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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선의 여성 CEO - `제주평민` 김만덕

회기로 2011. 2. 25. 17:50

 

 

  정조 20년,

  1796년 병진년 가을.

  한 여인이 임금 앞에서 절을 올리고 있다.

 

  그녀는 제주도의 상인, 김만덕.

 

  일개 평민여성이

  직접 왕을 알현하는 일은

  조선 역사상 전무한 일이었다.

 

   

1. 전재산을 기부해 제주도민을 구하다.

 

 

 

 

조선의 명재상 체재공.

그의 책 <번암집>에는

자신의 삶을 개척했던 한 여성의 이야기,

<만덕전(萬德傳)>이 실려 있다.

 

정조 20년(1796) 가을.

제주 출신의 한 여인이 궁에 들어섰다.

 

김만덕.

그녀는 열녀도 효부도 아니었다.

빈손으로 시작해 제주 최고의 부자에 오른 상인이었다.

 

최악의 흉년에 시달리던 제주.

만덕은 자신의 전재산을 풀어

수천 명의 제주도민을 살릴 수 있었다.

 

상업을 천하게 여겼던 조선 사회.

그녀는 시대보다 앞서 돈의 가치에 주목했다.

 

제주 여성으론 처음으로,

아니 조선 최초로 임금을 알현한 평민 여성 김만덕.

 

김만덕에 대한 최초 기록은

정조 20년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제주 기생 만덕이 재물을 풀어서 굶주리는 백성들의 목숨을 구하였다'

                                                               - <정조실록, 1796. 11. 25>

 

당시 제주라는 조선의 최변방에서

기생이라는 신분으로

자신의 재산을 풀어 굶주리는 제주도민을 구한 여성 김만덕.

 

이 짧은 문장속에 그녀의 파란만장한 일대기가 기대되지 않는가?

 

조선시대 평민,

그것도 여성에 관한 기록을 찾아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만덕은,

앞서본 <정조실록> <승정원일기> 같은 정사 뿐만 아니라,

 

<일성록(日省錄)>,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추제기이(秋齊紀異)>, <초정금주(楚亭金晝)> 등에 실려 있다.

 

정약용, 박제가 등

당대 실학자들에 의해 시와 문장으로 남겨졌고,

그녀의 일대기를 기록한 <만덕전>만도 다섯편에 달한다.

 

이것만 봐도 만덕의 기부가

사회에 어떤 반향을 일으켰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덕분에 수없이 많은 여성들이 이름없이 사라졌던 반면에

만덕은 자신의 삶을 당당히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할 수 있었다.

  

 

2. 흉년과 굶주림의 땅 제주-'출륙금지령'

 

 

그 첫페이지는 최악의 흉년을 맞은 제주에서 시작한다.

 

정조 19년(1795) 윤2월.

제주목사는 벌써 며칠째 영남에서 출발한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배에는 조정에서 마련한 구휼미가 실려 있다.

 

제주 최악의 흉년으로 기록되는 갑인년 흉년.

제주목사는 조정에 구휼미 2만 섬을 요청했다.

 

 

"동풍이 강하게 불어서 곡식이 짓밟히고 피해를 입었습니다.

만약 쌀 2만여 섬을 배로 실어 보내지 않는다면

백성들은 장차 다 죽을 것입니다."

                                                 - 정조 18년(1794). 9. 17

 

정조 16년(1792)부터 4년 동안 최악의 흉년이 지속되었다.

매해 수천의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갔다.

 

살아 남은 사람들의 모습도 참혹했다.

법으로 금지되어 있던 말과 소를 훔쳐 잡아먹거나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참상도 곳곳에서 벌어졌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경우,

사람의 시체를 파서 먹는 경우,

자식을 내버리는 경우 등이 비일비재 했습니다.

 

이런 일반적 참상이 제주에서도 일어났을 것이고

탈출구를 찾아 나갈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훨씬 심각한 상황, 사태였을 겁니다."

                                                                              - 정형지 교수(오산대학)

 

화산암이 만들어낸 천혜의 관광지 제주.

하지만 조선시대까지 제주는 사람이 살기 힘든 유배의 땅이었다.

