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가 열전](17) 조선 후기 - 백하 윤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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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예술을 논할 때 시대와 사람을 불문하고 늘 화두가 되는 것이 있다. ‘정체성 문제’가 그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알고 보면 시대에 따라 논의의 경중이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정체성이 없는 것으로 우리 예술이 채워지거나 공격받는 것에 대한 반작용 정도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일제세대가 민족문화의 말살위기 앞에서 우리문화의 정체성 문제가 가장 심각하게 제기되었다면, 그때가 정체성을 찾아내기가 가장 모호한 때 중의 하나인 듯싶다.
그러면 우리 글씨에서 일종의 정체성을 문제 삼는 ‘조선색’이란 어떤 것인가. 예컨대 초기 이용, 중기 한호, 후기 윤순, 말기 김정희 모두 조선의 걸출한 서가임이 분명하다. 이중에서 귀족미의 안평체, 전형미의 석봉체, 고졸미의 추사체 모두 시기는 다르지만 모두 일가를 이루면서 자기 색깔을 확보하고 있음은 물론이고 시대서풍을 뚜렷이 선도하여 왔다. 더 나아가 이들의 성취는 또한 당시부터 중국과 비견되거나 그들을 능가하는 것으로 평가되어 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글씨의 최고 아름다움에 대해 당시나 지금 ‘조선적이다’라는 평가가 우선되지는 않는다. 긍정적인 의미에서 이들 시대는 상대적으로 ‘조선적이다’라는 인식이 굳이 필요치 않았던 때인지도 모른다.
# 진정한 조선 글씨, ‘동국진체’의 다양함
이에 비한다면 백하 윤순(1680~1741)이 생존한 전후시대는 여타 시대와는 분명 다르다. 즉 시대상황은 임진·병자 양란과 대륙의 질서가 재편되는 명·청 교체기 이후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한 조선의 팽배한 자존의식으로 북벌(北伐) 도모를 계획한 때이다. 사상 또한 관념에서 현실을 문제 삼는 실학으로 바뀔 때고, 문예사조는 사실을 지향하면서도 그 속에서 참됨(眞)을 찾아낼 때이다. 요컨대 모든 방면에서 조선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가장 절실하게 묻지 않으면 안 될 때라고 할 수 있겠다.
글씨만 봐도 진정한 우리 것이 무엇인지를 규정하고 있는 ‘동국진체(東國眞體)’의 개념이 등장한 것이 그 단적인 예다. 허전은 “동국진체는 이서로부터 시작되어 그 후의 윤두서 윤순 이광사 등은 모두 그 실마리를 이은 자들이다”라고 할 정도다. 당시 조귀명 또한 “우리나라의 서법은 대략 세 번 변하였다. 국초에 촉체(蜀體:송설체)를 배웠고, 선조 인조 이후로는 석봉체를 배웠으며, 근래에는 진체(晉體:왕희지체)를 배우고 있다”고 한 바 있는데, 이용 한호 윤순이 그 해당인물이 된다. 요컨대 백하는 송설체가 퇴조하고, 석봉체가 관각체(館閣體)로 떨어진 조선후기 새로운 시대서풍을 꽃피운 인물로 자리매김된다. 즉 왕법을 토대로 당 송 명의 여러 명서가, 특히 미불과 동기창을 소화해냄으로서 백하 이후 후기서단을 주도한 이광사 조윤형 강세황 등의 서풍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옥동 이서와 백하 윤순은 글씨에서 왕희지를 토대로 하고 있지만 백하는 한걸음 더 나아가 미불과 동기창을 수용하여 옥동과는 서풍이 현격하게 차이가 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백하와 사제관계인 이광사 또한 왕희지법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글씨의 이념형은 같지만 해서와 행·초서는 물론 그 이전의 전서와 예서 등 오체겸수를 실천했다는 점에서 현격하게 차이가 난다. 요컨대 ‘동국진체’ 시기 서예는 같은 이념형을 가지고 있지만 실천에 있어 개별성이 두드러지는 흐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백하는 조선글씨의 정체성을 가장 문제 삼는 시기에 중핵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라 하겠다.
