권을 장악했으나 끝내 추악한 왕위 쟁탈전에 휘말려 비열하게 암살당한 장보고(張保皐) 등이 대표적이다.

고선지는 중국 땅에서 태어난 고구려의 후예였지만, 흑치상지는 백제에서 태어나 망국의 과정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유민들을 모아 백제 재건을 위한 항쟁을 벌이다가 결국 당나라에 투항, 이후 비참한 최후를 맞을 때까지 당나라 장수로서 남은 인생을 보냈다.

◆ 일생의 30년은 백제, 30년은 당에서 보내

이제부터 일생의 전반 30년은 백제에서, 후반 30년은 중원 대륙에서 전쟁터를 누비며 살다가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난 비운의 무장(武將) 흑치상지(黑齒常之)의 발자취를 돌이켜본다.

흑치상지에 관한 기록은 비교적 많은 편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에 그의 전기가 실려 있고, 중국 측 사서인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 열전(列傳)에도 그의 전기가 들어 있으며, 본기(本紀)에도 그에 관한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의 흑치상지전(黑齒常之傳)은 사실 이들 구당서와 신당서의 기록을 간추린 것이다. 그리고 지난 1929년 10월에 중국 낙양 북망산 그의 묘에서 출토된 묘지석 등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흑치상지전(黑齒常之傳)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흑치상지(黑齒常之)는 백제 서부 사람으로서 키가 7척이 넘었으며, 날래고 용감하며 지략이 있었다. 그는 백제의 달솔(達率)로서 풍달군(風達郡)의 장수를 겸했는데, 이는 당나라의 자사(刺史) 벼슬과 같다고 한다.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평정했을 때에 자기 부하와 함께 항복했다가 정방이 늙은 국왕을 가두고 군사를 놓아 함부로 노략질하매 상지가 성을 내어 좌우 추장 10여명을 데리고 탈출했다. 그리하여 도망쳤던 백제 군사들을 모아 임존성(任存城)으로 가서 굳게 지키니 열흘 안팎에 상지에게 모여든 자가 3만명이었다.

정방이 군사를 정비하여 그를 쳤으나 이기지 못했고, 상지는 마침내 2백여성을 회복했다. 용삭(龍朔) 연간에 당(唐) 고종(高宗)이 사신을 파견하여 상지를 불러 타이르매 그만 유인궤(劉仁軌)한테 가서 항복했다.'

그리고 이 뒤에는 당나라로 건너가 활약한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 및 흑치상지묘지명(黑齒常之墓誌銘)의 내용이 이보다는 더욱 상세하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위의 기록들을 바탕으로 흑치상지 장군의 생김새와 사람됨, 그의 출신 내력부터 알아보자. 먼저 그의 키가 7척이 넘었다고 했으니 오늘의 기준으로 보아도 그는 키가 2미터에 이르는 당당한 체격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늘의 한 자는 30.3센티미터이지만 옛날에 한 자는 28센티미터였다. 그러면 7척이라고 해도 196센티미터가 되는 셈이다.

흑치상지 장군은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을까? 신당서(新唐書) 본기(本紀)에 따르면 흑치상지가 감옥에서 죽은 것은 689년 10월이라고 했다. '무오(茂午)에 우무위대장군(右武衛大將軍) 흑치상지(黑齒常之)와 우응양장군(右鷹揚將軍) 조회절(趙懷節)을 죽였다.'고 했는데, 당시 그의 나이가 60세였다. 이를 기준으로 역산하면 그는 백제 무왕(武王) 재위 31년(서기 630년)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백제 왕족으로 동남아시아 지역 봉후(封侯)의 후손

또한 삼국사기(三國史記)나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모두 그가 백제의 서부 사람이라고 했다. 백제는 전국을 동, 서, 남, 북 및 중방의 5방으로 나누어서 지배했는데, 이는 웅진성(熊津城)에서 사비성(泗批城)으로 천도한 이후 개편한 방, 군, 현 체제에 따른 것이다. 그 이전 백제의 지방 행정구역은 22개 담로(擔魯)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서부란 당시 백제의 도성 사비성을 전, 후, 좌, 우 및 중부 등 5부로 나누었는데, 흑치상지가 태어난 서부란 서방의 오기로 보인다.

