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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尹東柱 100주년,

회기로 2017. 7. 25. 20:50
[문화] 지식카페 게재 일자 : 2017년 06월 27일(火)
東柱가 친필로 엮고… 정지용이 서문 쓰고… 대중 곁으로

▲  1941년 윤동주가 원고지에 정서해 간직했던 첫 번째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발간되지는 않았다.
▲  1948년 정음사에서 처음 발간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윤동주 자필 원고에 이어 두 번째다.
▲  1955년 정음사에서 재간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전체적으론 세 번째 판본이다.
▲  영화 ‘동주’에서 윤동주(왼쪽)와 정지용(오른쪽)이 만나는 장면. 그러나 둘이 생전에 만났다는 문헌적 증거는 없다. 다만 정지용과 윤동주는 일본 도시샤대 영문과 선후배였으며 해방 후에 정지용은 윤동주의 동기인 강처중을 통해 윤동주의 유고를 접했고, 시집 초판에 서문을 썼다.
     
유성호의 윤동주 100주년, 문학과 역사
- (3)‘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세 권의 시집


◇ 정지용과 윤동주와 ‘카톨릭소년’

윤동주는 북간도에서 ‘카톨릭소년’에 동시를 몇 편 발표하였다. 시를 써두기만 하고 발표를 거의 안 했던 그로서는 이 잡지가 중요한 발표 지면이었던 셈이다. 이 잡지는 가톨릭이라는 종교의 힘에 의해 일제강점기에 서울과 만주에서 발행되었는데, 이는 당시 만주 옌지(延吉)에 가톨릭 교구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교토(京都)의 도시샤(同志社)대 영문과에 다니던 정지용은 1928년 7월 교토의 가와라마치(河原町) 성당에서 천주교 입교 의식으로 세례를 받았다. 영세명은 프란치스코였고, 중국식 표기인 방지거(方濟各)를 쓰기도 하였다. 그리고 1929년 휘문고보 영어교사로 돌아온 정지용은 천주교 종현(鍾峴) 성당 청년회 총무를 맡았다. 1933년에는 천주교 전국 5개 교구(옌지교구 포함) 연합으로 창간한 월간 ‘카톨릭청년’의 문예란 편집을 맡게 되었다. 편집위원은 윤형중 신부를 비롯하여 장면, 장발, 정지용으로 구성되었고, 주간은 이동구였다. 필진은 이병기, 정지용, 이상, 신석정, 이태준, 김기림, 김억, 조운, 유치환, 김동리, 박태원, 김소운, 이효상 등이었다. 

정지용은 카톨릭청년 문예란에 이병기의 ‘조선어강좌’를 연재하였다. 당시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이상(李箱)의 시편을 처음 싣기도 했다. 처음에 그림과 숫자로만 시를 썼던 이상은, 이 지면에 이르러 처음으로 ‘꽃나무’ ‘이런 시(詩)’ 등 의젓한 한글 시편을 발표하였다. 비록 일제의 탄압으로 청년회가 해체되기는 했지만, 정지용의 신앙은 더욱 고양되어 1937년 성프란치스코회 재속(在俗) 회원으로 입회하기도 하였다. 이후 정지용은 서울 백동(혜화동) 성당에서 장면, 장발, 유홍렬, 한창우 등과 착의식에 참석하였는데, 한창우는 나중에 경향신문 사장이 되는 인물이다. 정지용은 일제 말기에 부천 소사로 이사하여 천주교 공소 신자로 신앙생활에 열중하였다. 

바로 그 무렵 윤동주는 가톨릭 만주 옌지교구에서 발행하는 카톨릭소년의 애독자이자 투고자로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인연은 이렇게 가톨릭이라는 종교의 매체들에 의해 연결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정지용은 해방 후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초판(정음사, 1948년) 서(序)에서 윤동주의 신앙시 ‘십자가’를 정성스레 인용할 정도로, 두 사람은 신앙이라는 공통항으로 연결되기도 하였다. 천주교회에서 운영하던 경향신문 주간도 물러나고, 이화여대 교수도 사퇴한 후 녹번동 한 초가에 은둔하다가 정지용은 홀연히 북으로 떠나갔다. 

◇‘정지용시집’과 정음사와 윤동주 

정지용과 윤동주는 도시샤대 영문과 선후배였지만 생전에 만난 적은 없다. 영화 ‘동주’에서는 윤동주가 정지용을 찾아갔을 때 정지용이 일본 유학을 권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윤동주가 정지용을 만났다는 문헌적 증거는 없다. 다만 해방 후에 정지용은 윤동주의 동기인 강처중을 통해 윤동주의 유고를 접하게 되었고, 시집 초판에 감동적인 서문을 씀으로써 도시샤대 선후배로서의 인연을 완성한다. 그리고 정지용의 월북 후 만들어진 윤동주 시집 재판은 ‘정지용시집’(시문학사, 1935년)의 배열을 그대로 따랐다. 북으로 간 강처중이 아니라, 시인의 아우인 윤일주와 후배인 정병욱의 편집 결과였다. 박용철에 의해 만들어진 정지용시집은 모두 5부로 구성되었는데, 1부 최근작, 2부 초기 시편, 3부 동요·동시, 4부 신앙시, 5부 산문시였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재판(정음사, 1955년 2월 16일) 역시 1부 자필시고, 2부 도쿄(東京) 시편, 3부 연대가 기입되지 않은 작품군(群), 4부 동요, 5부 산문으로 배열했다. 윤일주와 정병욱이 이 시집을 편집했을 때 정지용시집을 깊이 참고했으리라.

이 시집을 출간한 정음사(正音社)는 1928년에 국어학자인 외솔 최현배가 창설하여,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한글을 지키는 출판 활동을 벌여온 출판사이다. 정음사에서는 외솔의 ‘우리말본’을 비롯하여 1930년대에도 꾸준하게 한글 관련 책을 출간하였다. 바로 그 출판사에서, 일본 후쿠오카(福岡) 감옥에서 ‘사상불온, 독립운동’ 죄목으로 싸늘하게 옥사한 비극적 청년 시인의 유고시집이 출간된 것이다. 정음사 사장 최영해는 최현배의 아들로서, 양정고보와 연희전문 문과를 나왔고, 조선일보 출판부에 들어가 ‘소년’ 편집을 하기도 했고, ‘삼사문학’ 동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해방 후 경향신문 부사장을 역임하였고, 정음사 사장을 지내면서 윤동주 유고시집을 출간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정지용과 강처중, 최영해, 한창우 등이 결속하여 윤동주의 유고 시편을 발표하고 시집을 발행하는 동선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가톨릭-연희전문-경향신문-정음사’의 동선과 그대로 겹치는 형상을 하고 있다.

윤동주는 정지용시집을 소장하게 된 날짜를 1936년 3월 19일로 시집 내지에 감격적으로 기록하였다. 정지용 시는 윤동주뿐만 아니라 당대의 여러 후배 예컨대 신석정, 이상, 임화, 청록파 등에게 매우 보편적으로 감염된 어떤 수원(水源)이자 정전(正典) 역할을 했다. 마치 근대 초기에 시인들이 모두 김억의 번역 스타일을 따라 하자 춘원 이광수가 “전부 ‘오뇌의 무도’화(化) 하였다”고 말한 현상이 1930년대에 정지용 모방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특별히 윤동주에게는 정지용 영향의 흔적이 상대적으로 뚜렷하게 나타난다. 말하자면 정지용시집은 윤동주 습작 시절의 교과서였던 셈이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의 맥락 

그런데 이 재판 시집은 사실 세 번째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이다. 두루 알려져 있듯이 첫 번째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는 윤동주가 연희전문 졸업반 때 자신의 시편 가운데 18편을 정선하고, 마지막에 1941년 11월 20일 날짜로 시집의 서시를 써서, 모두 19편으로 만들어 원고지에 정서해 묶은 것이다. 비록 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가 발간되지는 않았지만, 1941년 11∼12월에 완성된 윤동주 자선 친필 시고가 온전한 제목으로서의 첫 번째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인 셈이다. 윤동주가 정병욱에게 준 이 원본 시고가 남아, 훗날 일반에게 공개되어 친필 전집의 자양이 된 것이다.

이어 1947년 2월 13일 경향신문에 정지용의 소개 글과 함께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詩’가 최초로 발표되었고, 1948년 1월에는 유고 31편을 모아 정지용 서문과 강처중 발문과 유영의 추도시를 붙여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초판을 간행하였다. 말하자면 이것이 두 번째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이다. 이 시집 표지는 파란색으로 더 유명하지만, 초간본 겉표지는 사실 갈색이었다. 정음사 대표 최영해의 장남인 최동식(전 고려대 화학과 교수)은 “윤동주의 3주기 추도식에 초간본을 헌정하려 했으나 제작이 늦어져 동대문시장에서 구한 벽지를 마분지에 입혀 표지를 꾸민 뒤 10권을 급하게 제본해 가져갔다”라고 증언한 바 있는데, 즉 벽지로 표지를 제본한 ‘갈색’ 시집 10권이 세상의 빛을 처음 본 윤동주의 최초 시집이었던 셈이다. 이후 한 달 정도 지난 1948년 3월에 초판본 1000부가 파란색 표지로 출간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잠깐, 이 시집 제목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가 아니어야 했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19편만 그 제목으로 출간하려 했던 윤동주의 뜻을 존중한다면, 시집 전체 제목은 ‘윤동주시집’ 정도로 하고 1부 19편을 원래 시집 제목으로, 그리고 나머지 12편을 다른 소제목을 달아 펴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냥 밋밋하게 윤동주시집으로 했다면 대중들의 호응은 훨씬 덜했을 것이니, 윤동주 시집 제목은 역시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의 운명을 타고난 셈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 세 번째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이후 1948년 12월 누이 윤혜원이 윤동주의 습작 노트를 가지고 북간도에서 서울로 이주하였다. 1953년 7월 15일 정병욱이 ‘연희춘추’에 ‘고 윤동주 형의 추억’을 썼고, 1953년 9월에는 윤동주에 대한 최초 비평 ‘윤동주의 정신적 소묘’가 고석규에 의해 쓰였다. 1955년 2월에는 시인의 10주기를 기려 시 89편과 산문 4편을 엮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재판을 정음사에서 펴냈는데, 이때 초판본에 실렸던 정지용 서문과 강처중 발문은 제외되었다. 편집은 정병욱과 윤일주가 하고 표지화는 김환기가 담당했다. 이것이 세 번째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이다. 앞에서 말한 정지용시집 편제를 따른 바로 그 시집이다. 그리고 1967년 2월에는 백철, 박두진, 문익환, 장덕순의 글을 책 말미에 추가 수록하고 판형을 바꾸어 새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정음사에서 간행하였다. 대중 보급판이 완료된 셈이다. 이러한 텍스트의 역사 안으로 제국과 식민, 기억과 망각, 해방과 분단과 전쟁의 흔적이 흘러간다. 그 점에서 모든 텍스트는 역사적 산물이다. 우리가 텍스트의 맥락과 구성까지 면밀히 들여다보아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습작과 완성작, 진정한 윤동주 정전을 위하여 

윤동주는 명동소학교에 들어간 이후 죽을 때까지 학생 신분으로만 있었다. 학교도 여럿 다녔다. 그는 자신을 ‘시인’이라고 여기지 않았고, ‘학생’이라는 아이덴티티를 견지하면서, 선행 명편들을 읽고 또 읽으면서, 그 가운데 핵심이 되는 표현이나 사유에서 자신의 시적 좌표를 정성스레 찾아갔다. 마치 서양화 그리는 학생이 데생 연습을 반복하면서 어떤 상(像)을 그려가듯이, 윤동주는 선배들의 빛나는 성과에 힘입어 자신의 시상(詩想)에 구체적인 형태를 부여해간 것이다. 그 대상은 정지용, 김광섭, 이상, 백석, 이용악 등에 두루 걸쳐 있다. 특별히 정지용의 압도적 영향 아래 여러 편의 습작들을 써두었다.

그러나 윤동주는 자신이 마지막 정리한 친필 시고에서 정지용 모작들을 모두 뺌으로써, 그것들이 학생 시절 습작이었음을 스스로 증명하였다. 그러니까 윤동주가 남긴 노트의 습작들을 인용하면서 그가 엄선한 작품들과 등가적으로 처리하는 일은 적절치 않다. 심지어 그것을 예로 들어 윤동주 시의 결함이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은 전혀 온당하지 않다. 다만 우리는 윤동주가 최종적으로 갈무리한 19편을 일단 윤동주 정선(精選)이라고 보아야 하고, 그 나머지는 섬세하게 실증적 위상을 따져 윤동주의 ‘습작’과 ‘완성작’을 구분해야 할 것이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그가 오랜 습작기를 거쳐 진정한 ‘시인’에 이르게 된 과정을 온전하게 경험하게 될 것이다.(문화일보 5월 23일자 25면 2 회 참조)유성호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교수 
 

 
[문화] 지식카페 게재 일자 : 2017년 05월 23일(火)
평양·서울·도쿄서 다시 바라본 故鄕 북간도… ‘디아스포라의 땅’
▲  용정에 있는 고향 집에서 치러진 윤동주의 장례식. 가운데 영정 사진의 오른쪽이 윤동주의 가족이다.


▲  명동소학교 졸업사진. 두 번째 줄 오른쪽에서 첫 번째가 윤동주다.


