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보급과 연구를 결심하다.
국어학의 과학적 연구를 개척한 학신(學愼) 주시경(周時經)은 1876년 11월 7일 황해도 봉산군 쌍산면(雙山面) 무릉골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주면석(周冕錫)은 과거 시험에 거듭 실패하면서도 여전히 관직 진출의 꿈을 버리지 못한 선비로서 가계는 돌보지 않고 한서(漢書)만 읽었던 듯하다. 그래서 그가 두 누이와 형 밑으로 태어날 무렵에는 가난으로 허덕이고 있었다.
아버지는 서른두살, 어머니는 스물아홉살로 아직 한창나이였지만, 생활고에 찌든 어머니는 건강을 크게 상하여 젖도 제대로 내지 못하였다. 갓난아기에게 미음을 쑤어 먹일 쌀도 넉넉하지 않아 아기가 영양 실조에 걸려 자주 기절을 하곤 하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주시경은 매우 영민하고 슬기로운 아이로 성장하였다. 탐구심이 강하고 민족 의식이 누구보다 깊었던 그는 이회종(李會鐘)이 운영하는 서당에 2년 동안 다니면서 한문(漢文)을 배웠다. 그 무렵의 심경을 그는 국문론(國文論, 1897년)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내가 배우려는 것은 결국 한문으로 씌여진 문장의 의미와 그 교훈이 아닌가? 서당에서 스승이 한문의 의미를 해석할 때는 반드시 우리 말로 되새기지 않는가? 우리 말은 결국 우리 생각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한문 또한 하나의 말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 어려운 한문을 쓰지 말고 누구나 잘 아는 우리 말로 가르치면 쉽게 배울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도 한문을 배우지 않으면 그 교훈을 알 수 없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가? 만일 그 교훈을 우리 말로 기록한다면 얼마나 편리하고 쉽게 배울 수 있을까?
내가 십년 동안 공부하여 얻은 지식을 만약 우리 말로 배웠다면 대략 3, 4년이면 충분하지 않았을까? 아니, 그보다 더 일찍 배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이 들자 나는 서당 공부가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가를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우리 말이 있고, 그 말을 적을 수 있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옛 선비들은 한문만을 진정한 문자와 학문이라 여기고 훈민정음은 돌아보지 않았으니, 이는 결코 옳지 못한 일이다.
한문은 중국의 말을 기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말이 중국 언어보다 낫지 않을 리 없고, 훈민정음이 한자에 뒤질 것이 없을 것이다. 아니, 훈민정음은 한자에 뒤지지 않는 정도가 아니다. 그토록 어렵게 배우는 한자에 비한다면 훈민정음은 얼마나 알기 쉬우며, 아름다운 문자인가? 그렇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은 훈민정음을 내가 빛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바르게 펼쳐야 하지 않겠는가?'
아직 소년 티를 벗지 못한 열일곱살의 나이에 우리 민족 문화의 위대한 창조물인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바르게 이해하고, 이처럼 민족의 자주성에 기초한 독창적인 사고를 확고히 한 것은 그의 소질이 범상치 않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우리 국어학사에 일대 전환을 가져올 징조를 알리는 사건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결심한 주시경은 이제 한문 공부를 그만두고 새로운 학문을 찾으려 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선진적인 학자로 알려진 박세양(朴世陽), 정인덕(鄭寅德) 두 스승 및에서 산수, 지리, 영어 등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1894년 초에 갑오농민항쟁(甲午農民抗爭)이 전라도 고부에서 일어나 전국의 농민을 떨쳐 일어나게 하였다. 그의 고향인 황해도 각지에서도 농민들이 궐기하여 격렬하게 싸운다는 소식이 잇달아 서울로 전해졌다.
시세에 민감하고 혈기 왕성한 열아홉살의 그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두메산골인 그의 고향은 시류와 무관한듯 조용하기만 하였다. 시골집에서 서울의 격렬한 상황을 전해들으니 오히려 더 애가 탔다. 그래서 그는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 무렵에는 이미 일본군이 청나라 군사들을 공격하여 대회전(大會戰)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런 소란한 분위기에 김홍집(金弘集)을 중심으로 신정부가 만들어지고 갑오경장(甲午更張)이라는 개혁정책이 선포되었다. 그리하여 민족의 자주성을 주창하여 독립 국가로서 개국 기년을 사용하고, 관제를 개혁하고, 신분 차별을 타파하며, 사민평등을 주장하여 노예를 해방하고, 과부의 재혼이 허락되며, 과거 제도가 폐지되는 등 단숨에 새로운 나라가 태어날 듯한 환상을 주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곧 일제의 혹심한 침략 간섭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그리고 농민혁명군도 일본군에 의해 궤멸되어 나라는 다시 어두운 구름에 휩싸이게 되었다.
