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자료실

[스크랩] 임꺽정, 그는 의적인가!~

회기로 2011. 2. 25. 17:48

 

 

1. 네가 거꾸로 나왔어도 세상은 바로 살아라!~

 

 

그들의 거점 황해도는 무법지대에 가까웠다.

마을을 약탈하고 관청을 습격하며 거침없이 공권력에 저항했다.

 

16세기 중반 조선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도적떼.

바로 임꺽정이었다.

 

부정한 방법으로 모은 부자들의 재산을 훔치고

부패한 관리들의 재산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도적.

 

우리는 그런 도적을 '의적'이라고 부른다.

 

로빈훗중세 유럽을 무대로 활동한 전설적인 의적이다.

문학작품으로 활약을 보면

백성들을 괴롭히는 봉건지배층에 맞서

빼앗긴 재산과 짓밟힌 정의를 백성들에게 되돌려준 대표적 영웅이다.

 

조선 전기 대표적 도적이었던 임꺽정 역시 의적으로 전해진다.

그동안 우리는 역사소설과 드라마를 통해 임꺽정을 만나보았다.

 

그렇다면 역사속에 실제 임꺽정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임꺽정의 첫 행적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은 경기도 양주이다.

 

임꺽정이 태어난 곳으로 알려진 곳에

임꺽정과 연관된 여러 흔적들이 전해진다.

주민들 사이에 임꺽정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들은 오랜 세월 사실로 전해지고 있다.

 

마을 뒷산에 있는 '임꺽정 우물'이라고 전해지는 옹달샘이 있고

'임꺽정 계곡'은 임꺽정이 백정 일을 하던 곳으로 전해진다.

 

"어머니께서 순산할 적에

모든 짐승들은 머리부터 나와야 하는데

임꺽정은 다리부터 나왔습니다.

 

그래서 임꺽정 어머니께서

'네가 거꾸로 나왔어도 세상은 바로 살아라'

이름을 '꺽정'(巨正)이라고 지어줬다고 합니다.

                                                       - 노인호(73세. 양주시 문화재관리)

 

 

 

 

 

임꺽정이 태어나고 자란 곳으로 전해오는 집터에서는

'임꺽정 생가 보존비'가 세워져 있고

 

어린시절 뛰어놀았다고 하는 불곡산 제2봉우리

일명 '임꺽정봉우리'로, 양주시의 상징과도 같다.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양주시 곳곳에 전하는 전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임꺽정이라는 사람 자체가 천민 출신으로

조선시대 역사에 기록될 수 없는 신분적 상황이었습니다.

 

임꺽정이 난리를 일으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그런 과정속에서 임꺽정 출생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설로 담겨 내려온다면

그것을 역사적 진실로 받아드려도 큰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아집니다."

                                                                     - 이도남 박사(건국대 사학과)

 

지금까지 우리가 기억하고 부르는 '꺽정'이라는 독특한 이름이

세간에 오르며 역사에 전면에 등장하는 것은

45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명종실록에

'임거질정(林巨叱正)'으로 나타나고 있다.

 

임꺽정의 난은

명종 14년(1559)에서 명종 17년(1562)까지

3년 이어진다. 

 

록에 따르면

그는 황해도에서 도적떼를 이끌고

대낮에도 살인과 약탈을 일삼았다고 한다.

 

1559년 3월 그러한 행적의 보고되면서 조정은 충격에 휩싸인다.

 

"황해도에 도적떼가 횡포하여 

살인과 약탈이 방자하게 이어질 뿐만 아니라

대낮에도 관군을 포위하며 수령과 나졸을 사살하며

옥문을 부수고 수감된 일당을 빼앗아가는 실정이옵니다."

 

"도적의 세력이 매우 커져 마치 적국이 있는 것과 같으니

지금 엄히 다스리지 못하면

백성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 말로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속히 조정의 위엄을 보이셔야 합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기 임꺽정의 세력은 황해도 고을 수령들이

자체 병력으로는 진압할 수없을 정도로 세력이 막강해진 듯 보인다.

 

급기야 조정이 긴급 대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조정은 즉시 도적과의 전쟁이 선포되고

황해도 일원의 관리는 모두 무관으로 교체되었다.

 

하지만 임꺽정은 관아를 습격하고 포도관까지 살해하며

공권력에 정면으로 맞섰다.

 

"개성부 포도관 이억근이 임꺽정을 추격하다 살해되었다."