그러면 흑치상지(黑齒常之)의 성씨 흑치(黑齒)는 어떻게 비롯되었을까? 의자왕(義慈王)의 후손들은 오늘날 부여(扶餘) 서씨(徐氏)로 남아 있다. 이는 백제 멸망 직후 당나라로 끌려갔던 의자왕의 셋째 아들 부여융(扶餘隆)으로 하여금 당황(唐皇) 고종(高宗)이 그의 성을 부여씨에서 서씨로 고쳐 당의 괴뢰정권은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의 도독으로 삼아 보낸 이후 부여 서씨의 시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구려의 명림답부(明臨答夫)와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처럼 흑치상지의 후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종적이 묘연하다. 명림씨나 을지씨나 흑치씨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흑치상지묘지명(黑齒常之墓誌銘)은 이렇게 그의 가계(家係)에 관해 전해주고 있다.

'그 선조는 부여씨에서 나와 흑치에 붕해졌으므로 자손이 이를 따라 성씨로 삼았다..... 그 집안은 세세로 이어 달솔이 되었다. 달솔의 직책은 지금 병부상서(兵部尙書)와 같은데, 본국(백제)의 2품관이다. 증조부의 이름은 문대(文大)이고, 조부의 이름은 덕현(德顯)이며, 부친의 이름은 사차(沙次)로서 모두 관등이 달솔에 이르렀다.'

위의 기록에서 달솔(達率)이 백제 16관등 가운데 2품관이란 말은 맞지만 당나라의 병부상서와 같다는 말은 잘못된 것이다. 병부상서는 오늘의 국방부장관과 같은 직책인데, 당시 백제에서 국방부장관과 같은 직책은 병관좌평(兵官佐平)이었다.

어쨌든 흑치상지의 선조는 본래 백제의 왕족이었다. 부여씨는 백제의 왕성(王姓)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흑치상지의 증조부 이전 어느 선조가 흑치라는 지역에 분봉되어 이를 성씨로 삼았다. 흑치(黑齒)라는 지역이 어딘가에 대해 그동안 역사학계에서 논란이 많았는데, 여러 학자의 연구 결과 흑치는 백제의 22개 담로(擔魯) 가운데 하나로서 오늘의 동남아시아 지역, 특히 필리핀으로 비정하는 설이 우세하다. 그러면 백제가 일본열도나 중국 산동반도 뿐만 아니라 필리핀까지 식민지로 지배했단 말이냐고 의문을 품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몇몇 역사적 기록에 따라 그렇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일찍이 최치원(崔致遠)이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기에는 강한 군사가 백만이나 되어 남쪽으로는 오월(吳越)을 침범했다."고 말했고,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도 "백제가 삼국 가운데 가장 강성했다."고 말했다. 여기에서 오월은 중국 남부 양자강 하구를 가리킨다. 또 송서(宋書)에 따르면 "백제는 요서(遼西)를 경락했는데, 백제가 다스린 곳은 진평군(晉平郡), 진평현(晉平縣)"이라 했고, 양서(梁書)에도 "백제 또한 요서와 진평 2군의 땅을 차지했는데, 백제군(百濟郡)을 두었다."고 했다. 백제는 또 탐라를 기점으로 하는 원양항로를 개척하여 대만해협과 유구(琉球)를 거쳐 태국,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지역과 인도까지 진출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 양서(梁書) 백제전(百濟傳)에 따르면 "읍(邑)을 담로라고 하는데, 중국의 군현(郡縣)과 같다. 그 나라에는 22개 담로가 있는데, 모두 자제 종족을 그곳에 나누어 거주시킨다."고 했다. 이는 흑치 지역에 분봉된 흑치상지의 선조가 본래 백제 왕족이라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 어려서부터 문무겸전(文武兼全)했던 당대의 영걸

이번에는 사서의 기록을 통해 나타난 흑치상지의 사람됨을 보자. 그의 묘지명은 이렇게 전한다.

'어려서 처음 공부할 나이가 되었는데, 곧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과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읽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좌구명(左丘明)이 부끄럽다고 했고 공자(孔子) 역시 부끄럽다고 했으니 진실로 나의 스승이다. 이 경지를 넘는다면 무엇이 부족하다고 하겠는가!" 라고 했다.'

이는 흑치상지가 평생을 무장으로 보냈으면서도 어려서부터 중국의 여러 고전과 역사서를 읽어 학문적 수양이 깊었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그리고 신당서(新唐書) 흑치상지전(黑齒常之傳)은 이런 일화를 소개하며 그가 대범하고 포용력이 넓은 인격자였음을 전해준다.

