開皇曆(개황역) 譯解序(역해서)
開天闢地(개천벽지)이래로 年月(년월)이 幾何(기하)련고, 一陰一陽(일음일양)이 天道(천도)의 常然(상연)이라면, 王輪(왕륜)을 쫓아 轉轉(전전)하는 興亡盛衰(흥망성쇠)를 어찌 人力(인력)으로 强制(강제) 하리요 마는, 窮達(궁달)이 또한 各其(각기) 때가 있어 動靜之間(동정지간)에 進退(진퇴)의 度가 適宜(적의)하고 百千臨事(백천임사)에 以德爲主(이덕위주)하면, 榮枯(영고)의 數(수)를 바꿀 수 는 없어도, 凶(흉)을 輕(경)히 하고, 吉(길)을 重(중)히 하며, 福(복)을 長遠(장원)케 하고, 禍(화)를 짧게 하는 기틀이 열리나니, 聖人(성인)이 一誕(일탄)에 遺澤(유택)이 綿綿(면면)함은 自古(자고)의 理致(이치)이며, 及令(급영)에 不易(불역)이라.
世人(세인)은 王,李(왕,이) 兩朝(양조) 一千載(일천재)에 落陌寒門(낙맥한문)을 웃지마는, 前山(전산)이 太高(태고)하여 後谷(후곡)이 깊어졌음을 모르는 召致(소치)라. 伽倻開土(가야개토) 五百年(오백년)에 聖君社稷(성군사직) 十一世가 三韓瑞氣(삼한서기)의 異色(이색)이라. 國除當年(국제당년) 正 壬子(임자)에 運路(운로)는 이미 黃昏(황혼)인데, 遺德(유덕)이 未盡(미진)하고 餘福(여복)이 無窮(무궁)하여 羅朝(나조)에서 再逢春(재봉춘)하니 鷄林麗月(계림여월)이 王宮(왕궁)밖으로는 財買井(재매정)을 먼저 빚었던 것 아닌가?
芳勳(방훈)은 高遠(고원)하여 靑史(청사)의 華編(화편)이요, 祥慶(상경)은 連緡(연민)하여 東國(동국)의 榮門(영문)이라. 君位(군위)에 處(처)하여는 爲天下而壽(위천하이수)하시고, 臣列(신열)에 있어서는 輔明王之忠良(보명왕지충량)이니, 正히 春秋筆(춘추필)의 값을 올린 家門(가문)이요 前千秋(전천추) 後萬歲(후만세)를 주름잡는 甲族(갑족)인데, 來苗尤盛(래묘우성)하여, 數百萬(수백만)을 헤아리니, 駕洛元君(가락원군) 世祖大王(세조대왕)의 乃聖乃德(내성내덕)을 알 일이요, 白日伽倻(백일가야) 永明宮(영명궁)의 乃治乃福(내치내복)을 깨칠 지로다.
그러하였건만, 蔿灌惟馨千歲後(위관유형천세후)에 春風秋月(춘풍추월)이 空徘徊(공배회)라. 龜旨靈峯(구지영봉) 降聖地(강성지)가 牧笛(목적)에 붙여지고, 太平煙月(태평연월) 鳳凰臺(봉황대)는 鷓鴣(자고)만이 깃 드리니, 꽃 아침 달 저녁과 가는 비 찬이슬에 鮮然(선연)히 스며드는 千古(천고)의 感懷(감회)를 뉘가 能(능)히 달래리오,
말없는 首陵(수능) 흙에 옛 駕洛(가락)을 더듬으니 駕續衰(가속쇠) 넓은 자락을 淡蕩(담탕)한 봄바람에 날리시며 거니시던 거룩한 聖姿御影(성자어영)이 心潭(심담)에 빗어오고, 太中宮(태중궁) 兩德殿(양덕전)의 和風(화풍)이 千里伽倻(천리가야)의 甘雨(감우)로 化하여 國中(국중)을 金沒(금몰)로 덮든 連豐開皇(연풍개황)의 歲歲年月(세세연월)이 目捷(목첩)에 아롱거리나, 一陣淸風(일진청풍)에 감은 눈 다시 뜨니 사라지는 幻像(환상)이라, 生을 千載下(천재하)에 받은 恨(한)을 다시 한번 삼킬 수 밖에.................
여기 眞假(진가)를 알 수 없는 古書(고서) 몇 卷(권)을 펴니, 古人(고인)이 이름하사 開皇曆(개황역) 이라삿다.
純全(순전)히 依本(의본)하여 삼가 我邦大姓(아방대성)인 金海金氏의 璿源世系(선원세계)를 쉬운 말로 간추려봄은 나의 주제 넓은 唐突(당돌)에서 始作(시작)된 바 아니고 오직 金達範(김달범)畏兄(외형)의 억지를 막을 수 없어, 字意未解(자의미해)의 淺薄(천박)을 헤아리지 앉고 시작 한 바이니, 尊門諸賢(존문제현)은 國統(국통)을 合하여 大業(대업)을 함께 이루고 血精(혈정)을 나누어 晋業(진업)의 誼(의)를 맺어 富貴(부귀)와 甘苦(감고)에 있어 運命(운명)을 같이하든 羅(라), 洛(락) 이래의 世誼(세의)를 參酌(참작)하사 諸累(제누)를 容納(용납)하시기 懇望(간망)하오며 序言(서언)에 대하나이다.
己酉 七月
鷄林后人 金 明 煥 謹序
發行人事(발행인사)
靜物(정물)은 오래되면 廢(폐)하고 生物(생물)은 오래되면 神(신)그러웁다 함은 理(이)의 自然(자연)인데, 우리 民族(민족)이 文化(문화)를 崇尙(숭상)하나 萬卷書籍(만권서적)에 珍書(진서) 한 卷(권)이 있기 어려운데, 開皇曆(개황역)은 珍書(진서)를 넘어 寶書(보서)인 것만은 學者(학자)가 悉知(실지)의 事實(사실)이요, 이 冊(책)이 없어서 駕洛(가락)은 永遠(영원)한 迷宮(미궁)으로 埋沒(매몰)되었던 것이고, 吾金(오김)은 華門列(화문열)에서 落伍(낙오)되었던 것이다.
어느 先祖(선조)에도 내리지 않았던 우리 始祖(시조)의 神聖資質(신성자질)을 傳說的(전설적) 價値(가치)에 그치게 한 것도, 다만 駕洛國記(가락국기)가 現存(현존)하지 못한데 起因(기인)했다. 이것은 길이길이 痛恨(통한) 할 일이었으나, 敢(감)히 찾을 수 없기에 바라지도, 생각지도 못 할 일이었는데, 天意(천의)가 有心(유심) 하시고 先祖(선조) 有靈(유령)하사, 白日下(백일하)에 내 눈으로 開皇曆(개황역)을 보게되니, 感懷(감회)를 어찌 筆舌(필설)로 다 하리요.
멀리 二千載(이천재)의 悠久(유구)한 時間(시간)이 曲折(곡절)많은 經路(경로)를 迂廻(우회)하여 舊誼己重(구의기중)의 家門(가문)에서 다시 나타나니, 어즈버 啓肇元月(계조원월)을 다시 본 듯 하며, 이 한 卷(권)이 於世(어세)에 값이 없을지라도 吾門(오문)에는 無上之寶(무상지보)요, 於人(어인)에 戱紙(희지) 일지라도 吾金(오김) 에게는 日月이라.
이에 所藏(소장)의 어진 德(덕)과 譯解(역해)의 번거로움을 다 해주신 金明煥(김명환) 先生(선생)에게 哀情(애정)의 謝意(사의)를 表(표)하오며 아울러 僉宗(첨종)은 元胎精神(원태정신)을 이어받아 始祖(시조) 駕洛元君(가락원군) 世祖大王(세조대왕)의 그림자를 흐리지 앉도록 矜持(긍지)를 整然(정연)히 가지시기 바라며 發刊(발간) 人事(인사)로 하나이다.
