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천추태후, 욕망에 눈먼 권력에 화신?
고려 7대왕 목종의 어머니, 천추태후.
그녀는 아들을 대신해 섭정을 했다.
권력을 잡은 그녀의 권세는 화려했다.
'자택을 300여 칸이 되게 짓고...'
'모든 벼슬아치의 임명과 철직이 그의 수중에 달려 있었다.'
역사는 천추태후를 욕망에 눈먼 음탕한 여자로 기록하고 있다.
'간통'
'태후와 밤낮으로 놀면서 꺼리는 바가 없었다."
"욕망을 실현하려고 하는 권력의 화신, 욕망의 화신으로 그려졌습니다.
상당히 후대에 유교적 잣대를 가지고
당대성을 무시한 그러한 평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이덕일(한가람역사연구소)
천추태후, 그녀는 왜 역사의 외면을 받아야 했던 것일까?
천추태후는 우리에게 그리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다.
<고려사>를 살펴보면
고려 초기 12년간 섭정을 했고
외척과 간통을 해서 불륜을 저질렀던 악랄한 왕후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천추태후가 섭정했던 고려 초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천추태후가 그리 비난을 받아 마땅한 인물인가 의문이 간다.
천추태후가 섭정했던 동안 고려는
전통이 부활하고
외세의 침략을 받지 않는 등 안정된 시기를 구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추태후에 대한 평가는 냉혹하기만 하다.
그렇다면 천추태후, 그녀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는가?
일본 교토국립박물관.
이곳에 고려 초기에 귀중한 문화재 한 점이 남아있다.
고려말에 일본으로 건너가
지금은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있는
<대보적경변상도(大寶積經變相圖)>이다.
고려시대 왕실에서는 불경을 옮겨 적는 사경을 자주했는데
변상도는 사경 첫머리에 불경의 내용을 압축해놓은 것을 말한다.
1006년에 그려진 <대보적경변상도>는
고려시대 사경 변상도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세 보살이 꽃을 뿌리며 찬미, 공양하는 모습이 은은한 자태로 그려져 있다.
짙은 감지에
가는 붓으로 세밀하게 묘사한 그림 하나하나가
고려 불교 미술이 화려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 변상도는 금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변상도에는 세 명의 보살이 서서 꽃을 흩뿌려서 공양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고,
신비한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악기도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려진 선은 매우 섬세하고 부드러우며 정교해
고려시대 전기를 대표하는 불화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 아카오 에이케이(교토국립박물관 학예부)
<대보적경변상도>는
대승불교의 여러 경전을 하나로 묶어
32권으로 정리한 것으로
주로 왕실과 백성의 안위를 빌고
자신들의 성공을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총 9미터 길이의 <대보적경변상도> 끝부분에는
이것을 옮겨 적은 이의 발원문이 남겨져 있다.
'응천계성정덕 왕태후 황보씨와 김치양이
마음을 합쳐 발원하여 금자대장경을 사성합니다.'
사경을 한 왕태후 황보씨와 김치양!
이들은 과연 누구일까?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대보적경변상도>가 완성된 1006년 <고려사> 기록을 찾아보았다.
살아있는 왕의 어머니를 뜻하는 태후(太后),
<대보적경변상도>을 사경한 왕태후 천추태후는
고려 7대왕 목종의 어머니 헌애왕태후 황보씨이다.
그렇다면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무엇을 위해 <대보적경변상도>를 사경했을까?
그리고 둘은 어떤 관계인가?
2. 고려 왕실은 철저히 근친혼을 했다!
천추태후.
그녀는 고려 5대왕 경종(재위 975~981)의 비, 헌애왕후 황보씨이다.
경종은 이미 두 명의 비를 두고 있었다.
헌애왕후 황보씨는
경종의 셋째 비가 되었다.
경종은 뒤이어 헌애왕후의 여동생을
네번째 비 헌정왕후로 맞았다.
