姓氏의 원류를 찾아서 종가기행 26
6대손 서청원(徐淸源) 씨 - 絶孫의 아픔을 딛고 香火 다시 지펴
50년 이상 방치됐던 묘소 찾아… "선조 업적 책 출간이 소망"
대구 서씨 약봉 후손은 조선 시대를 대표했던 명문가다. ‘부귀현혁(富貴顯赫)’한 가문이면서도 선비의 절조를 잃지 않아 더욱 칭송을 받았다. ‘연리(延李) 광김(光金)’을 국반(國班)으로 손꼽지만 그에 못지 않게 ‘서지약봉(徐之藥峯)이요 홍지모당(洪之慕堂)’이라는 문자가 있을 정도로 인정하는 집이 대구 서씨 약봉가다.
일반인들은 ‘서씨’ 하면 달성 서씨를 떠올린다. 그래서 달성 서씨들은 명문가로 손꼽히지만 갈래를 지우면 대구 서씨와는 그 성취에 있어서 현격한 차이가 있다. 대구와 달성은 같은 할아버지의 후손들임은 분명하지만 서로 촌수를 따질 수 없는 형편에 있다. 대구와 달성을 함께 부를 때는 달성으로 썼다는 사실을 대구 서씨의 현달한 인물들의 묘갈명이나 행장 등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두 파는 무엇으로 구분되는가?
족보상으로 달성 서씨는 판도판서공(版圖判書公)파라 하고 대구 서씨는 소윤공(少尹公)파라고 갈래지운다. 소윤공파에 약봉파(藥峯派)가 있는데, 그 선대에 5세 실전(失傳)이라는 계대(繼代)의 단절이 있다.
소윤공의 아들로부터 7세 전객공(典客公)까지 5세를 말하는데, 이처럼 불분명한 소목(昭穆, 종묘나 사당에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차례)을 밝히기 위해 후손들은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지금까지 휘자(諱字, 돌아가신 어른의 생전 이름자)조차 알 수 없는 형편이다. 명문가인 이 집안의 절박한 사정을 이용, 이득을 취하기 위해 몇 차례 날조된 소목이 세상에 나타나기도 했지만 번번이 바로잡혔다.
그러한 대구 서씨 명문가에 죽석(竹石) 서영보(徐榮輔)라는 이가 있다. 죽석은 인명사전에는 그 이름이 올라 있지만 한국사통론이나 문학개론에서는 흔적을 찾기 어렵다. 말하자면 무명인 셈이다. 하지만 그는 조선 최고 명문가의 후손이었고 당대를 대표했던 학자요 정치가, 문장가, 서법가로 이름을 드날렸다. 창덕궁의 법전(法殿)인 인정전(仁政殿)의 현판을 쓴 명필가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는 당대의 명성에 비해 역사 속에서 이름이 묻혀 있는 대표적 인물이다.
죽석공의 선대와 후대는 8대를 잇달아 대과에 합격했다. 그중에 두 명은 장원 급제자다. 조선 시대 초유의 일이다. 그의 고조부인 서종태가 영의정, 증조부인 서명균이 좌의정, 조부인 서지수가 영의정을 지냈다. 그래서 ‘삼대 정승집’이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받게 된다. 삼대 정승집은 이외에도 청송 심씨의 심덕부, 심온, 심회와, 동래 정씨의 정유길, 정창연, 정태화와 청풍 김씨 김구, 김재로, 김치인을 들 수 있다. 김구의 둘째사위는 서명균이다. 서울 송파구 방이동 몽촌토성 공원 내에 있는 김구의 묘비문 글씨를 쓴 이도 서명균이다.
대구 서씨는 또한 ‘삼대 대제학’ 집으로도 유명하다. 대구 서씨의 서유신, 서영보, 서기순과 광산 김씨의 김만기, 김진규, 김양택과 연안 이씨의 이정구, 이명한, 이일상과 전주 이씨 백강 이경여 집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삼대 정승과 대제학이라는 요건을 모두 충족하는 가문은 대구 서씨가 유일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극히 이루기 어려운 성취요 세상에 자랑할 만한 영예다.
필자는 사석에서 이 자랑을 죽석의 6대손 서청원(徐淸源, 1943년생) 전 한나라당 대표에게서 들었다. “제가 생각해도 나는 행운아예요. 이 점이 잠잘 때도 기쁘고, 밥을 굶어도 자랑스러워요. 우리 성씨가 그러해도 자랑스러운데, 제가 바로 그 집의 향화(香火)를 잇고 있다고 생각하니 정말 신이 나요. 한편으로는 무한한 사명감도 느끼고 있습니다. 명문가 사람으로서 더욱 모범이 되어야겠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뭔가는 달라야 한다는 말이죠.”
