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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종가기행 44] 安東 金氏 淸陰 金尙憲(안동 김씨 청음 김상헌)

회기로 2011. 2. 28. 20:52
[종가기행 44] 安東 金氏 淸陰 金尙憲(안동 김씨 청음 김상헌)
3대 종손 김성동(金星東) 씨
종손으로 입후… 힘겨운 종가보전, 사당 없어 지방 써서 제사 모셔
철도공무원 정년퇴임후 농사 지으며 불천위 제사와 봉사 이어가

종손 김성동 씨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5리 화합1길 37번지. ‘화합’의 길이라는 지명이 특이한데, 이 곳은 행정상 무수한 변천을 겪었다. 조선 시대에는 경기도 광주 초부면이었고 1980년 남양주시에 편입되었다가 그해 말 읍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청음 김상헌의 종택은 1층 양옥구조로 마을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최근 노환으로 치료를 받고 퇴원한 13대 종손 김성동(金星東, 1923년생) 씨가 부인 은진 송씨와 살고 있다. 종손은 종부를 우암 송시열 선생 후손이라고 소개했다.

청음은 안동 김씨를 교목세가(喬木世家)의 반열에 올렸으며, 한국사에서 절의(節義)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문자를 쓰면 정직불굴지사(正直不屈之士). 정직해서 조금도 굴함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안동 김씨의 3대 거점이 있으니, 안동 풍산의 소산마을과 서울의 장동, 경기도 남양주의 석실이다.

청음은 석실(石室)과 깊은 인연이 있다. 그는 이곳에 은거해 자신의 호를 삼았을 정도로 애정을 표시했다. 후인들이 이곳에 서원을 세웠는데, 그 유명한 석실서원(石室書院)이다.

그래서 석실은 안동 김씨 장동(壯洞) 계열 사람들에게는 중국 송나라 주자의 무이서원과도 같은 존재였다. 이곳에 1645년(인조23) 우암이 방문한 기록이 있다.

이들의 만남은 이후 3년간 지속되었는데, 우암은 선친 송갑조(宋甲祚)의 묘갈명을 부탁하기도 했다.

두 사람의 만남은 김장생-김집을 잇는 젊은 서인계(西人系) 산림(山林)의 연결이라는 의미 외에 청음의 절의를 시대정신으로 승화시킨 계기가 되었다. 우암은 이후 석실서원 묘정비(廟庭碑)를 지어 헌정했고 취석(醉石)이라는 멋진 서예 작품까지 남겼다. 묘정비 내용 일부는 이렇다.

“숭정황제 때의 병자년과 정축년은 천하의 어려움이 극에 달했다 할 만하다. 그때 우리 석실 선생은 예의와 대종(大宗)을 자임하여 이미 무너진 세상에 강상(綱常)을 세웠다.

사람들이 거리낌 없이 청(淸)과 화해하자는 의견을 내자 그렇지 않다고 결연히 말했다. 선생의 말씀은 막히면 막힐수록 기개는 더욱 드러났고, 몸이 곤궁하면 할수록 도는 더욱 트이었다. 그 때문에 어지러움이 더욱 심해졌어도 다스림은 더욱 안정되었다.”

뿐만 아니라 우암이 편찬한 청음의 연보를 보면, 청음을 도학의 전범(典範)으로도 부각하고 있다.

우암은 청음의 문인임을 자처하며 그를 위해 상복까지 입은 사람이다. 학문 교류는 청음의 손자인 김수항의 아들 대에 이르러 만개했다. 농암 김창협은 송시열의 고제(高弟)가 되었다.

이는 우암이 수제자인 수암 권상하에게 유계(遺戒)를 남길 때 자신이 일찍이 청음과 함께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상의했던 사실과 김수항과 함께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를 편찬한 것을 회상하며 주자대전차의와 정서분류(程書分類) 등의 일을 김창협과 상의해 교정할 것을 부탁한 데서 알 수 있다.

석실서원의 정확한 위치를 종손께 물었다.

“원래 서원은 여기에 있지 않았어요. 남양주 시청 쪽에 서원 터가 있었어요.

우리 김씨들이 보존하려고 했는데, 다른 사람 소유로 넘어갔어요. 10여 년 전에 그곳을 방문해 80노인에게 물어 겨우 위치만 확인했어요. 마을 이장도 모르더군요.” 석실서원은 안동 김씨에게는 서원 이상의 의미를 지닌 곳이다.

석실서원은 청음 사후 4년 뒤인 1656년(효종7) 그의 형인 선원 김상용과 함께 청음이 배향된 이래 1693년 김수항, 1713년 김창협, 1857년 김창흡, 김원행, 김이안, 김창집, 김조순이 뒤이어 배향돼 장동 김씨들의 정신적인 본향이다.

또한 서인-노론계의 학술과 인물을 배출하는 중심지이기도 했다. 초석은 김창협이 잡았고 교육기능은 그의 손자인 미호 김원행이 강화했다.