'흑치상지는 아랫사람을 부리며 사랑이 있었다. 그가 타는 말이 군사들에게 매질을 당했는데, 어떤 사람이 그에게 죄를 묻기를 청하니 대답하기를, "어찌 개인의 말[馬]에 대한 일로 경솔하게 관병(官兵)을 때릴 수 있으랴."고 했다. 상을 받는 대로 부하들에게 나누어주고 남겨놓은 것이 없었다. 그가 죽게 되자 사람들이 모두 그의 억울함을 슬퍼했다.'

또한 묘지명에도 이런 구절이 있다.

'부군(府君)은 어려서부터 사나이답고 포부가 대담했으며, 기지와 정신이 영민하고 배어났으니 가볍게 여긴 것은 즐거움이었고 무겁게 여긴 것은 명분의 가르침이었다.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이 침착하고 맑았으니 그 끝이 보이지 않고, 정(情)의 궤적이 활달하여 멀리는 그 이수(里數)를 나타내지 않았다. 거기에다 정성으로 더했으며, 여기에 온화함과 안자함이 겹쳤다. 이 때문에 친족들이 그를 공경하였고.....'

'부군은 타고난 바람이 영민하고 의젓했으며 성품이 명달했다. 힘은 능히 관 같은 무거운 것을 들 수 있었지만 힘 있다고 자처하지 않았고, 지혜는 능히 적들을 막을 수 있었지만 지혜로써 스스로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드러나지 않는 것으로써 썼지만 드러났고, 어리석음으로써 올바름을 길러나갔기 때문에 그때 행실이 산처럼 우뚝하게 서 있었고, 모두가 쳐다보는 명망이 있게 되었다.'

'이에 군대에 들어가 수레를 밀며 변방에서 절개를 세우니 중상을 잘 하는 사람도 악을 더하지 못했고, 칭찬을 잘하는 사람이라도 아름다운 말을 더 이상 보탤 수 없었다.'

한편, 흑치상지묘지명(黑齒常之墓誌銘)은 그가 약관이 안 되어 지적(地籍)으로서 달솔을 제수받았다고 했는데, 이는 곧 나이 20세 이전에 소속된 가문과 신분에 따라 2품관 벼슬인 달솔에 임명되었다는 말이다.

◆ 백제 멸망으로 무상하게 바뀐 인생행로

흑치상지(黑齒常之)가 성년이 될 무렵은 무왕(武王)이 재위 42년만에 죽고 그의 뒤를 이어 백제의 마지막 임금인 의자왕(義慈王)이 즉위한 지 9년째 되던 해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記)에 따르면 의자왕은 용감하고 담력과 결단력이 있었다고 했다. 또 무왕이 재위 33년째 되던 해에 그를 태자로 삼았는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가 있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불렀다고 한다. 의자왕은 즉위 이듬해인 642년 7월에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공격하여 40여성을 빼앗았다. 또 그 여세를 몰아 그해 8월에는 윤충(允忠) 장군에게 군사 1만명을 주어 오늘의 경남 합천인 대야성을 공격하게 하여 함락시켰다.

그런데 당시 대야성 성주는 뒷날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으로 즉위하는 김춘추(金春秋)의 사위 김품석(金品釋)이었다. 대야성이 함락되고 딸과 사위가 죽음을 당했다는 비보를 들은 김춘추는 그때부터 고구려로 당(唐)으로 쫓아다니며 목숨을 건 외교전(外交戰)을 펼치며 백제를 멸망시키고자 온갖 힘을 다 썼다. 하지만 부왕인 무왕이 그랬듯이 신라에 대한 의자왕의 공격은 집요했다. 재위 7년(서기 647년) 10월에는 의직(義直)에게 기병 3천명을 주어 신라를 치게 했고, 그 이듬해에도 의직을 보내 신라의 10여성을 빼앗았으며, 재위 9년(서기 649년)에는 좌평(佐平) 은상(殷相)에게 군사 7천여명을 주어 신라의 석토성 등 7개성을 빼앗게 했다.

사서에는 전혀 나오지 않지만 필자의 추측으로는 당시 20세 전후의 흑치상지도 의자왕이나 윤충, 의직, 은상 장군 등을 따라 출전했을 것으로 본다. 이와 아울러 황산벌전투(黃山筏戰鬪)에서 비장한 최후를 맞은 계백(階伯) 장군도 어쩌면 그때 신라를 공격한 여러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냈음직하지만, 어디에도 그런 기록이 없어 아쉽기만 하다.

