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평부원군 원두표 1593년(선조26)-1664년(현종5) 자는 자건(子建) 호는 탄수, 인조반정 정사공신(靖社功臣) 원평부원군(原平府院君), 시호는 충익(忠翼)
조선 왕조 현종실록은 실록과 함께 개정 실록이 있다. 이는 사실(史實)을 기록함에 있어서 현격한 관점의 차이가 있고, 별도의 실록을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을 정도로 첨예하게 대립됐음을 뜻한다.
다시 말해 개정 실록이 있다는 것은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 그 평가가 상반됨을 의미한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원두표다.
원두표는 인조와 효종, 현종 3대에 걸쳐 벼슬하면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그는 출발부터 소위 졸병이기를 거부했다. 그의 자긍심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우선 그에게는 나라에 공을 세운 자손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조부인 원호는 무과에 급제한 뒤 경원부사가 되어 야인들을 소탕했고 전라도 수군절도사가 되어서는 임진왜란 직전 왜구들을 물리쳤을 뿐 아니라 임진왜란 초기 여주목사 겸 강원도 조방장으로 향병을 소집하여 여주 신륵사 부근 등지에서 왜군을 물리친 전공도 세웠다. 뒤에 금화전투에서 분전하다 중과부적으로 절박한 지경에 달하자 천길 절벽에서 몸을 던져 순사(殉死)했다.
부친인 원유남은 무과에 두 번이나 급제한 뒤 권율 장군의 휘하에서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 때는 분의복수군의 장령(將領)으로 활약했다. 또한 아들과 함께 인조반정에 참여해 정사공신 3등에 책록되기도 했다. 충신과 공신을 겸한 혁혁한 집안이라는 자긍심이 당당함으로 드러나지 않았나 싶다.
원두표의 출신을 보면 놀랍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는 유생으로 인조반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이후 생원이나 진사, 문과를 거치지 않았고 마침내 지방 관료를 거쳐 좌의정에까지 이르렀다. 입지전적이다.
대동법 시행에 따른 견해차로 영의정 김육(金堉)이 당시 호조판서 직에 있던 원두표의 교체를 주청한 자리에서 효종이 외려 "이 사람이 자못 지려가 있기 때문에 대임을 구하기 어려워 오래도록 재임시켰다"라고 평했다. '지려(智慮)'란 사리를 꿰뚫어야 하고 추진력, 과단성을 갖추어야 가능한 경지다. 인조반정 초기의 난관과 이괄(李适)의 난을 진압한 것 모두 이 지려로 뚫은 것이다.
원두표는 말년에 현재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고산 윤선도의 직격탄을 맞는다. 예조참의 직에 있던 윤선도는 "원두표는 재주는 많으나 덕이 적고 이득을 좋아하고 의리가 없으며, 사납고 교활하며, 호악하게 화심(禍心)을 감추고 있으므로.....전하께서는 빨리 원두표를 먼 지방에서 한가롭게 살도록 해야 합니다."라는 상소를 올린다. 최악의 평이요 공격이었다.
천하의 원두표도 이제 저무는구나 라고 기대했던 이들에게는 경악할 장면이 이후 벌어졌다. 국왕은 거꾸로 "상소한 사연이 매우 해괴하고 경망하여 버려둘 수 없으니, 본직책에서 교체하라"라 명했다. 비난은 부메랑이 되어 당사자에 대한 인책(削職)으로 되돌아 온 것이다. 그 뿐이랴, 윤선도는 이 일로 유배까지 갔으며 '흉인(兇人)'으로 낙인까지 찍혔다.
이에 앞서 효종1년에도 대사헌 용주 조경 등이 당시 호조판서 직에 있던 그는 공격했다. 내용은 홍두표 자신이 붕당을 지었는데 오히려 교묘하게 붕당의 폐해를 지적하고 그 해결방안을 진달(進達)했으니 이는 주상을 기망(欺罔)한 것이라는 것이 요지였다.
이에 대해 임금은
"원두표는 공로가 있는 구신(舊臣)인데 어찌 그럴 리가 있느냐"고 두둔했다. 전폭적인 지지요 믿음이다. 국왕의 신뢰는 그가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극점에 이르렀다. 부음이 들리자 효종은 매우 슬퍼하며 자신의 옷을 벗어서 그에게 염(斂)을 했을 뿐 아니라 각 전(殿)에도 별도로 부의를 내리고 예관을 파견해 치제하게 했다.
원두표는 슬하에 3남1녀를 두었고 측실에서 4남을 두었다.
전라도 관찰사에 부임한 그는 주자대전이라는 방대학 성리학 이론 기본서 간행을 계획하고 완성해 나라에 올렸다. 그는 이 일에 대해, "주자께서 북송이 망해 남쪽으로 온 이후 시대와 상황에 대해 아파하고 분해하며, 그 임금을 위해 오랑캐를 물리치고 어질고 어질지 못한 이에 대한 분별하는 법을 아뢰었습니다. 돌아보면 그 당시는 우리 나라의 현 상황과 비슷합니다. 송나라는 주자의 말씀을 채용하지 않아 망했습니다. 뒷날 오늘을 보는 것이 오늘에 옛날을 보는 것처럼 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기시여금상근(其時與今相近)'이란 역사를 보는 눈이 없다면 불가능한 표현이다. 그는 이러한 역사적 관점을 가지고 부국 강병을 위해 실천했다. 지방 관료로 나아가서는 임란 이후의 군비 점검과 성곽 정비에 주력한 것이 그 예이다. 그리고 그 진정성에 대해 많은 비판은 받았으나 수차에 걸쳐 상소를 통해 붕당정치(朋黨政治)의 폐해와 그 해결방안에 대해 견해를 밝혔다. 그의 집안은 혁혁하다. 조부와 부친이 무과에 급제해 공을 세웠고 둘째아들인 원만리(元萬里)는 문과에 급제해 당시 선망하던 홍문록(弘文錄, 홍문관 후보로 결정된 사람을 기록한 책)에 올랐다. 원만석과 원만리 두 형제는 관찰사에 이르렀다. 그리고 손자인 원몽린(元夢麟)은 효종의 딸인 숙경공주(淑敬公主)에게 장가들어 흥평군(興平君)이 되었고, 증손자 원명구(元命龜)는 목사를 지냈다. 그리고 그의 현손인 원경하(元景夏)는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판돈녕부사로 치사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는 탕평책을 적극 주청해 실천했다. 그리고 그 아들인 원인손(元仁孫)은 판서를 지냈는데, 흥미롭게도 야사에 보면 조선시대 투전계(投錢系)의 전설적인 고수로 알려져 있다. 부친인 원경하가 '이 아이는 하늘이 낸 솜씨'라고 감탄했을 정도의 내공이었다니 달리 설명이 필요치 않다. 원두표의 사위는 전주 이씨 이민서(李敏敍, 1633-1688, 우참찬 역임)로 그의 두 아들인 이관명(李觀命)과 이건명(李健命,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이 모두 좌의정에 올랐다. 이민서의 사위는 영의정을 지낸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의 아들인 남학명(南鶴鳴, )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