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대 종손 이목(李睦)씨 의병의 요람 三栢堂 재건에 주력 조부모까지 모신 효자·효손, 만학으로 대학원까지 마치고 조상 현양 사업 매진 | ||||||||||||||||||
도산 온혜리에 있었던 삼백당은 도대체 어떤 집일까. 퇴계 이황 선생과 함께 금곤옥계(金昆玉季)로 이름난 온계(溫溪) 이해(李瀣) 선생이 살림난 곳이다. 온계는 퇴계의 동복(同腹) 친형으로 다섯 살 연장이다. 진성 이씨가 안동에 입향한 이래 최초의 문과 급제자가 송재 이우인데, 온계 형제의 숙부다. 두 번째 급제자가 온계다. 삼백당은 온계의 종택 당호다. 영남에서는 중심인물의 호를 들어 ‘아무개 선생 종가’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당호(堂號)를 쓴다. 불천위 종가를 말한다. 가장 유명한 인물의 당호가 아닌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학봉 김성일 선생의 종가인 풍뢰헌(風雷軒)이다. 풍뢰헌은 학봉 손자의 당호이다. 당당한 문충공 학봉이 있지만 그보다도 풍뢰헌으로 불려졌다. 안동 하회의 대종택인 양진당(養眞堂)은 입암 류중영과 그의 두 아들인 겸암 류운룡, 서애 류성룡 형제가 태어나 3부자가 모두 불천위로 모셔지고 있지만, 그래도 입암고택(立巖古宅) 보다도 양진당이라는 당호가 더 널리 쓰이고 있다. 양진당은 입암의 6대손인 류영(柳泳)의 당호이다. 삼백당 역시 온계의 종택이지만, 온계 선생 손자의 당호를 사용했다. 삼백당은 얼마 동안 잊혀진 당호가 되었다. 주된 이유는 고색창연한 건축물로 남아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문화재로도 등록되어 있지 못하다. 하지만 삼백당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이유가 있다. 삼백당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기 전인 1895년(을미년)에 일어난 안동 지방 의병 항쟁의 최고 지도자를 배출했고, 모의를 한 본거지였다.
다만 현재 취미헌(翠微軒)이라는 현판이 조그마하게 걸린 기와집 한 채만 남아, 이곳이 당당했던 온계의 종택임을 말해준다. 종택 옆에 온계 선생 신도비가 비각에 모셔져 있다. 비문은 영남 남인의 종장이며 정신적인 지도자였던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좌의정 재임 때 지었다. 퇴계 선생이 신도비를 남기고 있지 않는 것과 비교된다. 온계의 묘비에는 아우인 퇴계가 지은 글이 새겨져 있다. 현재 정부는 많은 독립운동 성지와 독립유공자를 지정해 국가적인 예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삼백당은 일제에 의해 불태워진 지 100년이 넘었건만 아직도 복원되지 않고 있다.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580번지 일대에는 온혜초등학교 건물과 드넓은 밭이 보인다. 바로 통한의 삼백당 옛터다. 놀랍게도 삼백당 종가의 입구자 안채의 ‘전통 설계도(家圖)’가 남아 있다. 종택이란 한 가문의 얼을 고스란히 간직한 집으로, 단순한 주손의 거주지와는 확실히 구분되는 고유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온계의 17대 종손 이목(李睦, 1949년생) 씨와의 만남은 그래서 종가 복원 이야기부터 시작되었다. 자연스럽게 새로 발굴 번역된 을미의병일기(국가보훈처 발간)에 대해 대화가 오갔다. 그 일기를 필자가 번역했다고 말하자, 종손은 참으로 깊은 인연이라고 반겼다. 종손의 부친 이혁(李爀) 씨는 보성중학교와 연희전문에서 수학했고 대구에서 신문기자 생활도 했다. 