첫머리에 소개한 대로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에 따르면 백제가 망할 당시 흑치상지의 관직이 풍달군장(風達郡將)이라고 했다. 그가 군장을 역임했다는 풍달군이 현재의 어느 지역을 가리키는지도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북사(北史) 백제전(百濟傳)에 따르면 백제는 5방에 5명의 방령(方領)이 있었고, 방령은 달솔이 맡았으며, 방좌(方佐)가 그를 보좌했다고 한다. 또 방에는 10개 군(郡)이 있고, 군에는 장(將) 3명이 있는데, 덕솔이 맡았다고 했다. 또 나머지 군현에는 성주와 같은 도사(道使)가 파견되었다고 전한다.

백제가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에게 멸망당하던 660년에 흑치상지는 31세였다. 당시 백제 조정은 정권 핵심부의 분열상이 극에 달한 상태였다. 좌평 성충(成忠)은 의자왕의 실정을 충간하다가 투옥되었고, 좌평 흥수(興首)는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으로 귀양 가 있었다. 반면 또 다른 좌평인 임자(任子)는 신라의 실력자 김유신(金庾信)과 밀통하고 있는 등, 한마디로 말해서 망국일로를 걷고 있었다.

◆ 정복군 횡포에 분개, 백제 부흥군 일으켜

그리하여 신라와 당나라가 백제 정복군을 편성한 것이 서기 660년, 김유신이 신라의 정예군 5만명을 이끌고 탄현을 넘어 황산(黃山)에서 계백(階伯)의 백제군 결사대 5천명을 전멸시켰으며, 소정방(蘇定方)이 지휘하는 당나라 군사 13만명은 웅진강(熊津江) 어귀에서 의직(義直)이 거느린 백제 군사 1만여명의 저항을 물리치고 곧바로 사비성(泗批城)으로 진격하여 7월에 의자왕의 항복을 받으니, 백제는 변변한 항전도 못하고 허무하게 역사의 뒷편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백제를 멸망시킨 당(唐)과 신라는 그 땅을 통치하기 위해 행정구역을 개편했다. 백제는 멸망 직전까지 5방 200여성 76만호를 이루고 있었다고 했는데, 이를 웅진(熊津), 마한(馬韓), 동명(東明), 금련(金蓮), 덕안(德安) 등 5개 도독부(都督府)로 나누고, 그 아랴 주와현을 예속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백제의 수도 사비성에는 유인원(劉仁願)을 사령관으로 하는 당군 1만명과 김인태(金仁泰)를 사령관으로 하는 신라군 7천명을 주둔시켰다. 그러나 이런 조치, 곧 백제를 5개 도독부로 분할하여 통치한다는 구상은 망국 직후 불길처럼 일어난 백제 부흥군에 의해 이내 유명무실(有名無實)해지고 만다.

망국 당시 풍달군장이던 흑치상지는 의자왕의 항복에 따라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당군에 항복했다. 그런데 소정방이 늙은 의자왕을 가두고, 당나라 군사들이 무지막지하게 살인, 방화, 약탈 등 만행을 마구 저지르자 이에 분개하여 곧 항복한 것을 후회했다.

그해 8월 2일 사비성에서는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의 전승축하연이 있었다. 그때 무열왕과 소정방이 당상에 높이 앉고, 의자왕과 왕자들은 당하에서 그들에게 술잔을 채워 올리게 하니 이를 본 백제 신료들의 비통한 통곡소리가 하늘에 울릴 정도였다. 흑치상지도 분명히 그 자리에서 그런 기막힌 광경을 목격했을 것이다. 그는 부하들을 거느리고 사비성을 빠져나와 임존성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부흥군 조직을 위해 백제의 유민들을 불러 모으니 불과 10일만에 무려 3만명이나 모여들었다는 것이다.

◆ 임존성에서 10일만에 병력 3만명 동원

이런 기록으로 미루어볼 때 흑치상지가 군장을 역임했다는 풍달군, 그리고 그의 출신지라는 서방은 현재 충남 예산군, 대흥면 예당저수기 곁의 대흥산성(大興山城)일 가능성이 높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대흥현(大興縣) 고적(古蹟) 조에도 이렇게 나온다.

'임존성(任存城)은 곧 백제의 복신(福信)과 지수신(遲受信), 흑치상지(黑齒常之) 등이 유인궤(劉仁軌)에게 대적하던 곳으로 지금 현의 서쪽 13리에 옛 석성이 있는데, 둘레가 5천 1백 94척이고, 성안에 우물 세곳이 있다.'