◆ 계몽운동(啓蒙運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다.
민족적인 문화와 참신한 학문을 바라 마지않던 주시경(周時經)은 서울에 돌아온 직후인 8월, 큰아버지와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단발(斷髮)을 하고 신학문을 가르치는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였다. 당시 아직 봉건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회 풍조 속에서 가족의 반대를 뿌리치고 머리카락을 자른다는 것은 용기 있고 진보적인 행동이었을 뿐만 아니라 가문과 의절까지 해야 하는 사건이었다.
그는 우선 스스로 살아가기 위해 배재학당에서 경영하는 인쇄소에 잡역으로 일하며 틈틈이 학교 수업을 받았고, 밤늦게까지 등잔 밑에서 공부하였다. 특히 그는 영어 공부를 통하여 배운 알파벳 발음과 철자법, 문법 구조 등의 이론을 훈민정음(訓民正音)에 응용하여 우리 말의 풍부한 단어와 풍부한 변화에 걸맞는 문법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외국어와 비교 연구를 통하여 우리 말의 풍부한 발음과 아름다움, 풍부한 어휘, 우리 말의 복잡한 구조, 합리적이고 유연한 변화를 깊이 연구할 수 있었다.
주시경은 연구를 진행하면서 환희를 맛보았다. 그는 쉴새없이 연구에 정신을 집중하였으므로 연구 주제가 머리를 떠나지 않아 사람들과 부딪치기도 하고 전봇대에 머리를 부딪치기도 하였다.
그가 어렵게 고학 생활을 계속하던 1895년 8월, 일본 군인들과 검객들이 궁궐에 난입하여 왕후 민씨를 시해하는 포학한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저질러 전국민을 격분하게 만들었다. 때마침 미국에 망명해 있던 서재필(徐載弼)이 친미파 세력의 주선으로 귀국하여 서울에서 성대한 연설회를 개최하였는데, 주시경도 연설회장으로 달려갔다.
넓은 국제적 시야를 보여주는 서재필의 열변은 군중을 감동시켰고, 세계의 새로운 지식을 연구하는데 열의를 불태우고 있던 스무살의 청년 주시경은 금새 서재필의 열렬한 신봉자가 되었다.
서재필은 그후 한때 배재학당에서 교편을 잡은 일이 있었는데, 주시경은 서재필의 깊은 신뢰를 얻었다. 서재필이 1896년에 선진적인 청년들을 모아 독립협회(獨立協會)라는 정치 단체를 만들고 같은 해 8월 15일에 독립신문(獨立新聞)을 발간하였을 때, 그는 서재필의 신임을 받아 이 신문의 회계 겸 교정 담당이 되었다.
이는 서재필이 주시경의 학비를 생각한 배려였는지도 모르지만, 순한글로 발간된 이 신문의 교정을 완벽히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은 주시경 말고는 적임자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교정뿐만 아니라 기사 정리, 기사 작성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생활의 안정을 위해서인지 스물한살의 그는 아내를 맞이하는데, 당시로서는 결코 조혼(早婚)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이상적인 결혼 연령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는 그해 민주적인 입헌 정치를 주장하는 학생들을 결집하여 협성회(協成會)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이 조직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학생 단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모임의 발기인인 그는 사적(司籍)이라는 직책을 맡았는데, 이는 학생 조직의 책임자를 뜻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협성회에서는 협성회보(協成會報)라는 주간 신문을 발행하였다. 이것도 순한글 신문으로 독립신문과 함께 당시 민중 계몽운동에서 대표적인 역할을 하였다.
1898년 4월 당시 정부는 서재필이 독립협회와 협성회를 부추겨 정부의 정책을 비난한다는 구실로 정치 고문직을 그만두게 하고 국외 퇴거를 명령하였다. 주시경은 동지들과 함께 서재필의 해임에 반대하여 정부에 항의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서재필은 출국할 때 동지들에게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의 뒷일을 부탁했는데, 특히 주시경에게 여러 가지로 뒷일을 부탁하였다고 전한다.