開皇 一千九百二十八年 七月
駕洛後孫 金達範 謹白
目次
一, 駕洛 創國前(가락 창국전)
가, 國家(국가)形態前(형태전)의 弁韓(변한)
나, 支配者(지배자)의 出現(출현)
다, 任那句耶(임나구야)
라, 上句耶(상구야) 下句耶(하구야) 十一句耶(십 일구야)
마, 大伽倻(대가야) 小伽倻(소가야)
바, 九伽倻(구가야)
사, 元君降誕(원군강탄)
二, 大駕洛(대가락) 創國(창국)
가, 元君卽位(원군즉위)와 開皇年月(개황년월)
나, 元君(원군) 統治下(통치하)의 八伽倻(팔가 야)
다, 乾坤合德(건곤합덕)
라, 五伽倻(오가야)
마, 元君(원군) 昇遐(승하)와 上君(상군)
開皇曆 解說(개황역 해설)
肇啓漸歲(조계점세)에 生民(생민)이 各各 衣食之業(의식지업)을 힘써 그 命을 이어오고, 子孫(자손)을 保全(보전)하나, 日月이 輪邁(윤매)에도 年度(년도)를 헤아리지 못하고 衆人(중인)이 集團(집단)으로 生活(생활)해도 規儀秩序(규의질서)가 없으니 社會構成(사회구성)의 처음은 될지라도 法度(법도)있는 國家形態(국가형태)를 가지지 못하더니 그 중에 或(혹) 智者(지자)나 勇者(용자)가 나서 그 나름의 主張(주장)하는 바로 한 境域(경역)을 定하여 他人(타인)에 干涉(간섭)하기 시작하니 “長”(장)이라.
그러나 “長”은 君主(군주)의 資質(자질)을 가지지 아니 하고 德化(덕화)의 힘을 지니지 아니하였으니 或 따르는 사람 위에 「威」(위)로서 臨(임)함을 常(상)으로 하니, 이러한 “長”은 五里에 하나 十里에 하나 或 百里에 하나씩 있으니, 弁韓(변한)의 古代(고대)는 數百(수백)의 “長”이 다스리는 散散(산산)의 地域(지역)이었다.
큰 곳은 한 “長”의 밑에 千戶를 헤아리고 작은 곳은 數十戶를 헤아리겠더라.
“長”은 또한 “陌之”(맥지)라 불리어 지더니 嘉悉山下(가실산하)에 大智大力者(대지대력자)가 나타나니 곧 이름하여 伊珍阿豉(이진아시)라 하다. 그는 當時(당시)의 弁韓(변한) 一帶(일대)의 모든 陌之(맥지)를 完全(완전)히 누르고 그 위에 君臨(군림)하니 비로소 君主(군주)다운 版圖(판도)를 形成(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馬韓大國(마한대국)인 目支國(목지국)밑에 있던 네 나라의 包攝(포섭)에 成功(성공)하고 弁韓(변한) 西北과 東南 一帶(일대)를 손에 넣어 다스리니 伊珍阿豉(이진아시) 밑에 大國(대국)이 八, 小國(소국)이 二十四였다. 그는 스스로 天神(천신)이라 일커르고 三十二國위에 君臨(군림)했으나 國名(국명)을 가지지 아니하고 一生(일생)을 마쳤다.
그는 아들이 없었는데, 末年(말년)에 句我山(구아산)에 있는 “正見”(정견)이라는 處女(처녀)를 얻었으나 不過(불과) 三個月 만에 그가 世上(세상)을 뜨니 弁韓(변한) 사람들은 그를 “夷毗訶之神”(이비가지신)이라 하여 하늘처럼 崇仰(숭앙) 하는 바 되었다. 正見(정견)은 그 뒤 伊診阿豉(이진아시)의 遺腹子(유복자)를 낳으니 쌍둥이라. 兄을 “惱窒朱日”(뇌질주일)이라 하고 아우를 “惱窒靑月”(뇌질청월)이라 하였다. 이 두 兄弟(형제)가 커서 兄은 任那(임나)의 主가 되고 아우는 句耶(구야)의 主가 되니 弁韓(변한)은 비로소 두 個의 巨國(거국)으로 化하였고 任那(임나)는 大小(대소) 十九國을 支配(지배)하고 句耶(구야)는 十三國 위에 處(처) 하더니 及其也(급기야) 그들의 母인 正見(정견)이 世上(세상)을 뜬 뒤 任那主(임나주)와 句耶主(구야주)가 그 아버지인 夷毗訶之神(이비가지신)을 天神(천신)으로 받들고, 그 어머니인 正見(정견)을 地神(지신)으로 받들어, 그 母의 遺骸(유해)가 묻힌 句我山(구아산)에 “祠室”(사실)을 짓고 해마다 두 차례의 祭(제)를 지내니 句我山(구아산)을 句耶山(구야산)으로 改稱(개칭)하고 正見(정견)을 句耶地神(구야지신)으로 받들었다.
朱日(주일)과 靑月(청월) 時代(시대)는 親(친)히 祠室(사실)에 祭祀(제사)하였으나 그들이 늙음에 親(친)히 祭(제)에 叅(참) 할 수 없으므로 “天君”(천군)이라는 祭官(제관)과 “地君”(지군)이라는 祭官(제관)을 두고 代行(대행)케 하니 “天君”(천군)은 天神祭官(천신제관)이며 “地君”(지군)은 地神祭官(지신제관)이더라.
朱日(주일)과 靑月(청월)의 뒤 그 子孫(자손)들은 “地君”(지군) 制度(제도)를 廢(폐)하니 祭官(제관)은 天神祭官(천신제관)이든 地神祭官(지신제관)이든 모두 “天君”(천군)이라는 이름만 남게 되었다.
大小 各 나라의 有司(유사)중에 九干(구간)을 두었고, 그 첫 번째의 有司(유사) 인 首干(수간)이 “天君”(천군) 이더라. 朱日(주일)의 孫(손) “大星”(대성)과 靑月(청월)의 孫(손) “魄塋(백영)”의 代(대)에 任那(임나)는 上句耶(상구야)로 改稱(개칭)되고 句耶(구야)는 下句耶(하구야)로 改稱(개칭)되었고, 大小國(대소국)은 다시 合쳐져서,
上句耶(상구야) 속에는 “碧珍句耶”(벽진구야) “靈珍句耶”(영진구야) “大珍句耶”(대진구야) “小珍句耶”(소진구야) “居珍句耶”(거진구야) “嘉珍句耶”(가진구야) “彌珍句耶”(미진구야)의 七句耶(칠구야)로 되고,
下句耶(하구야)는 “古寧句耶”(고녕구야) “非火句耶”(비화구야) “阿羅句耶”(아라구야) “黃山句耶”(황산구야)의 四句耶(사구야)로 되니, 合하여 十一句耶(십일구야)가 되었고, 다시 “大星”(대성)의 孫(손)인 “中光”(중광)의 代에 와서 句耶(구야)를 加耶(가야)로 改稱(개칭)하고 中光(중광)의子 “禾蘆”(화로)의 代에 와서는 上加耶(상가야)가 大伽倻(대가야)로 되고 下加耶(하가야)가 小伽倻(소가야)로 되더니, “禾蘆”(화로) 以后(이후)는 碧珍,(벽진) 靈珍(영진)등 各 伽倻(가야)가 盟主格(맹주격)인 大伽倻(대가야)의 命(명)에 服從(복종)치 아니하니, 各各 獨立伽倻(독립가야)로 되어 大小伽倻(대소가야) 十一國(십일국)이 九伽倻(구가야)로 變(변)하였다.
九伽倻(구가야)는 君主制(군주제)가 아니고, 九干(구간)들의 聯合指導下(연합지도하)에 統治(통치)되었다.
