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역사상 영역과 대외적 영향력이라는 면에서 당대에 그 왕조 최대의 영토 확장을 이룩한 군주로는 백제의 열세번째 국왕인 근초고왕(近肖古王)을 꼽을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記)에 의하면 근초고왕은 열한번째 국왕인 비류왕(比流王)의 둘째 아들이라고 한다. 그리고 근초고왕을 가리켜 '체격과 용모가 기위(奇偉)하고 원대한 식견이 있었다.'라고 하면서 계왕(契王)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를 이었다고 한다. 그의 용모가 '기위(奇偉)'했다는 것은 예삿 사람과는 달리 범상하지 않은 면모와 카리스마를 갖추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러한 근초고왕의 등장은 4세기대 동아시아의 정세와 결부지어서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잘 알려져 있듯이 4세기의 동북아시아는 격동의 시기였다. 만리장성 이북의 유목민족들이 대거 그 이남으로 밀고 내려왔거니와 진(晉)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316년에 양자강 유역으로 쫓겨 내려가 그 이듬해에 지금의 남경(南京)을 중심으로 동진 정권(東晉政權)을 성립시켰다. 그럼에 따라 중국 북부는 유목민족들이 할거하는 세력 각축장으로 변모하여 요동치는 장소가 되었다.
이러한 파동은 한반도의 정세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즉, 한족(漢族) 세력이 중국 북부에서 현저하게 쇠퇴하는 상황을 놓치지 않을 리 만무한 고구려 또한 만주와 내몽골 지역의 유목국가군과 마찬가지로 세력확장의 대열에 뛰어들었다. 고구려는 본토와의 관계가 단절된 낙랑군(樂浪郡)과 대방군(帶方郡)을 313년과 314년에 각각 축출한 결과 지금의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까지 세력을 미치게 되었다. 그렇다고 고구려의 영토가 여기까지 확대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쨌든 그 영향력의 남하는 한반도 중부지역 정치세력들로 하여금 일종의 위기의식을 불러 일으켜 공동 대응할 수 있는 세력결속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것이 바로 비교적 느슨한 형태로서 개별적으로 세력을 누리고 있던 한강 유역의 마한 제국이 백제를 중심으로 통합될 수 있었던 요인인 듯하다.
여러 사서의 기록을 검토해 볼 때 백제는 4세기 중엽에는 한반도 전체 면적의 약1/3에 이르는 지역을 장악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짐작된다. 즉, 백제는 이 무렵에 국세(國勢)를 크게 떨쳐 북쪽으로는 예성강까지, 남쪽으로는 노령산맥까지 영역을 확대하는 한편, 그 영향력은 영산강과 낙동강 유역까지 미쳤던 것이다. 예컨대 백제는 정치적으로 최대의 라이벌인 고구려를 공격하여 그 군왕을 전사하게 할 정도로 북진(北進)의 성과는 현저하였다. 가령 귀수(貴首) 태자는 수곡성(水谷城) 서북쪽에 이르러 고구려군에 대한 추격을 멈추고 돌을 쌓아 표지(標識)를 삼은 다음 그 위에 올라가 좌우를 돌아다 보며, "이 다음 날에 누가 다시 이곳까지 이를 수 있을까!"라는 말을 감회 어리게 할 정도였다. 또 백제는 영산강 유역과 낙동강 유역에도 진출하여 마한 잔여세력과 가야를 제압하였다.
백제의 정지할 줄 모르고 추진되어 온 영토확장사업(領土擴張事業)의 성과는 근초고왕(近肖古王) 재위기의 일이었다. 근초고왕(近肖古王)대에 절정을 이룬 백제의 영토확장사업(領土擴張事業)은 크게 세 방향으로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즉, 영산강 유역과 낙동강 유역, 그리고 예성강 유역으로의 진출이었다. 이 가운데 백제가 크게 주력한 것은 마한 지역을 제패하는 것이었으므로 그 영역은 적어도 금강 이남에서 노령산맥 이북에까지 미쳤다. 게다가 백제의 정치적 영향력은 노령산맥을 넘어 전남 해변지역까지 끼치게 될 정도로 마한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게 되었다.