 

돌 많고 바람 많은 제주.

그리고 무엇보다 재해가 많았다.

 

제주도 세귀포시 안덕변 사계리.

이곳 사계리에는 쓰나미, 해일 피해가 주기적으로 발생했다.

해일은 하루 아침에 마을 하나를 통째로 삼킬 정도로 그 위력이 대단했다.

 

"해일이 일어났거든요.

해일이 일어나 기왓장이 날라다니고

하룻밤에 마을에 모래가 덮쳤다고 되어 있습니다.

한반도의 방파제라 부를 만큼 많은 태풍들이

보리수확철부터 가을까지 제주를 괴롭혔습니다.

 

태풍이 어떨 때는 좀 일찍 와버립니다.

음력 5월에 오면 이때는 보리를 한참 베어야 할 때라 보리가 좀 무겁단 말입니다.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보리가 다 드러누워버리지요."

                                                                        - 고광민(학예연구사, 제주대박물관)

 

척박한 환경에 찾아오는 흉년.

사람들이 하나 둘 육지로 떠나기 시작한다.

 

16세기에 이르면

제주를 떠나 남해안에 정착하는 제주인이 만여 명에 이를 정도로

인구 유출이 심각했다.

 

"점점 어려워지니까 제주도민들이 제주도를 떠나지요.

못살겠다, 차라리 도망가야겠다,

그래서 제주의 인구가 계속 줄게 됩니다."

                                                         - 김동전 교수(제주대 사학과)

 

'제주의 백성들이 육지로 떠나갔다.

비변사가 제주도민의 육지 출입을 엄금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따랐다.'

                                                  - 인조 7년(1629. 8. 13)

 

조정에서는 제주도민의 육지 출입을 금지하는 '출륙금지령'까지 내렸다.

뭍으로 나가는 배는 모두 출륙허가서인 '출선기(出船記)'를 발급받아야 했다.

 

인구 감소로 제주 해안 방어가 취약해졌다.

관의 허락없이는 단 한 발도 제주밖으로 나갈 수 없게 했던 것이다.

 

발이 묶인 제주도민들은 육지 사람들처럼 흉년이 들면

형편이 조금 덜한 지역으로 옮겨갈 수조차 없었다.

제주도 전체가 거대한 감옥과 같았다.

 

구휼미 2만석을 보내달라는 제주목사의 장계가 도착한 조정.

 

"섬안에서 굶주리는 백성들이 어찌 불쌍하고 가엾지 않을 수 있겠는가."-(정조)

 

"하오나 호남 연안의 백성들도 피해가 극심해

제주도민들을 따로 걱정할 처지가 못되옵니다."

 

하지만 정조는 단호했다.

전라도 해남, 강진, 장흥에 구휼미 마련을 지시했다.

 

정조 19년 윤2월.

드디어 구휼미 만여 섬을 실은 배 12척이 영암을 출발했다.

아직 파도가 높았지만 보리고개 전에 쌀이 도착해야만 했다.

 

'구휼미 운반선 5척 침몰(1795, 윤2월)'

 

하지만 그 해 제주는 지독히도 운이 따르지 않았다.

12척중 5척이 풍랑을 만나 침몰되었다.

제주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옹기종기 떼를 지은 수 십 명의 거렁뱅이

하나같이 옷도 못 해 입고 털 빠진 개가죽 둘러썼네

검게 타서 여윈 살갗 뼛골에 달라붙고

목소리도 배고픔에 실날같이 가느다랗네

"사또님, 사또님 불쌍한 인생 살려 주옵소서."' 

                                                             - <탐라록>, 신광수

 

 

당시 제주 최고의 부자였던 만덕.

연이은 흉년의 참상을 그저 두고볼 수는 없었다.

 

갑인년과 을묘년에 걸쳐

제주도민의 1/3이 흉년으로 목숨을 잃을 정도로 심각했다.

 

"이게 내 전재산이다. 육지로 나가 쌀을 구해오너라."

 

수십 년 동안 모아온 만덕의 전재산이었다.

만덕은 경상, 전라 육지에서 쌀을 들여와 제주 관아로 보냈다.

 

'부황난 자가 소문을 듣고 관가 뜰에 모여들기를 마치 구름과 같았다.'