이 九伽倻(구가야)는 各其(각기) 伽倻(가야)의 盟主(맹주)가 되고자 하였고, 九伽倻(구가야)의 主(주)들은 여러 가지로 人間(인간) 現實的(현실적)인 努力(노력)을 하였는데, 黃山伽倻(황산가야)의 九干(구간)들은 天君(천군)을 위시하여 九伽倻(구가야)의 眞正(진정)한 統治主(통치주)가 나오시기를 하늘에 빌었으니, 漢建武八年(한건무팔년) 壬辰(임진) 正月三日 이었다.
丑山(축산)에 壇(단)을 모으고 天君(천군)이 九干(구간)을 代表(대표)하여 祭天(제천) 二十八日間에 得夢(득몽)하니 꿈에 天神(천신)이 나타나서 가로되 “九人(구인)이 다같이 龜山(구산)에 가서 다시 祈禱(기도)하라” 하는지라, 이로 인하여 同年(동년) 二月十五日에 아홉干들이 沐浴齊戒(목욕제계)하고 龜山(구산)에서 祭天(제천)하기를 十日間 하였더니, 忽然(홀연)히 龜山(구산)이 大鳴(대명)하거늘 九干(구간)들이 크게 놀랐다.
이윽고 神語(신어)가 들리는데, 風樂(풍악)을 갖추고 歌舞(가무)하되 “移御龜丘”(이어구구)라고 외치라 하는지라, 다시 그러하기를 七日間하니 同年(동년) 三月三日이라.
靑天(청천)에 紫雲(자운)이 실같이 내려 덮히더니 金色(금색)의 궤가 天上(천상)에서 내리거늘 九干(구간)이 절하고 받아보니 궤 속에 빛나는 알(卵)이 아홉 個가 있는지라 淨潔(정결)히 모셨더니 翌日(익일)에 본즉 九卵(구란)이 化爲九人(화위구인)이라.
그 중 一人(일인)이 가로되 “나는 金天(금천)에서 나왔고 九金之精(구금지정)이라. 天命(천명)이 있어 이 땅에 내렸으니 餘八人(여팔인)은 모두 나의 同氣(동기)라” 하시다.
金天(금천)에서 오시고 金궤에서 나시고 九金之精(구금지정)인 까닭에 스스로 “金”으로서 爲姓(위성)하시니 九君之中(구군지중) 元君(원군) 이시다. 諱(휘)를 首(字) 露(字)로 하시니 大槪(대개) 처음 나오신 분의 뜻이더라.
그 뒤부터는 龜山(구산)은 龜旨峯(구지봉)으로 改稱(개칭) 되었다.
그 후 十年이 지나니 壬寅年(임인년)이라, 三月十五日에 寶齡(보령) 十一歲(십일세)로 九伽倻(구가야)를 統合(통합)하여 登極(등극)하시니 國號(국호)는 “駕洛”(가락)이요, 年號(년호)는 “開皇”(개황)이라. 伽倻(가야)이름은 八伽倻(팔가야)에 있어서는 小國名(소국명)이며 地方名(지방명) 이었으나 黃山伽倻(황산가야)는 本伽倻(본가야)로 改稱(개칭)되고 이 地方(지방)에서의 “伽倻”(가야)는 單純(단순)한 地方名(지방명)으로 되고 말았다. 元君(원군) 以外의 八君(팔군)은 八伽倻(팔가야)에서 干들이 모셔다가 各其(각기) 自國(자국)의 君主(군주)로 삼으니 八君(팔군)은 다 推戴(추대)된 登位(등위)였다.
이로서 弁韓九國(변한구국)은 各各 自治(자치)하되 한 분의 盟主統治(맹주통치) 體制下(체제하)에 있게 되니, 東은 黃山江(황산강)에 닿고, 西는 方丈山(방장산)까지요, 北은 伽倻山(가야산)이 境界(경계)요, 南은 滄海(창해)에 이르니라.
元君(원군)은 龍準龍顔(용준용안)이요 雲眉重瞳(운미중동)인데, 龜背麟紋(구배인문)에 少鬚長臂(소수장비)라. 나는 새도 떨어질 眼光(안광)이나 威(위) 보다는 德(덕)이 더 높아 百姓(백성)이 慈愛(자애)서러운 父母(부모)를 대하듯 하였다.
開皇元年(개황원년) 十月에 假宮(가궁)을 지으시니 土階三尺(토계삼척)이요, 茅茨不剪(모자부전)이라. 九干(구간)등이 奏曰(주왈) “宮(궁)이 너무 낮고 허술하여 可히 元君(원군) 마마의 居處(거처)하실 곳이 못 됩니다”하니, 가라사대 “朕(짐)이 어찌 百姓(백성)의 괴로움을 즐겨 하리요” 하시다.
開皇(개황) 二年 癸卯(계묘) 春正月(춘정월)에 “朕(짐)이 都邑(도읍)을 定하여 社稷(사직)의 터전을 마련하고 後世(후세)에 지치리라” 하시고 假宮(가궁) 南(남) 新田(신전)에 납시사 四方(사방) 山勢(산세)를 살피시고 “이 땅이 비록 좁다하나 그 勢(세)가 빼어나고 그 形(형)이 奇異(기이)하여 可히 天乙諸衆(천을제중)도 聚團(취단)하여 살 만 하거늘 어찌 聖人(성인)의 起創(기창)에 一德(일덕)이 成三(성삼)하고 自三成七(자삼성칠)하며 萬戶成都(만호성도)가 못되리요. 正히 九聖(구성)이 居(거)할 땅 이로다” 하시다.
同年二月에 城(성)을 둘러싸게 하시니, 周圍(주위)가 一千五百五十四步(일천오백오십사보)라, 城(성) 이름을 “金官城”(금관성)이라 하시다.
이어 官府(관부)와 有司(유사)의 집과 나라의 各種(각종) 庫(고)집을 지을 곳을 定하시고 農期(농기)를 避(피)하여 일하도록 하시니 百姓(백성)의 收穫(수확)에 支障(지장)이 없었다.
同年十月에 諸(제) 役事(역사)를 始作(시작) 하시다.
開皇(개황)三年 甲辰(갑진)二月에 新宮(신궁)과 諸建築(제건축)이 이룩되니, 三月三日에 宮(궁) 이름을 “永明宮”(영명궁)이라 하시다.
三月十五日 永明宮(영명궁)에서 大駕洛(대가락) 九君會議(구군회의)가 열렸다. 八君(팔군)을 賜姓金氏(사성김씨) 하시고 各各 賜名(사명)하시니, 曰 次露(차로)요, 曰 東露(동로)요, 曰 南露(남로)요, 曰 西露(서로)요, 曰 壬露(임로)요, 曰 眞露(진로)요, 曰 春露(춘로)요, 曰 末露(말로)라.
다시 封君(봉군)하시니 次露(차로)를 星珍君(성진군)으로, 東露(동로)를 非火君(비화군)으로, 南露(남로)를 古珍君(고진군)으로, 西露(서로)를 古寧君(고녕군)으로, 壬露(임로)를 碧珍君(벽진군)으로, 眞露(진로)를 阿羅君(아라군)으로, 春露(춘로)를 加珍君(가진군)으로, 末露(말로)를 彌珍君(미진군)으로 各各 封(봉) 하시니, 從此(종차)로 八國(팔국)의 이름이 저절로 바뀌어져서 星珍伽倻,(성진가야) 非火伽倻,(비화가야) 古珍伽倻,(고진가야) 古寧伽倻,(고녕가야) 碧珍伽倻,(벽진가야) 阿羅伽倻,(아라가야) 加珍伽倻,(가진가야) 彌珍伽倻(미진가야)로 되니라.
元君(원군)과 八君(팔군) 사이에는 義(의)를 君臣(군신)으로 定하고 誼(의)는 兄弟(형제)로 定해지다.
八君(팔군)은 八伽倻(팔가야)를 自治(자치)하고 駕洛(가락)以外의 地域(지역)이나 國家(국가)와의 關係(관계)는 元君(원군) 마마의 命(명)을 받도록 定해졌다.