자매가 동시에 한 왕의 비가 된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경종은 왕건의 손자,
헌애왕후 황보씨 자매 또한 왕건의 손녀들이란 사실이다.
자매는 당시 왕실 풍습에 따라
외가의 성인 황보씨를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의 혼인은 태조 왕건의 손자, 손녀
사촌 집안간에 이루어진 근친혼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가?
고려 왕실 혼인관계를 살펴보기 위해
개성왕씨 중앙종친회(서초구 서초동)를 찾았다.
왕실의 계보가 기록된 <개성왕씨족보>.
고려 8대 현종(1009~1031)때까지 왕실은 거의 근친혼이었다.
태조 왕건의 네째 아들이자 고려 4대왕이었던 광종은
그의 누이를 첫째 왕비로 맞았다.
"광종의 첫째 비가 태목왕태후 황보씨로 돼있죠.
이 태목왕후는 어디 있느냐 하면 여기 이렇게 돼있습니다.
우리 태조(왕건)의 따님이시다.
그러니까 누나하고 동성 관계지요.
(태조 넷째 아들) 광종의 둘째 비를 보면 경화궁부인 임씨인데
이 어른은 혜종(태조 첫째 아들)의 따님이십니다.
여기 보시면 이렇게 나와 있죠.
경화궁부인이라고.
그러니까 조카님하고 결혼한 것이 됩니다."
-개성왕씨종친회원
고려시대 근친혼은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풍습이었다.
특히 고려 왕실은 철저히 근친혼이었다.
고려왕 34명중 19명이
같은 왕족과 혼인을 한 근친혼이었다.
"고려사회가 호족연합 정권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조선시대처럼 왕이 초월화 되지 못하고
자신들의 정치 세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근친혼의 방식을 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김기덕 교수(건국대 사학과)
개성왕씨 족보(開城王氏族譜).
개성왕씨 족보에서 고려 왕가의 혼인에 대한 다른 중요한 사실을 찾을 수 있었다.
태조 왕건에서 8대 현종까지 왕실의 혼인은 특정한 가문과 이뤄진 것이다.
태목왕후 황보씨, 헌정왕후 황보씨,
헌의왕후 유씨. 선정왕후 유씨.
황주 황보씨와 청주 유씨 두 가문이 대표적이었다.
특히 천추태후의 외가인 황주 황보씨는
황주를 중심으로 하는 호족 세력으로
왕비를 4명이나 배출하여 막강한 유세를 떨치고 있었다.
"당시 고려 정국에서 왕과 왕실의 정치적 영향력을 고려할 때
반드시 왕후족의 위세를 고려해야 되는데
그런 점에서 보면 황주 황보씨의 정치적 영향력은
거의 절대적이었다고 봐야 합니다."
- 구산우 교수(창원대 사학과)
왕건의 손녀이자, 쟁쟁한 호족 세력의 외손으로
경종의 비가 된 천추태후.
그녀는 경종의 다섯 왕비들 중에서
가장 먼저 아들(목종)을 낳았다.
경종의 유일한 아들이자
장차 왕위를 이을 아들이었다.
왕후에서 왕태후로 그녀의 운명이 달라지는 듯 했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일이 찾아온다.
급작스런 경종의 죽음(981년, 경종 6년)
천추태후가 아들을 낳은 지
불과 1년만에 경종이 세상을 떴다.
당시 천추태후의 나이 겨우 18살.
어린 나이에 남편을 잃은 천추태후의 충격은 컸다.
그러나 슬픔을 추스리기전에 또 다른 문제와 마주해야 했다.
누가 경종의 뒤를 이을 것인가?
3. 성종 즉위, 유교 통치 이념 - 스스로 제후국으로!~
왕의 후사가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왕위계승자를 정해야할 시급한 문제였다.
예정대로라면 헌애왕후의 아들이 왕위를 이어야 했지만
경종이 갑자기 죽으면서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당시 헌애왕후의 아들은 겨우 2살이었다.
왕위를 잇기에는 너무 어렸다.
