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대 종손 류성호(柳成昊)씨, 푸근한 인간미·탁월한 식견으로 가문의 전통 잇는 '인간 상록수' 순조롭던 서울생활 접고 '귀거래사'… 종부는 전통 가양주 기능 맥이어 | |||||||||||||||
서계 박세당의 둘째아들로, 작은아버지에게 양자를 간 인물이다. 양가 외조부는 윤선거요, 생가 외조부는 의령 남씨의 남일성이다. 남일성은 약천 남구만의 부친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박태보는 문과에 장원 급제(24세)했고 문장과 글씨에 능한 관료요 학자였으나 인현왕후 폐위를 극력 반대하다 진도 유배 도중 노량진에서 세상을 떠났다. 정재 박태보가 세상을 떠난 지 88년 뒤에 정재 류치명이 태어났다. 영남에서는 정재 박태보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서인과 남인의 이념적, 지정학적 간극 때문이다. 선배의 호는 쓰지 못하는 것이 관례요 예의다. 옛날에는 글자는 물론 동일한 음을 쓰는 것조차 금기시했다. 그런데도 류치명 선생이 선배의 호를 쓴 것은 정재 박태보를 잘 몰랐기 때문인 듯싶다. 정재 종가는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 무실에 있었다. 지금도 위치만 약간 옮겨 반갑게 손을 맞는다. 정재 묘소 아래에 입구자 종택과 불천위 사당, 강학지소인 만우정(晩愚亭)이 임하댐의 광활한 호반을 굽어보며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종가라고 하면 드러난 조상과 그를 모시는 사당이 있어야 하고, 직계 후손 즉 종손과 종부가 있어야 하고, 지손과 이들 지손의 모둠인 문중이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어야 한다. 물론 종택은 기본이다. 그런데 현재 이러한 기본적인 조건을 올곧게 갖추고 있는 종가는 드물다. 조선 시대 인물사전인 국조인물고에 등재된 이가 대략 2,000명을 넘는데, 조선을 대표하는 이들이다. 하지만 현재 경기도에서 지정한 종가가 11개 정도인 점을 감안한다면 제대로 조건을 갖춘 종가는 희박한 셈이다.
임동초등학교, 대구 동중, 대구고, 건국대 농과대 임학과를 졸업한 뒤 유명 출판사 평민사와 무역회사, 서점 등을 경영하다가 낙향해 종손으로서 직분을 다하고 있다. 신구와 동서를 아우르는 종손의 독서 편력을 보여주듯 종택 사랑채 서가에는 양서가 가득하다. 종손과 대화를 나누다보면 그의 식견에 놀란다. 또한 특유의 느리고 무게 있는 말투로 풀어내니 같이 앉아 있으면 인간미도 물씬 느낀다. 푹 삭은 김장 김치인 묵은지 맛이다. 족보를 꺼내 가계를 보여줬다. 정재 류치명의 아들이 세산(洗山) 류지호(柳止鎬), 그리고 손자가 수촌(水村) 류연박(柳淵博), 증손자가 일창(一滄) 류동시(柳東蓍)다. 증손자 대에서 맏아들이 일찍 세상을 버려 둘째아들이 후사를 이었다. 그가 류광준(柳光俊)으로 종손의 부친이다. 부친은 26세에 하세했다. 종부는 성주 이씨. 명문 성주 한개마을의 한주 이진상 선생 종가에서 이곳으로 시집왔다.
