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항일언론운동(抗日言論運動)에 참여하다.
국내 사서(史書)의 오류를 바로잡고, 민족 자주정신의 애국적 정열로 일본 군국주의 세력이 한반도 식민지 지배의 합리화를 만들기 위해 한국 역사를 왜곡하고 날조하는 행위에 맞서 역사의 진실을 파헤치는데 노력한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 역사학자로서, 또는 언론인으로서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냈다.
그는 1880년 11월 7일 충청도 청주의 산동(山東)에서 신광식(申光植)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하는데, 일설에는 청원군 문의(文義) 출생이라고도 하며 또 충청도 대덕군 산내면에서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 출생지가 이와 같이 다르게 전해지는 것은 그의 집안이 생활을 위하여 전전하였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일곱 살 때 아버지를 여읜 그는 할아버지에게 엄하게 한문 교육을 받았다. 어릴 때부터 남에게 지지 않으려는 성격이 강했던 그는 열세살 때에는 사서삼경(四書三經)에 통달하여 어른들로부터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는 열여덟살 때에 학문에 대한 재능이 인정되어 한 유력자의 추천으로 성균관(成均館)에서 공부하게 되어 서울로 상경하였다.
그 무렵 서울에서는 독립협회(獨立協會)가 설립되고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가 개최되는 등 새로운 계몽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신채호 역시 청춘의 혈기를 불태우며 그 애국 운동에 가담하였다.
1901년 스물두 살 때에 잠시 향리 근처에 설립된 문동학원(文東學院)의 강사가 되어 애국계몽운동(愛國啓蒙運動)의 전선(戰線)에 섰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는 성균관의 학우들과 함께 격렬한 반일 성명서를 발표하고, 이완용(李完用) 송병준(宋秉畯) 이용구(李容九) 등 매국적인 조정 대신들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당시 정부는 탁월한 능력을 갖춘 신채호를 회유하기 위하여 그를 성균관 박사에 임명하였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출세길을 뿌리치고 남궁억(南宮檍), 장지연(張志淵), 박은식(朴殷植) 등 우국지사들이 발간하던 황성신문(皇城新聞)의 논설위원으로 선임되어 당당한 애국적 논설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 해 10월 일본의 특파 대사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대한제국 정부에 '제2차 한일협약'을 강요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정치, 경제, 군사를 일본의 뜻대로 좌우하는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하게 하였다.
이 사실을 안 황성신문의 주필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제목으로 일본 군국주의 침략자들의 횡포함과 이 조약에 날인한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등 을사오적(乙巳五賊)의 매국적인 행동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전국민의 궐기를 호소하는 논설을 발표하였다.
사전 검열도 받지 않고 평소의 몇 배나 되는 부수를 인쇄하여 전국에 배포된 이 신문은 민족의 거센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이에 격분한 나머지 자살하는 사람이 속출하고, 각지에서 반일의병항쟁(反日義兵抗爭)이 깃발을 올리고, 반일시위(反日示威)가 연일 성난 파도와 같은 기세로 이어졌다. 이 논설로 장지연은 일본 헌병대에 체포, 구금되고 황성신문은 발간 정지되었다.
모든 언론 기관이 일제(日帝)의 탄압으로 신문을 발행하지 못할 때, 영국 자본으로 설립되었다는 명목으로 창설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만은 베델[Ernest Thomas Bethell]이라는 영국인 명의로 발간되는 신문으로 영일동맹(英日同盟)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있었기 때문에 일제도 감히 손을 쓸 수 없었다. 따라서 국내의 우수한 언론인들은 대개 이 신문을 근거지로 하여 활동을 계속하였다.
1906년 신채호는 스물일곱살의 젊은 나이로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초빙되었다. 그는 여기에서 양기탁(梁起鐸), 박은식(朴殷植) 등 애국적인 언론인들과 함께 일제의 대한제국 침략을 규탄하는 논설을 계속 발표하여 배일사상(排日思想)을 고취시켰다. 그리고 그는 애국정신을 고취시키려면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통감하고, 신문에 독사신론(讀史新論)이라는 논설을 발표하여 우리 민족의 역사를 올바르게 바라볼 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이런 논문은 많은 독자들로부터 절찬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독자들의 강한 요망도 있어서 우리 민족의 역사를 소설 형식으로 쉽게 읽을 수 있는 대동사천년사(大東四千年史)를 연재하였다. 이어서 그는 '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 '동국거걸최도통전(東國巨傑崔都統傳)', '이순신전(李舜臣轉)' 등 외침(外侵)을 물리치고 조국을 위기에서 구한 대표적인 호국 영웅 을지문덕(乙支文德), 최영(崔瑩), 이순신(李舜臣) 세명의 전기를 연재하여 독자들의 애국심을 고양시켰다.
