姓氏의 원류를 찾아서 종가기행 ⑨ - 13대 종손 이원흥 씨. 지방·축문 쓰면서 익힌 붓글씨, 이젠 선조 문집도 필사
퇴계 이황 선생의 학문적 전통을 이어받아 17세기에 영남 지역을 대표했던 대학자였던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1627-1704) 선생.
갈암은 문과에 급제한 분이 아니다. 그럼에도 조정의 부름을 받아 이조판서에까지 이른 데는 그의 인품과 학자적 위상이 얼마나 높았는지 알 수 있다. 갈암이 당쟁에 휘말려 학문적 업적이 폄하되고 정치적 핍박을 받았지만 그 종가의 위상은 오랫동안 실로 당당했다.
갈암 선생의 12대 종손은 이원흥(李元興, 1945년생) 씨다. 그가 사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이매동 삼성아파트를 찾아가 만났다.
갈암 종택은 본래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광덕리에 있었고 임하댐 건설 때 간접 수몰지역에 속해 1993년 5월 30일 영해 나라골로 옮겨 지었다. 그나마 1991년에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이건될 수 있었다.
사실 퇴락한 갈암의 종택을 두고도 종가의 물력(物力)으로는 중건이나 이건 모두 엄두를 내지 못했던 터수였다. 당시의 종손은 이원흥 씨의 부친인 이병주(李秉周, 1922-2001) 씨였다.
종손의 외가는 경북 선산에 대대로 살아온 파평 윤씨, 진외가(陳外家: 아버지의 외가)는 영양 남씨로 속칭 영해 ‘호지마을 남씨’라는 집이다. 그리고 외외가(外外家: 어머니의 외가)는 명문 인동 장씨 남산파(南山派)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 집이다.
종부 김호진(金鎬珍, 1948년생) 여사는 의성 김씨 봉화 해저리 팔오헌(八吾軒) 종가에서 왔다. 팔오헌 김성구(金聲九)는 봉화 해저리(속칭 바래미)를 대표하는 인물로 조선 후기 정치가요 학자다.
김 여사는 종가에서 자라 더 큰 종가로 시집와 종부가 됐다. 지난 9일 문화재청에서 주선해 서울 중구 필동 ‘한국의 집’에서 열린 전국 38개 명문가 종부 모임에 참석해 단아한 모습으로 찍힌 사진이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종손이 걸어온 삶은 갈암 선생이 겪었을 고초를 생각나게 한다. 당당했던 갈암 종가는 한국전쟁을 전후해 조부의 사거(死去)와 부친의 월북으로 급격히 가세가 기울었다. 월북한 부친과 생이별한 종손의 당시 나이는 여섯 살이었다.
종손은 어머니를 따라 외가인 경북 선산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 4학년 때 서울 성북동 삼선교 부근으로 이사해 돈암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웃한 동성중학교로 진학했다.
그런데 동성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아버지가 북에서 내려와 체포되었다는 이야기를 소문으로 들었고 마침내 그것은 현실로 나타났다. 부친의 재판과 이후 15년 동안 계속된 옥바라지로 모친은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었다고 한다.
종택까지 못가고 지방 써서 제사 모셔
종손은 서울에서 영어(囹圄)의 몸으로 있는 부친을 대신해 불천위는 물론 선대 기제사에 울음을 삼키며 잔을 올렸다. 당시 경북 청송 진보에 있던 종택까지 가지 못해 부득이 지방을 써서 제사를 모셨다.
하늘 같이 의지했던 모친마저 종손이 22세 때 46세를 일기로 삶을 마쳤다. 어려운 도회 생활에 종가의 많은 제사와 남편의 옥바라지까지 감내해야 했던 모친의 삶이 어떠했을까는 종손의 말을 듣지 않아도 눈에 선하다. 한복을 단아하게 입는 종손의 속내를 알고도 남음이 있다.
운명적으로 소년 시절부터 종손의 역할을 대행했던 이원흥 씨의 부친도 남북분단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인 2001년 보종(保宗)의 중책을 맏아들에 다시 맡긴 채 세상을 떠났다.
제사 때 지방과 축문을 쓰면서 붓을 잡기 시작한 종손의 붓글씨는 이제는 조상의 문집을 필사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뿐 아니라 일견 달필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범상치 않다. ‘가학(家學)의 전통’은 허명이 아님을 생각케 한다.
“이제 남은 생애엔 선조 문집을 붓글씨로 쓸 생각입니다. 문집을 써보니까 글 내용이 너무 좋아요.” 안동한지에서 특별 제작한 책에다 기약이 없을 듯한 필역(筆役)을 시작한 종손의 모습에서 영남 명가들의 정신과 재령 이씨의 고집을 함께 읽을 수 있었다.
소위 안동의 양반 출신이라고 하면 페미니스트의 욕을 먹는 고답적인 모습을 떠올릴지 모른다. 그러나 실상은 좀 다르며, 갈암 종손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저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손수 밥을 해먹었어요.” 종손은 힘들었던 시절을 회상한다.
그는 동성중학교를 졸업한 뒤 선린상고에 진학했다. 당시 인문계 고교에 가지 못할 정도로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상고를 졸업한 후에는 군대에 입대했다. 그는 1사단에 복무하던 중 월남전 파견을 자원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자칫하면 종통이 끊길 수도 있는 아찔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종손은 무사히 제대하였고 갈암 종가의 맥은 이어졌다. 종손은 낙향해 청송군청에서 일하다 도중에 퇴직한 뒤 서울로 올라와 사업을 했고 38세 때 삼보컴퓨터에 입사했다. 과장과 부? 관리본부장을 거쳐 나래이동통신으로 옮겼고 관리 이사와 농구단 단장을 역임했다. 1999년 TG삼보계열사인 나래DNC 사장과 삼보물류 사장 등을 역임한 뒤 퇴직했다.
