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記)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동성왕(東城王) 10년(서기 488년), 위(魏)가 군사를 보내어 우리 나라를 침범했으나 아군에게 패배하였다.[東城王十年, 魏兵來伐, 爲我所敗]'
백제가 중국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화북 지역의 패자(覇者)였던 북위(北魏)의 침략을 물리친 이 전쟁을 삼국사기는 이렇게 짧은 문장으로 처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기사는 자치통감(資治通鑑) 제기(齊紀) 세조(世祖) 상지하(上之下) 영명(永明) 6년(서기 488년)조의 기록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북위(北魏)가 병력을 보내어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백제에게 패배했다. 백제는 진나라 때부터 요서(遼西), 진평(晉平) 2개 군(郡)을 차지하고 있었다.[永明六年, 魏遣兵擊百濟. 晉世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也]'
자치통감은 이렇게 요서군(遼西郡)과 진평군(晉平郡)이 백제의 영역이었다는 놀라운 기록을 전하고 있다. 이것은 그동안 한반도 서남부에만 국한되어 있었다고 알려진 백제가 중원 서부 지역까지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북위(北魏)가 백제(百濟)를 침공했다가 패배한 이 전쟁은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자치통감(資治通鑑)에만 기록된 것이 아니다. 남제서(南齊書) 제58권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이때 위(魏)의 오랑캐가 (다시) 기병 수십만을 발하여 백제 경내에 들어왔다. 백제 국왕 모대(牟大)가 장수(將帥) 사법명(沙法名), 찬수류(贊首流), 해례곤(解禮昆), 목간나(木干那)를 파견했는데, 이들이 백제군을 이끌고 적을 격퇴시켰다.[時歲 魏虜又發騎數十萬, 攻百濟入其界, 牟大遣將沙法名, 贊首流, 解禮昆, 木干那. 率衆襲擊大破之]'
이것은 경오년(庚午年) 즉, 490년의 전쟁으로 삼국사기와 자치통감에 기록된 488년의 전쟁이 있은 후 2년 뒤에 벌어진 사건이다. 수군도 아닌 기병이, 그것도 수십만의 위나라 군사가 백제에 쳐들어왔다면, 그것은 필시 중원 대륙 안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그렇다면 중원 대륙에 백제의 영토가 있었다는 뜻인데, 김부식(金富軾)을 중심으로 한 삼국사기 편찬자들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때문에 삼국사기 편찬자들은 490년에 벌어진 북위의 두번째 백제 침공을 잘못된 기록으로 보고 아예 삭제해 버렸다. 백제의 땅이 중원 대륙에 그것도 요서 지역에서 양자강(揚子江)에 이를 만큼 광활한 영토였다는 사실을 몰랐던 그들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처사였는지도 모른다.
삼국사기 편찬자들의 한정된 시각은 고스란히 현대 사학계에도 이어져 지금도 대다수의 역사학자들이 중국의 정사(正史)인 남제서(南齊書)에 기록된 이 전쟁을 역사적 사실이 아니며 잘못된 사료라고 해석하고 있으니,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형성된 반도사관(半島史觀)의 깊은 골은 백제의 대륙 역사를 무려 1300여년 동안 땅 속에 묻어버렸던 셈이다.
하지만 남제서는 당시의 일을 동성왕(東城王)이 건무(建武) 2년(서기 495년)에 남제(南齊) 명제(明帝)에게 올린 다음의 표문을 통해 잘 알려주고 있다.
"신(臣)은 예로부터 책봉을 받고 대대로 조정의 영예를 입으며, 분에 넘치게도 하사하신 부절(符節)과 부월(斧鉞)을 받아들고 여러 제후들을 극복하여 물리쳤습니다. 지난번 저근(姐瑾) 등이 나란히 관작을 제수받는 은총(恩寵)을 입은 것으로 신과 백성들이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지난 경오년(庚午年)에 험윤(獫狁)이 회개하지 않고 병력를 일으켜 깊숙이 핍박하여 들어왔습니다. 신이 사법명(沙法名)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맞아 토벌하매, 밤중에 불시에 공격하여 번개처럼 들이치니, 흉노(匈奴)의 선우(鮮于)가 당황하여 무너지는 것이 마치 바닷물에 쓸려 내려가는 것 같았습니다. 적이 패주하는 기회를 타고 추격하여 수급(首級)을 베니, 들녘은 엎어진 주검으로 붉게 물들었습니다.[僵屍丹野]"
동성왕의 표문은 이처럼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 때 쳐들어온 위나라의 군사들을 수십만 기병이라고 명시한 것은 남제서의 편찬자들이었고, 동성왕의 표문은 그저 '험윤이 병력을 일으켜' 라고 담담하게 표현하고 있다. 즉, 동성왕의 표문에서는 위군(魏軍)의 병력에 대해 부풀리지도 않았고, 상황을 과장하지도 않았다는 뜻이다.
남제서에 기록된 동성왕의 표문은 겨우 31년간 존속한 중국 남조(南朝)의 약소국인 남제(南齊)의 군주에게 백제 국왕이 신칭(臣稱)을 한 부분에 있어서 마치 백제를 남제의 신국(臣國)으로 폄하하고 미화한 오만불손(傲慢不遜)한 화이사관(華夷史官)적인 사필(史筆)이 문제시되지 않을 수 없지만, 이것은 명백히 백제가 중원 대륙에서 북위(北魏)와 전쟁을 벌여 승리한 사실을 증명하는 정사(正史)의 기록인 것이다.
표문에서 드러나는 또 하나의 사실은 이 때 북위의 백제 침공은 한 차례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표문에서 '험윤(獫狁)이 회개하지 않고 병력을 일으켜' 라는 부분과 '지난번 저근(姐瑾) 등이 관작을 제수받은 은총(恩寵)을 입은 것으로' 라는 부분이 그 점을 증명하고 있다. 전자는 험윤으로 표현된 북위가 이미 첫 침입에서 패배했는데도 반성하지 않고 또 침입을 감행했다는 뜻이며, 후자는 이 때 첫 침입을 막아낸 장수가 저근이었다는 사실을 명시하고 있다. 이는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記) 동성왕(東城王) 10년조의 전쟁 기사가 남제서(南齊書) 경오년(庚午年)의 기록과 중복되는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즉, 위나라의 백제에 대한 침공은 488년과 490년, 두 차례에 걸쳐 이뤄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중국의 사서(史書)에도 기록된 북위와 백제 간의 전쟁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지 않는 학자가 대부분이다. 설사, 실제 북위가 백제를 침공했다고 하더라도 수군을 이용해 한반도 서남부에 있던 백제를 공격한 것이지 절대 중원 대륙에서 벌어진 전쟁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많다. 그러나 전통적인 유목민족인 탁발씨 선비족(拓跋氏鮮卑族)이 세운 북위가 선박을 이용한 해상전(海上戰)으로 한반도의 백제를 침공할 수는 없는 일이다. 유목민이 세운 왕조를 보면 해상전보다는 기병전(騎兵戰)이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게다가 남제서(南齊書)는 북위가 수십만 기병으로 백제를 침공했다고 전하고 있다. 즉 백제와 북위 간의 전쟁은 육상전(陸上戰)이었으며 이 싸움은 중원 대륙에서 일어난 것이다.
