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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종가기행 16] 原州 元氏 - 가풍에 스민 무인의 기백… 잘 가꾼 종택은 너무도 고즈넉

회기로 2011. 2. 28. 21:14
[종가기행 16] 原州 元氏 - 가풍에 스민 무인의 기백… 잘 가꾼 종택은 너무도 고즈넉
[주간한국 2006-09-04 09:51]    

13대 종손 원덕연(元悳淵)씨, 큰 아들 집서 종가 제사… 불천위 제사 6·25나며 조부가 없애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장암1리 319번지. 이곳은 원주 원씨를 대표하는 원평부원군(原平府院君) 원두표(元斗杓)의 종택이 자리잡고 있다.

빨간색 양기와에 토종 소나무 몇 그루가 수석 사이로 서 있고, 정원에는 연못과 푸른 잔디가 펼쳐져 있었다. 전문 정원관리 사의 손길이 곳곳에 닿았다는 느낌이다. 이 전원주택이 조선 후기 인조반정 공신이며 속칭 ‘도끼 정승’이라 불린 원두표의 종택이라는 사실은 다소 의외였다.

13대 종손 원덕연(元悳淵, 1943년 생) 씨가 낙향해 새로 지은 전원주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예단은 종손을 만난 뒤 이내 깨졌다. 그곳은 400년을 면면이 이어오는 원주 원씨의 터전이라는 것. 오랜 세월을 견뎌왔다고 보기에는 집의 외관이 깔끔해 잠시 오해를 한 터.

원래 종택은 솟을대문에 사당채와 안채, 행랑채로 구성된 당당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종손의 조부인 원도희(元道喜, 15대 종손) 씨는 평생 한학에 몰두한 유학자였다. 성균관에 관여하셨고 16세 때 궁궐에서 축문을 읽었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지녔던 어른이다. 종중에서도 신망이 두터웠다. 그러나 재테크에는 문외한이라 가세는 점점 기울어 갔다.

종손의 부친 원종갑(元鍾甲, 1951년 작고) 씨는 일본에 유학해 이 지역에서 교편을 잡았다. 삼촌인 원종극(元鍾極) 씨는 육사9기 출신으로 중령으로 예편해 문중일과 개인 사업에 전념했다.

오늘날 종가의 버팀목은 숙부인 원종극씨다. 퇴락한 구가를 헐고 이 집을 지은 이도 다름 아닌 종손의 숙부였다. 그는 서울대학교 공과대에 4학년까지 다니다가 뒤늦게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했다. 보통 시골 집안에서 서울대학교에 진학하면 주변에서 부러워했지만 이 종가에서는 그를 무(武)의 길로 들어서게 한 것이다. 분명 상식적인 선택은 아니다.

육사 출신 숙부가 종택 복원

그러나 알고 보면 이는 가풍(家風)에서 연유한다.

원두표의 조부인 원호(元豪, 1533-1592)와 부친인 원계군(元溪君) 원유남(元裕男)은 무과에 급제해 모두 큰 공을 세운 무신이었고, 원두표 자신에게도 무신의 피가 도도하게 흘렀다.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 안동 김씨 농암 김창협의 아들)은 그의 삶을 한마디로 ‘엄엄충익(嚴嚴忠翼), 유문유무(有文有武)’이라고 노래했는데, 이는 ‘위엄이 있으신 충익공이시여, 문(文)과 무(武)를 모두 잘 갖추셨습니다’라는 의미다.

인조반정 전야에 주도세력들이 까닭 모를 불안감으로 주저할 때 그는 즉시 결행을 주창했고, 성문이 잠겨 좌절할 때 손수 도끼를 들어 문을 부수고 진격했으며, 23년 선배요 당당한 반정 1등공신인 김류(1571-1648)에게조차도 거리낌 없이 대한 무인다운 기백이 지녔다. 그런 기백의 유전자가 다시 종손의 작은아버지에게서 나타난 것이 아닐까.

