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165년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불길한 조짐이 일어났다. 정월 그믐날에 일식이 있었던 것이다. 백성들은 나라에 무슨 큰 변고가 일어날 것이라고 술렁거렸다. 과연 그해 3월에는 차대왕(次大王)의 동복 형인 태조대왕(太祖大王)이 별궁에서 세상을 떴는데, 그때 나이가 119세였다. 그리고 그해 10월에 마침내 연나부(椽那部)의 조의선인(早衣仙人) 명림답부(明臨答夫)가 차대왕의 학정과 백성들의 고통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군사를 모아 차대왕을 살해하였다. 고구려는 물론 우리 역사상 최초의 유혈혁명에 성공한 명림답부는 그 동안 숨어살던 태조대왕의 막내아우인 백고(伯固)를 찾아내 왕위에 앉히니 그가 곧 신대왕(新大王)이다. 신대왕은 즉위 2년째인 서기 166년 정월에 명림답부를 국상(國相)으로 삼고 벼슬을 더해 패자(沛者)로 삼아 정치와 군사의 실권을 맡기고 여기에 더해 양맥(梁貊) 지방의 통치까지 맡겼다.
고구려에서 국상(國相)이란 그때까지 국왕의 정무를 보필하는 가장 높은 벼슬인 좌보(左輔)와 우보(右輔)를 통폐합한 최고위직이나, 이는 곧 뒷날 사람들이 말하는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인 수상(首相)을 가리키는 것이다. 고구려에서 유혈혁명(流血革命)을 일으켜 새 임금을 앉힌 사람이라면 봉상왕(烽上王)을 죽이고 미천왕(美川王)을 내세운 창조리(倉助利)가 있고, 영류왕(榮留王)을 죽이고 보장왕(寶藏王)을 내세운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있지만, 명림답부는 이들에 앞서 폭군(暴君)을 거세하고 새 임금을 추대한 뒤 정권을 장악했던 것이다. 그러면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 삼국사(三國史)를 통틀어 최초의 정변(政變)에 성공하고, 고구려 최초의 국상 자리에 앉아 출장입상(出將入相)하며 정권을 좌지우지했던 명림답부는 어떤 인물이었던가.
● 차대왕(次大王) 죽이고 신대왕(新大王) 세운 뒤 정권 장악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 명림답부(明臨答夫) 편에 따르면 그는 신대왕이 세상을 뜨기 3개월 전인 179년 9월에 113세의 고령으로 죽었다고 했으니, 이를 역산해 보면 그는 서기 66년에 출생한 셈이 된다. 명임답부가 태어날 무렵은 태조대왕의 모후인 부여태후(夫餘太后)가 우리 역사상 최초의 수렴청정(垂簾聽政)을 끝내고 21세의 국왕이 친정(親政)에 나선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명림답부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가 혁명을 일으킬 때까지 고구려의 사정을 살펴본다.
고구려는 시조 추모성왕(鄒牟聖王)이 나라를 세운 이후 두번째 유리명왕(琉璃明王)을 거쳐 세번째 국왕 대무신왕(大武神王)에 이르기까지 약 100년간은 주변의 소국들을 정복, 흡수, 통합하면서 국가의 기틀을 굳건히 다지고 국력을 기르는데 전심전력한 창업기라고 할 수 있다. 여섯번째 국왕인 태조대왕(太祖大王) 이후 본격적으로 국력신장기에 접어들어 주변국에 대한 통합을 마무리한 뒤, 중국의 후한(後漢)과 맞서 동북아시아의 종주국, 곧 천하의 주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유리명왕이 태자 도절(都切)과 해명(解明)을 차례로 죽이는가 하면, 그 뒤 태자에 책봉되었다가 제위를 이은 대무신왕 또한 낙랑국(樂浪國) 정복 직후 서자 호동왕자(好童王子)를 자살로 내모는 비극적 사건도 벌어졌다. 뿐만 아니;라 신하가 군왕을 살해하는 비상한 일도 일어났으니, 그것은 서기 53년 11월 모본 사람 두로(杜魯)가 모본왕(慕本王)을 죽인 사건이다. 고조선과 부여의 뒤를 이은 고구려는 천손족(天孫族)의 나라요, 임금은 천제(天帝), 곧 하늘의 뜻마저 통제할 수 있는 제왕이라는 사상이 백성들 사이에서도 뿌리깊이 박혀 있었으나, 폭군은 나라의 주인이 될 자격이 없다는 고조선과 부여 이래의 민본주의 사상 또한 연면히 이어져왔던 것이다.