그는 또한 외국 역사의 애국 영웅들을 소개하는 한편, 사대주의적 사상에 집착하는 유학자들의 오류를 비판하고 올바른 민족 의식을 가질 것을 호소하였다.
이렇게 언론인으로 활동하던 그는 마침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安昌浩)를 비롯한 동지들과 더불어 1907년 12월에 항일구국운동(抗日救國運動)을 위한 비밀 결사단체 신민회(新民會)를 결성하고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 각 방면에 걸친 민족진흥운동(民族振興運動)을 전개하였다.
신민회는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 정주에 오산학교(五山學校) 등을 설립하여 애국투사를 양성하는 한편, 새로운 서점을 만들어 문화계몽운동(文化啓蒙運動)을 전개하고, 또한 평양에 자기(磁器) 회사 등을 세워 산업진흥을 위해서도 힘을 기울였다.
또한 친일 대신들이 주도권을 쥔 정부가 거액의 차관을 들여오는 것에 반대하여 사실상의 반일운동인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을 일으켰다. 이 운동은 애국적 언론인들에 의해서 여론이 조성되었는데, 신채호도 이 운동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운동의 지도적 간부 여러 명을 '모금 횡령'이라는 누명을 씌;워 투옥하여, 국채보상운동은 궤멸 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그는 신민회 활동의 일환으로서 순한글 잡지인 가정잡지(家庭雜誌)를 편집, 발행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국채보상운동이 쇠퇴하자 모두 일이 제대로 추진되지 않아 그는 고민에 빠졌다.
그때 동지인 이승훈(李昇薰)이 자신이 경영하고 있는 오산학교에 들어오라고 강력히 권유하였다. 신채호는 그의 권유에 따라 국사와 서양사를 가르치게 되었다. 자아의식의 회복을 역설하는 그의 강의는 젊은 청년 학도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신채호는 이처럼 교사로 일하면서도 청년 학도들을 실천운동에 참가시키려면 학생들의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을 통감하고, 1909년에 동지들과 함께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결성할 것을 계획하고 그 취지서를 쓰기도 하였다. 하지만 한반도를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려는 일제의 탄압이 점점 악랄해져서 모든 구국운동의 싹이 꺾이고 말았다.
◆ 고구려, 발해의 유적을 찾아 나서다.
1910년 4월 신민회(新民會)의 일부 동지들은 조국에서 합법적인 국권회복운동(國權恢復運動)을 전개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지자 공연히 정력을 소모하기보다는 국외로 나가 광범위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낫다는 의견을 제안하였다. 그래서 동지들은 개별적으로 국외로 탈출하여 중국 청도(靑島)에 모이자고 약속하였다.
그는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행선지를 알리지 않고 며칠씩 집을 비우는 행동을 반복한 뒤, 어느 날 홀연히 자취를 감추어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향하였다. 그리하여 8월에 청도에서 동지들과 만날 수 있었다.
그 직후인 8월 29일에 조국이 일제에 강제 병합되었다는 슬픈 소식이 전해졌다. 동지들은 비분의 눈물을 흘리면서 조국 독립을 위한 대책을 논의하였다.
안창호(安昌浩)는 우선 해외 동포의 산업을 진흥시키고 교육을 보급하여 때가 오면 커다란 힘이 결집될 수 있도록 준비 공작을 벌이자는 점진적인 방책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대한제국 육군 강화도 진위대장을 지냈던 이동휘(李東輝)는 직접적인 무력투쟁(武力鬪爭)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나라가 망한 이때 산업이니 교육이니 하는 만사태평한 짓을 할 시간이 없소. 둘이 모으면 둘이서 결사적으로 싸우고, 또 셋이 모이면 셋이서 결사적으로 싸울 각오로 투쟁해야 하오."