헌애왕후의 아들이 왕위를 잇지 못한다면
헌애왕후의 앞날이 어찌될 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성종(고려 6대, 재위 981~997).
경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이는 성종이었다.
천추태후의 오빠였다.
성종이 즉위한 후
천추태후의 아들은
궁궐에 남아 성종의 손에 자라게 된다.
남편을 잃은데 이어
아들과도 떨어져 지내야 했던 천추태후.
이때 그녀곁에 한 남자가 나타난다.
김치양(金致陽)
그는 천추태후의 외척이었다.
승려였던 김치양은
천추태후 머물던 궁에 출입하면서 천추태후와 정을 통하게 된다.
둘이 사통한다는 소문은 곧 성종에 귀에 들어갔다.
"밤낮으로 태후와 놀면서 꺼리는 바가 없었다."
- <고려사 김치양전>
성종은 유학적 성향이 강한 왕이었다.
그는 유학자를 스승이자 벗으로 둘 정도로 유학에 대한 관심이 깊었다.
성종에게 여동생의 행동은 받아드릴 수 없는 불륜한 것이었다.
"성종이 그 소문을 확인하고 곤장을 쳐서 먼 곳으로 귀양 보냈다."
-<고려사 김치양전>
천추태후의 여동생 헌정왕후에게도 정을 통하던 한 남자가 있었다.
바로 작은아버지 왕욱이었다.
헌정왕후는 급기야 왕욱의 아이까지 임신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성종은
왕욱 역시 경상도 사천으로 귀양 보낸다.
이별의 상심이 컸던 헌정왕후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산기를 느끼고
집안 나무 아래서 아이를 낳는다.
하지만 아이를 낳자마자 헌정왕후는 이내 세상을 떠난다.
성종에게서 유교식 수절을 강요받았던 두자매.
헌정왕후는 죽음을 맞았고
천추태후는 불륜한 여자로 낙인찍혔다.
'김치양과 간통'
천추태후의 애인 김치양도 또한 패륜아로 기록되었다.
'타고난 본성이 간교'
'성욕이 몹시 강했다.'
남편을 잃고 외간 남자와 정을 통했다고 불륜한 여자로 낙인 찍힌 천추태후.
그렇다면 당시 고려사회에서 천추태후의 행동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을까?
대만 타이베이에 있는 국립고궁박물관.
중국 역대 왕조의 보물 70여 만점을 소장하고 있는 동양 최대 규모의 박물관이다.
이곳에는 천년전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를 다녀가서 기록한
<고려도경>의 가장 오래된 판본이 남아있다.
고려 건국의 역사에서부터 고려 왕실 계보까지
당대 고려의 모습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특히 인상적인 것은 고려인들의 생활상 부분이다.
천년전 송나라 사신이 크게 놀랐을 만큼
고려는 매우 자유롭고 개방적인 성풍속을 가지고 있었다.
"고려인들은 매일 아침 목욕을 하는데
남녀 구분없이 시냇물에 모인다."
- <고려도경>
서긍은 남녀가 함께 시냇가에서 목욕하는 것을 의아하게 여겼는데
개방적인 성풍속은 고려 시대 여인들의 지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당시 여성의 지위가 어느 정도였는지 족보를 통해 알 수 있다.
1333년 충숙왕때 작성된 <여주이씨세보(驪州李氏世譜)>를 보면
뜻밖의 자리에서 여성의 이름을 만날 수 있다.
'호주 낙랑군부인 최씨'
호주로 등록된 사람이 남자가 아닌 여자인 것이다.
"아들과 손자가 있었지만
나이가 제일 웃어른이고
남편이 죽은 지 오래되니까
부인이 호주가 된 겁니다.
제일 중요한 게 재산 문제인데
부모가 돌아가시면 재산을 아들, 딸이 똑같이 균분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만큼 여자가 중요한 겁니다.
여자를 남자와 차별시하지 않고 똑같이 재산을 나눠줬던 것입니다."
