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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유신 열전의 치명적 오류점들...

회기로 2011. 3. 1.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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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유신의 첫전투였던 낭비성 싸움에서 그의 직함은 무엇일까?

 

"건복 46년 기축(진평왕 51년: 629) 가을 8월에 왕이 이찬(伊湌) 임말리(任末里), 파진찬 용춘(龍春)·백룡(白龍), 소판(蘇判) 대인(大因)·서현(舒玄)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하게 하였다. 고구려인이 군사를 출동시켜 이를 맞아 치니, 우리편이 불리하여 죽은 자가 많고, 뭇 사람들의 마음이 꺾이어 다시 싸울 마음이 없었다. 유신이 그때 중당 당주(中幢幢主) 였었는데, 아버지 앞에 나아가 투구를 벗고 고하였다.

 

중당당주를 풀어 해석해보면 中幢의 부대장이라는 뜻인대 삼국사기 다른 역사기록 어느곳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본서 권40 잡지 직관지 하에 실려 있는 仲幢은 문무왕 11년(671)에 설치되었다고 하였으므로 671년에서야 생겨난 중당이라는 관직을 김유신이 갖고 있었다는 소리인가?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평왕 51년(629)조의 기록에는 김유신의 이 당시 직함을 ‘副將軍’으로 기록하고 있다. 신라본기 기록이 맞는걸까? 40여년 후에나 설치된 중당의 당주로 있었다는 김유신 열전을 믿어야 하는게 옳을까?

 

2. 648년 소정방의 20만 당나라군의 백제 정벌.

乃詔許 勑將軍蘇定方 以師二十萬 徂征百濟 時庾信爲押梁州軍主 若無意於軍事 .. 중략...

소호금천씨 의견대로 직역이 아니라 의역하자면, 신라본기에 나와있는 내용처럼 청병을 허락한거라고 할수도 있겠으나, 전혀 엉뚱하게 648년에 소정방에게 20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게 하였다는 구체적인 문구가 문제가 되는것입니다. 제가 사료를 오독한게 아니라, 왜 하필이면 소정방의 20만군대의 기사가 648년에 뜬금없이 등장하느냐는 말이죠. 이병도의 주장대로 그러한 문구는 660년에 나와야 함에 옳죠. 이병도의 주석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겠습니다.

 

이 때(648) 唐 太宗은 金春秋의 請에 겉으로 허락하였을 뿐이고, 蘇定方에게 출동 명령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정작 蘇定方에게 출동령을 내린 것은 다음 高宗 顯慶 5년(660)이었다(이병도, 《國譯 三國史記》, 621쪽). 본서 권5 신라본기 진덕왕 2년(648)에서는 군사출동의 약속을 받았다고 쓰여 있을 뿐이다. 따라서 『소정방에게 명하여 군대 20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게 하였다』는 설명은 잘못된 것이다. -이병도-

 

3. 당나라의 신라침공 실패계획.

김유신 열전에 660년 백제왕과 신료 93인, 병사 1만 명을 포로로 잡아 9월 3일 사비로부터 배를 타고 돌아가고 낭장 유인원(劉仁願) 등을 남겨 지키도록 하였다. 정방이 포로를 황제에게 바치니 천자가 위로하면서 “어찌 내친 김에 신라를 치지 않았는가?” 하고 물었다. 정방이 말하기를 “신라는 그 임금이 어질어 백성을 사랑하고, 그 신하들은 충성으로 나라를 섬기어 아랫 사람이 윗 사람을 부형처럼 섬기니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도모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였다. "

141) “신라는 …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도모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는 唐書에는 보이지 않는다. 《舊唐書》 권3 高宗本紀 上에 ‘責而宥之’했다고 간략히 기록하고 있다. 윗 표현은 통일 이후의 윤색으로, 바로 당시의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李昊榮, 〈新羅 三國統一에 관한 再檢討〉, 《史學志》 15, 1981, 28쪽).

 당나라 역사서 어디에서도 660년 백제정벌후,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직후 신라를 치라고 명령한 기록내지 시도를 한 흔적 자체가 없고,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도 전혀 언급되지 않았는대, 왜 하필 김유신열전에만 이런 기록이 남아있을까? 그렇다면 신당서,구당서,삼국사기 신라본기의 모든 기록을 제쳐두고 김유신 열전의 기록이 더 신빙성 있는 기록일까? 김유신을 찬양하기 위해 그의 후손이 당나라도 그를 겁냈다고 왜곡한 내용일 가능성이 더 크지 않을까? 단순히 당서와 신라본기 내용모두를 무시하고 김유신 열전 기록을 곧이곧대로 믿어야 할까?

 

 

4.신라군이 남천주에 주둔하였다는 661년 기록?