유성호의 윤동주 100주년, 문학과 역사 - 2 그는 ‘북간도 시인’으로 기억돼야 한다

파평 윤씨 집안 증조부 윤재옥이 북간도로 삶의 터를 옮겼을 때는 우리 민족이 북간도로 이주하던 초창기였다. 초기 이주 세력 가운데 하나인 윤하현의 외아들 윤영석과 동만(東滿)의 대통령이라 불렸던 김약연의 누이 김용 사이에서 태어난 윤동주는 생래적인 ‘북간도 시인’이었다. 북간도와 관련 있는 근대 문인들 가령 염상섭, 유치환, 강경애, 서정주, 안수길 등이 타지에서 태어나 북간도로 이동해 잠시 살았던 것과는 달리, 윤동주는 북간도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고유한 이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사잇섬(間島)’이라고 불리기도 했고 범박하게는 ‘만주(滿洲)’라고도 불렸던 북간도는 서구 열강과 중국 그리고 일본의 틈에서 일종의 중간자적 처지를 감당해야 했고, 북간도 사람들은 그 사이에 낀 채 온몸으로 수난을 견뎌야만 했다. 이렇게 볼 때 북간도는 자연스럽게 디아스포라(diaspora)의 형상을 띠게 되고, 결국 북간도는 윤동주처럼 ‘길 위’에서 살아간 비극적 운명들이 태어나고 자란 ‘디아스포라 땅’으로 성격화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윤동주의 북간도는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서 드러난 ‘만주 유토피아’ 곧 만주에서 새로운 낙원을 꿈꾸었던 기대 심리와는 전혀 다른 맥락으로 표현돼 나타났다. 그것은 민족수난사의 정점이자 현장으로서의 북간도 체험이었다. 이러한 북간도 공동체의 일원으로 윤동주는 태어나고 자랐고 살았고 또 묻혔다. 그의 어린 시절 풍경을 아우 윤일주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우리 남매는 3남 1녀였다. 내 위로는 누님(혜원), 아래로 동생(광주)이 있다. 용정에서 난 동생 광주를 제외한 우리 남매들이 태어난 명동집은 마을에서도 돋보이는 큰 기와집이었다. 마당에는 자두나무들이 있고, 지붕 얹은 큰 대문을 나서면 텃밭과 타작마당, 북쪽 울 밖에는 30주(株)가량의 살구와 자두 과원, 동쪽 쪽대문을 나가면 우물이 있었고, 그 옆에 큰 오디나무가 있었다. 우물가에서는 저만치 동북쪽 언덕 중턱에 교회당과 고목나무 위에 올려진 종각이 보였고, 그 건너편 동남쪽에는 이 마을에 어울리지 않도록 커 보이는 학교 건물과 주일학교 건물들이 보였다.” 

우물과 학교와 교회로 둘러싸인 공간에 자리 잡은 윤동주의 집은 두 가지 의미를 암시해준다. 하나는 윤동주 집안이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윤동주 유고시집 초판 서문에서 정지용과 윤일주가 주고받은 대화에서도 ‘소지주’라는 말이 여러 번 등장한다. 이러한 경제적 상황은 그들이 꿈꾼 공동체를 실현 가능하게 한 물리적 밑거름이 됐고, 자녀들에게 양질의 교육을 시킬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었다. 그래서 실제로 윤동주는 평양 숭실중학, 서울 연희전문, 일본의 릿쿄(立敎)대와 도시샤(同志社)대 등으로 유학을 갈 수 있었고, 어렵지 않게 유년 시절 내내 잡지와 시집들을 읽을 수 있었다. 그 점에서 윤동주의 평생은 ‘학생’으로서의 과정에 놓일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고난받는 민족공동체’로서의 북간도 

다른 하나는 윤동주 집이 북간도의 민족주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이다. 북간도 공동체는 기독교를 수용함으로써 수탈과 소외 속에서 ‘고난받는 민족공동체’를 상상하고 또 회복하려고 했다. 물론 윤동주가 태어나면서 그 나름대로 새로운 민족공동체의 구심을 구상해갈 수 있었겠지만, 어릴 때만 해도 그는 그곳이 여전히 소수집단에 그칠 수밖에 없었음을 선명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윤동주는 평양 숭실중학으로 들어가기 위해 처음으로 집을 떠나면서 북간도의 현실과 상황을 인지하게 된다.  

숭실중학에 입학했지만 신사참배 문제로 곤경에 빠진 학교의 모습을 보고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인지한 후, 윤동주는 처음으로 ‘조선-북간도’의 지리학과 ‘제국-식민지’의 정치학에 눈을 뜨게 된다. 그리고 연희전문에 진학하기 위해 북간도를 다시 떠나면서 북간도 공동체의 역사적 처지를 뚜렷하게 알게 된다. 이처럼 평양과 서울에서 바라본 북간도야말로 디아스포라의 현실을 인식하게끔 해준 체험적 전기가 됐다고 할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1930년대 후반의 북간도는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의 현장이었고, 일본이 만주국이라는 괴뢰국가를 세워 ‘오족협화(五族協和)’를 외치며 대륙침략 정책을 펼쳐가던 공간이었다. 이런 까닭으로 북간도는 일본이 만들어낸 ‘대동아공영권’의 핵심적 장(場)으로 인식됐다. 이러한 상황과 사정을 그가 평양과 서울에서 선명하게 알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일본 유학을 통해 ‘조선-북간도’를 다시 한 번 발견하는 현실인식을 가지게 됐다고 할 수 있다. 이 점, 윤동주가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별 헤는 밤’)라고 서울에서 쓴 것이나, “육첩방은 남의 나라”(‘쉽게 씌어진 시’)라고 일본의 심장 도쿄(東京)에서 쓴 것의 핵심적 의미를 새삼 알게 해준다.

고향이란 무릇 타관 또는 객지라는 타자를 체험 속에 거느릴 때 강한 영상으로 부각되는 실체일 것이다. 자신의 원형이 형성된 곳이기에 늘 추억과 그리움의 대상이 되지만, 또한 그곳은 자신의 한계를 만들어놓은 원죄 공간이기도 하다. 북간도는 그렇게 중층적으로 윤동주에게 다가왔다.

◇‘북간도 기독교’의 정신 

윤동주가 다닌 명동소학교는 처음에 명동서숙으로 시작했다. 윤동주는 아홉 살 나이로 여기 입학했는데, 당시 이 학교는 이른바 불령선인(不逞鮮人)의 소굴로 일제가 인식하고 있었다. 이 땅에서 윤동주는 4학년 때 ‘아이생활’이라는 잡지를 서울로부터 구독해 읽었고, 송몽규도 ‘어린이’를 즐겨 읽었다. 그들은 5학년이 되면서 ‘새 명동’이라는 등사판 월간 문예지를 만들기도 했다. 윤동주는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했고 송몽규, 김정우와 함께 명동에서 동쪽으로 10리가량 떨어진 대랍자의 관립한족소학교에 6학년으로 편입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소녀들의 이름”(‘별 헤는 밤’)이라는 구절은 이때의 경험을 투사한 것이다. 그들은 날마다 10리 길을 걸어 통학했고, 1931년 늦가을 윤동주 집안은 용정으로 이사했다. 

북간도 기독교 정신은 그곳 출신의 구성원들이 해방 이후 한국 사회에 남긴 삶을 통해서도 귀납적으로 증명된다. 윤동주, 송몽규, 문재린, 문익환, 문동환, 송창근, 김재준, 안병무, 강원룡, 정대위, 나운규 등 많은 이가 북간도에서 자라나 교육을 받았다. 특별히 윤동주와 송몽규, 문익환, 문동환은 집안 대대로 공동체의 핵심 구성원이었고, 문익환과 문동환 형제의 아버지 문재린은 1896년 함경북도 종성에서 태어나 네 살에 북간도 명동으로 이주해 평양신학교, 캐나다 임마누엘 신학교를 졸업한 근대 신학자였다. 또한 송창근은 명동중학과 광성중학에서 수학했고, 김재준은 1937년 3월부터 1940년 7월까지 용정 은진중학 교목으로 지내면서 신앙을 학생들에게 가르쳤으며, 강원룡과 안병무, 정대위, 나운규 등도 그곳에서 학교를 다녔다.  

이들은 해방 이후 현대사를 통해 정신사적으로 큰 발자취를 남김으로써 북간도 기독교 정신을 역사에 깊이 새겼다. 북간도 기독교의 고유한 속성이자, 우리나라 주류 기독교가 보수적 복음주의에 침윤돼 나타난 맥락과는 전혀 다른 층위를 한국 근대사에서 보여준 것이 아닐 수 없다. 이 또한 윤동주를 설명하는 데 빠져서는 안 될 ‘북간도’의 힘이자 후광이었다. 
 

▲  용정에 있는 윤동주 묘비.

◇동아시아 전역에 걸친 빛과 그늘 

이처럼 윤동주의 시와 함께 북간도에서 그가 경험한 사건들을 기억하고 재구성하는 일은, 이제 문학적 의미를 넘어 외교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작업이 돼가고 있다. 이제 그곳은 중국 국경 너머의 땅이다. 두루 알다시피 중국은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북간도에 관한 기억들을 자국 역사 속으로 편입해 동아시아 역사를 재구성해 가고 있다. 동북공정이란, 현재 중국 국경 안에서 이뤄진 모든 역사는 중국 역사이므로 고구려와 발해 또는 일제강점기의 만주 역사 또한 중국사의 일부라고 주장하는 역사 프로젝트를 말한다.  
 

이때 우리는 근래 들어 갑자기 세워진 윤동주 용정 생가의 표지석을 떠올리게 된다. 거기에는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 생가’라는 표현이 한글과 한자로 새겨져 있다. 중국이 강력하게 추진해온 동북공정의 결과이자, 윤동주의 삶과 문학을 중국의 그것으로 치환하려는 의도가 내재된 역사 오도(誤導)의 현장이 아닐 수 없다. 이럴 경우 윤동주의 국적은 중국이 된다. 하지만 윤동주는 자신이 중국인이나 일본인과는 전혀 다른 조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국소녀들”과 “남의 나라”라는 심층적 표현이 가능했다. 더구나 그는 자신의 모든 시를 명백하게 한글로만 썼다. 표지석에 ‘한국 시인’이라고 표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저 ‘시인 윤동주 생가’라고 한글로 쓰면 된다. 왜냐하면 윤동주는 오직 한글로만 시를 썼고, 그렇게 표기만 해도 그는 분명한 한국 시인이 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새 정부의 외교부나 문화체육관광부의 노력이 강력하게 요청된다. 이 문제를 외교적으로 풀어 윤동주가 중국 국적으로 표기되는 일이 다시는 없어야 한다. 이제 윤동주와 북간도는 우리의 기억만을 투영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게 됐다. 중국을 비롯한 일본, 북한과도 기억 투쟁을 해야 하는 대상이 돼버렸다. 그 점에서 ‘기억’은 곧 ‘정치’이자 ‘역사’가 된다. 

이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우리나라에서는 물론 일본에서도 애송되는 불멸의 시집이 됐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윤동주 관련 연구나 번역 혹은 시 읽기 모임이 연쇄적으로 생겨나고 있고, 최근에는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이 일본어로 완역되기도 했다. 그의 목숨을 거둬간 적국(敵國)의 심장에서, 그야말로 시를 통해 그들의 마음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이 또한 윤동주의 핵심 사상인 평화와 부끄럼과 연민이 그들에게까지 감염된 역사적 사례일 것이다. 
 

이처럼 윤동주는 지금의 중국 땅에서 태어나, 지금의 북한 땅에서 조국을 처음 발견하고, 지금의 일본 땅에서 죽어, 다시 지금의 중국 땅인 고향으로 돌아갔다. 우리가 그를 ‘북간도 시인’으로 기억해야 할 이유도, 그의 시적 태반이 북간도에 있다는 점 외에도, 그의 생애가 우리에게 던지는 이러한 동아시아 전역에 걸친 빛과 그늘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기도 하다.

(문화일보 4월 18일자 25면 1 회 참조)유성호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교수 

 

[문화] 지식카페 문화일보 : 2017년 04월 18일(火)
윤동주, 저항시인을 넘어 ‘보편적 인류애’ 텍스트로 기억할 때
▲  용정에 있는 고향 집에서 치러진 윤동주의 장례식. 가운데 영정 사진의 오른쪽이 윤동주의 가족이다.

▲  명동소학교 졸업사진. 두 번째 줄 오른쪽에서 첫 번째가 윤동주다.

유성호의 윤동주 100주년, 문학과 역사 - 2 그는 ‘북간도 시인’으로 기억돼야 한다

파평 윤씨 집안 증조부 윤재옥이 북간도로 삶의 터를 옮겼을 때는 우리 민족이 북간도로 이주하던 초창기였다. 초기 이주 세력 가운데 하나인 윤하현의 외아들 윤영석과 동만(東滿)의 대통령이라 불렸던 김약연의 누이 김용 사이에서 태어난 윤동주는 생래적인 ‘북간도 시인’이었다. 북간도와 관련 있는 근대 문인들 가령 염상섭, 유치환, 강경애, 서정주, 안수길 등이 타지에서 태어나 북간도로 이동해 잠시 살았던 것과는 달리, 윤동주는 북간도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고유한 이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사잇섬(間島)’이라고 불리기도 했고 범박하게는 ‘만주(滿洲)’라고도 불렸던 북간도는 서구 열강과 중국 그리고 일본의 틈에서 일종의 중간자적 처지를 감당해야 했고, 북간도 사람들은 그 사이에 낀 채 온몸으로 수난을 견뎌야만 했다. 이렇게 볼 때 북간도는 자연스럽게 디아스포라(diaspora)의 형상을 띠게 되고, 결국 북간도는 윤동주처럼 ‘길 위’에서 살아간 비극적 운명들이 태어나고 자란 ‘디아스포라 땅’으로 성격화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윤동주의 북간도는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서 드러난 ‘만주 유토피아’ 곧 만주에서 새로운 낙원을 꿈꾸었던 기대 심리와는 전혀 다른 맥락으로 표현돼 나타났다. 그것은 민족수난사의 정점이자 현장으로서의 북간도 체험이었다. 이러한 북간도 공동체의 일원으로 윤동주는 태어나고 자랐고 살았고 또 묻혔다. 그의 어린 시절 풍경을 아우 윤일주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우리 남매는 3남 1녀였다. 내 위로는 누님(혜원), 아래로 동생(광주)이 있다. 용정에서 난 동생 광주를 제외한 우리 남매들이 태어난 명동집은 마을에서도 돋보이는 큰 기와집이었다. 마당에는 자두나무들이 있고, 지붕 얹은 큰 대문을 나서면 텃밭과 타작마당, 북쪽 울 밖에는 30주(株)가량의 살구와 자두 과원, 동쪽 쪽대문을 나가면 우물이 있었고, 그 옆에 큰 오디나무가 있었다. 우물가에서는 저만치 동북쪽 언덕 중턱에 교회당과 고목나무 위에 올려진 종각이 보였고, 그 건너편 동남쪽에는 이 마을에 어울리지 않도록 커 보이는 학교 건물과 주일학교 건물들이 보였다.” 

