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자료실

[스크랩] [종가기행 ⑦] 杜谷 洪宇定 - 인조의 `삼전도 치욕`에 벼슬 버리고 은거

회기로 2011. 2. 28. 21:07
[종가기행 ⑦] 杜谷 洪宇定 - 인조의 '삼전도 치욕'에 벼슬 버리고 은거
[주간한국 2006-06-07 15:06]  

남양 홍씨 두곡 홍우정
1595년 (선조28) - 1656년 (효종7)


‘낙향한 뒤로 머리에는 벙거지를 쓰고 해진 배잠방이에 짚신까지 신었다. 그리고 망태기를 둘러메고 장사치 등 하류배들과 섞여 살았다. 때로는 북쪽 하늘을 우러러 눈물을 흘렸으나 사람들은 그 뜻을 알지 못했다.’

두곡 문집에 보이는 그의 고결한 모습의 한 단편이다. 철저한 진은(眞隱)으로서의 자기 성찰과 은둔의 삶이었다.

두곡은 만전당 홍가신의 손자요 서윤(庶尹) 홍영(洪榮)의 아들이며 허균의 형님인 허성의 외손자이다. 만전당이 “우리집에 필시 이인(異人)이 태어날 것이다”라는 현몽을 한 후 얼마 안되어 태어난 손자가 꿈에 본 모습 그대로였다고 한다. 장인은 해주목사를 지낸 최기(崔沂)이다.

홍우정은 5형제 중 맏이며 아우는 홍우원(1605-1687)인데 문과에 급제해 대사헌, 대사성, 이조판서 등 요직을 지냈다.

남파 홍우원은 허목, 윤휴, 권대운, 이봉징 등과 함께 남인 중에도 주류인 청남(淸南)을 형성해 서인은 물론 같은 남인인 허적, 민희 등 탁남(濁南) 세력과도 대립하였다. 또 아우 홍우량(洪宇亮)은 무과에 급제해 제주목사와 수사(水使)를 지냈으며 청백리에 들었다.

중앙 정치무대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가문 배경과 학문적 기반이 있었음에도 두곡은 인조의 삼전도 치욕에 부끄러움을 느껴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절의를 지키며 한양에서 산간벽지 봉화 뒤뜨물 마을로 은둔했다. 이후 그는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천명(天命)이다. 내 차리리 죽을지언정 불의와 타협해서 살고 싶지 않다”는 게 선생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두곡을 기리는 숭정처사유허비는 1748년(영조24) 사림(士林)의 뜻을 모아 마을에 세워졌다.

특히 이 비의 전면에는 사론(士論)에 따라 ‘대명천하무가객(大明天下無家客) 태백산중유발승(太白山中有髮僧)’이라는 선생의 시 귀절을 좌우면에 새겨 놓았다. 명나라 천하에 집이 없는 나그네가 되어 태백산 속에 스님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내용이다.

살아서는 철저하게 벼슬살이를 거부했던 선생은 사후에 더욱 빛난 분이다. 인조11년 사재감 직장에 잠깐 나아간 것이 벼슬살이의 전부였다. 그러나 사후인 영조22년, 이조판서 원경하가 경연에서 선생의 절의를 아뢰며 ‘대명천하무가객, 태백산중유발승’이라는 시를 읊자 영조는 무릎을 치며 칭찬하고 곧바로 추증을 명했다.

그 결과 이조참의로 추증이 이루어지고 국왕이 직접 ‘숭정처사’라는 칭호를 내렸다. 순조16년(1816) 다시 이조판서로 추증되었고 이듬해에 개절공(介節公)이란 시호까지 받아 구봉사(九峯祠)와 문산사(文山祠)에 봉안되었다.

묘갈명은 미수 허목, 묘지명은 갈암 이현일이, 전(傳)은 눌은 이광정, 행장은 대산 이상정, 구봉사 봉안문은 옥천 조덕린, 문산사 봉안문은 소산 이광정이 각각 지었는데 이들은 모두 당대를 대표하던 대정치가요 명유(名儒)였다.