북위가 한반도 서남부의 백제를 치려면 먼저 고구려의 영토를 통과해야 한다. 이것 역시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다. 당시 고구려는 동아시아의 패자(覇者)였으며 북위도 고구려의 강대한 국력에 꼼짝할 수 없었다. 일례로 고구려는 북위(北魏)에 황실의 기록을 보내라고 요구했는데 이는 천자(天子)가 제후(諸侯)에게 요구할 수 있는 행위였고, 북위는 고구려의 요구를 받아들여 고구려 측에 북위 황실의 사서(史書)를 바쳤다. 이것은 북위가 고구려보다 국력이 약했음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게다가 당시 국제정세를 볼 때 북위는 바다 건너에 있는 타국을 공격할 여력이 없었다. 당시 북위는 동으로는 고구려(高句麗), 서로는 토욕(吐谷), 남으로는 남조(南朝), 북으로는 유연(柔然)에 둘러쌓인 형국이었다. 북위는 고구려와는 친분관계를 유지했지만 나머지는 적대관계를 형성하고 있었으므로 사방이 온통 적에게 포위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무모하게 해상원정을 감행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북위와 백제 간의 전쟁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는 북위가 중원 대륙, 정확히 말하면 화북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아니 오히려 동쪽의 또 다른 위협세력인 백제를 제거하기 위해 대륙의 백제를 공격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므로 백제의 세력은 대륙에도 뻗어 있었고, 북위와 싸운 백제는 한반도 백제가 아닌 중원 대륙 백제인 것을 알 수 있다.
● 대방(帶方)은 어디에 있었는가?
백제의 대륙 진출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대방(帶方)의 위치에 대해 연구해보자.
당대(唐代)의 학자 이연수(李延壽)가 편찬한 북사(北史) 제94권 백제열전(百濟列傳)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온다.
'백제(百濟)라는 나라는 아마도 마한(馬韓)의 복속국이었을 것이며, 색리국(索離國)에서 나왔다. 그 왕이 순행을 나섰더니 시중드는 아이가 그 후에 임신을 하였는데 왕이 돌아와서 그녀를 죽이려 하였다. 시중드는 아이가 이르기를 "전에 하늘 위를 보니 큰 계란 같은 기운이 내려와 감응하였더니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하기에 왕이 그녀를 내버려 두었다. 후에 사내아이를 낳자 왕이 그를 돼지우리에 버렸더니 그에게 입깁을 불어넣어 죽지 않았으며, 뒤에 마구간으로 옮기니 역시 그렇게 하였다. 왕이 신령스럽게 여기고 명을 내려 그를 양육하게 하여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였다.
동명의 후손으로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신의와 믿음이 돈독하였다. 그는 처음에 대방(帶方)의 고지(故地)에 나라를 세웠다. 한나라의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가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니 마침내 동이(東夷)의 강국이 되었다.'
북사의 이 기록은 백제를 마한에서 나왔다고 했지만 그 내용을 살펴보면 전혀 딴판이다. 북사의 편찬자는 백제가 마한의 색리국(索離國)에서 나왔다고 하면서, 색리국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는 동부여(東扶餘)에서 일어난 주몽(朱蒙)의 탄생설화를 끌어들이고 있다. 즉, 이 기록의 첫 부분은 백제가 마한의 색리국에서 기반을 형성했다는 내용과 주몽의 탄생설화가 뒤엉켜 있는 것이다. 때문에 편찬자는 백제가 마한과 관계가 있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의 구체적인 내용은 전혀 몰랐음을 알 수 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630년경에 위징(魏徵) 등에 의해 편찬된 수서(隨書) 제81권 백제열전(百濟列傳)에도 나타난다. 하지만 수서에는 '백제의 선조는 고려국(高麗國)에서만 나왔다.'고만 쓰고 있고, 마한과 연관을 맺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 책에도 백제는 처음에 '대방(帶方) 옛 땅'에서 시작된 것으로 쓰고 있다. 남사(南史)에는 백제의 건국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백제는 그 선조인 동이(東夷)에 삼한국(三韓國)이 있었는데 그 첫재를 마한(馬韓)이라 하고 둘째를 진한(辰韓)이라 하며 셋째를 변한(弁韓)이라 하였다. 변한과 진한은 각기 열두 나라이며, 마한에는 쉰네 나라가 있었다. 큰 나라는 1만여 가구이며, 작은 나라는 수천 가구로서 총 10만여 호이니 백제가 그 중 하나이다. 후에 점차 강대해져 모든 작은 나라를 아울렀다. 그리고 그 나라는 본디 구려(句麗)와 함께 요동(遼東)의 동쪽 1천여리에 있었다가 진대(晉代)에 이미 구려(句麗)가 요동을 공략하여 가졌을 때 백제는 요서(遼西)와 진평(晉平) 두 군(郡)의 땅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스스로 백제군(百濟郡)을 두었다.'
이처럼 남사에는 백제와 대방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는데, 백제를 마한에서 나왔다고 규정짓고 있다.
남사(南史)와 북사(北史)가 동일인물인 이연수(李延壽)에 의해 편찬됐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 같은 기록의 차이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사항이다. 이연수가 백제에 대하여 남사와 북사에서 각각 다른 내용을 기재한 것은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의 남조와 북조가 백제에 대해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남조는 백제가 한반도의 삼한 소국 중 하나였다가 점차 삼한의 일부를 잠식하여 결국은 대륙까지 진출하였다고 보았고, 북조는 백제가 원래는 대방(帶方)의 옛 땅에서 시작하여 동이(東夷)의 강국으로 성장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연수는 남조와 북조의 이 같은 다른 기록 때문에 북사에서 이중적인 서술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남조와 북조의 기록을 모두 존중한다면 백제는 대방의 옛 땅에서도 건국되었고, 마한의 색리국(索離國)에서도 건국되었다는 설정이 가능하다. 백제의 건국은 대방의 옛 땅과 마한의 색리국에서 동시에 진행되었거나 또는 순차적으로 진행된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남조의 기록에서는 전혀 대방 옛 땅과 백제를 관련시키지 못한 것을 볼 때 대방 옛 땅에서의 건국이 마한에서의 건국보다 먼저 이뤄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대방 땅은 북조에 속한 땅이었기에 대방에서 일어난 일을 남조에서 모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라서 백제의 건국은 애초에 대방 옛 땅에서 이뤄졌다가 다시 마한의 색리국에서 또 한번 이뤄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백제의 최초 건국지인 대방 옛 땅의 위치는 어디인가?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우선 '대방 옛 땅'이라는 표현이 가지는 의미부터 파악할 필요가 있다.
대방(帶方) 옛 땅은 전한(前漢) 세종(世宗)이 서기전 108년에 위만조선(衛滿朝鮮)을 무너뜨리고 설치했다는 한사군(漢四郡)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세종이 설치했다는 한사군은 진번(眞番), 임둔(臨屯), 낙랑(樂浪), 현도군(玄菟郡)이다. 그런데 서기전 82년에 진번군은 낙랑군에 병합되고, 임둔군도 현도군에 폐합되었다. 그 후 낙랑군은 진번군 땅에 남부도위(南部都尉)를 설치했는데,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예맥(濊貊)의 토착세력이 강성해지자 낙랑의 남부도위는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2세기 말에 공손씨(公孫氏) 세력이 강성해지면서 낙랑의 남부도위 7현을 대방군(帶方郡)으로 삼는다. 따라서 '대방 옛 땅'은 바로 낙랑의 남부도위에 속한 진번 땅을 일컫는다.