흑치상지는 임존성을 거점으로 백제 부흥군을 모집하여 당군, 신라군과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해 8월 임존성을 공격해온 신라군을 격퇴시켜 첫 승리를 거두었다.

그런데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백제 부흥군의 중요한 지도자가 복신(福信)과 도침(道琛)으로 나온다.

복신은 무왕(武王)의 조카요, 의자왕(義慈王)의 사촌으로 알려졌는데, 무왕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그런데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그의 성(姓)이 백제 왕성인 부여씨(扶餘氏)가 아니라 귀실씨(鬼室氏)로 나오니 어쩌면 그도 흑치상지의 가문과 마찬가지로 부여씨에서 분파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627년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된 적도 있었는데, 백제 망국시 직급은 16관등 중 5위인 한솔(扞率)이었다. 그는 백제 부흥군을 일으킨 뒤 스스로 상잠장군(霜岑將軍)이라고 일컬었다.

도침은 오늘날의 전북 부안지방 출신의 승려로서 현재 부안군 상서면 개암사 뒷산으로 비정되는 주류성(周留城)을 거점으로 백제 부흥군을 일으켜 기세를 떨쳤는데, 아마도 그의 군사들은 여러 정황상 승군이 주력군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그는 영군장군(領軍將軍)이라고 자칭했다.

의자왕이 항복한 지 2개월 뒤인 660년 9월 23일에 이들 백제 부흥군은 갈수록 군세가 커지고 합류하는 성도 30여개로 늘어나 큰 세력을 형성하게 되자 당군과 신라군이 지키고 있는 사비성에 대한 공격을 개시해 도성 외곽의 목책을 부수고 군량을 탈취하는 등 곧 사비성을 함락시킬 듯 기세를 떨쳤다. 복신은 또 좌평 귀지(貴智)에게 생포한 당군 포로 100명을 딸려 왜국으로 보내며 지원군을 요청하는 한편, 왜국에 머물고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扶餘豊)을 새로운 임금으로 맞기 위해 본국으로 보내주기를 요청했다.

그러나 10월 30일에 벌어진 전투에서 부흥군은 신라군에게 패배해 사비성 남쪽을 포위했던 군사들이 퇴각하고, 이어서 11월 5일 벌어진 전투에서도 백마강 건너 왕흥사잠성(王興寺岑城)에 주둔했던 부흥군이 패배함으로써 사기가 급격히 떨어지고 말았다.

신라는 항복한 백제의 좌평 충상(忠常)과 상영(常永) 및 달솔 자간(自簡)에게 제7관등인 일길찬(一吉飡) 벼슬을 내리고 모두 백제의 고토 각지를 다스리는 총관직에 임명했다. 또 은솔 무수(武守)에게는 제10관등은 대내마(大奈麻) 벼슬에 대감직을, 은솔 인수(仁守)에게도 대내마 벼슬에 제감직을 주어 백제 유민들을 무마하도록 했다.

이듬해인 661년 2월에 복신과 도침은 전열을 정비하여 사비성 공격에 나섰으나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에게 배하여 임존성으로 퇴각했다. 당군은 그 틈을 타 점령군사령부인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수비하기 어려운 사비성에서 웅진성으로 옮겼다.

◆ 한때 사비성 탈환, 전남까지 세력권 넓혀

기록에는 보이지 않지만 부흥군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마침내 옛 백제의 수도 사비성을 탈환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기세를 몰아 3월 5일에는 신라군을 급습하여 대승을 거두니 그동안 비교적 소극적이었던 전남 지역까지 적극적으로 복국전쟁(復國戰爭)에 나서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부흥군은 4월 19일에도 신라군을 격퇴시키고 200여성을 회복했으며, 승세를 타고 당군의 주역이 지키고 있는 웅진성마저 포위했다.