이해 9월에 그는 배재학당의 만국지지과(萬國地志科)를 졸업하고 바로 그 학당의 보통과(普通科)에 입학하고, 다시 악우들을 모아 동문동식회(同文同式會)를 조직하여 개혁운동의 선두에 섰다.
독립협회 주최 아래 같은 해 10월 서울 종로에서 수만 군중이 운집하여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가 열려 '외국인들의 뜻에 다르지 말 것, 외국인과의 이권 계약을 대신이 단독으로 처리하지 말 것, 국가 재정의 수지를 공정히 하고 예산을 국민들에게 공개할 것, 언론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고 중대 범죄를 공판에 부칠 것' 등 6개 조 개혁안을 결의하고 정부에 그 실행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개혁을 약속했던 정부가 실행에 옮기려 하지 않자 독립협회는 많은 군중을 모아 날마다 항의 시위를 하였다. 정부는 이에 놀라 11월에 독립협회 해산을 명령하고 간부 17명을 검거하여 투옥하였다.
주시경은 이에 분노하여 동지들과 함께 대대적인 항의 집회를 열었지만 반동 어용 단체인 황국협회(皇國協會)가 수천명의 불량배와 보부상을 동원하여 항의 집회를 폭력으로 짓밟아 버렸다.
주시경은 독립신문이 폐쇄되고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부득이 시골의 친척 집에 몸을 맡기고 잠시 농부가 되어 밭일을 하며 보냈다. 그?? 석달 뒤 사태가 진정되어 안전해졌다는 동지의 소식을 받고 서울로 올라와 학업에 전념하게 되었다.
주시경은 어러한 시련 속에서도 한결같이 연구 활동을 계속하여 1900년 스물다섯살에 배재학당 보통과를 졸업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방면에 걸쳐 연구의욕을 불태웠다. 그래서 인천의 이운학교(利運學敎)에 가서 잠시 항해술을 배우는 한편, 서울의 흥화학교(興化學敎)에서 측량술을 배우고 또 이화학당(梨花學堂)에서 영국인 의사한테 영어와 의학을 배우고 그 영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
그리고 외국어 학교에서 일본어와 중국어 강의를 듣고 기계학과 종교학도 독학으로 연구하였다. 그러나 그의 연구의 중심 과제는 항상 국어학이었다.
◆ 늘 민중과 함께
그는 학문 연구와 민중 계몽운동을 따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이십대 청춘 시절은 그러한 신념으로 일관되었으며, 그에게 학문을 위한 학문 연구 따위는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한문의 마술에 철저히 포로가 되어 있는 민중을 일깨워 지식 흡수를 향한 진정한 문호를 열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위하여 국어를 정리하고 국어 교육에 온 힘을 기울어야 한다."
이것이 그의 철저한 신념이었다.
그의 폭넓은 연구와 한결같은 계몽운동, 식을 줄 모르는 교육열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민중의 지지를 받게 되었고, 그의 명성은 서서히 높아져 갔다.
종래의 한학에 집착하는 양반들은 그를 업신여겼지만 근대적인 학문을 깨친 학자들은 그의 학문적 가치를 인식하기 시작하였고, 폭넓은 민중은 그에게 절대적인 존경심을 품게 되었다.
서울 각지에서 국어강습회가 열리게 되고 근대적인 학문을 가르치는 학교에서는 잇달아 국어를 강의하게 되었다. 이러한 강습회와 학교에서는 앞다투어 그에게 강의를 청해오게 되었다. 주시경은 그러한 요청을 최대한 들어주며, 초인적인 정열로 쉴 틈도 없이 뛰어다니면서 강의를 계속하였다.
주시경은 대중과 함께 연구하고 대중과 함께 투쟁하는 생활을 몸소 실천하였다. 그가 서른살 전후에 강의한 기관을 열거해보면 그가 얼마나 뜨거운 신념을 불태우는 교육자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당시 청년학원(靑年學院), 공옥학교(功玉學敎), 서우학교(西友學敎), 이화학당(梨花學堂), 명신학교(明新學敎), 기호학교(畿湖學敎), 숙명대학(淑明大學), 진명대학(進明大學), 휘문전문학교(徽文專門學敎),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敎), 중앙대학(中央大學), 융희강습소(隆熙講習所), 사범강습소(師範講習所), 배재학당(培材學堂), 서북강습소(西北講習所), 협성학교(協成學敎), 경신전문학교(敬新專門學敎), 영창학당(永彰學當), 외국인 연구소 등 무려 20개소의 교육기관에서 강의하였다.
