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6년의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을 전후한 시기에 국론을 주도하던 위정척사론자(衛正斥邪論者) 가운데 기호지방의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와 함께 그 노선을 대표하던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은 호남지역의 위정척사운동(衛正斥邪運動)을 주도하던 인물이다. 1895년 반일의병항쟁(反日義兵抗爭)이 개시되면서 유인석(柳麟錫), 이소응(李昭應) 등 화서학파 인물들이 항일전(抗日戰)에 대거 투신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에 비할 때 노사학파로 의병항쟁에 적극 동참하였던 인물은 상대적으로 매우 드물다고 하겠다. 하지만, 기삼연(奇參衍)은 노사학파 인물 가운데 의병항쟁에 적극적으로 헌신한 두드러진 인물이다.
기삼연은 1851년 1월 113일 전남 장성에서 진사 기봉진(奇鳳鎭)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자는 경로(景魯)이고 호는 성재(省齋)이며, 행주(幸州)가 본관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당대의 명유(名儒)로 호남 유림을 대표하던 재종숙(再從叔)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하지만 일반 유생들과는 달리 그는 번쇄하고 사변적인 심성이기학(心性理氣學)에 얽매이지 않고 보다 널리 학문을 구해 경서 외에도 도교, 불교의 모든 경전과 패관(稗官), 야사(野史), 국외사(國外事) 등에 이르기까지 답습하였다. 특히 병서(兵書)도 탐독하는 한편, 실제 여러가지 병법을 시험해 보기까지 하였는데, 훗날 의병대장으로서의 면목이 이처럼 어린 시절부어 이미 드러났다고 하겠다.
기삼연은 또 젊어서 부모형제의 권유로 과거에도 응시하였으나 과장(科場)의 문란으로 인해 급제에 실패하고 말았다. 어린 시절에 그는 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손자인 이준용(李俊鎔)과 사귀었다. 대원군에게 문안을 드린 적이 없어 그의 노여움을 샀지만, 이로 인해 훗날 왕비 민씨로부터는 도리어 호감을 살 수가 있었다고 한다.
1895년의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斷髮令)을 계기로 전국에서 의병들이 봉기하자 이듬해 3월에 기삼연의 삼종질(三從姪)인 기우만(奇宇萬)과 고광순(高光洵)이 광주향교에서 동지들을 모아 거의(擧義), 토적복수(討賊復讐)를 다짐하였다. 이때 기삼연(奇參衍)은 장성에서 3백여명의 장정을 동원, 광주로 진군하여 기우만과 합세한 뒤 스스로 군무(軍務)를 자원하였다. 그러나 그해 4월 진주의 노응규(盧應奎) 의진(義陳)을 격파한 친위대장 이겸제(李謙濟)의 관군이 그 여세를 몰아 진격해오고, 또 남로선유사(南路宣瑜使) 신기선(申箕善)이 내려와 의병부대를 해산할 것을 권유하자 대장인 기우만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의진(義陳)을 해산하고 말았다.
의병부대 해산에 극력 반대했던 기삼연은 "선비와는 함께 일할 수 없구나. 장수가 밖에 있을 적에는 임금의 명령도 받지 아니하는 수가 있는데, 하물며 강한 적의 협박에서이지 우리 임금의 본심이 아님에서랴. 이 군사를 한번 파하고 나면 우리는 모두 사로잡히고 말 것이다."라고 탄식하며 집으로 돌아와 은거하였다. 그러나 을미거의(乙未擧義)에 참가했다는 죄목으로 김한정(金漢鼎)이 거느린 전주진위대의 군사들에게 붙잡혀 서울의 평리원(平理院)에서 약 보름 동안 감금되어 있다가 평리원장 이용태(李容泰)의 배려로 석방되었다.
1907년 한국 군대가 해산된 이후 의병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향리에 은거하고 있던 기삼연은 분연히 동지들과 손을 잡고 1908년 9월 영광(靈光)의 수연산(隨椽山)에서 거의(擧義)의 깃발을 들었다. 그는 자신의 의병부대를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라 지칭하고 총령(銃領)에 김용구(金容球), 참모에 김엽중(金燁中)과 김수봉(金樹鳳), 종사에 김익중(金翼中), 서석구(徐錫球), 전해산(全海山) 등을 임명하고 김태원(金泰元)을 선봉장으로 삼아 편제를 완료하였다.