本(본) 伽倻地方(가야지방)은 大駕洛(대가락) 元君(원군) 直轄統治區域(직할통치구역)이 되니 伽倻(가야) 國名(국명)이 없어지다. 이래서 開皇(개황)三年봄 以後(이후)는 大駕洛國(대가락국) 內에 直轄國(직할국) 하나 外 八伽倻國(팔가야국)이 있게되니라.
駕洛(가락)以前(이전) 制度(제도)인 九干(구간)의 任事(임사)를 改定(개정)하시니
一 司天干(사천간)
二 司地干(사지간)
三 司宰干(사재간)
四 司典干(사전간)
五 司農干(사농간)
六 司工干(사공간)
七 司庫干(사고간)
八 司軍干(사군간)
九 司正干(사정간) 이라.
前九干(전구간)은 百僚之長(백료지장)일뿐 首干(수간) 以外에는 各其 分擔(분담)된 責任(책임)의 限界(한계)가 뚜렷하지 못하였다.
이에 司天干(사천간)은 天機(천기)를 管掌(관장)하는 任事(임사)요, 司地干(사지간)은 地理(지리)를 管掌(관장)하며, 司宰干(사재간)은 百官人事(백관인사)의 總攬責任(총람책임)이며, 司農(사농)은 農業(농업)을, 司典(사전)은 典法(전법)을, 司工(사공)은 工商(공상)을, 司庫(사고)는 國財(국재)를, 司軍(사군)은 兵務(병무)를, 司正(사정)은 그릇됨이 없도록 하는 任事(임사)의 各各 長(장)이 되니라.
初任者(초임자)는
司天干(사천간) 我刀(아도)
司地干(사지간) 汝刀(여도)
司宰干(사재간) 彼刀(피도)
司典干(사전간) 五刀(오도)
司農干(사농간) 留水(유수)
司工干(사공간) 留天(유천)
司庫干(사고간) 神天(신천)
司軍干(사군간) 五天(오천)
司正干(사정간) 神鬼(신귀)
가 各各 任命(임명)되니 九部(구부) 司干制(사간제)는 그 뒤 八君(팔군)이 各各 歸國(귀국)하여 그 나라에도 그대로 施行(시행)하니라.
開皇四年(개황사년) 乙巳三月에 司天干(사천간) 我刀(아도)와 司地干(사지간) 汝刀(여도)를 徐羅(서라)에 보내시고 그 나라의 職制(직제)를 알아보도록 하시다.
同年四月에 九部(구부) 司干級(사간급)을 伊干(이간)으로 고치시고, 伊干(이간)밑에 阿干(아간)을 두시고, 阿干(아간)밑에 級干(급간)을 두시고, 級干(급간)밑에 奈麻(내마), 그 밑에 初位(초위)를 두시니, 官等(관등)의 級(급)이 五等級(오등급)으로 定해지다. 革古鼎新(혁고정신)과 設官分職之道(설관분직지도)가 다 이루어지니, 理國(이국)과 齊家(제가)가 完全(완전)하게 되었다.
元君(원군)은 百姓(백성)을 親子(친자)같이 사랑하시고, 그 敎化(교화)는 嚴肅(엄숙)치 아니하여도, 威儀(위의)가 있고 그 政治(정치)는 부드러워도 잘 다스려졌고, 그 法典(법전)은 무른데도 犯法者(범법자)가 없었다.
開皇五年(개황오년) 丙午正月에 司天伊干(사천이간)과 司地伊干(사지이간)과 司農伊干(사농이간)에 令(영)하사 “朕(짐)이 奉川行道(봉천행도)나, 然(연)이나, 雨露(우로)를 전혀 하늘에만 依存(의존)함은 人事(인사)를 다하는 道理(도리)아니니, 溜水之方(유수지방)이 可也니라” 하시고 駕洛大坪之北(가락대평지북)에 溜堤(유제)를 여섯 곳에 쌓게 하사 以備旱天(이비한천)하시다.
開皇(개황)六年 丁未六月에 蟲害(충해)가 있어 凶兆(흉조)가 보이므로 元君(원군)은 “朕(짐)의 不德(부덕)으로 百姓(백성)과 나라에 災(재)가되니 可히 永明宮(영명궁)을 避(피)해야겠다” 하시고 三日三夜를 露天(노천)에 御宿(어숙)하시니 大雷(대뇌)가 일어나고 蟲害(충해)가 없어지다.
이로因(인)하여 百姓(백성)들이 이 事實(사실)을 널리 傳(전)하기 爲(위)하여 潤餘堂(윤여당)을 지었다.
開皇(개황)七年 戊申四月에 伊西國(이서국)사람 豆蓼(두료)와 遺殤(유상)이 서로 耕地(경지)를 다투어 몇 고랑의 터전을 各其(각기) 더 지어 먹을 樣(양)으로 是非(시비)하니 元來(원래) 그 땅이 그들의 先代(선대)부터 境界(경계)가 分明(분명)치 못하였음에 起因(기인)하더라.
오랜 是非(시비) 끝에 伊西國主(이서국주)도 自初(자초)의 일을 昭詳(소상)하게 알지 못하고, 또 그들의 各各 主張(주장)하는 바를 들은즉, 두 사람의 말이 다같이 一理가 있는지라 이에 境界是非(경계시비)를 正確(정확)하게 가려주지 못함에 마침 그 두 사람은 駕洛元君(가락원군)은 神聖(신성)이라 하니 그 분에게 가서 黑白(흑백)을 가려보자 하고 駕洛國(가락국)으로 오는데, 駕洛國內(가락국내)에 들어서니 여기도 또 耕地(경지)로 是非(시비)하는 百姓(백성)들이 있으니, 伊西國人(이서국인) 두 사람은 駕洛人(가락인)들의 是非(시비)를 구경하였다.
그런데 한 사람이 “昨年(작년)에 내가 여기까지 지어 먹었으니 今年(금년)에는 네가 지어먹어야 할 것 아니냐” 한다. 또 한 사람은 “昨年(작년)에 네가 지어먹었으니, 네 땅인데 왜 나더러 지으라고 하느냐” 한다.
그 사람은 또 “年年이 나만 여기를 지어먹으면 내가 어찌 世上에 얼굴을 들고 다니리오” 한다. 또 한 사람은 “남의 땅을 내가 지어먹으면 나는 무슨 얼굴을 들고 世上에 살겠는가” 한다.
이 是非(시비)는 끝이 없을 것 같았는데, 한 老者(노자)가 이 光景(광경)을 보고 달려와서 땅을 묵히면 하늘의 福(복)을 못 받고 元君(원군)마마의 百姓(백성)된 道理(도리)가 아니니, 두 사람이 共同耕作(공동경작) 하라는 말을 듣고, 是非(시비)하던 두 駕洛百姓(가락백성)은 叩頭(고두)하고 물러서는 것을 본 伊西國百姓(이서국백성) 두 사람은 自己들의 일을 크게 부끄러이 여겨 그대로 돌아갔더라.
이로 因(인)하여 元君(원군)의 聖德(성덕)은 他國(타국)에 까지 알려지니 五月에 二十戶가 駕洛國(가락국)으로 移住(이주)해 오니, 慕德入國之始(모덕입국지시)라.
六月에 伊干(이간)등이 獻言(헌언)하여 가로되 “元君(원군)마마 降臨(강림)하신 지 해가 오래 되옵는데 아직 后妃(후비)를 맞아 드리시지 아니 하니 이는 天道(천도)의 온전함이 못되는 줄 아옵니다. 臣(신)들이 좋은 處女(처녀)를 가려 바치겠사오니 바라옵건데 빨리 后妃(후비)를 定하시고, 乾坤合德(건곤합덕)으로 駕洛百姓(가락백성)의 福을 더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였더니 元君(원군)은 “朕이 이곳에 온 것은 天命(천명) 이었다. 朕이 后를 맞는 것도 天命(천명)일지니 卿(경)들은 너무 걱정하지 말라” 하시고 물리치시다.
