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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최진석의 老莊的 생각] 천하흥망 필부유책 & `정해진 마음` 장례지내기

회기로 2017. 7. 25. 20:52
[최진석의 老莊的 생각] 도전이 초월의 동력이다

20170718() 00:00  
송필용 작 ‘초월’
인간에게는 초월의 욕구가 있다. 초월이 다 언어를 벗어날 정도로 어려운 것은 아니다. 초월은 지금의 나를 넘어서는 것, 지금의 나보다 더 나아지는 것, 더 확장되는 것, 더 넓어지는 것, 더 높아지는 것 등등을 한꺼번에 가리켜 하는 말이다. 가장 높고 크게 확장되어 있는 존재로 인간은 일단 ‘신’(神)을 모셔 놓고, 부단히 그곳을 향해 나아가려 한다. 초월의 욕구다.

외재적 초월도 가능하고 내재적 초월도 가능하다. 내면으로도 가능하고 외면으로도 가능하다. 정신으로도 가능하고 물질로도 가능하다. 초월의 정도가 자기 통제력의 두께다. 통제력의 내용은 복잡 다단에게 현현한다. 얼마나 초월되었느냐가 얼마나 크게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느냐를 결정한다. 개인적인 초월의 여정에 사회가 있고 국가가 있고 세계가 있고 우주도 있다. 여기에 환경도 있고 인권도 있고 자유도 있고 혁명도 있고 저항도 있고 역사도 있다. 학습도 바로 여기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학습과 역사는 매우 밀접하게 붙어있다. 역사적 경험에서 학습에 성공하면 그 역사는 빛나고, 학습에 소홀하면 그 역사는 찬란하기 어렵다. 동아시아의 근대 역사는 서양 침탈로 시작한다. 서양에 대한 반응이 곧 동아시아 역사의 많은 내용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한국도 이렇다. 중국의 개항은 1842년 제1차 아편전쟁의 결과로 맺어진 난징조약이 시작이고, 일본의 공식적인 개항은 1854년 미일화친조약이 시작이다. 우리는 서양의 대리인 격인 일본에 의해 강제개항을 당하는데, 바로 1875년 일본이 강화 해협을 불법 침입하여 이듬해에 강제로 맺은 강화도 조약이 그 시발이다.

그러니까 일본은 미국에 의해 강제 개항을 당하고 나서 22년 만에 힘을 키워 다른 나라를 강제 개항시킬 정도가 된 것이다. 물론 강제 개항의 그 시점에 일본과 조선 사이에는 벌써 국력에서 큰 차이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22년이다. 이 22년 동안 일본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가. 바로 학습이다. 서양에 당하고도 그 서양을 배우려는 열기가 왕성했다.

이것은 “탈아입구”(脫亞入歐)라는 표어에 집약되었다. 이런 점은 중국도 마찬가지다. 중국도 영국을 필두로 한 서양에 굴욕을 당하고 나서 나라 전체가 “서양을 배우자!”(向西方學習)라는 구호로 가득 찼다. 조선은 굴욕을 당하고 나서 서양(일본)을 배우자는 자발적 열기가 성숙되지 않았다.

막부정권의 쇄국정책으로 일본은 220여 년간이나 닫혀 있었다. 1853년 7월 8일 오후 5시경 매튜 페리(Matthew C. Perry) 제독이 이끄는 미국 군함, 소위 흑선(黑船·쿠로후네) 4척이 에도 앞바다에 들어오면서 일본은 엄청난 변화 앞에 직면한다. 쇄국을 유지하려는 막부와 개방을 요구하는 거대국가 미국과의 대결로 판이 전개된 것이다. 물론 막부가 전면적인 쇄국을 시행하면서도 네덜란드를 예외로 두고 서양 연결 통로를 열어둔다거나 1814년에 영일사전을 편찬한다거나 하는 등의 미래를 향한 개방적인 도전을 제한적으로나마 시행한 점이 훗날의 역사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던 점도 눈여겨봐야 한다.

이때 시대적 사명감을 가진 예민한 지식인들의 투쟁과 학습에 대한 열망은 일본으로 하여금 ‘당황스런 새 판’을 적극적이고 생산적으로 맞이할 수 있게 하였다. 뜻있는 일본의 젊은이들은 도전적인 자세로 과감하게 역사 속으로 뛰어든다. 여기에 일본 발전의 핵심이 있다. 그들은 역사를 위하려 하지도 않았고 자신들의 조국을 위하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 바로 자신이 역사 자체가 되려 했고 자신을 ‘일본’ 자체로 만들려 했다. 이들 가운데 앞장서서 스스로 일본의 ‘역사’로 완성되려 했던 젊은이가 그 시대의 중심에 살았다.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다.

요시다 쇼인은 우리에게 큰 고통과 치욕을 안겨준 일제 식민지 침략의 이론적 근거인 정한론(征韓論)을 완성하고, 대동아공영론(大東亞共榮論)의 기초를 다진 장본인이다. 궁극적으로는 침략자 일본의 심장이다. 흑선을 직접 본 쇼인은 큰 충격에 휩싸인다. 그 전에도 서양 문명의 강대한 변화를 듣기는 했지만, 구체적으로 구미 열강과의 격차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배도 대포도 적수가 안 된다’라는 위기감을 친구에게 편지로 쓸 정도였다.

그러나 기득권과 타성에 젖은 막부는 쇼인의 간언에도 불구하고 과감한 개혁을 도모하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강국을 직접 경험하고 싶어 마침내 시모다 항에 정박 중이던 미군의 함선에 접근하여 밀항을 시도하기까지 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국법을 어긴 죄로 감옥에 수감된다. 출옥 후에도 일본의 미래를 향한 착실한 행보를 이어간다. 고향 하기(萩)에 쇼카손주쿠(松下村塾)를 운영하며 근대형 인재들을 배양하는 데에 힘을 쏟은 것이다. 3년 정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여기서 배양된 인재들이 메이지 유신의 주력으로 성장하여 일본 근대를 튼튼하게 발전시킬 수 있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토 히로부미도 요시다 쇼인의 제자며, 아베 신조 현 총리도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요시다 쇼인을 들면서 그를 계승하는 일을 사명으로 하고 있음을 감추지 않는다. 심지어 이들은 쇼인이 강조했던 가르침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기까지 하다.

근대 이후로 일본과 한국의 국력 차이가 난 근본적인 이유를 한마디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일본에는 요시다 쇼인이 있었고, 한국에는 요시다 쇼인 같은 인물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의 내면에 있는 무엇이 ‘요시다 쇼인’을 만들었을까? 나는 가장 근본적인 요인을 밀항까지 감행했던 그의 도전 정신에서 찾는다. 도전은 ‘초월’의 동력이다. 도전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밝고 강한 미래를 보장하느냐 하지 않느냐를 결정한다. 페리도 이 점을 주의 깊게 본 듯하다. 요시다 쇼인이 밀항하려고 그의 제자와 함께 군함에 접근한 것을 보고 페리는 말한다. “이 사건은 우리를 매우 감격시켰다. 법을 어기고 목숨을 걸면서까지 지식을 넓히려는 두 청년의 뜨거운 열정에 놀랐다.…지금은 엄격한 법에 억눌렸지만 만약 모든 일본인이 이 두 젊은이와 같다면 일본은 미국만큼 강대해질 것이다.”(Japan Expedition·1854) 페리는 도전과 발전을 일치시켜 보는 안목이 있었고, 페리의 말대로 일본은 강대해졌다.

전번 주에 14명의 한국 젊은이들과 함께 하기 시에 갔다. 하기 시의 거리 곳곳에는 요시다 쇼인의 제자들이거나 같이 활동했던 인사들의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재밌게 그려진 캐릭터는 매우 친근감을 주게 되어 있었고, 그 아래에 써진 업적들은 그들을 존경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었다. 일본은 승자임에도 불구하고 역사 학습의 지속성을 전혀 잃지 않고 있었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이 역사속의 인물들과 그들의 업적을 어려서부터 매우 친근감 있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어있었다. 요시다 쇼인 빵도 있고 과자도 있고 책받침도 있다. 생활 속에서 역사를 학습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역사를 일상 속에서 만날 수 있는가. 역사 학습이 사라졌다. 하기 시에 가려면 후쿠오카 공항을 거치는데, 그 도시에는 구시다 신사(櫛田神社)가 있다. 이곳은 일본 낭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할 때 사용했던 칼이 보존되어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신사와 마찬가지로 여기도 소원을 써서 걸어 두는 곳이 있는데, 거기에 한국인들의 소원패도 많이 걸려 있었다. 우리가 역사를 조금이나마 학습했다면, 어떻게 구시다 신사에다가 자신의 소원패를 걸 수 있겠는가. 일말의 자존심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학습은 도전을 하게도 하지만 최소한의 기품을 지킬 수도 있게 해준다.