- 이우성, 성균관대 명예교수
<고려사(高麗史)>에 보면
고려 시대 여성들은 수절을 강요받지 않았다.
<고려사>에 따르면
충숙왕의 비 수비 권씨는
이미 한번 결혼을 했다가 이혼을 했고
다시 충숙왕의 비가 된다.
왕비도 재혼이 가능했던 것이다.
"성종의 왕비였던 문덕왕후 같은 경우에도 다른 종친하고 결혼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성종하고 재혼을 한 겁니다.
그 다음에 충렬왕의 후궁이었던 숙창 원비 같은 경우에도 역시 과부였습니다.
그런데 충렬왕의 후궁이 됐고,
충렬왕이 죽은 다음에는
다시 그 아들이었던 충선왕이 자기 후궁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렇게 재혼 사례가 있고
재혼한 여자를 왕비로까지 들일 정도면
'고려시대 때는 재혼에 대해선 아무런 규제가 없었다'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 권순형 박사(고려사 전공)
조선시대와는 달리
여성의 지위가 보장되고 여성의 성이 억압 당하지 않았던 고려시대.
그러나 천추태후만은 끝내 불륜한 왕후로 기록되고 있다.
<고려사>는
조선 초기 유학자들에 의해 씌여진 역사서.
유교를 최고의 이념으로 여겼던 유학자들에겐
헌애왕후의 행동은 결코 용납 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헌애왕후에 대한 비난은 불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권력에 눈이 먼 탐욕스러운 여자로 기록하고 있는데
헌애왕후, 그녀는 진정 권력의 화신이었을까?
4. 천추태후의 섭정, 대제국 고구려의 부활의 꿈~
997년.
잊혀진 존재가 되어가던 천추태후에게 재기의 기회가 찾아온다.
재위 16년,
성종이 38세에 세상을 뜬다.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은 성종을 이어
왕위에 오른 이는 목종, 고려 제 7대왕.
그는 16년전 왕위를 양보해야 했던
천추태후의 아들이었다.
즉위할 당시 목종은 18살.
그러나 천추태후는 아들을 대신해 섭정을 시작한다.
목종은 즉위하자마자 어머니께
'응천계성정덕왕태후(應天啓聖靜德王太后)'라는 웅대한 칭호를 내린다.
천추궁에 거쳐하면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그녀를
세상은 '천추태후(千秋太后)'라 불렸다.
권력의 중심으로 돌아온 천추태후.
그녀는 섭정을 시작하자마자 김치양을 가장 먼저 궁궐로 부른다.
그리고 조정의 모든 재정권과 인사권을 가진 막강한 권력을
그에게 부여한다.
"목종이 즉위할 당시에 정치세력의 분포는
경주계(신라계 유교파)가 퇴조를 하고,
근기계(황해도, 평안도 : 북방 자주파)가 약진했던 시대였습니다.
그런 속에서 목종이 평화롭게 왕위 계승을 이어받았고
근기계가 약진하는 가운데서
근기계의 일원이었던 황주 황보씨가
정치적 야심을 가지고서 정치 일선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장성한 나이에 아들이 왕위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정치 일선에 나서서
김치양을 끌어들여서 정국을 주도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 구산우 교수(창원대 사학과)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권세는 화려했다.
궁궐은 호화로웠고 모든 권력은 그들의 손에 있었다.
"자택을 300여 칸이나 되게 짓고
대와, 정자, 정원, 연못 등을 지극히 아름답고 화려하게 꾸며 놓았다."
"백관(모든 벼슬아치)의 임명과 철직이 모두 그의 수중에 달려 있었다."
- <고려사, 김치양전>
김치양이 휘두르는 권력은 목종도 어찌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목종이) 항상 그를 내보내고자 하였으나
모친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염려하고 단행하지 못하였다."
-<고려사, 김치양전>
천추태후는 왜 김치양을 불러들여 이렇게 막대한 권력을 나눠줬을까?
김치양은
황해주 동주(洞州) 출신이었다.