서청원 씨는 우리 시대의 정치가로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민주계 출신의 5선 의원으로 정무 제1장관도 지냈다. 6·3 세대로 중앙대학교 학생회장(1964년) 때는 학생운동에 앞장섰으며 이후 조선일보 기자를 거쳐 김영삼 전 대통령의 계보인 상도동계를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지만, 그가 명문 약봉가의 후예며 삼대 정승과 삼대 대제학 집이요 대제학을 이어받고 이어준 인물인 죽석 서영보의 봉사손(奉祀孫)이라는 사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제가 38세 때 11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어요. 서울 동작구에서 6전5승1패의 국회의원 선거 성적입니다.” 이어 그는 죽석공의 봉사손이 된 내력을 자세히 설명했다.
대구 서씨 세보 도위공파 족보에서 죽석 서영보 조를 펴보면 놀랍게도 손자인 서상지(徐相至)에 이르러 절손(絶孫)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서청원 씨는 어떻게 봉사손이 된 것인가?
죽석 서영보는 아들 셋을 두었다. 그 둘째가 대제학을 지낸 서기순(徐箕淳)이며 셋째인 서사순(徐士淳)의 현손(玄孫)이 서청원 씨의 부친인 원석(元錫, 1907-1971) 씨다. 죽석 서영보는 서청원의 6대조이다. 죽석의 맏아들인 이순(彛淳, 1782-1834)은 1남1녀를 두었는데, 아들 상지(相至, 1827-1861)는 24세 때(1850)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좌부승지에 이르렀으나 배위인 전주 이씨와의 사이에 후사를 두지 못한 채 3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서청원 씨는 마치 눈앞에 족보를 펼쳐두고 손으로 지적하는 듯 자세히 설명한다.
죽석공에 대한 향화는 절손이라는 이유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와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50년 이상 찾는 이가 없어 이어지지 못했다. 2000년에 들어와 서청원 씨의 종제와 대종회에서 죽석공의 산소를 찾았다는 연락이 왔다. 경기도 장단군 진동면 임고동, 즉 현재 도라산 전망대 부근인 비무장지대 남쪽에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 50년 이상 방치되어온 봉분 위에는 제법 크게 자란 잡목들까지 그득해 참담했다. 2004년 8월 이후 대종회 서진석 회장, 서동권 고문, 서명원 고문, 서정철 자문위원 등 문중 어른들의 지도를 받아 2005년 가을 사초와 묘비제막식을 거행해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제게 지금 소망이 있습니다. 생을 마감하기 전에 선조들의 훌륭한 업적을 책으로 펴내는 것입니다.” 자신의 뿌리를 찾고 절손된 선조의 향화를 다시 이으며 그 얼을 후세와 사회에 전하기 위한 경건한 자기 행진을 이제 막 시작한 셈이다.
명문가의 가정 교육에 대해 물었다.
“선친께서는 제가 어릴 때 손님만 오시면 절만 시켰어요. 그리고 중학교 때까지 종아리를 맞았는데, 꼭 잘못을 하면 회초리를 직접 해서 오라고 했어요. 좀 가는 매화나무 회초리를 가지고 가면 ‘왜 이렇게 약한 것만 가지고 왔어?’라 하시고 때리기 시작했는데, 약한 듯 해도 한 대만 맞으면 아파서 죽을 지경이었어요. 어머니가 좀 빨리 말려주었으면 했죠. 사실 회초리는 어머니께서 아버지에게 일러서 맞게 되었는데, 야속하기도 했지만 아파 죽을 때쯤 말려주면 그래도 너무 고마웠어요. 아버지는 하늘 같았어요.”
“팔다리를 주무르라고 하면 힘든 것도 문제지만 아버지께서 흡족하실 정도로 힘 조절하는 게 더 어려웠어요. 땀이 삐질삐질 날 정도로 숨죽이며 주물렀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더러 저의 아들놈에게 다리 좀 주물러 달라고 하면 그 녀석이 덩치도 크고 힘도 세서 막 주무르는데 아파서 견딜 수 없어요. 힘 조절이 안 되는 거죠. 그래서 이놈아, 당장 그만두라고 말하지만, 아무래도 어린 시절 선친의 다리를 주물렀던 그때 그 마음이 많이 생각납니다. 저는 화가 날 때면 한 대 쥐어박고 싶지만 아들놈은 ‘아버지 그러시면 괜히 다치십니다’ 하며 웃음으로 손을 잡아 쥡니다. 거참, 한 세대가 이렇게 바뀌었어요.”
