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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녕 비봉리패총 유적 모습(사적 제 486) 우리나라에서 조사된 최초의 저습지유적으로, 이곳에서는 다양한 유기물들이 출토되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
ⓒ 창녕 비봉리패총 발굴보고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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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비봉리패총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내륙의 패총유적일 뿐 아니라 저습지유적이기도 하다. 저습지유적의 특징은 유기물들이 그 상태 그대로 보존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인데, 이러한 유물들을 수습함으로서 당시의 식생이나 환경, 혹은 당시 사람들이 사용하였던 물건들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를 복원함으로서 그 당시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러한 점에서 비봉리패총에서는 흥미로운 유물이 여럿 출토되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연구자들과 언론에 많은 관심을 받았던 게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배였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배는 8~9세기경에 만들어진 경주 안압지의 배로 알려져 있었는데, 이번에 발굴된 배는 무려 8천 년 전의 것이다. 이는 국내는 물론이거니와 세계적으로도 희소성이 있는 유물로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이 외에도 여러 유기물들이 발견되었는데, 도토리나 가래 같은 식물은 물론, 개머리뻐나 멧돼지이빨 같은 동물유체, 그리고 망태기까지 발견되었다. 망태기 같은 유물은 매우 썩기 쉬워서 발굴되는 예가 극히 드문데, 신석기시대의 그것이 아직까지도 잘 보존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매우 크다.
우리나라 최초의 배는 어떻게 생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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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봉리패총 1호 배의 모습 비봉리패총에서는 2척의 배가 출토되었다. 신석기시대의 배로서 세계최초에 해당할 정도로 이른 시기의 유물이다. |
ⓒ 창녕 비봉리패총 발굴보고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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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배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바다에서 타는 큰 배나 보트 정도를 떠올린다. 역사상의 배를 떠올린다고 한다면 임진왜란 때 활약한 거북선이나 판옥선 등을 생각한다. 이들은 나무판자를 이용하여 만든 배이고, 우리들은 흔히 이러한 배들을 일반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그럼 그보다 훨씬 이전의 배, 즉 선사시대의 배는 어떻게 생겼을까?
선사시대의 배는 우리가 흔히 아는 카누와 그 생김새가 비슷하다. 비봉리패총이 발견되기 이전에는 이러한 선사시대의 배의 모습을 주로 울산 대곡리 반구대암각화를 통해서 유추하곤 하였다. 울산 대곡리 반구대암각화는 신석기시대, 혹은 청동기시대의 생활 모습을 벽에다가 새겨 놓은 유적이다. 여기에서도 배에 사람이 탄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그동안은 이러한 자료들을 통하여 당시의 배의 모습을 대강 유추해 볼 수 있었다.
배는 나무로 만들기 때문에 썩기가 쉽고 보존이 어렵다. 이러한 배가 보존이 되려면 습지나 물 속에 장시간 노출되면서 부식을 막아야 되는데, 지금까지 발견된 여러 배들은 모두 이러한 공통점이 있다. 외국 또한 이렇게 썩기 쉬운 배가 발견되는 일은 극히 이례적이다.
일본의 경우 대표적으로 도리하마(鳥浜) 1호나 이키리키(伊木力) 유적 출토 배가 있다고 하는데, 이들은 비봉리패총보다 시대가 2천 여 년 정도 떨어진다. 중국의 과호교유적(跨湖橋遺蹟)에서도 8천 여 년 전의 배가 발견된 바가 있는데, 비봉리패총도 이와 비슷한 곳으로 보인다. 이러한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등 그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8천년의 잠을 깬 신석기시대의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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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봉리패총 출토 1호 배 본래 길이는 총 4m정도로 추측되는 통나무배이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이 배를 타고 생활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
ⓒ 창녕 비봉리패총 발굴보고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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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봉리패총 출토 2호 배 1호보다는 좀 더 작은 규모이며 하나의 통나무를 가지고 만든 것으로 보인다. 통나무를 U자형으로 파내어 만들었다. |
ⓒ 창녕 비봉리패총 발굴보고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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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봉리패총에서는 총 2척의 배가 발굴되었다. 1호는 현장설명회 당시에 그 존재를 발표하여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졌으며, 2호는 그 후에 또다시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동안 과거의 배 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여러 자료를 참고하여야했었는데 선사시대의 경우는 앞서 말한 반구대암각화와 서포항 조개무지에서 출토된 고래 뼈로 만든 노(櫓)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이번 발견으로 통해 그동안의 자료들을 넘어 당시 바닷가의 생활이 어땠는지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근거자료를 제시해준다.
일단 1호부터 살펴보자. 1호는 현장설명회 때 공개되었으며, 언론에도 중점적으로 보도되었었다. 신석기시대 토층에서 발견되었는데, 발견 당시 동서방향으로 놓여 있었다고 한다. 남아있는 최대 길이는 310㎝, 최대 폭은 62㎝, 그리고 두께는 2~5㎝라고 한다. 전체적으로 길쭉한 모습으로서 오랜 세월이 지났기에 역시 부식된 부분이 많다.
통나무를 파내어 만들었는데, 원래의 길이는 4m를 넘을 것으로 보인다. 제작 당시 군데군데 불을 태워 가공의 효율성을 높인 흔적이 발견되는데, 이는 석기로 깎기 쉽게 함은 물론이거니와 배가 완성된 후 방충해를 방지하는 효과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배의 재료는 수령 200년의 소나무로 밝혀졌다.
