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령 이씨 갈암 이현일
1627년 (인조5) - 1704년 (숙종30) 자 翼昇 호 葛庵 시호 文敬
갈암 선생의 출사는 51세라는 비교적 늦은 시기에 이루어졌다. 권대운(權大運)과 허목(許穆) 등 근기(近畿) 남인들이 명유(名儒)로 대접해 추천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그러나 이면에는 근기 남인의 지도자였던 용주(龍洲) 조경(趙絅)과의 인연이 작용했다.
갈암의 부친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은 본래 파주에 살고 있던 용주 조경과 친분이 두터웠다. 갈암이 42세 때(1668) 부친의 명으로 서울로 과거를 보러가다가 돌아오는 길에 조용주를 만나보았고 그의 간정(簡靖)함과 온아(溫雅)함에 공경하는 마음이 생겨 인연의 끈을 맺었다고 한다.
갈암의 63세부터 67세까지는 생애의 대전환기였다.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집권하면서 그가 남인을 대표하는 산림(山林)으로 부름을 받아 경세의 포부를 펼쳤던 시기에 해당한다. 당시는 미수 허목과 백호 윤휴의 사거(死去) 후에 갈암은 남인을 대표하는 산림으로 추앙되어 존경을 받았다.
63세(숙종15) 때 봉열대부(정사품) 성균관 사업(司業)에 제수된 이후 사헌부 장령, 이조참의, 성균관 좨주, 예조참판, 사헌부 대사헌로 쾌속 승진 후 64세에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그러나 서인의 견제는 물론 집권 남인들로부터도 경연에 전념해 달라는 요구로 실권에서 배제되는 정치적 견제를 받았다. 따라서 갈암이 꿈꾸었던 도학적 경세제민의 포부는 이룰 수 없었다.
그리고 68세 때 갑술환국이 일어나자 즉시 사헌부의 계청(啓請: 임금에게 아뢰어 청함)으로 유배와 이배를 반복하게 된다.
이렇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63세 때인 1689년(숙종15)에 재이(災異: 재앙이 되는 괴이한 일)로 인한 구언(求言)에 응한 상소 내용 중 폐비 인현왕후(仁顯王后)를 별궁에 거처케 하여 보호해야 한다는 상소문 몇 구절(自絶于天) 때문이었다.
본의와는 상반되게 인현왕후를 모해하고자 한 것으로 몰려 마침내 ‘명의죄인(名義罪人)’으로 낙인 찍히게 된다. 평생은 물론 사후에까지 명의를 지킨 인물로 존경을 받은 도학자가 도리어 명의의 죄인으로 낙인 찍히게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저술 역시 금서(禁書)를 넘어 흉서(凶書)로 간주돼 간행하거나 보는 이 모두를 동일한 죄인으로 취급한 것이 사후 200년 동안 계속됐다. 그러니 재야에 있었던 제자나 후손들의 고초는 오죽했을까?
갈암은 71세(1697) 5월 호남 땅 광양으로 이배되었다. 그 전에 70여 일을 옥에 갖혀 온갖 고초를 겪은 뒤 함경북도 홍원에 유배되었고 다시 함경북도 종성으로 위리안치 된 바 있었다.
이곳에서 갈암은 53일간의 육로와 뱃길을 통해 7월 15일 전라남도 광양으로 왔고 이듬해 3월에는 섬진강 가 갈은리(葛隱里)로 옮겼다. 일찍이 갈암(葛庵)이라고 자호한 그와 마주친 갈은리라는 지명과는 기이한 인연이다.
갈암은 생전에 성균관 좨주의 역할에 큰 비중을 두었다. 그 직책을 사양하는 상소에서 그는 말했다.
“지금 받은 국자(國子) 사유(師儒)의 직임은 어찌 중대하고도 어려운 직임이 아니겠습니까? 위로는 오교(五敎)를 펴서 밝게 임금 섬기기를 도(道)로써 하는 의리를 알게 해야 하고, 다음으로는 고금의 사변(事變)을 말해주어 널리 들어서 도학(道學)을 갖추게 해야 합니다.”
실록과 그의 문집을 읽어보면 그가 향촌사회를 반듯하게 하려는 강한 포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향약(鄕約)을 실시하려는 정책을 세워 건의했지만 노론과 남인 세력 모두에게 채택되지 못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최근 자신의 형님인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 선생의 종가에서 경북대학교에 위탁해 둔 자료 중에서 향약(鄕約)과 관련된 필사본 12책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갈암 선생의 향약 실시 정책과 관련이 깊은 귀중한 유일본(唯一本) 자료일 것이다.
갈암 선생이 태어난 곳은 경북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속칭 나라골의 자운정이고, 돌아가신 곳은 안동군 임하면 금소리 금양재사(錦陽齋舍)이다. 종택은 영해 나라골에 있다.
묘소는 작고한 이듬해인 1705년 1월 안동 금소리 금양 북쪽 기슭에 모셨으나 1706년 안동 남쪽 신사동 언덕으로 옮겼고, 1832년(순조32) 영해 서쪽 인량리 행정(杏亭) 사향(巳向) 언덕에 정부인과 합장했다. 신도비는 묘소 로 가는 길가에 있다.
유배지에서 풀려나 후진양성을 하다 돌아가신 안동 금소에는 초대 부통령 이시영의 글씨로 새겨진 갈암 선생 금양유허비가 서 있다. 갈암의 정자는 영양군 석보면 주남리에 남악정(南嶽亭)이 있다.
갈암은 도학적 경세가로서 퇴계 선생의 적전(嫡傳)이다. 그리고 그는 369 명의 제자를 둔 학파의 중심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가학(家學)으로 득력(得力)했다. 소년 시절 그는 부친 석계 이시명과 모친인 정부인(貞夫人) 안동 장씨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리고 여덟 살 많은 형인 존재 이휘일로부터 기초 교육을 충실하게 받았다. 이를 통해 퇴계 이황과 학봉 김성일을 거쳐 경당 장흥효로 이어진 영남 주리론(主理論)의 정맥(正脈)을 계승하게 된 것이다. 갈암의 부친인 석계 이시명이 경당 장흥효의 제자며 모친이 경당의 무남독녀 외딸이라는 인연이 있었다. 갈암의 학통은 이후 밀암 이재와 대산 이상정, 그리고 정재 유치명에서 다시 학봉의 종손인 서산 김흥락으로 이어져 조선의 망국을 맞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