우물과 학교와 교회로 둘러싸인 공간에 자리 잡은 윤동주의 집은 두 가지 의미를 암시해준다. 하나는 윤동주 집안이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윤동주 유고시집 초판 서문에서 정지용과 윤일주가 주고받은 대화에서도 ‘소지주’라는 말이 여러 번 등장한다. 이러한 경제적 상황은 그들이 꿈꾼 공동체를 실현 가능하게 한 물리적 밑거름이 됐고, 자녀들에게 양질의 교육을 시킬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었다. 그래서 실제로 윤동주는 평양 숭실중학, 서울 연희전문, 일본의 릿쿄(立敎)대와 도시샤(同志社)대 등으로 유학을 갈 수 있었고, 어렵지 않게 유년 시절 내내 잡지와 시집들을 읽을 수 있었다. 그 점에서 윤동주의 평생은 ‘학생’으로서의 과정에 놓일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고난받는 민족공동체’로서의 북간도 

다른 하나는 윤동주 집이 북간도의 민족주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이다. 북간도 공동체는 기독교를 수용함으로써 수탈과 소외 속에서 ‘고난받는 민족공동체’를 상상하고 또 회복하려고 했다. 물론 윤동주가 태어나면서 그 나름대로 새로운 민족공동체의 구심을 구상해갈 수 있었겠지만, 어릴 때만 해도 그는 그곳이 여전히 소수집단에 그칠 수밖에 없었음을 선명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윤동주는 평양 숭실중학으로 들어가기 위해 처음으로 집을 떠나면서 북간도의 현실과 상황을 인지하게 된다.  

숭실중학에 입학했지만 신사참배 문제로 곤경에 빠진 학교의 모습을 보고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인지한 후, 윤동주는 처음으로 ‘조선-북간도’의 지리학과 ‘제국-식민지’의 정치학에 눈을 뜨게 된다. 그리고 연희전문에 진학하기 위해 북간도를 다시 떠나면서 북간도 공동체의 역사적 처지를 뚜렷하게 알게 된다. 이처럼 평양과 서울에서 바라본 북간도야말로 디아스포라의 현실을 인식하게끔 해준 체험적 전기가 됐다고 할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1930년대 후반의 북간도는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의 현장이었고, 일본이 만주국이라는 괴뢰국가를 세워 ‘오족협화(五族協和)’를 외치며 대륙침략 정책을 펼쳐가던 공간이었다. 이런 까닭으로 북간도는 일본이 만들어낸 ‘대동아공영권’의 핵심적 장(場)으로 인식됐다. 이러한 상황과 사정을 그가 평양과 서울에서 선명하게 알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일본 유학을 통해 ‘조선-북간도’를 다시 한 번 발견하는 현실인식을 가지게 됐다고 할 수 있다. 이 점, 윤동주가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별 헤는 밤’)라고 서울에서 쓴 것이나, “육첩방은 남의 나라”(‘쉽게 씌어진 시’)라고 일본의 심장 도쿄(東京)에서 쓴 것의 핵심적 의미를 새삼 알게 해준다.

고향이란 무릇 타관 또는 객지라는 타자를 체험 속에 거느릴 때 강한 영상으로 부각되는 실체일 것이다. 자신의 원형이 형성된 곳이기에 늘 추억과 그리움의 대상이 되지만, 또한 그곳은 자신의 한계를 만들어놓은 원죄 공간이기도 하다. 북간도는 그렇게 중층적으로 윤동주에게 다가왔다.

◇‘북간도 기독교’의 정신 

윤동주가 다닌 명동소학교는 처음에 명동서숙으로 시작했다. 윤동주는 아홉 살 나이로 여기 입학했는데, 당시 이 학교는 이른바 불령선인(不逞鮮人)의 소굴로 일제가 인식하고 있었다. 이 땅에서 윤동주는 4학년 때 ‘아이생활’이라는 잡지를 서울로부터 구독해 읽었고, 송몽규도 ‘어린이’를 즐겨 읽었다. 그들은 5학년이 되면서 ‘새 명동’이라는 등사판 월간 문예지를 만들기도 했다. 윤동주는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했고 송몽규, 김정우와 함께 명동에서 동쪽으로 10리가량 떨어진 대랍자의 관립한족소학교에 6학년으로 편입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소녀들의 이름”(‘별 헤는 밤’)이라는 구절은 이때의 경험을 투사한 것이다. 그들은 날마다 10리 길을 걸어 통학했고, 1931년 늦가을 윤동주 집안은 용정으로 이사했다. 

북간도 기독교 정신은 그곳 출신의 구성원들이 해방 이후 한국 사회에 남긴 삶을 통해서도 귀납적으로 증명된다. 윤동주, 송몽규, 문재린, 문익환, 문동환, 송창근, 김재준, 안병무, 강원룡, 정대위, 나운규 등 많은 이가 북간도에서 자라나 교육을 받았다. 특별히 윤동주와 송몽규, 문익환, 문동환은 집안 대대로 공동체의 핵심 구성원이었고, 문익환과 문동환 형제의 아버지 문재린은 1896년 함경북도 종성에서 태어나 네 살에 북간도 명동으로 이주해 평양신학교, 캐나다 임마누엘 신학교를 졸업한 근대 신학자였다. 또한 송창근은 명동중학과 광성중학에서 수학했고, 김재준은 1937년 3월부터 1940년 7월까지 용정 은진중학 교목으로 지내면서 신앙을 학생들에게 가르쳤으며, 강원룡과 안병무, 정대위, 나운규 등도 그곳에서 학교를 다녔다.  

이들은 해방 이후 현대사를 통해 정신사적으로 큰 발자취를 남김으로써 북간도 기독교 정신을 역사에 깊이 새겼다. 북간도 기독교의 고유한 속성이자, 우리나라 주류 기독교가 보수적 복음주의에 침윤돼 나타난 맥락과는 전혀 다른 층위를 한국 근대사에서 보여준 것이 아닐 수 없다. 이 또한 윤동주를 설명하는 데 빠져서는 안 될 ‘북간도’의 힘이자 후광이었다. 

▲  용정에 있는 윤동주 묘비.
◇동아시아 전역에 걸친 빛과 그늘 

이처럼 윤동주의 시와 함께 북간도에서 그가 경험한 사건들을 기억하고 재구성하는 일은, 이제 문학적 의미를 넘어 외교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작업이 돼가고 있다. 이제 그곳은 중국 국경 너머의 땅이다. 두루 알다시피 중국은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북간도에 관한 기억들을 자국 역사 속으로 편입해 동아시아 역사를 재구성해 가고 있다. 동북공정이란, 현재 중국 국경 안에서 이뤄진 모든 역사는 중국 역사이므로 고구려와 발해 또는 일제강점기의 만주 역사 또한 중국사의 일부라고 주장하는 역사 프로젝트를 말한다.  

이때 우리는 근래 들어 갑자기 세워진 윤동주 용정 생가의 표지석을 떠올리게 된다. 거기에는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 생가’라는 표현이 한글과 한자로 새겨져 있다. 중국이 강력하게 추진해온 동북공정의 결과이자, 윤동주의 삶과 문학을 중국의 그것으로 치환하려는 의도가 내재된 역사 오도(誤導)의 현장이 아닐 수 없다. 이럴 경우 윤동주의 국적은 중국이 된다. 하지만 윤동주는 자신이 중국인이나 일본인과는 전혀 다른 조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국소녀들”과 “남의 나라”라는 심층적 표현이 가능했다. 더구나 그는 자신의 모든 시를 명백하게 한글로만 썼다. 표지석에 ‘한국 시인’이라고 표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저 ‘시인 윤동주 생가’라고 한글로 쓰면 된다. 왜냐하면 윤동주는 오직 한글로만 시를 썼고, 그렇게 표기만 해도 그는 분명한 한국 시인이 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새 정부의 외교부나 문화체육관광부의 노력이 강력하게 요청된다. 이 문제를 외교적으로 풀어 윤동주가 중국 국적으로 표기되는 일이 다시는 없어야 한다. 이제 윤동주와 북간도는 우리의 기억만을 투영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게 됐다. 중국을 비롯한 일본, 북한과도 기억 투쟁을 해야 하는 대상이 돼버렸다. 그 점에서 ‘기억’은 곧 ‘정치’이자 ‘역사’가 된다. 

이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우리나라에서는 물론 일본에서도 애송되는 불멸의 시집이 됐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윤동주 관련 연구나 번역 혹은 시 읽기 모임이 연쇄적으로 생겨나고 있고, 최근에는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이 일본어로 완역되기도 했다. 그의 목숨을 거둬간 적국(敵國)의 심장에서, 그야말로 시를 통해 그들의 마음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이 또한 윤동주의 핵심 사상인 평화와 부끄럼과 연민이 그들에게까지 감염된 역사적 사례일 것이다. 

이처럼 윤동주는 지금의 중국 땅에서 태어나, 지금의 북한 땅에서 조국을 처음 발견하고, 지금의 일본 땅에서 죽어, 다시 지금의 중국 땅인 고향으로 돌아갔다. 우리가 그를 ‘북간도 시인’으로 기억해야 할 이유도, 그의 시적 태반이 북간도에 있다는 점 외에도, 그의 생애가 우리에게 던지는 이러한 동아시아 전역에 걸친 빛과 그늘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기도 하다.
(문화일보 4월 18일자 25면 1 회 참조)  유성호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교수  





[문화] 지식카페 문화일보 : 2017년 07월 25일(火)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자기성찰의 아이콘… ‘東柱의 부끄럼’
▲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 있는 윤동주 시인의 언덕. 윤동주문학관에서 길을 따라 150m쯤 올라가면 시민공원으로 조성된 곳에 윤동주의 ‘서시’ 시비와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새겨진 비석이 서 있다. 연합뉴스

유성호의 윤동주 100주년, 문학과 역사 - ④ 그를 이어가는 계보는 왜 없을까 ?

◇ 윤동주가 참조한 경의에 찬 선행 언어들 = 한국 현대시의 역사에는 오래도록 자신만의 빛을 발하는 명편들이 많다. 세월의 풍화를 전혀 겪지 않고 새로운 순간을 재현하면서 항구적 매혹을 주는 시편들에는 서로 공명하고 마주 보는 눈높이의 뚜렷함이 있다. 그 가운데 지금도 정상 시편으로 손색이 없을 다음 두 편에는, 후배 시인이 선배 시인의 작품에서 취한 계승과 신뢰의 흔적이 선연하게 나타난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잠’과 도연명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부분)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윤동주, ‘별 헤는 밤’ 부분) 

▲  시인 백석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세상의 존재자들을 하나하나 호명해가는 두 시인의 모습은 많이 닮았다. 시의 세목에서도 앞의 시편이 성취해낸 것들은 뒤의 시편으로 파동 치듯 번져간다. ‘흰 바람벽이 있어’는 1941년 4월 ‘문장’에 실렸는데, 이 시를 접한 윤동주는 연희전문 졸업반이었던 그해 연말에 이 작품의 세목을 충실하게 계승하고 변형한 ‘별 헤는 밤’을 써서 친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의 마지막 순서에 넣었다. 비유하자면 ‘흰 바람벽이 있어’는 골방에서 ‘미리’ 씌어진 ‘별 헤는 밤’이요, ‘별 헤는 밤’은 언덕에서 ‘이어’ 씌어진 ‘흰 바람벽이 있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그들은 퍽 닮았고 또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윤동주가 백석의 유일한 시집 ‘사슴’(1936)을 구하지 못하여 일일이 그 안에 실린 시편들을 필사하고 또 특정 구절에는 느낌이나 해석까지 써두었다는 증언은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백석이 호명한 대상이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였다면, 윤동주는 그것들의 이형동체(異形同體)인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를 정성껏 불렀다. 서양의 두 시인을 함께 나열하는 장면이나, 백석이 어머니와 여인을 생각하듯 윤동주가 어머니, 아이들, 소녀들, 계집애들, 이웃 사람들의 이름을 연쇄적으로 부르는 모습도 꽤 닮아있다. 그렇다고 ‘별 헤는 밤’이 ‘흰 바람벽이 있어’의 모작이냐 하면 그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윤동주는 선행 시편에서 받은 지극한 감동과 자극을 창의적으로 변형하여 더없이 아름다운 성찰 시편을 써냄으로써, 전통의 창의적 계승 사례가 되기에 족한 시인으로 남았을 뿐이다.

