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자료

[스크랩] 동양의 유토피아 신라(新羅)

회기로 2010. 2. 1.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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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당나라의 군사력을 빌려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삼한통일을 이룩하였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신라의 삼한통일을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일단 자력이 아닌 타력으로 이룬 통일이었고 그나마 불완전한 통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지 위해 당나라의 신국(臣國)을 자처하며 스스로 허리를 굽혔다. 이 때문에 후세에는 신라의 삼한통일을 비판하는 민족주의자들이 많았고 더러는 고구려가 삼한통일을 이룩했다면 저 드넓은 만주와 요동 반도는 우리 민족의 영역이 되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하는 사람이 많다. 심지어 신라는 한국사에서 존재했으면 안 될 국가였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우리 역사 가운데 가장 저평가를 받는 나라는 신라 왕국이다. 하지만 신라를 극단적으로 부정하는 것보다는 신라의 삼한통일을 통해 우리가 교훈으로 삼아야 할 부분과 신라인들의 화랑 정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점이 필요하다고 본다.

 

신라는 분명 삼한 가운데 가장 국력이 약한 국가였다. 그러나 조선왕조처럼 닫힌 나라는 아니었다. 신라는 황금의 나라였고, 모든 이들이 꿈꾼 동방의 이상향이었다.


 

9세기에 신라는 당나라, 일본 뿐 아니라 저 멀리 아랍 지역과도 교역을 했다. 아랍 지역의 여러 중세 문헌을 보면 신라에 많은 아랍인들이 오갔을 뿐 아니라 정착까지 했다는 기록이 있다.


 

중세 아랍인들의 눈에 비친 신라는 '동방의 이상향'이었다. 그들의 기록에 의하면 세상에는 '행운의 섬'과 '불멸의 섬'으로 알려진 이상향이 두 곳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아틀란티스이고, 다른 하나는 동방의 신라다. 같은 이상향이라도 아틀란티스는 무인도임에 반해, 신라는 사람이 사는 곳으로 과수원과 경작지가 있다고 한다. 이는 아틀란티스가 전설에 등장하는 이상향임에 반해, 신라는 세상에 살아 숨쉬는 이상향이라는 것이다. 이는 그들에게 신라가 동경과 선망의 대상이었음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신라의 위치에 대해 기록한 아랍 서적을 보면 신라가 중국의 동편, 지구의 동쪽 끝에 있으며 역청해(태평양)로 에워싸여 있다고 지적한다. 아랍상인 술라이만 앗 타지르는 여행기 『중국과 인도소식』에서 신라가 중국의 동쪽 바다에 자리하고 있다고 하고, 중세 아랍 역사학의 태두인 알 마스오디도 신라의 위치를 '중국의 동쪽 바닷가', '육지의 동쪽 끝'으로 설정하였다. 이것은 중국보다 동쪽에 신라가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육지의 동쪽 끝을 오로지 중국으로만 보아오던 종래의 그리스, 로마의 지리관을 타파하고 동방에 관한 새로운 지리지식을 첨가한 엄청난 발견으로 평가된다.

열사에 찌들고 풍랑에 지친 아랍인들에게 산명수려한 자연경관과 풍부한 지하자원을 가지고 있는신라는 꿈속의 이상향일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신라에 대해 "공기가 맑고 부유하며 땅이 기름지고 물이 좋을 뿐만 아니라, 주민의 성격 또한 양순"하기 때문에 누구든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떠나지 않고 정착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들의 눈에 비친 신라는 황금의 나라다. 금이 너무나 흔해서 가옥은 금으로 수놓은 천으로 단장하고, 금제 식기를 사용하며, 심지어 개의 사슬까지 금으로 만든다는 것이 그들이 믿고 있는 신라의 모습이다. 그래서 일단 신라를 떠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중국의 동쪽에 신라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곳에 들어간 사람은 공기가 맑고 부가 많으며 땅이 기름지고 물이 좋을 뿐만 아니라, 주민의 성격 또한 양순하기 때문에 떠나려 하지 않는다"


 

"신라인들은 가옥을 비단과 금실로 수놓은 천으로 단장하며 식사 때는 금으로 만든 그릇을 사용한다"

-창세와 역사서<마크디시(al-Maqdi shi>, 서기 966년(신라가 멸망한 직후)-


"그 곳(신라)을 방문한 사람은 누구나 정착하여 나오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곳이 매우 풍족하고 이로운 것이 많은 데 있다. 그 가운데서도 금은 너무나 흔해 그곳 주민들은 개의 사슬이나 원숭이의 목테도 금으로 만든다. "


-알 이드리시(이슬람 지리학자)-1154년에 신라가 포함된 지도를 만듬

"신라는 중국의 맨 끝에 있는 대단히 좋은 나라다. 그 곳은 공기가 깨끗하며 물이 맑고 토질이 비옥하여 불구자를 볼 수 없다. 만약 그들의 집에 물을 뿌리면 용연향(龍涎香 - 아주 좋은 향기)이 풍긴다고 한다. 전염병이나 질병은 드물며 파리나 갈증도 적다. 다른 곳에서 병에 걸린 사람이 그곳에 오면 곧 치유된다."