일본에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이 귀국한 것은 그 이듬해인 662년 5월이었다. 의자왕의 서자 수십명 가운데 한명이라는 설도 있는 부여풍이 왜국으로 건너간 것은 흑치상지가 태어날 무렵이던 631년이니 30년만의 귀국이었다. 부흥군은 부여풍을 새로운 백제 국왕으로 옹립하고 항전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해 7월에 연합군에게 대패하고, 12월에는 부흥군의 수도나 마찬가지인 주류성에서 오늘의 전북 김제로 비정되는 벽성으로 천도했다. 그런데 백제 부흥군은 그 이후 지도층 안에서 내분이 일어나 자멸의 내리막길로 굴러 떨어지고 만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그의 직할부대까지 합쳐 부흥군의 최강자가 되니 부여풍이 그의 위세에 감히 맞설 수 없어 제사나 주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663년에 복신은 조카인 부여풍에게 붙잡혀 피살당했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의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는 부흥군의 내분은 복신과 초기에 부흥군을 일으켰던 부여자진(扶餘自進) 사이의 알력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부여자진이 당장(唐將) 유인궤(劉仁軌)와 밀통한 사실을 복신의 심복인 사수원(沙首原)이 알고 이를 복신에게 보고하여 자진은 복신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어서 신라군을 대파한 복신이 여세를 몰아 도침까지 죽이고 부흥군의 주도권을 장악하니 불안해진 부여풍이 복신과 갈등을 빚다가 마침내 복신을 잡아 죽였다는 것이다.

◆ 내분으로 자멸한 백제 부흥군

그 결과 부흥군의 전력은 급격히 떨어졌다. 663년 6월, 복신을 죽인 부여풍(扶餘豊)은 왜국과 고구려에 구원병을 요청했고, 왜국이 이에 호응하여 군선 1천여척에 군사 2만 7천명을 보냈다. 하지만 8월 28일에 벌어진 백강전투(白江戰鬪)에서 왜군은 당나라 수군에게 군선 4백여척이 불타고 군사들이 전멸되는 참패를 당했다. 이 결정적 전투의 패배로 부흥군의 수뇌인 왕자 부여충승(扶餘忠勝)과 부여충지(扶餘忠志)는 당군에게 항복하고, 부여풍은 고구려로, 그의 아우 부여용(扶餘勇)은 왜국으로 망명하고 말았다. 이어서 9월 7일에는 주류성이 함락되어 결국 백제 부흥운동은 종막을 고했다.

그러면 흑치상지는 어떻게 하고 있었을까? 백제의 복국전쟁(復國戰爭)이 이처럼 허무하게 끝나자 그는 참으로 심각한 고민에 바졌을 것이다. 상세한 사정은 알 수 없고, 다만 분명한 것은 그가 이 무렵에 당군에게 항복했다는 사실이다. 장수로서 전사가 아닌 항복이란 참을 수 없는 치욕이다. 또한 변절자로 매도당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가 항복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부흥군 지도부의 내분에 환멸을 느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를 위해 변호를 하자면 더 이상 무고한 백제 유민의 희생을 막고자 했음인지도 모른다. 또는 부여융(扶餘隆)의 권유에 따라 비록 괴뢰정권이지만 웅진도독부에 참여하여 백제 재건을 기약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흑치상지가 항복한 것은 663년 10월에서 11월 사이였다. 그때 임존성은 백강구 전투 패배에도 불구하고 지수신(遲受信)이 부흥군을 이끌고 지키고 있었다. 그해 10월 21일 신라군이 임존성을 공격하다가 실패하여 퇴각하고, 당군이 공격에 나었다. 그런데 이 임존성을 함락시킨 장수가 다름 아닌 흑치상지와 그의 심복이었던 사타상여(沙咤相如)였다.

임존성이 함락되자 지수신은 고구려로 달아나고, 이로써 백제 부흥운동은 완전히 막을 내리고 말았다. 전쟁이 끝나자 흑치상지는 부여융을 따라 당나라로 건너갔다가 그 이듬해인 664년 초에 당나라 괴뢰정권이 수립될 때 다시 부여융을 따라 백제로 돌아와 웅진성주를 맡는다. 당나라가 신라를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로 삼아 문무대왕(文武大王)을 계림대도독으로, 백제 옛 땅은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로 삼아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임명했기 때문이다. 이는 형식상 신라와 옛 백제를 동등한 지위로 만들어 신라와 백제 유민 사이에 깊이 파인 감정의 골을 덮고 양국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한 당나라의 잔꾀였다.

어쨌든 흑치상지는 웅진성주로 있다가 672년에는 충무장군행대방주장사(忠武將軍行帶方主長使)로 임명되어 한동안 오늘의 전남 나주, 함평 지방에 파견되었다가 다시 좌영장군(左營將軍) 겸 웅진도독부사마(熊津都督府司馬)라는 명목상의 벼승을 받았고, 그 이듬해에 신라의 강공으로 웅진도독부가 해체되자 다시 당나라로 건너갔다. 이후 흑치상지는 당나라 장수로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다.

