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30년 이상 근무하면 닭에서 꿩으로 변하기가 어렵다. 아무리 이야기해보아야 소용없다. 닭장의 모이에 너무나 익숙해져 버렸고, 닭장을 벗어나면 죽는 줄 알기 때문이다. 회사에 20년 정도 있다가 나오면 꿩으로 바뀌는데 시간이 좀 걸린다. 굳어버린 날개 근육과 허벅지를 풀려면 어느 정도 물리치료를 받아야 한다. 10년 정도 있다가 나오면 적응이 수월하다. 10년 정도 닭장에 있던 닭이 나와 꿩으로 변하면 오히려 장점이 많다. 조직의 경험이 장점으로 작용한다.
꿩으로 있다가 더 진화하면 독수리가 된다. 독수리는 절벽 위로도 날아 올라가고 수백 미터 고공까지도 비상한다. 그 날카로운 발톱으로 뱀이나 쥐를 움켜쥐면 놓치는 법이 없다. 독수리의 발톱은 독보적인 전문기술이 될 것이다. 필자는 독수리를 흠모했는데, 요즘 보니까 부엉이도 괜찮은 것 같다. 낮에는 조용히 쉬다가 황혼이 질 무렵에 날갯짓을 시작한다. 남들은 보지 못하는 껌껌한 밤에 나무에 앉아 있다가 먹이를 잡는 시스템도 효율적이다. 장점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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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중국이 한국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서 중국의 내공이 생각만큼 깊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졸부(猝富)가 보여주는 그 어떤 면모를 보면서 실망을 많이 했다. 그럼에도 나는 중국의 명산(名山), 보이차, 수정방(水井坊) 때문에 중국 취향을 끊을 수 없다. 특히 중국 명산들의 장엄하고 기괴한 풍광은 한국 사람의 원초적 심성에 어필하는 바가 많다. 중장년의 한국인에게 산은 세상의 시름을 달래주고 '왜 이 세상에 왔는가'를 깨닫게 해주는 구원의 장소이다.
대만의 이림찬 선생이 쓴 '중국미술사'(장인용 번역)를 보니 중국 역대급 산수화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면서 흥미롭다. 토박이 전문가가 쓴 내용이라 서양학자 글과는 결이 다른 것 같다. 이림찬이 대만 고궁박물원에 수십 년간 근무하면서 작품들을 직접 들여다보고 썼으니 오죽하겠는가. 범관(范寬·950~ 1032)의 명작인 '계산행려도(谿山行旅圖·산과 골짜기를 지나감)'에 대한 설명도 마음에 든다. 암봉(巖峰)이 주는 장중함을 잘 표현해 평소 필자가 좋아하는 그림이다. 압도하는 바위 봉우리가 인간의 욕심과 한을 짓이겨 부숴버린다는 필자의 관념에 아주 부합하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삼단논법으로 이 작품을 감상해야 한다는 설명이 나온다. 산 정상의 나무와 풀은 하늘에서 내려다본 각도이고, 낮은 산의 사원은 능선에서 바라본 각도이고, 시냇가의 바위들은 평지에서 바라다본 시각이라는 것이다. 이 세 가지의 각도가 이 작품에 모두 들어 있다는 이림찬의 설명을 듣고 보니 그림 보는 재미가 배가 된다. 황공망(黃公望)의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도 좋다. 후한(後漢)의 엄광(嚴光)이 친구인 광무제가 주는 벼슬을 사양하고 숨어 살았던 곳이 부춘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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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용헌 살롱] [1097] 가야 불교의 성지가야는 백제보다도 더 패자이다 보니 오늘날 남은 기록이 거의 없다. 가야 불교의 구전 가운데 가장 압권은 지리산 칠불사(七佛寺)의 7왕자 이야기이다. 물론 '김해 김씨 대동보'라는 문중 족보에도 7왕자 이야기는 기록돼 있다. 어떻게 7왕자가 모두 도를 통하여 부처가 되었을까. 칠불사 터는 지리산 한복판에 있다. 김수로왕은 허황후(허황옥)와의 사이에 10남 2녀를 두었다고 전해진다. 장남은 왕위를 계승하였고, 둘째와 셋째 아들은 어머니 성(姓)을 이어받아 김해허씨의 시조가 되었다. 나머지 일곱 아들이 모두 외삼촌인 보옥선사(寶玉禪師)를 따라서 머리를 깎고 출가하였다.
고고학자인 김병모 교수가 30년 넘게 허황후의 고향 땅이 어디인가를 추적하고 다니며 쓴 '허황옥루트―인도에서 가야까지'(2010)를 보면 흥미로운 내용이 나온다. 허황옥 일족은 원래 인도의 아요디아에서 살다가 쿠샨왕조의 침입을 받아 중국 사천성의 보주(普州)로 이주했고, 보주에서 살다가 탄압을 받고 그 일파가 배를 타고 가야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보주에서 살던 허씨 성의 '허(許)'는 원래 '무사(巫師)'를 뜻하는 의미였다고 김병모 교수는 밝혔다. 허씨들이 원래 제사장 또는 브라만 계급이었다는 말이다. 그 허황옥이 출가한 아들 일곱 명을 보기 위하여 지리산 깊은 계곡을 따라서 칠불사에까지 왔고, 왕후가 머물던 자리가 오늘날 '대비촌'이라는 지명으로 전해진다.