종손의 어린 시절은 영남의 반촌인 성주 한개마을의 추억이 짙게 배어 있다. “야야, 니 학교는 내가 시캐주마.” 2006년에 9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외조부의 목소리가 아직까지 생생하다는 종손은 대구에서 학교다닐 때 자주 그곳을 찾아갔다고 한다. 특히 국민대학교 총장을 지낸 외종조부 이규석 씨는 종손의 선친과 동갑으로 한때 한 집에서 지내기도 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불천위 제사 이야기를 들었다.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증조부께서76세로 돌아가셨어요. 증조부께서 노환으로 불편하실 때마다 제가 대향을 했죠. 증조부의 증조부가 정재 선생인데, 유림 불천위로 모셨어요. 제가 중3 때였죠. 그래서 제가 불천위를 모시게 되었어요. 생각해보니 제가 제사를 지낸 것이 여섯 살 때 부터였네요. 종손으로서 힘든 점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쓸 곳도 많고, 인사를 해야 할 곳도 많은데 시간이 모자라요. 가장 큰 문제가 경제와 시간이지요. 종손의 의무가 봉제사 접빈객이 아닙니까. 손님이 많이 와요. 그런데 과수 농사도 지어야 하므로 시간이 턱없이 부족해요. 그래서 문상도 밤 11시에 다녀올 때가 있습니다. 농사를 지으며 번 돈으로는 살림살이도 빠듯해요. 그 때문에 안식구도 나섰어요. 종손은 자기 삶의 상당 부분을 타인처럼 살아야 한다는데, 저야 그래도 견디겠지만 아랫대는 장담할 수 없어요.”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맏며느리는 중학교 수학교사다. “요즘 시골에는 일손이 없어요. 구할 데도 없고요. 그런데도 문중행사에는 빠질 수 없잖아요. 그러니 농사를 제대로 짓겠습니까. 게다가 종택이다보니 문화재절도도 걱정이 돼요. 그래서 선대 문적들은 대부분 한구국학진흥원에 맡겼습니다.” 종가를 지키는 종손의 고민이다. 방에 있는 메모장에는 과수 묘목 위치와 나이, 품종 등이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농촌을 살리려는 몸부림이다. 종택을 떠나면서 문득 ‘인간 상록수’가 떠올랐다.
▲ 류치명 1777년(정조1)-1861년(철종12)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백(誠伯), 호는 정재(定齋) 정재는 퇴계 적전(嫡傳: 학문적 정통성을 이은 학자)을 이어받은 대학자다. 문하생이 600백여 명에 달할 정도로 학자로서의 위상이 높았다. 1805년(순조5)에 문과에 급제한 뒤 지평, 정언을 거쳐 대사간을 지냈고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1855년(철종6) 장헌세자를 추존(追尊)하는 문제로 상소했다가 탄핵을 받고 8개월여 동안 평안도 상원과 전라도 신지도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가의대부에 올라 춘추관동지사에 이르렀고, 85세의 수를 누렸다. 그는 종증조부인 동암(東巖) 류장원(柳長源)에게 수학했고, 뒤에 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에게 학문을 익혔다. 강학에 힘써 <독서쇄어(讀書鎖語)>, <예의총화(禮疑總話)>, <가례집해(家禮輯解)>, <주절휘요(朱節彙要)> 등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정재집(定齋集)> 27책도 남아 있다. <정재집>을 펴보면 방대함에 압도된다. 송시열의 문집인 <우암집(尤菴集)>에 묘갈명, 행장 등 묘도문자(墓道文字: 인물에 대해 생애와 업적 등을 적은 글)가 많은 것에 비길 바는 아니지만, 그 예가 드물 정도다. 외증조부인 이상정의 저술인 <대산집(大山集)>과 동일한 27책이다. 시의 편수는 극히 적으며 상소와 편지 서발류(序跋類)와 묘도문자 글들이 주를 이룬다. 주요한 묘도문자로는 진일재류숭조선생 시장, 대산선생신도비와 시장, 갈암이현일선생신도비가 있다. 묘갈명만 87편, 행장이 33편이나 된다.