초월의 욕구는 자신을 점점 높고 넓게 확장하므로 시대 의식을 포착하게 한다. 그래서 뜻있는 사람은, 즉 초월의 욕구가 살아있는 사람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찾으려 애쓰기 보다는 시대의 병을 함께 아파할 수밖에 없다. 시대의식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대 의식은 나를 보편의 단계로 확장시키는 방아쇠다. 이 방아쇠를 당기는 일을 도전이라고 한다. 젊은이들과 얘기를 하면서 도전을 강조할 때가 있는데, 그 때 나오는 대부분의 질문들이 다음과 같다.

“도전을 했다가 실패하더라도 사회에서 그 실패를 허용하거나 보살피는 시스템이 준비되지 않았다. 도전하다 실패하면 어떻게 하는가? 그 위험을 누가 책임지는가?” 도전, 모험 그리고 탐험을 말할 때는 항상 나오는 질문이다. 이것은 나의 매우 협소한 경험인데, 다른 나라 젊은이들에게 도전에 대해서 얘기하고 나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나오곤 했다. “도전이 중요하다는 것은 알겠다. 그런데 내게 도전하려는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도전할 마음이 생기는가?” 초월의 견지에서 볼 때, 도전해서 실패하였을 경우를 걱정하는 질문과 도전할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하는 질문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크다. 도전은 우선 뒤를 돌아보는 조심성이 결여되어 있어야 미덕이다. 이런 미덕이 갖춰져 있어야만 ‘초월’의 확장이 실현된다. 학습을 통해 두텁고 두터워진 존재는 뒤를 돌아볼 필요가 없다. 그가 당기는 도전의 방아쇠는 역사의 순방향에 조준되어 있을 것이 거의 분명하기 때문이다. 긴 시간 스스로 역사가 될 준비를 진실하게 한 사람은 항상 옳다. 스스로 역사가 되었기 때문에 보상을 기대하거나 결과에 전전긍긍 하지도 않을 것이다. 자유롭다. 두려움도 없다.

절대 자유와 한계 지우지 못하는 큰 업적을 이루는 경지를 장자(莊子)라는 철학자는 ‘소요유’(逍遙遊)라 말했다. ‘소요유’의 상징은 ‘대붕’(大鵬)이다. 대붕은 원래 작은 물고기였다. 우주의 바다에서 긴 시간 학습한 공력(積厚之功)이 극한까지 커져서 질적인 전환을 도모하지 않을 수 없던 찰나에 바다가 흔들리자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과감하게 9만리를 튀어 올라 새가 되었다. 이것이 ‘대붕’(大鵬)이다. 대붕은 9만리를 튀어 오르는 내내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서강대 철학과교수·건명원 원장·  섬진강 인문학교 교장〉



[최진석의 老莊的 생각] (7) '정해진 마음' 장례지내기
철 지난 틀 버려야 ‘진짜 선진국’ 열린다

2017년 06월 20일(화) 00:00 

어떤 모임에서나 앉자마자 정치나 종교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촌스럽다. 무지하고 강박적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신념을 선(善)으로 확신하고 들이미는 행위다. 신념을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전 인격으로서의 자신은 뒤로 감추고 나타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매우 큰 실례다.

보통의 경우 정치와 종교를 주제로 하는 대화에서 논리적으로 합의점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합의점을 찾았다면 아마 논리 너머의 다른 어떤 요인들이 개입되어서일 것이다. 정치와 종교는 기본적으로 신념의 활동이다. 매우 세련되고 현란하며 또 권위까지 갖추고 있어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게다가 보편성으로 해석될 무늬의 외피까지 두르게 되었지만 일상 안에서는 신념의 차원을 넘지 못한다.

가끔 정치와 종교의 최고 지도자들 가운데 높은 차원의 포용을 보여주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는 분명히 자신의 신념을 조금이나마 양보했을 때다. 신념은 각자에게 진리다. 진리를 양보하고 마음 편할 수는 없다. ‘자기 진리’를 양보하고 여유로울 수 있는 것, 아마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일지 모른다.

정치와 종교의 영역에 모두 순교자가 있고 또 그들이 떠받들어지는 한 그것들이 강력한 신념 체계라는 것을 부인하지 못한다. 신념이 맹목적인 방향으로 자가 발전하면 타협이 원천 봉쇄되는 근본주의로 흐른다.

그런데,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거수일투족은 다 정치행위다. 말 한마디도 모두 정치행위다. 상황을 자신의 의지대로 끌고 가려는 욕망을 실현시키려 하는 한 이 정치 행위를 벗어날 수 없다. 삶이 정치 행위라면 인간은 모두 크거나 작거나 혹은 강하거나 약하거나 하는 점에서만 차이가 있을 뿐, 모두 각자의 신념 속에 갇혀 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자신만의 판단 기준을 갖는 것이다. 이것을 장자는 ‘정해진 마음’(成心)이라 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정해진 마음을 스승처럼 모시고 산다. 현자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다 똑같다. 따지고 보면 누구나 정해진 마음을 기준으로 해서 시비판단을 한다. 그래서 정해진 마음이 없이 시비판단을 한다는 말은 오늘 월(越)나라로 떠났는데 도착은 어제 했다는 말만큼이나 이치에 맞지 않다.”(장자· 제물론) ‘정해진 마음-시비판단-정치행위-삶’이 하나의 유기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삶의 형태에서라면 어떤 합의도 애초에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각자의 기준은 각자에게 진리이기 때문이다. 다음에 말하는 장자의 얘기를 들으면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나와 당신이 논쟁을 한다고 합시다. 당신이 나를 이기고, 내가 당신에게 졌다면 당신은 옳고 나는 틀렸을까요? 내가 당신을 이기고 당신이 졌다면 내가 옳고 당신은 틀렸을까요? 한쪽은 옳고 다른 쪽은 틀린 경우일까요, 아니면 두 쪽 다 옳은 경우일까요? 두 쪽 다 틀린 경우일까요? 이런 일은 둘 다 알 수 없소. 제3자는 더 알 수 없소.

그렇다면, 누구를 불러 이를 판단하게 할 수 있겠소. 당신과 입장이 같은 사람을 불러 판단하게 한다면, 그는 당신과 같으니까 공정하게 판단할 수 없소. 나와 입장이 같은 사람을 불러 판단하게 하면, 나와 같은 입장이라 공정한 판단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우리 둘 모두와 입장이 다른 사람을 불러 판단하게 하면, 그는 나하고도 다르고 당신하고도 다르니 역시 공정한 판단을 할 수가 없소. 우리 둘 모두와 입장이 같은 사람을 불러 판단하게 하면, 그는 우리 둘 모두와 같기 때문에 공정한 판단을 할 수가 없소. 그렇다면 나도 당신도 그리고 제3자도 모두 공정한 판단을 할 수가 없는 거요. 그런데 누구에게 기대한다는 말이요?”(장자·제물론) 이처럼 ‘정해진 마음’에 갇혀 사는 것이 세상 속 인간이다. 이 ‘정해진 마음’을 치장하는 데에 거의 대부분을 쓰는 존재가 또 인간이다. 자신만 모른다. 이 ‘정해진 마음’을 치장하며 사는 한 자신은 한 곳에 뿌리를 내린 결박된 존재가 되고, 자신이 하는 일은 대부분 과거를 지키는 일이 된다는 것을 알기 어렵다. 어쩌랴. 새롭고 신선한 일은 죄다 자신의 ‘정해진 마음’에서 이탈해서야 가능한 일인 것을…

한 농부가 있었다. 하루는 밭에서 일을 하다가 내달리던 토끼가 밭 가운데 있는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혀 죽는 것을 보았다. 죽은 토끼를 주워 집으로 돌아 온 농부는 그 다음 날부터 농사는 짓지 않고 그루터기만 지켜보며 또 그런 토끼가 나오기를 기다리기만 했다. 하지만 그 뒤로 한 마리도 보지 못하고 결국에는 온 동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수주대토’(守株待兎)라는 말이 출현한 이야기다.

