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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迎日 鄭氏 - 유가의 반듯한 삶과 철학으로 산업현장 지킨 `우리시대 선비`

회기로 2011. 2. 28. 21:16
迎日 鄭氏 - 유가의 반듯한 삶과 철학으로 산업현장 지킨 '우리시대 선비'
[주간한국 2006-10-02 14:42]    

[姓氏의 원류를 찾아서 종가기행 20] 9대 종손 정시종(鄭時鍾) 씨 - 시골읍 서기에서 대기업 사장까지… 종손의 격조 잃지 않아

격조가 있는 사람은 어떤 분일까? 요즘은 격(人格) 또는 품격(品格)을 논한다는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 존경 받는 원로는 드물고, 설령 있다 해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세태다. 물건에 대해선 품질을 따져 명품이란 이름을 붙이길 좋아하지만 사람의 품격에 대해선 존경은커녕 헐뜯기가 다반사다.

‘사람의 격조’를 말할 때면 생각나는 야화(野話)가 있다.

조선 말 흥선대원군은 왕족이면서도 세도가들에 밀려 지방을 떠돌았다. 사실은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인재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당시 인재들은 서울에 몰렸고 또 그 대부분은 세도가인 안동 김씨 주변에 기웃거렸다. 그러나 대원군은 참 인재를 찾고자 했다. 그래서 영남을 지나던 중 상주 낙동의 강고(江皐) 류심춘(柳尋春)을 만났다.

강고는 대원군을 만나자 예의와 당당함을 잃지 않고 빈한한 시골 선비이지만 심오한 학문을 바탕으로 시대를 논했고, 때가 되어 소반에 음식을 장만해 내놓았다. 음식이란 게 보잘 것 없어 김치에 멀건 된장, 간장 한 종지 그리고 보리밥이 전부였다. 반가(班家)에서는 국(羹)이 없을 수 없었는데, 가난한 살림에 장만할 도리가 없자 맹물을 끓여 떠놓았던 것. 그것이 글자 그대로 그 유명한 ‘백비탕(白沸湯)’이다.

그러나 강고는 조금도 미안해 함이 없었다. 며칠을 그렇게 머문 대원군은 강고의 격조에 감동했어도 현실적 고통을 견딜 수 없자 예정보다 일찍 작별을 고했다. 그때 강고가 노자를 대원군의 손에 쥐어 주었는데, 그 돈은 마침 시댁을 다녀온 며느리가 가져온 몇 푼 안 되는 것이었다.

작별 후 얼마쯤 가다 대원군은 뒤따라온 강고의 하인을 다시 만났다. 하인은 대뜸 주인의 말을 전하기를, 미안한 일이나 그 돈을 다시 달라는 것이었다. 의아해 하는 대원군에게 하인은, 막 손님을 보내고 나니 사돈이 운명했다는 전갈이 와 가난한 살림이지만 부의를 전하지 않을 수 없어 보다 중한 예를 표하기 위해 부득이 귀빈에게 실례를 범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대원군은 혀를 차며 강고의 당당함과 인간미에 반했고, 후일 그의 아들 낙파(洛坡) 류후조(柳厚祚)를 중용해 정승에까지 이르게 했다는 이야기다.

강고는 가난할망정 학문을 즐겼고 가문의 긍지 때문에 불의와 타협하거나 비굴해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엄격하지만 주변에는 훈기를 풍기는 그런 격조를 지닌 선비였다.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 선생도 그러한 부류에 속한다.

인간미 넘치는 세련된 노신사

하곡의 종손을 만나기 전 먼저 그가 어떤 인물인가에 대해 그림을 그려보았다. 하곡은 조선 후기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학자요 정치가다. 그는 왕조실록에서조차 이단(異端)으로 낙인 찍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하곡 선생’이라 불리며 추앙받은 사람이라는 평도 함께 실려 있어 그에 대한 평가는 극단으로 갈린다. 이는 이례적이다. 그만큼 논하기에 간단한 선비가 아니라는 의미다.

하곡은 영일 정씨다. 독자들은 영일(迎日) 정씨(鄭氏)와 연일(延日) 정씨(鄭氏)의 표기에 대해서 혼란스러울 것이다. 행장을 보면 관향을 영일(迎日)로 적고 있다. 그리고 어떤 경우는 연일로도 표기했다. 문중과 영일 정씨 포은공파 종약원(1981년부터 영일로 통일)에서는 ‘영일’로 쓰고 있다. 하곡은 포은 정몽주의 11대 손으로, 양명학자요 강화학파의 개창자로 일반에 알려져 있다.

하곡의9대 종손인 정시종(鄭時鍾, 1933년 생) 씨. 피는 못 속이는지 그는 외교관 출신이라고 느낄 정도로 모든 면에서 세련된 노신사다. 이지적이며 단정한 태도를 지녔으면서도 인간미가 넘친다. 그래서 불현듯 대원군의 야사가 생각난지도 모르겠다.

만나자마자 종손은 “자손으로서 훌륭한 조상을 모시게 된 것이 영광스럽습니다”라고 말문을 연다. 현재 종손은 인천시 남동구 간석3동 27-11번지에 살고 있다. 중학교는 서울에서 다녔고 용산고를 나온 뒤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충북 진천으로 내려가 진천읍 서기를 하기도 했다.