이렇게 의견이 달라 며칠간이나 격론을 되풀이하였다. 일부 동지들이 조정을 하려고 노력하였지만, 마침내 청도 회의는 결렬되었다. 이리하여 해외에서 단일 독립전선을 결성한다는 꿈은 깨지고, 직접 투쟁을 부르짖는 급진파는 다시 조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점진파인 안창호 등과 함께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였다. 그 주변에는 대략 10만여명의 동포가 거주하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동포들을 상대로 해조신문(海潮新聞)을 발행하여 조국 독립을 위해 투쟁하자는 사상을 고양시키는 한편, 문화 계몽을 위해 힘을 쏟았다.
그러던 중에 신채호는 블라디보스토크를 왕래하는 동포들에게 중국 동북지방 각지에서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되었다.
신채호는 사대주의자들이 왜곡해놓은 조국의 역사를 바로잡고자 열망하였다. 그것을 위해서 민족의 발생지인 북방 대륙과 강대한 민족 역량을 발휘한 고구려의 유적을 자기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이 열망은 나날이 강해져 갔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며 독립운동을 계속하자는 동지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바라 마지않던 유적 탐방에 나섰다. 애초에 충분한 여비가 있을 리는 없으니, 흡사 방랑여행?? 하듯 온갖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는 고조선의 발상지의 흔적을 빠짐없이 찾아다녔다. 옛 전쟁터나 폐허로 변한 옛 성의 자취를 찾아다니며, 가는 곳마다 지도와 자료에 비추어보며 산하의 이름을 묻고 그곳의 풍습을 확인하여 고대사와 비교 검토하였다. 그리고 깨진 금석 조각을 찾아내고 매몰되어 있던 성의 흔적을 발견하고는 환호성을 질렀다.
그는 집안현(輯安縣)에 가서 제2 환도성(丸都城)의 자취를 찾았다. 흩어진 능과 묘는 일일이 다 셀수도 없을 정도였고, 커다란 능으로 짐작되는 것이 수백 기나 되었으며, 묘는 일만 기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는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대나무잎 무늬가 있는 쇠자[金尺]을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본인이 매입한 영락기공비문(永樂紀功碑文)의 탁본 가격을 물어보고는 너무나 비싸 잠자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수백 기의 능 가운데 남아 있는 팔층 석탑 사면방형(四面方形)의 광개토태왕릉(廣開土太王陵) 및 오른쪽에 있는 제천단(祭天檀)을 사진 대신 붓으로 옮겨 그리고, 능의 높이와 넓이를 보폭으로 확인하는데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서 그때의 감상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왕릉 상층에 올라가 석주(石柱)가 있던 자취와 복와(覆瓦)의 남은 파편과 드문드문 서 있는 송백(松柏)을 보고 후한서(後漢書)에 '고구려는... 금은 재화를 모두 함께 묻었으며, 돌을 쌓아 분봉을 하고 또한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었다.'는 간단한 문구를 비로소 충분히 해석할 수 있었다. '수백 원이 있으면 묘 한 기를 파볼 것이요, 수천 원 혹은 수만 원이면 능 한 개를 파볼 것이라. 그리하면 수천년 전 고구려 생활의 살아 있는 사진을 보리라.' 하는 꿈만 꾸었다.
아아, 이와 같은 천장비사(天藏秘史)의 보고를 만나서 나의 소득이 무엇이었던가. 인재와 물력이 없으면 재료가 있어도 나의 소유가 아님을 알 것이다. 그러나 하루동안, 그 외부에 대한 조악하고 거친 관찰만이지만, 고구려의 종교 예술 경제력 등의 여하가 눈앞에 살아나 '그곳에서 한 번 본 집안현이 김부식(金富軾)의 고구려본기를 만 번 읽는 것보다 낫다.'는 단안을 내렸다.'
그는 조국의 옛 유적을 더듬으며 이처럼 비통한 생각을 되풀이하였다.
◆ 상해에서 다시 북경으로
만주 일대를 답사한 그는 다시 발길을 옮겨 고조선의 세력이 미친 곳으로 보이는 산해관(山海關)을 거쳐 북경으로 향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잠시 머무르며 사료 발굴 작업을 한 듯하다. 그때 신규식(申圭植)이라는 사람이 상해로 오라고 권유하며 여비를 보내왔다.