물론 후대 시인이 선행 시편을 어법이나 세계관 차원에서 무반성적으로 옮겨 적는 일은 거의 없다. 시편 곳곳에 선행 시편들의 흔적이 간접화되어 남게 되는 사례가 많을 뿐이다. 그 경우, 후대 시인은 선행 시편에 깊이 의존하면서도 그에 대한 일정한 변형을 수행함으로써 전통을 품고 또 전통을 넘어선다. 잘 알려져 있듯이, 윤동주는 정지용과 백석의 영향을 많이 입었다. 그 시인들의 시집을 여러 차례 숙독하면서 선배들을 사숙하고 흠모하는 다독가로서의 면모를 충실하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겸허하게 배우고 또 배웠다. 그래서인지 윤동주가 남긴 시편에서 선행 시편들의 흔적은 여럿 발견된다. 그렇다고 윤동주가 선배 시인들을 무반성적으로 베끼거나 그 모방적 성과를 대수롭지 않게 발표한 흔적은 전혀 없다. 다만 그는 매우 성실한 습작의 정신으로 당대 대가들의 작품을 읽고 메모하면서, 거기에 창의적 변형을 가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수행하였을 뿐이다. 이 점, 다시 한 번 강조되어야 할 윤동주의 생래적 성정(性情)이자 적공(積功)의 과정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윤동주가 시를 써가는 과정에서 강한 암시와 자극을 준 텍스트는 당시의 선행 시편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는 신구약 성경은 물론, 릴케나 투르게네프 등의 외국 시인들, 그리고 키르케고르를 비롯한 서양 철학자들의 저작에 나타난 사유와 방법을 끊임없이 읽고 참조하였다. 일본 근대시인 다치하라 미치조(立原道造)의 시편들도 윤동주가 많이 궁구했을 것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  윤동주 ‘별 헤는 밤’ 육필 원고.


이처럼 윤동주는 자신의 텍스트 안으로 경의에 찬 선행 언어들을 안아 들이면서 부단한 창의적 굴절 작업을 지속적으로 행했던 것이다. 

◇ 윤동주만이 누리는 기억 전승의 특권 = 하지만 정작 우리가 강조해야 할 것은 윤동주의 후행 시인이 그 계보를 이어간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일 것이다. 우리 현대시사에서 정지용, 이상, 백석, 서정주, 김수영 등은 막강한 후배 시인의 계보와 후행 현상들을 파생적으로 거느리고 있다. 정지용의 경우 한시적이기는 했지만 당대의 가장 커다란 ‘정지용 에피고넨’들을 만들어냈고, 백석은 해방 후 많은 시인의 서사 지향 시편과 유장한 호흡의 고백 시편들에 커다란 영향을 남겼다. 이상-서정주-김수영은 우리 현대시사의 세 가지 지향 곧 ‘실험-서정-참여’의 연원이자 비조(鼻祖)가 되었다. 하지만 윤동주에게는 후행 계보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간헐적이거나 예외적으로 존재할 것이고, 그 또한 괄목할 만한 시사적 자산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윤동주는 우리 문학사에서 반복이나 대체가 불가능한 유일한 사건이자 표지(標識)이다. 흉내를 내거나 모방할 경우 바로 촌스러워지는 유일성을 그는 배타적으로 가지고 있다. 어쩌면 ‘윤동주적(的)’인 존재는 윤동주 자신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윤동주는 선행 시인으로부터는 많은 영향과 참작을 통해 새로운 창의적 변형으로 나아갔지만, 후행 시인들에게는 모방하거나 따라 할 수 없는 유일한 아이콘으로 남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또한 윤리적이고 미학적인 진정성을 통해 윤동주만이 누리고 있는 기억 전승의 특권이 아닐 수 없다. 

◇ ‘부끄럼’이 ‘자랑’으로 전이되어가는 윤동주 시 = 그렇다면 윤동주만이 누리는 이러한 기억 전승의 특권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말할 것도 없이 그의 순결한 생애와 비극적 죽음이 그 일차적 원인으로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남긴 시의 내부로 들어가면, 우리는 그에게만 존재하는 치열하고 정직한 자기 응시와 입법 과정이 그 안에 담겨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가 한국 현대시사에서 거의 최초로 본격적 의미의 성찰적 일인칭 시편들을 써갔다는 사실과 만나게 된다. 그 성찰의 가장 중요한 발원처는 이제 윤동주만의 브랜드가 되어버린 ‘부끄럼’이다. 물론 이 ‘부끄럼’은, 타자의 시선에 자신의 윤리적 결함이 들켰을 때 느껴지는 수치심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눈높이에 못 미치는 자신에 대해 스스로 느끼는 실존적 안타까움 같은 것일 터이다. 윤동주의 계보가 존재하지 않는 가장 중요한 까닭이 바로 이 지점에 있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거의 최초로 자기 자신을 시의 대상으로 삼았던, 그래서 자기 확인이나 성찰이 얼마나 성실한 변증 과정을 이루면서 한 사람의 삶과 언어를 완성해가는가를 보여준 유력하고도 유일한 사건으로 남은 것이다. ‘부끄럼’을 소녀 취향의 정서로 치부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거니와, 그것은 섬약한 퇴영적 정서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에 대한 부단한 ‘부정-긍정’ 과정을 통해 다다른 성찰적 소산인 것이다. 그런데 윤동주는 ‘별 헤는 밤’에서 바로 그 ‘부끄럼’을 ‘자랑’으로 바꾸어가는 아름다운 전이(轉移) 과정을 선명하게 보여주지 않는가.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별 헤는 밤’의 마지막 연)


이처럼 그는 자신의 부끄럼을 ‘자랑’으로 거듭나게 하고 있다. 윤동주에게 ‘부끄럼/괴로움/자랑스러움’은 하나의 육체를 이루는 정서의 안팎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그가 노래하는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이라는 대목이, “자랑처럼 풀이 무성한” 상태로 부활하게 되는 것이다. ‘별 헤는 밤’의 구조는 ‘흙으로 덮음-봄의 도래-풀(잔디)의 재생’이라는 일련의 과정으로 짜여 있는데, 그러한 자연의 순환과 섭리에 그대로 대응되는 은유적 상관물이 바로 “(부끄러운) 내 이름자”이다. 윤동주는 이 시편에서 흙 속에 피어나는 잔디를 통해 재생과 부활을 꿈꾼다. 그 재생과 부활은 수난과 영광에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개체적이고 집단적인 갱생이라는 의미를 모두 포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현실적 시련을 자연의 순리처럼 받아들이며 견디겠다는 자세를 무덤 위에 돋아나는 ‘풀’의 이미지, 서러움과 생명력을 동반한 소망의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내 이름자를 써서 흙으로 덮어버린 위에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것이라는 의미는, 이처럼 ‘부끄럼’ 자체를 순결한 자신에 대한 긍지로 삼아간 의식의 한 표현일 것이다. 

이러한 자기완성을 향한 끊임없는 반성적 인식이야말로 윤동주 시가 자기 회귀성이 강한 전형적인 서정 양식으로, 모어(母語)의 아름다움을 가장 높은 수준에서 체현한 언어의 보고(寶庫)로, 어둑한 역사를 외적 투쟁이 아닌 내면의 치열한 싸움으로 대응했던 첨예하고도 이색적인 저항의 한 양상으로 기억되게끔 작용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 안에는 ‘부끄럼’에서 ‘자랑’으로의 실존적 전이 과정이 이처럼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이러한 실존적 전이 과정을 순결한 언어로 구현해낸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는, 그 점에서 윤동주 시의 성숙 과정을 보여주는 자전(自傳)의 기록이라 할 만하다. 이 시집을 대하는 순간, 우리에게도 ‘부끄럼’이 “자랑처럼” 감염되어올 것이다. 이 점이 윤동주의 후행 계보가 존재하지 않는 가장 중요한 까닭이다. 그리고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시집을 새삼 꼼꼼하게 읽어야 할 까닭도 이러한 맥락에서 도출되는 것이다. (문화일보 6월 27일자 28면 3회 참조)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교수


 

[윤동주 탄생 100주년] <2> 광양 망덕포구 정병욱 가옥
어둠에 묻힐 뻔한 별, 밤하늘의 찬란한 별 되다  -  2017년 05월 01일(월) 00:00

그 포구에 봄볕이 들이친다. 포구는 더없이 아늑하고 따스하다. 지극한 아름다움은 세상과 가장 가까이 이웃하면서, 가장 낮고 쓸쓸한 곳에서 피어나는 법. 비록 만선의 고깃배는 보이지 않지만, 눈앞의 포구는 무수한 생명을 품고 있을 것이다. 세상살이의 시난고난한 이야기와 저잣거리의 삽상한 흥취를 머금고 말이다.

광양 망덕포구. 적당히 데워진 봄볕이 강물 위로 들이친다. 잔물결에 일렁이는 수면은 더없이 정밀하고 고적하다. 물비늘이 아름다운 섬진강 어귀마다 그렇게 봄은 영글어 간다. 21세기 신 해양시대를 열어갈 광양의 미래를 보는 듯 상서로운 기운이 감돈다. 광양의 대표적인 산, 구봉산에서 보는 지세도 동일한 느낌을 준다. 붉은 배가 대양을 향해 출항하는 홍선출해(紅船出海) 형국은 필경 오늘의 번창을 예감했던 모양이다.

망덕포구는 전북 진안에서 발원한 섬진강이 550리를 내달려 비로소 몸을 푸는 곳이다. 수줍은 섬진강은 그렇게 품이 넓은 남해를 만나 포구 곳곳에 다양한 생명들을 부려놓았다. 인근에서 전어, 굴이 많이 나는 것은 포구가 지닌 생래적인 포용성과 무관치 않다.

강과 인접한 바다에서 남자들은 파도를 다스리며 그물을 당겼을 터다. 팔딱거리며 은색의 배를 드러내는 전어는 뭇 사내들의 가슴을 뛰게 했다. 노도를 거스르며 그물을 당기는 힘은 남성성의 극치다. 매년 가을이면 망덕포구에서 전어축제가 열리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망덕포구는, 창조란 융합과 섞임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명징한 곳이다. 망덕포구를 가벼이 볼 수 없는 이유는 비단 그뿐이 아니다. 창조와 생명으로 전이되는 이곳은 한국문학사에 길이 빛나는 상징적 공간이다. 문학은 창조와 생명, 융합과 섞임을 기반으로 하지 않던가.

무엇보다, 망덕포구에 오면 기억해야 할 사람이 있다. 아니 기억해야 할 남자들의 우정이 있다. 시인 윤동주(1917∼1945)와 국문학자 정병욱(1922∼1985) 서울대 교수. 이들의 지고한 문우의 정은 빛의 도시 광양(光陽)을 해처럼 빛나게 한다.

물론 두 사람의 만남은 문학이 매개가 됐다. 망덕포구에 소재한 정병욱 가옥(등록문화재 341호)은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가 보관돼 있던 곳이다. 정병욱은 1940년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면서 선배인 윤동주를 만났다. 평소 두 사람은 문학을 이야기하며 각별한 우정을 쌓는다.

얼마 후 윤동주는 일본 유학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일설에 따르면 출국에 앞서 시집을 펴낼 계획이었으나 지도교수인 이양하 선생 만류로 뜻을 접는다. 일제의 탄압을 우려했던 때문이다. 윤동주는 필사본 3권을 만들어 1권은 이양하 교수에게, 1권은 후배 정병욱에게, 마지막 1권은 일본으로 가져간다.

그러나 윤동주는 일본 교토 도시샤대학 재학 중 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된다. 그 사이 정병욱도 일본으로 징용돼 떠나게 된다. 그는 징집 직전 망덕포구 고향집에 들러 어머니에게 윤동주의 시 필사본을 맡긴다. 해방과 함께 귀국한 정병욱은 윤동주의 사망 소식을 접하게 되고, 어머니가 고향집 마룻바닥 아래에 묻은 항아리를 떠올린다. 이 필사본에는 ‘서시’, ‘별 헤는 밤’, ‘자화상’ 등 윤동주의 주옥같은 작품들이 담겨 있다. 그리고 마침내 1948년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세상에 나오기에 이른다.

정병욱 가옥을 찬찬히 둘러본다. 고적하고 쓸쓸해 보이는 가옥에는 오랜 시간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있다. 불현듯 가옥 어딘가에서 누군가 걸어 나올 것만 같다. 가만히 윤동주 시인과 정병욱 교수의 이름을 불러본다. 허공으로 흩어지는 그의 이름들은 밤하늘의 별이 되었을 것만 같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별헤는 밤’중에서)

아마 정병욱은 섬진강 망덕 포구를 바라보며 윤동주의 ‘별헤는 밤’을 수없이 외웠을 것이다. 맑은 섬진강과 남해의 푸른 물, 광양의 밝은 빛이 들이치는 이곳은 별을 보기에는 최적의 장소다. 어쩌면 정병욱이 허공에 대고 읊었을 시어들은 섬진강 물을 따라 푸른 남해로 흘러갔을 것이다. 윤동주의 시혼도 이곳 어딘가를 떠돌며 오매불망 별이 된 벗들을 부르고 있을지 모른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1920년대 지어진 정병욱 가옥에는 문학적, 건축사적, 역사적 의미가 깃들어 있다. 최상종 광양시학예연구사는 “1925년 무렵에 지어진 가옥이라 근대적 가치도 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윤동주 유고시집이 보관돼 있던 장소성의 가치가 보다 주목을 받는다 ”고 평했다.

나라를 잃어버린 시대, 문학을 사랑했던 두 남자의 우정은 그렇게 시대를 넘어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났다. 이들의 각별한 우의가 있어 망덕포구는 아름답다. 더없이 광양이 빛난다.