                                                                            

'우리를 살려준 이가 만덕이로다'

                                                             - 체재공(정조때 재상)

 

'개비년 숭년에도 살앙 남아신디' - 제주 속담

(갑인년 흉년에도 살아 남았는데)

 

 

1794년. 정조 18년.

극심한 흉년의 고유명사가 되었을 정도로 200년 전 흉년은 참혹했다.

만덕은 그때 굶주리는 제주도민을 위해 자신의 전재산을 내어놓았다.

 

만덕이 구곡으로 나눠줬다는 쌀과 돈이 얼마인지 기록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다.

당시 재상이었던 체재공의 <만덕전>에는 '천금(千金)'으로,

 

그리고 조수삼의 <추제기이(秋齊紀異)>에는

'수천각곡(數千각穀)' '수천민전(數千緡錢)'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액수가 매우 컸다는 것만 짐작 가능하다.

 

 

3. 조실부모, 기생이 되다.

 

 

만덕은 이처럼 많은 돈을 선뜻 내놓았다는데

지금 생각해도 참 배포가 큰 여인이었던 듯 하다.

 

과연 만덕은 어떤 여인이었을까?

 

 

 

제주도 만덕기념탑.

매년 이곳에서 김만덕의 덕을 기리는 제사가 이뤄진다.

제주도민에게는 만덕이 여전히 살아있는 존재다.

 

김만덕(金萬德, 1739~1812) 묘비.

만덕의 생애를 비교적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이묘비에는

그녀가 양가집 딸로 제주 김해김씨의 후손이라고 적고 있다.

 

제주 김해김씨 종친회.

15대손에서 만덕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만덕은 아버지 응열(應悅)과 어머니 고씨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12살 되던 해 풍랑으로 아버지를 여의고 만다.

 

"무역을 해서 육지서 돌아오다 풍랑을 만나서 돌아가셨다는 설이 있습니다.

어쨌거나 우리 할머니가 아주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 김대은(상임부 회장, 가락 제주도 청년회)

 

1750년의 전염병으로 제주도민 882명이 사망하는데,

이때 만덕은 어머니마저 잃고 만다.

어린 나이에 천애고아가 된 남매들은 의탁할 곳을 찾아 흩어지게 된다.

 

"오빠 둘이 있었는데, 오빠들은 친척들이 하나씩 데려가고

김만덕의 경우에는

마침 퇴기 한 분이 자식이 없어 자기가 키우겠다고 데려갑니다."

                                                            - 홍순만 원장(제주문화원)

 

퇴기의 수양딸로 들어간 만덕.

보통 기녀는 자신의 딸에게 기녀를 되물림하는 게 일반적이다.

 

비록 수양딸이지만

만덕이 재주가 있는 것을 알고

기녀 장부인 <기안>

만덕의 이름을 올리게 된다.

 

관아의 기방에서 춤과 노래를 배우게 된 만덕.

15살 무렵부터 관기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제주의 자연, 역사, 풍속이 생생하게 그려진 <탐라순력도>.

당시 제주 기녀들이 어떤 생활을 했는지 자세히 그려져 있다.

 

 

길 밖에서 제주목사가 기녀들과 풍악을 즐기고 있는 장면도 있고

또 양반들의 행사에 참가해 춤과 노래를 선보이기도 했다.

 

기녀는 관원에게 수청을 들 의무가 있었고

그 지방 향족들의 연회에 참여해야 했다.

 

만덕 역시 마찬가지였다.

춤과 노래 등 연회를 담당하는 기녀의 특성상 관기는 재색이 뛰어난 자를 삼았다.

만덕은 특히 악기 다루는 솜씨가 좋았다고 전해진다.

기예에 뛰어나고 용모 또한 뛰어난 만덕은 제주는 물론 육지까지 명성이 자자했다.

 

"근데 실제 전해지기로는 굉장한 미인으로 나타납니다.

워낙 절세미인이라는 말이 퍼지니까

육지에서 김만덕을 보려고 제주목사를 자청한 사람도 있었다고 했을 정도입니다."

                                                                                                      - 홍순만 원장

 

조실부모하고 퇴기에 의탁해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낸 만덕.