신규식은 일찍이 중국에 망명하여 손문(孫文)이 무창에서 혁명 봉기를 했을 때 그 혁명군에 가담하였다. 그 덕분에 손문의 협력 아래 동제사(同濟社)라는 조직을 만들고, 각지의 조선 독립운동가들과 연락을 취하면서 한국과 중국 양국의 민족 해방 혁명을 추진하였다. 그의 노력으로 상해에 많은 독립운동 지사들이 모여 있었다.
신채호가 신규식의 초대로 상해에 간 날짜는 명확하지 않다. 상해에 도착한 그는 박은식(朴殷植), 김규식(金奎植), 여운형(呂運亨) 등을 만나 중국인 동지들과 함께 동제사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상해의 외국 조계(租界)에 근거지를 마련한 그들은 한국인 청년 조직을 구성하여 독립운동 지도자를 양성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1백여명의 동포 청년을 모아 박달학원(博達學院)이라는 교육기관을 세우고, 신채호는 이 학원의 지도 강사가 되어 애국적인 역사 교육에 헌신하였다. 이때가 1915년 그가 서른여섯살 때의 일이다.
그는 여기에서 조선사(朝鮮史)라는 교재를 저술하고, 다음해에는 '꿈과 하늘'이라는 이야기를 쓰기도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면서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이 급진전되었다. 그리고 1919년 3월에 마침내 거국적인 3.1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상해는 독립운동의 지도 본부처럼 되어 4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수립되었다. 신채호도 여기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맡아 의정원(議政院) 전원위원장(全院委員長)에 뽑혔다.
그때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추대된 이승만(李承晩)이 미국 정부에 '조선을 위임 통치해 달라'는 청원을 제출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이것을 외세에 매달려 민족 자주성을 망치는 민족 반역적인 행위로 격렬하게 규탄하고 이승만의 대통령 취임을 취소하라고 요구하였다.
임시정부는 기관지로 독립신문(獨立新聞)을 발행하였는데, 그는 주필로 활동하였다. 그 신문은 국내에 대량으로 수송되어 비밀리에 전국 각지에 배포되었다. 그리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궐기한 민중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그러나 상해 임시정부 안에서 추악한 파벌 투쟁이 일어났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매진한다는 기본적인 정신을 망각하고, 임시정부에서 지배권을 장악하려고 서로 반대파를 공격하는 비열한 행위가 되풀이되었다.
신채호(申采浩)는 민족 통일전선의 확대와 화합을 극력 주장하였지만 내부의 복잡한 분규에 깊이 절망하였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국내에 잠입하여 조국의 민중과 더불어 독립시위운동(獨立示威運動)에 참가하는 데서 삶의 보람을 찾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동료들은 신변을 염려하여 신채호에게 결혼할 것을 권유하고 새로 맞이한 아내와 함께 북경에 망명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는 열여섯 살 때에 할아버지의 권유로 향리에서 결혼한 적이 있었지만 생활을 함께 한 적은 거의 없었고, 오랫동안 독립운동과 망명으로 사는 동안 독신으로 지내왔던 것이다.
마흔한살이 된 그는 동지들의 권유에 따라 새로운 아내와 함께 북경으로 향하였다. 그는 북경에서 동지들과 함께 한문 잡지 천고(天鼓)를 발행하고 중국 안에 널리 배포하여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한편 그는 북경의 주요 신문인 중화일보(中華日報)에 계속 논설을 발표하여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항거하는 조선 민족의 모습을 강력한 필치로 호소하여 독자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었다.
그는 마흔두살에 비로소 사내아이를 얻고 생활도 안정된 듯이 보였다. 그러나 그는 개성이 강한 탓이었는지, 세속적인 행복에 만족하지 못하고 마흔세살에 절에 들어가 승려가 되는 등 변신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그의 고대사 연구는 중단되지 않고 지속되었다. 그 연구 논문의 일부가 서울에 보내져서 동아일보(東亞日報)에 연재되기도 하였다.
1927년 그는 다시 북경의 동지들과 함께 잡지 탈환(奪還), 동방(東方)을 연속 발행하였다. 이 동방은 무정부주의자들의 기관지라고도 할 수 있었는데, 그는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무정부주의자들의 운동에 공명하게 되었다.