모본왕 시해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대무신왕은 자신의 맏아들이지만 두번째 왕후 소생인 호동왕자가 자살하자 적자인 해우(解憂)를 태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서기 44년 10월에 대무신왕이 재위 26년 만에 죽자 왕위는 태자 해우가 아닌 해색주(解色朱)에게 돌아갔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해색주는 유리명왕의 다섯째 아들이니 대무신왕의 막내 아우였다. 당시 사정에 대해서는 "대무신왕(大武神王)이 세상을 떠나자 태자가 어려서 정사(政事)를 맡아볼 수 없으므로 국인(國人)들이 그를 추대하여 왕위에 앉혔다."고 했다. 여기에서 말한 국인이란 글자 그대로 '나라 사람'이란 뜻이 아니라 임금을 갈아치울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유력자들을 가리킨다. 이렇게 즉위한 해색주가 민중왕(閔中王)이다. 하지만 그는 불과 4년 두에 죽고, 서기 48년에 마침내 해우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모본왕이다.
● '백성의 원수' 모본왕을 죽인 두로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高句麗本記) 모본왕(慕本王) 즉위 조의 기록에는 "그는 사람됨이 사납고 어질지 못해 국사(國事)를 돌보지 않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원망했다."고 하고, 재위 4년 조의 기록에는 "군왕은 날로 포악하여 앉을 때면 언제나 사람을 깔고 앉고, 누울 때에도 사람을 베고 누웠으며, 그 사람이 혹시 움직이면 죽이는 데에 용서할 줄 몰랐고, 신하 가운데 간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활로 쏘아 죽였다."고 했다. 그래서 재위 6년째인 서기 53년 11월에 두로가 모본왕을 죽였다는 것이다. 이 기록을 그대로 신뢰한다면 모본왕은 당대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폭군(暴君)이며 악랄한 난군(亂君)이었을 것이다.
두로는 국왕의 근신이었는데 자신도 언제 그런 식으로 비명에 죽을지 몰라 신세를 한탄하다가 어느 날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누군가가 그 모습을 보고 이런 말로 사주했다.
"사나이 대장부가 어찌 아녀자처럼 그리 쉽게 우는가? 옛 사람이 말하기를 나를 위무하면 임금이요, 나를 학대하면 원수라고 했다네. 지금 임금은 포악하게 사람을 마구 죽이니 이는 백성들의 원수요, 결코 임금다운 임금이라고 할 수가 없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그대가 그를 죽여 없애면 그야말로 백성들의 원수를 죽여 없앤 장한 일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두로가 이 말을 옳게 여겨 모본왕을 칼로 찔러 죽여 버렸다. 그렇게 해서 그 뒤를 이은 임금이 바로 태조대왕(太祖大王)이다. 태조대왕의 이름은 궁(宮), 어릴 때의 이름은 어수(於嗽)로서 유리명왕의 여섯째 아들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의 아들이라고 한다.
어쨌든 그렇게 모본왕이 근신(近臣)에 의해 암살된 이후 고구려의 새 국왕에 즉위한 태조대왕에 대해 후한서(後漢書)는 그가 태어날 때부터 이미 눈을 뜨고 나와 세상을 볼 수 있었다고 기록했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태조대왕 즉위 조에는 "모본왕이 세상을 뜨자 태자 익(翊)이 불초해서 나라를 맡길 수 없으므로 궁(宮)을 맞이하여 왕위를 잇게 했다."고 썼다. 모본왕의 태자 익은 48년 10월에 태자로 책봉되었는데, 부왕이 비명에 죽자 왕위계승권까지 빼앗겨 버린 것이다.
고구려의 모본왕(慕本王)은 로마 제국의 네로(Nero) 황제를 연상시킨다. 두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제왕으로 등극했고(모본왕은 48년, 네로는 54년), 비슷하게 포악했으며, 비슷한 시기에 제거되었다(모본왕은 53년, 네로는 68년). 네로는 37년에 태어나 17세의 나이로 로마의 황제에 즉위했고, 모본왕은 그 탄생년도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아버지 대무신왕이 죽었을 때인 44년에 왕위를 바로 물려받지 못할 만큼 어렸다면 네로와 거의 동년배로 추정할 수 있다. 네로와 모본왕은 닮은 점이 또 있다.