미모와 재기가 뛰어나 가난에서 벗어나 재물도 제법 모을 수 있었지만

만덕에게는 떨칠 수 없는 문제가 있었다.

기녀는 여염집 규수처럼 사는 게 불가능했다.

 

 

원래 양가집 규수였던 만덕은 그런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만덕은 비록 머리를 숙이고 기녀노릇을 했으나

스스로 기녀로 자처하지는 않았다.'           

                                                         - <만덕전>

전라감영 노비안.

전라감영에 소속된 노비들의 이름을 적어놓은 노비안.

여기에는 기녀의 이름도 포함되어 있다.

 

기녀는 그 신분이 노비였다.

기녀는 관의 소유물로서 엄격하게 관리를 받았다.

기녀들은 50세까지 기녀를 했다.

그 전에 빠져 나오기 위해서는 부자집에 소실로 들어가야 했다.

하지만 그것은 만덕이 원하는 삶이 아니었다.

 

 

'나이 20여 세가 되자 만덕이 자신의 사정을 울면서 관아에 호소하니..'

                                                                         

'목사가 불쌍하고 가엾게 여겨 기안에서 빼주고 양민으로 되돌려 주었다.'

                                                                                               - <만덕전>

 

화려한 기생의 생활도.

부자집 소실의 안정된 삶도 거부한 만덕.

이제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야 했다.

 

비록 천민의 신분이었지만 당시 제주 기생의 위세는 대단했다.

 

제주목사를 지낸 이익태가 쓴 <지영록(知瀛錄)>을 보면,

 

"관리들이 총애하는 것을 믿고 건방져서 누구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며

보통 일도 기녀에게 뇌물을 주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시 최고라는 평양 기생 못지 않게

호사를 누리면서 비단옷을 입고 다녔다고 하니,

 

만덕의 입장에서 천민의 신분이지만

기생을 그만 둔다는 것이 그리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4. 기생에서 다시 양민으로 - 객주를 차리다.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 만덕은 과연 어떤 삶을 선택했을까?

 

 

 

제주시 건입동.

제주항이 있는 제주의 관문이다.

 

과거 건입포, 선지포라 불리던 이곳은

탐라국 시절부터 개화기까지

육지와 연결하는 해상 교통의 중심지였다.

 

관기를 그만둔 만덕은

이 건입포구에 객주를 차리고 장사를 시작하게 된다.

 

 

 

만덕의 객주는 최고의 명당자리였다.

현재 만덕의 객주는 세월의 풍화와 함께 사라졌고 그 터만 남아 있다.

 

제주목 관아에 인접한 건입포에는

장사배에서 관선까지 많은 배들이 드나들었다.

 

객주는 상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상품을 위탁판매하는 일종의 중개상인이었다.

 

시장이 점점 활성화되면서

객주는 초기 중개업을 넘어 시장을 움직이는 손이 되어갔다.

 

 

 

객주에 사업적 이익이 커지면서

웃돈을 주고 객주의 사업적 권리를 사고 팔았다.

 

매매가 성사되면 단지 객주집만이 아니라

거래하던 상인과 상품에 관한 권리까지 물러받았다.

객주가 된다는 것은 근처 상권을 장악한다는 의미와 같은 것이다.

 

"만약 다른 곳에서 여기 와서 물품을 판다거나,

원래 팔아야 하는 곳이 아닌 딴 곳에 판다거나 하면,

여기서 못하도록 나름대로 권리를 확보하는 문서입니다."

                                           - 양진석 박사(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학예연구사)

 

객주 초기, 만덕은 관기 시절의 인맥을 십분 활용하게 된다.

 

관기생활을 하면서 모은 밑천을 가지고 객주를 시작한 만덕.

제주 관리들은 물론,

육지에서 공무를 온 관리들까지 만덕의 객주를 드나들었고,

만덕은 이 과정에서 육지와 제주의 물류 동향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또 한 때 일류 기생이었던 만덕을 보기 위해 제주와 육지 상인들이 모여들었다.

 

"기본적으로 김만덕이 관청에서 관기 역할을 했다는 것이 중요하게 작용한 듯 합니다.