그런데 학계 일각에서는 이 진번군 지역을 한반도의 황해도 일원에 설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2세기 말에서 3세기 초에 황하 동북부 일대를 장악했던 공손씨 세력이 황해도까지 세력을 뻗쳤다는 의미인데, 이는 얼토당토않은 소리다. 당시 한반도 북부는 고구려와 말갈(靺鞨)이 장악하고 있었고, 백제가 황해도 남쪽까지 진출해 있는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진번군(眞番郡)을 한반도에서 찾으려는 학자들은 당시 대방군이 황해도 지역에서 요동반도 쪽으로 밀려났다는 주장을 하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한사군이 한반도에 설치됐다는 주장을 합리화시키려는 억측일 뿐이다.
서진(西晉)의 진수(陳壽)가 지은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오환선비동이전(烏桓鮮卑東夷傳)에는 당시 대방군(帶方郡)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려주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倭 人은 대방(帶方)의 동남쪽 큰 바다 한가운데에 있으며, 산으로 이루어진 섬에 의지하여 나라와 읍락을 이루고 있다. 옛날에는 1백여국이 있었으며 한나라 때 예방하여 배알하는 자가 많았고, 지금은 사신과 통역인이 왕래하는 곳이 서른 나라이다.
군(郡)으로부터 왜(倭)에 이르려면 해안으로 물길을 따라 한국(韓國)을 지나고, 남쪽으로 가다가 동쪽으로 가다 보면 그 북쪽 해안인 구야한국(仇耶韓國)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7천리를 가다가 비로소 한차례 바다를 건너 1천여리를 가면 대마국(對馬國)에 이르게 된다.'
이 기록은 대방군에서 왜국에 이르는 길을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군(郡)이란 대방군을 일컫고, 거기서 출발하여 왜(倭)로 향했다는 것은 대방군이 삼국지의 저자 진수가 살았던 진(晉)의 영토에 속했다는 뜻이며, 진이 한반도를 장악한 적이 없기에 대방군은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대방군을 떠나 한국에 이르고, 다시 한국의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다시 동쪽에 이르면 구야한국(가덕도 근처)에 이르고, 다시 천리를 항해하면 대마도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 기록을 얼핏 보면 대방군이 요동반도에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해안을 따라 항해했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과정을 살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의 항로는 대방군을 떠나 고구려를 거치지 않고 곧장 한국(韓國)의 해안에 닿았으며, 한(韓)의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가다가 다시 동쪽으로 항해하여 구야한국(仇耶韓國)에 이르렀다. 당시 한국이라 함은 여러 한국으로 이뤄졌던 한반도 남쪽 지역을 통칭하는 것으로 백제 땅을 일컬으며, 구야한국은 김해를 중심으로 형성된 금관가야(金官加耶)를 일컫는다. 따라서 이 항로는 항해의 시작점이 요동반도가 아니라 산동반도였음을 말해준다. 즉, 그들은 산동반도를 출발하여 한반도 남부에 이르러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다시 동쪽으로 항해하여 구야한국에 이르렀고, 이 항해 거리를 총 7천리라고 했던 것이다(항해 거리가 7천리라고 표현한 것도 대방이 한반도에 있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당시 거리 개념으로 한반도의 황해도 지역에서 일본열도에 이르는 길을 아무리 길게 잡아도 3천리 이상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왜(倭)에 이르기 위한 항로를 대방군(帶方郡)에서 시작한 것은 이처럼 대방군이 산동반도에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대방군이 산동반도에 있지 않고 요동반도에 있었다면 그들은 대방군에서 출발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에 이르는 가장 짧은 항로는 산동반도를 출발해 황해를 건너는 것이기 때문이다(더구나 진수가 살았을 당시 요동반도는 고구려의 땅이었다.). 또 요동반도를 출발하여 왜에 이르고자 한다면 항해 시간이 긴 것은 물론이고 고구려의 간섭마저 받아야 한다. 하지만 산동반도에서는 고구려의 간섭 없이 곧바로 한국의 해안을 거쳐 왜국과 우호관계를 맺고 있던 가야에 이를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당시 위나라 사람들은 당연히 산동반도를 항해의 출발점으로 삼았을 것이다. 이는 위나라 사람들이 왜국으로 가기 위해 택했던 항로의 시작점인 대방군이 산동반도에 있었다는 뜻이 된다. 말하자면 대방군은 하수(河水; 黃河)의 남쪽인 하남 지역의 동쪽 지대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동쪽으로 바다를 끼고 있었다는 것이다. 대방이 이렇게 설정될 때 백제의 첫 도읍지가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이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도 성립될 수 있다.
● 백제의 대륙 진출 과정과 그 증거들
백제는 언제 대륙에 진출했으며, 어떤 과정을 거쳤을까? 백제의 땅이 대륙에도 있었다는 것은 비록 극소수이기는 하나 국내 사학계의 일부 학자들도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그 구체적인 성립 과정은 아직까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에 관련된 사료를 자세히 살펴보면 결코 수수께끼 정도로 치부할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대륙백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김부식을 비롯한 삼국사기 편찬자들은 백제의 대륙 영토를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중국 사서(史書)를 인용하는 과정에서 대륙백제에 관한 기사는 완전히 제외시켰고, 설사 인용했다 하더라도 자신들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편찬했다. 삼국사기 편찬자들의 이런 행동은 결국 백제사(百濟史)를 한반도 안에만 가둬두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오히려 중국의 사서들은 대륙백제의 존재를 확인시키고 있으며, 그 성립 과정과 시기를 명백히 기록하고 있다.
중국 사서에서 백제에 대한 언급이 최초로 나타나는 것은 송서(宋書) 제97권 이만열전(夷蠻列傳)이다. 송서에는 백제에 대한 기록을 이렇게 시작한다.
'백제국(百濟國)은 본래 고려(高麗; 高句麗)와 더불어 요동(遼東)의 동쪽 천여리에 함께 있었으며, 그 후 고려는 대략 요동에 있었는데, 백제는 대략 요서(遼西)에 있었고, 백제가 다스린 곳은 진평군(晉平郡) 진평현(晉平縣)이라 불렀다.[百濟國, 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 其後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晉平郡晉平縣.]'
요서(遼西)는 북경을 포함한 하북성(河北省), 하남성(河南省), 산서성(山西省) 등을 포괄하는데, 산서성의 옛이름이 진(晉)이었다.
삼국사기 편찬자들도 송서를 참고했을 터이고, 틀림없이 도입부의 이 기록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기록을 신뢰하지 않았다. 당시 그들의 상식으로는 백제가 요서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백제란 그저 한반도 서쪽 일대를 지배하고 있는 작은 나라에 불과했다. 그러니 중원 대륙의 요서 지역을 장악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비단 그들뿐 아니라 지금도 국내 역사학자 대부분은 백제의 요서 지배 사실에 의구심을 품고 있는 실정이다. 도대체 어떤 경로로 바다 건너 대륙의 요서 지역을 장악하여 다스렸다는 말인가? 진평군(晉平郡)이라는 구체적인 지명까지 나와 있는 것으로 봐선 백제가 요서 지역을 점령하여 다스린 것은 분명한데, 그 경로는 그저 수수께끼로만 남아 있는 것이다.
당(唐) 태종(太宗) 연간인 636년에 편찬된 양서(梁書)에는 조금 더 구체적인 기록이 나온다.