남보다 조금 늦게 서울대학교 상과(12회)에 진학했다. 대학을 졸업 후 삼미그룹에 입사해 종합특수강 전무, 계열사 사장을 역임했고, 1986년 퇴사해 포항제철의 협력회사를 운영, 지금까지

현역으로 일하고 있다.

종손은 한눈 팔지 않고 평생 산업현장에서 일했지만, 태도와 구사하는 말에는 유가(儒家)의 격조가 짙게 남아 있다. 하곡으로 시작해 자신까지 9대의 이름자를 막힘 없이 외운다. 그 내력이 궁금했다.

“제가요, 사업을 하다보니 책 볼 시간이 없어요. 돌아서면 노사협상하랴, 납품 계약하랴, 월급 지급하랴 정신이 없었죠. 공장이 창원에 있고 한 달에 네 번 정도 비행기를 타고 다녔는데, 버스와 별반 시간 차가 없겠다 싶어 요즈음은 버스를 탑니다. 5시간 鵑?타는데, 세 시간은 책을 봅니다. 할아버지 글도 읽고 한문책도 보죠. 한시도 외우고요. 조식(曹植)의 칠보시(七步詩)도 외워요. 배운다는 것이 너무 즐거워요.”

그래도 상과를 나왔기에 한문책을 보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진천에서 면서기 할 때 거처가 마땅치 않아 향교(鄕校, 조선조 지방 국립 교육기관)에 살았어요, 그곳에 삼종조(三從祖) 한 분이 계셨는데 ‘너는 나이나 학벌로 보나 천자문이나 동몽선습 읽기는 그렇고 하니 맹자를 읽어라’라 해서 맹자를 1년간 읽었어요. 맹자를 3,000번 읽었더니 문리(文理)가 터지더라는 말이 있잖아요."

젊은 시절 읽었던 맹자가 평생의 자양분으로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요즘, 명문대를 졸업한 수재 중 어느 누가 20대 나이에 1년여를 투자해 동양 고전에 빠져들까.

덕치를 강조한 맹자를 읽은 덕분일까, 종손이 경영하는 회사 직원은 90명 정도 되지만 아직까지 노사 분규가 없다고 한다. 투명경영을 실천하려고 했고 항상 변화하려고 노력한 결과일 것이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맹자 7권이 종손에게 경영학개론 몇 권 이상의 영향을 준 듯하다.

그러나 종손에게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전통 계승 문제다.

종손은 지난 6월 초 일본 후꾸시마 현(福島縣)을 방문했는데 거기에서 고이즈미 총리를 만난 적이 있었다. 고이즈미 역시 그때 종손과 마찬가지로 일본 1,000엔권 지폐에 나오는 인물인 노구치 히데요(野口英世, 1876-1928, 저명한 세균학자)의 생가를 찾았던 것이다. 종손은 초등학교 2, 3학년 때 노구치의 일화에 감명받은 적이 있었다.

고이즈미는 일본의 전통에 깊은 관심을 갖고 틈만 나면 유명 역사인물의 유촉지를 답사한다고 한다. 지금 한국의 정치지도자들은 어떤가. 서글픔이 느껴졌다고 종손은 말한다.

종손이 하곡의 삶을 반추하고 남긴 글을 읽는 것은 그래서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는 여러 역사적 사실이나 일화를 꿰고 있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청렴하고 강직했어요. 양명학을 하였고, 그것이 실학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이론보다는 실천을 항상 생각했던 분이셨죠. 조부께서 우의정까지 지냈지만 집안은 정말 가난했어요.”

필자는 하곡이 양명학자나 반(反)주자학자가 아니라 ‘참학문이 무엇인가 고민하고 그것을 실천한 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시각으로 보면 종손의 삶의 철학은 하곡과 얼마간 닮았다.

종손은 2남 1녀를 두었다. 맏아들 정한구(鄭漢求, 1959년 생)씨는 창원특수강 차장이고, 둘째인 한남(漢南, 1961) 씨는 공학박사로 포항제철에 근무하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소위 ‘실용지학(實用之學)’을 전공했고 그 분야로 회사와 사회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본래 가난한 종가였지만 더욱 어렵게 된 것은 증조부(鄭元夏)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중국으로 가솔을 이끌고 망명했기 때문이다. 선친(鄭在忠, 1902년생)은 부친을 따라 온갖 고생을 하면서 만주 생활을 했다. 선친은 그후 중동학원을 다녔고 92세까지 사셨다.

증조부는 영재 이건창의 동생 이건승과 함께 나라가 망하자 음독 자결을 단행했다. 그때 식구들이 약사발을 빼앗아 뜻을 이루지 못하자 칼을 뽑아 자결하고자 했고 억지로 막는 과정에서 한 손을 크게 다쳐 평생 불구로 지낸 지사(志士)였다.

종손과 인터뷰를 한 뒤 3번 전화통화를 했는데, 그때마다 거듭 조금이라도 과장하거나 자랑은 빼고 그저 수수하게 써달라고 당부했다. 그래서 더욱 짙은 ‘인간미’가 느껴졌다.
출처 : 나의 사랑 한국한문학
글쓴이 : 인간사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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