관청과의 연관성이 있다는 것,

그리고 김만덕이 가진 상업적 기질도 있었을 것입니다.

 

용모도 좋고,

언변도 좋고,

또 관청에서 배운 예절을 포함해서 봤을 때,

 

제주 토착민 뿐만 아니라

외래 상인들까지 휘어잡을 수 있는 능력을 가졌던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 박찬식 교수(제주대 탐라문화연구소)

 

 5. 제주의 특산품(미역, 제주마, 양태)  

                - 육지의 쌀, 소금과 맞바꾸어 시세차익

 

 

과연 김만덕의 객주에서 어떤 물품이 거래되었을까?

 

 

제주시 남원읍 바닷가.

이 바닷가 지명은 '짐치통'이다.

 

태양열에 바닷물이 증발하면서

배추절이기에 적당한 물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여름때는 마을 사람들이 이 물을 떠서 허벅에 담고 가서

부엌에서 솥에 다려서 소금을 만들고,

 

겨울에는 태양열이 약해서 소금을 못 만들고

그 대신 배추를 절이기에 염도가 딱 맞아서,

 

겨울철에 마을 사람들이 여기 와서

띄엄띄엄 웅덩이에서 배추 절여 김치를 만들어 먹었습니다.

그래서 '짐치통'이라 불렀습니다."

                                              - 고광민 학예연구사

 

 

갯벌이 없는 제주는

사면이 바다여도 소금을 만들 수 없었다.

 

제주시 애월읍 애월 염전.

너른바위 위에서 염전을 만들어 소금을 생산하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제주의 소금 자급율은 24% 정도였다.

 

'육지보다 백 배의 힘을 들여도 얻는 소금은 적다.

반드시 진도나 남해 등에서 구입해온다.'

                                                                - <제주풍토록>

 

소금 뿐만 아니라 식량도 크게 부족했다.

현무암으로 된 척박한 땅에서 논농사는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만덕은 쌀과 소금 등 주요 생필품을 거래하기 시작했다.

 

쌀과 소금은 생필품이면서 자급자족이 불가능한 교역품이었다.

장사의 기본은 싸게 싸서 비싸게 파는 것이다.

값이 싼 가을에 쌀을 넉넉히 사들여다가

봄에 비싸게 파는 식으로 물량을 조절했다.

 

"건입포가 가장 중심이 되는 포구였습니다.

거기에 객주였다면 제주에 유입되는 물품을 거의 독점했을 것입니다.

부를 축적했다고 보여집니다."

                                           - 고동환 교수(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쌀과 소금은

제주 특산물과 거래되었다.

 

제주는 농업에는 부적합 했지만 

전복이나 오징어 등

어느 지역보다 해산물이 많이 나는 곳이었다.

 

특히 미역은 제주 사람에게 있어 화폐와 같은 역할을 했다.

 

지금이야 미역을 양식하지만

조선시대엔 미역이 동남해 일부와

제주에서만 채취되는 것이었다.

 

조선 백성 절반이 제주 미역을 먹었다고 할만큼

미역은 당시 제주 최고의 상품이었다.

 

'제주에도 미역이 생산되는데 나라 사람 절반이 제주 미역을 먹는다.'

                                                                   - <경세유표, 정약용>

 

고립되어 있는 제주의 특성상

바다를 건너면 가격이 산지보다 월등히 높아졌다.

 

만덕은 제주와 육지간 시세차익을 이용해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섬 제주에 갇혀 있었지만

고위 관리와 육지 상인과 교류하면서

물류 동향에 대해 누구보다 앞선 정보를 가지고 있었던 만덕.

그녀는 더 큰 도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조선 사회는 사농공상의 신분제가 강한 사회였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대동법 실시후

수공업, 상업이 발달하고,

화폐 사용이 장려되면서 급격한 변화가 오고 있었다.

돈의 가치와 상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이를 뒷받침하듯 18세기가 되면서

전국에 1,000여 개의 시장(장시)이 들어선다.

 

시장(장시)은

8도에서 올라온 각종 특산물로 항상 활기를 띄었다.

 

개성 인삼, 한산 모시, 안성 유기, 전주 한지, 원산 북어.