광양시는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맞아 정병욱 가옥을 일부 정비하고 전시 공간을 마련할 예정이다. 정비가 끝난 후에는 이곳에 윤동주 관련 원고 영인본과 사진·유품 등을 비롯해 정병욱 선생의 미공개 자료 등을 전시할 계획이다. 천창우 광양윤동주문학보존회 사무총장은 “광양은 윤동주 문학의 탄생지라고 해도 좋을 만큼 문학사적 의미와 가치가 남다른 곳”이라며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아 윤동주 국제포럼과 문학제를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생전의 정병욱은 자신의 아호를 백영(白影)이라 불렀다. 그는 윤동주가 백의민족(白衣民族)을 상정해 그리던 ‘흰 그림자’를 오롯이 기억하기 원했다.

강물은 봄날의 햇볕을 싣고 먼 바다로 내달린다. 섬진강의 끝자락 망덕포구에서 아름다운 두 남자 윤동주와 정병욱의 별처럼 빛나는 우정을 생각한다.  /박성천기자 skypark@kwangju.co.kr  〈사진=광주일보DB·광양시 제공〉2017년 05월 01일(월) 00:00

 


[윤동주 탄생 100주년]<3> 연희전문대서 문학 꿈 영글다
푸르름 가득한 교정, 문학청년 詩魂 고스란히     -  20170529() 00:00

연희전문 창립 초기 공이 큰 미 남감리교 총무 핀슨 박사를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핀슨 홀(Pinson Hall)은 후일 기숙사로 쓰였다. 현재 2층에는 윤동주기념관이 있는데, 윤동주는 입학 후 이곳에서 생활하며 문학에 정진했다

늦봄과 초여름 사이, 캠퍼스는 푸른 신록과 젊음의 열기로 가득했다. 떠나가는 봄의 끝자락을 붙잡기라도 하듯 계절은 여름 문턱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한다.

연세대 정문에 들어서자 인도 양쪽으로 도열한 가로수가 시선을 끈다. 시원하게 내뻗은 푸른 나무들은 푸른 청춘들을 상징할 터다. 비록 취업과 진로 문제로 예전만은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캠퍼스엔 활기가 감돈다. 많은 이에게 청춘의 한때가 소중한 페이지로 기억되는 것은 푸르른 젊음 때문일 것이다.

수필가 민태원(1894∼1935)은 ‘청춘예찬’에서 “청춘(靑春)!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라고 했다. 나아가 “이성은 투명하되 얼음과 같으며, 지혜는 날카로우나 갑 속에 든 칼”이라고 정의했다. 청춘이 겸비해야 될 이성과 지혜는 ‘차가운 불’, ‘날카로운 곡선’과 같아야 한다는 의미다. 약동하지만 가볍지 않은, 단단하지만 결코 유연함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늘에 돌아보는 젊음의 상과도 무관하지 않을 터이다. 그러나 시대를 초월해 울림을 주는 청춘의 표상은 나를 내려놓은 자리에 ‘우리’를 들여놓는 것인지 모른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가슴 깊이 아파하며 가혹하게 스스로를 채찍질 했던 이가 있다. 청년 윤동주. 그는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는 삶을 희구했던 순수한 젊은이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참지식인이자, 참문인이었다.

연세대는 윤동주 시인이 대학생활을 보냈던 곳이다(당시의 학교 명칭은 연희전문대였다). 윤동주는 1938년부터 1941년까지 이곳에서 청춘의 한 때를 보냈다. 그가 고종 사촌인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에 입학한 것은 1937년이었다.

대학 시절 윤동주는 문학에 대한 꿈을 점차 현실화한다. 좋아했던 수업은 최현배의 조선어 시간과 이양하의 영문학 시간이었다고 전해진다. 우리말에 대한 사랑과 문학에 대한 열정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입학하면서부터 윤동주는 기숙사에서 생활한다. 사촌인 송몽규와 영어에 능통했던 강처종과 함께 한방을 썼다고 한다. 수업이 없는 날에는 교정을 거닐거나 인근의 동산을 산책하며 시심을 다듬었다. 정지용과 백석, 김영랑의 시를 읽었고 외국 시인으로는 라이너마리아 릴케, 프랑시스 잠 등의 작품에 심취했다.

당시 문학청년 윤동주의 시재(詩才)를 알 수 있는 일화가 윤동주기념관에 기록돼 있다. 그가 천상 시인이었음을 방증하는 에피소드다.

“동주는 교실과 서재와는 구별이 없는 친구다. 달변과 교수 기술과 박학으로 명강의를 하시는 정인섭 선생님에게는 누구나가 매혹되는데, 학기 말 시험에 엉뚱하게도 작문 제목을 하나 내 놓고 그 자리에서 쓰라는 것이다. 밤새워 해온 문학개론의 광범위한 준비가 다 수포로 돌아갔다. 억지 춘향으로 모두 창작기술을 발휘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필자 역시 진땀을 빼며 써냈더니 점수가 과히 나쁘지 않아 천만다행이라고 안심하고 말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동주는 바로 그 제목을 그 글을 깨끗이 옮겨서 신문의 학생란에 발표하였다. 제목은 ‘달을 쏘다’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들 모두가 말없는 동주에게 멋지게 한 대 맞고 말았다. 이렇게 보면 그는 교실과 하숙방, 그리고 생활 전부가 모두 창작의 산실이었다.” (유영, ‘연희전문시절의 윤동주’, 나라사랑23, 126쪽)

윤동주는 1939년 1월 23일자 조선일보 학생란에 산문 ‘달을 쏘다’를 기고한다. 2월 6일자에 시 ‘아우의 인상화’를, 같은 해 10월 17일에는 ‘유언’을 윤주(尹柱)라는 이름으로 발표한다.

윤동주가 기거했던 기숙사는 윤동주 시비가 있는 동산 인근에 자리한다. 서양의 근대 건축 양식을 지닌 기숙사는 연희전문 창립 초기에 공이 큰 미 남감리교 총무 핀슨 박사를 기념하기 위해 지어졌다. 핀슨 홀(Pinson Hall)로 명명된 건물은 1922년 학생 기숙사로 준공됐으며 1938년 연희전문에 입학한 윤동주는 이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문학에 정진했다.

현재 이곳 2층에는 윤동주기념관이 있다. 학교법인 사무처도 핀슨 홀 건물에 입주해 있는데, 관계자는 “내년 사무처가 다른 곳으로 이주를 하면 건물 전체가 윤동주 기념관으로 새롭게 꾸며질 것”이라고 말했다.

윤동주기념관에는 당시 시인이 생활했던 기숙사 방이 재현돼 있다. 시를 쓰고 책을 읽던 나무 책상과 나무 걸상, 그가 읽었을 책 등이 비치돼 있다. 시인의 자화상으로 보이는 옛그림도 소품처럼 드리워져 있다. 공간은 정답고 아늑해 시인의 천품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연세대는 윤동즈 시정신과 문학적 업적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해 지난 2000년 11월 27일 윤동주기념사업회를 조직했다. 기념사업회는 “윤동주가 떠난 지 반백년이 지났지만, 그 시대가 주는 절망 속에서 그의 영혼의 내면에 자리한 기독교적 가치관과 나라사랑이 그의 저항의 원동력이었으며 그의 삶의 궤적이요, 지표였다”며 “한국인이 제일 사랑하는 시인인 윤동주 동문의 기독교 정신과 민족사랑 정신을 되새기어 그의 문학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한국 시문학을 부흥시키기 위하여 설립하였다”고 취지를 설명한다.

윤동주기념사업회에서는 시인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특히 올해는 탄생 100주년을 맞아 윤동주 시인 추모식(2월)과 기념음악회(5월)를 개최했다. 앞으로 윤동주시문학상,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 국학연구원과 연변대학공동학술대회 등 의미있는 행사들을 개최할 예정이다.

윤동주 시비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1968년 연세대 총학생회가 건립한 시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그가 이 동산을 거닐며 지은 구슬 같은 시들은 암흑기 민족문학의 마지막 등불로서 겨레의 가슴을 울리니 그 메아리 하늘과 바람과 별과 더불어 길이 그치지 않는다”

화병에 꽂힌 꽃송이가 하오의 볕을 받아 처연하게 빛난다. 어디선가 날아온 비둘기 몇 마리가 주위를 배회하다 숲으로 사라진다. 그는 어디에 있는가. 그의 시혼은 이곳 동산 아니 교정 어딘가를 날며 시를 읽고 있을지 모른다. 시비 아래 부서지는 햇살을 바라보며 우리 시대 참 시인의 모습을 잠시 묵상한다.  /글·사진=박성천기자 skypark@  광주일보



[윤동주 탄생 100주년] <4> 서울 윤동주문학관
별빛 내린 언덕 위 시인의 흔적 따라 걷는다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 자리한 윤동주문학관은 시인의 삶과 문학이 응결된 공간이다. /최현배기자 choi@kwangju.co.kr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 자리한 윤동주문학관은 작고 아담하다. 뒤로는 인왕산 자락과 앞으로는 저만치 경복궁이 자리한다. 흰색 톤의 문학관은 윤동주 시인의 순절한 영혼을 떠올리게 한다. 소담하면서도 단촐한 조형미는 아마도 그의 시와 성정을 고려한 듯하다.

시인의 고향은 만주 북간도인데 왜 서울 종로구에 문학관이 있을까? 그것은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지금의 연세대) 문과를 졸업한 사실과 무관치 않다. 그는 대학시절 종로구 누상동의 소설가 김송(1909∼1988) 집에서 하숙을 했다. 당시 문우이자 후일 평론가로 문명을 날렸던 정병욱(1922∼1982·전 서울대국문과 교수)이 절친한 후배다.

“윤동주와 정병욱은 아침이면 인왕산 중턱까지 산책을 했답니다. 두 사람은 언덕을 오르며 식민지 조국의 암울한 현실을 아파하며 그럼에도 흔들림 없이 문학의 길을 가자는 결의를 다졌지요. 우리가 익히 아는 빛나는 시들이 이 시기에 창작됐답니다.”

윤동주문학관 문화해설사 한경자 씨의 설명이다. 그녀는 ‘별헤는 밤’, ‘자화상’, ‘쉽게 쓰여진 시’ 등이 이 시기에 탄생했다고 덧붙인다. 윤동주 문학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시들이 이곳을 기화로 형상화된 것은 공간과 예술의 상관성을 가늠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종로구는 지난 2012년 7월 인왕산 자락에 윤동주문학관을 세웠다. 원래 이곳은 청운수도가압장이 있던 자리다. 느려지는 물살에 압력을 가해 세차게 흐르도록 견인하는 장치가 바로 가압장이다. 한경자 해설사는 “세상에 지친 나머지 적당한 타협으로 비겁해지는 우리들에게 윤동주 시는 새롭게 시작하고 다잡을 수 있도록 자극을 준다”고 강조한다.

그럴 만도 하다. 세상살이에 지친 사람들은 이곳에 들러 영혼의 생명수를 공급받는다. 주말이면 1600명의 관람객들이 윤동주 시인의 흔적을 보고 느끼기 위해 방문한다. 시가 읽히지 않는 시대라고 하지만, 시집이 팔리지 않는 시대라고 하지만, 순전한 영혼의 시인을 만나기 위한 발걸음은 끊이지 않고 있다. 윤동주는 종로구가 배출한 고품격 브랜드이자 세계 속에 자랑할 만한 문인이기 때문이다.

문학관은 모두 3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1전시실은 윤동주의 시세계를 가늠할 수 있는 사진자료, 친필원고 영인본이 비치돼 있다. 눈에 띄는 자료 가운데 하나가 중앙에 놓여 있는 ‘우물틀’이다. 용정 생가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문인들이 가져온 것으로, 시 ‘자화상’의 모티프로 추정된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찿아가선”으로 시작되는 ‘자화상’은 윤동주의 시를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이다

2전시실과 3전시실은 가압장 물탱크가 있던 공간을 개조한 곳이다. 각각 ‘열린 우물’ ‘닫힌 우물’을 상징하는 이곳은 시간의 흐름이라는 장소성과 아울러 침묵, 사색을 환기한다. ‘열린 우물’은 가압장의 물탱크 윗부분을 개방한 덕분에 천장이 없다. 이곳에선 계절의 변화와 4계의 풍경을 오롯이 감상할 수 있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합니다”라는 ‘별 헤는 밤’의 싯구가 부지불식간에 연상된다. 그 뿐 아니다. 물탱크에 저장됐던 물의 흔적은 벽면에 특유의 물그림자를 새겨, 시인의 생과 작품의 의미를 가늠할 수 있는 모티브를 제공한다.

3전시실인 ‘닫힌 우물’은 물탱크 윗부분을 개방하지 않은 탓에 온전히 하나의 공간으로 이미지화된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캄캄한 감옥의 이미지와 만날 수 있다. 윤동주가 마지막 숨을 거두었던 일본의 후쿠오카 형무소를 현실 속에서 재현한 것이다. 이곳에선 방문객들을 위해 윤동주의 삶과 문학을 소재로 한 다큐가 상영된다. 조국의 광복을 기원하며 죽음에 이르기까지 시심을 불태웠던 해환(海煥)의 넋을 잠시나마 만날 수 있다.

문학관을 나와 뒤편 ‘시인의 언덕’을 오른다. 따사로운 오뉴월 햇볕이 문학관 위로 들이친다. 한폭의 그림 같은 수려한 풍광이다. 좌로는 북악산이 펼쳐져 있고 앞으로는 경복궁이 한눈에 들어온다. 뒤로는 인왕산과 창의문(자하문)이 수도 ‘한양’의 위엄을 드러낸다. 여기에 서울 성곽의 흔적까지 남아 있어 서울의 어제와 오늘을 조망할 수 있다.

