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姓氏의 원류를 찾아서 종가기행 19] 17대 종손 이주용(李柱瑢)씨 - 박정희 전 대통령도 친서 보내 경의 표했던 명문 종가, 뇌졸중으로 병상에… 종부가 봉제사 접빈객 정성
필자는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에 대해 ‘청빈한 정승’과 ‘붕당(朋黨)을 예견한 정승’ 그리고 광주 이씨(廣州李氏)의 대표적 인물로 기억하고 있다.
‘원로’라는 단어도 떠오른다. 그의 신도비를 보면 ‘사조원로(四朝元老)’라는 구절이 전면에 크게 쓰여 있다. ‘네 조정(중종, 인종, 명종, 선조)에서 벼슬한 원로대신’이라는 의미다.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다.
조선 시대는 각 왕조마다 여러 명의 정승이 명멸(明滅)했다. 크게 빛난 정승도 있었고 그렇지 못해 사약(賜藥)을 받은 이도 있다. 그 가운데 정승에까지 이르렀으면서도 선비다운 품격을 잃지 않고 청백리에 뽑힌 ‘청빈한 정승’에 마음이 간다.
고종 때 발간된 청선고(淸選考)라는 책에는 이 기준에 해당되는 조선 시대 정승으로 16명만이 올라와 있다. 그중의 한 명이 명종 때 정승을 지낸 동고 이준경이다. 좀 장황하기는 하지만, 이 16명을 소개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본다. 세종 때의 이원, 황희, 유관, 맹사성, 세조 때의 구치관, 연산군 때의 허침, 중종 때의 김전, 명종 때의 이준경, 선조 때의 심수경, 류성룡, 이원익, 이항복, 김상헌, 효종 때의 이시백, 현종 때의 홍명하, 숙종 때의 이상진이 그들이다.
그렇게 혁혁한 정승들이건만, 그 업적과 삶 모두가 생소한 사람도 있다. 우리는 옛 역사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관직, 업적, 관향, 고향, 사승(師承) 관계, 자손들의 갈래, 종택과 종손, 생몰년 등으로 따져 들어가면 너무나 무지함에 민망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조선 명종 때 영의정을 지낸 동고 이준경의 종택을 찾아보고 싶어 여러 곳에 수소문을 했지만 정확한 정보를 얻는데 실패했다. 광주 이씨 종친회에 관여하는 이조차 종손의 존재를 알지 못했을 정도였다.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명가로 존경받아 마땅한 종택과 종손이 일가나 세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광주 이씨 동고공파종회 이승희(李昇熙, 1939년생, 종손의 생가 당질) 회장을 만나 종손을 소개받게 되었다.
종손은 현재 서울 관악구 봉천동의 부미아파트에 우거(寓居)하고 있다. 종손이 사는 곳에는 사당이 있고, 그곳에서 제사를 모시며, 문중 지도자들과 지손들이 문사를 의논하기도 한다. 이번에 찾은 곳은 사사 종가가 아닌 국불천위(國不遷位, 큰 공훈이 있어 나라에서 영원히 사당에서 모시기를 허락한 신위) 종택이다.
거실 벽엔 동고 시호 교지 복제본 게시
종택 거실에서 개량한복을 입은 종손과 인사를 나누면서 그 혁혁했던 집이 세인들에게 왜 알려지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풀렸다. 동고의 17대 종손 이주용(李柱瑢, 1933년 생) 씨는 뇌졸중으로 언어 장애가 있었다. 종손과 직접적인 대화조차 나눌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동행한 종회장의 설명을 먼저 듣고 종손과 눈을 맞추어 확인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진행했다. 종회장은 종손이 부친의 말씀을 조금도 거역하는 법이 없었던 ‘타고난 효자’였다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선유동) 756번지는 대대로 동고의 향화(香火)를 이어온 종택이 있는 곳이다. 현재는 한국전쟁 때 마지막으로 불타 다시 지은 종택이 남아 있다.
종손은 그곳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뒤 청주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청주시청에서 근무하다 육군에 입대했다. 전역 후 서울로 올라와 한일은행 계열인 서울부동산에 오래 근무했다. 종손은 중구 남창동에 있는 창고의 책임을 맡아 성실하게 일하다 49세 때 과로로 쓰러졌다.
상인들을 상대하는 업무라 항상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온 것이 화근이었다. 그 이후 2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조금의 차도만 있을 뿐 종손으로서의 활동조차 여의치 못했다. 오랜 세월 종손의 병수발과 봉제사 접빈객의 수고를 다한 종부는 더없이 인자한 모습이었다.
불천위 제사에 제관이 얼마나 모이는가를 물었더니, 열서너 명이란다. 지손들이 종손의 건강이 좋지 못하니 참제(參祭)를 하는 것이 도리어 폐가 된다고 생각한 때문이라 했다. 사가(私家)의 제사도 아니고 당당한
불천위 제사에 제관이 그 정도라는 것은 믿기지 않았지만 사실이었다.
