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김유신장군의 열전내용이 후손 장청의 개국공행록 10권에서
배꼈다는 것과 본기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열전내용이 과장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매우 고민없는 단순한 주장으로 보입니다.
우선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행록10권 내용을 아무 생각없이 입전 시켰는지?
아니면 본기에 언급되지 못한 것을 행록으로 보충하였는지? 그리고 그 보충부분이
본기보다는 열전에 입전시켰는지? 그 문제를 먼저 확실하게 매듭을 짓고
그냥 과장되었다 본기내용과 틀리므로 아니다 이런 주장이 따르야 하는데
누구도 본기와 열전내용이 반드시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조차 밝혀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전투는 같은 지역에서 하루에도 몇번씩 일어 납니다
하물며 비슷한 시기에 같은 장소이지만 다른 장수가 총수가 되어 전투를 치루면 그전투는
엄연히 다른 전투가 되지요
우선 옥문곡 전투가 같은 전투인지? 다른 전투인지?
같은 전투로써 본기와 맞는지? 열전내용이 맞는지? 누구도 밝혀 내질 못한채
다만 열전 내용이 후손의 뻥튀기 기록이라고만 말합니다.
뻥튀기 기록이라면 그 전투에 대한 치밀한 연구검토결과에 의해 결론을 내려 주셔야 하는게 아닌지요?
열전에 따르면 대량성 옥문곡 전투로
왕이 논공(論功)할 때 김유신에게 직질(職秩)을 더하여 이찬(伊飡)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을 삼았다
라는 구체적 기록을 어떻게 반론할지?
하지만 기록에 나타난 수급자의 수효는 때로는 과장일 수가 있으나 그런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적을 일만명을 죽이고 아군이 천명이 죽는 전투보다도 차라리 적을 겨우 수백명 죽이고 아군 피해가 없는 것이
오히려 훨씬 전공이 큰 전투일수도 있으니까요!
무엇보다도 개인적으로는 열전기록조차 김유신의 전공기록이 많이 누락되었다고 보는 편입니다..
그 이유는 겨우 열전에 기록된 정도의 전공으로써 태대각간에 흥무대왕까지 그리고
태종묘호를 바꾸라는 당황제의 명령에도 김유신을 내세울 정도이며 김유신묘의 회오리바람 사건으로
신라 혜공왕은 대신 김경신을 보내 제사를 드려야 할 정도의 신라에서는 절대적 존재의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겨우 열전 정도의 전공으로써 저러한 무결점의 입신의 경지에 오를수가 있는지?
그것이 우선 이해가 되질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시 신라시대로부터 조선시대까지 사대부들은 물론 뭇사람들로 부터 어떻게 존경이 대상이 될 수가 있었을까요?
심지어는 조선시대까지 김유신 장군의 묘소에 국가적 차원으로 치제를 들이면서 그를 존경했고
역사기록에서 비교적 실증적인 경향을 보인 안정복선생의 동사강목 조차도 김유신의 열전내용을
대부분 수용한 것은 그의 공로를 누구도 의심치 않았던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보여집니다.
오히려 그가 입신의 경지에 오르면서 사후 흥무대왕으로까지 추봉된 사유가 열전의 기록만으로는
터무니없이 그의 공적이 누락되고 부족하다고 여긴 까닭에 열전내용을 대부분 그대로 수용한 것이
아닌가?라고 개인적으로 추측해 봅니다.
아마도 우선에 저러한 무결점 입신의 경지에 도달될려면 그의 누락된 공적을 찾아도 한참 더 찾아 내어야만
그의 무결점 입신의 경지에 대한 설명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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