'백제는 본래 구려(句麗)와 더불어 요동(遼東)의 동쪽에 있었으나 진대(晉代)에 구려가 이미 요동을 공격하여 가지자, 백제 역시 요서군(遼西郡)과 진평군(晉平郡)의 땅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스스로 백제군(百濟郡)을 설치하였다.'
양서는 백제가 요서 지역을 차지한 시기를 진나라 때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고, 여기서는 진평군(晉平郡) 이외에 요서군(遼西郡)이라는 지명과 백제군(百濟郡)이라는 지명이 추가되었다.
양서에서 말하는 진나라는 사마염(司馬炎)이 266년에 건국한 진(晉)을 일컫는다. 진은 역사학계에서 편의상 서진(西晉)과 동진(東晉)으로 나뉘는데, 서진은 세조(世祖) 사마염이 창업(創業)한 국가이고 동진은 흉노족(匈奴族) 유연(劉淵)에 의해 서진이 몰락하자 세조(世祖)의 후예 사마예(司馬睿)가 동쪽으로 달아나 세운 나라를 일컫는다. 서진은 266년에서 316년까지 유지되었고, 동진은 317년에서 420년까지 유지되었는데, 백제가 요서 지역에 진출한 시기는 서진시대(西晉時代)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記)에는 298년 9월에 한(漢)이 맥인(貊人)을 거느리고 침략하자 책계왕(責稽王)이 군사를 거느리고 방어전(防禦戰)을 펼치던 중 전사했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한나라는 흉노(匈奴)의 귀족 유연의 세력을 일컫는다. 유연(劉淵)은 이 무렵 서진의 세력이 약화되자,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다가 304년에 한(漢)이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세웠다. 이 한나라는 원래 평양(지금의 산서성 임분시 서남쪽)에 도읍했다가 나중에 장안으로 천도하여 국호를 조(趙)로 고쳤는데, 이를 중국 역사학계에서는 전조(前趙)로 부른다.
물론 한이 침입한 백제 땅은 한반도가 아니라 중원 대륙이었다. 따라서 백제가 요서 지역을 장악한 시기는 서진이 세워진 266년에서 한의 침입으로 책계왕이 사망한 298년 사이로 한정된다.
그런데 책계왕의 부인이 대방왕(帶方王)의 딸 보과(寶菓)였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책계왕 즉위년인 286년 이전에 대방이 백제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제가 산동성 아래 위치한 대방을 세력권 아래 뒀다는 것은 이미 그때 백제가 요서 지역에 진출해 있었다는 의미다. 즉, 백제는 고이왕(古爾王) 연간에 이미 대륙에 진출하여 요서 지역을 장악하고, 진평군(晉平郡)과 요서군(遼西郡)을 합쳐 백제군(百濟郡)으로 불렀으며 대방왕은 그런 백제의 막강한 힘에 의지할 요량으로 딸을 백제 태자에게 내줬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백제는 언제부터 대륙에 진출했을까? 246년 8월에 위나라의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串丘儉)이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柳武), 대방태수(帶方太守) 긍준(肯俊)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자 고이왕(古爾王)은 그 틈을 이용하여 좌장(左將) 진충(眞忠)으로 하여금 낙랑의 변방을 공격하도록 하여 그 주민들을 잡아오는 사건이 있었는데, 백제의 대륙 진출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중국 측 기록은 진인(晉人) 진수(陳壽)가 쓴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오환선비동이전(烏桓鮮卑東夷傳) 한(韓)편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부종사 오림(吳臨)은 낙랑(樂浪)이 본래 한국(韓國)을 통치하였다고 하면서 진한(辰韓)의 여덟 나라를 분할하여 낙랑에게 줘버렸는데, 이 일을 벼슬아치가 통역하여 전하다가 잘못 전해진 부분이 있자, 신지(臣智)가 한(韓)의 백성들을 격분시켜 대방군(帶方郡)의 기리영읍을 공격하였다. 이 때에 태수 긍준(肯俊)과 낙랑태수 유무(柳武)가 병사를 일으켜 정벌했는데, 긍준은 전사하였으나 두 군이 마침내 한을 멸하였다.'
삼국지의 이 기록은 마한에 관한 것이다. 마한은 이미 그때 멸망하고 없었다. 하지만 중국에서 여전히 백제를 마한으로 알고 있던 때였다. 때문에 백제 국왕을 마한의 신지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마한의 신지로 표현된 사람은 다름 아닌 고이왕이었고, 기리영을 공격하여 긍준을 죽인 군사들은 고이왕이 보낸 진충의 군대였다.
고이왕이 진충을 시켜 대방을 공격하게 한 것은 낙랑태수가 위나라 부종사의 말을 빌미로 백제에 속한 진한 땅의 영유권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 기사에서 낙랑군과 대방군이 합쳐서 한(韓)을 멸하였다고 하는 내용은 조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진수의 삼국지는 위나라 중심의 역사관을 가지고 쓴 책인데, 당시 백제가 낙랑과 대방을 장악한 내용이 그대로 남을 경우 위나라 땅을 승계한 진나라에 매우 불리하게 작용할 것을 염려하여 진수가 고의로 조작했다는 뜻이다. 서진 시대에 이미 백제가 대륙에 진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진서(晉書)에 백제(百濟)편은 없고 이미 망한 나라인 마한(馬韓)편만 있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이 때 백제의 세력은 낙랑과 대방 세력에 의해 패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물리치고 대방을 장악했을 것이다. 그 때문에 대방에서는 불모로 딸을 백제에 시집보내야만 했던 것이다. 즉, 백제는 이 때 대방을 장악하여 대륙 진출의 근거지로 삼고 후에 요서군(遼西郡)과 진평군(晉平郡)을 차지하여 대륙백제를 일궜다는 뜻이다.
중국이 백제라는 나라를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백제가 대륙에 영토를 개척한 서진(西晉) 이후부터였다. 그 전까지 중국에선 한반도 중부 이남을 삼한(三韓)의 땅으로 인식했고, 때문에 백재가 대륙에 진출하기 전에는 삼한의 맹주인 마한과 마한의 중심국인 목지국(目支國)에 의해 그 땅이 다스려지고 있다고 믿었다. 말하자면 백제가 처음 대륙에 진출할 때가지만 해도 중국인들은 백제를 마한으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송서(宋書)와 남제서(南濟書), 위서(魏書), 주서(周書)에 백제(百濟)편은 있으나 신라(新羅)편은 없는 것도 당시에 중국은 신라를 진한의 한 소국으로 인식한 반면, 백제는 대륙에 진출한 비교적 큰 나라로 보았기 때문이다. 남사(南史)에서는 신라의 위치를 '백제의 동남쪽 5천여리에 있다.' 고 쓰고 있는데, 이는 백제의 대륙 영토를 중심으로 서술한 것이다. 5천리라는 개념은 백제를 대륙에 설정하지 않고는 나올수 없는 수치인 까닭이다.
그렇다면 고이왕(古爾王)이 개척한 대륙백제의 정확한 위치는 어디일까? 송서(宋書)와 양서(梁書)에서는 대륙백제의 위치를 요서 지역이라고 전하고 있는데, 요서 지역은 요수 서쪽 일대를 통칭하는 것이므로 그 범위가 매우 넓다. 때문에 요서 지역이라는 표현만으로는 대륙백제의 위치를 정확히 알기 힘들다.
북위(北魏)의 역사를 다룬 위서(魏書)는 '백제는 북쪽으로 고구려와 1천리 떨어져 있으며, 소해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백성들은 토착생활을 하며, 땅은 매우 낮고 습기가 많기에 거의 모두 산에 기거한다.'고 하여 대륙백제의 위치를 좀더 정확하게 설명해준다.