어떤 검객이 배를 타고 양자강(陽子江)을 건너고 있었다. 그런데 강 중간쯤에서 물결이 크게 출렁거리던 차에 차고 있던 칼이 강물에 빠지고 말았다. 놀란 검객은 급히 작은 단도(短刀)로 칼을 떨어뜨릴 때 앉아있던 뱃전의 한 곳에 표시를 하였다. “이곳이 칼을 떨어뜨린 곳이다.” 건너편 나루터에 도착하여 여유가 생기자 검객은 칼을 찾기 위해 뱃전에 표시한 바로 그 밑의 물속으로 들어갔다. 각주구검(刻舟求劍)이라는 말로 회자되는 고사다.

이 두 고사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모두 비웃음을 사지 않을 수 없다. 비웃음이라는 것은 어디서 오는가. 바보 같은 상황에 있으면서 정작 자신은 알아채지 못한 채 어떤 고정된 행위를 벗어나지 못하면 비웃음을 살 수밖에 없다. 달라진 상황에 다르게 반응하지 못하고 계속 같은 반응을 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도 같은 일이다. 다른 시대에 다른 비전을 생산하지 못하고 고정되고 철 지난 틀로 새 시대를 맞자고 주장하는 것도 같은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비웃음이 비웃음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비웃음을 사는 행위 때문에 비효율이 발생되어 힘 자체가 빠지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이처럼 ‘정해진 마음’은 한 번 토끼를 얻은 기억을 떨쳐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박혀서 계속 토끼만 기다리게 한다. 토끼를 기다리는 동안 이 농부는 어떤 생산 활동도 하지 못한다. 막연한 심리적 기대가 객관적 사실로 착각되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토끼를 주워서 먹을 수 있다는 기대와 확신이 너무 커서 지금의 배고픔을 불평할 틈도 없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러고 있다가는 굶어 죽을 수 있다고 해도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다. 오히려 그런 말 하는 사람들을 무지하거나 사악한 부류로 몰아붙이기까지 할 것이다.

‘정해진 마음’에 지배되는 상태가 되면, 그 사람의 온 마음과 행동이 이 ‘정해진 마음’의 변주에 불과해진다. 한 사람이 하는 모든 심리적 활동의 터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진짜로는 ‘심리적 기대’와 ‘심리적 확신’인데, 그것을 ‘객관적 사실’로 믿는다. 이처럼 ‘정해진 마음’은 한 사람을 과거에 묶어두고, 변화하는 현실에 적응할 수 없도록 만들어버린다. 토끼를 기다리는 이 농부의 이야기는 ‘한비자’(韓非子)의 ‘오두’( )편에 나오는데, ‘오두’는 나라를 망가뜨리는 다섯 종류의 ‘좀 벌레’를 말한다. 즉 나라를 망하게 하는 다섯 가지 요인이라는 뜻이다. 비효율적으로 운용되는 나라에서는 심리적 기대와 객관적 사실을 혼동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우리 경제는 선진국의 문턱에서 몇 년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은 2007년에 2만 달러대에 진입하고 나서 선진국 진입의 경계선으로 여겨지는 3만 달러의 벽을 여태껏 넘지 못하고 있다. 심한 정체에 빠져 있다. 무엇이 정체되어 있다는 것은 새로움이 시도되지 못하고 있다는 뜻과 같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선진국 진입을 기대하면서 중진국에 이를 때 사용하던 방법을 계속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봐야 한다. 게다가 후진국에서 중진국으로 이르는 일과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일은 성격이 전혀 다르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후진국에서 중진국에 오르는 일은 선진국에서 먼저 닦아 놓은 길, 즉 있는 길을 가는 것과 같다.

하지만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일은 없는 길을 열면서 가야 한다. 있는 길을 가는 것과 없는 길을 열면서 가는 길은 차원이 다르다. 뱃전에 긁어놓은 표식만을 마음속에 담고 있다가는 자신이 배를 타고 얼마나 흘러왔는지를 망각한다. 이 망각은 사람을 맹목적인 상황 속에서 헤매게 만든다.

‘정해진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염치(廉恥)가 없어진다. ‘정해진 마음’이 자신의 마음을 차지하는 덩어리가 크면 클수록 ‘정해진 마음’이 주인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그 ‘정해진 마음’을 철저히 지키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자 진실을 지키는 일로 바뀐다. 따라서 아무리 크고 중한 일이라도 그것이 ‘정해진 마음’을 발휘하는 데 방해가 되면 바로 사소한 것으로 취급된다. 이럴 때 사용하는 비굴한 논리들은 모두 상황을 상대적인 묘사 속으로 끌고 간다. “다른 사람보다는 그래도 덜하다”고 하거나 “나만 그런 것이냐”고 하는 식으로 자신을 정당화한다. 남보다 더 낫기만 하면 된다는 종속적 사고에 빠져 있다.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사람이라면 남보다 더 나은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남과 다를 뿐만 아니라 나만의 고유한 것이 있어야만 만족할 것이다. 비굴한 논리를 사용하는 것도 자신을 자신의 존엄 위에 세우지 못하고 ‘정해진 마음’ 위에 세우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불행하게도 염치를 잃어버린다. 자신이 뭐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된다. 예를 들어, 이런 일이 있다고 하자. 법을 어긴 사람을 법무장관으로 추천하고, 악의적 표절을 한 사람을 교육부 수장으로 추천한다. 법무장관은 법을 관장해야 하고, 교육부 수장은 표절을 하지 못하도록 감독해야 할 직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천한 사람들이나 추천된 사람들이나 모두 아무렇지 않은 양 당당하다. ‘정해진 마음’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스스로 말한 원칙을 스스로 깨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소위 ‘정치’를 버리고 ‘정치 공학’을 선택하는 것이다. 게다가 ‘정해진 마음’을 공유한 사람들은 객관적 비판 능력보다는 감성적 동질감에만 의존하면서, 갑자기 호위무사로 등장한다. 자존감이나 품격이나 진실성은 사라진다. 오직 ‘정해진 마음’들의 굳건한 연대만 남는다. 참 무섭고 슬픈 일이다. 이처럼 무섭고 슬픈 풍경 안에서 아무도 몰래 비효율은 두꺼워진다. 우리가 ‘정해진 마음’에 좌우되는 감정을 극복하고 과학적으로 사고해야 하는 이유다. 그래서 장자는 말한다.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氣)로 들어라.” “‘정해진 마음’에 갇힌 자기를 장례 지내라.”
〈서강대 철학과교수·건명원 원장·섬진강 인문학교 교장〉http://www.kwangju.co.kr/section.html?section=252 

[최진석의 老莊的 생각] 6. 경계에 서면 밝고 환해진다
한 쪽을 택하면 과거에 박히고 … 경계에 서면 미래가 열린다

2017년 05월 23일(화) 00:00

인간에게는 이탈의 욕구가 있다. 부정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 동작이지만, 사실 이는 매우 긍정적이며 생산적이기도 하다. 모든 생물은 자기 존재를 보존하며 확장하려 애쓰도록 태어났는데, 서로 확장하려 하다가 경쟁을 피할 수 없게 되기도 한다. 확장은 다양한 의미에서 기존의 터전에 고착되지 않고 벗어나려는 율동이다. 이것이 이탈이다. 어쩔 수 없이 이탈은 부정의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 정반합의 ‘반’이다.

‘합’을 기약하는 ‘반’, 그래서 또 인간은 이탈을 하면서 스스로를 확장한다. 생산적이지 못한 상황에 처한 인간은 지루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 지루함을 이기려고 그것을 부정한다. 부정이 없다면 얼마나 지루할까. 또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의 속성은 얼마나 공격적이며 생산적인가. 부정할 수 있어서 우리는 고정되지 않고 움직인다. 발전도 부정의 한 형식이 빚은 결과다.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부정이 어느 순간에는 또 멈추어 고정될 수 있다는 점이다. 부정의 죽음이다. 싫증난 한 켠을 부정한 후에 채택한 새로운 한 켠이라고 해서 계속 새롭거나 영원한 선인 것은 아니다. 새로운 부정이 기약될 때만 새롭고 선하다. 부정의 동력이 끊기고, 뿌리를 내려 자리를 잡으면 폐색과 멸망만이 기다릴 뿐이다. 이는 매우 미묘한 원칙이다. 불교에서는 일찍부터 이 점을 주의 깊게 살피고 이중 부정이나 지속 부정을 말했다. 바로 양공(兩空)이니 중현(重玄)이니 하는 것들이다. 장자는 양행(兩行)을 말한다.

시인 이갑수는 이렇게 적었다. “신은 시골을 만들었고/인간은 도회를 건설했다/신은 망했다.”(‘신은 망했다’ 민음사) 사태가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의 중심 자리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신’은 인간이 가고 싶어 하는 방향이거나 완성이거나 원본이거나 모델이거나 초청된 감독자다. 인간 확장의 절정이다.