그는 권력 투쟁을 증오한 나머지 권력에 무관심한 운동이 아니면 독립운동에서 통일전선은 결성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북경에서 그와 함께 운동을 한 사람들은 상해의 임시정부를 둘러싸고 동포들이 대립하고 항쟁하는 것이 단지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의 투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 무렵 북경에서 세력을 갖기 시작한 무정부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되었는대, 신채호도 이들과 함께 행동한 것이었다.
1928년 무정부주의자들은 북경에서 동방연맹대회(東方聯盟大會)를 개최하였는데, 그는 이 회의에 참가하여 대회 선언문을 작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북경에서 활동하던 그들은 일제(日帝)의 모략에 대하여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였다. 일제가 한반도 식민지 지배의 합리화를 조장하기 위하여 한국 역사를 크게 축소, 왜곡하는 범죄적인 행위를 저지르고 있음을 철저하게 폭로하고, 민족의 빛나는 역사와 높은 문화 전통을 소리 높여 찬양하며, 한국 민족 독립운동의 커다란 지주로 활약하는 신채호에 대하여 일제가 깊은 적대감을 품지 않을 리 없었다.
따라서 일제는 늘 신채호를 추적하다가 마침 그가 무정부주의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을 절호의 구실로 삼아 그를 체포하여 대련(大連)의 감옥에 투옥하였다. 그리고 있지도 않은 죄상을 날조하며 공판을 서둘러 1930년 5월 대련의 법정에서 10년의 실형을 선고하고 여순(黎順)의 감옥에 이감시켰다.
◆ 옥중 투쟁과 사망
그가 대련 감옥에 투옥된 다음해인 1929년 둘째 아들이 태어났다. 그 무렵 서울에서 조선일보(朝鮮日報)의 이사를 맡고 있던 안재홍(安在鴻)은 상해에 있는 동안 그의 깊은 학식에 경의를 표하였던 만큼, 그가 쓴 원고가 없어질 것을 염려하여 그 원고를 보내달라고 간청하였다.
그의 아내와 친구들은 옥중에 있는 그를 대신하여 그 원고들을 서울로 보내주었다. 그가 여순 감옥에 옮겨진 직후인 1930년 6월, 먼저 그의 최초의 저작집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가 조선도서주식회사(朝鮮圖書株式會社)에서 출간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31년에 조선사(朝鮮史),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가 잇달아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다. 이러한 저작은 제판이 완료되어 인쇄 직전까지 준비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탄압으로 단행본으로 출판되지는 못하였다.
일제(日帝)는 신채호를 대련 감옥에 가두고 재판을 진행하면서 죄상을 날조하기 위하여 잔악하기 그지없는 고문을 하였다. 하지만 신채호는 한없이 야위었지만 끝내 굴하지 않았고, 항상 의연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신채호는 여순 감옥에서 극도로 쇠약해졌으면서도 결코 독서를 중단하지 않았고, 항상 저작을 구상하였다. 그러나 그는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시간이 갈수록 심하게 쇠약해져서 5년 뒤에는 이미 소생할 가망이 없어지고 말았다.
일제는 그를 옥사시켜 민족적인 격분을 사기보다는 그를 가석방시키는 쪽이 득책이라고 생각하고, 유력한 신원 인수인이 나타나면 석방 형식으로 출옥하겠다는 통고를 하였다. 이 통고를 받은 그의 친구들은 백방으로 손을 써서 향리에 있는 그의 먼 친척인 부호를 설득하여 신원 인수인이 될 것을 승낙받았다. 이 소식을 접한 신채호는 일제 침략자에게 빌붙어 재산을 축적한 자에게 신세를 지느나 차라리 이대로 옥사하는 것이 낫다면서 완강하게 거부하였다.
결국 그는 옥중에서 죽음을 예견하고 가까운 동지에게 유서와 같은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그 가운데 "꼭 써서 남겨야 할 원고를 머리 속에 넣어둔 채 죽는 것이 유감 천만이네."라고 적고 있다.
이리하여 그는 1936년 2월 21일 일제의 탄압 속에 옥중에서 삶을 마감하였다.