남편인 클라디우스 황제를 독살하고 아들을 새 황제로 만든 어머니인 아그리피나 황후의 영향을 받은 네로와 마찬가지로 모본왕은 호동왕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첫째 왕후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모봉왕은 시종에게 살해되었고, 네로는 근위병까지 합세한 반란으로 살해 직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비참한 종말을 맞이했다.
그러나 모본왕을 단순하게 폭군으로만 평가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기록이 보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모본왕이 49년 봄에 장수와 군사들을 보내 당시 한나라의 영토였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공격하도록 하여 요동태수 채융(蔡絨)의 항복을 받아냈으며, 같은 해 8월에는 사자를 보내 국내의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했다고 한다. 다만, 채융의 항복을 받아낸 사실을 김부식은 사대주의 역사관에 따라 "요동태수 채융이 은혜와 신의로써 고구려 장수에게 대하므로 이에 다시 화친했다."고 얼버무렸다.
이 기록만을 본다면 모본왕(慕本王)은 강단(剛斷)이 있고, 구민정책(救民政策)을 적극적으로 펼친 현군(賢君)이라고 불릴 만하다. 모본왕이 군사작전을 실행한 지역인 북평은 지금 중국의 수도 북경(北京)으로 바로 하북지방이며, 상곡은 북평 바로 위에 위치해 있다. 또한 태원은 태행산(太行山) 서쪽에 있는 산서성의 치소가 있는 곳이며, 이곳에서는 낙하(洛河)가 발원한다. 고구려의 군사들이 북평을 치기 위해서는 산해관을 통과해야 하며, 태원을 치기 위해서는 험한 태행산 줄기를 타고 가야 한다. 이들 지역은 모두 만리장성 이남에 있는데, 특히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해 모든 군사력을 결집한 곳이 바로 북평이었다. 만약 지금의 압록강 유역에 있던 고구려가 그곳까지 공략하여 요동태수의 항복을 받아냈다면 실로 대단한 위업(威業)이 아닐 수 없다.
모본왕(慕本王)대의 이 기록은 고구려의 초기 영역 및 도읍지 문제와 관련하여 아주 의미있는 기록이다. 만약 고구려의 국내성이 지금의 압록강 유역인 집안시에 있었다면 요동군을 통과해 만리장성 안에 있는 북평이나 태행산에 있는 태원까지 진격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고구려가 이곳을 습격하기 위해서는 국내성의 위치가 지금의 요하나 난하 중상류에 있어야만 지리적으로 습격이 가능하다. 삼국사기는 이 군사작전을 분명히 습격이라고 표현하여 그곳까지의 거리가 대장정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런 모본왕이 무슨 영문인지 51년부터 갑자기 포악한 임금으로 돌변해 2년 뒤에 두로에게 죽었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니 피살당한 모본왕이 폭군으로 묘사된 것도 어쩔 수 없다고 할까. 그리고 두로는 비록 모본왕을 죽였으나 그가 임금을 죽인 죄로 처형되었다는 기록도 없고, 반대로 그 공로로 무슨 상을 받았다거나 높은 벼슬에 올랐다는 아무 기록도 없으니 그는 부여태후 일파의 사주를 받아 모본왕을 살해하는 임무만 완수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슬그머니 사라져 버린 셈이다.
● 사상 최초로 수렴청정한 여걸 부여태후(夫餘太后).
그러면 이번에는 태조대왕(太祖大王)의 생부인 재사(再思)에 대해 알아보자. 삼국사기에는 재사가 유리명왕(琉璃明王)의 아들로서 고추가(古鄒加)라고 했는데,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태조대왕 즉위시 생존한 것으로 나온다. 재사가 만일 유리명왕 재위 마지막 해인 서기 18년에 출생했다면 모본왕 사망시 36세의 한창 나이였을 것이니 '늙어서 왕위를 아들에게 양보했다'는 기록은 신빙성이 전혀 없는 것이다. 36세의 아비가 자신이 늙었다고 불과 7세의 아들에게 대고구려(大高句麗)의 보위(寶位)를 양보했다는 말을 누가 믿겠는가.