同年 七月二十七日에 司工伊干(사공이간) 留天(유천)에게 命하사 오늘 卿(경)들이 바라는 后가 오나니 “肆席(사석)차비를 갖추고 輕舟(경주)와 駿馬(준마)를 가지고 望山島(망산도)에 가서 기다리라” 하시고 또 司正伊干(사정이간) 神鬼(신귀)에게 命하사 乘岾(승점)으로 가라 하시다.
留天伊干(유천이간) 一行이 望山島(망산도)에서 먼저 멀리 바다를 바라보니 忽然(홀연)히 바다 西南쪽에서 붉은旗(기)를 달고 오는 붉은 돛대의 배가 北쪽으로 向하고 오는지라, 留天(유천)등이 횃불을 드니 배는 곧 下陸(하륙)하려 하는지라, 伊干神鬼(이간신귀)가 바라보고 急(급)히 宮(궁)으로 달려와서 元君에게 아뢰니 들으시고 기뻐하시다.
이어 九伊干을 다 보내시되 좋은 배로 맞아 모시고 오도록 하였다.
그런데 后는 “나와 너희들은 初面(초면)이요 알지 못하는 터인데 내가 어찌 輕率(경솔)히 너희를 따라가겠느냐” 하는지라, 留天(유천)등이 돌아와서 다시 그 말을 元君에게 품 한즉 “그럴 일 이로다” 하시고 宮(궁)外 西南山 밑에 幔殿(만전)을 베풀고 親(친)히 기다리시다.
后는 別浦津頭(별포진두)에 繫舟(계주)하고 上陸(상륙)하사 丘陵(구릉)에 오르사 비단 바지를 벗어 地方山神(지방산신)에게 선물로 사라주시다. 后의 從者(종자)는 男女 合하여 二十餘人(여인)이요 侍從責任(시종책임)은 申輔(신보)와 趙匡(조광) 그리고 申輔(신보)의 아내 慕貞(모정)과 趙匡(조광)의 아내 慕良(모량)이었다.
后는 그밖에 綾羅(능라)와 錦繡(금수)며 金銀(금은)과 珠玉(주옥)이며 衣裳疋緞(의상필단)에 瓊玖玩物(경구완물)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가지고 오시다.
幔殿(만전) 가까이 后 일행이 이르자 元君은 親(친)히 맞아 드리시니 兩(양) 處臣(처신)들은 뜰 아래서 拜禮(배례)하고 물러서니 元君은 有司(유사)인 司工伊干(사공이간)에게 命하사 申, 趙(신, 조) 두 膝臣夫婦(슬신부부)를 各 房에 引導(인도)케 하시고, 以下(이하) 奴婢(노비)等은 別處(별처)에 두도록 하시고 蘭液蕙醑(난액혜서)로 接待(접대)토록 하시고 衣類(의류)와 寶物(보물)을 分與(분여)케 하시고 別도로 司軍伊干(사군이간)에게 命하사 特別(특별)히 保護(보호)하는데 軍人으로써 지키도록 하시다.
이날 밤 后는 燭火(촉화)를 밝히고 元君은 淨水(정수)를 받들어 陰陽之體物(음양지체물)로 含和(함화)의 禮(예)를 이루고 寢殿(침전)에 드시니 后曰 “나는 本是 盤邪陁國(반사타국)과 邯葆陀國(감보타국) 사이에 있는 阿踰陁國(아유타국)의 託那悉大王(탁나실대왕)의 딸 黃玉公主(황옥공주)니 姓(성)은 許氏(허씨)요 나이는 열여섯인데 今年五月朔日(삭일)에 父王(부왕)께서 母后(모후)와 함께 꿈을 꾸시니 上帝(상제)를 뵈었는데, 上帝(상제)말씀이 東北(동북) 滄海萬里(창해만리)外에 駕洛國(가락국)이 있으니 하늘이 元君을 내려 登極(등극)케 하였으니 이 사람은 眞是(진시) 神聖(신성)이라 나라를 새로 다스리나 아직 配匹(배필)을 얻지 못하였으니 公主를 보내어 짝짓게 하라 하시고 上天(상천)하셨다 합니다, 잠을 깬 뒤에 父王과 母后는 꿈이 같으므로 나에게 떠나라 하시는지라 五月十一日에 出發(출발)하여 滄海(창해)에 떠서 蒸棗(증조)를 찾고 하늘에 옮겨 蟠桃(반도)를 얻어 螓首(진수)로 외람히 龍顔(용안)을 가까이 하였나이다” 하시니 元君은 “나는 날 때부터 자못 聖스러워 미리 公主가 멀리서 올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밑에 있는 臣下들이 納妃(납비)하라는 請(청)을 받아드리지 아니 하였더니 只今(지금) 賢淑(현숙)한 사람이 스스로 이르렀으니 이 사람의 多幸(다행)이요 이 나라의 福이라” 하시고 寢殿(침전)에 드시다.
七月그믐날 뱃사공外 一行 十五人이 阿踰陁國(아유타국)으로 돌아 갈 제 元君은 各人에게 穀(곡) 十石과 布帛(포백) 二十匹(필)씩 을 주시니라.
八月一日 本宮(본궁)으로 還駕(환가)하시다.
十月에 九伊干(구이간) 奏請(주청)으로 太中宮(태중궁)을 지으니 本殿(본전)은 兩德殿(양덕전)이라.
開皇(개황)八年 己酉(기유)三月에 太中宮(태중궁)이 준공되었다. 內府庫(내부고)와 外府庫(외부고)도 이룩되다.
開皇(개황)九年 庚戌(경술)七月에 伊干(이간)들의 이름을 고쳐주시니, 我刀(아도)는 我躬(아궁)으로, 汝刀(여도)는 汝諧(여해)로, 彼刀(피도)는 彼藏(피장)으로, 五刀(오도)는 五常(오상)으로, 留水(유수)는 留功(유공)으로, 留天(유천)은 留德(유덕)으로, 神天(신천)은 神道(신도)로, 五天(오천)은 五能(오능)으로, 神鬼(신귀)는 臣貴(신귀)로 고쳐주시다.
開皇(개황)十年 辛亥(신해)九月에 月登樓(월등루)를 지으시다.
開皇(개황)十一年 壬子에 許后(허후)는 親(친)히 五官級婦人(오관급부인)을 太中宮(태중궁)으로 召集(소집)하시고 養蠶法(양잠법)을 가르치시니 自此(자차)로 駕洛國(가락국)에 비단이 생산되고 綺紋鳥禽(기문조금)을 繡(수)놓아 元君의 裳(상)은 크게 華麗(화려)하여지다.
開皇(개황)十二年 癸丑(계축)에 宮中(궁중)에 明絲室(명사실)이 지어지다. 織物(직물)이 全國(전국)에 大昌(대창)하더라.
開皇(개황)十三年 甲寅(갑인)五月에 倭人(왜인) 彌生(미생)이 배를 六隻(척)가지고 와서 銀(은)으로 駕洛(가락)비단을 買去(매거)하니 彩紋緞(채문단)이 倭國(왜국)으로 많이 팔려가다.
倭人(왜인)들은 當年(당년)에 四次 往來(왕래)했고 金官城(금관성)外에 市場(시장)이 생기고 그들은 문채비단을 駕羅物(가라물)이라 하며 사 가더라.
開皇(개황)十四年 乙卯(을묘)에 倭商(왜상)이 黃山江(황산강)을 배로 올라가서 碧珍伽倻(벽진가야) 까지 通商路(통상로)를 열었고, 그들의 商品留置所(상품유치소)를 駕洛下津(가락하진)에 두기를 奏請(주청)해 옴으로 元君은 允許(윤허)하시다. 倭商(왜상)들은 物品留積庫(물품유적고)를 짓고, 그들은 彌馬那庫(미마나고)라 하다.