정재는 퇴계 학설에 바탕을 둔 영남 주리론(主理論)를 발전시켜 갈암 이현일, 대산 이상정, 손재 남한조로 이어지는 학문적 계통을 더욱 공고했다. 이(理)를 강조한 그의 학문은 한주 이진상, 면우 곽종석(학자, 독립운동가), 회봉 하겸진 등으로 이어졌다. 정재는 만년에 벼슬에 몸담기도 했지만 줄곧 성리학을 연구한 학자였다. 정재는 학문뿐 아니라 핏줄로도 대산 이상정을 이었다. 정재는 대산 이상정의 외증손자로서 외가인 소호리 대산 종택에서 태어났다. 정재가 태어났을 때 대산이 그의 종조부인 류도원에게 편지로 그 골상이 비범함을 칭찬했다고 한다. 정재는 목민관으로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초산부사 시절 백성을 헌신적으로 보살폈다. 65세 때 대사간으로 전임되었으나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때 초산 백성들이 그에게 알리지도 않고 선정을 기리기 위해 초상화를 사당에 걸고 제사를 지냈다. 이를 생사당(生祠堂)이라고 하는데, 이는 최고의 영예다. 하지만 정재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즉시 사람을 보내 철거했지만 그 후로도 사당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다. 피는 못 속이는가 보다. 정재의 증조부인 양파 류관현(柳觀鉉)은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벼슬을 지냈는데, 정약용이 지은 <목민심서(牧民心書, 권 45)>에 그 치적이 올라 있을 정도로 깨끗한 목민관이었다. 류관현은 함경도 경성판관으로 부임해 풍속을 교화하고 흉년엔 굶주린 백성을 구휼했다. 어려운 형편에도 토지를 내놔 사람들이 그 땅을 ‘의전(義田)’이라 불렀다. 그는 자제들에게 “천하에 걷잡게 어려운 것은 이(利)에 끌린 욕심이니, 각별히 경계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가훈은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재 종가 사랑방 문앞에는 양파구려(陽坡舊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양파구려는 정재 종택의 또 다른 택호로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다. 종가의 가정 지침서로 <가세영언(家世零言)>이라는 소책자가 있다.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작은 이야기’ 를 뜻한다. 짧은 글이지만 담긴 의미는 무궁하다. 한문본과 한글본 두 종류가 있는데 사랑방용과 안방용의 구분이랄 수 있다. 가세영언에 류관현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양파공(陽坡公)이 근검하시와 벼슬이 높아져 귀히 되셔도 손수 하인의 일을 하시니 하루는 나라의 승소(承召)를 받아 역마를 타고 풍악(風樂)을 잡히고 집을 떠나시다 홀연히 말을 돌려 돌아오셔서 부엌의 재를 쳐내시고 흙 한 삼태기를 부엌 바닥에 깔고 다시 말을 타고 가시는지라 서리(胥吏)가 그 연유를 물으니 말씀하시기를, 내가 어릴 적부터 매양 흙을 파다가 부엌에 깔고 그것을 이튿날 끌어내고 다시 까는 일이 일과이더니 오늘은 내가 벼슬길을 떠난다고 마음이 잠시 해이해져서 잊은 것이다 하시거늘 그러면 나으리가 출타하시면 어떻게 하시나이까? 하니 내가 집에 없으면 밥을 아니 먹으니 관계없다 하시더라.” 양파가 이처럼 철저히 실천했던 일상은 옛날에는 소학(小學)을 통해 어린 시절부터 익히게 된다. 사람이 한결같이 근면할 수는 없다. 나이를 들고 또 출세를 하면 이를 잊기 쉽다. 한훤당 김굉필의 경우 평생을 이러한 기본에 충실해 주위에서는 그를 ‘소학동자(小學童子)’라고 칭찬해 마지않았다. 가세영언에서는 정재와 관련해 이렇게 적고 있다. “(양파 류관현의) 증손 정재 선생은 대산 이 선생의 연원으로 도학에 통달하시고 급문록(及門錄)에 기록된 문인이 육백여 분이고 대과에 급제하셔서 벼슬은 가의대부 병조참판이시고 외직은 초산부사를 지냈는데 초산서 회가(回駕: 집으로 돌아옴)할 때 진지 지을 쌀이 없어서 아랫마을 망지내 댁에 가서 쌀을 꾸어서 밥을 지었나니라. 부인께서 평생 모시치마를 입어보지 못하였다가 선생이 초산부사를 가시게 되자 말씀하시기를 사랑에서 지금 만금태수를 가시니 모시치마를 입어보겠다 하셨으나 불행히 돌아가시니 관 안에 모시치마를 썼나니라. 선생은 그후 계묘년 구월 이십오일 본가 길사(吉祀)시 도유(道儒) 향유(鄕儒) 문친(門親) 육백여명이 모인 도회석상에서 불천위로 결정하여 봉사하게 되었나니라.” 바르고 근검했던 가성(家性)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정재의 아들 세산 류지호는 오랫동안 높은 벼슬을 지냈지만 제사 때는 실과 한 접시, 포 한 마리 외에는 본가에 보낸 것이 없을 정도로 청렴했다 한다. 선비가의 전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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