그 중에서도 보성전문학교에 설치된 일요 강습소는 유명한 것이었다. 일요 강습소에는 직접 학교에 다니며 그의 강의를 들을 수 없는 청년 대중이 모여들었다.
그는 강의에 필요한 교재를 자비로 등사하여 커다란 보따리를 싸들고 다니면서 수많은 학생들에게 나누어주고 강의를 하였다.
연구에 열중한 그는 궁핍한 살림에서도 어렵게 돈을 변통하여 많은 책을 샀다. 그리고 그 커다란 책 보따리를 들고 돌아다니는 일이 많아서 그에게는 '주보따리', '주보퉁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그는 국어뿐만 아니라 지리, 역사, 수학을 가르치기도 하여 박학다재한 선생으로서 학생들의 존경을 받았다. 이후 국내의 국어학자는 대부분 그의 문하에서 나온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학교는 대부분 경영이 어려워 보수가 매우 적고, 그것도 몇달치씩 밀리기 일쑤였다. 그래서 주시경은 일년 내내 궁핍하였다. 언제나 무명옷에 짚신을 신고 밥을 굶는 일도 많았다.
그는 서울 변두리 상동(尙洞)에 있는 조그만 초가집에서 살았는데, 낮에도 햇빛이 잘 들지 않아 등잔불을 밝히지 않으면 방안에서도 책을 읽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한번도 결강하거나 지각하지 않았으며, 시간이 없을 때면 교무실에도 들르지 않고 바로 교실로 직행하기도 하였다.
저명한 국어학자였던 이병기(李秉岐, 1892~1968) 전 중앙대학교 교수는 스승 주시경의 당시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주 선생이 강의하는 교실은 언제나 지나다닐 수도 없을 만큼 학생들이 꽉 들어찼다. 이 교실에서는 한눈을 팔거나 하품을 하거나 잡담을 하는 것은 애초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단지 들리는 것은 선생의 부드러운 음성과 여기저기서 들리는 연필 소리뿐이었다.
조금 갸름한 듯 넓은 이마를 가진 선생의 얼굴에는 언제나 엄숙하면서도 온화하고 부드러운 모습이 감돌고 있었다. 선생이 웃는 모습은 특별히 보지 못하였지만 선생이 화를 내시는 모습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선생의 눈에는 언제나 열정이 넘칠 듯하몄으며, 그 커다란 체구와 품위 있는 풍체는 저절로 모든 이에게 존경하고 복종하는 마음을 불러일으켰다.
선생의 말씀은 달변은 아니지만 눌변도 아니었다. 언제 어떠한 문제를 말씀하시더라도 듣는 사람들에게 지루함을 주지 않고 언제나 당당한 진실감을 느끼게 하였다. 그리고 선생의 말씀에는 선생의 성격과 행동이 잘 나타나고 있었다. 참으로 선생은 인격으로 보더라도 당시 제일인자였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다.'
이처럼 존경받는 온화하고 훌륭한 교육자였던 주시경은 한편으로 국어 문제를 정책에 반영시키라고 정부에 요구하기를 잊지 않았다.
당시 학계의 대표자와 같았던 서울 의학교장 지석영(池錫永, 1855~1935)은 신정국문(新訂國文) 6개조를 정부에 상신하여 1905년에 그 시행이 공포되었는데, 당시로서는 일반에 수용되기 어려운 난점도 있었다.
당시 서른살의 청년 학도인 주시경은 당당히 정부의 학부(學部) 내에 국문학 연구소를 개설할 것을 건의하고, 국어를 시대에 맞게끔 개혁할 것을 호소하였다. 2년 뒤인 1907년 7월 그의 제안이 수용되는 형식으로 학부 내에 국문학 연구소가 설치되었다.
위원으로는 당시 학부국장을 비롯하여 대표적인 학자들이 선출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젊은 주시경은 돋보이는 존재였다. 그러나 당시는 이미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연구위원 중에는 일본인도 한명 끼여 있었다.