開皇(개황)十五年 丙辰(병진)에 新羅(신라) 邊境人(변경인)들이 비로소 비단을 買去(매거)하다.
開皇(개황)十六年 丁巳(정사)에 倭人(왜인) 宿門(숙문)이 와서 梨木(이목)과 穀種(곡종) 二類(이류)를 買去(매거)하다.
開皇(개황)十七年 戊午(무오)十一月十六日에 許后(허후)가 公主(공주)를 낳으니 “也尺”(야척)이라 이름하시고 國人(국인)이 즐거워 慶祝(경축)하더라.
開皇(개황)十八年 乙未(을미) 春(춘)三月에 元君은 駕洛直轄境域(가락직할경역)을 巡歷(순역)하시고 民情(민정)을 살피시고 鰥寡(환과)와 孤獨(고독)한 사람이며, 老齡人(노령인)을 慰撫(위무)하시고 國役(국역)과 租稅(조세)를 一年間 免(면)하시다.
開皇(개황)十九年 庚申(경신)八月과
開皇(개황)二十年 辛酉(신유)四月과
開皇(개황)二十一年 壬戌(임술)三月에 各各 八伽倻(팔가야)의 民情(민정)을 살피시기 爲(위)하여 巡歷(순역)하시니 頌德(송덕)의 소리가 伽倻天地(가야천지)에 널리 퍼지더라.
開皇(개황)二十二年 癸亥(계해) 秋(추)七月에 許后(허후)꿈에 큰곰을 보고 孕胎(잉태)하시다.
開皇(개황)二十三年 甲子(갑자)八月二十九日에 아들을 낳으시니 駕洛國(가락국)에 처음으로 元君後嗣(원군후사)가 誕生(탄생)하다.
元君은 “巨德”(거덕)이라 이름지으시고, 國中(국중)은 慶事(경사)를 크게 祝賀(축하)하며 金官城(금관성)中 百姓(백성)은 三日동안 더러운 것을 만지지 아니하고 新衣(신의)를 갈아입고 宮中은 七日間 慶祝(경축)하였다.
開皇(개황)二十四年 乙丑(을축)七月에 彩丹神鳥(채단신조)가 宮西에 날아드니 瑞氣(서기) 가득하여 國中(국중)이 和(화) 하거늘 元君 가라사대 “이는 朕(짐)이 나라를 다스림에 큰 허물이 없는 證據(증거)라” 하시고 “鳳鳥(봉조)가 왔구나” 하시다.
開皇(개황)二十五年 丙寅(병인) 西垣(서원)에 鳳凰臺(봉황대)를 이룩하시다.
開皇(개황)二十六年 丁卯(정묘) 治平閣(치평각)이 이룩되다.
開皇(개황)二十七年 戊辰(무진)二月六日에 觀天臺(관천대)를 세우고 日月曆象(일월역상)을 알도록 하시니 이름하사 天市臺(천시대)라 하시니 두 個의 臺(대)를 쌓아서 위에가서 이으니 形(형)이더라.
石基壇(석기단) 五尺위에 構木而成(구목이성)하니 높이가 二十四尺이라. (石基五尺 構木十九尺)
開皇(개황)二十八年 己巳(기사)五月에 馬韓國王(마한국왕) 多路(다로)의 使者(사자) 于之紹(우지소)가 漆器(칠기)를 바쳐왔다.
開皇(개황)二十九年 庚午(경오)七月에 塋惑(영혹)이 虛垣(허원)을 衝犯(충범)하니 元君이 가라사대 “未久(미구)에 自南海(자남해)로 賊(적)이 金官城(금관성)을 侵犯(침범)해 오리라” 하시고 防備(방비)와 警戒(경계)를 할 것을 伊干(이간)등에게 命 하시다.
八月에 鷹浦(응포)로 怪船(괴선)이 上陸(상륙)하더니, 其中 一人이 十餘衆(십여중)을 引率(인솔)하고 金官都(금관도)로 들어와서 이르기를 自己들은 楊沙國(양사국)에서 온 使者(사자)이니 元君을 拜謁(배알)코저 하는지라, 그는 스스로 이름을 達解(달해)라 하다. 伊干(이간) 汝諧(여해)가 이 事實(사실)을 알외니 元君 曰 “내 이미 짐작한지 오래라”하시며 迎間(영간)에 납시되 司軍阿干(사군아간) 芝峀(지수)만을 따르라 하시다. 達解(달해)를 引見(인견)하시니 解(해)왈 “내 또한 뜻이 있어 이에 다다르니 駕洛國土(가락국토)를 나에게 讓與(양여)하심이 어떻닛고” 하니 元君 가라사대 “朕이 하늘 뜻을 받들어 이에 臨(임)하였거늘 어찌 汝(여)의 뜻을 따르리” 하시니 達解(달해)는 “能力(능력)으로 大位(대위)를 앗으리라”하고 傾刻間(경각간)에 매가되어 덮치니 元君은 곧 독수리가 되어 매를 쫓는지라 解가 급히 참새로 化하니 元君은 곧 새매가 되어 참새를 잡으니 숨돌릴 사이에 참새는 達解(달해)의 本모양으로 變(변)했고 元君도 還本龍顔(환본용안)이라. 解 拜辭(배사)하여 가로되 “能(능)히 大位(대위)를 힘으로 取(취)할려고 하였으니 其 罪(죄) 死(사)에 當(당)하고 새매의 힘으로 잡은 참새를 살려주셔서 本身(본신)으로 化하게 하심은 元君 마마의 殺生(살생)을 아니하신 鴻德(홍덕)이니 길이 잊지 아니하고 다시는 犯(범)하지 아니 하겠나이다”하고 곧 떠나니라. 伊干(이간)들이 뒤를 “쫓으오리까” 하니 元君 가라사대 “그리하면 우리가 저를 겁내는 줄 알 것이니 그냥 두라”하시다.
達解(달해)는 黃浦津(황포진)으로 出航(출항)하여 本國으로 달아나다.
開皇(개황)三十年 辛未(신미)十月에 非火伽倻(비화가야)에서 斑鳥(반조)를 바쳐왔고
開皇(개황)三十一年 壬申(임신)十月에는 阿羅伽倻(아라가야)에서 瑞栗(서율)을 獻納(헌납)해오다.
開皇(개황)三十二年 癸酉(계유)二月十八日에 申輔(신보)가 돌아가니 許后(허후)가 親(친)히 問喪(문상)하시고 內庫物資(내고물자)를 喪(상)에 쓰도록 내리시고 阿踰陁國(아유타국)의 벼슬 그대로 泉府卿(천부경)으로 이름하시다.
申泉府(신천부)는 許后(허후)를 모시고 온 以來 趙匡(조광)과 더불어 忠(충)을 다하여 섬겼고 國家(국가)를 위하여 竭力(갈력)하였으니 文字(문자)를 가르치고 禮樂(예악)을 일으키고 萬物(만물)을 獎勵(장려)하여 그 功이 九干(구간)위에 處(처)했어도 伊干(이간)의 벼슬을 받지 아니하였다. 開皇曆(개황역)을 執筆(집필)하여 數十年에 이르니 駕洛文明(가락문명) 緖開之功(서개지공)을 이루 말 할 수가 없었으니 元君은 그 子孫(자손)에게 粗(조)를 내리시고 盛(성)히 葬禮(장례) 지내도록 하시다.
開皇(개황)三十三年 甲戌(갑술)七月에 元君은 申輔(신보)의 子 申玆(신자)에게 宗文監職(종문감직)을 내리시고 世襲(세습)토록 하시고 趙匡(조광)에게는 宗正監職(종정감직)을 내리시고 世襲(세습)토록 하시다.
開皇(개황)三十四年 乙亥(을해)에 元君은 二子를 얻으시니 巨壇(거단)이라 이름하시다.
開皇(개황)三十六年 丁丑(정축)十一月에 元君 第 三子 巨靈(거령)이 誕生(탄생) 하시다.