 

"임꺽정의 난은 조선 건국 이후

최초의, 최대 규모의, 최장기간에 걸친 조직적 농민 저항이었고,

 

또 이 난의 활동 과정에

소상인, 수공업자, 농민, 아전 등의 광범위한 호응을 받아

난이 확대 되어나가서

국가에서 굉장히 위기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 한희숙 교수(숙명여대 인문학부)

 

위기를 느낀 조정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임꺽정을 도적의 괴수로 보고

주요 거리마다 특별포고령이 내려졌다.

임꺽정을 잡기 위한 관민합동작전에 나선 것이다.

포고문에는 백성들의 도움을 받디 위한 파격적인 포상문이 적혔다.

 

도적을 잡는 이에게는 신분상승의 기회를 주고

아울러 입수한 도적의 재산을 모두 주며

임꺽정을 잡는 수령은 당상관으로 승진시킨다는 내용이었다.

 

조정은 또한 정수익을 황해도에 급파해

중앙 차원의 본격적인 토벌작전에 돌입했다.

  

"황해도에 선전관 정수익을 급파하다." - 명종 15년

 

황해도에 도착한 중앙군은

봉산과 평산 등 다섯 고을의 관군과 합류하여

대대적인 토벌에 나선다.

 

맹렬한 추격을 받은 임꺽정부대는 깊은 산속으로 도주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함정이었다.

 

계곡에 매복해 있던 임꺽정부대의 반격에

중앙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는 참패였다.

 

500여 명의 중앙군을 참패시킨

임꺽정부대의 규모는 과연 어느정도였을까?

 

단서는 훗날 임꺽정을 토벌하게 되는

남치근의 행적을 다룬 <남판윤유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60여 기의 말을 타고 화살을 비 오듯 퍼부었다." 

 

임꺽정 부대엔 말을 타고 다니는 기병까지 있었다는 기록이다.

 

"당시 반군들이 기병만 60여 기 있었다는 것은

상당히 중무장한 병력을 갖추었다는 뜻으로 보이고,

 

4~5개군의 연합군 부대가

반군을 진압하지 못했다는 걸 봤을 때

반군들의 숫자가 비슷했거나 더 많지 않았나 추측됩니다."

                                                - 신병주 박사(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대규모 임꺽정부대는 조직적으로 나섰다.

관군들이 토벌에 나서면

어느새 정보를 입수해 숨어버리거나

역습을 가해 관군을 무력화시켰다.

 

갈수록 임꺽정부대의 활동은 확대되었다.

봉산, 맹산, 양덕, 성천, 재령, 해주, 개성, 이천, 한성 등 

황해도에서 강원도, 경기도로 옮겨다니며 종횡무진 출몰했다.

급기야 한성까지 나타나 조정을 위협했다.

 

  

명종은 남치근을 한성판윤에 임명하고 도성문에 경비를 강화했다.

 

"남치근을 한성부 판윤에 임명하다." - 명종 15년

 

"당시 서울시장과 같은 요직에

무신을 얹힌 것은 상당히 모험일 수도 있습니다.

 

남치근이란 인물이 그런 요직에 임명될 수 있었던 것은

을묘왜변때 왜군 진압에 상당한 공을 세웠고,

 

따라서 전쟁에 대한 방어에 노하우가 많은 인물이기 때문에

임꺽정의 난으로 위기에 몰린 조정에서는

탁월한 무신으로 검증된 남치근을 임명한 것으로 보입니다."

                                                                       - 신병주 박사          

 

임꺽정의 활동한 3년 동안

황해도의 공권력은 거의 마비되고 무법지대에 가까웠다.

 

백성들이 도적들만 무서워하고

국가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실록에 기록될 정도로

16세기는 도적떼의 대반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기록으로 확인되는 임꺽정의 행적은 실로 대담하다.

임꺽정은 잡히기는 커녕 더욱 더 활동무대를 넓혀가는데

이런 가운데 웃지 못할 사태가 벌어지기도 한다.

 

명종실록에서는

공을 세우려는 수령과 포졸들이

가짜 임꺽정을 잡아온 사례가

몇 차례 되풀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곳곳에서 가짜 임꺽정이 의금부에 잡혀오곤 했던 것이다.

어떻게 그런 사태가 일어났을까?

 

임꺽정을 잡으면 엄청난 포상과 특진까지 내걸었기 때문에

각 고을에서는 덩치 좋고 힘 좋은 사람들을 보면

잡아다가 갖은 고문을 하며 임꺽정으로 몰아부친 것이다.  

 

당시 조정에서 얼마나 임꺽정을 잡으려 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2. 백정들의 삶의 터전 - 갈대밭은 사라지고!~

 

 

전남 순천시.