기삼연은 각지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 증모에 진력하였고, 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거의(擧義)의 정당성을 천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대한매일신보사(大韓每日申報社)에도 글을 보내 전국민의 항일전(抗日戰) 동참을 적극 권유하고자 하였다. 기삼연의 창의진(倡義陳)은 각 의병장별로 별도의 단위부대를 편성해 각지로 분산,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작전목표가 정해지면 집결지와 집결일시를 각 부대에 통보하여 양민을 가장하거나 각개 행동으로 집결지에 모인 다음 일시에 작전을 수행하고는 다시 각처로 분산되는 전법을 구사하였으므로 일본 군대와 경찰은 좀처럼 기삼연 의진의 실체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기삼연(奇參衍) 의진(義陳)은 장성 지역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북상, 10월 29일 고창 문수사(文殊寺)에서 선봉장 김태원(金泰元)의 부대가 일본군 70여명을 무찌르고 주민들로부터 군량 등의 군수물자를 지원받은 뒤 서쪽의 법성포(法聖浦)로 나아갔다. 법성포에는 해로를 이용해 서울로 운송하기 위한 전라도 지역의 세곡(稅穀)이 집결되어 있었으므로 이를 탈취하고자 한 것이다. 12월 7일에 법성포로 진군한 기삼연 의진은 그곳의 순사주재소(巡査駐在所)를 습격하여 그 지역의 일제(日帝) 경찰력을 무력화시킨 뒤 집결된 세곡을 군량으로 확보하고 일부는 주민에게 분배해 주었다.
이후 기삼연 의진은 각 부대를 분산시켜 기삼연이 이끄는 본대는 담양으로, 통령 김용구(金容球)의 부대는 고창으로, 김태원의 선봉부대는 함평으로 분진(分進)하였다. 이와 같이 기삼연 의진이 장성, 고창, 영광 등지에서 기세를 떨치게 되자 일본군 광주수비대는 각 분둔대(分屯隊)의 병력을 총동원하여 10개 종대(縱隊)의 의병토벌대(義兵討伐隊)를 편성하고 1908년 1월 24일부터 광주, 나주, 장성, 함평, 순창 등지의 의병들을 진압하기 위한 작전에 나섰다.
이런 가운데 기삼연은 본대 3백여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법성포에서 장성을 지나 1월 30일 담양의 금성(金城)에 포진하였다. 이곳의 험준한 지세를 근거로 하여 그해 겨울을 넘길 생각으로 이진해온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담양에서 작전 준비를 진행하던 중 담양에 주둔한 일본 헌병대의 선제공격을 받고 의병 30여명이 전사하는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때 의병부대는 적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탈출할 가망이 없었는데, 때마침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짙은 안개가 끼여 잔여 의병은 무사히 북문으로 빠져 나갈 수가 있었다.
담양 금성의 전투에서 패배한 기삼연 의진은 곧바로 순창의 복흥산(福興山)으로 들어가 휴식을 취하였다. 의병들은 그동안의 연전(連戰)으로 전력이 크게 소모되었을 뿐만 아니라 심한 혹한이 계속되어 더 이상의 항전이 곤란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더욱이 음력 설날에 다가옴에 의병들이 귀향, 과세(過歲)할 것을 간절히 원하게 되니 기삼연은 섣달 대목을 맞아 휘하 의병들에게 창의진의 일시해산을 선언하였다. 의병들을 각기 귀향시켜 설을 지내게 한 다음 정월 보름에 다시 집결토록 한 것이다.
의진을 해산한 기삼연은 그 부근에 살던 재종제(再從弟) 기구연(奇九衍)의 집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그러나, 음력 설날 아침에 의병토벌전(義兵討伐戰)을 계속하던 일본군에게 은신처가 탄로나 피체되고 말았다. 한편, 기삼연(奇參衍)의 피체(被逮) 소식을 들은 선봉장 김태원(金泰元)은 그를 구출하기 위해 정병 30여명을 인솔하고 광주로 가는 길목인 경양역(景陽驛)까지 이르렀으나 이미 일행이 지나가고 난 뒤였으므로 달리 조처할 방도가 없었다고 한다. 일본군은 기삼연을 사로잡은 이튿날 1908년 1월 2일 광주 백사장에서 총격으로 그를 살해하였다.
기삼연이 순국한 직후 광주에 살던 안규용(安圭容)은 백사장에 방치된 그의 시신을 수습, 광주 서쪽의 탑동(塔洞)에다 정성껏 장사지냈다. 그러자 그의 곧은 절의와 애국심에 경탄한 일제(日帝) 침략자들도 그의 무덤 앞에다 '호남의병대장기공지묘(湖南義兵大將奇公之墓)'라고 새긴 목비(木碑)를 세워주기까지 했다고 전해진다.