풍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이에서도 명징하게 통용되나 보다. 윤동주는 이 언덕에서 별을 헤며 그리운 얼굴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식민지 조국의 현실을 아파했던 고뇌에 찬 시인의 표정이 풍경과 오버랩된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憧憬)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중략)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별 헤는 밤’중에서)

이곳에선 매년 윤동주의 삶과 문학을 기리는 문학제가 열린다. 작년에도 추모콘서트, 시화전 등이 열렸다. 올해도 탄생 100주년을 맞아 9월 8일부터 10일까지 윤동주의 문학사상과 민족사상 정신을 기리는 윤동주 문학제를 개최한다.

문학관과 청운문학도서관, 시인의 언덕에서 펼쳐지는 이번 문학제는 제3회 윤동주 창작음악제 및 역대 수상팀 축하 공연을 비롯, 제4회 청소년 윤동주시화공모전 등이 예정돼 있다. 또한 윤동주 문학 관련 저명한 학자를 초청 문학 강연도 진행한다. (문의 02-6203-1155)

심정구 종로문화재단 담당자는 “탄생 100주년을 맞은 올해는 시민과 함께하는 다양한 행사를 기획했다”며 “윤동주문학관 동영상 기념품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그리고 윤동주’ DVD, USB를 찾는 시미들도 많다”고 귀띔했다.

시인의 언덕을 둘러보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이곳은 ‘하늘과 바람과 별’이 깃들기에 최적의 공간이다. 한동안 시비 곁에 서서 시인을 기다린다. 그는 오지 않고 바람만 휑하니 분다. ‘그의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뿐이다’.  광주일보  /박성천기자 skypark@kwangju.co.kr  2017년 06월 12일(월) 00:00 http://www.kwangju.co.kr/section.html?section=254





윤동주 탄생 100주년 <5> 일본 유학시절

식민지 유학생의 비애·저항 … 여전한 울림으로    -    2017년 06월 26일(월) 00:00
윤동주 시인이 릿교대학에서 한 학기를 보내고 편입했던 도시샤대학은 기독교 정신과 국제주의에 입각한 건학 이념을 기치로 내건 학교다. 〈도시샤대학 홈페이지〉
1941년 12월 8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다. 그해 전시학제 단축으로 12월 27일 연희전문을 졸업한 윤동주 앞에는 암울한 미래가 놓여 있었다. 집안 어른들은 윤동주의 진로를 두고 깊은 고민에 빠진다. 그들은 고종사촌이었던 윤동주와 송몽규를 일본에 유학 보내기로 결정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일본 유학의 전제 조건은 창씨개명이었다. 졸업증명서와 일본 대학 입시에 필요한 서류에는 창씨 계명한 이름이 올라 있어야 했다.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 문학을 공부하고자 했던 윤동주에게는 ‘굴욕’의 현실 그 자체였다(현재 연세대에 보관된 연희전문대 학적부에는 윤동주와 송몽규의 창씨 개명한 이름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얼골이 남어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줄의 참회록(懺悔錄)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나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어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추정하건데 윤동주는 창씨개명을 제출하기(1942년 1월 29일) 전, 시 ‘참회록’을 쓴 것으로 보인다. 시가 쓰인 날짜(1942년 1월 24일)가 5일 빠르다. 시인은 “이다지도 욕될가”라는 표현으로 참회와 저항의 상반된 감정을 드러냈다. 뼈저린 고통과 깊은 성찰이 투영된 ‘참회록’은 시공을 초월해 오늘에까지 울림을 준다.

그렇게 윤동주는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다. 그의 나이 25세 때인 1942년이었다. 송몽규는 교토제국대학 서양사학과에, 윤동주는 릿교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 북간도 용정이 고향인 윤동주는 부산행 기차와 일본행 관부연락선을 탔을 것이다. 그리고 교토까지 기차로 이동하는 번거로운 여행을 감행했다.

릿교대학에서 한 학기를 보낸 윤동주는 이후 도시샤대학에 편입한다. 교토제국대학에 다니는 송몽규와 가까운 대학으로 옮기고 싶었던 모양이다. 도시샤대학은 기독교 정신과 국제주의에 입각한 건학 이념을 바탕으로 많은 인재를 길러낸 대학으로 알려져 있다. 윤동주 시인 외에도 이곳은 정지용, 오상순 시인 등이 한국 현대시문학사의 거장들이 거처간 미션계 학교로도 유명하다.

도시샤대학은 1875년 그리스도교 전도사이자 교육자인 니지마 조(新島襄·1843∼1890)에 의해 설립됐으며 당시의 학교명은 도시샤에이학교(同志社英學校)였다. 니지마 조는 해외에서 학위를 취득한 최초의 일본인으로 알려질 정도로 교육에 대한 남다른 철학을 지닌 학자였다.

2011년 현재 도시샤대학에는 2만8000명의 학생과 800여 명의 교수가 재직하고 있다. 신학부, 문학부, 사회학부, 법학부 등 11개 학부 33개 학과, 대학원과정에는 15개의 연구과 29개 전공이 개설돼 있다. 광주일보와 함께 ‘윤동주 서시 문학상’을 제정한 계간 ‘시산맥’은 지난해 6월 20여 명의 시인들이 도시샤대학을 방문했다. 윤동주 시인의 흔적이 남아 있는 의미있는 공간을 찾아 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함이었다. 문정영 ‘시산맥’ 대표는 “윤동주는 시대의 고뇌를 깊은 성찰과 뼈저린 괴로움으로 승화했다”며 “‘서시문학상’ 제정을 계기로 일본에서의 시인의 흔적을 더듬어보는 것은 후배시인들로서 당연히 거쳐야 할 통과의례”라고 밝혔다.

140년 이상의 역사가 깃든 교정은 긴 역사만큼이나 격조있는 정적이 감돈다. 오래된 나무에서 배어나오는 수목의 향은 깊고 잔잔하다. 전통의 아우라가 빚어내는 그윽함이 오래도록 여운을 준다. 도시샤대학 교정 한켠에는 윤동주 추모시비가 있다. 도시샤대학을 졸업한 재일동포들이 주축이 돼 1995년 2월 15일에 제막했다고 한다. 시비 앞에는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 유고시집과 사진이 놓여 있다. 20여 명의 시인 일행은 시비 앞에서 헌화와 묵념을 했다. 광주일보 신춘문예(2016) 출신 진혜진 시인은 윤동주의 ‘쉽게 쓰여진 시’를 낭송했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가,/ ……/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시비 앞에 놓인 사진 속 윤동주의 표정은 평온하다. 아니 “선량하다”는 표현이 맞을 듯하다. 마치 한 마리의 사슴처럼 그는 순진구무구한 표정으로 한국에서 온 시인들을 맞고 있다. 그의 미소가 짧은 생애를 온전히 보여주지는 못할 것인데, 웃음인듯 울음인듯 보이는 얼굴은 더할 수 없는 쓸쓸함과 아픔으로 다가온다.

강의실은 윤동주의 20대의 흔적이 있을지 모른다. 진혜진 시인은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복도에서 바라본 강의실에는 그의 시 속에 나오는 노교수의 강의만이 있었다”며 “시대적 위험에도 불구하고 불운한 조국의 운명을 시로 드러냈던 그를 조국은 끝내 지키지 못했다”고 말했다.

아마도 20대의 청년 윤동주는 강의실에 앉아 영문학을 공부하고 시를 썼을 것이다. 그는 없고 모든 것은 그대로다. 당시나 지금이나 세상은 별반 달라진 것 같지 않다. 윤동주의 ‘참회’는 시간을 거슬러 오늘의 우리에게, 아니 ‘치욕’을 값싼 대가로 치환하려는 이들에게 아픈 죽비로 다가오는지 모른다.

다행히 윤동주 시비 옆에는 그의 선배 시인 정지용의 시비가 자리해 그마마 외로움을 덜어준다. 정지용은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문에 이렇게 적고 있다.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고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적도 없이! 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박성천기자 skypark@kwangju.co.kr



[윤동주 탄생 100주년] <6> 후쿠오카 형무소
광복 6개월 앞두고 스물여덟에 형장의 이슬 되다

20170710() 00:00
구치소로 바뀐 후쿠오카 형무소 인근에 설치된 철조망. 〈시산맥 제공〉
“강변에서 식사를 한 후 바위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노래 한 곡 불러 주지 않겠어?’라는 급우들의 청을 받고 윤동주는 ‘아리랑’을 불렀다. 조금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애수를 띤 조용한 목소리가 강물 따라 흐르고, 모두들 조용히 듣고 있다가 노래가 끝나자 모두 박수를 쳤다. 윤동주가 주저하지도, 사양하지도 않고 노래를 불렀던 것은 급우 전원이 자신의 송별회에 참석해 준 데 대한 감사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위의 글은 2006년 ‘현대문학’ 6월호에 실린 윤동주 연구가 야나기하라 야스코의 특별기고 일부다. 당시 윤동주는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기에 앞서 도시샤대학 친구들과 송별회를 열었다. 비록 짧은 기간이나마 공부하며 정이 들었던 친구들과의 마지막 만남을 기억하고 싶었던 것이다. “주저하지도, 사양하지도 않고” 노래를 불렀고, 그 노래가 ‘아리랑’이었던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송별회에 참석해준 친구들에 대한 고마움과 조선인으로서의 자각을 잃지 않았다는 의미다.

윤동주가 갑작스런 귀국을 해야 했던 것은 당시의 전황과 무관치 않다. 윤동주가 릿교대학에서 도시샤대학으로 편입을 했던 1942년 봄, 미국은 일본 본토에 대한 폭격을 감행한다. 일제는 부족한 병력을 수급하기 위해 조선인에 대한 징병제도를 실시한다. 윤동주는 귀국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처해졌고, 때는 1943년 초여름이었다.

그러나 윤동주는 귀국하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그해 7월 14일 일본 경찰에 체포돼 유치장에 감금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고종사촌 송몽규는 윤동주보다 4일 전인 7월 10일에 붙잡혔다.

그렇다면 윤동주는 왜 체포됐을까? 윤동주는 내향적이고 신중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한때 많은 이들은 일본 경찰의 단속에 잘못 걸려들어 희생을 당했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윤동주는 사상범으로 체포됐다.

일제 때의 정부극비 문서들인 ‘특고월보’에 실린 일경의 취조문서에 이렇게 나와 있다. ‘경도에 있는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 다시 말해서 독립운동이 죄목이었다.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중심인물은 송몽규이고 윤동주가 그에 동조했고, 이 사건으로 검사국(요즘의 검찰청)에 송국된 사람은 송몽규, 윤동주, 고희욱 3인’이었다는 사건의 전모와 경찰 수사 종결의 결과가 밝혀졌다.”

고희욱 씨는 당시 22세였고 당시에 교토의 제 3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다음은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에 수록된 고희욱 씨의 말. “그 사건은 송몽규 씨가 일경의 ‘요시찰인’이었기 때문에 일어났던 거였어요. 그 사람을 일경이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는 걸 모르고 같이 ‘우리 민족의 장래’니 ‘독립운동’이니 하는 이야기들을 나눴거든요. 나중에 보니 일경이 그걸 모조리 엿듣고 미행하고 해서 사건을 만들었더군요.”

이에 앞서 윤동주는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을 계기로 민족의식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친구들에게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등 ‘의식화 작업’을 진행했다. 동생들에게는 “우리말 인쇄물이 앞으로 사라질 것이니 무엇이나 심지어 악보까지도 사서 모으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2월. 윤동주의 고향집에 한 통의 전보가 배달된다. ‘16일 동주 사망, 시신 가지로 오라.’ 모진 옥살이 끝에 윤동주는 해방을 불과 6개월 여 앞두고 감옥에서 죽고 만다. 그의 나이 불과 28세. 넓은 세계를 경험하고자 떠난 유학의 여정에서 윤동주는 그토록 푸른 나이에 생을 마감한 것이다. 강제로 투여한 생체실험 주사가 직접적인 사인이었다고 전해진다.

윤동주가 옥사했던 후쿠오카 형무소는 현재 ‘후쿠오카 구치소’로 명칭이 바뀌어 있다. 구치소 바로 옆으로 해변이 있다. 윤동주는 밤이면 귓가를 적시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밤새 뒤척였을 것이다. 파도소리는 시인의 순결한 영혼을 때리는 가혹한 폭음이었고, 가슴을 후벼 파는 절망의 포효였을 터이다.

지난해 계간 ‘시산맥’ 회원들은 윤동주 시인의 흔적을 찾아 일본을 방문했다. 시인들은 후쿠오카 구치소 앞에서 윤동주 시인의 고혼을 기렸다. 광주일보 신춘문예 출신 진혜진 시인은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말한다.

“윤동주와 그의 고종사촌 송몽규가 옥사한 후쿠오카 형무소는 변해 있었다. 지금은 구치소가 있고, 근처에는 시민회관과 4, 5층의 아파트가 있다. 구 형무소 담벼락 자리에 있는 니시모치 공원은 어린이 놀이터 정도로 보였다. 채수구가 있었고 그곳에서 추모제와 시 낭송을 하였다. 철망으로 가려진 채수구는 마치윤동주 시인이 갇혔던 감옥처럼 느껴졌다. 1km 앞쪽으로 펼쳐진 하까다만이라 불리는 바다만이 그때 그대로 있었다. 밤이면 고통에 찬 비명 같은 파도소리를 들으며 그는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저 바다가 야속했을 것이다.”

윤동주는 한 시대를 그렇게 아프게 살았다. 그의 삶은 우리들의 아픈 역사이자, 상흔의 기억이기도 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가슴에 슬프고도 아름다운 존재로 드리워져 있다. ‘자화상’ 속의 그는 여전히 우리에게 묻고 있다. 오늘 당신들의 삶이 부끄럽지 않느냐고.