고흥반도와 여수반도에 둘러싸인 순천만

70여 만평에 이르는 갈대밭이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지금은 철새 도래지이지만

60년대와 70년대까지만 해도

순천만의 이 갈대밭은 인근 마을 주민들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비록 예전과 같지 않지만 지금도 갈대를 요긴하게 쓰고 있다.

마을 어른들은 갈대로 울타리도 만들고 빗자루도 만들어 사용한다.

 

갈대는 임꺽정의 운명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백정이었던 임꺽정은 도둑이 되기전까지

황해도 봉산에서 갈대로 삿갓이나 그릇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했다.

 

황해도 봉산은 갯벌지대라 갈대가 무성하고 농토는 척박했다.

갈대는 임꺽정과 같은 백정들의 주요 생계수단이었다.

 

그런데 <명종실록>에 놀라운 기록이 나온다.

 

"권세가들이

황주, 안악, 봉산, 재령의 갈대밭을 빼앗고,

백성들에게 갈대를 팔아 이익을 남기니

백성들이 생업을 잃었다."                     - 명종 8년

 

분노한 봉산 백성들이

조정에 상소를 올렸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봉산 백성 80명이 갈대밭을 돌려달라고 상소를 하다." - 명종 11년

 

결국 생업을 잃은 임꺽정과 같은 백정들은

산으로 들어가 도적이 된 것으로 보여진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더라도

본인들이 무상으로 채취해서 돗자리를 짜서 파는 것보다

 

그걸 값을 주고 샀을 때 원가가 상당히 높아지게 되고

원가가 높아진다는 것은 백성들이 취할 이익이 감소된다는 것을 의미하니,

 

나름대로 자신들의 어려운 처지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됨으로써

임꺽정 같은 인물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 한춘순 박사(경희대 인문학연구원)

 

당시 갈대밭은 국가공유지였다.

어떻게 사유지로 바뀐 것일까?

 

거기엔 조선 농업 사회의 기술 발달과 정책 변화가 있었다.

 

고려말부터

시비법이앙법(모내기법), 이모작이 가능해지면서

 

15세기 조선은

농업 생산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한다.

최초의 우리 농서 <농사직설(1429, 세종 11년)도 편찬되어 보급된다.

  

수리법간척지 개발도 활달해지는데

간척에 성공하면 사유지로 인정했기 때문에

권세가들이 앞다투어 간척지 개발에 나선 것이다.

 

"사유지로 인정되자

어느 정도의 인력만 동원하면 개발이 가능하므로

권세가들이 경쟁적으로 나선 것입니다."

                                                        - 이태진 교수(서울대 국사학과)

 

그리하여 16세기는 권세가들의 간척지 개발이 가장 활발해지게 되었다.

 

영산강 하구의 대표적 간척지인 영암 지남제.

이곳은 1540년 명종때 선산 임씨,

임구령(林九齡)이 주도하여 간척한 곳이다.

 

지금도 넓은 농지와 마을만 보이지만 

옛날에 이곳이 바다였음을 알리는 

마을로 통하는 논둑길 한쪽에 세워져 있는 돌이 그 흔적이다.

 

 

                 전남 지남재 선돌- 배를 매어 두던 곳, 간척지로 개발된 농경지

 

"여기선  선돌이라 합니다.

배를 매어두던 돌이지요.

 

지남제가 축조되기 이전에 여기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배를 매어두기 위해 선돌을 100m 간격으로 세워 놓았다고 합니다."

                                                                  

"예전엔 여기가 모두 바다였고

바로 앞쪽에 긴둑을 쌓아 막아서

그 왼쪽은 바다, 그 오른쪽은 간척지가 된 것이죠." 

                                                         - 최복(향토사학자)  

 

갯벌에 흙과 돌을 이용하여 제방을 쌓으면서 바다를 농토로 바꾸는 것이었다.

 

당시 그렇게 간척한 땅이 1,000두락,

즉 20만 평의 농토가 생겼다고 한다.

 

 

 

세종때 이후 소금끼에 강한 벼 품종이 개발되어 있었기 때문에

간척지는 부를 축척하는 좋은 수단이었다.

임구령은 이후 이 지역에 강력한 지주로 성장한다.

 

14세기말 경기도에서 시작한 간척기 개발은

삼남을 거쳐 16세기에 이르면 평안도 황해도에 집중적으로 이뤄진다.

 

"물론 충청도, 전라도도 많은 문제가 발생합니다만

이 지역은 이미 토지 소유관계나 토착세력이 많았으므로

중앙 권세가들의 침투가 어려웠습니다.

 

택지 개간에 주민을 동원을 하되

토착세력이 적은 곳이

중앙권력이 침투하기 좋은 곳이었습니다.

 

평안도에 비해 황해도가 더 활발했던 이유는

서울과 거리가 가까으므로

서울 권세가들의 관심이 집중됩니다."