동주는
황주와 더불어 예성강 일대 지역으로
이 일대는 패서 지역으로 불린다.
패서 지역의 호족세력들은
광종의 개혁정치에서 대부분 숙청되고
중앙정치에서 소외되었다.
천추태후는 자신의 근거지였던 황주를 비롯한
패서 지역 출신들을 모아 자신의 정치 기반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패서 지역 출신의 김치양은 천추태후가 선택한 정치적 동반자였다.
"패서 세력은 거슬러 올라가면
통일신라 시대 말기에 설치된 패강진 세력이라고 볼 수 있는데,
패강진의 관할 범위는 황주, 동주, 또는 평주 이런 지역을 위시해서
고려 제 2의 수도였던 서경까지도 포함되는 지역 세력입니다.
이러한 세력은 서경을 중시하는 경향을 갖고 있어서
고구려 계승 이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던 세력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 김갑동 교수(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김치양을 위시한 패서 호족 세력의 결집으로 중앙 관료의 불만은 더 커져 갔다.
김치양과 천추태후를 향한 비난이 쏟아졌다.
"친한 세력이 요직을 차지"
"그 세력이 나라 안팎을 좌우" - <고려사, 김치양전>
"충신과 의로운 사람들을 더욱더 꺼렸다." - <고려사, 천추태후전>
천추태후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던 사람들.
충신과 의로운 사람들은 어떤 세력을 뜻하는 걸까?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숭의전(崇義殿).
숭의전은
태조 왕건에서부터 현종, 문종, 원종까지
네 분의 고려왕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조선시대와 마찬가지로
고려시대에도 왕과 왕비를 모신 태묘가 설치되었다.
고려 태묘는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지은
중국식 태묘를 본받아 지은 것으로
그 시작은 고려 성종때부터다.
고려 6대왕 성종.
그는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삼아 유교식으로 통치하고자 하였다.
그 중심에는 유학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송나라 문물과 새로운 정치체제를 받아들여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갖추고자 했다.
그러나 천추태후는 유학자들과 다른 노선을 지향했다.
"목종 때 이들 패서 세력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는데
불만을 품은 과거 출신 관리들은 유학을 바탕으로 유학적 소양에 의하여
중앙의 정치무대에 진출하려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호족세력을 견제하고 중앙집권화를 이루려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특정한 지역을 기반으로 중앙정계를 오로지 하려는
천추태후와 김치양과 갈등을 빚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 김당택 교수(전남대 역사교육학과)
성종때 유학자들이 추구했던 유교식 정치체제는
내부적으로 황제국을 지향했던 고려를 스스로 제후국으로 낮추는 결과를 가져왔다.
실제 성종은
고려초부터 사용한 '조서'를 '교서'로 바꾸도록 했다.
'조서'는 황제국에서 쓰는 말이므로
제후국에서는 쓸 수 없다는 말이었다.
"이때 비로소 '조서'를 '교서'라고 개칭하였다."
- <고려사, 세가 성종 5년>
황제국을 지향했던 고려는 중국과 다른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였다.
경기도 하남시 선법사.
고려시대 불상인 마애약사불좌상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약 1m에 달하는 정교한 불상옆에는 27자의 명문이 적혀 있다.
'태평 2년에 황제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해 석불을 다시 만든다.'
(太平二年 佛石重修 今上皇帝 萬歲願)
태종 2년의 황제는 고려 5대 경종을 일컫는다.
고려가 황제국을 지향했다는 것은 고려 궁궐의 형태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조선시대 궁궐문이 세 개였는데 반해
고려시대 궁궐문은 총 다섯 개이다.
다섯 개의 궁궐문은 황제국에서만 사용하는 체제다.
"당시 고려가 성립될 때에는
특히 중국이 아직 통일되지 못해서 분열돼 있었던 국제적 환경과,
또 다시 후삼국을 통일했다는 자존의식,
그리고 문화적 자주의식,
이런 것들이 합쳐짐으로써
고려초는 실제로 내부적으로 황제국 체제를 크게 내건
황제국 국가로 운영을 했습니다."
