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한반도에 산이 많아서 사자가 살 수 없었다라는 뉘앙스의 글을 쓰셨는데
호랑이가 초원에 살았듯이 사자도 산에 살았습니다 -백여년전까지 중앙아시아 초원에서 호랑이를 볼 수 있었습니다. 로마인들이 경기장 서커스에서 보았던 호랑이는 뱅골 호랑이가 아니라 중앙아시아에 살았던 카스피 호랑이였습니다
사자들 중에서 가장 풍채가 좋았다는 바바리 사자의 마지막 사냥지가 아틀라스 산맥이었습니다
사자는 그리스에서 인도까지 살았는데 그 지역은 초원보다는 산악이 많은 지형이지요
사자가 현재 아프리카 초원지대에서만-극 소수는 인도- 볼 수 있는 것은 인간들이 워낙에 많이 잡아 죽여서 그 지역에서만 살아 남았기 때문입니다
그 전에 하나 생각해보실 것이
만약 서역을 통해서 왔다면 왜 고구려에는 사자 흔적이 없을까 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호랑이 흔적은 있어도 사자 흔적은 없는 것으로 입니다
고분 벽화로도 그렇고 고고학도 그렇고
서역과의 교류도 고구려가 신라보다 더 했으면 더햇을 것인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살아 있는 사자가 안들어왔거나 아니면 사자와 연관된 매개물이 고구려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거나 둘 중 하나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김용만 선생님 서적을 보니 고구려에서 불교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서역 문화의 매개체는 중국이거나 북방 유목민족이거나 불교일 것입니다
그런데 중국이나 북방 유목민족들이 사자를 직접 소개했을리는 가능성이 낮고 불교일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실제 우리나라에서 사자 관련 미술이나 단어는 대다수가 불교 관련 용어라는 것도 사자와 불교와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라에서 발견된 서역 물품에도 사자와 관련되는 물건은 없는것으로 압니다
이건 여휘님이 저보다 더 잘 아실 것 같고요....
일단 본론으로 들어가면
저도 생물학 전공은 아니지만 생물학 서적을 보니 우리나라에서 동굴사자의 화석이 출토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그 시기는 박혁거세는 물론이고 단군할아버지도 훨씬 전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야생 사자는 없다고 보아야겠지요
19세기 후반부에서 20세기 초까지 우리 야생 동물들을 기록한 선교사나 일본 학자들 기록에도 사자는 없습니다 -만주 붉은 승냥이를 재칼로 잘못 기록한 것은 있다고 들었습니다만은...
실제 북청사자놀음이나 봉산탈춤 등에 나오는 사자탈이 사자와는 거리가 있는 추상적 형태이고
김홍도 그림 중에 노여도라는 그림이 잇는데 고양이 몸에 갈기만 붙인 수준이라..
그리고 사자를 보지 못했을 중세 유럽 화가들은 사자를 복실 강아지 처럼 그리기도 했습니다. 성 마르코(마가) 옆에 강아지처럼 잇는 동물이 사자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자라는 동물을 직접 보았을 가능성은 희박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자 관련 민담의경우
'한국 민담을 모아놓은 서적은 교보문고 인터넷 검색만 해봐도 주루루 나오는데
세계민담전집1권 한국의 민담 편도 있고 한국 민담 연구류 서적도 있지요
여러 종류도 있고, 저 나름대로는 시중에 나오는 출처 불명인 아동용 한국 전래동화까지 보았지만 사자 관련 민담은 거의 없다시피 했습니다
제가 본 것은 딱 하나...
요약하면 폭군 사자가 하루에 한 마리씩 자신의 먹이가 되라고 합니다. 이에 분을 갈던 토끼가 사자를 연못으로 유인해 저기 너보다 더 힘센 놈이 잇으니 한 번 붙어 보라해 사자를 연못으로 다이빙 시켜 죽인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문제는 자타카-확실치는 않습니다 오래되어서- 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봤습니다
그 외에는 사자 관련 민담을 본 적 없습니다
있다면 이사부 관련...
구비문학 관련 수업을 들을 때도 사자 민담은 나온 적이 없었습니다
호랑이 곰은 많이 나왔지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사자란 동물이 매우 낮설었던 동물이고 사자는 민중들이 결코 보지 못햇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지요
북방 유목민족들이 사자를 소개햇을 가능성의 경우, 스텝로드에는 사자가 살지 않았으며, 가축을 해치는 사자의 경우 긍정적이라기 보다는 부정에 가까운 이미지였습니다
유목민족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성경에서 '악마가 사자처럼 으르렁 거린다'라는 표현이 잇는 것으로 보아 사자는 딱히 긍정적인 동물로 여겨졋을 가능성이 희박합니다
즉 북방 유목민족들이 사자를 소개햇을 가능성은 낮습니다
또한 중국을 통해 전해졌다면 필시 가죽 이상이 전해졌을 가능성은 낮다고 봅니다
게다가 앞에서도 말했지만 사자 조각이나 사자 관련 단어가 주로 절이나 불교 관련 용어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사자는 불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럼 이사부는 언제 불경을 알았냐인데...
당시 중국에서도 불경 번역 작업은 완결되지 않은 형태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구마라습의 불경 번역이 이사부 시대보다 한 세대 앞서기는 합니다만은.. 아직 완결 형태는 아니고 오역이 많았던 형태였다고 합니다
현장 스님-서유기의 삼장법사- 시대에 와서 불경 번역이 완결된 것으로 저는 압니다-틀렷으면 지적 요망-
그리고 설명 불경이 잇었다 해도 불교가 공인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이사부가 과연 불경을 읽었을 수나 있는지, 읽고 나서 과연 사자가 어떻게 생긴 동물인지 알았을 가능성 역시 희박합니다
이사부의 지식으로서는 사자라는 동물이 서역에 있는 맹수다 이 정도 이상은 생각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자 목각상을 만들 수가 있을까요?
게다가 삼국유사에서 환인을 제석-인드라신-으로 소개하고 아란불 가섭원이라는 지명-아란과 가섭은 싯다르타의 양 대 제자- 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불교 승려들이나 불교 신자였을 학자들이 후대 역사를 기술하면서 나름의 가필과 첨가를 했으리라 보입니다
단재 신채호의 지적대로 당시 문서 활동이 절의 승려나 불교 신자였을 지식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그들이 자신의 세계관으로 이야기를 고쳣을 가능성은 다분합니다
몇 가지 첨가도 햇겠지요
이차돈 순교담에서 머리를 베니 젖과 같은 피가 쏟아졌다도 불경이나 인도 설화에서 유사성을 찾아 볼 수 있지요
사도 바오로 행전-외경-에도 사도 바오로의 머리를 베니 젖과 같은 피가 나왔다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젖과 같은 피는 아마 서역에서 비교적 흔히 쓰인 수사였던 듯 합니다
그 서역의 수사가 불교를 통해서 우리에게 들여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일종의 야사 형태로 전해졌고 구삼국사를 거쳐 삼국사기에 별 무리 없이 소개된 듯 보입니다
사자의 경우 문수보살에서 사자의 강력한 힘이 느껴집니다
지혜의 상징 문수보살이 사자를 타고 다니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문수보살의 경우 화엄경 선재동자의 구법여행에서 크게 묘사되지요
화엄경의 한문 번역이 대략 6-7세기였던 것으로 보여지는 학설을 고려하면 이사부 사자 이야기는 이 화엄경이 전해지고 나서 덧붙여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산국 관련해서는 죄송합니다
그냥 제 추측이었을 뿐...
저를 과대평가하지 마세요...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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