그런데 융무(隆武) 80년(서기 132년)의 기록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가을 7월에 수성(遂成, 太祖大王의 아우)이 왜산(倭山)에서 사냥하여 측근들과 잔치를 베풀었다. 이에 관나부(貫那部)의 우태(優台) 미유(彌儒)와 환나부(桓那部)의 우태 어지류(於支留)와 비류나부(沸流那部) 조의(早衣) 양신(陽神) 등이 가만히 수성에게 말했다. "처음에 모본왕이 죽었을 때 태자가 불초하여 여러 신하가 왕자 재사(再思)를 세우려 했으나 재사가 늙어서 그 아들에게 양보한 것은, 형이 늙으면 아우에게 양위하게 하려 함이었소. 이제 군왕은 이미 늙었는데 왕위를 사양할 의사가 없으니 공은 이 일을 도모함이 좋을 것이오." 그러자 수성이 말하기를, " 맏아들이 반드시 왕위를 계승함은 천하의 떳떳한 도리이다. 군왕이 이제 비록 늙었으나 맏아들이 있는데 어찌 감히 분에 넘치는 일을 바랄 수 있으랴" 하니 미유가 말했다. "아우가 어질면 형의 뒤를 잇는 일은 옛날에도 있었으니 공은 주저하지 마소서!" 이때에 좌보(左輔) 패자(沛者) 목도루(穆度婁)는 수성에게 다른 생각이 있음을 알고 병을 핑계로 벼슬을 버렸다.'
삼국사기의 기사를 분석해보면 태조대왕은 오로지 어머니 부여태후와 그의 외가인 부여 출신 세력의 힘으로 왕위에 올랐으며, 부여태후가 남편인 재사를 제쳐두고 불과 7세의 아들을 왕위에 앉히고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여 실질적인 고구려의 여제(女帝) 노릇을 했다는 풀이가 가능하다. 왕손인 남편까지 좌지우지한 이 태조대왕의 어머니가 바로 성명은 전해지지 않지만 부여 출신이라고 하여 부여태후 라고 불리는 우리 고대사의 여걸 가운데 한 명이다.
부여태후(夫餘太后)는 정권을 장악한 뒤 먼저 내정을 안정시키고, 밖으로 눈을 돌려 시조 추모성왕(鄒牟聖王)의 건국이념이며 개국 이래의 숙원인 '다물(多勿)', 곧 고조선과 부여 멸망 이후 잃어버린 옛 당을 되찾는데 국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융무(隆武) 3년(서기 55년)에는 요서지방에 10개 성을 쌓아 후한의 침범에 대비했고, 그 이듬해에는 오늘의 함경도 지방에 있던 동옥저를 정복하여 동북 국경을 동해안까지 넓혔다. 또 남쪽 국경은 살수(薩水)까지 이르렀다. 태조대왕(太祖大王)이 장성하여 국정을 맡은 이후인 융무(隆武) 16년(서기 68년)에는 압록강 하구에 있던 나라로 비정되는 동부여의 후예 갈사국의 국왕 도두(都頭)가 항복해왔고, 서기 72년에는 관나부(貫那部)의 패자(沛者) 달가(達賈)를 보내 조나를, 74년에는 환나부(桓那部)의 패자 설유(薛儒)를 보내 주나를 쳐서 복속시켰다. 또 105년과 111년, 118년에는 각각 군사를 보내 요동을 공략했다.
● 부국강병으로 한나라와 천하의 패권 다퉈
고구려가 강성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걸핏하면 쳐들어와 사람들을 붙잡아가고 영토를 넓히려 하자 못내 불안해진 한나라는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융무(隆武) 69년(서기 121년) 봄에 유주자사(幽州刺史), 현도태수(玄途太守), 요동태수(遼東太守)의 군대가 합세하여 대대적으로 고구려를 침공했다. 이에 태조대왕(太祖大王)은 아우 수성(遂成)으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나가 한나라 군사의 진로를 막게 한 뒤, 자신도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뒤따라가 한나라 군사를 쳐서 크게 무찔렀다.