“제가 명색이 국회 국방위원이면서 한나라당 대표 시절에 아들(東翼,
1978년생)이 군대에 갔는데, 미국에서 국제정치학을 공부한 아이지만 가만 두었더니 최전방 기갑여단에 배치받아 고생했어요. 나중에 아들 면회를 갔더니만 ‘아버지 그래도 너무하셨어요’라며 웃더군요. 자대 배치 후에 아버지가 누군지 알려졌지만 아들을 편하게 해주기 위한 부탁을 하지 않았던 거죠. 또 그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대하고 와서는 기갑여단의 군복과 베레모까지 다시 쓰고 친구들 만나러 가는 아들을 보고 내심 대견했습니다. 제 마음을 알아주어 복무를 잘 했으니 고마웠죠. 그래도 내색은 안했습니다.”
대구 서씨 종보 창간 100호를 기념하는 서청원 씨의 글을 읽어 보았다. 이를 통해 필자는 우리 정치인들 가운데도 ‘나는 후손에게 무엇을 남길 것인가?’라는 가문에 대한 자긍과 아울러 전통문화의 계승에 강한 의지를 지닌 이가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서영보 1759년(영조35)-1816년(순조16) 본관은 대구, 자는 경재(景在), 호는 죽석(竹石), 시호는 문헌(文憲)
과거시험서 다산 꺾은 천재… 국정 처방書 '만기요람' 편저
“담배 피우는 사이에 붓을 놀려 금방 쓰니 어찌 기재(奇才)가 아니냐.” 국왕 정조의 감탄이다. 역사에 이름난 글은 후천적 노력 이상으로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 가능하다. 죽석 서영보는 그러한 재능까지 타고난 천재였다. 조선의 천재를 손꼽을 때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을 으뜸으로 꼽는다. 다산은 18년 간 유배의 고초를 겪었음에도 가장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는 문장 스타일을 가리지 않았고 고금에 두루 통한 대학자였다. 그런 그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지는 못했다. 갑과 2등이었다. 그렇다면 그 앞에는 누가 있었을까. 죽석 서영보가 갑과 1등 장원 급제자다. 그는 다산을 능가했다.
죽석이 등과한 정조13년 식년시에는 모두 71명이 급제했다. 쟁쟁한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다. 우의정을 지낸 김이교(안동 김씨, 병과 8인), 영의정을 지낸 심상규(청송 심씨, 병과 1인), 영의정(14년간 정승 지냄)을 지낸 이만수(연안 이씨, 병과 9인)도 동방이다. 이들은 후일 시파와 벽파로 갈려 서로에게 칼날을 겨눴다. 다산도 그 피해자 중 한 사람이다.
또 다른 천재로 심상규(沈象奎: 1766-1838)가 있다. 그는 ‘사조기구(四朝耆舊)’, 즉 네 국왕을 섬긴 조정의 원로 대신이다. 지조가 곧았을 뿐 아니라 ‘나라를 빛낸 문장(華國之文)’을 갖췄다. 시에 능하고 서간(書簡)에 뛰어났으며, 장서(藏書)가 많아서 세상에서 그에게 견줄 만한 이가 없었다. ‘음성이 그 몸보다 커서 전상에서 일을 아뢸 때마다 뭇수레가 굴러가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는 평이 왕조실록에 실려 있다. 서영보보다 7년 후배로 동방 급제자인 심상규는 순조8년(1808)에 국왕의 정무지침서인 만기요람(萬機要覽) 11권을 함께 찬진(撰進, 글을 지어 임금에게 올림)했다. 이들은 학문과 식견, 명망이 당대 으뜸이자 최고의 콤비였다.
재용편(財用篇) 6권과 군정편(軍政篇) 5권으로 구성된 만기요람은 제반 연혁과 각 제도의 실정 및 그 운용, 각 기관의 경비조달 방법까지 정책과 실용 양측면에서 요약 정리되어 있다. 책 제목에는 ‘임금이 나라를 다스려 나가는 데 하루나 이틀 정도의 짧은 시간일지라도 만반의 미묘 복잡한 일의 조짐(事機)이 닥쳤을 때 그 한 가지라도 소홀하게 해 과오가 없게 해야 한다’는 당부가 담겨 있다. 그렇게 보면 이 책이야말로 임진왜란 이후 서애 류성룡이 남긴 징비록 이상의 국정 처방전인 셈이다. 이 책의 주된 독자는 국왕과 최고 정책 담당자다.