- 지리학자 알 카즈워니  『여러 나라의 유적과 인류의 소식』(1250년)


"중국 저쪽에 산이 많은 ‘신라(Shila)’라는 나라가 있는데 금이 풍부하고 물 맑고 공기가 좋아 한번 간 무슬림은 돌아오지 않는다"


-후르다드베(Ibn Khurdadbeh)의 '제 도로와 왕국 총람' (이슬람 문헌) -

신라의 환경이 얼마나 정갈했으면 물 뿌린 집에서 용연향이 풍기고, 불구자도 없으며, 외지에서 온 환자는 금세 치유된다는 표현은 신라에 대한 극찬의 표현이다. 게다가 아랍인들은 신라인들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다는 찬사도 아끼지 않는다. 물론 인종학적으로 인간 외모의 우열을 가린다는 것은 비현실적이지만, 그들이 지적한 가장 아름다운 외모란 때 없고 병 없는 환경에서 사는 신라인들이야 말로 그 외모가 준수할 수 밖에 없다는 은유일 것이다. 또한 신라인들의 성격이 양순하다고 한 것은 대인관계에서의 친절성, 유화성, 신뢰성 같은 것을 의미한다. 신라인들의 외모가 아름답다거나, 성격이 양순하다고 한 것은 그들의 높은 문화 수준과 윤리 · 도덕성에 대해 아랍인들이 품고 있는 일종의 선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신라의 대당교역(對唐交易)에 대해서도 눈길을 끄는 아랍의 기록이 있다. 신라인들은 "중국 황제와 서로 선물을 주고 받는데,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늘은 그들에게 비를 내려주지 않는다"는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신라와 당나라와의 관계가 모화사상(慕華思想)이나 사대주의에 기초한 조공관계가 기본이었다는 통념에 반해, 양국 간에는 상호상에 입각한 선물 교환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기술은 양국관계의 다른 한 측면을 보여준다. 즉, 서로가 선물을 교환하지 않으면 천벌로 가뭄이 든다는 '하늘의 뜻'을 빌려 양국 간의 긴밀한 관계를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아랍인들은 신라에서 나는 비단, 검, 사향, 말안장, 흑담비 가죽, 오지그릇, 계피 등의 물품을 수입해갔다. 그 통로는 중세 아랍상인들의 활동 무대였던 남해의 바닷길이었다. 신라는 열린 나라였다. 신라는 이 바닷길을 통해 중국을 넘어 저 멀리 아라비아까지 그 자취를 남긴 것이다.

신라는 경제적으로도 그 활동범위는 중국, 일본을 넘어서 서아시아, 로마까지 이르고 있다. 흔히 신라에 들어온 아라비아 상인하면 처용이라든가 후기 신라 이후로 생각하면 그건 양반일 것이다. 4세기 유적으로 추정되는 황남대총(皇南大塚)에서 발견된 유물은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고 있다는 데에 그 놀라움을 표시하지 않을 수 없다.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봉수병 유리병의 경우 시리아등지에서 생산되어 동부 지중해 연안과 터키를 비롯하여 에게 해 연안과 흑해 연안에서 사용되던 물품이었다. 그뿐인가?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된 은제에 주조된 인물상은 고대 이란의 여신인 아나히타 상을 표시한 것이고, 이란에서 발달한 컷글라스, 쾰른 지방에서 유행한 반점문 유리잔이 금령총에서 출토되었다.

천마총(天馬塚)에서 출토된 남색 귀갑문 유리잔은 동부 지중해 연안이 그 산지로 추정되고 있다. 미추왕릉(4세기 무렵의 신라 왕)에서 발견된 인물이 상감된 유리 구슬은 경주 외에는 동북 아시아에서 출토된 사례가 없다는 점에서 신라가 바다 무역이 얼마나 번성했는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뿐만 아니라 오르도스 지역에서 주로 만들어진 청동 대구(帶鉤)가 신라 영역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있고, 사산왕조(226년에서 651년까지 번성된 지금의 이란에 있던 왕국)의 영향을 받은 마두 장식의 리이톤(장식이 붙은 뿔잔 형태) 또한 다수 출토되었다. 

후기 신라 이후에도 신라 무역은 계속 번성하였다. 공작선은 공작의 꼬리를 잘라 만든 부채로 공작은 인도와 스리랑카에서 서식한다. 로마 문명도 상당히 신라인들에게 들어왔다고 한다. 일본인 신라사(新羅史) 전문 연구자인 요시미츠 츠네오는 이런 말을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삼국시대의 신라도 중국 문화를 받아들인 중국 문화의 그늘 아래 있던 나라 중 하나였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동아시아 역사의 상식으로 인식하여 전혀 의문을 품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인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인이나 일본인 그리고 전 세계인들 중 한국의 문화는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중국 문화 아래 있었고, 중국 문화 외에 다른 문화를 받아들인 국가가 있었다고 생각한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다."

이 말은 신라가 중국 문화권에 있었으면서도 독특하게도 중국 문화를 완벽하게 수용하지 않았고, 6세기 이전까지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로마문명을 직접 받은 수혜자였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점을 본다면 우리의 상상력으로 감히 신라를 재단한다는게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지 알만한 일이 아닐까?

신라는 우리가 생각하던 것 이상의 나라였다. 신라는 민족의 자존심에 수치를 준 나라도, 한국사에서 없었어야 할 나라도 아니다. 신라는 우리 조상이 세운 나라, 자랑스런 우리의 고대 왕국이었다.

신라는 바다를 개척한 나라였다. 바다를 개척한 나라가 세계를 제패하듯, 신라는 바다를 통해 국익을 증진시켰고, 신라 고유의 문명을 더욱 발전시켰다.

아랍인들이 꿈꾸어왔던 동방의 이상향, 영원한 유토피아, 그 곳이 바로 신라였다.

 

출처; 국사광복국민운동본부 編 「우리 역사의 비밀」(2003년版)

 

해설; 이문규(李文圭) 한국청년민족사학회 부회장

출처 : 한국사의 영웅과 열사들!
글쓴이 : 조의선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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