포항중학교에서 6년여 교사 생활(수학 담당)을 하다가 청송 안덕중학교, 예안중학교에서 근무했다. 한국전쟁 당시 조부(이정식)가 보도연맹에 가담하는 바람에 부친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초를 당했다. 종손의 모친은 안동 내앞의 의성 김씨 큰 종가의 종손 고(故) 김시우(金時雨) 씨의 누이동생이었다. 취미헌(翠微軒)에서 만난 노종부는 내앞 종손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영감이 43세로 세상을 버렸을 때 목(睦)이가 고2, 내가 39살이었어요. 3남 5녀 8남매를 건사해야 했으니 안 해본 일이 없었어요. 눈만 뜨면 농사일을 했으니까요. 그리고 시누이와 시동생이 모두 9남매였어요.” 내앞 큰 종가에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성장했을 노종부를 생각하니 남편을 여의고 온몸으로 맞았을 경제적 고통이 눈에 선했다. “과수나무 200주를 심고 하루에 분무기로 8번이나 약을 친 적도 있어요. 밤에 누워도 편한 줄 몰랐어요. 이 집에 시집와 시어머니와 시증조모까지 받들었어요. 이제는 뭐 막내만 결혼하면 됩니다.” 화제를 돌려 기쁜 일이 무엇인가 물었다. “아직 80이 넘어도 건강하고 자식 앞세우지 않았고, 또 이혼한 사람 하나 없어요. 명문가 출신이라 욕을 먹이지 않으려고 딸을 더욱 엄하게 키웠어요.” 종손은 외가가 내앞 의성 김씨 종가요 처가는 안동 박실의 전주 류씨, 처외가는 안동 김씨 보백당 종가, 진외가는 창녕 성씨라 했다. 명문가의 통혼 범위를 엿볼 수 있다. 종손은 2녀 1녀를 두었는데, 외동인 차종손 승륜(1983년생) 군은 중앙대학교에 재학 중이다. 종손은 조부 밑에서 성장하다 청송 안덕초등학교, 예안중학교, 서울 선린상고를 졸업한 뒤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곧바로 금성방직에 입사했다. 군복무를 마친 뒤 미도파에 들어갔고, 2002년부터는 이마산업으로 옮겨 현재 계열사 대표이사로 재임 중이다. 종손은 가정형편 때문에 중단한 학업을 계속해 만학으로 대학과 대학원을 마쳤다. 공부에 재미를 느꼈으나 이제는 학업보다 문중사, 그중에도 종택 복원과 조상 현양 사업에 전력하겠다고 했다. 종손은 시종 신중하고 사려 깊은 태도를 보였다. 손자가 조부모를 평생 모시다 떠나보냈다. 이 한 가지 일만 보아도 종손의 훌륭한 처사를 짐작할 수 있다. 종손가의 유물에 대해 물었다. “말도 마십시오. 도둑을 크게 세 번이나 맞았습니다. 대원군이 온계 선생을 위해 특유의 유려한 필치로 써준 현판이 둘 있었는데, 취미헌(翠微軒)과 운암석실(雲岩石室)입니다. 이 중 취미헌 현판을 떼가버렸어요. 귀중한 서책, 서첩, 고문서 등을 간수하지 못한 것도 아쉽습니다.” 종가에는 매병(梅甁) 형태의 중국 명나라 시대 도자기가 세전(世傳)되고 있다. 한 쌍의 도자기로 인종1년(1545, 선생50세) 5월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명나라 세종황제로부터 주자대전(朱子大全) 한 질과 함께 받은 상사품(賞賜品)이다. 최고의 격조를 지닌 문화재급 중국 도자기다. 2005년 12월 25일 안동에서는 뜻 깊은 단체가 결성되었다. 온계선생종택복원사업추진위원회다. 고문에 충재 권벌 종손, 학봉 김성일 종손, 서애 류성룡 종손, 전 안동향교 전교, 진성 이씨 대종회장, 퇴계 이황 종손이 위촉됐고, 위원장에는 조순 민족문화추진회 회장 등 총 134인이 참여한 모임이다. 국가와 시민사회의 힘으로 종택을 재건해야 한다는 자의식의 발로다. 삼백당 복원사업은 단순히 한 씨족의 종가 복원이 아니라 광복된 나라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자존과도 상관된 일이기 때문이다.