함께 윤동주와 연희전문에서 공부했던 후배 정병욱 전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렇게 회고한다. “이제는 북간도 용정 뒷동산에 묻힌 동주의 무덤 위에 이 봄에도 파란 잔디가 돋아났을 것이다. 그러나 동주의 무덤은 멀리 북간도의 용정에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동주의 나라사랑, 동주의 겨레사랑을 저버린 모든 사람들의 가슴속에도 동주의 무덤은 있는 것이다.”(정병욱의 추모기 ‘잊지 못할 윤동주의 일들’ 중에서)
/박성천기자 skypark@kwangju.co.kr   http://www.kwangju.co.kr/section.html?section=254


윤동주와 함께 한 듯 북간도의 별 헤는 밤
탄생 100주년 기념 광주일보·시산맥 ‘문학기행’

2017년 07월 20일(목) 00:00 /  /중국 용정=박성천기자 skypark@
북간도 용정은 구한말 독립투사들이 이주해 항일독립운동을 펼쳤던 곳이다. 용정 명동촌에 있는 윤동주 시인 생가.
윤동주 시인의 생가는 북간도 용정(명동촌)에 있다. 생가에는 작은 우물이 있다. 정자각형 우물의 모형은 정교하다. 보기에도 새로 지어진 지 얼마 안돼 보인다. 고개를 숙여 안을 들여다보면 고인 물이 보인다. 우물에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가 얼핏얼핏 비친다. 맑은 날에는 들여다보는 이의 얼굴도 보일 것 같다.

생가 뒷마당에는 앵두나무가 서있다. 푸른 잎 사이로 드러난 붉은 앵두는 보색의 효과 때문인지 유독 불그스름해 보인다. 적요하고 한가롭지만, 어딘가 모르게 쓸쓸하고 고적하다. 시인은 어디에 있는가. 사슴처럼 해맑고 순진무구한 미소를 짓던 윤동주는 어디에 있는가.

광주일보와 ‘윤동주 서시문학상’을 공동으로 제정한 계간 ‘시산맥’은 지난 15일부터 18일까지 시인의 발자취를 찾아가는 문학기행을 다녀왔다. 40여 명의 시인들이 참여해 3박 4일 일정으로 진행된 이번 문학기행은 윤동주 시인의 생가와 묘지, 모교인 대성중학교 등 시인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곳을 찾아 그의 시 정신을 기리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번 기행에는 문정영 시산맥 대표, 김필영 시산맥 시인협회 회장, 지난해 제1회 윤동주 서시 해외작가상 수상자로 선정된 김미희 시인(미국 달라스 거주)이 참여했다. 또한 윤동주 서시문학상 제전위원장 이성렬 시인 (경희대 교수), 윤동주 서시해외작가상 제전위원장 서영택 시인(대진실업주식회사 대표), 광주일보 신춘문예 출신(2016) 진혜진 시인, 시산맥이 배출한 최연수·정시마·조숙향 시인, 평론가인 전혜수 동국대 외래교수 등이 참석했다.

북간도 용정은 구한말 독립투사들이 이주한 곳이다. 항일투사들과 이주민들은 해방을 위해 항일투쟁을 전개했고, 근대 민족교육을 활발하게 펼쳤다.

윤동주 생가는 용정시 명동촌에 자리한다. 1994년 용정시 자치정부와 용정시문학예술연합회에서 복원했다. 2007년 연변조선족 자치주 문화재 보호단위로 지정됐고, 2014년 표지석을 세웠다.

생가는 새롭게 단장이 됐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한국의 시인’ 보다는 ‘조선족 시인’의 집 같은 느낌을 주었다. 윤동주는 죽어서도 ‘독립된 조국’의 시인이 아닌, 여전히 이역만리를 떠도는 ‘이방인의 시인’으로 남아 있는 듯 했다.

시인의 생가 바로 옆에는 옛터가 있다. 그리고 옛터 옆에는 작은 교회가 있는데 아담하다 못해 협소하다. 예배당에는 당시 풍경을 엿볼 수 있는 손때 묻은 강대상, 십자가가 있었는데 옛 교구들은 무정한 시간의 흐름을 대변한다.

윤동주 생가를 둘러보고 당도한 곳은 시인이 묻혀 있는 명동촌 공동묘지다.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한 공동묘지에는 수많은 묘가 자리했다. 웃자란 풀들 사이로 한 그루의 살구나무가 보였는데 묘는 그 옆에 있었다. 묘지는 비교적 잘 관리된 상태였고 주위로 꽃다발과 기념 소품들이 놓여 있었다.

묘 앞에서 간단한 추모식이 거행됐다. 시인들이 광목천을 한자락씩 잡고 묘를 빙 에둘러 싸고 시인의 혼을 기렸다. 묵념과 헌화 등 간단한 의식에 이어 시인들의 시낭송이 진행됐다. 서영주·김미희 시인 등이 ‘자화상’을 비롯한 윤동주의 작품을 낭송했다.

시인들은 윤동주 시비가 있는 대성중학교도 방문했다. 윤동주는 원래 은진중학교에서 공부하다 숭실중학교로 편입했다. 이후 은진중학교를 비롯한 5개의 학교가 대성중학교로 통합됐는데 대성중학교에는 윤동주가 한때 공부했던 교실이 복원돼 있다.

교사 앞에는 ‘별의 시인 윤동주’라는 동상과 대표작 ‘서시’가 새겨진 시비가 세워져 있다. 학교는 윤동주가 모교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해 보였다. ‘윤동주 교실’이라고 명명된 공간에는 당시의 모습이 재현돼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교실 어딘가에서 시인이 해맑은 얼굴로 나올 것 같은 분위기였다.

방문 일행은 연변시인들과 함께하는 시낭송회도 개최했다. 연변대주호텔에서 연변시낭송협회와 공동으로 개최한 ‘중한문인 시랑송의 밤’에서 양국 시인들은 저마다 좋아하는 윤동주 작품을 낭송했다.

연변시낭송협회에서는 오영옥·김정자 시인이 각기 ‘별헤는 밤’, ‘쉽게 쓰여진 시’ 등을 낭송했다. 시산맥에서는 한경용·최연수 시인 등이 ‘눈오는 지도’, ‘흰 그림자’ 등을 낭송했고 이화영 시인은 ‘윤동주 시인의 생애와 문학’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했다. 또한 송미자 연변시낭송협회장은 ‘아리랑’을 불러 참석한 문인들의 가슴을 울렸다.

문정영 시산맥 대표는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았지만 시인 윤동주에 대한 실질적인 관심이 미흡하다”며 “이번 방문을 계기로 윤동주 시인의 위상이 회복되고 그의 정신이 널리 선양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http://www.kwangju.co.kr/read.php3?aid=1500476400609309254

[ 박보균 칼럼] 윤동주를 기억하는 방식

고향집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의 정체성 헝클어
무덤 발견한 일본학자 회고는
"동주 자료 찾는 한국인 없어”
한국 문단에 부드러운 경멸
도시샤의 시비는 개방 학풍

윤동주는 위대한 매력이다. 그 매력은 동북아 3국에서 발산된다. 윤동주는 두만강 건너 만주(중국 동북 3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향과 평양(숭실중학), 서울(연희전문)에서 공부했다. 일본에 유학을 갔다. 그리고 후쿠오카 감옥에서 숨졌다. 한·중·일에서 그의 시를 기억하고 기린다. 그 시각과 방식은 비슷하면서 다르다.
 
윤동주의 고향 옛집은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위치는 중국 조선족자치주의 룽징(龍井·용정)시 밍둥(明東·명동)촌이다. 한국 관광객들은 광개토대왕비·백두산을 오가며 그곳을 찾는다. 그들은 민족주의, 통일의 감정으로 충만해진다. 하지만 그곳에 가면 당황하고 낭패감에 젖는다. 집 앞에 놓인 큰 표지석 때문이다. 한글과 중국어로 이렇게 적혀있다.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 생가, 中國 朝鮮族 愛國詩人 尹東柱 故居(고거)’-. 윤동주의 서시(序詩,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중에서)가 돌에 새겨져 있다. 하지만 그 시각적 충격은 순례의 감흥을 헝클어뜨린다.
 
2012년 룽징시는 그 집을 단장했다. 조선족 동포들도 정성을 보탰다. 하지만 시인의 정체성은 혼란스럽다. 그는 소수민족 출신의 중국 사람이 돼 버렸다. 윤동주는 한글로 글을 썼다. 그 시절을 굳이 따지면 북간도는 만주국이다. 만주국은 제국 일본의 위성국이었다. 그곳 인근에 윤동주의 무덤이 있다. 발견자는 일본인 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와세다대 명예교수) 교수다. 그는 한국문학 전공자다. 1985년 오무라는 연변대학 교환교수로 갔다. 그해 5월 잡초와 흙더미로 덮인 산자락을 누볐다. 무덤과 비석을 찾아냈다.
 

오무라의 성취는 이어졌다. 그는 86년 윤동주의 육필 유고(遺稿)에 접근했다. 한국과 일본의 ‘윤동주 전문가’로선 처음이다. 유족들이 그의 집념을 인정해서다. 오무라의 저서에 이렇게 적혀 있다. “그 원고를 접했을 때 손이 떨릴 정도의 감동을 느꼈다. 윤동주의 친우 정병욱 일가가 비밀리 숨긴 자선시고집, 친구 강처증이 보관했던 유품과 작품, 누이동생 부부가 지닌 창작노트다”.(『윤동주와 한국 근대문학』) 오무라 교수의 회고는 씁쓸하다. “그 10년 뒤 육필원고를 보고 싶다는 한국인이 나타났다. 단국대학 왕신영 교수가 그다. 유가족들 말을 빌리면… 윤동주가 왕성하게 논의의 대상이었는데도 이상하게도 1차 자료를 직접 보여 달라고 요청한 이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 회고는 한국 문단·학계를 부끄럽게 만든다. 그것은 부드러운 경멸이다. 오무라의 첫 행운은 알리바이를 갖는다. 무덤 발견 때는 한· 중 수교 이전이었다. 하지만 육필 원고는 다르다. 한국의 지적 풍토는 원전(原典), 기초자료 습득에 부실하다. 현장추적에 게으르다. 그 대신 사후 분석과 비평, 의미 부여에 익숙하다. 왕신영(일본어과) 교수는 19일 “그때 놀란 것은 제가 육필 원고를 보고자 했던 첫 한국 사람이었다는 점과 우리 국문학계의 무반응 내지는 무시였다”고 했다.
 
실망은 이르다. 반격이 진행됐다. 왕신영은 육필원고의 필사, 디스켓 저장에 몰입했다. 왕신영은 “원고를 읽는 동안 윤동주 시인이 온갖 비밀을 털어놓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고 말한다. 그가 주도한 작업은 출판으로 이어진다. 발간작업에 오무라 교수, 유족(윤인석 교수)도 참여한다. 99년 공동작업으로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이 나왔다. 그 책의 위상은 독보적이다. ‘윤동주 알기’에선 우회할 수 없는 존재다.
 
일본 교토의 도시샤(同志社)대학 캠퍼스에 윤동주 시비(詩碑)가 있다. 95년 도시샤의 재일동포 졸업생들이 건립했다. 아담한 규모(높이 70㎝, 너비 1m)다. 윤동주의 ‘서시’가 원고글씨로 적혀 있다. 그 옆엔 그의 도시샤 선배인 정지용의 시비(2005년 건립)도 있다. 그곳은 도시샤의 중심이다. 그 앞 건물은 ‘예배당’(중요문화재), 옆은 명덕관이다. 일본 규슈 대학 연구원 이병진(54)씨는 “캠퍼스 구석에 시비가 있으려니 짐작했는데 반대다. 윤동주의 재학 중 일본식 이름이 적혀 있나 살펴봤는데 그렇지 않다. 도시샤의 자유와 개방, 기독교 학풍은 인상적”이라고 했다. 윤동주의 일본 이름은 히라누마 도주(平沼東柱·평소동주)다. 창씨개명은 제국 일본의 악랄한 조치다. 그의 시 참회록은 그때의 회한과 고뇌를 담고 있다.
 
윤동주 탄생 100주년(1917~45)이다. 그는 신화와 영웅의 무대로도 옮겨진다. 신길우(수필가) 박사는 오랫동안 윤동주를 추적해왔다. 신길우는 그런 흐름의 과도함을 경계한다. “윤동주의 시는 저항과 민족주의를 깔고 있다. 하지만 거기에만 초점을 맞추면 곤란하다. 그의 시가 읽히는 것은 순수하고 맑은 영혼을 윤동주만의 언어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박보균 칼럼니스트·대기자   [중앙일보] 입력 2017.07.20 02:26   [출처: 중앙일보] [박보균 칼럼] 윤동주를 기억하는 방식 


[동주의 길]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김응교 숙명여대 기초교양대 교수  |   입력 2017-07-05 03:00수정 2017-07-07 16:47

<1> 프롤로그 - 병원

《 1943년 7월 14일, 일본 유학 중이던 윤동주는 교토에서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그리고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형무소 차가운 감방에서 생을 마감했다. 28년의 짧은 생. 하지만 청년 시인 윤동주의 울림은 우리에게 지금도 여전하다. 윤동주 탄생 100년(12월 30일)을 맞아 그 흔적의 공간을 따라 그의 삶과 문학을 돌아보는 기획을 격주로 연재한다. 집필은 윤동주 연구의 권위자인 김응교 숙명여대 기초교양대 교수가 맡는다. 》
  
그에게 언어는 생명이었다.  