◆ 찬란히 빛나는 역사관
소년 시절 신동 소리를 들었던 신채호(申采浩)는 오랫동안 연구 생활을 하며 수많은 저작을 지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글은 스스로 거의 찢어버렸고, 유랑 생활과 상해 북경을 전전하는 동안 사라진 것도 많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것은 초기의 황성신문(皇城新聞)과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게재된 글과 1925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것, 그리고 저작집으로서는 1930년에 출판된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와 해방 후에 겨우 출판된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 등이다.
그는 국내에서 전해지는 대부분의 고전적인 역사서가 사대주의적인 유학자들에 의하여 중국 역사의 외곽적인 역사라는 인식에 따라 쓰여졌다는 점을 예리하게 지적하였다. 그리고 일제에 의한 한국 역사의 왜곡이 점차 심해져서 마침내 한국이 고대부터 중국의 지배 아래 있었던 것처럼 서술하거나 한사군(漢四郡)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서술한 것을 통렬히 비판하였다. 더구나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라는 가공의 이야기를 마치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날조한 일제 어용사학자들의 범죄적 행위를 결코 용서하려 하지 않았다.
그의 역사학 인식의 출발점은 항상 민족 자주적인 '아(我)'에 있었다. 그는 동북아시아에 자리잡은 한국 민족을 '아(我)'의 단위로 하여 조선사(朝鮮史) 서술의 기점으로 삼았다. 그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아(我)'의 성장 발달의 상태를 제1요건으로 하고 그리하여 최초 문명의 기원이 어디서 된 것, 역대 강역의 신축이 어떠하였던 것, 각 시대 사상의 변천이 어떻게 되어온 것, 민족적 의식이 어느 때에 가장 왕성하고 어느 때에 가장 쇠퇴한 것, 여진(女眞), 선비(鮮卑), 몽고(夢古), 흉노(匈奴) 등이 본디 '아(我)'의 동족으로 어느 때에 분리되며, 분리된 뒤의 영향이 어떠한 것, '아(我)'의 현대의 지위와 흥복(興復) 문제의 성부(成否)가 어떠할 것인가의 등을 분서(分敍)하며...
'아(我)'와의 상대자인 사린각족(四隣各族)의 관계를 서술의 제2요건으로 하고 그리하여 '아(我)'에서 분리한 흉노(匈奴), 선비(鮮卑), 몽고(夢古)며, '아(我)'의 문화의 강보에서 자라온 일본이 '아(我)'의 거실(巨室)이 되던 것이 아니 되어 있는 사실이며, 인도(印度)는 간접으로, 지나(支那)는 직접으로 '아(我)'가 그 문화를 수입하였는데, 어찌하여 그 수입의 분량을 따라 민족의 활기가 여위어 영토의 범위가 줄어졌나...
오늘 이후는 서구의 문화와 북구의 사상이 세계 역사의 중심이 된 바, 아(我) 조선은 그 문화 사상의 노예가 되어 소멸하고 말 것인가? 또는 그를 저작(咀爵)하며 소화하여 신문화를 건설할 것인가? 등을 분서(分敍)하여 위의 1, 2 양자로 본사(本史)의 기초를 삼고...
언어, 문자 등 '아(我)'의 사상을 표시하는 연장의 그 이둔(利鈍)은 어떠하며 그 변화는 어떻게 되었으며, 종교가 오늘 이후에는 거의 가치 없는 폐물이 되었지만, 고대에는 확실히 일민족(一民族)의 존망성쇠(存亡盛衰)의 관건이었으나, '아(我)'의 신앙에 관한 추세가 어떠하였으며, 학술, 기예 등 '아(我)'의 천재를 발휘한 부분이 어떠하였으며...
의식주(衣食住)의 정황과 농상공의 발달, 전토의 분배, 화폐의 제도, 기타 경제 조직 등이 어더하였으며, 인민의 이동과 번식과 또 강토의 신축을 따라 인구의 가감이 어떻게 된 것이며, 정치 제도의 변천이며, 북벌 진취의 사상이 시대를 따라 진퇴된 것이며, 귀천 빈부 각 계급의 압제하며, 대항한 사실과 그 성쇠소장(盛衰消長)의 대세며, 지방 자치제가 태고부터 발생하여 근세에 와서는 형식만 남기고 정신이 소망한 인과(因果)며...