                                                       - 이태진 교수

 

명종실록에 의하면

공권력을 동원하여 황해도 간척에 주력한 사람은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이었다.

 

"해주목사 윤행은 군민을 동원하여

간척지를 개발해 윤원형에게 바쳤다." - 명종 15년

 

"윤원형이 공주들과 함께 전라도 함평의 민전을 빼앗았다." - 명종 21년

 

"연안부사 이숙남은 평산해주를 잇는 둑을 쌓아 간척지를 만들었다." - 명종 20년

 

연안부사 이숙남은

평산과 연줄을 이용하여 백성들을 증발해

평산에서 해주를 잇는 제방을 쌓아 사유지로 만들었다.

심지어는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는 일도 서슴치 않았다.

 

권세가들이 마구잡이로 토지를 확장해 지주제(1/2세)가 확장되고 있었다.

 

결국 땅을 빼앗긴 농민들은 먹고 살기 위해

지주들 밑으로 들어가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실제 임꺽정의 난은

16세기 사회의 전반적 모순속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직접적으로는 15세기말부터 권세가들의

황해도 대규모 간척지 개발과,

 

황해도 시장권이 서울 시장권에 편입되면서 

진행되는 사회적, 경제적 현상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특히 권세가들은 생산과 유통을 통해서

황해도의 모든 유통을 독점함에 따라

그 지역 농민들이 생업지를 잃고 유랑하게 되고,

 

또 이외에 소작인, 상인, 수공업자, 백정들까지 같은 상태에 빠지면서

이런 하층민들이 결집해서 일어나는

하나의 정치적 행동이 임꺽정의 난입니다."

                                                            - 이정수 교수(동서대 일본학과)

 

결국 임꺽정의 난은

지배층의 핍박, 사회적 모순으로 야기된 것이다.

 

 

3. 국가 토지정책의 붕괴

   - 모두 양반들의 땅, 백성들은 도적이 되고..

 

 

조선 초기에는

농민들이 경작하는 모든 토지는

나라의 소유가 되는 공전제도(公田)로 운영했다. 

 

그런데 점차 인구가 늘어나자

나라에서는 개간을 장려하고

 

이렇게 만들어진 개간지는 개인 소유로 인정하자

힘께나 쓰는 권세가들이 앞을 다투어 토지 확장에 나선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양반지주'란 말이 이 때에 생겨나게 된다.

 

땅이란 땅은 모두 권세가의 소유가 되고

대부분의 농민들은 있었던 작은 땅마저 권세가에게 넘기거나 빼았기고

양반들의 땅을 경작하는 소작농으로 전락한다.

 

양반 지주들은 수확량의 절반을 소작료로 요구,

나라에서 관리할 때보다 5배를 올린다.

 

이것이 양반은 지주, 농민은 소작농으로 전락한 지주전호제.

소작료가 1/2세라고 하여 병작반수제라고도 다.

 

기록을 토대로 소작농의 상황을 예를 들어보자.

 

 

 

50마지기를 경작하는 소작농이 있어

한 해 농사로 50석을 생산했다고 가정하자.

 

우선 소작료로 25석을 주어야 하고,

그외 나라에 바치는 토지세(전세) 7석,

빌려쓴 환곡과 생필품 구입비에 8석,

내년에 농사 지을 종자용으로 5석.

 

농민 한 가족 5명이 1년 먹어야 할 식량이 17석인데

남은 건 겨우 5석뿐이다.

결국 1년 농사를 짓고도 12석이나 적자인 셈이다.

 

양반지주들은 다시 이러한 농민들의 처지를 악용,

곡식을 빌려주고 비싼 이자를 받는 리대를 하여 더욱 재산을 늘인다.

 

농부는 살기 위해 고리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빈곤과 굶주림의 반복이었다.

그것은 사회구조적 문제였다.

 

 

4. 청계천에 나타나는 임꺽정 - 장시의 발달!~

 

 

이 시기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하면서 시장이 발달한다.

양반 권세가들이 또 다른 재산 증식으로 시장에 주목한다.

 

임꺽정의 활동 무대를 보면

처음에는 황해도 봉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경기도, 평안도까지 확대하고

급기야 1560년 한성에 나타난다.

 

청계천에 나타났다가

관군에게 적발되어 추격을 받으며

임꺽정은 오히려 관군 부장을 활로 쏘아죽이고 달아난다.

 

"흉포한 도적들이 장통방에서 발각되자

격투 끝에 관군의 부장은 살해되었다."

                                                  - 명종 15년

 

그렇다면 임꺽정은 왜 청계천에 나타났을까?