여느 종가가 그러하듯이 당당하던 이 집도 일제 강점기 쇠락의 길을 걸었다. 집은 퇴락했고 남은 전답은 황폐해졌다. 게다가 유학을 숭상한 종손의 조부는 돈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많은 조상을 현양하기 위한 일로 그나마 있던 재산조차 보전하지 못했다. 친일 인사의 꼬임에도 빠져 상당한 재산상 손실도 입었다. 그러한 경제적 어려움을 목도한 종손의 부친은 진작 신학에서 돌파구를 찾고자 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일본 유학이었다.

종가의 거실은 잘 정돈되어 있었다. 널찍한

공간 정면에 ‘탄수재’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조상의 일생을 기록한 여러 폭의 한문 병풍이 가지런하게 펼쳐져 있다. 집의 외양과는 사뭇 다른 종가다운 격이 느껴진다.

‘탄수재’란 원두표의 호(號)다. ‘탄수’라는 호는 광주 이씨(廣州李氏) 이연경(李延慶)이 대표적인데 그는 영의정을 지낸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의 장인이다. 원두표의 경우는 탄수 호보다는 인조 반정공신 원평부원군이나 정승을 지낸 이로 더 알려져 있다. 이는 그의 문집이 남아 있지 않고, 학문적인 연원이 전승되지 못한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병풍과 서예 작품들에 ‘탄운(灘雲) 원종극(元鍾極)’이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종손의 숙부다.

원두표는 무인다운 기백이 세상에 알려진 탓인지 문신으로서의 면모는 가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좌의정까지 오르며 당시의 저명한 학자인 잠야(潛冶) 박지계(朴知誡, 1573-1635, 동몽선습을 지은 박세무의 손자)의 문인이라는 학통도 있다. 그가 전라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주자대전(朱子大全)을 간행해 왕에게 올렸다는 알려지지 않은 사실도 있다. 학문의 바탕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문과 무를 겸비했다는 평을 들은 것이다.

종손은 서울 광희중학교와 성동공고를 졸업한 뒤 한양대학교 공대를 중퇴했다. 자신이 공부를 못했서라고 말했지만, 이는 아마도 다단했던 종가의 사정과도 관련이 있는 듯하다.

군대 제대 후 건설회사(고려개발)에 다녔고 결혼한 뒤(부인은 경기도 안성 출신 김해 김씨, 1947년 생) 종택을 지켜야 했기에 개인 사업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업이 여의치 않아 다시 직장생활을 한 후 7년 전 퇴직했다. 종손의 외가는 서울이며,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 진외가는 경주 김씨, 외외가는 양평의 박씨라고만 했다.

종가 찾는 이에게 가양주 대접

아들만 둘 둔 종손은 안성에 사는 장남의 집에서 종가 제사를 모신다고 한다. 불천위 제사를 모시지 않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 묻자, “한국전쟁 전까지는 불천위 제사를 지냈는데, 할아버지가 없앴습니다. 불천위 사당도 유지하지 못했고요”라고 안타까움을 털어놓는다.

종손은 2년 전 혈압으로 쓰러진 뒤 건강에 조심해 이제는 많이 회복됐다. 술은 입에도 대지 못하지만 의외로 많은 가양주를 진열해두고 있다. 종가를 찾아오는 이들에게 즐겨 내기 위함인 듯한데, 이는 종손의 순수하고 넉넉한 이미지와도 맞아 떨어진다.

선대 묘소는 잔디며 봉분, 석물들이 잘 꾸며져 있다. 퇴직 이후 종가와 묘소를 지극정성으로 돌본 때문이란다. “제가 그 넓은 묘역을 일 년에 세 번씩 벌초를 합니다. 일일이 손으로 뽑지요.”

종손의 말을 듣고 보니 지금 잡초 한 포기 없이 말끔한 묘역의 잔디가 왜 그렇게 단정한지 짐작이 간다.

종택이 있는 장암1리는 마을 뒷산에 선대의 묘소와 의물(儀物)들이 가지런하게 있고 동족부락으로 모듬살이를 하고 있는 전통마을이다. 마을에서는 종가를 ‘큰댁’이라고 부르며 지금은 한창 때의 절반도 안 되지만 아직도 30호 이상이 살고 있다 한다. 원주 원씨 시중공계(侍中公系)의 재사인 소산사(蘇山祠)가 마을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출처 : 나의 사랑 한국한문학
글쓴이 : 인간사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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