이들 특산물들은 희소성으로 인해 매점매석이 가능했다.

 

상인(사상-자유상인, 도고-독점도매상인)들은

이 거래들을 통해 조선 후기 신흥 부자로 떠오른다.

 

만덕도 역시 제주 특산물의 가치에 주목한다.

 

천연기념물 제 347호.

제주마.

제주는 조선 군마의 최대 생산지였다.

 

기후가 따뜻하고 넓은 초지가 있어 말을 사육하기 안성마춤이었다.

말을 키워 조정에 진상하는 것은 제주 목사의 중요한 업무였다.

 

그러나 진상되는 이외,

개인 목장의 말들은 비싼 값으로 팔려 나갔다.

 

 

 

 '큰 말은 한 필에 상등이면 쌀 20석'

                                                   -경국대전 호전

 

"모든 말들은

조천포라든지 화북포를 통해 강진, 영남쪽으로 도착해

 

나주로 들어가면

두 배로 올라서 쌀 40석에 거래되고,

 

다시 한양까지 가면

쌀 80석에 해당되는 가격으로 폭등합니다."

                                             - 장덕지 교수(제주산업정보대학)

 

당시 상인들은 말 매매로 엄청난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말꼬리인 말총 또한 제주만의 특산품이었다.

 

이 시기 작품인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허생이 제주에 들어가서 말총을 모두 거두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망건값이 열배나 올랐다"

 

말총을 매점하기 위해 한양 뿐만 아니라

멀리 개성에서도 제주를 찾았을 정도로 말총은 그 가치가 상당했다.

 

 

 

말총과 함께 양태도 제주의 특산품이었다.

 

갓의 테두리에 해당하는 양태는

대나무를 재료로 만든 수공업품으로

제주 양태가 전국 시장을 독점했다.

 

말총과 양태는

모두 양반의 복식인 갓에 필요한 재료였다.

 

조선후기 봉건적 신분제도가 해체되면서

양반의 수가 증가되므로

더불어 갓과 망건, 탕건의 수요가 증가하였다.

 

"이 양태업이라는 건 연중 가능한 것입니다.

미역은 봄에만 채취 가능한 것이지만

양태업은 베어 와서 집에 놔두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언제든지 작업할 수 있는 것입니다."

                                                             - 김동전 교수(제주대 사학과)

 

양태는 20세기 초반까지 제주 여인들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출륙금지령이 내려진 상태였지만

정조 후기에 들어서면

제주 상인도 전국 각지에서 자유로운 판매를 보장받았다.

(금난전권 폐지 - 시전상인의 독점판매권 폐지 -> 자유 상공업 발달)

 

대신 육지와 거래할 수 있는 포구를 정해 놓았는데

조천포구, 화북포구가 그것이었다.

 

교역이 활발해짐에 따라 포구의 정비와 확장도 이루어졌다.

 

영조때 제주목사 <김정 공덕비>.

김정의 진두지휘로 화북포구의 확장공사가 이루어진다.

 

"포구는 비좁고 선박은 많다보니

조그만 풍랑이 불어도 배끼리 부딪혀서 파손되는 일이 많이 발생합니다.

개인적 피해를 줄이기 위해 노봉 김정이 포구 확장공사를 재촉하게 되고

노봉 김정이 직접 돌을 지고 나르며 솔선수범하게 됩니다."

                                                                                  - 김동전 교수

 

당시는 제주 뿐만 아니라 전국에 배를 이용한 상품유통이 활발해진다.

 

배는 육상교통보다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유리했다.

조선후기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도

상업활동에 있어 해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길이 멀면 운반비 때문에 이득이 적게 된다.

그러므로 물화를 옮겨가고 바꾸어 이익을 보려면 배에 싣고 운반해야 한다."

                                                                                                    - <택리지>

 

만덕도 육지와의 직거래를 시작한다.

멀리 개성에서 찾아올 정도였으니

주요 특산품을 직접 가지고 나가면 훨씬 많은 이익을 볼 수 있었다.

 

갓양태미역은 저장성이 좋기 때문에

먼 거리 이동에도 부패할 염려가 없었다.