 

 

임꺽정이 나타난 청계천 장통교

종로구 관철동과 중구 장교동을 이어주는 다리인데

조선시대 이 일대를 '장통방(長通方)'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 당시 장통방은

한성에 공급되는 모든 물품이

장통방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조선 최대 상업중심지였다.

 

"장통방 일대

조선 초기 태종때 설치된 도성의 궁궐들, 관아들,

그리고 일반민에 생필품을 조달하는

육의전(六矣廛)으로 알려져 있는 시전이 발달한 곳입니다.

 

여기서 곡물, 포목, 어물, 관자, 철물, 신발, 비파점까지

다양한 물건이 거래되는 시장거리였습니다."

                                             - 나각순 연구위원(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물건을 사고 파는 장통방은

임꺽정이 훔친 물건을 손쉽게 처리할 수 있는 장소였다.

 

이 시기 장시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유통경제의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농사 짓을 땅을 잃게 된 사람들은 장시로 몰려왔다.

이를 계기로 상인과 장시의 수는 급격히 늘어나고

장시는 도적들에게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곳이며, 경제적 기반도 되었다.

 

그러나 장시는 도적들에게 뿐만 아니라

권세가들에게, 또 지주들에게 막대한 경제적 부를 가져다 주는 곳이기도 했다.

 

농본주의를 내세운 조선 유교 사회에선

상업과 수공업은 상대적으로 천시 여겼음으로,

 

한 때 조정에서는

장시의 발달을 심각하게 생각하여

폐지해야 한다는 논의도 재기되었다.

 

"백성들이 장사에만 치중하고 도적들이 번성하니

장시를 금하면 도적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흉년이 들었으니 장시를 금하면 백성이 괴롭습니다."

 

이제 장시를 중심으로 한 유통경제의 흐름을 돌이킬 수는 없는 일이었고

양반 권세가들에게도 꼭 필요한 엄청난 축재 공간이었다.

 

"이 시기 농촌 인구들이 점차적으로 서울로 유입하고

또 상인과 수공업자도 급격히 늘어납니다.

이에 따라 미곡을 중심으로 생필품의 소비가 증가합니다.

 

물가는 상승하고,

미곡의 상품화가 본격화되면서,

 

권세가들이 서울과 가까운 황해도에 주목해서 간척지를 개발해

그곳에서 생산된 물품을 한성으로 수송해 막대한 이익을 남기게 됩니다."

                                                                - 이정수 교수 (동서대 일본학과)

 

 

 

험난한 장산곶이 개발되면서

권세가들은 황해도 재령평야 일대 간척지에서 생산된 쌀을

한성으로 운반해 판매한다.

 

장시의 주요한 상품으로 등장한 쌀은

권세가들에게 막대한 부를 준다.

 

그런데 이즈음 이상한 현상이 일어난다.

쌀값이 폭등한 것이다.

 

 

 

 

성종때 면포 5필에 거래되던 쌀이

연산군때는 면포 10필,

중종때는 면포 33필로 조금씩 오르더니

급기야 명종때는 면포 300필로 폭등한 것이다.

 

쌀값이 폭등한 이유는 실록에 나온다.

한성의 상인들이

한성으로 들어오는 곡물운송선을 막고 모두 사들여

시중에 매점매석하여 엄청난 폭리를 취한 것이다.

 

하지만 단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성의 상인들이 한성의 권세가와 결탁하고 있어서

쌀값 폭등으로 얻은 이익은 다시 권세가의 주머니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임꺽정도 그런 장시를 적극 이용한다.

 

"황해도에서 약탈한 재물을 장시에 내다판다." - 명종 15년

 

실록에 나타난 임꺽정의 주요 활동 거점을 보면

봉산, 재령, 해주, 평산, 시흥, 우봉 개성, 장단, 한성으로 이어지는

16세기 상업의 거점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임꺽정의 활동 무대는

당시 상권과 일정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특히 황해도에 수륙 교통의 기점이라 할 수 있는

기림역, 근교역에서 예성강 물줄기를 사이에 두고 있는

금곡곡창, 조곡곡창으로 활동이 집중됩니다.

 

한편, 임꺽정의 주요 참모였던

서림(徐林)이라는 인물에 주목되는데,

 

그는 서울에 거주하면서

서울의 정보를 수집하고

서울과 개성에 장물을 팔기도 합니다.

 

장시는

이들 조직원들의 집회, 연락, 장물처리 장소로 적극 활용됩니다." 

                                                          - 이정수 교수(동서대 일본학과)

 

한편 당시 권세가들은 대외무역에도 주력했다.