이들의 글을 읽지 않더라도 두곡의 위상을 충분히 가늠할 수 있는 사료는 많다. 비워서 채우는 삶을 살았고, 물러나서 청사에 길이 남은 두곡 선생은 오늘날 이 시대의 사표(師表)라 아니할 수 없다.








두곡 문집
충신의 절의와 탈속한 작품 가득


두곡집은 1824년(순조24년) 봉화의 삼계서원(三溪書院)에서 간행된 5권 2책과 현 종손의 부친이 석판본으로 중간(重刊)한 두 종류가

남아 있다.

문집에는 충신의 절의가 절절이 느껴지는 주옥 같은 문장과 탈속한 시 작품들이 가득하다. 현대인이 읽더라도 그 서정성과 꼿꼿한 정신에 놀라게 된다.

그중의 하나가 도중음(道中吟)이란 작품이다.

대지는 산하 만리 눈내려 덮였는데
하늘은 서북풍 한바탕 휘몰아 치네
행인들마저 끊긴 이 석양 길을
홀로 지친 나귈 몰아 동으로 가네.

地負山河萬里雪
天噓西北一箕風
行人已盡斜陽外
獨策玄黃猶向東


그러나 애석하게도 두곡의 전집은 한국문집총간에도 실려 있지 않고 국역 출간도 안돼 일반인이 쉽게 접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종손 혼자 힘만으로는 조상의 문집을 번역해 후손은 물론 사회에 널리 읽히려고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많은 난관에 봉착한다.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국역 출간을 어느 종손이 선뜻 나서겠는가.

그래서 물질적 기반이 종가에 없다면 부자 지손들이 나서야 한다. 지손들이 모여 머리를 맞댄다면 충분히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조상 현양 사업이다.

이해관계를 넘어 조상을 받들고 알리는 것은 문중의 단합과 후세 뿌리교육에도 큰 도움을 주는 의미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여느 종가나 그러하지만 문중의 인적 네트워크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또한 조상 현양 사업을 종손에게 떼미는 지손들이 많다. 이름난 문중의 불천위 제사에조차 참사하는 이가 십여 명 남짓한 것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다행히 두곡 문집 국역 작업은 후손에 의해 격조있게 완성되었다고 한다. 문집을 쉬운 우리말로 옮겨 적으면서 보냈을 세월과 고초를 생각하면 경의를 표할 일이다.
태백오현
은둔의 삶 산 조선의 지성 다섯 명


1637년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평소 오랑캐라 칭했던 청나라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절하는 삼전도의 치욕을 당했다.

이는 조선의 지성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굴욕이었다. 그래서 후일 ‘태백오현’으로 불리는 서울 출신의 선비 다섯 명이 봉화 문수산을 중심으로 모여들어 은둔의 삶을 살았다.

그들의 면면을 보면 단순히 이름없는 선비나 말단 관료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영의정 인재 홍섬의 증손 손우당 홍석, 송강 정철의 손자인 포옹 정양, 청양군 심의겸의 손자인 각금당 심장세, 참판 강징의 현손(玄孫)인 잠은 감흡과 만전당 홍가신의 손자 두곡 홍우정 다섯 사람이 그들이다.

오현은 춘양 노리, 도심, 모래골, 버정이, 뒤뜨물 등에 터를 잡아 정착했으니 서로 간에 거리는 멀어야 수십 리에 불과했다.

이들은 자연을 벗삼아 빈번하게 교류했는데 그 주된 만남의 장소가 사덕암과 그 위에 있는 와선대(臥仙臺)다. 학산리(鶴山里) 골띠마을의 와선대 아래로 폭포는 그들의 충절을 아는지 모르는지 예처럼 정겹게 떨어지고 있다.

이들 태백오현의 후손들이 와선정계(契)를 결성하여 아직까지 이어가고 있는 모습은 영남 지역이 아니면 보기 어려운 끈끈한 유대이다. 다섯 사람의 그때 그 약속이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는 셈이다.

출처 : 나의 사랑 한국한문학
글쓴이 : 인간사화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