그런데 인간은 도회를 건설하면서 확장에 가속도를 냈다. 우리가 누리는 문명은 모두 도회의 산물이다. 그렇다면, 도회적 확장의 절정은 신이 만든 시골을 닮아가야 할 것이다. 도회의 시골화는 이상적인 차원에서 완성된 모습일 수 있지만, 현실 속에서의 확장은 시골의 도회화다. 그래서 우리는 도회에 있으면서 시골을 갈망한다. 시골을 갈망하는 농도가 강해질수록 도회에 대한 비판은 격렬하다. 도회에 대한 비판이 격렬해질수록 그는 신적인 영역에 가까워지는 환상을 차지한다. 도회를 공격할수록 진실하고, 신을 닮은 참된 인간으로 치장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도회를 떠나지 않는다. 시골에서 도회를 동경하는 것도 도회에서 도회를 비판하는 강도만큼이나 인정을 받아야 공평하다.

‘신은 망했다’는 이갑수의 말이 시골을 택하고 도회를 버리라는 웅변은 아닐 것이다. 신이 망하면서 인간의 승리를 몰래 감추듯이 말해준다. 그런데, 도회의 승리가 시골을 품어야 진정한 완성이 되듯이, 인간의 승리도 신의 승리를 품을 수 있다. 도회에 살면서 배타적 자세로 도회를 부정하고 시골을 갈망하는 것으로는 아무리 격렬해도 성숙한 완성의 길이 아니다. 시골과 도회가 상호 교차되거나 포섭되는 길만이 인간적인 완성에 가깝다. 이것도 사실은 부정이 부정으로 고착되지 않고, 스스로 부정되어 다시 새로워지는 한 형태다. 이것이 진정한 완성이다.

스스로를 생태주의자로 자리매김하는 어느 분의 인터뷰 대상자가 된 적이 있다. 그는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에 마당에 난 민들레의 꽃대를 꺾어 피리 만드는 법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 나는 시골 출신이면서도 난생처음 민들레 피리를 만들어 불어보았고, 나중에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주기도 하였다. 민들레 피리를 불 때, 나는 잠시 잊었던 시골의 정서를 다시 불러올 수 있었다. 이야기가 깊어갈수록 그는 매우 절실하고 진실한 사람임을 드러냈다. 생태주의의 철저한 복원을 꿈꿨다. 시골을 건설해놓고 망한 신을 살려내려는 전사 같았다. 당신이 사용은 하지만, 사실은 냉장고도 부정한다고 했다. 강남에 살지만, 사실은 많이 가지는 생활 방식을 부정한다고도 했다.

인터뷰 중간쯤에서 나는 지식의 생산이나 창의력이 탐험이나 모험과 깊게 연관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서양에는 직업으로서의 탐험가가 먼 옛날부터 존재했지만, 동양에는 그러지 않았다는 점을 언급했다. 그러자 그 분은 탐험이 오히려 삶의 환경을 악화시켰다고 강조한다. 탐험을 통해서 대륙 간에 교류가 활발해지고, 이 교류가 세상의 생태 환경을 악화시켰다고 한다. 지식의 생산이나 생산된 그 지식을 통한 과학 기술 문명의 발달도 추구할 일이 아니라고 한다. 이는 그냥 단순한 서양추수주의일 뿐이며 결과적으로 삶을 나쁘게 끌고 가는 악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천성을 해칠까봐 문명의 이기인 기계 자체를 사용하지 않는 노인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는 그 이야기의 반 만 알고 있었다. 나는 나머지 반을 이야기 해주고 싶었지만, 그저 조용히 있었다. ‘장자’의 ‘천지’편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얘긴즉슨 다음과 같다.

공자의 제자인 자공이 여행길에 밭에서 일하는 노인을 보았다. 굴을 뚫고 우물에 들어가 항아리로 물을 퍼 나르고 있었다. 그러자 자공이 힘겹게 일하는 그 모습이 딱해서 두레박이라는 기계를 쓰면 하루에 백 이랑도 물을 줄 수 있고 아주 편하니 그렇게 해 보시라고 권했다. 그러자 노인이 웃으면서 기계를 쓰면 기계에 사로잡히는 마음이 생겨나서 순진 결백한 본래의 것이 없어지고, 그러면 또 정신이나 본성의 작용이 안정되지 않으며, 더 나아가서 도가 깃들지 않게 되니 기계를 안 쓰는 것이지 기계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 말의 의미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고 크게 느껴진 자공은 넋을 잃었다가 30리나 걷고 나서야 제정신이 들었다고 한다.

자공은 왜 정신을 잃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을까? 문명의 착실한 건설을 주장하는 스승 공자와 전혀 다른 생각을 펼쳐 보이면서 문명 자체를 부정하는 근본주의적 철저함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자공에게도 제자가 있었다. 그 제자하고 나눈 대화를 보면 자공이 왜 그리 놀래고 또 감탄했는지를 알 수 있다.

안색이 변하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놀랜 자공을 보고 그 제자는 그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어서 그렇게 놀래신 것이냐고 묻는다. 그러자 자공이 말해준다. 자공은 원래 스승인 공자로부터 옳은 것을 하고 공을 이루려고 애쓰며 수고를 덜하고도 큰 효과를 거둬야 한다고 배우고 그 가르침을 최고로 알았는데, 이 노인네는 확실히 근본의 도를 지키고 있어서 덕과 육체와 정신이 모두 온전하니 확실히 공자보다도 훨씬 더 성인의 도를 구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경탄한 것이다. 자공이 머리속에 그린 성인의 도는 일의 편리함이나 거짓 기교 따위로 자유롭고 소박한 원래의 마음을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 경지에 있는 사람은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어디에도 가지 않고, 마음이 원치 않으면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온 세상 사람들이 칭찬해도 돌아보지 않고, 모두가 비난해도 들은 채를 않는다. 성인의 도를 이렇게 생각하고 있던 자공에게 기계가 주는 편리함을 누리다가 거짓 기교에 빠져 본마음을 잃지 않으려 하는 이 노인네의 모습은 자공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 했다.

귀향 후에 공자에게 이 이야기를 전했다. 아마 자공의 속마음에는 그 노인네를 스승보다 더 높이 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주의할 점은 장자라는 책에는 ‘중언’(重言)이라는 기법이 사용되는데, 그것은 유명한 사람의 입을 통해 필자 자신의 말을 하는 것이다. 권위에 기대 설득력을 배가시키려는 기술이다. 당연히 여기에 나오는 공자는 ‘논어’ 속의 공자라기보다는 도가적 사상가로서의 공자다. 공자가 자공에게 그 노인네는 도가 정신을 잘못 배워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즉 자신의 내면만 다스리고 외면을 다스리는 법은 모른다고 일러준다. 참된 본성 만 품고 무위자연의 순박한 모습을 지키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정신으로 속세적인 삶을 살면서도 유유자적하는 경지를 보여야 제대로 된 것이라고 말한다. 장자는 내면과 외면을 동시에 다스릴 수 있어야 최고지, 어느 한 편만 지키는 것은 아직 부족하다고 분명히 말한다.

양자택일의 논리에 익숙한 사람들은 ‘장자’에 나오는 이 이야기를 들을 때도 한 쪽 만을 택해서 장자를 문명 부정론자로 끌고 간다. 이런 일은 노자를 읽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쉽게 나타난다. ‘도덕경’에는 분명히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 즉 “무위하면 모든 일이 잘 이뤄진다”고 쓰여 있는데, 양자택일의 전사들은 ‘무위’만 보고 ‘무불위’는 애써 외면한다. 하지만 사실 노자의 시선은 모든 일이 잘 이뤄지는 현실적인 효과로서의 ‘무불위’에 가 있다. 노자의 사상은 뒤로 물러서는 것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물러서는 것도 앞서기 위해서다. ‘도덕경’ 제7장에 분명이 기록되어 있다. “후기신이신선”(聖人後其身而身先), 즉 뒤로 물러서지만 결국 앞서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 편을 지키는 일에 익숙한 사람들은 뒤로 물러서는 일만 챙기고, 책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앞서는 일은 애써 외면한다. 노자나 장자나 모두 문명 부정론자가 아니다. 철저한 문명론자다. 다만 다른 또 하나의 문명을 주장할 뿐이다. 문명 비판을 문명 부정으로 바로 끌고 갈 일이 아니다. 문명 비판이 문명부정에서 멈추지 않고 다른 또 하나의 문명을 초청하는 힘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보통 대립된 두 면 가운데 하나를 취하는 데 익숙하다. 이 쪽 아니면 저 쪽을 택하면서 상대방에게도 그러기를 은연중에 강요한다. 한 쪽을 택한 후, 그것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을 순수하고 절실하고 진실한 삶의 태도로 여기기도 한다. 이단이나 극단적 근본주의는 다 이런 곳에서 성장한다. 하지만 두면을 동시에 장악하거나, 두 면 사이의 경계에 처하지 않으면 전면적 인식이나 진보적 삶은 구현되지 못한다. 이것을 부정하다가 저것에만 빠지는 것은 부정의 고착화다. 지속 부정을 통해 부정을 살아있게 해야 한다. 그것이 성숙한 이탈이다. 한 쪽을 택하면 과거에 박히고, 경계에 서면 미래로 열린다. 한 쪽을 택하면 이념화되기 쉽고, 경계에 서면 생산적인 효과를 낸다. 한 쪽을 택하면 얼굴에 짜증기가 새겨지고, 경계에 서면 밝고 환해진다.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건명원 원장〉

[최진석의 老莊的 생각] 5. 문명은 용기의 소산이다
발전은 익숙함과의 결별이다

2017년 04월 25일(화) 00:00 

인간이 삶을 꾸리는 하나의 무대는 ‘문명’과 ‘자연’이라는 두 개의 세계로 구성되어 있다.