2호는 현장설명회 이후에 발견되었으며 출토된 토층을 명확하게 판단하기는 어렵다. 1호에 비해서 부식이 많이 되어 전체적인 모습을 파악하기엔 어렵다. 잔존길이는 64㎝이며, 잔존 너비는 22㎝이다. 그리고 두께는 1.2~1.7㎝로서 앞서 살펴본 1호에 비해서는 더 작은 편에 속한다. 수령이 많은 소나무를 이용하여 속을 U자형으로 파내고 비교적 두께를 얇게 조정하여 만들었다. 내부와 외부에는 폭 2㎝ 이상의 석부에 의한 가공흔적이 나타난다고 한다. 또한 제작 시에 생긴 것으로 추정되는 불에 그슬린 흔적도 남아 있다.
비봉리패총의 배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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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안압지 출토 배 통일신라시대의 유적인 안압지에서 출토된 배로서 3개의 나무를 잇대어서 만든 통나무배이다. |
ⓒ 국립경주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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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비봉리패총의 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까? 일단 당시의 배 모습과 이를 통하여 대략적인 생활의 모습을 복원해 볼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비봉리패총의 배는 통나무배인데, 이는 세계에서도 가장 널리 쓰인 배 중 하나이며 또한 가장 원시적인 형태이다. 최근까지도 남아있기도 하였는데, 대동강과 한강에서 주로 사용되던 '마상이'가 그것이다. 마상이는 한두 사람이 탈 수 있는 조그마한 통나무배로서, 통나무의 속을 파서 만든 형태를 말한다.
재미있는 점은 이러한 형태가 무덤에서도 발견된다는 것이다. 비봉리패총과는 시대적으로 꽤 떨어져 있긴 하지만 창원 다호리 고분군에서는 역시 통나무의 속을 파서 이를 관으로 만든 게 발견되었다. 바로 다호리 1호분이 그것인데, 이 외에도 시대를 불문하고 다양한 유물들을 이와 비슷하게 통나무를 파서 만들곤 하였다. 이는 가장 만들기 손쉬우면서도 효율성이 낫다는 점에 착안 한 것으로 보인다.
배의 경우 나중에 가서는 이보다 좀 더 발달하여 여러 쪽의 통나무를 이용하여 배를 만들게 되었다. 같은 통나무배라고 하더라도 외쪽배, 쌍쪽배, 두쪽배, 세쪽배 등 만드는 방법에 따라서 다양하게 구분을 하는데, 통일신라시대의 배로 보이는 안압지 통나무배의 경우엔 3개의 나무를 잇대어 만들어졌다. 이는 내구성을 좀 더 강하게 함은 물론이거니와 배에 더 많은 인원들을 타게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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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 대곡리 반구대암각화 중 일부 위는 고래를 잡는 배의 모습을, 아래는 배를 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반구대암각화를 통해 당시 어로문화의 일부를 엿볼 수 있다. |
ⓒ 국립해양유물전시관 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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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대암각화에서 보이는 통나무배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타고 있다. 고래잡이를 하는 용도로 보이는 배에는 무려 18명이나 타고 있으며 11명이 타고 있는 배도 보인다. 이러한 점은 반구대암각화가 조성될 시절에 이르러서는 바다에서 고래잡이 같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배의 규모가 더 커진 것을 의미하며 현재까지 많은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과거 조상들의 조선기술은 우리의 생각보다도 더 많이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럼 이 배들은 원양까지 나가서 고기잡이를 하는 용도였을까? 이에 대해서는 꼭 그렇게 보기는 힘들지 않을까 싶다. 당시 비봉리 패총이 있던 지역은 비봉만이라고 하여 바닷물이 들어오는 지역이었다. 동시에 밀물과 썰물이 들락날락 거리는 환경이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러한 상황에 맞춰서 물고기나 조개를 비롯한 다양한 해산물들을 채취하는데 쓰이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이 외에도 '떼배'라고 하여 뗏목배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떼배는 여러개의 가는 통나무를 평탄하게 펴놓고 서로 묶어 만든 것으로서 현재 동해안의 정동진을 비롯한 곳곳에 남아 있다. 그리고 지금도 남해안 일대 등에서는 갯벌에서 움직일 수 있는 뻘썰매 같은 작은 배들이 사용되고 있는데, 당시에도 이와 비슷한 용도로 배가 쓰이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2점의 유물만을 가지고 당시의 어로생활을 완벽하게 복원한다는 점은 무리가 따른다. 당시에도 좀 더 큰 규모의 배들이 마을 간의 교역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아직 발견이 안됐거나 부식되었을 뿐이지, 그러한 가능성까지 모두 배제할 수는 없다. 발굴을 통해 발견되는 이러한 작은 사항 하나 하나는 과거 사람들의 모습을 복원해주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준다. 비봉리패총은 그러한 단서들을 상상 이상으로 제공해주며, 이러한 자료를 제공하기 위해 다른 발굴보다 몇 배나 힘든 저습지발굴을 행하였던 고고학자들의 노고 또한 생각해 보면 어떨까 싶다.
한국 최초의 배는 어떻게 생겼을까?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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