글을 쓰려면 “피로 쓰라”라고 했던 니체, “온몸으로” 시를 쓴다던 김수영, 심비(心碑)에 새겨진 글을 열망했던 바울처럼 한 해 동안을 두뇌가 아니라 몸으로 헤아려 가까스로 글 몇 줄을 얻었던 윤동주에게 글쓰기는 목숨이었다.

“딴은 얼마의 단어를 모아 이 졸문을 지적거리는 데도 내 머리는 그렇게 명석한 것은 못 됩니다. 한 해 동안을 내 두뇌로써가 아니라 몸으로써 일일이 헤아려 겨우 몇 줄의 글이 이루어집니다.”(윤동주, ‘화원에 꽃이 핀다’·1939년)

그는 모국어를 빼앗겼다. 모국어를 빼앗긴 것은 숨을 빼앗긴 것이다.

연희전문에 입학하던 해, 1938년 3월에 조선어 사용금지와 교육금지령이 내려졌건만 금지된 조선어 수업을 열었던 외솔 최현배 교수는 그해 9월, 3개월간 투옥되고 강제 퇴직을 당한다. 윤동주가 동생들에게 자랑하던 존경하던 선생님이었다. 그가 침묵하기 전 1939년 7월 8일에는 국민징용령이 내려졌다. 언제든 전선으로 끌려가야 하는 신세였다. 그 충격이었을까. 그해 9월 ‘자화상’을 쓴 이후 1년 2, 3개월 동안 그는 글을 쓸 수 없었다. 1939년 11월 10일부터는 창씨개명령으로 성씨마저 바꿔야 할 지경이었다.   


모두 조선어와 연관된 일이었다.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었고 숨쉬기도 괴로웠던 시대였다. 침묵기를 거쳐 1940년 12월 그는 ‘병원’을 쓴다. 조선어를 쓸 수 없는 조선은 이미 병원이었다. 몇몇 문인이 일본어 친일 시를 발표하던 시기에, 오랜 침묵을 마친 동주는 일본어가 아닌 금지된 조선어로 썼다.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金盞花)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 윤동주, ‘병원’(1940년 12월) 
 

윤동주의 시 ‘병원’ 육필원고. 유족 대표 윤인석 교수 제공


1연은 병실에 있지만 “나비 한 마리 찾아오지 않는” 병든 여인 이야기다. 병든 여인은 식민지가 된 한반도를 의미한다는 해석도 있다. 2연은 “나도 모를 아픔”으로 “지나친 시련, 지나친 피로”에 시달리면서도 성내지 않으려 인내하는 윤동주의 모습이 엿보인다. 늙은 의사는 화자의 병명을 모른다. 3연에서 서로 병이 회복되기를 바라면서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고 동주는 귀띔한다.

왜 아픈 이가 누웠던 자리에 눕겠다고 했을까. 병자가 떠난 자리에 누워보겠다는 것은 병자가 겪는 아픔을 공유하겠다는 뜻일까. 병원이라는 특정 공간을 넘어 그는 이 세상의 죽어가는 존재들 ‘곁으로’ 다가가려 했다. 그의 글에는 디아스포라 난민, 부모 잃은 결손가족, 거지들, 슬픈 족속, 여성 노동자, 복선철도 노동자 이야기가 가득하다.

“나는 아픈 인간이다”라고 도스토옙스키가 ‘지하로부터의 수기’ 첫 줄에 썼듯이, 윤동주는 “지금 세상은 온통 환자투성이”라고 후배 정병욱에게 말했다. 윤동주 자신이 질식할 정도로 영혼의 질병에 걸린 상황이었다. 

사실 한 인간의 삶은 한 문장으로 줄일 수 있다.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은 “내 삶이 유언이다”라는 짧은 말을 남겼다. 윤동주의 삶을 한 줄로 줄인다면 바로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일 것이다.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이 한 구절에 자극받아 나는 ‘곁으로’라는 책을 썼다. 

‘병원’은 윤동주 문학에서 중요한 전기가 되는 작품이다. 이 시를 대표 시로 여겼던 그는 시집 제목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아니라 ‘병원’으로 하려 했다. 그가 왜 병원 이미지를 앞세웠는가를 곰삭여 생각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는 구절은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서시’)라는 다짐과 겹친다. 무언가 실천하려 했던 윤동주. 그의 시를 읽는다며, 행동하지 않고 윤동주를 안다고 한다면 혹시 그를 상품으로만 소비하는 행위는 아닐까.  


그는 면벽한 채 방 안에서 명상만 하던 도인이 아니다. 아픔 곁으로 다가가려 했던 구도자였다. 3월 1018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윤동주를 민족시인이나 저항시인이나 기독교시인이 아니라, ‘자기성찰을 하고 실천을 고민했던 시인’으로 529명(51.7%)이 선택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윤동주 시비는 한국 중국 일본에 서 있다. 그의 시는, 중국에는 조선족 교과서이지만, 세 나라의 교과서에 실려 있다. 그의 흔적은 동북아시아 세 나라에 남아 있다. 중국 용정중학교 운동장에서 그의 숨결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그가 좋아하는 축구를 했던 적이 있다. 그가 다녔던 도시샤(同志社)대 벤치에 앉아, 후쿠오카(福岡) 구치소 뒤편에서 오오래 그를 호명했었다.   


누구나 환자다. 세상은 환자로 가득 찬 병실이다. 이제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이제 그가 사랑의 총량을 키우던 곁으로 마음의 채비를 차리고 가보자.   김응교 숙명여대 기초교양대 교수
http://news.donga.com/IssueSerial/3/70040100000240/20170705/85203506/1#csidxb6e4cc7f7bb1041a6b3870ccf0c9cde  




[동주의 길] 소년 동주, 만주땅에서 역사와 詩를 만나다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입력 2017-07-19 03:00수정 2017-07-19 03:58

<2> 만주 명동마을

윤동주의 시 ‘곡간’ 육필원고. 유족 대표 윤인석 교수 제공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으로 파괴된 만주는 서글픈 변두리였다. “돈 벌러 간 아버지 계신 만주땅”(‘오줌싸개 지도’)은 떠도는 디아스포라의 유랑지였다. 지린(吉林)성 허룽(和龍)현 명동촌(明東村),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변두리에서 1917년 12월 30일 한 생명이 태어났다.
 
산들이 두 줄로 줄다름질치고, 
여울이 소리처 목이 자젓다. 
한여름의 햇님이 구름을 타고, 
이 골작이를 빠르게도 건너련다 

―윤동주 ‘곡간’(1936년 여름)에서 
  

산들이 두 줄로 줄달음질치는 골짜기(谷間·곡간)에 있는 명동마을에 꽃이 피면 무릉도원 그 자체였다. 집 근처 풍경을 동생 윤일주는 생생하게 남겼다.

명동집은 마을에서도 돋보이는 큰 기와집이었다. 마당에는 자두나무들이 있고, 지붕 얹은 큰 대문을 나서면 텃밭과 타작마당, 북쪽 울 밖에는 30주가량의 살구와 자두 과원, 동쪽 쪽대문을 나가면 우물이 있었고, 그 옆에 큰 오디나무가 있었다. 우물가에서는 저만치 동북쪽 언덕 중턱에 교회당과 고목나무 위에 올려진 종각이 보였고, 그 건너편 동남쪽에는 이 마을에 어울리지 않도록 커 보이는 학교 건물과 주일학교 건물들이 보였다.(윤일주 ‘윤동주의 생애’·1976년)  
 

만주 명동마을 윤동주의 생가. 최근 생가 앞에 대리석을 깔고 여기저기 시비를 세워 놓아 고즈넉한 분위기가 사라졌다. 두번째 사진은 생가 안내비. ‘중국 조선족 애국’이란 표현은 사실과 달라 수정되어야 한다. 동아일보DB

윤동주는 마을에서 돋보이는 큰 기와집 아들이었다. 할아버지는 개척하여 소지주였고, 아버지는 장사도 하시고 회사에도 다니셨다고 윤일주는 회고했다. 명동마을에서 벼농사를 지을 수 있는 부자 소리 듣는 소지주의 후손이었던 윤동주는 맘껏 공부할 수 있었다.  


또래 친구들과 뽕나무 오디를 따먹기도 하고, 집 동쪽에 있는 우물물을 길어 입안을 가셔내며 우물 속에 대고 소리치며 그 울림소리에 귀 기울이기도 했다. 윤동주 아버지가 선생으로 있던 명동학교에서는 변질되지 않은 갓 태어난 한글을 가르쳤다.

“동주랑 같이 학교에서 1학년 때 국어 공부를 한 이야기인데, 당시의 교과서는 ‘솟는 샘’이란 등사본이었다. ‘가’자에 ‘ㄱ’(기역)하면 ‘각’하고, ‘가’자에 ‘ㄴ’(니은)하면 ‘간’하여 천자문을 외듯이 머리를 앞뒤로 저으며 낭랑한 목소리로 암송하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김정우 ‘윤동주의 소년시절’·1976년)

명동학교는 졸업식 때 파인(巴人) 김동환의 ‘국경의 밤’을 나누어주는 학교였다. 윤동주는 한글로만 작품을 남겼다. 중국어 성적이 높았던 윤동주지만 중국을 ‘패, 경, 옥 이런 이국소녀들’로 구별했고, 일본을 ‘육첩방은 남의 나라’라고 구별했다. 그에게 중국어 일본어 만주어는 이국어였다. 변두리에서 배운 때 묻지 않은 한글과 투박한 사투리를 버무려 그는 고소한 시를 썼다.  

변두리에 있는 ‘언덕 중턱의 교회당’은 북간도 기독교의 상징이었다. 명동마을 모든 집의 막새기와에는 무궁화, 십자가, 태극문양 등이 새겨 있었다. 천둥 비가 내려 무서워하는 동생들을 윤동주는 “예배당 십자가를 봐”라며 달랬다. 성탄절에 친구들은 교회당에서 가까운 동주네 집에서 새벽송을 준비하기도 했다.

변두리에 살던 저들은 ‘히브리인’(경계를 넘어선 방랑인)들이었다. 외삼촌 규암 김약연은 환갑에 신학교에 들어가 목사가 된다. 문익환의 아버지 문재린은 캐나다 임마누엘 신학교를 졸업한 신학자였다. 김재준은 1937년 3월부터 1년 반 동안 룽징(龍井) 은진중학 교목으로 지냈다. 김약연, 문재린, 문익환, 문동환, 송창근, 김재준, 윤동주, 송몽규, 안병무, 강원용 등 이들은 예언자와 예수를 혀가 아니라, 몸으로 살려고 했다. 윤동주 시를 해석할 때 성경은 종요로운 텍스트다.

이 변두리 명동학교에서 민족교육이 살아났다. 동학혁명이 실패하자 만주로 가서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교육시킨 의인들이 있었다.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은 맹자와 독립사상을 몸으로 가르쳤다. 1901년에 세운 규암재 이름을 명동서숙으로 바꾼 그는 1909년 다시 이름을 명동학교로 개칭했다. 예배당과 학교 건물을 서양식 벽돌집으로 짓고, 서울 기독교 청년학교를 갓 졸업한 실력자 정재면을 모셔 신학문을 가르치게 했다. 

명동소학교는 일경이 볼 때 불손한 불령선인(不逞鮮人)이 우글거리는 소굴이었지만, 윤동주에게는 한없는 자유를 가르쳐 준 꿈터였다. 윤동주는 4학년 때 잡지 ‘아이생활’을 서울에서 구독해 읽었고, 당찬 송몽규는 ‘어린이’에 독자편지를 투고해 실리기도 했다. 두 아이가 읽은 잡지를 동네 꼬마들이 돌아가며 읽었다. 5학년생 몽규와 동주가 찍어낸 등사판 월간지 ‘새 명동’은 두 아이의 운명을 엿보인 여린 새싹이었다.

지금 명동마을 윤동주 생가 입구엔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 생가’라는 표석이 자리하고 있다. 이 문구에서 ‘애국’의 대상은 조선이 아니라 중국이란 뜻이다. 중국 국적으로 산 적이 없고, 중국어로 작품을 남기지 않았던 윤동주로서는 황당한 일이다.  


변두리 만주에 소설가 염상섭 강경애 현경준 김창걸 안수길 박영준 황건, 시인 박팔양 유치환 백석 김조규 서정주 함형수 등이 거쳐 갔다. 그들은 잠시 머물렀지만, 윤동주는 만주에서 태어나 자라고 다시 만주에 묻혔다. “아아, 간도에 시와 애수와 같은 것이 발효(醱酵)하기 비롯한다면 윤동주와 같은 세대에서부텀이었고나!”(정지용 ‘서문’)라는 평가처럼, 저들보다 늦게 태어난 윤동주는 변두리가 낳은 작은 별이다.

윤동주는 만주의 시인일까.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별 헤는 밤’)라며 만주를 그리워했지만, 윤동주의 시는 만주에 갇혀 있지 않다. 후기로 갈수록 지리적 고향을 넘어, 인간의 원형적인 본향의식으로 향한다.

모든 변두리에서 진리가 나오지는 않지만, 많은 진리는 변두리에서 태어난다. 싯다르타의 고향 룸비니와 카필라바스투는 인도 북부의 변두리 성읍 공동체였다. 시장과 공동묘지라는 변두리에서 지냈기에 맹자는 여민동락 사상을 축조할 수 있었다. 큰 인물이 나올 리 없다는 나사렛에서 태어난 예수는 지리멸렬한 갈릴리에서 진리를 말했다. 윤동주, 그는 막막한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희미하게 밝혀주는 변두리의 작은 별이다.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
http://news.donga.com/Column/3/all/20170719/85419499/1#csidx204983c6a7c013686fa9f27a74cf4da  





출처 : 즐거운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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