기삼연은 일찍이 거의(擧義)를 앞둔 어느 날 붉은 해를 삼키는 꿈을 꾸고 붉은 해는 일제(日帝)를 상징하므로 자신이 반드시 일본의 침략세력을 이 땅에서 몰아내는 구국(救國)의 공훈(功勳)을 세울 것이라고 해석, 늘 이를 자신하였다. 하지만 끝내 그의 꿈은 무산되고 말았으니, 죽음을 눈앞에 두고 '군사를 내어 이기지 못하고 몸이 먼저 죽으니, 붉은 해를 삼킨 천년의 꿈도 또한 허망하도다.'라는 시(詩)는 매우 인상적인 구절이라 아니할 수 없다.
기삼연은 1851년 1월 113일 전남 장성에서 진사 기봉진(奇鳳鎭)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자는 경로(景魯)이고 호는 성재(省齋)이며, 행주(幸州)가 본관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당대의 명유(名儒)로 호남 유림을 대표하던 재종숙(再從叔)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하지만 일반 유생들과는 달리 그는 번쇄하고 사변적인 심성이기학(心性理氣學)에 얽매이지 않고 보다 널리 학문을 구해 경서 외에도 도교, 불교의 모든 경전과 패관(稗官), 야사(野史), 국외사(國外事) 등에 이르기까지 답습하였다. 특히 병서(兵書)도 탐독하는 한편, 실제 여러가지 병법을 시험해 보기까지 하였는데, 훗날 의병대장으로서의 면목이 이처럼 어린 시절부어 이미 드러났다고 하겠다.
기삼연은 또 젊어서 부모형제의 권유로 과거에도 응시하였으나 과장(科場)의 문란으로 인해 급제에 실패하고 말았다. 어린 시절에 그는 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손자인 이준용(李俊鎔)과 사귀었다. 대원군에게 문안을 드린 적이 없어 그의 노여움을 샀지만, 이로 인해 훗날 왕비 민씨로부터는 도리어 호감을 살 수가 있었다고 한다.
1895년의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斷髮令)을 계기로 전국에서 의병들이 봉기하자 이듬해 3월에 기삼연의 삼종질(三從姪)인 기우만(奇宇萬)과 고광순(高光洵)이 광주향교에서 동지들을 모아 거의(擧義), 토적복수(討賊復讐)를 다짐하였다. 이때 기삼연(奇參衍)은 장성에서 3백여명의 장정을 동원, 광주로 진군하여 기우만과 합세한 뒤 스스로 군무(軍務)를 자원하였다. 그러나 그해 4월 진주의 노응규(盧應奎) 의진(義陳)을 격파한 친위대장 이겸제(李謙濟)의 관군이 그 여세를 몰아 진격해오고, 또 남로선유사(南路宣瑜使) 신기선(申箕善)이 내려와 의병부대를 해산할 것을 권유하자 대장인 기우만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의진(義陳)을 해산하고 말았다.
의병부대 해산에 극력 반대했던 기삼연은 "선비와는 함께 일할 수 없구나. 장수가 밖에 있을 적에는 임금의 명령도 받지 아니하는 수가 있는데, 하물며 강한 적의 협박에서이지 우리 임금의 본심이 아님에서랴. 이 군사를 한번 파하고 나면 우리는 모두 사로잡히고 말 것이다."라고 탄식하며 집으로 돌아와 은거하였다. 그러나 을미거의(乙未擧義)에 참가했다는 죄목으로 김한정(金漢鼎)이 거느린 전주진위대의 군사들에게 붙잡혀 서울의 평리원(平理院)에서 약 보름 동안 감금되어 있다가 평리원장 이용태(李容泰)의 배려로 석방되었다.
1907년 한국 군대가 해산된 이후 의병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향리에 은거하고 있던 기삼연은 분연히 동지들과 손을 잡고 1908년 9월 영광(靈光)의 수연산(隨椽山)에서 거의(擧義)의 깃발을 들었다. 그는 자신의 의병부대를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라 지칭하고 총령(銃領)에 김용구(金容球), 참모에 김엽중(金燁中)과 김수봉(金樹鳳), 종사에 김익중(金翼中), 서석구(徐錫球), 전해산(全海山) 등을 임명하고 김태원(金泰元)을 선봉장으로 삼아 편제를 완료하였다.
기삼연은 각지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 증모에 진력하였고, 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거의(擧義)의 정당성을 천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대한매일신보사(大韓每日申報社)에도 글을 보내 전국민의 항일전(抗日戰) 동참을 적극 권유하고자 하였다. 기삼연의 창의진(倡義陳)은 각 의병장별로 별도의 단위부대를 편성해 각지로 분산,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작전목표가 정해지면 집결지와 집결일시를 각 부대에 통보하여 양민을 가장하거나 각개 행동으로 집결지에 모인 다음 일시에 작전을 수행하고는 다시 각처로 분산되는 전법을 구사하였으므로 일본 군대와 경찰은 좀처럼 기삼연 의진의 실체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기삼연(奇參衍) 의진(義陳)은 장성 지역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북상, 10월 29일 고창 문수사(文殊寺)에서 선봉장 김태원(金泰元)의 부대가 일본군 70여명을 무찌르고 주민들로부터 군량 등의 군수물자를 지원받은 뒤 서쪽의 법성포(法聖浦)로 나아갔다. 법성포에는 해로를 이용해 서울로 운송하기 위한 전라도 지역의 세곡(稅穀)이 집결되어 있었으므로 이를 탈취하고자 한 것이다. 12월 7일에 법성포로 진군한 기삼연 의진은 그곳의 순사주재소(巡査駐在所)를 습격하여 그 지역의 일제(日帝) 경찰력을 무력화시킨 뒤 집결된 세곡을 군량으로 확보하고 일부는 주민에게 분배해 주었다.