연구위원들은 1907년 9월부터 1909년 12월에 이르기까지 23회에 걸쳐 회의를 거듭하고, 국어학사와 훈민정음의 역사, 한글 문자의 철자와 발음, 문법 등에 관한 연구 성과를 정리하고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악랄한 식민지화 공작에 따른 정국 불안과 학부대신의 교체 등으로 그 성과를 공표하지도 못한 채 연구소 자체가 해산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주시경은 이런 상황에서 1908년 7월 국어문전음학(國語文典音學)을 발간하였다. 이 책은 국문학 연구소의 연구 중심 과제를 정리한 것으로 연구소의 일도 실제로 그가 중심이었던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책은 한글과 한자를 섞은 낡은 문체여서 대중에게는 어려웠다. 그는 자기의 주장대로 순한글 문법으로 1909년 국어문법을 발간하였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근대적인 문법서를 대표하는 저작이었다.
◆ 자주독립정신을 지키기 위하여
그는 항상 독립정신을 불태우던 애국자였다.1906년 12월에 의병항쟁(義兵抗爭)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일제에 체포되어 대마도로 유배된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이 순국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자 서울의 젊은 학도 70여명이 서울 교외의 절에 모여 최익현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도 집회를 개최하였다.
주시경은 그 집회에 참가하고 돌아오다가 우연히 한 개신교 목사와 동행하여 대화를 나누었는데, 두 사람은 무력적인 침략보다 정신적인 침략이 더 심각한 일이라고 이야기하였다. 주시경은 서양의 근대적인 학문을 흡수하기 위하여 개신교 신자들과 어울렸으며, 그들이 권유하는 대로 교회에 다니며 신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목사와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나는 이미 정신적 침략을 받았소. 자주독립정신이 왜곡되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개신교를 믿으려 한다면 그것은 이미 사람이 아니오."
그는 이렇게 단언하고, 개신교와 절연하고 민족적 종교로 개종하겠다는 뜻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시조(始祖)인 환웅(桓雄), 단군(檀君)을 숭배하는 대종교(大倧敎)의 열렬한 신자가 되었다고 한다.
1907년 12월 당시 조선통감인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英親王)을 일본에 인질로 연행할 때, 그 수행원으로 따라가는 사람에게는 장차 출세를 보장하겠다는 고시(告示)가 내걸리자 많은 사람들이 응모하였다. 이때 주시경(周時經)의 아우 시강(時綱)도 수행원에 응모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그는 아우를 심하게 꾸짖어 말렸다고 한다.
"이처럼 불의에 편승하여 영달을 꾀하려 하는 것은 이 나라 국민으로서 있을 수 없는 행위다."
1910년 8월 경술병합(庚戌竝合)으로 나라의 주권이 강탈당하고 조국의 영토가 일제의 식민지로 떨어지자 많은 애국지사들은 설령 나라는 무너져도 산천이 남고 우리 민족이 존재하는 이상 반드시 독립을 이루겠다는 신념으로 헌신적인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주시경도 동포들에게 자주독립정신을 심어주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동지들과 함께 우선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대표적 문헌을 발간하여 널리 보급하는 운동에 나섰다.
한편 그는 국어사전을 편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는 우리나라를 찾아온 중국인 학자에게 안남망국사(安南亡國史)라는 책을 받아 읽고, 그 책이 우리나라의 망국의 운명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에 놀랐다. 그리고 이 책을 널리 보급하면 민족의 자주독립정신을 분발시키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신하였다. 그는 즉시 이 책을 한글로 번역하여 박문서관(博文書館)에서 출판하였다.
일제는 즉시 이 책을 발매 금지했지만, 책은 은밀히 판매되어 많은 사람에게 건네져서 마침내 독립운동가들의 필독서처럼 되었다.
일제의 혹독한 민족문화 말살정책으로 이제 국어학 연구 성과를 출판하는 일도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주시경은 1914년 자필 원고를 석판 인쇄하여 '말소리'라는 문법서를 발간하였다.
하지만 주시경의 이러한 민족적인 저술활동은 사사건건 일제의 탄압을 받아 제약을 받았다. 그러자 그는 국외로 망명해서 연해주와 중국 동북지방의 독립운동가들과 행동을 같이하여 반일운동에 헌신할 결의를 굳혔다.