‘자연’은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내장되어 있는 스스로의 법칙에 따르는 저절로‘自’ 그러한‘然’ 세계고, 문명은 인간이 그려 넣은 ‘文’ 세계다. 인간이 그린 세계를 문명이라고 할 때, 그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이 의도를 개입시켜 제조한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문명을 제조하는 의도를 의지나 의욕, 욕망 혹은 영혼 등등으로 다양하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통괄하여 일단 ‘생각’이라고 하자. 그래서 각자 누리는 문명의 수준이나 내용은 각자 가지고 있는 생각의 그것들에 좌우된다.

나는 이것을 ‘탁월한 사유의 시선’에서 “시선의 높이가 삶의 높이다”고 표현하였다. 당연히 앞 선 문명은 앞 선 생각이 만들고, 뒤따라가는 문명은 생각이 뒤따라간 결과다. 먼저 생각을 하여 문명의 새 길을 내는 일이 창조고, 창조의 의지가 발휘되는 일이 바로 창의다. 창의를 통해서 새로운 길을 열어 흐름을 만들면, 그것을 ‘선진’이라고도 하고 ‘일류’라고도 하며 선도력을 가졌다고도 한다. 이미 있는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없는 길을 열어서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이리하여 창의는 결국 삶의 영토를 확장하는 셈이다. 따라서 창의적인 인간은 영토를 확장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언제나 높은 자리에 올려 진다.

생각은 들쑥날쑥하고 들락날락한다. 무엇을 만들거나 개척하려면, 그 들쑥날쑥하고 들락날락하는 것이 일정한 높이에서 초점을 맞춰 작동해야 한다. 높이와 초점을 맞춘 생각을 시선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왜 시선이 중요한가? 사람은 자신이 가진 시선의 높이 이상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기관이나 국가도 마찬가지다. 시선은 삶과 사회의 전체 수준을 결정한다. 시선의 높이가 삶의 높이다. 그래서 보통 일컫는 발전이나 진보라는 것도 사실은 시선의 상승이 이뤄낸다. 여기 있던 이 시선이 한 단계 더 높이 저 시선으로 상승하여 이루는 구체적 결과가 바로 발전인 것이다. 그런데, 이 발전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를 지배하는 정해진 생각의 틀을 벗어나는 도전이 감행되어야 한다. 익숙함과의 결별이다.

‘장자’의 ‘소요유’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혜자(惠子)가 위(魏)나라 왕으로부터 큰 박이 열리는 박 씨를 선물로 받아와서 뒤뜰에 심었다. 아니나 다를까 자라나 엄청나게 큰 박이 열렸다. 그런데 크기가 너무 커서 물을 담자니 무거워서 들 수가 없을 지경이고, 쪼개서 바가지로 쓰자 해도 납작하고 얕아서 한 방울도 담을 수가 없었다. 위나라 왕이 말한 대로 박이 크기는 컸지만 아무 쓸모가 없어서 부숴버리고 말았다. 혜자의 말을 다 듣고 나서 장자(莊子)가 말했다. “그렇게 큰 박이 열렸다면 어째서 그 속을 파내 큰 배로 만들어 강이나 호수에 띄워 놓고 즐기려 하지 않고, 납작하여 아무 것도 담을 수 없다는 걱정만 하셨소? 선생은 생각이 꼭 쑥대 대롱에 난 작은 구멍만큼이나 좁디좁군요.”

우리는 보통 익숙한 생각에 갇힌다. 혜자가 그랬던 것처럼 ‘박’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물을 담아 다니거나 쪼개서 바가지로 쓰는 일을 먼저 떠올리고, 그 생각에 ‘박’의 용처를 제한해버린다. 이러면 ‘박’은 물을 담고 뜨는 기능에만 갇혀 그 이상으로 확장되기 어렵다. 갇힌 생각은 이처럼 갇힌 세계를 조성한다. 세계를 일정한 틀로 가두어버린다. 이미 있는 익숙한 생각을 가지고 살면서 우리는 부단히 새로운 환경을 접한다. 인간의 역할은 새로운 세계를 맞닥뜨렸을 때 적절한 대응방안을 찾느냐 찾지 못하느냐로 수준이 결정된다.

이미 가지고 있는 생각으로 새로운 세계를 관리하려고 하는 일은 보통 누구나 하는 일이다. 새로운 영토를 확장하는 역할은 새로운 세계를 맞닥뜨렸을 때 새로운 적응 방법을 찾아내야만 비로소 가능해진다. 이 이야기에서 예상 밖으로 ‘큰 박’은 이전에 대면해 본 적이 없는 새로 맞닥뜨리는 세계다. 기존의 생각에 갇혀있는 혜자는 이 ‘큰 박’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적응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새로운 세계가 혜자에게는 ‘없는 세계’가 되었다. 박을 깨서 새로운 세계 자체를 부정해버린 것이다. 장자는 새로운 세계에 맞는 새로운 적응 방법을 만들어 냈다. 창의가 일어난 것이다. 이제까지 세계에 존재해본 적이 없는 ‘박 배’가 탄생하였다. 바로 창조다. 이런 창조가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장자가 ‘박’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거기에 매몰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일은 기존의 관념이 주는 무게감을 이겨낼 수 있는 단련된 자아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일어나지 못한다. 자아가 이념과 관념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 수 있을 정도로 고도로 단련된 상태, 사실은 이것이 모든 창의적 활동의 핵심이다.

창의는 익숙하게 알고 있는 것이 부과하는 무게를 이겨내고 모르는 곳으로 과감하게 넘어가는 일이다.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는 일에다 ‘과감’이라는 단어를 붙인 이유가 있다.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는 일은 일종의 모험이자 탐험이기 때문이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모르는 곳’은 명료하게 해석될 수 없기 때문에 항상 이상하고 불안한 곳으로 남는다. 그래서 위험한 곳이기도 하다. 위험한 곳으로 넘어가는 탐험과 모험의 여정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언제나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다. 모든 창의가 아직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넘어가는 일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철저히 탐험의 결과다. 장자의 ‘박 배’도 장자가 가지고 있었던 지식이 아니라, 그의 탐험 정신이 만들어냈다. 그 탐험 정신은 장자를 여기서 저기로 성큼 건너가게 만들었다.

탐험 정신이 살아있는 문명은 강하다. 새로운 이론이나 지식이 생산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왜 문명을 강하게 만드는가? 문명은 생각이 만든다. 생각이 문명을 통제한다는 뜻이다. 인간은 문명을 확장하고 통제하는 매우 효율적인 생각의 얼개를 만들어내는데, 그것이 바로 지식이자 이론이다. 앎의 체계인 것이다. 당연히 지식이나 이론을 생산하는 문명은 문명의 통제력이 클 수밖에 없고, 통제력이 큰 문명은 강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지식이나 이론을 수입하는 문명은 종속적이기 때문에 주도권이 없어 강한 면모를 보이기 어렵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안다고 할 때, 보통은 그것에 대하여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앎을 매우 좁게 이해하는 것이다. 앎이 문명을 통제하고 확장하는 이론을 생산하는 기초인데, 앎을 이렇게 제한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회에서는 이론의 생산이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론의 생산까지 보장할 수 있는 앎은 어떤 것에 대해서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반드시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고 발버둥치고 몸부림친다.