당시 한나라는 각지에서 농민들이 봉기하고 왕실은 외척과 환관의 대립이 극에 이르러 망국의 내리막길로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서기 107년부터 시작된 농민 봉기는 80년간 100회에 걸쳐 거듭되다가 마침내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저 유명한 황건적(黃巾賊)의 난으로 발전하여 위(魏), 오(吳), 촉(蜀) 삼국의 정립과 후한의 멸망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렇게 태조대왕은 한나라 군사를 격파한 다음에도 요동과 부여 지방에 잇따라 출병하여 동북아시아의 패자(覇者)로 새롭게 등장한 거대왕국 대고구려(大高句麗)의 위세를 사방에 덜쳤다. 이처럼 태조대왕 재위시에 고구려는 고조선의 옛 영토 대부분을 회복하고, 더 이상 중국의 주변국이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종주국, 곧 천하의 주인 된 나라로 거듭났기에 태조대왕의 시호가 개국시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태조대왕(太祖大王), 또는 국조왕(國朝王)으로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 역사를 포함하여 묘호(廟號)에 태조(太祖)라는 호칭이 붙여졌던 제왕은 고구려의 태조대왕이 최초였다. 그런 이유로 필자는 태조대왕(太祖大王) 재위시에도 뒷날의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과 마찬가지로 황제(皇帝)를 칭하고, 태백일사(太白逸史)의 기록에 의거하여 융무(隆武)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썼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태조대왕은 거의 2천년 전의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오래 살았다. 그의 후손이며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아들인 장수태왕(長壽太王)이 20세에 즉위하여 78년 2개월간 재위하고 97세까지 오래 살았기에 장수(長壽)란 단어가 묘호에 붙여지기도 했지만, 태조대왕(太祖大王)은 무려 119세까지 살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 119세까지 장수했던 태조대왕.
그런 까닭에 자신이 죽기를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는(?!) 아우 수성을 위해 100세에 양위하고 별궁에 물러나 또 다시 19년이나 오랜 여생을 보내다가 세상을 떴던 것이다. 이처럼 늙은 형을 몰아내다시피 하고 제위에 오른 수성이 곧 차대왕(次大王)인데, 즉위 당시 그의 나이도 이미 76세의 고령이었다. 그런데 태조대왕(太祖大王)의 양위는 정상적이 아니라 수성(遂成)의 협박 공갈에 못 이겨 마지못해 했던 행우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밝힌 대로 태조대왕에게는 자신의 사후 제위 후계 1순위인 태자 막근(莫勤)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를 반증하는 기록이 고구려본기(高句麗本記) 태조대왕(太祖大王) 86년 조에 이렇게 나온다.
'가을 7월에 수성이 또 기구에 가서 사냥하다가 5일 만에 돌아왔다. 그의 아우 백고(佰苦)가 말하기를, "재앙과 복은 오는 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사람이 그것을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지금 형님은 임금의 아우라는 近親으로서 백관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니 지위가 이미 매우 높고 공로 또한 크십니다. 마땅히 충의의 마음을 가지고 예정과 겸양으로써 욕심을 억제하여 위로는 군왕의 덕을 따르고 아래로는 백성의 마음을 얻어야 합니다."고 충고 했으나 듣지 않았다.'
또 태조대왕 94년 조에도 비슷한 기록이 나온다.
'가을 7월에 수성이 왜산 아래에서 사냥하면서 측근들에게 말했다. "대왕이 늙었으나 죽지 않고 나의 나이도 곧 늙게 되니 기다리고만 있을 수가 없구나! 그대들은 나를 위해 계책을 꾸미기 바라노라!"'
이렇게 전개된 상황은 마침내 태조대왕의 양위로 이어지게 된다. 그해 10월에 우보 고복장(高福章)이 태조대왕에게 이르기를, "수성이 반역하려고 획책하니 청컨대 빨리 처형하소서!"라고 했다. 하지만 이미 수성 일파의 공갈 협박에 못 이긴 태조대왕은 이렇게 대답했던 것이다. "내가 이미 늙었고 수성은 나라에 공로가 크므로 내가 그에게 양위하려는 것이니라." 그리고 12월에 제위를 내주고 별궁으로 물러나 은퇴하고 말았다.
어쨌거나 마침내 고대하던 제위에 오른 차대왕은 자신의 즉위에 공이 큰 측근들을 중용한 반면, 바른 말로 간하는 충신들은 사정없이 숙청하는 등 살벌한 공포정치를 펼쳤다. 즉위에 일등공신인 미유(彌儒)와 어지류(於支留)를 좌보로 삼고 양신(陽神)을 중외대부로 삼는 등 중용하고, 자신을 죽이라고 충언했던 고복장은 처형해 버렸던 것이다. 예나 이제나 독재자일수록 자신의 정권 안보에 관해서는 신경이 날카롭게 마련이다. 그 역시 권좌가 불안했기에 선왕인 태조대왕의 태자요, 자신의 친조카인 막근을 자객으로 하여금 암살하도록 했다. 그러자 막근의 아우인 막덕(莫德)은 다음은 자기 차례라고 생각하고 아예 자살하고 말았다.
