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김유신 열전과 본기의 오류에 대한 차이
(頗多釀辭 VS 事迹闕亡)
우리가 삼국사기를 볼때 무심코 넘어가는 부분이 있어서
한번쯤 이러한 오류부분을 알고 또한 본기와의 차이점을 고찰하면서
열전의 주종사료인 개국공 행록과 본기의 원사료인 구삼국사나 신라고기류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참조가 될것 같아 몇자 끄적거려 봅니다.
김유신 열전에서
祖武力 爲新州道行軍摠管 嘗領兵獲 百濟王及其將四人 斬首一萬餘級
父舒玄 官至 蘇判大梁州都督 安撫大梁州諸軍事
조부 무력은 신주도 행군총관이 되어 일찌기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왕과 그 장수 네 명을 사로잡고 1만여 명을 참수한 일이 있었다.
부친 서현은 벼슬이 소판 대량주도독 안무대량주제군사에 이르렀다.
이 열전의 이부분은 장청의 개국공 행록에서 입전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료에서 입전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진흥왕 시절에는 신라가 중국과의 교류 부분이 미약했을 뿐더러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할때이므로 마땅히
"조부 무력은 新州軍主"가 되어라는 신라식 관직을 사용해야하며
부친 서현의 벼슬이 蘇判大梁州軍主 라는 칭호가 올바르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총관이니 도독이니 하는 관직과 都督 安撫諸軍事 라는
관직은 당나라의 관직이기 때문에 후대의 사관이 소급 적용시킨 결과로
추측되기 때문입니다.
신라본기에서는 선덕여왕 11년 대야성 함락시
최초로 도독이라는 관직이 나오는데 열전에서는 군주라고 나오기 때문이지요
<본기의 내용>
이 달에 백제 장군 윤충이 군사를 거느리고 대야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도독 이찬 품석과 사지 죽죽 용석 등이 이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여기서 또한 선덕여왕 초기재위시 도독이라는 당나라 관직이 있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용된 것은 역시 후대인의 소급적용이라 하겠습니다.
<김유신열전의 내용>
대량성 회복 전투에서 승리한 후 품석부부 유골과 백제장군 8인과 교환하는 내용에서
"우리 군주 품석과 그 아내 김씨의 뼈가 너희 나라 옥중에 묻혀 있다"
(我軍主 品釋及其妻金氏之骨, 埋於爾國獄中....)
열전에서는 당연히 신라인 장청의 기록이니 올바른 관직을 사용되었다고 판단됩니다.
또한 낭비성 전투에서
본기에서는 副將軍 이라는 칭호와 열전에서는 中幢幢主 라는 엇갈린 관직이 적용된바
부장군의 관직 역시 후대인의 관직적용으로 보는게 타당할 것입니다.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편찬시 관직을 고쳤다면 고려시대의 관직적용일 것이고
고기류를 적용시켰다면 원전역시 후대 고려시대의 것으로 봐야 한다고 봅니다.
김유신 열전에서 보이는 김춘추의 고구려 청병내용중 일부분인 귀토설은
김유신의 공적과는 무관한 춘추공의 기지를 높이기 위한 내용으로 본기에 적용되어야 할
고기의 내용이 김유신 열전에 수록된 것으로 보이며 진평대왕12년 본기에 보인다는 주석은
선덕여왕 11년의 내용을 잘못 적용시킨 삼국사기 편찬자의 오류로 보입니다.
진덕여왕2년 (648년) 대량성을 회복하고 백제 경내에 들어가 악성 등 12성을 함락시키고,
2만여 명의 머리를 베었으며 9천 명을 사로잡았다.
왕은 공을 논하여 유신에게 이찬의 작위를 주고 상주 행군 대총관으로 삼았다.
라는 내용으로 보아 김유신 장군은 648년에 2관등인 이찬에 올랐으며
무열왕 7년(660년)에 대각간(잡지 관직에 의거)에 올랐다면
본기에서 무열왕2년(655년) 겨울10월 기사중 "왕의 딸 지조가 대각찬 유신에게 시집갔다"는
내용은 잘못된 기사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는 각간(1관등)을 대각간 으로 誤記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열왕7년(660년)
봄 정월, 상대등 금강이 사망하였다. 이에 따라 이찬(2관등) 김유신을 상대등에 임명하였다.
라는 잘못된 기사로 아마도 각간(1관등) 김유신을 상대등에 임명했다고 하여야 올바른 내용이
될 것입니다.
물론 이런 정도의 오류는 관직의 소급 정도로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보아 줄수도 있지만
문제는 무열왕 2년(655년) 3월의 엉터리 기사가 눈에 뜨입니다.
바로 3월에 당 나라가 영주 도독 정명진과 좌우위 중랑장 소정방을 파견하여 고구려를 공격
하였다. 맏아들 법민을 태자로 세우고,
서자인 문왕을 이찬, 노차를 해찬, 인태를 각찬, 지경과 개원을 각각 이찬으로 임명하였다.
무열왕의 피래미 같은 자식들이 각찬,이찬,해찬(1,2,3관등)등 싹스리해 버립니다.
이부분은 삼국사기 편찬자들의 잘못 보다도 신라고기 또는 구삼국사의 원 사료가
엉터리였던 것을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입전을 시키면서 제대로 고증하질 않았다고 보여집니다.
김부식이야 나이가 많아 눈이 침침해서 이를 발견치 못했다는 것에는 십분 이해가 되지만
후대에 삼국사절요를 편찬한 사람들 역시 이 내용을 그대로 배껴쓰면서 왜? 발견치 못했는지?
이 역시 술이부작인가? 봅니다....ㅎ.ㅎ
문무왕7년(667년) 지경은 파진찬(4관등), 개원은 대아찬(5관등)으로 각각 2,3 관등씩 강등을
하게 되는데 이는 강등이 아니라 655년 무열왕 2년 기사의 오류로 보아야 마땅하다고 봅니다.
물론 개인적인 추론입니다만 열전의 오류중 행록에서 입전된 것은 파다양사(頗多釀辭=즉 자뭇 지어낸 말)
로써 부풀린 것만 걷어내는 것과 달리 문장이 거칠고 졸렬하며 사적의 내용이 누락(文字蕪拙 事迹闕亡)
된 원전을 끼워 맞추고 조작해야 하는 작업에 있어서 어떤 것이 더욱 심각한 오류를 일으키는지는
곰곰히 생각해 볼 문제인 것으로 삼국사기 내용을 보다 면밀하게 살피지 않으면
오류자체가 알게 모르게 진실로 받아 들여진다는데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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