서원의 강학 기능을 가장 잘 살린 모범적인 석실서원이 현재 청음 종손조차 그 위치를 찾기 어려운 정도로 변한 사실에 놀라며 종택 인근의 석실서원 묘정비와 우암 친필로 세워진 취석비(醉石碑)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석실마을은 장동 김씨의 위선 사업이 집중된 곳이다. 파조인 김번(金璠)의 묘소를 위시해 김생해(청음의 조부), 김극효(청음의 부친), 김상용, 김상헌의 묘가 있다.

청음의 손자인 김수증은 부친인 김광찬을 석실에 모신 뒤 이곳에 도산정사(陶山精舍)를 건립함과 아울러 우암의 글씨를 받아 취석(醉石)]이라는 대자(大字)를 돌에 새겨 세웠다.

청음의 13대 종손 김성동 씨는 실상은 안동 김씨 시조로부터 11대인 김번(경파, 장동파의 파조)의 종손이기도 하다. 김번은 청음의 증조부이기 때문에 김성동 씨는 16대 종손이 된다. 김번의 맏형은 삼당(三塘) 김영(金瑛)으로 안동 소산파이다.

안동 김씨의 과환(科宦)을 살펴보면, 정승부에 오른 이가 15명이고 그중에 영의정이 8명이다. 대제학이 7명, 판서가 35명이다. 문과 급제161명, 무과 급제가 134명이다. 유일한 청백리가 청음이다.

시호를 받은 이만 50명이다. 벼슬로 혁혁한 이 가문의 실상을 살피면 참으로 명불허전(名不虛傳)임을 알 수 있다. 일반인들은 안동 김씨가 오랫동안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벼슬만 많이 한 집안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안동 김씨는 많은 저술도 남기고 있다. 유고가 203명, 문집이 127명에 달한다. 안동 김씨는 우리나라 최고의 문헌지가(文獻之家)인 셈이다.

종가에서 많은 자료를 볼 수 있기를 내심 기대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족보 이외에는 다른 자료를 거의 보지 못했다.

“대대로 내려온 책이 집에 많이 남아 있었어요. 그런데 대여섯 번 도둑맞아 벼루며 붓까지 몽땅 도둑 맞았어요. 책을 독에 넣어두거나 서울 아들 집에 보관해 두기도 했어요.

마을에 쌍초상이 난 날에도 도둑이 차를 집 앞에 대놓고 책을 실어가려고 했는데 운 좋게 그것을 발견해 겨우 막았죠.” 종가를 방문할 때면 자주 듣는 이야기다.

족보를 보니 청음 이후 13대를 내려오면서 현 종손까지 5번의 양자가 있었다.

참으로 고단한 종통(宗統) 계승 과정이다. 청음 종가의 양자 문제는 조선왕조실록에까지 올라 있다. 청음의 7대 종손은 김면순(金勉淳, 생부 金履錫)인데 당초에는 김건순(金建淳)으로 봉사손을 세웠다.

그런데 순조1년(1801) 3월 27일에 이르러 파양(罷養)한 일이 있었다. 이는 김건순이 서학(西學, 천주교)에 연루된 죄를 지었기 때문이었다.

종손은 외조부인 잠곡 김육의 후손인 청풍 김씨에게 어려서 3년간 글을 배웠다. 그 뒤 소학교를 마친 뒤 22세 때 철도청에서 근무하다 정년 퇴직 후 종가를 지키며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현재 불천위 제사와 4대 봉사를 하고 있는데, 불천위 사당이 없어 지방을 써서 제사를 모시고 있다.

“며느리를 구하는 데 힘들었어요. 밀양 박씨를 안동에서 데려왔죠.” 차종부를 구한 어려움을 토로했다. 종손은 1남 2녀를 두었는데, 차종손은 주현(柱顯, 1953) 씨며, 손자는 증년(曾年, 1981년생) 씨다.

종손의 마지막으로 또 다른 고민을 털어놨다.

“위토가 많습니다. 이 마을에 대지만도 5,000평이 넘는데 그것을 25집이나 깔고 있어요. 지난해에는 예전에 없던 종부세가 4,500만 원이나 나왔어요.

농사를 짓고선 도저히 낼 수 없는 고액의 세금이라 지금까지 못 내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차압을 하겠다고 해요. 자나깨나 이게 걱정입니다. 할 수 없이 조상 대대로 내려온 땅을 팔아야 하는데, 그것도 여의치 못해요.”

문중 토지는 투기의 대상이 아니다. 조상의 제사를 받들기 위해 물려받은 땅이며, 종손은 이를 고스란히 후세에 물려줘야 할 소임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종손들에게 말 못할 고민을 떠안기고 있다.

출처 : 나의 사랑 한국한문학
글쓴이 : 인간사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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