자신도 형제이면서 아들만 둘 둔 종손은 어릴 적 몸이 유난히도 약했던 자신을 떠올려 아들의 이름을 튼튼하라는 의미로 ‘대견(大堅, 1973년
생)’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차종손은 현재 포항공대 생명공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종가라서 결혼시키기가 어렵다는 말을 하던 종손에게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끼던 뿌리회(명문가 후예 친목단체, 2004년 창립, 회장 이용규 )의 회원 한 분과 오간 혼담이 이제 성사 단계에 이르렀다 한다.
묘한 것은, 신부될 사람의 집안이 갈암 선생이 최초로 율곡 선생의 이론적 잘못을 지적했고 이후 지속적인 학통 상의 대립관계를 이루었던 덕수 이씨 문중이라는 점이다.
주역(周易)에 정통했던 갈암이 남긴 “인간 만사는 미리 정해지지 않은 것이 없다”는 말을 상기하면 예전에 없었던 갈암 종가와 덕수 이씨와의 혼담은 또한 그렇게 미리 정해진 것은 아니었을까? 인연이라면 그것도 질긴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자긍심 지키면 산 조상들의 정신 이어가
종손이 살고 있는 분당 아파트 거실 벽에는 갈암 선생께서 9세 때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는 화왕시(花王詩)가 서예가 고성인(固城人) 유천(攸川) 이동익(李東益) 씨의 글씨로 표구되어 있다. 그리고 또 한 편의 시는 갈암이 78세로 돌아가셨던 해인1604년 8월 4일에 지은 절필시(絶筆詩)로 고성인(固城人) 운산(雲山) 이청림(李靑林)이라는 서예가의 글씨로 표구되어 있다.
두 편의 시는 초년의 거칠 것 없었던 기상과 말년의 완숙한 도학군자(道學君子)로서의 인격체를 동시에 보여주는 작품이다. 처음과 끝인 셈이다. 갈암의 삶은 이 시들로도 정리될 수 있다.
그리고 또 한 점의 표구는 갈암이 성균관 좨주(祭酒)로 임명된 교지이다. 성균관 좨주는 직급상으로는 선생의 최고위직이었던 이조판서와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이조판서 교지를 걸지 않고 이를 택한 것은 영남 지방에 면면이 내려오고 있는 산림(山林)의 영수(領袖)로서의 직책이 지니는 상징 때문으로 해석된다. 벼슬보다는 명예에 대한 자긍심이 더 큰 것이었다.
不魚階壇上
紛紛百花開
何花爲丞相
(봄바람에 모란이 피어
말 없이 계단 위에 있네
많고 많은 봄꽃들이여
어느 꽃이 승상이 될까?)
草草人間世
居然八十年
平生何所事
要不愧皇天
(덧없는 인간 세상이여
어느덧 팔십 평생일세
내 평생 한 일 무엇이던가?
하늘에 부끄럼 없고자 했네.)
절필시는 선생께서 평생 애썼던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해준다. 아주 길죽한 대형 현판형 작품인 절필시 휘호는 특이하게도 잔 글자로 써 나가다 ‘불괴황천(不愧皇天)’이란 마지막 네 글자만 특이하게 대자로 강조했다. 말 그대로 ‘대서특필(大書特筆)’이다. 서예가 역시 이 시의 진의를 확실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삼보컴퓨터 외빈 접견실에 걸려 있던 것을 종손이 가져왔다는데, 작품이 제자리를 온전하게 찾았다는 느낌이다. 접견실에서 갈암의 고조부 이래 종손인 이용태 회장이 이 작품을 보고 가졌을 감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갈암 선생의 글씨는 얼마간 독특하다. 특히 유배기에 쓴 편지나 시고(詩稿)는 종이마저 좋지 않아 눈에 쉽게 들어온다.
갈암 후손들은 사랑방에서 우스개로 “글씨를 못쓴 것을 보니 우리 할배 글씨가 맞네”라고 말할 정도라고 했다. 그러나 유배지에서 주역 고경(古經)을 손수 베껴 썼고 존주록(尊周錄)을 편찬하는 등 수많은 서사(書寫)와 저술을 남겼던 분이라 글씨 역시 격조가 있었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도둑을 일곱 번이나 맞았던 종가에 남은 자료가 부족한 것이 못내 아쉽다.
갈암의 문집은 셋째아들 밀암(密庵) 이재(李栽)에 의해 초창기부터 수습되었다. 문집은 갈암이 안동 금소리에서 세상을 떠나자 상중에 유문을 수습하여 동지들과 교감했다. 이 일에는 창설재 권두경, 눌은 이광정 등 이 지역을 대표하던 학자들이 참여했다. 그러나 본집 15책, 별집 2책으로 정리된 문집을 발간하지 못하고 밀암은 세상을 떠났다. 이어 1732년(영조8) 제자인 제산 김성탁이 재차 교정을 하였고 사후 100년이 지난 1810년께 영해에서 후손에 의해 처음으로 80질 가량을 간행되었다. 그러나 죄인으로 신원(伸寃) 되지 않은 이의 문집을 사사로이 간행했다는 이유로 책과 책판은 관아에 수거되어 태워졌고 간행에 관련된 이들은 유배당했다. 후손 반와(盤窩) 이광진(李光振, 1751-1833)도 3년간 섬에 유배되었고 초간본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다. 205수의 시와 소, 차, 헌의 등이 138편, 편지 360편 등이 실려 있다. 1909년(순종3) 증보 간행되어 오늘에 전해지고 있다. 원집 29권, 별집6권, 부록 5권, 합 21책 규모다. 갈암집은 2004년까지 민족문화추진회에서 완역해 전 7책으로 간행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