일곱명 왕자 모두 부처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손위의 두 왕자는 분발심을 내게 된다. '동생들은 부처가 되었다는데 우리는 뭐했나. 우리도 도를 닦자.' 두 명의 왕자가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지리산에 들어왔는데, 이들이 도를 닦은 터가 오늘날 '허북대(許北臺)'로 전해진다. 칠불사 도응(道應) 주지스님에 의하면 허북대 위치는 칠불사 북쪽으로 10리쯤 되는 산봉우리이다. 지리산 반야봉의 맥이 토끼봉으로 왔고, 토끼봉의 주맥이 칠불사로 왔다면, 토끼봉의 지맥 하나가 내려가서 허북대를 만들었다고 한다. 칠불사는 다실(茶室)이 명당이다. 해발 700m 높이라서 바람이 친다. '업장이 녹는' 시원한 다실에서 차 한잔하였다.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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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 살롱] [1096] 食色同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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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용헌 살롱] [1095] 상인의 천칭(天秤)
천칭은 공평함을 상징한다. 로마신화에서는 정의의 여신 아스트라에아가 쓰던 저울이 하늘로 올라가서 천칭자리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선과 악을 이 저울에 달아보았던 것이다. 선과 악이 추상적인 개념이라면 이익과 손해의 물물교환 현장에서도 천칭이 필수적이다. 상품을 교환할 때는 공평해야 하기 때문이다. 동양에 비해 고대부터 훨씬 상업이 활발하였던 서양 문화권에서는 저울이 중요한 사회 정의의 상징이 된 것 같다. 그러니까 하늘의 별자리 위치까지 올라간 것이다. 동양의 열두 띠에는 동물만 있지 천칭(저울) 띠는 없지 않은가.
중동의 이란을 여행하면서 필자가 깊은 인상을 받은 대목은 거리의 상점 간판 곳곳에 이 천칭이 큰 그림으로 그려져 있는 장면이었다. 아랍은 동서양 중계무역으로 먹고살았던 문화권이다. 무역과 장사의 핵심이 공평함이라는 사실을 이란 사람들은 깊이 체득하였다는 증거이다. 속여먹으면 신뢰가 깨지고 결국 장사가 어렵게 된다. 한 번 속지 두 번 속나. 조선조는 상(商)을 천시하였지만 아랍(이란)에서는 장사가 주업이다 보니까 역설적으로 상업의 본질이 공평해야 한다는 사실을 체득하지 않았나 싶다.
직업을 통해서 고통도 받지만 깨달음도 얻는다. 이란의 중세 도시 이스파한. 시내 중심부로 강이 흐르고 그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고풍스러운 도시였다. 카펫을 하나 사러 중세 아랍의 분위기가 물씬 나는 가게에 들어가 보니까 달러를 유로로 환산하고, 유 로를 다시 이란 화폐로 환산하는 과정이 투명했다. 어리어리한 아시아 관광객을 속여먹을 법도 한데, 의외로 정직하게 값을 매기는 장면을 지켜보게 되었다. 장사를 통해서 도를 닦은 문명이 이슬람 문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장사는 이익을 추구하지만 말이다. 천칭은 이익과 공평함이라는 상반된 요소를 결합하는 도구였다. 이슬람의 골격은 천칭이 아닐까?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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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슬을 하면 얼마나 좋은가는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잘 알려져 있지만, 벼슬이 없는 것도 몇 가지 장점이 있다는 사실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벼슬 못해서 상처받거나 한이 맺힌 사람들에게는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유가(儒家)의 가풍은 과거 합격해서 벼슬을 하는 것이 코스이다. 이에 비해 도가(道家)의 가풍은 경물중생(輕物重生)이다. 물(物)엔 벼슬이나 명예도 포함된다. 벼슬이나 명예를 가볍게 여기고 개인적인 삶을 중시한다. 먹을 것만 있으면 산속에 들어가 살거나 명산대천 유람을 중요한 가치로 여겼다. 유가는 벼슬하다가 당쟁에 걸려 사약을 받거나 유배를 당해보면 그다음에는 도가의 '경물중생'이 맞는다는 것을 실감하고 노선을 바꾸는 경우가 많았다.
인간은 누구나 주변 사람들에게 베풀고 싶은 욕망이 있다. 공직에서 성공하려면 이 욕망을 억눌러야 한다는 데에 벼슬살이의 어려움이 있다. 자칫하면 빙공영사(憑公營私)가 된다. 공을 빙자해서 사익을 추구하면 감옥행이다. 요즘은 전 국민이 인터넷 현미경과 망원경으로 감시하고 있어서 '먹지도' 못한다. 무관유한(無官有閑)도 인생의 큰 혜택이다.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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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용헌 살롱] [1093] 바위 절벽 건축
신문의 주말매거진판에 보니까 깎아지른 바위 절벽의 한 틈새에 아슬아슬하게 자리 잡은 히말라야 부탄의 탁상 사원 사진이 실려 있다. 해발은 3120m이고 현장의 계곡 바닥에서부터 높이를 따지면 792m라고 한다. 천 길도 넘는 낭떠러지 바위 절벽 사이에 사원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독수리나 호랑이가 살면 적당한 지형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바위 절벽 건축의 전형이다. 돈과 물질, 그리고 벼슬에 대한 갈망을 끊어줄 수 있는 건축이 바위 절벽 건축이기 때문에, 바위 절벽에 세워진 건축물들이 위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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