앞에서 말한 대로 인간이 사는 무대는 ‘문명’과 ‘자연’으로 되어 있다. 문명은 인간이 만들고, 자연은 저절로 그러하다. 그래서 인간은 이 두 세계에 대해서 제대로 알면 지적으로 완벽해진다. 자연은 내장되어 있는 자연 그대로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므로 인간은 그것을 이해하고 거기에 맞추면 되지만, 문명 세계는 인간이 계속 만들어 나간다. 어쩔 수 없이 아직 알려지지 않은 곳 혹은 아직 모르는 곳을 열며 나아간다.

이것을 장자는 ‘대종사’편 첫머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즉, “인간의 일을 아는 사람은 알고 있는 것을 가지고 모르는 곳을 기른다.”(知人之所爲者, 以其知之所知, 以養其知之所不知) 장자에 의하면, 아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고 하는 발버둥이 문명을 전개시키는 토대다. 이렇게 되면, 지적인 최고 단계는 엉뚱하게도 지식의 영역을 벗어나서 ‘태도’의 문제가 되어버린다. 확장성을 포기한 앎은 이론의 구축이나 생산까지는 엄두를 낼 수도 없다. 이론의 생산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에서 진보적인 선진 문명을 꿈꿀 수는 없다. 앎의 진보는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는 바로 그 ‘발버둥’이나 ‘몸부림’에 있기 때문이다.

‘발버둥’이나 ‘몸부림’은 지적인 영역 밖의 것으로서, 차라리 인격적인 활동이나 ‘태도’나 ‘기질’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어느 한 문명이 다른 문명과 비교했을 때, 압도적인 과학 기술 문명을 가졌다는 것은 그런 과학 기술을 구체화 시킬 수 있는 상위의 지식과 이론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위의 지식과 이론을 가졌다면, 분명히 그들은 지적인 ‘발버둥’이나 ‘몸부림’을 훨씬 더 강하게 발휘하였을 것이다. 더 탐험적이었고 더 모험적이었을 것이다. ‘발버둥’ ‘몸부림’ ‘탐험’ ‘모험’이 없이는 새롭고도 높은 지식과 이론을 생산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생각-지식-이론은 문명을 확장하고 통제하는 가장 효율적인 무기다. 이런 것들이 세계를 새롭게 열며 앞으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세계를 새롭게 열 때 인간이 발휘하는 능력을 ‘창의’라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창의’는 인간의 능력 가운데 고도의 어떤 것이 분명하다. 절대 평범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더 나은 삶을 도모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모두들 창의력을 발휘하자고 서로 독려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애석하게도 창의력이 나타나는 일은 그렇게 일반적이지 않다. 왜 그런가? 발휘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혜자로 살기는 쉬워도 장자로 살기 어려운 이유다. 보통은 창의력을 발휘한다고 하는데, 이는 틀렸다. 창의력을 기능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냥 해버리면 될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알 듯이 창의력은 발휘하려 한다고 해서 쉽게 되는 일이 아니다. 창의력은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발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적으로 단련된 어떤 사람의 내면에서 튀어나오는 것이지 해보려고 맘먹는다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창의력이 튀어 나올 수 있는 내면이 준비되어있지 않으면 그것은 이 세상에 나타나지 못한다. 이렇게 하여 창의력은 기능적인 범위를 넘어서서 인격적인 문제로 바뀌어버린다. 결국 사람의 문제다.

장자가 지적인 상승과 확장은 아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고 발버둥 치는 일에서 이루어진다는 뜻을 피력하고 난 후, 바로 이어서 한 말은 그래서 더욱 울림이 크다. “참된 사람이 있고 나서야 참된 지식이 있다.”(有眞人而後有眞知) ‘사람’은 근본적으로 이론이나 지식이나 관념이나 이념의 수행자에 제한될 수 없다. 그것들의 생산자이거나 지배자일 때만 ‘사람’이다. 그래서 ‘사람’을 채우는 진실은 차라리 ‘모르는 곳’으로 덤벼드는 무모함에 있다. 탐험이고 모험이고 발버둥이고 몸부림이다. 이것을 우리는 용기라고 말한다. 이렇다면, 문명은 사람이 발휘하는 용기의 소산일 뿐이다.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건명원 원장〉 

[최진석의 老莊的 생각] ④ 금방 죽는다
깨어 있지 않으면 살았어도 죽은 것

2017년 03월 28일(화) 00:00

금방 죽는다.
이 단어를 떠올리면 느리고도 느리게 평정이 흔들린다. 이런 비슷한 기분이 들 때 착 가라앉는다고 표현하곤 했던 것 같은데, ‘착’이라는 단어가 바늘 끝처럼 거슬린다. 어딘가에 딱 달라붙어버린 느낌. 그래서 유동성이 제거되어 상승이나 승화의 기운은 아예 휘발되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 밀폐성의 답답함. 그러나 내 기분은 사실 ‘착’을 울타리 치는 이런 느낌들과는 많이 다르다. 차라리 좀 붕 뜬 기분 같기도 하다. 부력을 받는 중량감. 그러면서 흘러가는 그런 상태다. 이 단어는 바로 ‘죽음’이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 방학 초입의 조금 늦은 초저녁이었다. 나는 마당에 덕석을 깔았다. 거기 둘러앉아 우리 식구들은 닭백숙을 먹을 참이었다. 엄마가 준비를 하시는 동안 모깃불을 피우고 덕석에 벌렁 누웠다. 하늘에는 초저녁 별들이 부산스러웠다. 그렇게 이른 시간에 벌써 서둘러 달려가는 별똥별도 있었다. 별똥별은 달리다가 가속도를 타고 사라졌다. 나는 이유 없이 별똥별의 궤적을 내 안의 어딘가에 한참 동안 가둬두었다. 어느 것이 먼저이고, 어느 것이 나중인지를 모를 정도로 잠깐이었다. 항상 하던 일을 하면서 잠깐 누운 순간에 나는 아주 다른 세계로 급히 이동하고 있었다. 그것은 처음 경험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부족하다. 정확하게 말하려고 애써 본다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어떤 것으로서 태초 같기도 하고 종말 같기도 하였다. 음험한 어떤 기운이 모든 땀구멍에다가 표식을 달아 놓고 나를 훑으며 아주 천천히 지나갔다.

나는 한기가 서린 그 기운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냥 무너졌고, 방향을 잃었으며, 끝없이 추락했다. 구체적으로 체온도 떨어졌다. 닭백숙이 담긴 그릇을 들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웃으며 다가오시는 엄마도 갑자기 남이 되었다. 누나와 동생의 재잘거리던 소리들도 내게 다가오지 못하고 그냥 먼 곳에서 멈추어 웅성거릴 뿐이었다. 매우 무서운 경험이다. 닭백숙을 한 점도 뜯지 못하고, 나는 별똥별이 남긴 기억 속의 궤적을 따라 희미하게 소멸되어갔다. 몇 날을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우물에서 기력을 놓고 쓰러지기 전까지.

잠들기 전에는 항상 그 덕석의 찬 기운을 느꼈다. 긴 시간 동안 그것은 하나의 의식이 되어버렸다. 내 기운은 방향 없이 소멸하면서 맥없는 분말처럼 소실점도 갖추지 못한 채 흩어지고, 정신은 안개처럼 흐려진다. 체온이 내려가다가, 공포도 아니고 두려움도 아니지만 모호하게 무섭기만 한 어떤 한기에 의해 정신이 아득해질 때쯤 갑자기 온몸에 식은땀이 나면서 나는 축축해진다. 그 축축함은 그늘진 깊은 계곡 큰 낙엽 아래의 음습한 어떤 곳 같기도 하다. 많은 것을 습관처럼 감추기만 하는 응큼한 파충류의 눈 주위 같기도 하다. 아무것도 아니면서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 사실 수시로 덤비는 그것들에 속수무책인 채 몇 십 년 동안 그저 식은땀만 흘리다 잠들었다. 나는 매일 이런 의식을 치르며 잠든다.