◆ 웅진도독부 해체 이후 당나라 장수로 활약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좌영군(左領軍) 원외장군(員外將軍)의 벼슬을 받은 흑치상지(黑齒常之)는 49세 되던 678년에 중서령(中書令)이며 하원도경략대사(河源道經略大使)인 이경현(李敬賢), 공부상서(工部商書) 유심례(劉審禮)와 더불어 토번(吐蕃) 공략전(攻略戰)에 나선다. 오늘날의 티베트인 토번은 607년에 통합되어 유례없는 강성을 보여 돌궐(突厥)과 더불어 당(唐)의 서역진출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세력이었다.

먼저 유심례가 선봉부대를 이끌고 토번 공격에 나섰으나 이경현은 토번의 군사들이 밀려온다는 말을 듣고는 겁을 먹고 낭패하여 달아났다. 진격하던 유심례는 지원군이 이어지지 않았으므로 토번군의 반격을 받아 군사를 거의 잃고 간신히 목숨을 건져 적의 포위망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흑치상지는 그러한 혼한 속에서 침착함을 잃지 않고 활로를 트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는 날랜 군사 5백명을 선발하여 결사대를 조직하고 앞장서서 토번군 진지를 야습(夜襲)하여 적병 수백명을 참살하거나 포로로 삼았다. 이로써 이경현도 가까스로 선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전투에서 흑치상지만이 홀로 전세를 역전시키는 산과 같은 무공(武功)을 세워 주목받았다. 승전(勝戰) 소식을 들은 당황(唐皇) 고종(高宗)은 흑치상지의 수훈(首勳)에 감탄하며 그를 좌무위장군과 검교좌우림군에 발탁하고 금 5백냥과 비단 5백필을 상으로 내렸다. 흑치상지는 하원도경락부사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다시금 토번 정벌이 실행되었는데, 이경현의 군대가 양비천(良非川)에 주둔하고 있는 찬파(贊婆)와 소화귀(素和貴)가 거느린 토번 군사 3만명과 접전(接戰)을 벌였으나 대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흑치상지는 정예 기마병 3천명을 거느리고 토번 진영에 대한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적병 2천여명을 참살하고 수만마리의 양과 말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찬파는 단기로 달아날 정도로 토번군의 완벽한 패배였다. 고종은 패전한 이경현을 파직하는 대신 흑치상지를 하원도경락대사로 삼고 비단 4백필을 상으로 내렸다. 그러나 흑치상지는 당나라 황제에게서 하사받은 상품을 모두 부하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은 단 한필도 집에 가져가지 않았다.

흑치상지 장군의 승승장구(乘勝長驅)는 이어졌다. 681년에 토번의 추장 찬파가 변경을 침입하여 청해(淸海)에 흑치상지는 기병 1만을 거느리고 한달음에 덮쳐서 격파하였다. 흑치상지는 창을 잡고 말을 달리며 전장을 좌충우돌(左衝右突), 쓰러뜨린 적장만도 수십명에 이르렀으며 양이나 말과 같은 가축과 갑수(甲首)를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이 노획하였다. 흑치상지의 승전(勝戰) 소식을 들은 고종은 조서(詔書)를 내려 그의 노고를 위로하고 전공(戰功)을 포상하여 좌응양위대장군, 연연도부대총관으로 승진시켰다. 흑치상지는 684년에는 좌무위대장군, 검교좌우림군으로 승진되었고, 686년에는 돌궐의 침공을 격퇴시킨 공으로 연연도대총관으로 승진했다. 또 그 이듬해에도 황하퇴(黃花堆)에서 돌궐의 지도자인 쿠틀룩 합한과 원진의 군대를 격파하여 연국공이란 작위와 식읍 3천호를 받고 우무위대장군 겸 신무도경락대사(神武道經略大使)로 임명되었다.

◆ 토번, 돌궐과의 전쟁에서 혁혁한 전공(戰功) 세워

흑치상지묘지명(黑齒常之墓誌銘)은 그의 빛나는 전공(戰功)을 이렇게 찬양했다.

'오랑캐의 난리가 깨끗이 평정되니 변방의 말이 살찌게 되었고, 중국이 태평성대(太平聖代)가 되니 오랑캐가 없어지게 되었다. 군사를 내니 칭송이 있고, 개선하여 돌아오니 노래가 생겼다.'