백제가 이처럼 동남쪽으로는 낙동강 유역과 북쪽으로는 예성강선까지 정치적 영향력을 끼치거나 영역을 확장하는데 소요된 기간은 369년~371년까지의 불과 3년에 지나지 않은 짧은 시일이었다. 이 기간 동안 백제는 남쪽, 동쪽과 북쪽으로 영역을 확대하였거니와 서쪽으로는 중국 동진과의 교섭을 통하여 그 존재가 국제 무대에 찬연히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 같은 백제의 흥기(興期)와 세력 팽창 특히 그 힘의 동진(東進)은 낙동강 동안(東岸) 지역에 자리잡은 진한 제국 전체의 위기의식을 초래하여 신라를 중심으로 통합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같은 백제의 단기간에 걸친 세력 팽창을 계기적인 발전 과정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근초고왕(近肖古王)대 백제의 폭발적인 팽창은 계기적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것만은 결코 아니다. 백제사상 삼국사기(三國史記)만 보아도 두명의 시조(始祖)가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시조의 존재는 2개 왕실의 존재를 설정하게 하는 것이다. 나아가 근초고왕 재위기와 그 이전 왕대(王代)의 백제 왕실 계보가 단층이 진다는 지적에 대한 일종의 해명 차원에서라도 정복국가론(征服國家論)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 백제가 정복전(征服戰)에 승리한 배경.
근초고왕(近肖古王)대의 백제가 단기간 내에 마한 전역을 제패하는 한편, 그 세력이 사방으로 확산될 수 있던 비결은 어디에 있었을까? 백제의 신속한 영역 확장과 마한 제국에 대한 지배권 장악에는 그 지형적 조건이 험준한 산악지대가 아니라 대부분 야산이나 광활한 평야 지역이었으므로 기동성 위주의 기마전(騎馬戰)에는 적지(適地)였던 점이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즉 '평원 평야가 편평하게 서로 이어져 있으면 이곳은 거기(車騎)를 사용하는 땅으로 보병 10명이 기병 1명을 당하지 못한다.(三峯集 陳法)'고 할 정도로 기병전(騎兵戰)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지형이었다. 게다가 가야 제국이 분지라는 폐쇄적 지형에 소재하고 있던 관계로 통합이 진척되지 못하였던 데 반해 마한 지역은 이와는 다르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할 사안인 것이다.
근초고왕 재위기의 광범위한 정복 전쟁은 고구려와의 쟁패전(爭覇戰)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근초고왕은 진출 방향을 북쪽의 대방군(帶方郡)이 있던 옛 땅으로 설정하였다. 369년 9월에는 고구려의 고국원왕(故國原王)이 보병과 기병 2만명을 거늘고 지금의 황해도 배천으로 짐작되는 치양에 진을 치고 군사를 나누어 민가를 약탈하였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근초고왕의 출전 명령을 받은 귀수(貴首) 태자가 군대를 이끌고 지름길로 치양에 진격하여 방심하고 있던 고구려군을 일격에 쳐서 적병 5천여명을 목 베는 대승(大勝)을 거두었으며, 노획한 전리품을 장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때의 전쟁을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記) 근구수왕(近仇首王) 즉위년 조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이에 고구려 국강왕(國岡王) 사유(斯由)가 친히 쳐들어 오매 근초고왕(近肖古王)이 태자를 보내어 막게 하였다. 반걸량(半乞糧)에 이르러 싸우려 하는데 고구려인 사기(斯紀)는 본시 백제인으로 국가에서 기르는 말의 발굽을 잘못하여 상하게 하자 죄를 물을까 두려워 고구려로 도망쳤었다. 이에 이르러 돌아와서 태자에게 말하기를, "비록 고구려 군사가 많기는 하지만 모두 수만을 채운 가짜 군사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 중 제일 날랜 부대는 오직 붉은 깃발뿐이니 만일 그것을 먼저 쳐서 깨뜨린다면 그 나머지는 치지 않더라도 절로 무너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태자가 이 말을 쫓아 진격하여 크게 이기고 달아나는 군사를 계속 추격하여 수곡성(水谷城) 서북에까지 이르렀을 때에 장수 막고해(莫古解)가 간(諫)하며 말하기를, "일찍이 도가의 말을 들으며 '만족한 것을 알면 욕을 보지 않으며 그칠 줄을 알면 위태하지 않다'고 하였으니 지금에 얻은 바도 많은데 어찌 더 많은 것을 바라겠습니까." 하였다. 태자가 이 말을 옳게 여겨 추격하기를 중지하였다. 즉시 그곳에 돌을 쌓아 표지(標識)를 만들고 그 위에 올라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 다음날에 누가 다시 이곳까지 올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그곳에 말발굽같이 생긴 바위 돌 틈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태자의 말발굽이라고 부른다.'