그런 의식을 치르기 시작하던 16살에 나는 분명히 딴 사람이 되었다. 그 단절 같은 두려움 앞에서 원래 열심이던 것에는 게으름을 피우고, 눈길을 주지 않던 것들에 눈길을 주었다. 허용된 모든 것이 지루해 죽을 맛이었다. 대신 금지된 것들은 죄다 재밌고 좋아서 깊이 빠져들었다. 내 성실성의 초점도 대상을 바꾸었다. 대학에 가는 일보다 정체 모를 ‘의미’가 커보였다. 그런데 그 내면의 두려움은 오히려 내게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만용과 거친 숨결을 주었다. 방탕한 생활 속에서도 시간이 금보다 귀하다는 것을 천천히 배워나갔다. 무엇보다도 내가 금방 죽는다는 것을 몸으로 느꼈다. 밤마다 치르는 의식은 내게 인생의 유한함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돌이켜보면, 이보다 더 큰 학습은 없었다. 어찌 보면, 나는 내가 금방 죽는다는 이 체득 위에 흔들리며 서 있기 시작했고, 서있던 그 자리는 점점 견고해졌다. 또 알게 되었다. 나뿐만 아니라, 내가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내가 예뻐하는 사람이나 미워하는 사람이나 내 아내나 내 아들들까지도 모두 금방 죽는다는 것을.

금방 죽는다는 사실에 대한 체득은 언뜻 생각하면, 모든 것을 소멸시키고 포기해버리려 할 것 같지만, 정 반대로 내게 두려움 대신 순간을 영원으로 확장하려는 강한 의지를 주었다. 순간에 대한 체득은 필연적으로 영원성에 대한 갈망을 낳게 한다. 사실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에 멈추지 않고, 그것을 흔들어서 무한 확장하려는 예술적인 높이의 도전으로 이끌어주었다. 시를 읽고 외우게 하였다. 문자보다는 그 문자들 사이를 비집고 다니는 소리의 아름다움을 알게 하였다. 이제는 더욱 분명히 안다. 죽음에 대한 체득이 삶을 튼실하게 북돋운다는 것을. 이것은 모든 크고 위대한 성취의 가장 강력한 비결이다. 곧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바람직한 일보다는 자기가 바라고 좋아하는 일을 선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장자’(莊子)는 매우 두꺼운 책이다. 그 안에서 장자가 한 많은 얘기들은 인간의 무한 확장을 도모한다. 그것을 장자는 “소요유”(逍遙遊)라는 단어로 묘사했지만, 절대자유라고 말해도 된다. ‘제물론’에 나오는 말이다. “해와 달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우주를 겨드랑이에 낀 채, 만물의 흐름과 하나도 어긋나지 않는다. 모든 것을 혼돈의 상태 그대로 두고 귀천 같은 것은 구별도 하지 않는다.”(제물론 편) 한 인간이 우주를 겨드랑이에 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였다. 그래도 이 정도는 좀 친절하게 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장자’를 펼치자마자 읽히는 내용은 더욱 광활하다. “우주의 북쪽 바다에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큰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살았는데, 변해서 붕(鵬)이라는 새가 되었다. 붕의 등 넓이도 몇 천리나 되는지 모른다. 힘차게 날아올라 날개를 펼치면 마치 하늘 가득 드리운 구름 같다. 이 새는 바다가 크게 출렁거려 대풍(大風)을 일으킬 때, 그 기운을 타고 천지(天池)라고 불리는 남쪽 바다로 날아간다.”(소요유 편)

곤은 그냥 붕이 되는 것이 아니다. 우선 긴 시간의 축적을 통해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크기를 키워야 한다. 크기가 충분히 커진 어느 날 우주의 바다(그냥 바다가 아니다)가 출렁대며 일으키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거대한 날개 짓을 해 구름을 뚫고 9만리를 솟구쳐 오른다. 상승하는 동력이 극점에 이르러 멈추는 순간 존재 차원에 극변이 일어나 새가 되는 것이다. 적후지공(積厚之功), 즉 두텁게 쌓은 공력이 실현되는 순간이다. 이 장엄한 전 과정을 장자는 높은 창공에서 남쪽으로 날아가는 긴 여정으로 묘사했다.

이것은 위대한 승리의 여정이다. 그 안에는 삶에 대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헌신이 깃들어 있다. 성실한지도 모를 정도로 펼치는 무극의 성실이다. 어떻게 이 정도의 삶이 가능할까? 이 정도의 삶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는 근저의 힘은 무엇일까? 한 참 그것을 찾던 어느 날 내 눈에 한 구절이 들어왔다. 곤이 붕이되어 남쪽으로 날아가는 이 장엄한 성실성의 기초는 모두 이 한 구절에 담긴 체득에서 나온다.

내가 별똥별의 궤적을 내 안의 어딘가에 감추곤 하던 시절, 지붕은 초가에서 슬레이트로 바뀌었지만 벽은 여전히 흙벽이었다. 나뭇단이 쌓인 부엌은 특히 석양볕이 길고 낮게 들어왔다. 부엌에 찾아드는 석양볕은 흙벽의 갈라진 틈새를 거침없이 밀고 들어왔는데, 겨우 책받침 두께 정도에 불과했다. 당연히 흙벽의 갈라진 틈은 책받침보다도 얇다. 그 틈의 간격을 천리마가 달리며 지나치는 시간은 얼마나 짧을까? 아마 순간보다도 더 순간적이고, 찰나보다도 더 찰나적일 것이다. 이 얇은 두께의 틈새를 보통은 극(隙 혹은 ?)이라고 한다.

장자에 의하면, 우리의 일생은 고작 이 찰나적인 간격을 천리마가 지나치는 그 시간 정도밖에 안 된다고 갈파한다. 이것이 바로 근본적인 체득으로 이끈다고 앞에서 말한 바로 그 한 구절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사람이 사는 시간이라는 것은 마치 천리마가 벽의 갈라진 틈새를 내달리며 지나치는 순간 정도이다. 홀연할 따름이다!”(지북유 편) 장자가 말하는 무한 확장, 덕후지공, 절대 자유, 위대한 성취들은 모두 금방 죽는다는 이 처절하고도 두려운 체득에 푹 빠졌다가 건진 결과들이다. 순간에 대한 체득만이 영원으로 확장하려는 강한 욕망을 갖게 한다. 장자 철학의 핵심은 절대적으로 이 한 구절의 인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장자가 살았던 자유롭고 투철한 삶은 모두 죽음에 대한 진실한 인식을 기초로 한다.

죽음은 경험되지 못한다. 경험하는 순간 경험하는 주체의 의식이 원래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이탈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은 누구에게나 제3자의 일로 다가올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타자의 죽음을 통해서 죽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전부다. 내 죽음을 경험할 수는 없다. ‘금방 죽는다’는 말을 듣거나 의식하는 당시에는 평정이 허물어지고 내면이 동요하기 때문에 체득이 일어나는 것 같지만, 잠깐 지나면 ‘금방 죽는다’는 문장이 나의 일로 남지 않는다. 나에게 경험되지 않기 때문에 항상 ‘죽음’으로만 존재하지 죽어가는 일로서의 ‘사건’으로 의식되지 못하는 것이다.

보자. ‘죽음’은 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죽어가는 일’이 있을 뿐이다. 체득은 ‘죽음’에 대하여 내용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사건’으로 직접 경험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죽어가는 사건’을 내가 경험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다만, 죽음의 구체적 상황 비슷한 경우 속으로 나를 밀어 넣을 수는 있다. 나에게 직접 닥치는 ‘사건’으로 체득하려면 ‘죽음’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평정’이 무너지며 내면이 동요하는 그 경험의 시간을 계속 늘려나가는 수밖에 없다. 기억하고 의식하는 수밖에 없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운명처럼 우연히 다가와서 집요하게 머물러 죽음을 ‘사건’으로 대면할 수 있기도 하지만, 보통 그런 경우는 매우 희박하므로 우리는 튼실한 삶을 위해 죽음을 의식적으로 자주 불러들이는 수밖에 없다. 인생이 짧디 짧다는 것을 항상 의식적으로 기억해야 한다.