- 김기덕 교수(건국대 사학과)
건국 이래 국가적 행사였던 팔관회.
원래 불교의식의 하나였던 팔관회는
태조 왕건때 호국의 뜻을 기리고 복을 비는 국가 행사로 발전한다.
고려의 정신과 문화와 전통이 결합된 민족 융합의 장.
그것이 바로 팔관회였다.
그러나 성종은 고려의 전통인 팔관회, 연등회를 모두 폐지했다.
유교적이지 못하다는 이유였다.
'팔관회 잡기들이 떳떳하지 못하고 또 번쇄하다고 생각하여 이를 전부 폐지하다.'
- <고려사, 세가 성종 6년>
그러나 천추태후는
성종때 외면받았던 팔관회 등
고려시대 전통을 부활했다.
이는 중국식 유교 정치 이념 아래 자칫 잃을 뻔 했던
고려인의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것이었다.
더구나 당시 고려 백성들은
성종의 급격한 중국화 정책에 큰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 풍습을 나라 사람들이 달가워하지 않았다.'
-<고려사, 서희전>
"고려가 중국식 유교정치 체제하에서는
결국 중국에 구속된 제후국가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는데,
제후국가의 틀을 뛰어넘어서
고구려가 실질적으로 누렸던 황제국가의 지위까지도
말로써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내용면에서도
추구하려는 마음이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 이덕일 소장
5. 송, 거란과의 실리 외교
천추태후는
또한 대고구려국의 부활을 꿈꿨던
태조 왕건의 정신을 이어 받으려 했다.
그것은 서경 중시 정책으로 이어진다.
오늘날 평양에 해당하는 고려의 서경.
태조 왕건이 북진 정책을 추진하면서 그 중심기지로 삼았던 곳이다.
천추태후는 서경을 호경으로 개칭한다.
서경을 제2의 수도로 삼겠다는 뜻이다.
이는 중국의 여황제 즉천무후가
호경을 중심으로 주나라를 통일한 것처럼
서경을 강화해 고려를 일으키겠다는
천추태후의 의지였다.
천추태후는
안으로 고구려 영토 회복의 꿈을 키우면서
밖으로는 급변하는 동북아 정세에 대응하고 있었다.
당시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키고
중국 대륙을 넘보는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무섭게 떠오르는 거란의 기세에도 불구하고
성종때 고려는 송나라와 외교관계만을 고집했다.
이는 결국 거란 침략의 빌미를 제공한다.
중국대륙을 놓고 송과 대립하고 있던 거란은
고려를 먼저 공격해 송과의 관계를 끊어놓은 후
송을 치겠다는 계획이었다.
고려가 송에 군사를 지원할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결국 성종의 친송 일변도의 외교정책이 거란 침입을 부른 것이다.
그러나 천추태후의 섭정 기간 동안
고려는 단 한 차례도 외세의 침략을 받지 않는다.
천추태후는 고려의 안정을 위해
거란과 송 사이에서
현실적인 실리외교를 펼쳐 나간다.
'거란이 야율연귀를 보내와 왕을 올려 책봉하여 수의보방추성봉성공신으로 삼았다.'
- <고려사절요, 목종 10년>
당시 거란은
송나라와
중국 북동부 연운 16주를 두고
쟁탈전을 벌이고 있던 상황이었다.
천추태후는 신흥세력인 거란과 우호적인 세력을 유지함으로써
고려 북방의 안전을 꾀하는 실리적 외교를 한다.
"목종 5년에 가면
거란이 송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축하하는 사절을 보냄으로써
새롭게 등장하는 거란에 대한 친선 정책을 유지했는데
그런 측면에서는 명분보다는 실리, 현실을 추구하는 외교 정책을 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김갑동 교수
한편 고려는
거란의 1차 침입 이후
외교 관계를 단절했던 송과도 일정한 관계를 유지한다.