위의 기사는 369년의 치양전투(雉壤戰鬪)를 말하는 것으로 보는데 이견이 없다. 마지막 구절에 보이는 '태자의 말발굽자국' 이야기는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金富軾), 최산보(崔山甫), 서안정(徐安貞) 등이 직접 목도하였거나 들은 사실을 적어 놓은 듯한 인상이 짙다. 김부식이 평양을 거점으로 한 묘청(妙淸)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수곡성으로 적혀 있는 신계(新係) 지역을 통과할 때 그가 직접 보고 들은 것을, 그로부터 10년 후에 주관하여 완성시킨 삼국사기에 이와 같이 수록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위의 인용에서 백제 장수 막고해(莫古解)가 귀수(貴首) 태자에게 한 말은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 적혀 있는 구절이다. 백제인들의 학문적 교양과 문화 전반의 역량을 암시해 주는 기사라고 하겠다. 마지막으로 귀수 태자가 전승(戰勝) 기념으로 수곡성에서 돌을 쌓아 표지를 삼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이는 제왕의 업적을 과시하고 승전의 당위성을 선포하는 목적에서 세워진 비석의 형태였으리라고 생각된다.
치양전투(雉壤戰鬪)로부터 두달 후 한강 남쪽에서 대규모 백제 군대의 사열이 있었다. 전 장병이 황색(黃色) 기치를 나부끼는 물결 속에 근초고왕(近肖古王)은 황제로서의 웅자(雄姿)를 화려하게 드러내었다. 또 그로부터 2년 후인 371년에 고구려 군사들이 보복을 위해 대거 밀고 내려 왔다. 이 소식을 들은 근초고왕은 고구려군의 예상 진격로인 지금의 예성강을 가리키는 패하(浿河) 부근에 군사를 매복시켜 놓고 기다렸다. 거침없이 내려오던 고구려군은 예기치 않은 백제군 복병의 습격을 받아 크게 패하여 쫓겨 올라갔다. 두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기습과 매복이라는,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전술로써 백제군은 고구려군의 남진(南進)에 제동을 걸었던 것이다.
이제는 근초고왕의 보복이 준비되고 있었다. 그해 겨울 근초고왕은 귀수 태자와 함께 몸소 정예군 3만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평양성까지 진격하였다. 고국원왕(故國原王)은 직접 평양성에서 고구려군을 지휘해 백제군을 맞아 싸웠다. 이는 평양성이 수도에 버금가는 역할을 수행하던 곳임을 뜻한다. 이 전투에서 고국원왕은 백제군의 화살을 맞아 치명상을 입고 죽었다. 근초고왕의 백제군은 고구려 국왕을 전사시킴에 따라 사기가 올라갔는데, 100년이 지난 후 개로왕(蓋鹵王)은 이때의 전과를 일러 "고국원왕의 머리를 베어 장대에 꽂았다!"라고 과장되게 이야기하였을 정도로 두고 두고 되새기는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그럼에 따라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백제는 대동강선까지 북계(北界)를 확대할 수 있었으리라고 보이는데 황주에서 출토된 백제 토기는 이러한 상황을 반영해 준다. 그러나 고국원왕의 전사는 고구려 측을 크게 자극하였다. 고국원왕의 손자인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업적을 기록한 영락기공비문(永樂紀功碑文)에서 백제를 '백잔(百殘)'이라는 멸칭(蔑稱)으로서 일컬었음은 당시의 정서를 잘 전달하고 있다. 고구려의 입장에서 볼 때 백제는 응징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이로써 양국 간의 전쟁은 한층 격렬해지게 되었다.