북위는 386년에 창업되어 528년에 망한 나라로 한때 백제와 직접 전쟁을 치른 나라이기도 하다. 때문에 북위의 기록을 바탕으로 형성된 위서는 당시의 영토 상황을 가장 정확하게 알려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위서의 기록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이 맞닿아 있지 않았으며, 그것도 1천리나 떨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백제의 위치를 소해의 남쪽이라고 구체적으로 쓰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소해는 발해를 의미한다. 즉, 대륙백제는 요서 지역으로서 고구려 국경과 1천리 이상 떨어진 발해 남쪽 일대에 형성됐다는 뜻이다.
이어지는 기후와 거주 지역에 대한 설명은 그 위치를 명백히 증명하고 있다. 땅은 매우 낮고 습기가 많다는 지형과 기후에 대한 설명은 발해 남쪽의 지형과 기후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발해(渤海)는 요동반도와 산동반도로 둘러싸인 내해로 '안개 바다'라는 뜻인데, 지대가 낮고 깊은 만이 형성되어 있는 까닭에 늘 안개가 끼어 있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면적은 총 7만 7천 제곱킬로미터이고,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뉜다. 서부는 발해만, 북쪽은 요동만, 남부는 내주만, 가운데는 발해중앙분지이다. 발해는 3면이 육지로 둘러싸여 있어 대륙의 영향을 심하게 받아 수온의 연 변화가 크고, 황하를 비롯한 난하, 요하, 해하 등의 거대 하천들이 모두 흘러드는 곳이라 습기가 늘 많은 곳이다.
발해 남쪽은 내주만과 산동반도 지역으로 지표면은 장기간 침식을 받아 대부분이 구릉지이고, 아주 일부만 1천 미터 이상의 높은 봉우리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주로 구릉지에 기거하고, 농작물도 구릉지에 적합한 사과와 배를 대량 생산한다. 이 곳의 수목으로는 구릉산지에서 잘 자라는 참나무가 가장 많은데, 이것은 멧누에인 작잠의 사료로 쓰인다. 이 곳의 연 강수량은 6백 50에서 9백 50 밀리미터 사이로, 다른 화북 지역 강수량보다 2백 밀리미터 이상 많다.
이 곳 사람들이 발해만 주변의 저평원 지대에 기거하지 않고 산간 지역인 구릉지에서 생활하는 또 다른 이유는 평원 지역이 모두 염화저평원이기 때문이다. 이 곳에서는 해수가 들어온 후 조수가 빠지지 못해 해수가 증발되고 지하수 염분 농도가 증가되어 고등식물이 번식할 수가 없다. 산동성(山東省), 하북성(河北省), 강소성(江蘇省) 지역이 여기에 해당한다.
열거한 사실들은 위서(魏書)의 '땅은 매우 낮고 습기가 많기에 거의 모두 산에 기거한다.'는 기록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즉, 대륙백제는 발해 남쪽의 산동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가, 후에 세력이 팽창되면서 하북성과 강소성 지역으로 확대되었다는 뜻이다.
● 왜국에서 돌아와 왕위에 오르는 모대(牟大)
475년 9월 고구려의 장수태왕(長壽太王)이 군사 3만여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급습하여 순식간에 한강 이북의 땅을 점령하고 한성(漢城)을 포위하였다. 개로왕(蓋鹵王)은 최후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성을 빠져나와 달아나려 했으나 재증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古伊萬年)에게 사로잡혀 장수태왕이 머물고 있는 아차성(阿且城)으로 끌려갔다.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은 원래 백제인이었으나 비유왕(毗有王)을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백제 관군에게 패배하게 되자 고구려로 도망친 자들이었다. 개로왕은 포박된 채 장수태왕 앞에서 치죄(治罪)를 당하고 斬首刑을 받았다.
고구려의 침공으로 비참하게 죽음을 당한 개로왕의 뒤를 이어 문주왕(文周王)이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三國史記)는 문주왕을 개로왕의 아들이라 기록하고 있으나 그가 개로왕(蓋鹵王)대에 재상격인 상좌평(上佐平)의 직위에 있었기 때문에 개로왕의 아우라고 기록한 일본서기(日本書紀)의 문헌이 더 정확하다고 판단된다. 전지왕(腆支王)대에 처음으로 상좌평이란 관직이 생긴 이래 왕자나 태자가 상좌평에 앉은 예는 없었고, 현실적으로 왕자가 재상에 오르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도읍을 웅진성(熊津城)으로 옮긴 이후 백제 왕실은 일대 몰락의 위기에 몰려 있었다. 백성들은 이미 부여씨(扶餘氏) 왕실에 대한 믿음을 저버렸고, 조정 대신들 역시 왕실을 깔보고 있었다. 특히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외척 해씨(解氏) 가문은 왕권을 능가하는 힘을 행사하며 기강을 문란하게 했다. 거기에다 곳곳에서 도적이 일어나 설쳐댔고, 대신들 중에는 도적과 결탁하여 사익을 챙기는 자도 있었다.
476년 8월, 해씨 세력의 핵심인 해구(解仇)가 병관좌평(兵官佐平)에 임명되면서부터 왕권은 한층 유명무실해지고, 권력은 모두 해구에게 집중되었다. 문주왕은 왜국에 있다가 돌아온 아우 곤지(昆支)를 내신좌평(內臣佐平)에 임명해 해씨 세력의 독주를 견제하고 맏아들 임걸(任乞)을 태자에 책봉해 국가 기강을 바로잡으려 했다.
그러나 해씨 세력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내신좌평에 오른 곤지가 조정을 추스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역부족이었다. 곤지는 결국 해구와의 권력 다툼에서 져서 477년 7월에 살해되고 만다. 문주왕은 이제 허수아비나 다름없었지만, 해구에게는 여전히 문주왕이 위험스런 존재였다. 문주왕은 어떻게 해서든 왕권 회복을 위해 노력했을 것이고, 때문에 해구를 제거할 방도를 모색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제거된 쪽은 문주왕(文周王)이었다. 477년 9월에 문주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사냥터 근처에서 하루를 묵게 되자, 해구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도적들을 시켜 문주왕을 살해하도록 함으로써 권력을 독식해 버렸던 것이다.
문주왕이 죽고 태자 임걸(任乞)이 삼근왕(三斤王)으로 즉위했지만, 그는 세상 물정 모르는 13세의 어린 아이에 불과했다. 해구가 군권(軍權)과 행정권(行政權)을 모두 장악했기 때문에 왕권은 더욱 미약해졌다. 그러나 모든 권력이 해씨 가문에 집중되자 다른 귀족들의 반발이 일어났다. 그것은 유력한 호족 세력으로 한때 가장 힘 있는 외척 중의 하나였던 진씨(眞氏) 가문에게는 호재가 아닐 수 없었다.
진씨 세력은 고이왕(古爾王)대에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하여 아신왕(阿莘王)대까지 약 160년간 유력한 외척으로서 백제 조정을 장악했었다. 하지만 전지왕(腆支王)대에 몰락하여 해씨 세력에게 권좌를 내주고 정권의 뒷면으로 사라졌는데, 마침내 과거의 영화(榮華)를 되찾을 기회를 맞은 것이다.