송나라 역사서에 따르면
고려는 송에 군대를 출병해
거란의 위험을 막아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송의 군사를 국경에 주둔하여 거란을 견제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 <송사 권 487 열전>
"공을 저쪽으로 던진 거죠.
송나라에서는 계속 고려에 외교관계를 맺을 것을 요청하는데
(송과 외교 관계를) 맺는다고 하면 거란이 쳐들어 온단 말이죠.
이런 상황에서는 송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으면
곧바로 전쟁에 돌입할 수밖에 없는데
그렇지 않을 수 있는 너희 송나라가 거란을 확실히 제압할 수 있는
군사력을 가지고 있다고 힘을 보여주면 외교관계를 맺겠다
라는 식으로 공을 떠넘겼다고 봐야 되는 것이죠."
- 이덕일 소장
명분이 아닌 고려의 국익을 가장 우선시 했던 천추태후.
그녀는 탁월한 국제감각으로 고려를 지켜낸 여성 정치가였다.
6. 유학자들의 쿠테타 - 여걸 천추태후의 쇠락
천추태후는 중국의 여황제인 즉천무후와 비교되기도 한다.
섭정을 통해 정치 전면에 나섰던 즉천무후는
자신의 정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기존의 귀족세력을 몰아내고
신진세력을 등용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독자적인 세력을 바탕으로 중국에서 유일한 여황제에 즉위하였다.
천추태후 또한 섭정을 하면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였다.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하고
실리외교를 통해 나라 안정을 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천추태후의 정치이념은
조정의 유학세력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의 불만은 점점 정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유교를 바탕으로 고려의 체제를 바꾸려던 유학자들.
이들은 천추태후에 반대하는 세력으로 결집해가고 있었다.
유학자들에게는 정치적 구심점이 된 한 사람이 있다.
바로 대량원군(왕욱과 여동생 헌정왕후 사이 출생).
태조 왕건의 유일한 손자다.
1003년 목종 6년.
이들의 결집에 결정적 빌미가 된 사건이 있었다.
천추태후가 김치양의 아들을 낳은 것이다.
목종의 후사가 없는 상황에서 낳은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아들.
유학자들은 이 아이가 장차 왕위에 오를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유학자들에게 김치양의 아들이 왕위에 오른다는 것은 고려 왕조를 부정하는 것이다.
정치적 대립이 극에 달하고 있는 상황.
천추태후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천추태후는 결국 대량원군을 승려로 출가시켜 내보낸다.
이는 당시 정적 제거의 주요한 수단이었다.
'태후가 대량원군을 강제로 출가시켰다.' - <고려사, 천추태후전>
"대량원군은 족계로 따지면 태조의 손자거든요.
그래서 천추태후의 입장에서는
자기 반대 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가시같은 존재였지만,
천추태후의 반대 세력 입장에서는
태조의 손자라는 명분때문에
하나의 정치적인 중심, 구심점 역할을 하는 그런 존재였다고 보입니다."
- 김갑동 교수
목종 12년 천추궁이 불길에 휩싸였다.
천추궁의 기름창고에서 난 불이 옮겨 붙어 발생한 화재.
그러나 우발적인 사고라 보기엔 사건의 여파가 너무 컸다.
화재가 있은 후 궁궐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목종은 신하들의 출입마저 금지시켰다.
'모든 궁문을 닫아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고려사 세가 목종 12년>
'왕은 신하들을 만나기를 싫어하였다.' -<고려사 세가 목종 12년>
<고려사>는 누군가 정변을 일으키려 했다고 적고 있다.
김치양.
그가 정변을 계획하고 천추궁에 불을 냈다는 것이다.
과연 이것이 사실일까?
'왕이 병석에 누워있는 틈을 타서 정변을 일으키려 했다.'
-<고려사 세가 목종 12년>
국경지역에 최강의 부대를 이끌고 있던 강조.
그는 화재 사건후 5천의 군사를 이끌고 천추궁을 향했다.
강조는 목종이 이미 죽었고
김치양이 왕위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을 믿고 출병한 것이다.
