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김씨 수곡 김주신
1661년 (현종2) -1721년 (경종1) 자 廈卿, 호 壽谷 또는 洗心齋, 시호 孝簡, 봉호는 慶恩府院君.
수곡 김주신은 생원(生員) 일진(一振)의 둘째아들로, 그의 둘째딸이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仁元王后)다.
어려서 부친을 잃고 숙부에게 글을 배웠으며, 이어서 당대의 대표적 재야 학자인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36세에 생원시에 합격했고 이듬해 봄 시험관이던 최석정(崔錫鼎)의 추천으로 벼슬에 나가 39세에 사헌부 감찰, 호조좌랑 등을 맡았다.
42세(숙종28, 1702년) 9월 딸이 숙종의 계비가 되고 돈녕부 도정, 돈녕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등을 지냈다. 사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그의 사후에 국왕들의 쉼 없이 이어진 '사제(賜祭)'가 주목된다.
이는 그가 세상을 떠난 직후에 단행된 왕대비(仁元王后)에 의한 왕세제(王世弟: 왕위를 이를 임금의 아우) 책봉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 왕세제가 후일의 영조이며 조선왕조의 왕통은 그렇게 이어졌다. 왕대비 자신은 슬하에 왕자를 두지 못했지만 영조를 세제로 옹립한 공이 부원군인 그에게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세의 완인(一世完人)’이란 관점에서 역대 국왕들이 격을 갖춰 추모하였으니 영조29년(1753) 국왕이 친히 제문을 지어 치제(致祭: 임금이 제물과 제문을 내려 죽은 공신을 제사지냄)한 이래 그것은 영조45· 47년, 정조5·12년 순조11·25년, 고종30년(1893)에 이어졌다. 불천위 중의 불천위에 해당하는 인물인 셈이다. 그런 분이 지금은 불천위 사당조차 없다.
수곡의 집은 원래 순화방(현재 서울시 중구 순화동) 대은암동(大隱巖洞) 연우궁(延祐宮) 곁에 있었다. 그 집의 양정재(養正齋)에서 인원왕후가 태어났다. 본래 있던 집은 누워서 보면 하늘의 별이 보였을 정도로 검소했고 그 규모도 단출했다.
부원군이 된 이후 숙종이 아주 넓은 집을 하사했는데 지금의 서울 종로구 조계사 터라고 한다.
경기도 고양에 있는 묘소는 손향(巽向)으로 모셔져 있다. 부원군의 묘소답게 격조가 있으며 절제된 느낌이다. 묘소는 묘비와 호석(護石: 묘소 봉분을 보호하기 위해 두른 돌)과 곡장(曲墻: 묘소를 보호할 목적으로 만든 담)으로 아담하게 꾸며져 있다.
묘비는 최규서(崔奎瑞)가 짓고 서명균(徐命均)이 글씨를 썼다. 폭 65cm, 높이 1m이다. 신도비는 국왕의 명을 받들어 이조판서 박종훈(朴宗熏)이 글을, 이조판서 김이교(金履喬)가 글씨를, 그리고 대제학 김조순(金祖淳)이 전자(篆字)를 써서 순조26년(1826)에 건립했다. 폭 96cm, 높이 2m53cm 다.
시대 앞서간 행정가… 지방인재 발탁 건의 수곡은 1690년(숙종16) 섣달 그믐날 숭례문에 나갔다가 민간에서 농사짓는 소를 잡고 있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는 좌의정이 매년 섣달 삼일 전부터 백성들에게 설을 쇠는데 도움을 주고자 도축 금지를 일시 해제해서 그러하다는 말을 듣고 잘못된 정책을 지적한 글을 지었다. 그는 '재상은 독서를 한 사람으로 임명해야 한다(古人以爲宰相 須用讀書人 於今尤覺其爲確論也)'고 좌의정의 무지함을 통렬히 질타했다. 문집 9권에는 거가기문(居家記文)이란 글이 있다. '집에 있으면서 적어본 가벼운 글'이라는 뜻이다. 그는 여기서 지방 관찰사를 좀 더 비중 있는 인물로 선발해 보내야 함을 역설했다. 팔도의 관찰사는 종2품직이다. 그런데 수곡은 이전 조정에서는 정2품직 이상의 능력 있는 고위 관료를 파견해 지방을 중시했음을 상기시켰다. 그는 근세에 경기, 평안, 함경 등 3도에는 높은 직급의 관리를 파견하면서 상대적으로 그 규모가 큰 전라도와 경상도에 이제 막 정3품 상상관이 된 인사를 파견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생원과 진사시에 합격한 이들이 예전에는 영남 출신자가 많았는데 근자에는 그렇지 못한 점을 예로 들어 서울과 지방을 동일시하고 사정에 의해 과거시험으로 등용되지 못한 지방인재를 적극 발탁하는 정책을 펼 것을 주문했다. 그의 문집인 수곡집(壽谷集) 권1에 보면 장설(葬說)이라는 특이한 글이 실려 있다. 그는 자신이 풍수설에 정통하지 않았지만 풍수가들의 주장에 현혹되어 묘소를 통해 복을 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선령(先靈)을 편안히 모시겠다는 정성이 우선이며 화복(禍福)의 유무는 논할 것이 없고 나라에서 법으로 금한 곳을 피하되 토질이 좋고 잡인들이 함부로 범하지 못할 장소에 묘소를 쓰고 그 뒤 잘 관리만 하면 족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명당을 찾아 재산을 탕진하기까지 하는 일부 권세가의 욕심과 산소로 인해 야기되었던 무수한 시비를 생각하면 그의 견해는 실로 선진적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사람은 모름지기 침착하고 평상심을 유지하여 마치 물속에 있는 반석과 같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경솔하게 행동하면 몸에 가장 해롭다"라는 가르침을 남겼다. 격변의 숙종 시대를 살면서도 화란(禍亂)에 휩싸이지 않은 것은 이 같은 평소의 수양 철학으로 득력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음운(音韻)은 넓고 길 뿐더러 맑고 마치 옥을 치듯 구슬을 굴리듯 하였다"는 기록도 보인다. 글 읽은 소리는 청아했고 또한 사서, 소학, 그리고 성리학 책, 주역 등이 자신의 주요 독서 목록에 올라 있음을 볼 때 그가 늘 읽었던 책도 과거시험을 대비한 게 아니라 수신(修身)과 관련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