이해 1496년(연산군2)-1550년(명종5)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경명(景明), 호는 온계(溫溪), 시호는 정민(貞愍) 퇴계의 친형… 정적 견제로 고초받은 '절조의 名巨'
그에 비해 그의 형님인 온계 선생의 경우, 함께 공부하여 문과에 급제하고 20여 년간 관직 생활을 했음에도 저술은 일고(逸稿)의 형태로 3책만 지금 남아 있다. 북행록(北行錄)의 경우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돼 있는데, 일고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은 자료다. 우선 왜 퇴계 선생께서 형님의 유고를 수습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퇴계 선생은 제자들이 공부방을 마련하면 현판을 써주고 먼저 세상을 떠난 제자의 문집까지 편집하여 출간했던 이다. 따라서 형님의 유고가 있었다면 수습을 하지 않을 어른이 아니다. 그렇다면, 온계가 참소를 입고 죄인의 신분으로 유배 도중 객점에서 세상을 떠난 현실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고 본다. 아마도 그것과 상관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아쉬움 때문인지, 지난 1979년 퇴계의 후손인 이가원(李家源) 박사의 서문과 한학자 이익성(李翼成) 씨의 국역으로 국역 온계전집이 간행된 바 있다.
온계의 관직 이력을 보면 중종과 그 이후로 나눠 확연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즉 인종을 거쳐 명종 대에는 거개가 외직을 전전했다는 것이다. 이는 정치적인 상황과 자신의 선택 때문이었다. 원인은 인종1년(50세) 대사헌 신분으로 전횡을 일삼던 우의정 이기를 논박하여 체직시킨 사건이다. 이 일로 온계는 이기의 최대 정적이 되고 말았다. 또한 역사상 충주옥(忠州獄) 사건 때 금부당상(禁府堂上)이 윤원형. 이기와 윤원형은 사림의 공적일 뿐 아니라 우리 역사를 후퇴시킨 조선 중기의 반역사적인 인물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기는 온계보다 20년 선배로 덕수 이씨며 명종4년(1549)에 영의정에 이르렀고 보익공신1등에 풍성부원군에 봉해진 인물이다. 그리고 윤원형은 파평 윤씨며 명종의 외숙으로 역시 1563년에 영의정에 이른 인물이다. 그러나 이들의 공신 작호는 선조 초에 삭훈되었다.
장소는 양주의 객점. 향년 55세였다. 희미한 성음으로 ‘大同江水何時盡 別淚年年添綠波’를 읊조리며 맞은 최후다. ‘대동강물이 언제 마르까? 이별의 눈물이 이렇게 해마다 떨어지는데’. 고려 시대 시인 정지상(鄭知常)의 시다. 물론 시를 지은 정황은 연인의 이별로 이와는 판이하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온계는 아우인 퇴계와 깊은 형제애를 나눴다. 퇴계에 못지않게 귀거래(歸去來)를 꿈꾸었던 온계는 악인들의 참소로 뜻을 미처 펴지도 못한 채 한많은 삶을 마감했다. 아마도 가장 보고 싶은 얼굴은 아우인 퇴계였을 것이고, 지난 이별의 눈물을 떠올리며 다시 못 올 길을 떠날 것을 생각하니 목이 메어 절로 이 시구가 생각났을 것이다. 오랜 나그네로 홀로 누에 오르니 고향생각 대궐 생각 한이 없어라 반 해 동안 나그네 길 하도 고달파 무정한 백발만 두발에 가득해. 객지에서 명원루(明遠樓)라는 문루에 올라 지은 시다. 선생은 관직에서 정직과 충성으로 일관해 권신들과 타협하지 않은 곧은 인물이었다. 그에게는 처가 쪽으로 당시의 권력 실세였던 김안로(金安老)의 손짓이 있었다. 아울러 척신 윤원형의 제의도 있었지만 모두 물리치고 당당하게 정도를 걸어갔다. 온계일고의 서문에서 소퇴계(小退溪)로 추앙 받았던 대산 이상정은 그를 ‘강대준위비상지인(剛大俊偉非常之人)’이라고 평했다. 강대하고 우뚝하며 남들은 쉽사리 하기 어려운 절조를 지켰던 분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유배 도중에 객사하고 말았다. 매우 불합리한 현실이었다. 대산 이상정은 때문에 서문에서는 이례적으로 ‘통탄하며 눈물을 흘린다(爲之痛傷流涕也)’고 현실의 아픔을 적었다. 퇴계 선생은 봄날처럼 따뜻했던 형님이 비명횡사하자 ‘분을 풀고 지석에 글을 새기니(洩憤幽刻)’라고 적어 기록으로 저들을 응징했다. 온계는 사후 효종 때 유림들의 발의로 일찍이 우거한 바 있는 경북 영주의 삼봉서원(三峯書院, 1658)과 고향 안동 도산면 온혜리의 청계서원(淸溪書院, 1667)에 각각 배향되었으나 모두 훼철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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