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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平海 黃氏 - 종택에 칠순 노모만 쓸쓸히… "저도 이제 고향으로 가야죠"

회기로 2011. 2. 28. 21:13
平海 黃氏 - 종택에 칠순 노모만 쓸쓸히… "저도 이제 고향으로 가야죠"
[주간한국 2006-08-21 08:21]    

姓氏의 원류를 찾아서 종가기행 ⑮
16대 종손 황재천(黃載天)씨, 분당서 학원운영하며 선현 잠언 등 교육… 낙향 채비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선생의 종택은 예로부터 십승지로 이름난 경북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에 있다.

십승지란 조선 시대 민간예언서 <정감록>에 나타난 ‘전쟁 등 국난이 있을 시 숨어야 할 안전한 피난처 10곳’으로 보은의 속리산, 안동의 화산, 남원의 운봉, 부안의 호안, 무주의 무풍, 영월, 예천, 계룡산, 합천의 가야산, 풍기의 금계촌을 말한다.

금계리는 십승지의 명성 외에 황준량 선생의 종택과 선생께서 노니시던 명승으로도 이름났으니 이 지역 출신의 어떤 이는 중·고등학교 6년 동안 12번 소풍을 떠났는데 그중 9번을 금선정(錦仙亭) 계곡으로 갔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금선정은 바로 금계 선생이 자연과 벗하며 노니셨던 유서 깊은 곳이다. 금선정, 우선 그 이름부터 멋스럽다. 금선정이란 정자는 금계가 생존한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아름다운 계곡의 풍광을 감상하던 널찍한 대(臺)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선생은 평생을 벼슬보다는 자연을 벗삼아 스승을 따라 학문하며 후진을 양성하려는 생각을 지녔던 선비였다. 그의 처조부인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의 어부가(漁父歌)라는 가사는 어쩌면 금계가 가장 참맛을 아는 독자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깨끗한 속내를 지녔던 분이었다.

문과에 급제해 입신양명의 길이 열렸지만 청빈한 선비의 삶을 지향한 그에게 재물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래서 공부에 몰두할 아담한 집을 평생 동안 꿈꾸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는 스승이나 후임 풍기군수들 모두 애석해 마지않았던 사실이기도 하다. 금계 사후에 그 꿈이 이루어졌으니 금선대 위의 금선정과 산 속의 금양정사(錦陽精舍)가 바로 그곳이다.

금계를 기리며 후학들이 공부했던 배움터인 금양정사는 총애했지만 일찍이 세상을 떠난 제자를 기린 퇴계 선생의 관심과 교시, 그리고 동문수학한 후배인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 1539-1601, 서애 류성룡의 맏형)에 의해 오늘날의 규모로 완성되고 의미가 부여됐다.

퇴계와 겸암이 각각 지은 금양정사 완호기문(完護記文)에 보면 금계는 천신만고 끝에 정자 건축을 시작해 완공을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성주목사 직을 그만두고 귀향을 결심한 배경에는 정자 완성과도 관련이 있었다고 한다.

퇴계는 당시 풍기군수 조완벽(趙完璧)에게 부탁해 이 정자에 대해 면역의 혜택을 주고 아울러 이곳을 후학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로부터 29년 뒤 이러한 퇴계 스승의 교시를 이어받은 후임 풍기군수 류운룡은 “이 정자를 황폐하게 만든다면 이는 수령은 물론 온 고을 사군자(士君子)들의 수치이다”라고 전제한 뒤 퇴계 선생의 기문과 군수 조완벽의 결정문을 지역의 향사당(鄕射堂) 벽에 걸어 영구히 따를 것을 강조했다.

그런데 금계의 혼이 배어있는 유서 깊은 금양정사가 지금은 잊혀진 채 쇠락해 가고 있다. 몇 개의 현판만 남아 있을 뿐 많은 자료가 도난당했고, 큰 화재마저 겪었다. 마을에 아직도 의식 있는 사군자가 있다면 의당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겠지만 현실은 어찌 그러랴. 문중과 지역 유지와 지식인들이 금양정사의 옛 모습과 역할을 되살려야 할

것이다. 그 역사성으로 인해 근자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하기로 했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이제 건물 퇴락에 대한 걱정의 절반은 던 셈이다.

마을로 들어서자 금선정 옆에 양기와를 올린 집 마당 중심에 은행나무 노거수 한 그루가 서 있고 그 뒤로 골기와가 얹힌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예상대로 그곳은 금계 선생의 종택이었다.

종택에는 퇴계 제자 백암(栢巖) 김륵(1540-1616)의 후손인 노종부 선성 김씨 김옥남(金玉男, 1935년생) 여사가 거주하고 있었다. 사당 수호는 종손의 의무이지만 생계에 쫓기다 보면 그렇지도 못하는 게 현실인지라 모친인 선성 김씨가 홀로 이 넓은 집을 지키고 있다.

노종부의 사랑어른이었던 황봉섭(黃鳳燮, 1929년생, 1982년 몰) 씨는 조선 시대 그 지역의 마지막 급제자로 명망이 높았던 금주(錦洲) 황헌에게 사사해 조선 선비의 맥을 이었던 이다. 평생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사는 것을 신조로 생활했지만 어려운 종가 살림에 봉제사와 접빈객으로 고단한 삶을 살았다.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현 16대 종손 황재천(黃載天, 1957년생) 씨는 ‘금계 선생의 후손으로 부끄럽지 않게 살라’는 선친의 가르침에 따라 풍기 북부초등학교, 금계중학교를 거쳐 청운의 뜻을 품고 서울로 유학해 국민대학교 행정학과에 진학했으며 행정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사회로 나온 종손은 대학에서 강의도 하였으며 대기업 기획실과 통신회사의 간부를 역임한 뒤 현재는 경기도 분당에서 독서·논술 학원(점핑스쿨)을 운영하고 있다.

번화가 빌딩에 입주해있는 학원을 찾았을 때 원장실 벽에 걸어둔 퇴계 선생의 교육 잠언(箴言)이 먼저 눈에 번쩍 들어왔다. 그도 어쩔 수 없이 영남의 명문가 종손이구나 라는 생각을 들게 했다. 그런 느낌은 인터뷰를 하면서 더했는데, 차분한 설명과 함께 고향의 노모와 사당을 지금처럼 두어서는 안 되겠기에 조만간 낙향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 때문이었다. 30여 년 동안 산 위의 금양정사에 거처한 종손에게 고향과 금양정사가 지니는 의미는 각별하다.

종손은 학생들을 지도할 때 ‘선현들의 교육 잠언’을 많이 인용한다고 한다. 선현의 지혜는 그냥 간직해서는 안 되고 디지털시대에 오히려 참된 삶의 방향을 알려줄 나침반으로 적극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생들이 성적뿐만 아니라 가정과 학교 생활에서도 우등생으로 커가는 것을 보면서 가르치는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

만난 지 며칠 뒤 종손으로부터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점심 식사라도 같이 하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사업 관계로 잡힌 선약으로 점심을 같이하자는 말도 꺼내지 못했다고 미안해 했다. 이런 따뜻한 심성으로 보아 머지않아 금선정 계곡의 물소리를 듣고 울울창창한 소나무를 벗하며 종손으로 맑게 살아갈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독성현서(讀聖賢書) 열친척화(悅親戚話)’ 성현의 좋은 글을 읽고 친척 간에 즐겁게 이야기하는 삶을 살아갈 그런 청복(淸福)을 누리길 빌었다.

출처 : 나의 사랑 한국한문학
글쓴이 : 인간사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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