● 차대왕의 폭정에 유혈혁명 일으킨 명림답부.
명림답부(明臨答夫)은 이러한 때에 몸을 일으켜 우리 역사상 최초의 반정에 나섰던 것이다.
서기 165년 3월 별궁에서 쓸쓸히 노년을 보내던 태조대왕이 세상을 떴다. 그리고 7개월이 지난 그해 10월에 연나부(椽那部)의 조의선인(早衣仙人) 명림답부가 군사를 일으켰다. 차대왕의 20년에 걸친 폭정을 종식시키기 위해서였다. 명림답부에 의해 목숨이 끊어질 때에 차대왕도 96세였으니 천수를 누릴 만큼 누린 셈이었다.
차대왕을 제거한 명림답부는 태조대왕의 두 아들이 모두 죽고 없기에 그의 막내아우인 백고(佰苦)를 모셔와 제위를 잇게 했다. 그가 신대왕(新大王)이다. 그러나 신대왕도 제위에 오를 때에는 이미 77세의 고령이었다. 또 추산해보건대 명림답부도 거병(擧兵)했을 때 나이 99세였다. 왜냐하면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高句麗本記)에 따르면 그가 죽은 것이 서기 179년 113세였다고 했으니 출생은 66년이요, 혁명을 일으키던 165년에는 99세가 되기 때문이다.
신대왕은 차대왕이 맏형 태조대왕의 제위를 넘볼 때에 목숨을 걸고 이에 반대했기에 지난 20년간 도성인 국내성에서 멀리 떨어진 깊은 산중에 숨어살고 있었다. 혁명에 성공한 명림답부는 사람들을 불러 백고를 찾아 궁궐로 모시고 와 제위에 오르게 했다. 이렇게 집권한 명림답부는 신대왕으로 하여금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리게 하는 등 화합정책을 펼쳐 차대왕의 폭정으로 피폐해진 민심부터 어루만지도록 했다. 이에 따라 생업을 버린 채 산야로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던 백성들도 제 고향 제 집으로 돌아와 차츰 안정을 되찾았다.
신대왕(新大王)은 행정조직을 개현하여 좌보와 우보제도를 없애고 국상을 신설하여 초대 국상(國相)으로 자신의 즉위에 일등공신인 명림답부(明臨答夫)를 임명했다. 고구려 역사상 최초의 혁명을 일으켜 차대왕을 제거하고 신대왕을 추대한 뒤 고구려 최초의 국상이 된 명림답부의 가장 큰 공적이라면 좌원대전(坐原大戰)에서 승리하여 후한을 굴복시킨 일이라고 할 수 있다.
● 좌원대전(坐原大戰)을 승리로 이끌어 후한을 굴복시키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高句麗本記) 신대왕(新大王) 4년(서기 168년) 조의 기록에는 "한나라의 현도군 태수 경림(耿臨)이 침범해와 우리 군사 수백 명을 죽이므로 국왕은 스스로 항복하여 현도군(玄途郡)에게 복종할 것을 청했다."는 대목이 있다. 이는 참으로 허황하기 그지없는 중화 사대주의 모화사상가 김부식다은 망발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한창 기세를 뻗어가는 거대왕국 고구려가 다 망해가는 한나라, 그것도 황제의 친정(親征)이 아닌 일개 지방관인 태수가 쳐들어와 겨우 수백 명의 군사가 전사했다고 해서 항복을 자청하고, 한나라 자체도 아닌 현도군에게 복종을 맹세했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린가 말이다. 이야말로 소도 듣고 개도 듣는다면 기가 막혀 웃을 노릇이다.
어찌하여 이런 망발이 비롯되었을까. 중국의 사서(史書)들은 하나같이 이른바 '춘추필법(春秋筆法)'이라고 하여 중국은 높이고 다른 나라는 깔보며, 중국이 패배한 치욕은 감추거나 얼버무리고 주변국의 패전(敗戰)은 크게 부풀리는 못된 습관이 있으면 천하가 모두 잘 아는 사실이다. 당시 한나라의 사정은 고구려가 조금만 더 강한 힘으로 밀고 들어가면 나라가 거덜 날 위험한 처지에 빠져 있었다.