해씨(解氏) 가문이 정권을 주도하고 있던 중에 개로왕이 죽어 한성이 몰락했고, 그 이후에 해구가 정권을 장악하고 내신좌평 곤지와 문주왕을 살해한 뒤 어린 임금 삼근왕을 허수아비로 앉혀놓자, 백성들과 여타의 귀족들은 해씨 세력에게서 등을 돌린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488년 2월에 진씨 가문의 거두인 좌평(佐平) 진남(眞男)이 군사 2천여명을 거느리고 궁성을 장악했고, 다급해진 해구는 은솔(恩率) 연신(燕信)과 함께 백강 북쪽으,로 달아나 대두성(大豆城)에 거점을 형성하고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진씨 세력 쪽으로 기울어진 상태였다. 진남은 덕솔(德率) 진로(眞瀘)가 거느린 정예병 5백명을 앞세워 대두성을 함락시키고 해구를 죽이는데 성공했다. 또한 해구 편에 섰던 연신은 패색이 짙어지자 고구려로 달아났고, 그의 처자들은 체포되어 웅진 저잣거리에서 斬首刑에 처해졌다.
어린 삼근왕(三斤王)은 이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두려움에 떨며 구경만 해야 했다.
정변(政變)을 성공시킨 진남은 무능한 삼근왕에게 왕위를 맡길 수 없다고 생각하고, 새로운 임금을 추대하려고 했다. 그가 선택한 인물은 왜국에 있는 곤지(昆支)의 맏아들 모대(牟大)였다. 진남은 삼근왕이 변란 중에 죽었으니 새 국왕으로 옹립할 모대를 백제로 보내달라고 왜국에 통보했을 것이다. 왜국의 웅략왕(雄略王)은 군사 5백명으로 모대를 호위토록 하여 백제로 보냈다.
그런데 모대가 막상 백제 땅에 도착해보니, 죽었다던 삼근왕이 살아 있었으므로 어지간히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이미 삼근왕은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마당이었고, 정권은 자신을 추대한 진씨 일가가 장악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엄연히 국왕이 있는데 자신이 왕위에 오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삼근왕(三斤王)이 479년 11월 재위 2년여만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삼근왕은 그때 겨우 15세의 소년이었기에 자연사(自然死)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했다. 게다가 삼근왕은 모대에겐 사촌동생이었다. 힘으로 내쫓자니 백성들의 눈을 의식해야 하고, 그대로 두면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 또 폐위한다손 치더라도 살려둔다면 모반의 빌미가 될 소지가 있고, 죽이자니 주변의 비판이 염려스런 처지였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모대는 왕위에 올라야 했고, 삼근왕은 죽어야 했다. 비정한 일이지만 쫓아낸 국왕을 살려둔다는 것은 반역의 불씨를 남겨두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진씨 세력과 모대(牟大)가 선택한 방법은 무엇일까?
똑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유사한 상황이 조선왕조사(朝鮮王朝史)에 보인다.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조카 단종(端宗)을 밀어내고, 왕위를 차지하는 과정이 그것이다. 수양대군은 먼저 어린 단종의 측근들을 모두 죽이거나 유배 보내 단종을 위협하였고, 수하들을 동원하여 회유와 압력을 가하여 단종이 두려움에 질려 스스로 상왕(上王)으로 물러앉도록 만든다. 이때 수양대군 일파는 단종이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나겠다는 공포를 하고, 수양대군은 세번이나 왕위를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형태를 연출했다.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뒤에 집현전(集賢殿) 학사 출신인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에 의해 계획된 단종복위운동(端宗復位運動)이 적발된다. 정확하게 주모자가 누군지도 모르는 것은 물론이고, 단지 논의만 됐을 뿐 미수에 그친 이 사건과 단종은 전혀 무관했으나, 단종은 이 일로 상왕에서 쫓겨나 왕자로 강등된 뒤 유배된다. 유배 후에는 다시 수양대군의 동생 금성대군(錦城大君)에 의해 단종복위운동(端宗復位運動) 계획이 이뤄졌고, 이것이 적발되면서 단종은 비운의 최후를 맞이한다.
삼근왕이 제거되는 상황도 이와 유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일단 삼근왕을 상왕이나 그와 비슷한 위치로 밀어낸 다음, 반란 계획을 빌미로 유배시키고, 다시 또 복위 사건을 조작하여 죽였을 것이다.
동성왕(東城王)의 치세는 이처럼 삼근왕(三斤王)이라는 어리고 불쌍한 인간을 죽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 동성왕(東城王)의 강단 있는 정치와 북위(北魏)와의 전쟁.
동성왕은 482년에 자신의 즉위에 결정적 공로를 세웠음이 분명한 진로(眞瀘)를 병관좌평(兵官佐平)에 임명했는데, 기록에 나오지는 않지만 진남(眞男)은 상좌평(上佐平)으로 승진된 듯하다. 진로는 그로부터 동성왕(東城王) 재위 19년까지 약 15년 동안 병관좌평에 머무르면서 군권(軍權)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 대가지는 진씨 가문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 진씨 이외에도 조정의 중추 세력으로 등장한 가문이 있었는데, 이들은 사씨(沙氏), 백씨(白氏), 연씨(燕氏) 등이다.
수서(隨書) 백제전(百濟傳)에는 "(백제에는) 큰 성씨로 여덟 씨족이 있는데, 사씨(沙氏), 연씨(燕氏), 협씨(協氏), 해씨(解氏), 진씨(眞氏), 목씨(木氏), 국씨(國氏), 백씨(白氏) 등이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사씨와 백씨, 연씨 등은 동성왕(東城王)대를 전후하여 성장한 성씨이다. 해씨(解氏)와 연씨(燕氏)는 온조 일행이 망명해올때 함께 온 부여족(夫餘族) 출신인데, 해씨는 온조왕(溫祚王)의 본가 쪽 성씨이고, 연씨(燕氏)는 외가 쪽 성씨이다. 협씨(協氏), 진씨(眞氏), 백씨(白氏), 사씨(沙氏) 등은 마한(馬韓) 본토배기일 것이며, 목씨(木氏)나 국씨(國氏) 등은 왜국에서 건너온 성씨인 듯하다. 그런데 동성왕 19년에 진로가 죽은 뒤로 삼국사기에 진씨 일족의 이름이 전혀 거명되지 않은 것은 동성왕 이후에 진씨 가문이 몰락했음을 의미한다. 진로의 후임으로 연돌(燕乭)을 병관좌평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통해 이 무렵부터 동성왕이 진씨 일족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성왕은 즉위 이후 줄곧 백제의 옛 명성을 되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 때문에 여러번 전쟁을 치러야 했다. 재위 4년 9월에 말갈(靺鞨)이 한산성(漢山城)을 습격하여 함락시키고, 백성 3백여호를 포로로 잡아 돌아간 사건이 있었다. 당시 백제는 정치와 군사가 모두 불안한 상태였기에 말갈을 반격할 힘이 없었다. 때문에 동성왕은 이듬해 봄에 직접 한산성으로 가서 열흘 동안 머무르며 군사와 백성을 안정시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 사건이 있은 뒤로 동성왕은 궁실을 증수하고 성곽을 보수함으로써 외침(外侵)에 대비했는데, 그 무렵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다. 탁발씨(拓跋氏) 선비족(鮮卑族)이 세운 북위(北魏)와 마찰을 일으켜 전쟁으로 비화되었던 것이다.