문무왕 원년] 6월에 당나라 고종 황제가 장군 소정방 등을 보내 고구려를 정벌하려 할 때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하고 있던 김인문이 명을 받고 돌아와 출병일을 알리고 겸하여 출병하여 함께 치기를 권유하였다. 이에 문무대왕은 유신, 인문, 문훈(文訓)등을 인솔하여 많은 병사를 출동시켜 고구려로 향하였다. 행군이 남천주(南川州)에 이르렀을 때 주둔하고 있던 유인원이 거느린 군사를 사비로부터 배를 태워 혜포(鞋浦)에 이르러 하륙시켜 또한 남천주에 주둔하고 있었다.

 

본서 권6 신라본기 문무왕 원년(661) 8월조에서는 대왕이 諸將을 영솔하고 始飴谷停에 이르러 머물렀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옳을 듯하다. 왜냐하면 다음 문장에 『有司의 급보에 의하면 前路에 백제군이 甕山城(현재의 대전광역시 大德區 鷄足山城)에 웅거하여 있다』고 하였으므로, 왕과 유신의 군대가 아직 南川州에 이르지 못한 것이 확실하다. 따라서 유인원의 군대도 남천주에 주둔하였다는 표현도 그 사실성이 의심스럽다. 始飴谷停의 위치는 알 수 없다. 유인원도 이 때 南川停에 온 것이 아니라 始飴谷停에 와서 신라군과 같이 행군하였던 것 같다는 견해가 있다(이병도, 《國譯 三國史記》, 629쪽). 이는 《金庾信行錄》의 찬자가 두찬한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군이 옹산성을 지나간 점으로 보아 웅진에서 유인원 군대와 만나기로 약속하였던 듯 하다.

 

 

 

과연 이러고도 일본서기보다 김유신 열전이 사료적 신뢰성이 높다고 단정지을수 있을까? 

본기와 열전의 기록이 이렇게 큰차이를 두고있다. 그럼에도 김유신 열전의 내용이 무조건 옳다고만 따질것인가?

 

김유신의 행록을 읽다보면 찬양하고 높이기 위해 쓴 여러 미사어구와 그를 신격화 하기 위한 신의계시나, 자신이 죽을것을 알고 하늘에서 음병들이 내려와 울었다는 허무맹랭한 내용도 많으며, (이건 건국시조보다도 더 드라마틱하고 뛰어나게 그려져 있다.). 더군다나 신라본기나 당나라역사서에서도 전혀 없는 시기도 전혀 다른 엉뚱한 내용들이 김유신 열전에 수록되어 있다면, 전공정도야 충분히 과장하고 왜곡할 가능성이 매우 클 개연성이 많다. 김부식 조차도 "유신과 같은 이는 우리 나라 사람들이 칭송하여 지금(고려)까지 끊어지지 않으니, 사대부가 알아줌은 당연하지만 꼴베고 나무하는 어린아이까지도 능히 알고 있으니 그 사람됨이 반드시 다른 사람과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라고 평하였다.  또한 김유신을 을지문덕이나 장보고 같은 위인들보다도 더 뛰어나고 훌륭하다고 찬양하며 사론까지 달았다. 김유신의 행록 열전이 김부식에 의하여 오히려 축소되었고 삭감되었다는 주장역시 신빙성이 매우 떨어진다. 또한 이렇게 김유신을 찬양한 김부식 조차도 김유신의 행록이 거짓되고 꾸며진게 많다고 인정하였다.

 

이렇게 과장되고 오류점이 많은 김유신 열전에서 조차도 대야성을 김유신이 함락하였다는 문구는 전혀 없다. (대야성에서 끝끝내 싸우다 전사한 13번째 관직의 하급관리이자, 가야출신의 인물인 죽죽에게 따로 열전까지 지어서 알린 신라인들이다. 그런대 대야성을 함락한 영광스러운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다는것이 말이될까?) 그럼에도 단순히 자신의 개인적 의견만을 내세워 대야성의 수비병력을 물리쳤다는 문구 하나만으로 대야성이 함락되었다고 주장하는것이 과연 옳을까?

 

누누히 강조하지만, 왜 김유신의 후손들은, 김유신을 신격화 시키며 여러가지 미사어구를 동원해 찬양하면서도 정말 김유신이 대야성을 함락시켰으면서 상징적으로 백제와 고구려 멸망 다음으로 큰 전공이었을 진대., 그러한 내용을 행록에 남겨 가문의 영광으로 후세에 널리 알리지 않았던 것일까???

 

결론: 물론 그렇다고 하여, 김유신 열전의 모든 내용이 다 거짓이고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것은 아니다. 옥문곡 전투처럼, 본기의 내용에 대해 더 자세히 묘사하고 부연설명한 부분도 많고 이는 중요한 사료적 가치성을 지니는 바이다. 하지만, 본기의 내용과 전혀 상반되거나 없는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기보단, 한번정도는 그 진위여부를 고려해봄직이 옳다.

출처 : 우리역사문화연구모임(역사문)
글쓴이 : 백제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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