고구려가 점차 장성하여 요하를 건너 요서와 북경 지방은 물론 산동반도 일대까지 고구려 군사들의 용장(勇壯)한 말발굽 아래 무참하게 짓밟히는 사태가 쉴새없이 이어지자, 이러한 열세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보려고 틈만 나면 요서지방의 한나라 태수들이 고구려의 서쪽 변경을 침범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 기록은 후한(後漢)의 현도태수 경림(耿臨)이 열세를 인정하고 고구려에 화해를 청한 역사적 사실을 '삼국지(三國志)'의 저자 진수(陳壽)가 왜곡하여 기술한 것을 김부식이 의도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대로 베겨 슨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고구려의 강성함에 위기를 느낀 후한은 당분간 고구려의 기세를 눌러놓은 뒤 국내 문제를 해결하고자 172년 11월에 수만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당시 사정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이렇게 전한다.
'한나라에서 대군으로 우리나라를 공격했다. 대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공격과 방어 어느 쪽이 유리한지 물으니 여러 사람이 의논하여 말하기를, "한나라는 군사의 수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를 업신여기는데 만약 나가서 싸우지 않으면 적들은 우리가 비겁하다 하여 자주 올 것이요, 또한 우리나라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으니 이야말로 한 사람이 문을 지켜도 만 사람을 당하는 격입니다. 한나라 군사가 아무리 수가 많더라도 우리에게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니 청컨대 군사를 내어 막아버리소서" 하였다.
이에 명림답부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한나라는 나라가 크고 백성이 많아 이제 강병으로써 멀리 쳐들어오니 그 기세를 당할 수 없을 분 아니라, 군사가 많은 자는 싸워야 하고 군사가 적은 자는 지켜야 한다는 것은 병가(兵家)의 상식입니다. 이제 한나라 사람들이 천릿길에서 군량을 운반하매 오랫동안 지탱할 수 없을 것이니, 만약 우리가 구렁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고 곡식 한 톨 없이 들판을 비워놓고 기다리게 되면 적들은 반드시 열흘이나 한 달이 넘지 않아서 굶주리고 피곤하여 돌아갈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강병으로써 친다면 필승할 것입니다." 하였다.
대왕이 그렇게 여겨서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니 한군(漢軍)이 치다가 이기지 못하고 장수와 사졸들이 굶주려서 퇴각하매 이때 명림답부(明臨答夫)가 수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좌원에서 교전하니 한나라 군사가 크게 패해 한 필의 말조차 돌아가지 못했다. 대왕이 매우 기뻐하여 답부에게 좌원과 질산을 주어 그의 식읍(食邑)으로 하였다.'
● 탁월한 전략으로 한나라 군사 전멸시켜
이처럼 치밀하고 신중한 전략으로 한나라 현도군(玄途郡)의 침략군을 일거에 무찌르며 좌원대전(坐原大戰)에서 대승(大勝)을 거둔 명림답부(明臨答夫)는 고구려의 국력 신장기를 이끈 당대의 영걸이었다. 명림답부는 서기 179년 9월에 113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신대왕(新大王)은 친히 찾아가 조문하고 7일간 조회를 중지했으며, 예를 갖춰 질산에 장사지낸 뒤 20여호를 묘지기로 두었다. 그리고 그해 12월에는 명림답부가 옹립했던 신대왕도 재위 15년만에 붕어(崩御)하니 그의 나이 또한 당시로서는 고령인 97세였다고 사서는 전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명립답부 사후 그의 손자로 추측되는 명림어수(明臨於漱)가 동천왕(東川王)대인 230년에 국상(國相)에 임명되었고, 역시 그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명림홀도(明臨笏覩)가 중천왕(中川王)대인 256년에 국왕의 사위인 부마도위(駙馬都尉)가 되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한 그의 출신부족인 연나부(椽那部)는 여러 명의 왕비를 배출한 것으로 기록은 전한다.
명림답부는 일세의 영걸이면서도 훌륭한 인격자였다. 그가 강력한 독재자인 차대왕(次大王)을 제거할 수 있었던 것은 그보다 더 강력한 무력(武力)과 치밀한 계획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음만 먹었다면 자신이 제위에 오를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새로운 임금을 내세워 충성을 다 바쳤던 것이다. 그러니 어찌 명림답부(明臨答夫)를 가리켜 의로운 재상(宰相)이며 강직한 무인(武人)이라고 하지 않을 것인가.
참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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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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