開皇(개황)三十七年 戊寅(무인)七月에 斯羅(사라)가 쳐들어오니 黃山(황산)에서 싸워 물리치다. [이 싸움에 羅將(라장)은 吉門(길문)이 나왔고 우리는 阿干(아간) 旗大(기대)가 領兵出陳(영병출진)하여 却之(각지)라.]
開皇(개황)四十年 辛巳(신사)九月에 元君 第四子 巨中(거중)이 誕生(탄생)하니라.
開皇(개황)四十一年 壬午(임오)二月에 地震(지진)이 있었다.
開皇(개황)四十四年 乙酉(을유)三月에 元君 第五子 巨宇(거우)가 誕生(탄생)하였다.
開皇(개황)四十六年 丁亥(정해)十月에 閑等樓(한등루)가 이룩되다.
開皇(개황)四十七年 戊子(무자)七月에 斯羅軍(사라군)이 加召(가소)와 馬頭(마두)와 乘兮(승혜)等 에 侵入(침입)하고 防築(방축)을 쌓으니 加珍(가진)의 軍으로 能히 막지 못하여 大駕洛(대가락) 統軍(통군)이 出戰(출전)하여 막다.
開皇(개황)四十八年 己丑六月에 元君 第六子 巨山(거산)이 誕生(탄생)하시다.
開皇(개황)五十年 辛卯(신묘)十二月에 元君 第七子 宇德(우덕)이 誕生(탄생)하시다.
開皇(개황)五十二年 癸巳(계사)十一月에 元君 第八子 加德(가덕)이 誕生(탄생)하시다.
開皇(개황)五十五年 丙申(병신) 二月에 元君 第九子 膩德(이덕)이 誕生(탄생)되고 우리 軍(군)이 徐羅柵(서라책)인 馬頭(마두)를 쳤다.
同年九月에 우리 軍(군)이 加召柵(가소책)을 치니 柵主(책주) 長世(장세)가 戰死(전사)하다. 斯羅(사라)는 大兵(대병)을 거느리고 다시 와서 싸우니 우리가 물러섰다.
開皇(개황)五十六年 丁酉(정유)正月에 斯羅(사라)와의 싸움이 잦음을 哀惜(애석)하게 여기시고 元君은 和平(화평)하게 살도록 德(덕)으로 달래여, 使臣(사신)이 오고가고 平和(평화)가 왔다.
開皇(개황)五十七年 戊戌三月에 太中宮(태중궁)에서 大駕洛(대가락) 會議(회의)가 열렸다.
東北(동북)과 西南(서남)에 장차 侵入(침입)해 올지 모를 外軍(외군)을 막기 爲(위)하여 八伽倻(팔가야)를 或(혹) 竝合(병합)하고 或은 境域(경역)을 다시 定하여 五伽倻(오가야)로 하시니 星山伽倻(성산가야) 阿羅伽倻(아라가야) 古寧伽倻(고녕가야) 非火伽倻(비화가야) 高靈伽倻(고령가야)더라.
八君中 三君은 本伽倻(본가야)로 와서 大駕洛國(대가락국) 元君을 輔佐(보좌)하게되니 이때부터 三副君(삼부군)이 생기니라.
開皇(개황)五十八年 己亥(기해)正月에 二公主(공주) 雪容(설용)이 誕生(탄생)하시다.
開皇(개황)六十年 辛丑봄에 花上花(화상화)가 피어나다.
開皇(개황)六十一年 壬寅(임인)三月에 太中宮(태중궁)에서 元君降誕登位國慶宴(원군강탄등위국경연)이 있을 제 五伽倻(오가야) 國主(국주)와 三副君(삼부군) 伊干(이간) 阿干(아간)등 大駕洛(대가락) 大小官員(대소관원)이 賀禮(하례)드리고, 斯羅(사라)는 使臣(사신)을 보내오니 金銀麻苧(금은마저), 牛馬(우마)等을 보내왔다.
南浦(남포)에 七色(칠색)이 玲瓏(영롱)한 円貝(원패)가 나와서 바쳐왔기 때문에 元君은 이로서 貨幣(화폐)로 하도록 하시니 駕洛國經寶(가락국경보)의 처음이 되니라.
이날 元君마마는 九王子와 二公主에 各各 賜姓(사성)하시니 許后의 請(청)을 받아드리사 一公主 也尺(야척)과 八王子 加德(가덕)과 九王子 膩德(이덕)은 許氏(허씨)로 賜姓(사성)되니 許后姓(허후성)을 이었고 其外 일곱王子와 끝의 公主 雪容(설용)은 金氏(김씨)로 賜姓(사성)되니 元君마마 姓(성)을 이었더라.
同年八月에 斯羅(사라)의 使臣(사신)이 와서 婆娑主(파사주)의 글을 바치니 그 글에 “徐羅(서라) 北에있는 音質國(음질국)과 悉直國(실직국)이 서로 境域(경역)을 다투어 是非하여 斯羅(사라)에 黑白(흑백)을 가려달라고 해왔으나 到底(도저)히 그 自初之終(자초지종)을 헤아릴 수 없음으로 이는 神聖資質(신성자질)이라야 可히 確定(확정)지을 수 있는 일이므로 이에 사람을 보내서 尊駕(존가)가 金城(금성)에 이르심을 바라옵니다.” 하였더라. 이에 元君께서는 不在中(부재중)의 金官城(금관성)을 三副君(삼부군)에게 맡기시고 伊干둘 阿干여섯 以下 四十餘人(사십여인)을 거느리시고 金城(금성)으로 巡遊(순유)하사 두 나라의 是非(시비)를 解決(해결) 하시다. [駕洛國(가락국) 밖의 일을 處決(처결)하신 처음이라]
開皇(개황)六十二年 癸卯(계묘)正月二十一日에 趙匡(조광)이 돌아가니 元君은 御命(어명)으로 駕洛全國(가락전국)에 三日間 일을 못하도록 하시다.
開皇(개황)六十五年 丙午(병오)八月에 斯羅(사라)와 馬頭(마두)에서 다시 싸우다.
開皇(개황)七十年 辛亥(신해)十月에 金官城(금관성)에 새로운 門樓(문루)를 세우니 望德梁(망덕양) 利見梁(이견양) 栴檀梁(전단양) 松壽梁(송수양)이라. (梁은 門이라)
開皇(개황)七十四年 乙卯(을묘)正月에 女星(여성)이 帶殺(대살)하니 同二月에 雞林(계림)을 쳐서 黃山江(황산강)넘어 十里까지 물리치다.
同七月에 雞林主(계림주)가 黃山江(황산강)을 넘어 쳐들어오니 我軍(아군)이 包圍(포위)하여 大勝(대승)하다. 雞林主(계림주)는 간신히 목숨을 保全(보전)하여 물러가다.
開皇(개황)七十五年 丙辰(병진)八月에 雞林(계림)은 다시 쳐오니 우리는 굳게 지켜서 能히 지탱하니 雞林軍(계림군)이 利(이)롭지 못함을 알고 물러가다.
開皇(개황)七十六年 丁巳(정사)十一月에 駕洛開國(가락개국) 以後(이후)에 제일 큰 年豐(년풍)으로 百姓은 곡식을 다스릴 庫(고)집이 없어 들에 穀庫(곡고)를 지으니 伐庫(벌고)가 생기다.
開皇(개황)七十七年 戊午(무오)七月에 金官城(금관성)뒤에 麒麟(기린)이 나오니 元君 가라사대 “瑞兆(서조)라” 하시다. 百姓은 太平聖世(태평성세)를 누리니 輕架(경가)에 重馱(중타)를 運搬(운반)하고 歌樂(가락)이 晝夜(주야)를 끊임없고, 밤에 扉門(비문)이 열려있고 賤民(천민)의 입에도 薰醍(훈제)가 그치지 아니하니 馬韓諸國(마한제국)이 듣고 歸化(귀화)한자 千戶(천호)를 헤아리고 黃山江(황산강)건너 雞林과의 사이는 서로 德있는 곳을 가려 移住(이주)토록 兩國(양국)이 出入에 禁(금)함이 없게 되니라.