# 굳세되 비속(卑俗)해지지 마라
그렇다면 이러한 백하는 글씨에 대한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가. 백하는 자신의 서첩을 평한 글에서 “비록 획의 뜻은 얻었으나 그 뜻이 먼저 속된 눈에 들고자하는 데 있다면 그 짜임새는 비속하게 된다. 그러므로 뜻이 항상 굳세고 속되지 않은(창경발속·蒼勁拔俗) 곳에 있은 뒤에야 그 성취가 필경 크게 나아갈 수 있다”고 하였다. 백하는 글씨의 정도(正道)를 그 짜임새나 획이 아니라 ‘굳세고 비속(卑俗)하지 않은’ 뜻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백하는 이러한 태도로 18세 봄부터 글씨공부를 시작하여 37세 겨울까지 족히 20년을 공부하고 나서야 비로소 글씨에 대한 고질(痼疾)과 독실한 공부가 스스로도 옛날 사람보다 못하지 않다고 말 할 수 있게 됨을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백하의 글씨철학은 또 그의 생활 속에서도 그대로 실천되었다. 즉 극심한 당쟁 속에서 직심(直心)과 절의(節義)의 조선의 선비정신 그대로 산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고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백하는 1716년 홍문관 부수찬 재직 시 숙종임금이 약원(藥院)을 나무라며 조정신하를 진퇴시킨 데 대하여 “전하께서 조정을 바꿔 조치하시는 것이 본래 바둑알 뒤집듯이 하셨지만 그 갑작스럽고 황급한 것이 또한 오늘의 조치와 같은 적이 없습니다”라고 직간(直諫)을 할 정도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백하는 숙종 경종 영조 3대에 걸쳐 30여년 동안 당쟁에 휘말리지 않고 80여 차례나 관직에 제수되었는데, 청렴하기는 영조가 ‘백하의 깨끗함(淸)이 너무 지나칠 정도다’라고 할 정도이다. 오죽했으면 평생 집 한 채를 가지지 못해 형인 윤유가 장만해 주었을까.
#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따라올 자 없는 백하체
그러면 이러한 백하의 예술정신이나 생활철학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백하의 가문은 동서분당 이후 서인(西人)이었고, 노소분당 이후 소론(小論)으로 김장생 송시열 등의 노론학맥에 반해 윤증 박세당 등의 학맥을 이었다. 그러나 백하의 생각과 행동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가학(家學)으로 내려온 양명학(陽明學)이다.
이것은 백하가 40여년을 스승으로 모셔온 정제두의 ‘제문(祭文)’에서 치양지(致良知:양지에 이르게 함)의 심학(心學)이 바로 스승의 삶이었음을 증언하는 대목에서 짐작이 간다. 즉 “이 마음을 간직하여 온갖 이치를 정하게 하고(存此心而精萬理), 이 마음을 실하게 하여 온갖 일에 응했다(實此心而應萬事)”는 것이 바로 양명학의 화두인 심즉리(心卽理)를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본연의 천을 즐겼다(樂其本然之天)”는 것은 본래 타고난 양지(良知)를 즐겼다는 말이다.
이러한 학문과 실천 속에서 배태된 굳세고 비속함이 없는 백하 글씨에 대해 “오직 백하 윤공이 천년 뒤에 태어나 뛰어남과 빼어남으로 조선의 고루함을 단번에 씻어냈다. 김생 이하 여러 서가를 다 취하여 그 빛나는 것을 가려냈으며 당·송·원·명을 깊이 터득하여 이를 왕희지에 절충하였다”고 홍양호가 평하고 있다. 하지만 백하 당대 사람들은 이미 “이전에도 없었고(前無古人) 이후에도 따라 올 사람이 없었다(後無來者)”고 할 정도로 상찬이 자자하였다.
〈이동국|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학예사〉
출처 : 나의 사랑 한국한문학
글쓴이 : 인간사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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