아파트 종택 거실 중앙 벽에다 동고의 시호(諡號) 교지(敎旨) 복제본을 실물 크기로 게시해둔 것만 보아도 종손으로서의 마음가짐을 알 수 있다. ‘위신봉상왈(委身奉上曰) 충(忠), 이정복지왈(以正服之曰) 정(正)’ 즉 ‘목숨을 바쳐 임금을 받들었으니 충(忠)이요, 바름으로 여러 사람들을 포용했으니 정(正)이다’ 라는 시호다. 그래서 ‘충정공(忠正公)’이 되었다.
학문과 경륜이 있고 영의정까지 지낸 이로서 ‘문(文)’ 그중에서도 ‘도덕박문왈(道德博文曰) 문(文)’이라는 전통 사회에서 명예롭게 여긴 ‘문(文) 자(? 시호(諡號)’를 받지 못한 이유에 대해 물었다. ‘문무를 겸전해 군공(軍功)도 세웠기 때문’이라는 종회장의 설명은 어디엔가 미흡한 느낌이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후대에 시호를 개정하기 위한 논의가 생긴 것도 이런 시각에서다.
종손의 부친인 이완수(李完洙, 1903년생) 씨는 양자로 종손이 된 이다. 그런데 그는 종손의 자질을 타고났던 것 같다. 양정고보를 나온 후 고향으로 돌아가 종택을 지키며 조상 사업을 하는 이외에는 다른 일에 종사하지 않았다고 한다. 남아 있는 빛바랜 앨범을 통해 학창시절의 당당했던 모습과 그 뒤 종손으로서의 장중한 풍채를 함께 살필 수 있었다.
근육질의 윗몸을 드러낸 채 권투 글러브를 끼고 포즈를 취한 모습이 당당했고, 노년에 선유동 종택 대청에서 동고의 유품을 펼치고 찍은 모습은 고고했다. 사진 속에서 길게 늘어진 ‘동지일월(東之日月) 고지자손(皐之子孫)’ 즉 '동쪽의 해와 달, 언덕의 자손'이라는 뜻이지만, ‘해와 달 같이 빛났던 동고 상공의 자손’이라고 적은 휘호가 인상적이었다.
앨범 뒷부분에는 한문투로 쓴 편지 한 통이 들어 있었다. ‘근계(謹啓)’로 시작해 한 줄 바꾼 뒤 ‘심상모앙어 선현장구지소 유촉지지(心常慕仰於先賢杖之所遺之地)’로 이어진 편지는 말미에 ‘대통령(大統領) 박정희(朴正熙)’와 다시 줄 바꾸어 ‘이완수(李完洙) 좌하(座下)’가 적힌 것으로 보아 이는 분명 박 전 대통령이 종손인 이완수 씨에게 보낸 친서임을 알 수 있었다.
그 대략적인 내용은 이렇다. “삼가 아뢰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항상 선현께서 머물러 계셨던 곳과 발자취가 남은 곳과 종손이 살고 있는 집에 대해 흠모하고 우러러 왔습니다. 그렇지만 말하자면 몸은 하나이고 일은 수없이 많아서(身一事百) 아직 찾아보려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지만, 오늘도 저의 소홀했던 잘못에 대해 잊지는 않고 있습니다. 올해도 또 이렇게 저물어감에 우선 한 장의 편지로 저의 마음을 표하니 너무 허물하지는 마십시오”이다. 말미에1963년 12월 27일이라고 적혀 있다.
한해가 저물어갈 무렵이라는 표현은 12월 27일에 딱 맞다. 그때쯤이면 필부필부(匹夫匹婦)라 할지라도 잡힌 약속과 마무리 지어야할 약속으로 주체하지 못한다. 그런데 막 군사혁명을 단행해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있는 그의 분주함을 고려할 때, 선현과 종손을 흠모해 직접 글을 짓고 써서 보낸 정성과 집중력에 그저 놀랄 뿐이다.
박 전 대통령은 동고의 어떤 면을 그렇게 흠모해 마지않았을까? 아마도 죽음에 임해 올린 한편의 상소 때문이었을 것 같다. 머지않아 생길 당파의 폐단을 조기에 차단해 달라는 간곡한 당부 말씀 말이다. 후일 박 전 대통령이 국론 분열을 항상 염려했고 새마을 정신으로 국민을 하나로 묶었으며, 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설립, 국민교육헌장 제정 등 일련의 업적들이 바로 이러한 역사 인식 하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한다.
분명 박 전 대통령도 지도자로서의 공과(功過)에 논란이 있겠지만, 미풍양속이 사라지고 전통문화가 점차 잊혀가는 요즘에 우리는 이 한 장의 편지에 담겼을 행간의 의미를 읽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종손은 1남 2녀를 두었으며 차종손 이태희(李泰熙, 1967년생) 씨는 대학을 나와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