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姓氏의 원류를 찾아서 종가기행 17]
16대 종손 류장희(柳長熙)씨, 신도비따라 경북 봉화에서 여주로 이주, 서예에 깊은 조예
경기도 여주군 가남면 대신2리 456번지에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 교육자인 진일재(眞一齋) 류숭조(柳崇祖) 선생의 종손이 사는 집이 있고, 인접한 곳에 진일재와 그의 부친 그리고 아들의 묘소가 있다.
진일재 선생의 16대 종손은 류장희(柳長熙, 1933년 생)씨다. 종손이 사는 집을 종가라고 부를 수 있지만 이곳은 원래 묘소를 지키기 위한 집이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종가는 아니다.
그렇다고 하여 종손이 우거하고 있는 이곳 여주 지역이 종손에게 아주 타관은 아니다. 진일재 선생의 선대부터 인연이 있었던 곳이다. 선대 묘소도 조성되었고 위토(位土, 문중 제사 등의 경비를 충당하기 마련한 땅)도 상당히 남아 있다. 진일재의 유배지인 원주와도 그리 멀지 않다.
원래 종택은 경북 봉화 읍내인 솔안(松內)이라는 곳에 퇴락한 형태로 남아 있다. 종손 역시 선대들이 그랬던 것처럼 봉화와 여주를 오가며 묘소를 지켰다. 그러나 봉화에 남은 터전은 그렇게 넓지 않다. 그것조차 선친인 류기수(柳麒秀, 15대 종손) 씨가 여주 땅 일부를 팔아 억지로 마련한 것이니 비옥할 턱이 없다.
종손은 공직생활을 한 선친을 따라 봉화와 안동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이후 봉화고등학교를 졸업하고 家學을 전수했다. 결혼은 안동의 명문인 재령 이씨 고재 이만 선생의 종녀와 했다.
종손은 첫인상이 영락없는 농부라는 느낌이다. 그가 영남의 명가 문목공 진일재 류숭조 선생의 종손이며 서예에도 조예가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면 놀랄 정도이다.
마음도 넉넉해 천자문 병풍 12틀을 써달라고 부탁하면 기꺼이 들어주고, 화선지 값이 만만치 않음에도 묘비나 일상 제문 글씨를 금전적 대가를 바라지 않고 써주고 있다. 이는 일종의 적선(積善)이요 봉사다. 종손은 요즈음도 틈이 나면 붓을 잡는다. 글씨는 봉화군 춘양에 있는 외숙 권노섭 씨에게 배웠다고 한다.
여주(驪州) 선대 터전 수만 평을 농토로 직접 개간
종손이 관리하는 토지가 얼마나 되느냐는 질문에 2만 평은 족히 넘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이곳의 땅값은 봉화 산간 오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터인데 넉넉하지 않은 살림이었던 종손이 이곳을 선택하게 된 선견지명이 놀랍다. 모두 손수 개간해 일군 땅이란다. 사연이 궁금했다.
“종가 살림살이이란 게 대부분 그렇지만, 예전엔 먹고살기조차 참 막막했어요. 선조의 사패지(賜牌地)인 이곳은 황무지나 다름없었는데, 내가 일등중사(현재의 상사)로 포병학교에 근무할 때 교장이던 박정희 준장을 모셨어요. 박정희 교장이 소장이 되어 3사단장으로 나갈 때 나를 제대 못하게 하고 같이 가자고 해서 5년간 함께 근무했죠. 그 시절 인연으로 훗날 그 분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여주 땅 이야기를 했더니 정부에서 비용60%를 지원하고 내가 40% 를 보태는 조건으로 이 황무지를 불하받아 개간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덕을 톡톡히 본 것이죠.”
종손의 선택은 탁월했다. 사실 선친도 윗대에서 다 없어진 터전을 회복해 종가를 공고히 하려고 오랫동안 부심했다. 그래서 이곳 여주 땅 2만 평을 평당 5,000원씩에 팔아 봉화군 물야면에다 평당 1만 5,000원씩 주고 땅 5,000 평을 샀다. 당시 땅값은 봉화 지역이 월등히 높았지만 지금은 여주 땅이 평당 8만원이고 봉화 지역은 여전히 1만원에 불과하다. 그런데 종손은 다시 이곳 여주 땅을 개간하여 2만 평을 마련한 것이다.
땅값 이야기를 듣고선 차라리 이 땅을 팔아 하고 싶은 일을 해보는 게 어떠하냐고 짓궂게 떠보았다. 고등학교만 마친 뒤 객지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명예퇴직해 현재는 낚시점을 운영하고 있는 차종손의 가정형편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랬더니 종손은 “나는 선대 땅은 한 평도 팔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식은 스스로 벌어서 살면 되고, 내가 죽으면 자식이 이 터전을 맡아 제사 지내고 손님을 맞이 하면 되는 것이죠” 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종손의 기골이 여실이 느껴진다.
진일재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 교육자였음에도 그에 대한 기념사업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일차적 책임은 후손들에게 있다. 전주 류씨 갈래 중에 유독 진일재 집 후손만 번창하지 못했다. 그 역사에 비해 현재 진일재 후손가는 약 1.000여 호에 불과한 실정이라 한다. 반면에 같은 대에 갈린 회헌파가 약 4만 호, 낙봉파가 약 2만 호다.
종손의 11대 조모가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과 남매간이라고 하는데, 현재 학봉 선생의 종손이 14대며 2, 500 여 세대로 번창한 것과 비교해보면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처음에 여주 사람들은 진일재 선생을 잘 몰랐어요. 향교에서도 아는 사람이 없었고요. 그래서 내가 문화원에다 이야기를 하고 향교의 장의(掌議, 향교를 운영함에 있어 대의원과 같은 で弩?하는 사람)을 맡으면서 진일재 선생을 자꾸 알린 덕에 이제는 지역에서 많이 알려졌어요.”
종손의 표정에는 진일재 선생의 업적이 후대에 반드시 평가받았으면 하는 바람이 짙게 남아 있다. 신도비를 따라 종손이 여주로 왔다. 진일재 선생이 여주를 대표할 역사 인물로 소개되고 연구될 날도 멀지 않은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