   

조선의 대외무역을 보면

일본에 면포를 팔고 은을 사들였으며

 

다시 명에다가 은을 주고

비싼 귀금속과 비단을 사들이고 있었다.

 

실록에 양반가들이

사신들을 통해

명나라의 호화 수입품을 사들였다고 하는데

 

당시 명에서는

조선의 사신을 '달자'

즉 '장사치'라고 불렸다.

 

명나라 입장에서 물건 사고 파는데 정신없는

조선의 사신이 곱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명나라 과거 시험 문제에 이런 주제도 있었다고 한다. 

 

'조선 사람들이 나라일을 핑계로

중국에 와서 장사를 하고 있으니 이를 막을 계책을 세우라'

 

이처럼 권세가들이 부를 독점하니 '양극화현상'이 두드러진다.

16세기 중반 임꺽정의 시대였다.

 

중요한 건 부를 축적하는 방법이다.

부정한 방법으로 축척하다보니 국가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준다.

 

 

5. 절대권력자, 여주(女主) 문정왕후의 호화불사!~

 

 

명종 2년(1547년) '양재역 벽서 사건'이 발생한다.

 

 

 

"여주(女主)가 정권을 잡고

아래에서는 간신들이 권세를 농간하고 있으니 나라가 망할 것이다!

이 어찌 한심하지 않는가!"

 

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한 벽서였다.

여기서 여주(女主)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를 말한다.

 

명종이 왕위에 있었지만

모든 실권은 문정왕후에게 있었다.

 

실제 문정왕후는

12살에 왕위에 오른 명종을 대신해

 

남동생 윤원형과 같은 외척들을 거느리고

20년간 절대권력을 휘두른다.

 

당시 권세가 뿐만 아니라

문정왕후를 비롯한 왕실에서도 

백성들의 땅을 빼앗는 등 나라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 갔다.

 

 

 

경기도 여주 근동면 일대는 

지금도 옥토로 손꼽히는 곳으로

 

양화나루터를 통해

조선시대 왕실로 쌀을 진상하던 곳이다.

 

명종때 왕실 소유의 토지는 급증한다.

내수사 토지대장에 당시 토지 소유 관계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여주에 능서면, 점동면, 북내면, 대신면,

모두 내수사에 환속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 안치중(여주군농업기술센터)

 

종로구 내수동 내수사터.

조선시대 내수사는 왕실 사유재산을 관리하던 관청이다.

 

그런데 명종때 오면

내수사의 기능과 권한이 대폭 강화되는데,

 

원래 5품 이하 관리가 근무하는 관청이었는데

명종때는 정2품의 당상관을 보내 승격시킨다.

 

"2품 이하로 격상되었다는 것은 임금에게 직계하는 권한,

심지어 형옥을 설치하고 국가 기관에서 다루어야 하는 범인 취조와 심문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이 됩니다."

                                                          - 한춘순 박사(경희대 인문학연구원)

 

내수사 권력을 이처럼 확대한 이는 문정왕후였다.

 

막강한 권력이 주어지자 내수사

문정왕후의 수족이 되어 왕실 재산 증식에 앞장선다.

그 대표적 방법이 백성들의 토지를 강탈하는 것이었다.

 

실록에는 내수사에서 백성들의 땅을 빼앗는 게 수없이 등장한다.

 

 

 

"민전(民田)을 빼앗아 내수사에 소속시키다." - 명종 5년

 

"내수사가 강진 땅을 탈점하다." - 명종 5년

 

"내수사가 황해도 갈대밭을 빼앗다." - 명종 11년

 

그러나 내수사의 땅이 늘어날수록 국가재정은 줄어들었다.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백성이

토지에 대해 전세, 요역, 공물을 내는 것이

조선의 수취 체제의 원칙입니다. 

 

그러나 내수사전 무세전(無稅田)이어서

내수사에 소속된 땅들은 모두 국가에 세금을 내지 않습니다.

 

내수사에서 전부 자유로이 쓰는 것입니다.

거기에 소속된 토지가 많으면 많을수록

국가 재정이 줄어들고 궁핍해지는 것입니다."

                                                                      - 한춘순 박사

 

상인들은 국가 재정과 백성들을 파탄으로 몰고간 또 하나의 주역이었다.

그들은 백성들이 나라에 바치는 방납제를 이용해 폭리를 취했다.

 

공물은 지방특산물로 

수령이 거둬들여 나라에 바치는 것이다.

 

 

그런데 권세가를 등에 업은 상인들이

먼저 곡물을 조정에 납품한 다음에

백성들에게 그 값을 수백 배로 부풀려 거두는 것이다.