자래(自來) 외력(外力)의 침입에서 받은 거대한 손실과 그 반면에 끼친 다소의 이익과, 흉노, 여진 등 일차 '아(我)'와 분리한 뒤에 다시 합하지 못한 의문이며, 종고(從古) 문화상 '아(我)'의 창작이 불소(不少)하나, 매양 고립적 단편적이 되고 계속적이 되고 계속적이 되지 못한 괴인(怪因) 등을 힘써 참고하며 논열하여 위의 세번째 네번째 이하 각종 문제로 본사(本史)의 요목을 삼아 일반 독사자(讀史者)로 하여금 거의 조선 면목(面目)의 만분의 일이라도 알게 될까 하노라.
즉 그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논리로 한국을 침략하여 식민지로 지배하는 것을 정당화하려는 일본 제국주의 어용학자들의 사관을 폭로하는 한편, 식민지가 된 한국의 현실 속에서 '어떻게 하면 우리 민족의 불굴의 정신을 올바르게 인식시킬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민족 독립을 위하여 투쟁할 용기를 줄 수 있을까.' 라는 점에 그의 사관의 기본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과거의 사대주의적인 사가들이 반역자로 치부하며 말살하려고 한 인물들을 중시하소, 그들의 혁명 정신을 높이 평가하였다.
예컨대 신채호는 16세기에 혁명을 일으키려다 실패하여 자살한 정여립(鄭汝立)을 기리는 글에서 이렇게 서술하였다.
"정여립은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으며,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다' 라고 한 유가(儒家)의 윤리관을 일필(一筆)로 말살하고 '인민에 해가 되는 임금은 죽일 수도 있고, 행실이 나쁜 지아비는 떠날 수도 있다.'고 하였다.'
그는 또한 고대사에 기록된 중국 사서의 잘못된 해석을 바로잡아 고조선의 전성시대를 '기원전 10세기 무렵부터 약 5, 6백년간'으로 보고, "백이(伯夷), 숙제(叔齊)는 고죽국(孤竹國)의 조선족이며 주(周)를 유람하고 무왕(武王)에게 비전론(非戰論)을 주장하였다."고 서술하였으며, "기원전 5, 6세기 무렵 불리지(弗離支)라는 사람이 조선의 군사를 이끌고 오늘날의 직례(直澧) 산서(山西) 산동(山東) 등 중국의 북부 지역을 정복하여 나라를 건설하고 자기 이름을 따서 불리지국(弗離支國)이라는 국호를 붙였다."고도 서술하였다.
신채호가 연구 발표한 한국 고대사는 세인을 놀라게 하였다. 당시 일본 제국주의 어용학자들은 황당무계한 소리라고 배격하고 비과학적인 주관론일 뿐이라고 비난하였지만, 그의 주장은 한국과 중국의 고전을 정확히 대비하고 풍부한 사료를 과학적으로 예증한 것으로서 사실적인 면에서도 가장 신뢰할 만한 것이었다.
신채호의 주요 저서는 해방 후가 되어서야 겨우 출판되어 새삼 국내 역사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었다. 해방 후에 새로 발간된 유적과 금석문을 토대로 한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신채호의 주장이 매우 정확하며, 그가 얼마나 선견지명을 가지고 올바른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건가가 새삼스레 실증되었다.
신채호는 평생 일제의 침략 통치에 저항하다가 마침내 일제의 박해를 받아 옥사하였다. 그리고 제대로 보답받지도 못하고 비참하게 삶을 마감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신채호의 업적은 한국 역사학의 발전에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참고서적
김형광 '인물로 보는 조선사' 시아출판사 2002년
송은명 '인물로 보는 고려사' 시아출판사 2003년
김용만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 창해 2001년
황원갑 '민족사를 바꾼 무인들' 인디북 2004년
이덕일 '고구려 700년의 수수께기' 대산출판사 2000년
이덕일 '살아있는 한국사' 휴머니스트 2003년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 들녘 2000년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들녘 2000년
김기홍 '천년의 왕국 신라' 창작과비평사 2000년
박선식 '한민족 대외 정벌기' 청년정신 2000년
이도학 '백제 장군 흑치상지 평전' 주류성 1996년
송기호 '발해를 찾아서' 솔출판사 1993년
윤병식 '의병항쟁과 항일 독립전쟁'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6년
한시준 '임시정부 활동과 의열투쟁의 전개'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8년
장세윤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 솔출판사 2001년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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