국가 통치의 기밀이 수록되어 있어 특히 일본에 유출되서는 안 될 책이었다. 때문에 책자로 간행돼 널리 보급되지 못했다. 지금 남아 있는 책도 몇 질의 필사본에 불과하다. 놀라운 사실은 일제 강점기에 이토 히로부미가 규장각에서 대출해간 1,028권 가운데 이 책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주요 도서 목록을 보면 ‘계원필경’, ‘지봉유설’, ‘퇴계선생언행록’, ‘이충무공전서’, ‘영남인물고’, ‘동문선’, ‘기재잡기’, ‘만기요람’, ‘청구만록’ 등이 있다. 다행히 ‘만기요람’, ‘우복선생문집’, ‘김충장공유서’ 등 11종 90책은 1966년 한·일협정 당시 반환됐다.
여기서 우리는 일제가 우리나라를 빼앗기 위해 얼마나 치밀하게 연구하고 준비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일본은 우리의 정책과 문화 진수를 연구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데 반해 우리는 아직도 우리의 역사와 전통 문화를 연구하는 데 소홀하다. 위에 제시된 책자를 모두 읽은 학자가 얼마나 되며 저자와 제목 정도라도 알고 있는 일반인은 얼마나 될까.
서영보는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이 경우 국왕 알현이 관례였고, 이에 정조는 그를 만나본 뒤 만감이 교차된 어조로 말했다. “네 용모가 네 아비(서유신)를 많이 닮았고 또 돌아가신 재상(서지수)의 모습도 있다. 너의 집안 일을 생각할 때마다 항상 나 때문이었다는 탄식을 하곤 했다. 3대 정승 집안을 내가 잊을 수 없었는데 지금 네가 출신하였으니 나의 빚을 갚은 셈이다.” 제3자가 읽어봐도 가슴 찡한 말이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말이 있거니와, 국왕은 아버지와 동일시되던 존재였다. 따라서 신하는 국왕의 입장에서 보면 죽석공은 사랑스러운 아들과도 같은 존재다. 죽석공의 조부인 문청공 서지수(徐志修)는 정조 자신이 왕세손으로 있을 때 지도를 받았던 스승이었다.
그런데 부친인 대제학을 지낸 문정공 서유신은 정조7년에 모함을 받아 전리(田里)로 방축되는 일을 당했다. 이 점에 대해 정조는 늘 미안하게 생각한 것이다. 정조는 임금과 신하 사이에도 대대로 이어온 구신(舊臣)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영보를 남달리 보았던 것이다. 정조는 서영보의 장원 급제를 기념하여 “옛 정의를 되새기는 일을 날을 넘겨서야 되겠느냐. 고 영의정 서지수의 집에 승지를 보내 치제하도록 하라. 지난 일은 모두 덧없는 세상 탓으로 돌리고 그 아들이 출신(出身)하였으니 그 아비도 서용하고자 한다”고 했다.
정조가 왕세손일 때 서지수를 필두로 박성원(朴聖源), 남유용(南有容)을 스승으로 모셨다. 정조는 평생 이 세 사람들의 은혜를 잊지 않았고 그 후손들이 과거에 급제했을 때마다 자신의 성취처럼 좋아하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특히 남유용과 서지수는 국왕의 총애를 받아 똑같이 문정공(文淸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남유용의 아들 남공철이 문과에 올랐을 때 죽석이 치제관으로 갔다. 이러한 관계는 국왕의 치제문에 잘 드러나 있다.
“나의 보양관은(曰余輔養) 두 분 문청공이었네(惟兩文淸) (…) 왕명을 가진 저 사람은(彼銜王命) 서 문청공의 손자라네(徐文淸孫)”
죽석의 글은 죽석관유집(竹石館遺集) 8책(필사본, 不分卷, 521판)에 남아 있다. 명문가 후예답게 주요 정책에 대한 건의나 선비다운 처세로 사퇴하는 상소가 많이 실려 있다. 특히 관서응지계(關西應旨啓)는 전정(田政)과 군정(軍政) 조정(糶政, 미곡정책), 민고(民庫) 등 ┨?정책에 대한 총론을 쓰고 그 아래에 평양(平壤), 영변(寧邊) 등 지역 실정을 밝혀 현실에 맞게 피력한 점에서 주목된다.
민교오칙(民敎五則)이란 글도 눈길을 끈다. 사친(事親), 경장(敬長), 수업(修業), 지신(持身), 치가(治家) 등 총 34항목으로 나누어 서술했는데, 행동으로 옮길 수 있도록 요약한 점이 돋보인다. 우리 시대에 적용해 시민운동으로 펴도 좋을 규범이다. 그의 명문장은 정조가 그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顯隆園) 참배길에 고갯마루에서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적은 지지대비문을 통해서도 감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