 

평안도 백성을 상대로 한 상인들의 경우

담비가죽 한 장을 대신 반납하고

심지어 면포 600필을 받아

시중가의 열 배 이상의 폭리를 취했다.

 

백성들이 고통을 호소하자 방납 폐지령이 내려지지만

상인들과 손잡은 권세가들의 힘에 눌러 단속이 이뤄지지 못하였다.

 

백성들의 고통이 커질수록 국가재정도 감소하였다.

 

 

 

 

국가의 세입은

1490년 20만석에서,

1510년 27만석,

1530년 26만석으로 조선초 꾸준히 늘어났으나, 

 

1555년 명종때 오히려 10만석으로 크게 줄어들어

관리들의 녹봉조차 제대로 지급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흉년 등의 재해 상황이 발생하면

녹봉 지급을 못하는 상황이 비일비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녹봉을 받지 못한 관리들이 자기 권력을 이용해

방납을 편법 이용하여 부를 축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축적한 부로 호화, 사치생활을 하였던 것입니다."

                                         - 김성우 교수(대구한의대 관광레저학부)

 

왕실은 호화 불사를 일삼았다.

 

 

 

경기도 양주 회암사지

문정왕후가 불사를 일으킨 곳인데

실록에 당시 이곳의 불사가 얼마나 화려했는지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붉은 비단으로 깃발을 만들고 황금으로 수레를 꾸몄다." - 명종 20년

 

 

 

 

회암사의 <약사삼존도>도

문정왕후가 중창을 기념하기 위해 그린 400여 점의 불화중 하나다.

 

이 불화는 비단위에 금을 이용해 그린 것이다.

문정왕후가 만든 400여 점중, 200여 점이 이러한 금화였다.

 

"고려불화가 화려하다고 이야기하는데

이 불화의 경우 고려불화의 화려한 양식에다가

고려불화가 하지 않은 순금으로 장식하여

당시 얼마나 호화로웠나를 짐작케 하는 대표적 작품입니다."

                                      - 김정희 교수(원광대 고고미술사학과)

 

문정왕후의 호화불사에 들어간 돈은

내수사에서 백성들의 돈을 빼앗아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축적한 

백성들의 고혈이었다.

 

모든 것을 빼앗긴 백성들은

굶어죽지 않으려고 자진해서 내수사의 노비가 되거나

유랑민이 되어 떠돌다 산으로 들어가 도적이 되기도 했다.

 

 

 

 

16세기 단양, 평양 호구 조사를 보면

1500년대 500여 호로 늘어났던 가구수가

명종때가 되면 40여 가구로 급감한다.

 

"명종때에 오면 

이미 국가 기능이 마비되었다고 생각해도 좋을 위기상황에 빠집니다.

그 단적인 증거인 단양과 평양의 농민층 몰락입니다.

다른 쪽에서는 임꺽정의 난이 일어나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이런 상황에 대처할 능력을 갖지 못합니다.

국가가 망하는 이야기가 나돌 지경이었습니다."

                                                                     - 김성우 교수

 

도적의 봉기가 전국에서 일어나고

실록에 기록된 대규모 도적 사건만 40여 건이 되었다.

 

한성, 봉인, 예천, 경주, 고산 등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백성들은 농기구 대신 칼을 잡고 약탈로 지배층의 수탈에 맞선다.

 

만백성의 모범이 되어야 할 왕실이

내수사를 앞세워 불법을 저지르고

호화불사를 하는 동안 국가재정은 바닥났다.

부패한 정치와 권력이 백성을 도적으로 몰았다.

 

1560년 황해도 관찰사가 명종에게 올린 상소는 대국민현장보고서였다.

 

"빈궁한 백성들은

나물을 캐어먹고

 

약한 자는 몰래 도적질을 하고

강한 자는 몰래 살인을 하며

 

심지어 밥을 가지고 가는 것을 보고

목을 졸라 죽이고 뺏아 먹는 자가 있었다."

 

상소 내용으로 봐도

당시 국가가 피폐한 백성과 경제를

살릴 수 없는 절망적 상황임을 짐작할 수 있다.

벼랑끝으로 내몰린 백성들은 언제 터질 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았다.

 

명종이 '왕의 수레 밑에 도적이 이르렀다'고 탄식할 정도로

도적이 생겨나고 도적을 만드는 시대였다.

 

 

6. 그런데 우리는 왜 임꺽정을 '의적'이라고 기억하는가?

 

 

3.1운동으로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벽초 홍명희

충북 음성에 머물며 역사소설 <임꺽정>을 구상한 것으로 알려진다.

 

1928~1939년까지 <조선일보>에 기재된 역사소설 <임꺽정>은 

홍명희가 민족 문제와 식민지 조선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고민하고

조선 백성에게 희망을 전해주는 메세지로 쓴 것이었다.