백제가 북위와 전쟁을 벌이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어느 사서도 명확히 밝히고 있지 않지만, 당시 정황을 분석해보면 그 내막을 대충 알아낼 수 있다. 동성왕(東城王)은 즉위 후 줄곧 백제의 옛 영광을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부심했을 것이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잃었던 땅을 회복해야 한다는 지론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백제가 당시 영토 회복을 강력히 원했던 곳은 역시 대방(帶方) 지역의 대륙 영토였다. 한반도에서도 한강 북쪽 땅 일부를 고구려에 빼앗기긴 했지만, 그것은 그다지 넓지 않았다. 하지만 백제의 대륙 영토는 발해와 황해의 해안선을 따라 요서 지역에서 양자강에 이르는 광활한 땅이었다. 고이왕(古爾王)이 대륙을 개척한 이래, 근초고왕(近肖古王)대를 거치면서 크게 확대된 백제의 땅은 아신왕(阿辛王)대에 고구려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에게 대폭 빼앗겼고, 다시 개로왕(蓋鹵王)대에 장수태왕(長壽太王)의 공격으로 한성(漢城)이 함락되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영토마저도 영향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동성왕은 어떻게 해서든지 잃었던 대륙 영토를 회복하는 것이 옛 영화를 되찾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하고, 여러 모로 그것의 실현을 강구했을 법하다. 그런데 당시 대륙백제의 옛 영토는 거의 북위가 소유하고 있었다. 때문에 백제는 북위에게 그 영토의 일부만이라도 돌려달라고 했을 공산이 크며, 북위는 당연히 어림없는 일이라고 일축했을 것이다. 이에 백제는 486년 3월에 북위의 라이벌인 남제(南齊)에 내법좌평(內法佐平) 사약사(沙若思)를 사신으로 보내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백제가 남제와 결탁하여 대방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아가서는 요서 지역의 옛 땅을 회복하려 하자, 북위는 무력(武力)으로 백제를 응징하려 했다. 그래서 옛 대방(帶方) 땅에서 백제를 몰아내기 위해 군사를 동원한 것이었다.
488년 북위(北魏)의 군사들이 쳐들어오자, 동성왕(東城王)은 저근(姐瑾), 양무(楊茂) 등의 장수를 보내어 방어전(防禦戰)을 펼치게 한 끝에 적군을 격퇴시켰다. 북위는 490년에 수십만 기병을 보내 다시 백제를 공격했으나, 사법명(沙法名), 목간나(木干那) 등 백제 장수들의 전술에 말려 참담한 패배를 안고 퇴각해야만 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백제의 힘은 막강해졌다. 동성왕은 493년에 신라에 사신을 보내 혼인할 왕녀를 요청했다. 이미 정비와 여러 후비를 거느리고 있던 상황에서 다른 나라의 왕녀를 요청했다는 것은 그만큼 백제의 힘이 강성해졌다는 뜻인데, 신라도 그 점을 인정하여 이찬(伊贊) 비지(比智)의 딸을 동성왕에게 시집보냈다.
494년에는 신라의 군사들이 고구려의 살수(薩水)까지 진격하여 한바탕 싸움을 벌였는데, 이 전투에서 신라군이 패배하여 견아성(犬牙城)으로 퇴각, 고구려군에게 포위되어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 때 동성왕은 군사 3천여명을 파병하여 신라군을 구원하게 했다. 이듬해에는 고구려가 백제의 치양성(雉壤城)을 공격하자 신라군의 도움으로 고구려군을 막아냈다.
이렇듯 안팎으로 힘을 과시한 동성왕은 495년에 남제(南齊)에 표문을 보내 북위(北魏)와의 전쟁에서 전공(戰功)을 세운 장수들에게 벼슬을 내려줄 것을 청했다. 사법명을 포함한 백제 장수들은 북위의 침공을 물리친 뒤에 대륙의 옛 땅을 상당부분 회복하여 다스리고 있었는데, 남제의 황제가 그들에게 벼슬을 내려 그 곳이 백제 땅임을 확인시켜 달라는 요청이었다.
"지금 나라가 고요하고 평온한 것은 사법명(沙法名) 등의 책략이 결실을 맺은 것이니, 그 공훈(功勳)을 찾아 마땅히 기리고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사법명을 행정로장군(行征虜將軍) 매라왕(邁羅王)으로 임시하고, 찬수류(贊首流)를 행안국장군(行安國將軍) 벽중왕(辟中王)으로 삼고, 해례곤(解禮昆)을 행무위장군(行武威將軍) 불중후(弗中候)으로 삼으며, 목간나(木干那)는 앞서 군공(軍功)이 있는데다 또한 누선을 쳐 빼앗았으니 행광위장군(行廣威將軍) 면중후(面中候)로 삼았습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천자(天子)의 은혜로 특별히 가엾게 여기시고 청을 들어 제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신(臣)이 보낸 행용양장군(行龍驤將軍) 낙랑태수(樂浪太守) 겸 장사(長史) 신(臣) 모유(慕遺)와 행건무장군(行建武將軍) 성양태수(城陽太守) 겸 사마(司馬) 신(臣) 왕무(王茂) 및 겸 참군(參軍) 행진무장군(行振武將軍) 조선태수(朝鮮太守) 신(臣) 장새(張塞) 그리고 행양무장군(行梁武將軍) 진명(眞銘) 등은 관직에 있으면서 사사로움을 잊고 오로지 임무를 공변되게 하며,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치고 어려움을 이행함에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이제 신(臣)의 사신으로 임명함에 거듭되는 험난을 무릅쓰고 다니며 지극한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진실로 마땅히 관작(官爵)을 올려줘야 함에 각기 행(行)으로 삼아 임시(任施)합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조정에서 특별히 (정식으로) 관작을 제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남제(南齊) 명제(明帝)는 동성왕(東城王)의 요청을 받아들여 사법명(沙法名), 목간나(木干那) 등에게 왕(王) 또는 태수(太守), 장군(將軍) 등의 작호를 내렸다.
남제서(南齊書)에 기록된 동성왕의 표문에서 중요한 사실을 또 하나 일깨우고 있는데, 그것은 관작(官爵)에 포함된 지명들이 가지는 의미이다. 표문에서 동성왕은 행건위장군(行建威將軍) 광양태수(廣陽太守) 겸 장사(長史)로 있던 고달(高達)을 행용양장군(行龍驤將軍) 대방태수(帶方太守)로, 행건위장군(行建威將軍) 조선태수(朝鮮太守) 겸 사마(司馬)에 있던 양무(楊茂)를 광릉태수(廣陵太守)로, 행선위장군(行宣威將軍) 겸 참군(參軍)인 회매(會邁)를 청하태수(淸河太守)로 임명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또 모유(慕遺)의 관작에 낙랑태수(樂浪太守), 왕무(王茂)의 관작에 성양태수(城陽太守) 등의 호칭이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 보이는 광양(廣陽), 광릉(廣陵), 대방(帶方), 조선(朝鮮), 청하(淸河), 낙랑(樂浪), 성양(城陽) 등의 지명은 어디에 있는 땅인가? 이미 설명했듯이 낙랑은 하북성 발해 연안에, 대방은 산동반도와 그 남쪽에 비정한 바 있으므로, 이 지명들은 모두 중원 대륙, 그것도 요서 지방에서 양자강에 이르는 중국 동해안 지역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 일곱개의 지명은 백제가 영유권을 행사하던 대륙백제의 땅이라는 뜻이다.