그래서 고향의 식구들에게 남몰래 이별을 고하고 망명을 준비하던 중 돌연 병상에 누워 1914년 7월 27일 서른아홉의 젊은 나이로 삶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는 평생을 매우 가난하게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민족에 대한 애정을 학문으로 숭화시켜 동포들에게 애국정신을 불어넣고자 노력한 인물이었다. 그의 투쟁은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그는 완고한 수구파의 포위망 속에서 중상과 박해를 받으면서도 국어 연구의 필요성을 호소하고 그 일에 나서서 헌신했다.
그리고 그의 활동 성과가 겨우 우리 민중의 마음을 널리 사로잡기 시작하였을때 일제의 탄압으로 가혹하기 그지없는 압박을 받았다. 그러나 주시경은 일제의 탄압 정책에 저항하면서 비합법적인 계몽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그의 생활이 너무나 비참하여 일본인 어용학자들은 "잠자코 일본의 조선 통치에 따르고 협력하면 밥 걱정은 안해도 될 텐데..."라며 그를 비웃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불굴의 강인한 애국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 주시경에게 감동한 어느 유지가 그에게 은밀히 집을 한채 사주어 여기저기 비가 새는 초가집살이를 면하게 해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주시경은 좋은 집이 생겼다는 것보다 자신이 힘들게 모은 귀중한 문헌을 안심하고 보관할 수 있는 곳이 생겼다는 것을 더 좋아하였다고 한다.
주시경이 이루어낸 국어 연구의 성과는 가히 불멸의 금자탑으로 평가되고 있다. 후세의 학자들은 그의 공훈(功勳)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과학 이론의 측면에서는 국어의 음운론에서 독창적인 이론적 토대를 쌓았고, 국어 문법 체계 연구에서 주체성 있는 새로운 길을 열었고, 철자법 연구에서 훈민정음의 초성, 종성 등 철칙을 적용하여 오늘날의 형태와 원칙을 확립하였다.
문화, 계몽 사상적 측면에서는 한자 사용을 폐지하고 일반 용어뿐만 아니라 학술 용어에서도 고유한 우리 말을 사용하여 쉽고 문화성이 있는 국어 배양의 필요성을 제창하여 그 면에서도 모범을 보였고, 종래의 음절식 문자를 없애고 문자를 풀어 가로쓰기할 것을 주장하고 직접 그 실천적 모범을 보였다.'
그는 교육자로서 십수년 동안 실로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제자들에게 그만큼 경모받는 교육자도 드물 것이라고 한다.
그의 제자들은 모두 일제 식민지 시대를 겪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스승의 삶을 인생의 거울로 삼아 스승의 정신을 욕되게 하지 않으려고 힘썼다. 그의 제자들은 일제 침략 통치 아래 벌이는 민족독립운동에서 중요한 기둥 역할을 수행하였다.
참고서적
김형광 '인물로 보는 조선사' 시아출판사 2002년
송은명 '인물로 보는 고려사' 시아출판사 2003년
김용만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 창해 2001년
황원갑 '민족사를 바꾼 무인들' 인디북 2004년
이덕일 '고구려 700년의 수수께기' 대산출판사 2000년
이덕일 '살아있는 한국사' 휴머니스트 2003년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 들녘 2000년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들녘 2000년
김기홍 '천년의 왕국 신라' 창작과비평사 2000년
박선식 '한민족 대외 정벌기' 청년정신 2000년
이도학 '백제 장군 흑치상지 평전' 주류성 1996년
송기호 '발해를 찾아서' 솔출판사 1993년
윤병식 '의병항쟁과 항일 독립전쟁'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6년
한시준 '임시정부 활동과 의열투쟁의 전개'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8년
장세윤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 솔출판사 2001년
{이상}
'역사자료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한국의 역사 인물」61.살아서 전설을 남긴 평민 의병대장 신돌석(申乭石) (0) | 2010.01.26 |
---|---|
[스크랩] 「한국의 역사 인물」62.`붉은 해`를 삼킬 수 있다고 믿었던 항일 의병대장 기삼연(奇參衍) (0) | 2010.01.26 |
[스크랩] 「한국의 역사 인물」64.민족 자주권의 정당성을 역사에서 찾은 신채호(申采浩) (0) | 2010.01.26 |
[스크랩] 「한국의 역사 인물」65.허얼빈에서 울린 정의의 총성, 안중근(安重根) (0) | 2010.01.26 |
[스크랩] 「한국의 역사 인물」66.일본군을 공포에 떨게 했던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의 상승장군 홍범도(洪範圖) (0) | 2010.0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