 

"임꺽정의 전기적 사실은

조선왕조실록, 기재잡기(記) , 민담과 야사에서 많이 나옵니다.

 

정사의 기록 자료를 바탕으로 씌였기에,

정사에서 보는 대도적을 근간으로,

민중의 해방을 열망하는 의적성을 가진 도적,

그렇게 양면적으로 그렸습니다."

                                           - 김승환 교수(충북대 국어교육학과)

 

그러나 소설과는 달리 실록에서 그가 의적이었다는 걸 어디서고 찾을 수 없다.

 

"임꺽정이 왜 난을 일으켰을까에 대한 자신의 기록이 없고

또 정치적, 사상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남길 지식인이 아니었기에

그의 생각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는 말과 글이 아니라

몸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임꺽정이 난을 일으킨 이유는

배고픔과 신분적 차별에 대한 저항이었습니다."

                                                                          - 한희숙 교수

 

실록에 의하면 임꺽정은 전형적인 도적이었다.

 

곳곳에서 관청을 습격하고 재물을 약탈했다고 한다. 

임꺽정을 공격한 수령을 처단하고 붙잡힌 부하를 구출하는 게 주된 목표였다.

그것은 수탈에 대한 보복이지, 정권에 대한 도전은 아니었다.

 

하지만 역사서엔

임꺽정이 '의적'이었음을

암시하는 부분이 곳곳에 있다.

 

바로 '백성들의 협조'였다.

토벌떼가 올 때마다 백성들과 아전들이 알려준 것이다.

 

"아전과 백성들이 도적과 내통하다." - 명종 15년

 

"조정에서, 관군들이 도적 진압에 가장 어려웠던 것이

백성과 하급관리인 아전들이 도적과 내통하는 것이었습니다.

잡으러 가면 이미 달아난 상황이 여러번 발생합니다.

그것은 결국 그들이 심정적으로 상당히 동조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록엔 '모이면 도적이 되고 흩어지면 백성이 된다'고 기록했습니다.

도적들은 언제나 백성속에 들어가 있다가 어려우면 도적이 될 수 있었습니다."

                                                                                        - 신병주 박사

 

강원도 철원군.

한탄강 물줄기가 굽이쳐 흐르는 한탄강 고석정.

 

 

 

고석정 일대는 임꺽정의 활동 무대로 유명하다.

이 일대에서 임꺽정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 수많은 이야기들이 지금도 전해진다.

고석정 건너편 고석산성 '임꺽정산성'으로 불린다.

 

"이 성이 임꺽정산성입니다.

높이 3미터, 길이 870미터 된다고 향토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랜 세월을 견디지 못해 무너진 성돌들.

정확히 축조 연대를 알 수는 없지만

주민들 사이엔 임꺽정이 관군에 맞서 싸우기 위해 쌓은 돌성이라고 전한다.

 

이곳 고석성에서 임꺽정의 주요 공격 대상은

함경도에서 한강으로 운송되는 곡물운송선이었다.

 

"임꺽정은 여기서 함경도 지방에서 조정으로 바치는 곡물을 약탈해

백성들에게 나눠줬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 김철암 사무국장(철원문화원)

 

임꺽정은 단순한 도적이 아니라

백성들을 돕는 의적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임꺽정은 도적임에 분명합니다.

민가의 재산을 약탈하고 많은 살상도 자행했습니다.

 

그러나 임꺽정이 가장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척신, 부패한 관리였습니다.

당시 누구라도 저항해보고 싶었던 대상이었습니다.

 

어떤 측면에서 임꺽정은 당시 백성들의 바램을

시원하게 대행한 선망과 동경의 대상이었다고 봅니다."

                                                             - 신병주 박사

 

1562년(명종 17년). 1월.

임꺽정은 황해도 구월산에서

남치근이 이끄는 토벌대에 체포되어

15일만에 처형당한다.

 

소설과 드라마에서 왜 임꺽정을 의적으로 여겼는지 알 수 있었다.

임꺽정은 처형되었지만 제2, 제3의 의적이 계속 출현했다.

 

부정과 부패를 막을 수 있는 시스템이 작동치 않았을 때

백성들이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 온몸으로 보여준 인물이었다.

 

임꺽정.

그는 죽었지만 백성들 마음속에 그는 죽지 않았다.

지배층의 부정과 사회 모순에 저항하는 희망으로 살아있다.

 

 

- 역사스페셜을 보고 (늘 좋은날 되세요!~)

 

출처 : 조선왕릉연구원
글쓴이 : 권정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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