 

제주도에서 출발한 배는 하루밤에 해남이나 강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특히 강진은 제주와 교역이 가장 활발한 곳이었다.

 

전남 강진 마량항'말마(馬)' 자가 남아있을 정도로

제주와 관련된 요충지이자 상업의 거점이었다.

당시의 포구는 제주에서 건너온 배로 장관이었다.

 

'추자도 장삿배가 고달도에 매였다네

제주도 갓양태를 가득 싣고 왔다네

돈 많고 물건 많아 장사 시세 좋을세라'

                                                      - 탐진어가(정약용)

 

강진에 도착한 만덕 상단.

강진은 갓양태의 집산지였다.

8도의 상인들이 제주의 갓양태를 사려고 달려들었다.

갓양태를 매점하기 위한 한양상인과 개성상인의 다툼도 흔한 일상사였다.

 

"제주의 양태들을 실은 배가 강진에 도착하면

거기 많은 상인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제주산 양태를 선점하기 위해 쟁탈을 벌입니다." 

                                                                    - 김동전 교수 

 

금강의 충남 논산 강경 포구

충청, 전라 두 지역의 생산물이 모여들면서 급격하게 번성하는 곳이다.

 

제주에서 충청도까지 만만찮은 항해지만

위험을 무릎쓰면서까지 제주에서 강경포구까지 진출한 이유는 명확했다.

한양이 가까울수록 물가는 치솟았다.

 

"제주 특산물 말총이라든가,

같은 것들을 육지에 보내서 상당히 많은 차익을 남기고,

 

또 돌아오는 길에 미곡을 싣고 들어와서

수십 배에 달하는 시세차익을 남겨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 고동환 교수 

 

'(만덕은) 시세에 따라 물가의 높고 낮음을 잘 짐작하여 사고 팔기를 계속하니

몇십 년 만에 부자로 이름을 날렸다.'                                         

                                                                                   - <만덕전>

 

객주를 시작으로 유통업에 뛰어든 지 삼십여 년.

그녀는 제주 최고 부자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모든 성공한 이들이 그렇듯

만덕의 성공에는 남다른 근검절약이 한몫을 했다.

 

'의복을 줄이고 먹을 것을 먹지 아니하니 재산이 대단히 커졌다.'

 

'만덕의 성품이 음흉하고 인색해 돈을 보고 따랐다가 돈이 다하면 떠나는데...

이리하여 그녀는 제주 최고의 부자가 된 것.'

                                                                                        - <효전산고> 

 

악착같은 그녀의 성품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누구보다 이렇게 번돈을 가치있게 쓸 줄 아는 사람이었다.  

 

 

6. "제 소원은...

     단 한 번이라도 이곳을 벗어나,

    임금이 계시는 한양과,

   금강산 일만 이천봉을 유람하는 것이옵니다."

 

 

당시 만덕의 선행을 알게 된 조정은

만덕의 소원을 묻고

그것이 쉽든 어렵든 가리지 말고 특별 시행하라 명한다.

 

만덕은 어떤 소원을 말했을까?

 

재물을 잘 쓰는 자는 밥 한그릇으로도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썩은 흙과 같다고 생각한 만덕.

자신의 전재산을 상대로 굶주린 제주 사람을 구해주었다.

 

"목사가 만덕을 불러 임금의 분부대로 소원을 물었다"

                                                                              - <만덕전>

"어명이다. 주저 말고 소원을 말해보아라"

 

"제 소원은 단 한 번이라도 이곳을 벗어나

임금이 계시는 한양과

금강산 일만 이천봉을 유람하는 것이옵니다."

 

벼슬도 금은보화도 원하지 않았지만

만덕의 소원은 결코 쉬운 게 아니었다.

 

출륙금지령이 엄연했기 때문이다.

더우기 여자는 육지 사람과 결혼까지 금지할 정도로 엄하게 규제하고 있었다.

 

"진짜 육지구경 한 번 해보고 싶다,

소박하면서도 당시 시대적 한계,

섬이라는 꽉 묶여져 있는 세상을 한 번 뛰어넘어가고 싶다는 그런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 박찬식 연구교수

 

정조는 그런 만덕의 소원을 기꺼이 들어주었다.