開皇(개황)八十八年 己巳(기사)十一月에 永德宮(영덕궁)이 이루어지니 霅揚殿(삽양전)이 主殿(주전)이라. 新宮(신궁)에서 大駕洛太平宴(대가락태평연)이 열리다.
開皇(개황)九十七年 戊寅(무인)봄에 元君은 許后와 同輦(동연)으로 五伽倻(오가야)를 巡遊(순유)하시고 民情(민정)을 살피시고 府庫(부고)가 찼으니 租穀(조곡)을 金官都(금관도)로 納付(납부)함을 三年間 禁(금)하시다.
開皇(개황)百年 辛巳(신사)三月十五日에 新宮(신궁)에 壇(단)을 모으고 親(친)히 天地에 祭祀(제사)하시니 祭天壇(제천단)이라.
開皇(개황)一百二十一年 壬寅(임인)三月三日에 太子壇(태자단)을 세우고 元嗣(원사) 巨德(거덕)을 壇上(단상)에 서게 하신 後 太子로 封(봉)하시다. 元君 가라사대 “太子는 繼天之統(계천지통)이니 效德天地(효덕천지)하고 行德中外(행덕중외)하야 能(능)히 駕洛(가락)을 保全(보전)하고 朕(짐)의 그림자를 어둡게 하지 마라” 하시다.
同年三月十五日 부터 太子는 年老(년로)하신 元君의 御國事務(어국사무)를 輔佐(보좌)하시다.
이때부터 許后께서는 太中宮坤室(태중궁곤실)에 安置(안치)된 佛(불) [阿踰陁國(아유타국)서 오실 때 奉安(봉안)한 像(상)]前 淨水(정수)를 손수 뜨시지 아니하고 太子妃(태자비)에게 責任(책임) 지우시다.
同年十月에 太和宮(태화궁)을 짓기 시작하다.
開皇(개황)一百二十二年 癸卯(계묘)三月에 太和宮(태화궁)이 이룩되다.
開皇(개황)一百二十三年 甲辰(갑진)二月에 靑鶴樓(청학루)가 이룩되다.
開皇(개황)一百四十八年 己巳(기사)正月에 大地震(대지진)이 있고, 三月朔日(삭일) 許后가 太中宮(태중궁)에서 逝世(서세)하시니 享壽(향수) 一百五十七年이라. 元君의 슬퍼하심은 勿論(물론)이요 伽倻五國(가야오국)과 더불어 大駕洛(대가락)이 땅이 꺼진 것처럼 서러워하다. 城北(성북) 龜旨南麓(구지남록)에 葬禮(장례)지내다.
開皇(개황)一百四十九年 庚午(경오)三月二十一日 太子(태자) 巨德(거덕)이 母后의 逝世(서세)를 悲痛(비통)해 하다가 逝世(서세)하시니 萊峠(래상)에 葬事(장사)지내다.
開皇(개황)一百五十年 辛未(신미)三月三日에 巨德太子(거덕태자)의 元子 諱(휘) 居(거)字 登(등)字가 太子壇(태자단)에서 太子로 封(봉)해지다.
開皇(개황)一百五十七年 戊寅(무인)三月에 鷰子樓(연자루)를 세우시고 元君 가라사대 “朕(짐)이 이땅에 經論(경론)함은 乃九聖可住之氣(내구성가주지기)를 살핀 바이니 後世(후세)에 大運(대운)이 東北雞林(동북계림)으로 合해 지리니 그 때를 짐작키 어려우리라. 朕(짐)이 鷰子樓(연자루)를 세워 樓(누)의 有事(유사)로 때를 짐작케 하노라 ” 하시다.
開皇(개황)一百五十八年 己卯(기묘)三月二十三日 日未落(일미락)인데 元君마마 또 세상을 뜨시니 國人(국인)이 슬퍼함은 마치 하늘이 무너진 듯 하였다. 卽日(즉일)에 太子는 位에 오르시니 大駕洛國(대가락국) 두 번째 主君(주군)이 되시고 五伽倻國主(오가야국주)의 받듬으로 上君(상군)이 되시다.
元君마마는 御壽(어수) 一百六十八年에 駕洛(가락)과 百姓(백성)과 寶位(보위)와 一百六名의 血孫(혈손)을 두고 가시다.
上君마마는 元君마마의 葬禮(장례)를 모시고 “首陵(수능)”이라 높이니 “첫 陵(능)” 이라는 뜻이요, “后陵(후능)”과 함께 駕洛國乾坤之陵(가락국건곤지능)이라. 上君은 또 神廟(신묘)를 세우사 祭祀(제사)를 지내시니 每日(매일) 祭需(제수)를 올려도 元君마마의 顯靈(현령)은 正月三日과 七日 五月五日과 八月五日 그리고 八月十五日 以外는 흠향 하시지 아니 하심으로 開皇一百五十九年 부터는 一年에 다섯 번 祭祀(제사)지내시다.
開皇一百五十九年 三月
大駕洛國 宗正監 趙呂 謹修
開皇曆 謹譯을 끝내고 附記 할 일은 新羅三十一代 文武王께서 合國後 끊어진 元君祭享을 다시 復活하실 때 처음으로 位牌를 모셨는데 “駕洛元君世祖大王之位” 라고 쓴 記錄이 있어 添記합니다.
開皇一千九百二十八年 七月
雞林后人 金明煥 謹譯
駕洛國 開皇曆解說 終
開皇 一千九百二十八年
西紀 一千九百六十九년 八月二十日 印刷
開皇 一千九百二十八年
西紀 一千九百六十九年 九月一日 發行
譯解 金 明 煥
發行 金 達 範
開皇 一千九百六十一年 四月에 金 南 哲 이 漢字에 토를 달고 誤字 脫字 부분을 바로잡아 再發行 합니다.
○김규봉(전 양산문화원 근무) 족장님 메일내용입니다.(2010. 4.2)
개황력은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원전이 되는 역사서입니다. 학계에서는 김유신이 찬한 것으로 보고 있는데, 김유신이 찬했다기 보다는 그 이전에 존재하던 가락국편찬 역사서를 참조했다고보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어쨌든 이런 유서깊은 책이 1970년전후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왜냐하면 개황력에 대한 이름은 기록되어 있어도 내용을 기록한 역사서는 그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개황력의 원본을 찾는 일은 너무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지금 보내드리는 개황력은 경남 밀양에 거주하시는 김남철 족장님이 보내주신 겁니다.
-당시 보내주셨던 메일 원본입니다.-
안녕하세요.
나도 수로할아버지 71세손으로 삼현파입니다.
이 개황력 복사본은 전라도에서 먼 친척이 소장하고 계신것을 복사한 것입니다.
그 분은 돌아가셨고요.
원본은 아쉽게도 燒失되었다고 하네요.
역해는 한학에 아주 조예가 깊은 분이 하셨는데, 그 분도 돌아가셨습니다.
60년대에 부산에 계신 몇몇 종친들의 부탁으로 그 분이 풀이를 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풀이한 원본은 지금 행방을 알 수 없고요.
여러부 복사하여 몇몇 종친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나 한자가 너무 어려워 읽기 힘들다고 해서 내 나름대로 토를 달아 재 편집하였습니다.
김태식교수 맞습니다. 김해시장은 아마 정치적인 성향이 많은 분 같네요.
메일로 보내니 잘 연구하셔서 꼭 빛을 보게 해주세요.
원하시면 복사원본도 보내드릴께요.
나는 현재 밀양 초동면에 살고 있는 은퇴자 입니다.
전직은 교사였고요. 부산에서 고등학교에 쭉 재직하였습니다.
당당과목이 역사와는 무관하여 구체적인 것을 잘 알지 못하는 것이 아쉽네요.
그럼 수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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