동성왕이 남제에 보낸 표문, 즉 남제서(南齊書)의 기록을 보면 이 때 백제가 장악한 지역이 관직과 함께 기록되어 있다. 그 지역들을 열거하면 광양(廣陽), 조선(朝鮮), 낙랑(樂浪), 대방(帶方), 광릉(廣陵), 청하(淸河), 성양(城陽) 등이다. 또 송서(宋書)에는 백제 비유왕(毗有王)이 대사(大使) 풍야부(馮野夫)를 서하태수(西河太守)에 임명한다는 내용이 보인다. 남제서와 송서에 나타난 지명들이 구체적으로 어디를 가리키는지 알 수 없으나, 짐작하건대 대방은 지금의 산동 지역, 낙랑은 그 북쪽, 조선은 낙랑 북쪽의 요서 지역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서하, 성양, 광릉, 광양, 청하 등은 강소성 지역에 자리한 백제 땅으로 서하는 회수 주변, 광릉과 광양과 성양은 양자강 남북의 양주와 상주 일대, 청하는 양주 북쪽의 청강 지역을 일컫는 듯하다. 중국 산동성(山東省)에 현재에도 백제(百濟)라는 지명이 남아있는 것으로 볼 때, 대륙백제는 단순한 가설(假說)로 치부할 수 없음을 말해준다.
표문에서는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이 발견되는데, 그것은 면중왕(面中王), 도한왕(都漢王), 아착왕(阿錯王), 매라왕(邁羅王), 벽중왕(辟中王) 등의 작호가 보인다는 점이다. 백제의 신하에게 남제의 황제가 왕(王)의 관작(官爵)을 내린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동성왕에게는 백제왕(百濟王)의 작호가 내려졌는데, 굳이 사법명(沙法名)과 찬수류(贊首流), 저근(姐瑾), 여력(餘歷), 여고(餘古) 등에게 왕의 칭호를 내린 까닭은 무엇인가? 동성왕이 요구한 것으로 봐서, 그것은 백제에서 꼭 필요한 조치였던 것은 분명하다.
짐작하건대, 동성왕(東城王)의 이런 요구는 백제의 대륙 영토 지배를 원활하게 하기 위한 조치였을 것이다. 왕의 관작을 받은 이들은 대륙백제를 나눠 다스리는 총독 같은 역할을 하고, 해례곤(解禮昆)과 목간나(木干那), 여고(餘古) 등은 불중후(弗中候)와 면중후(面中候), 불사후(弗斯侯)로서 그들을 보좌하고 낙랑, 조선, 성양, 광릉, 대방, 광양의 태수들이 그들 아래에 있으면서 대륙백제의 각 지역 행정을 맡았을 것이다. 그들에게 남제의 황제가 내린 관작이 필요했던 것도 대륙에서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북위의 침공을 물리치고 대륙백제의 고토를 회복한 장수들은 동성왕(東城王)대의 대륙백제를 다스리는 총독으로서, 군왕과 같은 역할을 했다는 뜻이다.
이렇듯 백제는 두차례에 걸친 위나라와의 전쟁을 통해 대륙 영토의 상당 부분을 회복하고, 국제 무대에서도 그 영유권을 인정받았던 것이다.
● 귀족들과의 불화로 백가(苩可)에게 살해되다.
동성왕(東城王)은 재위 20년에 탐라(耽羅)에서 공납과 조세를 바치지 않자 직접 군대를 이끌고 무진주로 향했다. 탐라에서 그 소식을 듣고 즉시 사신을 보내 사죄했다. 진로(眞瀘)의 죽음으로 왕권이 강화된 상태에서 군왕의 위엄을 보이고자 군사적 시위를 결행했던 동성왕은 이 때부터 사치스런 면모를 드러내며 거만한 행동을 일삼았다. 499년 여름에는 큰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는 사태가 일어나고, 백성 2천여명이 고구려로 달아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하지만 동성왕은 아랑곳하지 않고 대궐 동쪽에 8미터 높이의 임류각(臨流閣)을 세우고, 그 주변에 연못을 파고 기이한 짐승들을 기르는 등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다.
관리들이 이에 항의하여 상소를 했지만, 동성왕은 듣지 않고 대궐 문을 닫아버렸다. 또 우두성(牛頭城)으로 사냥을 다니며 백성들의 원성을 샀고, 측근들과 함께 임류각에서 연회를 열며 밤새도록 실컷 즐기기도 했다. 동성왕은 신라에 대해서도 거만한 태도를 보였고, 이는 신라와의 관계를 극도로 악화시켰다. 신라에서는 백제 정벌론이 대두되었고, 그 때문에 동성왕은 탄현(炭縣)에 목책을 세워 신라의 침입에 대비하고, 가림성(加林城)을 쌓아 외침에 대비하도록 했다.
하지만 여전히 동성왕의 사치스런 행각은 그치지 않았다. 국사(國事)는 뒷전으로 밀어놓고 자주 사냥을 다녔는데, 501년 겨울에는 웅천 북쪽 벌판과 사비 서쪽 벌판에서 사냥을 하다가 큰 눈에 길이 막혀 마포촌에 머물러야 했다. 이 때 위사좌평(衛士佐平) 백가(苩可)가 보낸 자객이 칼로 동성왕을 찔러 살해함으로써, 옛 대륙 영토를 회복하여 백제의 위용을 과시했던 젊은 영웅 동성왕은 비명횡사(非命橫死)하게 되었다.
동성왕(東城王)을 살해한 백가는 가림성을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켰는데, 귀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 개로왕(蓋鹵王)의 아들 사마(斯摩)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가림성을 공격하여 백가를 처단했다. 동성왕의 죽음 이후 백제는 점점 그 세력이 약화되어 대륙 영토를 상실하게 된다.
참고서적
김형광 '인물로 보는 조선사' 시아출판사 2002년
송은명 '인물로 보는 고려사' 시아출판사 2003년
김용만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 창해 2001년
황원갑 '민족사를 바꾼 무인들' 인디북 2004년
이덕일 '고구려 700년의 수수께기' 대산출판사 2000년
이덕일 '살아있는 한국사' 휴머니스트 2003년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 들녘 2000년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들녘 2000년
김기홍 '천년의 왕국 신라' 창작과비평사 2000년
박선식 '한민족 대외 정벌기' 청년정신 2000년
이도학 '백제 장군 흑치상지 평전' 주류성 1996년
송기호 '발해를 찾아서' 솔출판사 1993년
윤병식 '의병항쟁과 항일 독립전쟁'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6년
한시준 '임시정부 활동과 의열투쟁의 전개'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8년
장세윤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 솔출판사 2001년
{이상}
'역사자료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한국의 역사 인물」3.국가통치체계를 확립하여 백제의 최전성기를 이룩한 근초고왕(近肖古王) (0) | 2010.01.26 |
---|---|
[스크랩] 「한국의 역사 인물」4.수(隨)의 침략군을 격퇴시킨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 (0) | 2010.01.26 |
[스크랩] 「한국의 역사 인물」6.당(唐)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고구려의 실권자 연개소문(淵蓋蘇文) (0) | 2010.01.26 |
[스크랩] 「한국의 역사 인물」7.조국 백제와 함께 최후를 맞이한 충절무인(忠節武人)의 표본 계백(階伯) 장군 (0) | 2010.01.26 |
[스크랩] 「한국의 역사 인물」8.삼한통일(三韓通一)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신라의 대표적 명장 김유신(金庾信) (0) | 2010.0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