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자료실

[스크랩] [종가기행 20] 霞谷 鄭齊斗 - 정몽주 11대손… 강화학파의 개창자

회기로 2011. 2. 28. 21:16
 
[종가기행 20] 霞谷 鄭齊斗 - 정몽주 11대손… 강화학파의 개창자
[주간한국 2006-10-02 14:42]  

영일 정씨 하곡 정제두 1649년(인조27)-1736년(영조12)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사앙(士仰), 호는 하곡(霞谷), 시호는 문강(文康)

하곡은 포은 정몽주의 11대손으로 서울에서 태어나 5세 때 부친을 여의었다. 우의정에 이른 명신 조부(鄭維城, 忠貞公)에게 길러졌다. 부평위(富平尉) 정제현(鄭齊賢)의 종제(從弟)이기도 하다. 큰어머니는 인조 때의 충신 삼학사(三學士)의 한 명인 홍익한(洪翼漢)의 딸이다.

성장해서는 남계 박세채(朴世采,1631-1695), 명재 윤증 등 당대의 대학자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경학은 물론 병학, 의학, 지리 등 폭넓은 지식과 '사람됨이 공근했다(爲人恭勤而已)'는 그의 학문 태도는 이 무렵을 전후해서 배양되었다.

그는 당초 주자학을 공부했으나 일찍부터 양명학에 심취해 많은 저술을 남겼다. 평생 존경했던 박세채의 지적까지 받았지만 그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생애의 전환점은 숙종 15년(41세, 1689)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이 문묘에서 축출된 일이었다. 그는 벼슬을 그만두고 서울을 떠나 안산 추곡(楸谷)으로 낙향해 20여 년을 생활했다.

하곡은 처음부터 관료의 길을 걷지 않았다. 회갑년에 좌의정으로 있던 만정당(晩靜堂) 서종태(徐宗泰, 1652-1719)가 추천해 세자익위사 익위(정5품)에 제수되었고, 그해 8월부터 강화도 하곡(霞谷, 霞逸洞)으로 터를 잡아 은둔했다.

그에 대해서는 만정당 뿐 아니라 이조판서 명곡 최석정, 이조판서 여성제, 호조판서 유상운 등 많은 사람들이 학문이 있다고 추천해 마지 않았다. 그는 문과에 급제한 이가 아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대신들의 추천과 국왕의 신임으로 후일 종1품직인 우찬성(86세, 1734년)에 까지 이를 수 있었다.

또한 그의 관직 이력을 보면 78세 때 맡은 좨주(祭酒, 종3품 직)라는 직함이 눈에 띈다. 이는 조선 중기 이후 산림처사의 다른 명칭으로 유림에 가장 영향력을 크게 끼친 이에게만 특별히 주어지는 일종의 명예직이다.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 등이 모두 좨주를 역임한 유림의 종장(宗匠)이었다.

하곡은 88세를 살았다. 당시에는 이례적인 장수다. 기질적으로 벼슬을 싫어했다. 그럼에도 유림의 중망과 조정의 기대는 컸고 그래서 30여 차례나 벼슬이 내려졌으며 쉼없이 사양하다 벼슬에 나가도 2, 3개월만 봉직하고 다시 향리로 돌아오곤 했다.

당시 국왕인 영조의 은애 의지가 어떠했는가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88세 때 왕세자의 책례를 마치자 세자를 보양할 관리로 다시 요청했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영조는 시장이 작성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시호를 내렸을 정도였다.

그러나 학문을 즐겼던 하곡의 삶은 순탄하지 못했다. 23세와 52세 때 두 번이나 상처(喪妻)했다. 이 점은 퇴계 이황과 유사하다. 지금 하곡을 지칭하는 호는 61세 때 선영이 있는 강화도 하곡으로 자리잡으면서부터 사용했다.

하곡을 이야기하자면 양명학을 피해갈 수는 없다.

조선 시대에 양명학은 정통으로 대우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해서는 안 될 학문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이러한 금기를 깨고 접근했을 때는 맹렬한 경보음이 울렸고 그래도 더 나아가면 이단, 또는 사문난적으로 몰렸다. 지금 시각으로 보면 하곡은 오로지 양명학을 연구하지도 않았음에도 양명학자로 몰린 느낌이다.

양명학은 뜻밖에 왕가에서도 관심을 가졌다. 특히 왕실 인사였던 경안령(慶安令) 이요(李瑤)가 대표적이다. 그로 인해 국왕인 선조도 호기심을 가졌다. 선조가 임진왜란의 참담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부심할 때 양명학을 내세운 경안령이 등장했다. 경안령은 동강(東岡) 남언경(南彦經:1528-1594, 서경덕, 이황의 제자)의 학문적인 영향을 받은 이다.

선조는 최측근 신하인 류성룡에게 우선 경안령과 양명학에 대해 자문(諮問)했다. 서애는 남언경과 이요 그리고 양명학 모두를 부정하고 폄하했다.

서애는 심지어 "양명이 말한 양지(良知, 선천적으로 타고난 도덕성과 인식 본능)를 이룬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라는 선조의 물음에 "그 말은 거짓입니다"라고 답했다. 서애는 이어 "왕양명의 학문은 그래서 배우면 해롭다"고 말하자 선조는 "양명학을 하는 것이 전혀 배우지 않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라며 못내 아쉬움을 표했다고 한다.