이후 기삼연 의진은 각 부대를 분산시켜 기삼연이 이끄는 본대는 담양으로, 통령 김용구(金容球)의 부대는 고창으로, 김태원의 선봉부대는 함평으로 분진(分進)하였다. 이와 같이 기삼연 의진이 장성, 고창, 영광 등지에서 기세를 떨치게 되자 일본군 광주수비대는 각 분둔대(分屯隊)의 병력을 총동원하여 10개 종대(縱隊)의 의병토벌대(義兵討伐隊)를 편성하고 1908년 1월 24일부터 광주, 나주, 장성, 함평, 순창 등지의 의병들을 진압하기 위한 작전에 나섰다.
이런 가운데 기삼연은 본대 3백여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법성포에서 장성을 지나 1월 30일 담양의 금성(金城)에 포진하였다. 이곳의 험준한 지세를 근거로 하여 그해 겨울을 넘길 생각으로 이진해온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담양에서 작전 준비를 진행하던 중 담양에 주둔한 일본 헌병대의 선제공격을 받고 의병 30여명이 전사하는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때 의병부대는 적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탈출할 가망이 없었는데, 때마침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짙은 안개가 끼여 잔여 의병은 무사히 북문으로 빠져 나갈 수가 있었다.
담양 금성의 전투에서 패배한 기삼연 의진은 곧바로 순창의 복흥산(福興山)으로 들어가 휴식을 취하였다. 의병들은 그동안의 연전(連戰)으로 전력이 크게 소모되었을 뿐만 아니라 심한 혹한이 계속되어 더 이상의 항전이 곤란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더욱이 음력 설날에 다가옴에 의병들이 귀향, 과세(過歲)할 것을 간절히 원하게 되니 기삼연은 섣달 대목을 맞아 휘하 의병들에게 창의진의 일시해산을 선언하였다. 의병들을 각기 귀향시켜 설을 지내게 한 다음 정월 보름에 다시 집결토록 한 것이다.
의진을 해산한 기삼연은 그 부근에 살던 재종제(再從弟) 기구연(奇九衍)의 집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그러나, 음력 설날 아침에 의병토벌전(義兵討伐戰)을 계속하던 일본군에게 은신처가 탄로나 피체되고 말았다. 한편, 기삼연(奇參衍)의 피체(被逮) 소식을 들은 선봉장 김태원(金泰元)은 그를 구출하기 위해 정병 30여명을 인솔하고 광주로 가는 길목인 경양역(景陽驛)까지 이르렀으나 이미 일행이 지나가고 난 뒤였으므로 달리 조처할 방도가 없었다고 한다. 일본군은 기삼연을 사로잡은 이튿날 1908년 1월 2일 광주 백사장에서 총격으로 그를 살해하였다.
기삼연이 순국한 직후 광주에 살던 안규용(安圭容)은 백사장에 방치된 그의 시신을 수습, 광주 서쪽의 탑동(塔洞)에다 정성껏 장사지냈다. 그러자 그의 곧은 절의와 애국심에 경탄한 일제(日帝) 침략자들도 그의 무덤 앞에다 '호남의병대장기공지묘(湖南義兵大將奇公之墓)'라고 새긴 목비(木碑)를 세워주기까지 했다고 전해진다.
기삼연은 일찍이 거의(擧義)를 앞둔 어느 날 붉은 해를 삼키는 꿈을 꾸고 붉은 해는 일제(日帝)를 상징하므로 자신이 반드시 일본의 침략세력을 이 땅에서 몰아내는 구국(救國)의 공훈(功勳)을 세울 것이라고 해석, 늘 이를 자신하였다. 하지만 끝내 그의 꿈은 무산되고 말았으니, 죽음을 눈앞에 두고 '군사를 내어 이기지 못하고 몸이 먼저 죽으니, 붉은 해를 삼킨 천년의 꿈도 또한 허망하도다.'라는 시(詩)는 매우 인상적인 구절이라 아니할 수 없다.
출처 : 한국사의 영웅과 열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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