흑치상지 장군은 백제 부흥군을 이끌고 나당연합군과 싸울 때나 당나라 장수로서 변방 부족들과 싸울 때나 한결같이 걸출한 지략과 용맹으로써 발군의 전공을 세웠고, 또 진중에서도 언제나 경서를 두고 틈나는 대로 읽는 등 학문을 멀리하지 않았다. 또한 여자와 음악을 멀리함으로써 철저한 자기관리를 했고, 원만하고 대범한 성품에 청렴결백으로 모범이 되니 상하가 모두 그를 존경했다.

하지만 검은 함정이 그의 앞에 숨어 있을 줄을 어찌 알았으랴. 때는 그의 나이 58세가 되던 687년 당나라는 고종의 황후였던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지배하고 있었고, 흑치상지는 회원군 경락대사의 관직에 있었다. 이때 좌감문위중랑장 찬보벽(贊甫碧)과 합동작전으로 돌궐(突厥) 정벌전(征伐戰)을 펼쳤는데, 찬보벽이 전공을 독차지할 욕심으로 혼자 군사를 거느리고 적군을 공격하다가 전군이 전멸되는 참패를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결국 찬보벽은 처형되고, 흑치상지도 패전(敗戰)의 책임을 함께 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우응양장군 조회절(趙檜節)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무고를 당해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흑치상지를 무고한 주흥(周興)이란 자는 요즘 말로 치면 측천무후의 비밀경찰이었는데, 밀고자였을 뿐만 아니라 악랄한 고문자로도 악명을 떨치던 자였다.

◆ 모반사건에 연루, 옥중에서 억울하게 죽어

그렇게 해서 일세의 영웅 흑치상지는 끝내 옥중에서 죽음을 맞았으니 그대가 689년 10월 9일이라고 묘지명은 전한다. 당시 향년 60세였다.

그런데 그의 죽음이 처형인지 자살인지 불분명하다. 묘지명에는 교수형을 당한 것으로 나오고,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에는 스스로 목을 매 자살한 것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묘지명에는 그의 죽음을 두고 이렇게 썼다.

'영욕은 반드시 있는 법이고,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이다. 진실로 돌아가는 데 함께 한다면 어찌 부인의 손에서 목숨을 마치랴.'

이렇게 흑치상지가 누명을 쓰고 죽자 그의 사람됨을 아는 주위 사람 모두가 슬픔을 이기지 못했다. 흑치상지가 한을 품고 죽은 지 9년이 지난 698년 그의 장남 흑치준(黑齒俊)의 눈물겨운 신원의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보아 그의 억울함이 밝혀지고 좌옥금위대장군 벼슬이 추증되었다. 측천무후는 이런 교서를 내렸다고 그의 묘지명은 전한다.

'죽은 좌무위대장군(左武威大將軍) 검교좌우림위상주국(檢校左羽林衛上柱國) 연국공(燕國公) 흑치상지(黑齒常之)는 일찍이 어려서부터 지체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았고, 군무(軍務)를 많이 경험했다. 장수로서 군사일을 총괄하게 되어 비로소 공적을 널리 떨쳤다. 지난날에 뜬소문을 받아가지고 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은근한 분함을 머금고 목숨을 마쳤으나 의심받았던 죄는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근래에 조사해보니까 일찍이 모반했던 정황이 없었다. 생각해보건대 오로지 그러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진실로 크게 한탄스럽다. 마땅히 원통함을 풀어 주어서 무덤에 가 있는 혼이라도 위로해주어야겠다. 그래서 총애하는 표시로 관작을 더해 고인을 빛내주고자 하여 좌욱금위대장군(左玉妗衛大將軍)에 추증하고 훈봉(勳封)을 옛날과 같이 하였다.'

또 사후 10년째인 699년에는 측천무후가 흑치상지의 개장(改葬)을 허락하는 조칙을 내려 그의 묘는 낙양 북망산으로 이장되었다.

흑치상지 장군의 죽음은 그의 후배인 고선지(高仙芝)의 죽음과 비슷한 점이 있다. 두사람 모두 각각 백제와 고구려 왕가의 후예로서 나라를 잃은 뒤 당나라 장수가 되고, 빛나는 전공(戰功)을 세워 무위(武威)를 크게 떨쳤건만, 끝내 무고를 당해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이 그렇다.

참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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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식 '한민족 대외 정벌기' 청년정신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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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출처 : 한국사의 영웅과 열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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