갑작스런 강조의 출병에 당황한 천추태후.
궁궐내에서 천추태후는 이를 막으려고 애를 썼다.
'태후는 강조가 오는 것을 꺼리어
대신은 파견하여 절령을 수비하고 행인들을 차단케 하였다.'
-<고려사, 강조전>
강조는 평주에 와서야 모든 게 거짓임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군사를 되돌리기에 늦었다고 판단한 강조는 결국 궁으로 입성한다.
강조정변(1009년, 康兆政變, 고려 목종 12)
그는 김치양 부자와 그 측근 세력을 모두 죽였다.
천추태후의 친척 서른 명은 섬으로 귀양을 갔다.
그리고 목종마저 끝내 폐위시켰다.
강조의 쿠데타로
목종과 천추태후마저 제거되고
결국 왕위에 오른 이는 바로 대량원군이었다.
그런데 <고려사>에 기록된 쿠데타의 배후세력을 잘 살펴보면
실제 배후세력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최항, 채충순...
그들은 바로 유학자들이었다.
'대량원군을 맞아오게 했다.'
국립 춘천 박물관.
지하 수장고에서는 또 다른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유학자 <최사위 묘비명>.
대량원군 즉위 과정에서 최사위의 역할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 적혀 있다.최사위는 대량원군 즉위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태자의 자리를 오래도록 보존하게 하였다.
이로서 마침내 왕의 자리에 오르셨다.'
"이 구절을 보면 최사위가
현종이 왕위로 등극할 수 있도록 하는
그때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힘이 컸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박성원(학예 연구사, 국립춘천박물관)
목종이 폐위되고
천추태후도 궁밖으로 쫓겨났다.
12년간 섭정하며 고려를 이끈 천추태후.
'목종이 개성 밖 동북쪽 귀법사로 나가
어의를 벗어 음식을 교환해 모후에게 올렸다.'
-<고려사 세가 목종 12년>
아들과 함께 떠나는 그녀의 마지막은 쓸쓸했다.
'태후가 음식을 먹으려고 하면 친히 밥상을 차려 드리고
태후가 말을 타고자 하면 왕이 친히 고삐를 잡아 드렸다.'
- <고려사 세가 목종 12년>
목종은 파주 접성현에서
강조가 보낸 자객에 의해 죽음을 당한다.
대고구려의 부활을 꿈꾸며
대제국의 역사를 새롭게 쓰고자 했던 천추태후.
두 아들의 죽음과 함께
천추태후의 시대도 막을 내렸다.
"태조 왕건이 꿈꾸었던
대고구려 제국을 다시 구현하자라는 사상과 정책에서
천추태후의 정치가 이뤄졌다고 볼 수 있는데,
천추태후가 강제로 퇴장 당했다는 점은
바로 고려가 개국 이념이었던 북진정책을 비롯한
여타의 대고구려주의라는 정치이념과 정치세력이,
이후로 상당한 기간 동안 고려 정계에서
소외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이덕일 소장
천추태후는 66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다.
자유롭고 당당했던 한 여자로서,
고려의 운명을 짊어졌던 한 정치가로서,
당대 최고 여걸로 살았던 천추태후.
그러나 유학자들과 갈등 속에서
천추태후는 끝내 불륜한 여자로 기록된 채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승자에 의해 쓰여진 역사서에서
천추태후의 정치적 업적은 모두 철저히 외면되었다.
남성 중심의 윤리와 유교 이념속에서
윤리적이지 못하고 세속적인 왕으로 매도 당했던 천추태후.
그러나 천추태후는 음탕한 여자로 권력에 눈이 먼 여자도 아니었다.
고려 전통의 부활을 통해 고려의 자주 정신을 되살리고
유연한 외교전략으로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고려를 지켜낸 여성정치가 천추태후.
그녀는 고려 500년을 통해 여성으로서
고려 최고의 정치 권력을 행사한 여걸이었다.
- 한국사전을 보고(늘 좋은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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