● 정복전(征服戰) 승리에서 얻은 산물
4세기 중반 이후 근초고왕의 전쟁 수행은 정치 권력의 집중을 가능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획득한 인적, 물적 자원을 토대로 국왕의 사회, 경제적 기반을 강화시켜 주었다. 근초고왕은 토지와 전쟁 포로를 포함한 많은 전리품을 소유하게 되어 권력 기반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또 그것을 사여(賜與)함으로써 권력 범위를 확대시키는게 가능하였다. 근초고왕은 왕권의 강화라든지 국가 성장과 궤(軌)를 같이 하였던 전쟁을 통하여 얻어진 권위를 정치적인 권력 축적으로 연결시켰다. 이와 더불어 백제는 여타의 것에 대한 통제보다 더 큰 힘을 제공하는 기본적 생존자원의 '생산수단'을 확보, 장악하고자 하였다. 이는 막대한 농업생산력을 수중에 집중시켜 국가유지의 물질적 토대를 마련할 수 있는 관개시설(灌槪施設)의 축조로 나타나게 되었다. 관개시설의 축조는 토목공사에 따른 대규모 노동력의 징발을 가져오게 하였으므로 집권화의 수단으로 알려지고 있다.
근초고왕은 자국 영내와 그 영향권내 세력들의 교역을 통제함으로써 그들을 지배하는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더불어 근초고왕은 교역품의 분여를 통해 권력 범위를 확대하였을 뿐 아니라 강화시켜 나갔다. 근초고왕은 광범위한 정복 전쟁의 수행과 승리를 통하여 군사력을 독점함으로써 권력을 한층 강화시켰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記) 근초고왕(近肖古王) 24년조의 다음과 같은 기사를 주목하고자 한다.
'11월 한수(漢水) 남쪽에서 크게 사열(査閱)하였는데, 기치(旗幟)는 모두 황색(黃色)을 사용하였다.'
즉, 근초고왕이 몸소 한수(漢水) 남쪽에서 군사를 사열하면서 모두 황색 기치를 사용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황색(黃色)은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과 관련지어 살펴볼 때 방위상 중앙을 뜻하거니와, 황색의 기치는 전통적으로 중국에서 천자(天子)란 이름으로 신성시되는, 즉 황제(皇帝)라는 칭호로 불리던 군주들이 사용하였다. 백제군이 정복전쟁에 승리하여 국왕의 권위가 한껏 고양(高揚)된 시점에서 모두 황색 기치를 사용한 것은 근초고왕의 군사지휘권 장악을 뜻한다. 나아가 이 무렵 근초고왕은 율령반포로써 지배세력 간의 신분적 서열을 확립하여 일원적인 지배체제를 구축하여 나간 것으로 추측된다.
근초고왕은 유교적 이념을 바탕으로 왕권의 행사를 정당화하려고 했으리라 짐작된다. 또 그러한 내용은 이들에 의하여 찬정되었을 율령 속에 내포되었을 것이다. 율령의 반포는 조직체계의 법제화를 가져왔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석촌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돌추가 주목된다. 이 돌추는 자른 면이 모를 죽인 장방형이고, 네모진 몸체 윗부분에 구멍이 뚫린 반원형 꼭지가 있다. 물체의 무게를 측량하는 이러한 측량 기구는 돌추 뿐 아니라 척도(尺度)를 비롯한 도량형 전체의 통일을 가져왔을 것으로 보인다. 도량형의 통일은 중앙집권적 통치 질서의 확립에 긴요한 요건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화사(畵師)와 와사(瓦師)를 비롯한 전문기술직이 소속된 여러 관부도 설치되었다고 보겠다. 고흥(高興) 박사에 의한 문서 작성의 공식화는 국가제도 전반에 걸친 전문화된 행정기구의 출현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추론은 삼국사기 근초고왕 말년 기사의 '비로소 서기함이 있었다.(始有書記)'를 이른바 '서기(書記)'라는 역사서의 편찬과 결부짓지 않고 범위를 넓혀 공문서 전반에 대한 작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파악한데 근거하고 있다. 나아가 이 구절을 문자체계의 확립까지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국가체제의 통일성 확립을 위한 조치로 해석하고자 한다. |
참고서적
김형광 '인물로 보는 조선사' 시아출판사 2002년 {이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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