평민인 만덕이 궁궐에 들일 수 있는 자격과 지위를 준 것이다.

 

'만덕을 내의원 행수로 삼았다.'

                                       - <일성록> (정조 20년 11월 25일)

 

"네가 여자로서 의기를 발휘하여 수많은 굶주린 백성을 구하였으니 참으로 갸륵한 일이로다."

 

정조는 만덕의 선행을 다른 지역도 본받도록 널리 알리도록 하고

육지에 머무는 동안 양식과 노자를 지급했다.

 

이듬해 1793년 3월.

만덕은 드디어 금강산 유람을 시작하게 된다.

 

그런데 왜 금강산이었을까?

 

금강산은 삼라만상을 축소해놓은 하나의 세계였다.

그 세계를 유람하는 것은 풍류객들에게도 대단한 명예로 여겨졌다.

금강산 유람을 위한 계를 결성할 정도로 금강산 유람은 당시 역풍이었다.

 

만덕은 장안사에서 만폭동으로,

묘길상에서 유점사, 십이폭포, 구룡폭포, 신세계, 삼일포, 해금강을 다 구경했다.

 

사찰에 들일 때마다 정성을 다해 공양을 드렸으며

삼일포에서 배를 타고 총석정에 올라

한 달여에 걸친 금강산 유람을 마쳤다.

 

 

한양에 도착한 만덕은 그야말로 장안의 화재가 되었다.

변방 제주 여인으로 주린 백성을 살릴 만큼 상업으로 크게 성공한 부자,

게다가 사대부도 쉽게 할 수 없는 금강산 구경을 두루 하지 않았던가.

 

'만덕의 이름이 한양 안에 가득하여

공경대부와 선비 등 계층을 가리지 않고

모두 그녀의 얼굴을 한 번 보고자 하였다.'

                                                            - <만덕전>

 

당대 천재학자이자 문장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박제가, 정약용, 이가환.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육지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만덕을 위해

한 편의 시를 지어주기도 했다.

 

'만덕은 제주의 훌륭한 여인.

예순 나이 마흔쯤으로 보이구료

평생 모은 돈으로 쌀을 사 백성을 구제하고

한번 바다를 건너 궁궐에 조회하였네'

                                                      - 이가환

 

특히 당시 재상이던 체재공은

그녀의 일대기를 글로 써서 선물할 만큼 그녀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넌 탐라에서 자라 한라산 백록담 물을 먹고

이제 또 금강산 구경을 두루 하였으니

온 세상의 사내들 중에서도

누가 또 그런 복을 누릴 수 있겠는가."

                                                      - <만덕전>

 

6개월의 짧지만 잊을 수 없는 육지 여행을 한 만덕.

그녀는 제주에서 여생을 마감한다.

 

김만덕.

그녀는 18세기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모험과 도전을 통해 큰 돈을 모은 전문 경영인(CEO)이었다.

 

그리고 여성에 대한 금기를 깨고

자신의 삶을 경영할 줄 알았던 앞선 근대인이었다.

 

조선 최초 여성 상인으로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열었던 한 여인과의 만남.

 

만덕의 덕을 칭송하고

후대에 전하려는 사람들의 남다른 공통점이 있다.

 

정조, 체재공, 정약용, 이가환, 박제가.

이들은 모두 새로운 조선을 건설하기 위해

경제의 중요성을 깨달은 개혁군주와 실학자였다.

 

한 시대를 이끈 이들이

만덕을 주목한 데는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변화의 시기엔 언제나 반대 여론이 높은 법이다.

사농공상의 질서 속에서

여전히 상업에 대한 반대 여론이 만만찮았던 시대.

 

여론을 무마하고

상업을 발달시키기 위해선 좋은 모범이 필요하다.

 

돈의 흐름을 쫓아 영리를 축적할 줄도 알았지만

돈을 기꺼이 사회에 환원할 줄 알았던 만덕.

바로 이것이 그들이 꿈꿨던 상도(商道) 아니었을까.

 

 

- 한국사전을 보고(늘 좋은날 되세요!~)

 

 
출처 : 조선왕릉연구원
글쓴이 : 권정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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