사실 양명학에 대한 선조의 관심은 스승인 한윤명과 한윤명이 존경한 소재 노수신(1515-1590)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노수신은 영의정에 이른 이로 유배지인 진도에서 명나라 학자인 나흠순(羅欽順)의 곤지기(困知記)를 열심히 읽었다. 곤지기는 양명학의 문제를 지적하기 위한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은 정통 정주학자들에 의해 바르지 못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양명학을 비판하기 위한 책이 도리어 주자학의 잣대로 비출 때 문제가 된 것이다.

노수신은 유배지에서

주자학을 보다 정확히 인식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최신 자료인 곤지기를 입수해 미리 읽었던 것이다. 왕조실록 졸기에 "노수신은 유독 육학(陸學)의 종지(宗旨)를 참작하여 사용했는데, 후인들이 더러는 추모하여 칭술(稱述)하기도 했다"는 평이 있는데, 그가 음으로 양으로 주자학의 문제에 대한 고민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국왕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하곡은 과연 양명학자였을까? 이를 설명하기 위해 주로 인용되는 구절이 있다.

"좨주 정제두는 정주의 학문을 완전히 배반하고 육왕(陸王, 육상산과 왕양명)의 학설을 대강 답습하여, 이에 감히 말하기를 '육왕과 정주는 비록 다같이 대도(大道)에 들어갔다고 할 수 있지만, 육왕의 학문은 숭례문과 같고 정주의 학문은 돈의문과 같다'고 했으니, 대개 육왕을 정도로 삼고 정주를 방기로 여긴 것입니다."

사헌부 지평으로 있던 이정박이란 이가 정제두를 논핵한 내용 일부다. 내용 중에 하곡이 말한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 과연 자신이 직접 언급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참 흥미로운 비유라고 생각된다. 숭례문은 남대문으로 모든 사람들이 드나드는 문임에 비해 돈의문은 서대문을 말한다. 묘하게도 지금은 돈의문 자체가 남아 있지 않다.

학문의 중점은 남대문에 두어져 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표현을 실제로 했다면 후인들이 말한 이단이니, 혹세무민이니, '매우 왕양명의 학문을 좋아했다(酷好王陽明之學)'이라는 평이 일어날 수 있는 시대적 상황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끊임없이 청아한 절조가 있다느니 하는 상반된 평가가 이어졌기에 진실을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그가 남긴 글은 불행하게도 이러한 학문 갈래에 대한 논란 때문에 진작 문집으로 간행되지 못했다. 그래서 후손과 학자들의 편집 및 산삭(刪削)을 거쳐 여러 형태의 필사본으로 남아 전한다.

특이한 점은 이 자료들은 일제 강점기 때 학자들의 눈에 띄어 다시 필사가 이루어졌고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영인본으로 볼 수 있는 국립중앙서관 소장본 22책이다.

하곡집은 그 일부가 번역되었는데, 그중 '가법(家法)'이라는 글이 주목된다. 양명학자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보아서인지 오히려 정통 주자학자 이상으로 가문의 전통과 질서 계승에 유의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친히 가르치고 독려하거나 책망하지 말고 스승을 얻어서 그에게 자식을 맡기라." 자식을 가르치는 법이다.

'임술유고(壬戌遺敎, 아우 齊泰와 아들 厚一에게 준 글)'는 유언장과도 같은 당부의 글이다. 34세 때(숙종8, 1862년) 쓴 글인데 이 무렵 더욱 몸이 불편해지자 자신의 후일을 당부한 내용이다. 그는 여기서 "후세의 학술은 의심이 없을 수 없다"고 고백한 뒤 자신의 양명학설 관련 저술을 소개한 뒤, 소학이나 논어, 맹자 등 사서를 열심히 배우고 이어서 시경, 서경을 반복해서 읽되 경서를 떠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여기서 누누이 강조하는 것은 '실학'이었다. 이 글을 통해 보면 그가 했던 양명학은 주자학을 더욱 공고하게 하기 위해 학문적으로만 접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곡집을 읽으면서, 국왕인 선조가 양명학에 관심을 가졌을 때 신하들이 그러한 학문의 갈래를 겸허하게 인정하고 그것을 하나의 방편으로 연구하게 하거나, 하곡이 살았던 숙종, 경종, 영조 시대에도 양명학을 살펴 부국강병의 길을 모색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생겼다.

하곡에게는 시호와 아울러 국왕의 치제(致祭, 영조26년 1월 5일)가 있었다. 일반적인 기준으로 보면 불천위에 해당한다. 그러나 현재 불천위로 모셔지고 있지는 않다. 묘소는 인천시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산62-6에 부인 한산 이씨와 합장이다. 묘비는 신대우(申大羽)가 짓고 서영보(徐榮輔)가 글씨를 썼다.

강화학파(江華學派)


조선 후기에 정제두를 비롯한 학자들이 강화도를 중심으로 형성해 이어진 학문 유파(流派)다. 하곡은 자신과 가까운 소론(少論)들이 정치적으로 어려움을 당하자 강화도로 물러나 은거했는데, 그 뒤 친인척인 이광사, 이광려, 신대우, 심육, 윤순 등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형성한 이 학단은 이후 200여 년 동안 이어졌다. 강화학파는 구한말 영재 이건창과 위당 정인보, 단재 신채호, 백암 박은식, 창강 김택영에 이르러 꽃을 피웠다.

출처 : 나의 사랑 한국한문학
글쓴이 : 인간사화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