나는 ‘금방 죽는다’는 사실과 ‘죽어가는 사건’의 실재성을 연속적으로 붙들어 놓고 싶다. 그것이 삶을 튼실하게 하는 비결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조용히 앉아 “나는 금방 죽는다”고 서 너 번 중얼거린다. 그러면 적어도 그날 하루는 덜 쩨쩨해질 수 있다. 최소한 그날 오전까지 만이라도 덜 째째해질 수 있다. 나 자신을 번잡하고 부산스러운 곳에 두는 일을 그나마 조금 줄일 수 있게 된다.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소중하게 쓸 수 있게 된다. 급한 일보다는 중요한 일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된다. 그래도 사는 것이 이 모양 이 꼴인 것을 보면 나는 아직 덜 죽은 것이 분명하다. 더 철저하게 죽어버려야겠다.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건명원 원장〉

[최진석의 老莊的 생각] ③ 이념에 빠지지 말고 세계에 직접 접촉하라
변화하는 세상, 유연한 사고가 필요하다

2017년 02월 28일(화) 00:00

철학자 장자(莊子)는 보통을 훨씬 넘어선 그의 시각을 기록으로 남겼다. “수준이 가장 높은 사람은 하늘이 하는 일을 알면서, 인간이 하는 일을 아는 사람이다.”(知天之所爲, 知人之所爲者. 至矣.) ‘대종사’ 편 첫머리에 등장하는 말이다. 지금부터 2000년도 훨씬 전에 이렇게 가장 높은 곳에서 인간사를 개괄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원래 인간은 두 세계를 겹쳐 놓은 무대에서 사는데, 하나는 자연의 세계요, 다른 하나는 문명의 세계다. 자연은 인간이 없을 때부터 존재했으며, 사실상 인간과 상관이 없던 세계다. 문명은 오롯이 인간이 건설한 세계다. 인간은 이 두 세계 외에 다른 세계를 가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이 두 세계를 가장 높은 차원에서 알게 된다면, 그는 지적으로 가장 탁월한 능력자다. 설령 가장 탁월하지는 못할지라도 인간으로서 이 두 세계에 대하여 균형 잡힌 이해를 하고 있으면, 어느 정도는 높은 단계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세계를 다 아는 것은 나처럼 적당한 지력을 가진 사람에게는 버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한쪽이라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하자고 제도적으로 합의한 결과, 고등학교 2학년 올라갈 때 영역을 구분한다. 즉 문과와 이과를 각자 선택하여 우선 한쪽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문과와 이과를 어떤 기준으로 선택했냐고 물으면 가장 많은 답으로 ‘수학Ⅱ’를 든다. ‘수학Ⅰ’은 어떻게 해보겠는데, ‘수학Ⅱ’까지는 자신이 없을 때 문과를 택한다는 것이다. 결국 ‘수학Ⅱ’가 부담이 안 되는 사람이 이과를 간다. 그러나 문·이과를 선택하는 데에 이보다는 깊은 의미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문과를 가서 배우는 학문을 보자. 철학, 사학, 문학, 정치, 경제, 법률, 신문방송학 등등이다. 이과로 진학한 다음에는 주로 생물학, 물리학, 지구과학, 천문학, 수학, 화학 등등을 배운다.

이렇게 나눠놓고 보면, 두 영역을 가르는 기준이 희미하게 드러난다. 이렇게 물어보자. 이 지구상에서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나 인간이 갑자기 한 명도 남김없이 모두 사라져버렸다고 치자. 그렇다면 문과에서 배우는 학문 분야는 인간이 사라져버려도 여전히 남아 있는가? 아니면 함께 사라져 버리는가? 함께 사라져 버린다. 똑같은 질문을 이과 학문 대상들에게도 할 수 있다. 인간이 모두 사라져버려도 이과에서 배우는 학문 대상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문·이과를 선택할 때, 인간이 사라져도 여전히 남아 있는 것에 관심이 있으면 이과를 가고, 인간이 사라질 때 함께 사라져버리는 것에 관심이 있으면 문과를 가는 것이라고 알 수 있다. 인간이 개입되어 있느냐 개입되어 있지 않느냐가 관건이다.

세계를 통괄하는 능력을 가진 인간형을 추구한다면 문과와 이과를 나누는 것보다는 당연히 문·이과를 함께 다루는 교육 제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 세계는 문(文)과 이(理)의 두 영역으로만 되어 있고, 이 두 영역은 인간의 실존적 전체 공간이기 때문이다. ‘자연이 하는 일과 인간이 하는 일을 다 알면 가장 높다’는 장자의 통찰은 얼마나 정확한가. 이제 자연세계와 인간세계를 모두 이해한 가장 지적인 인격이 태어났다.

자연 세계와 문명 세계의 이치를 모두 아는 사람은 얼마나 위대할까? 그 정도의 사람이 하는 일은 또 얼마나 거창할까? ‘하늘이 하는 일과 인간이 하는 일을 모두 아는’ 비범한 높이의 인격을 가진 사람을 창조한 장자는 이런 높이의 사람이 가지는 구체적인 효과를 다음처럼 말한다. “천수를 누리고 중도에 요절하지 않는다. 이것이 지적으로 최고의 단계다.”(終其天年, 而不中道夭者. 是知之盛也.) 지적으로 최고의 단계에 이른 사람이라면 무언가 초월적이고 추상적이고 월등한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거의 아연실색할 지경이다. 그렇게도 높은 단계의 지적인 완성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이 고작 요절하지 않는 것이라니...! 뭔가 갑자기 촌스러운 골목 모퉁이를 도는 착각이 들 정도다. 최소한 자유나 행복이나 정의나 완벽함이나 성스러움 등이 나올 줄 알았는데, 고작 천수를 누리는 정도라니, 이해가 가질 않는다.

도대체 죽는다는 일은 무엇일까? 인간이 실제 생활에서 감당하는 구체적인 일 가운데 가장 무거운 것이다. 실제로 벌어지는 일 가운데 이보다 큰일은 없다. 그런데 지식에는 끝없이 분화하는 속성이 있다. 무한히 분화하면서 한없이 확장한다. 지식의 분화에는 원심력이 작용하고, 실재 세계는 중력의 영향을 받는다. 지식의 분화에 몸을 맡긴 사람은 진짜 세계로부터 계속 이탈하고 벗어날 수밖에 없다.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이 무한 분화하는 지식을 따라 원심력에 몸을 맡기면 매우 위험하다는 경고판을 장자는 이미 ‘대종사’편 앞의 ‘양생주’ 첫머리에 세워 놓았다.(吾生也有涯, 以知也無涯, 以有涯隨無涯, 殆已) 그는 지식이란 실재 세계, 즉 구체적인 세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 했다. 그는 단호하게 말한다. “개념이라는 것은 실재 세계의 손님일 뿐이다.”(名者, 實之賓也. 「逍遙遊」)

세계 그 자체는 구체적으로 유동한다. 그것이 실재이고 진짜이다. 지식이란 원래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진짜 세계를 개념이나 관념의 형식으로 구성한 것이다. 지식은 진짜가 아니라, 진짜를 개괄하는 것일 뿐이다. 당연히 지식이나 이론은 진짜 세계일 수 없다. 지적으로 완벽한 인간은 세계를 믿지, 지식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는다. 어설픈 지식인은 지식이나 이론을 화려하게 나열한다. 하지만, 높은 단계의 지식인은 투박하더라도 세계에 대하여 직접 말한다. 세계를 사유하지, 사유를 사유하는 일을 하지 않고 구체적인 세계에 직접 접촉한다. 장자는 구체적인 세계에 직접 접촉하고, 거기서 성숙해지는 것이야말로 지적으로 완성된 사람이 보여주는 경지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결국 지적인 완성은 현실에서 검증될 뿐이다.

우리는 지식 생산국이 아니라 지식 수입국이다. 지식은 구체적인 진짜 세계를 밭으로 삼아 바로 거기서 출생한다. 지식 수입국은 밭에서 지식이 생산되는 과정을 모른 채, 수확된 이론 체계만을 가져다 쓴다. 생산 과정을 모른 채 이론을 수입한 나라는 그 이론을 바로 진리로 여긴다. 밭에서 생산된 것이라는 인식이 있으면 밭을 터전으로 삼지만, 그 과정을 모른 채 수확물을 수입만 해서 쓴다면 수확물 자체를 보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체적인 생산 과정에 익숙한 사람들은 주도권을 세계에 두고, 이론을 수입한 나라의 사람들은 주도권을 세계가 아니라 이론에 둔다. 당연히 지식 생산국에서는 세계가 변하면 이데올로기나 이론을 바꾸며 변화해 가지만, 지식 수입국은 한 번 받아들인 이론을 끝까지 믿으며 절대 바꾸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 이론으로 진짜 세계를 통제하려 든다. 한쪽은 변화하며 앞으로 나아가지만, 한쪽은 정체될 수밖에 없다. 지식과 실재 세계를 대하는 이런 태도의 차이가 바로 독립과 종속을 결정해버린다.

조선시대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패망의 기운에 붙잡힌 고려 말의 모순을 극복하고 새로 성립된 나라인 조선은 고려하고는 전혀 다른 통치 구조나 이데올로기를 쓸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성리학(性理學)과 중앙집권 관료체제를 선택한다. 성리학은 중국 송나라 때 형성된 새로운 형태의 유학적 이데올로기다. 조선은 원나라와 명나라가 교체되는 시기에 성리학을 받아들여 그것을 통치 이데올로기로 정하고 난 후, 줄곧 원래의 성리학 모습을 지키려 매우 노력한다. 하지만 중국은(물론 왕조가 교체되는 정치적 격변을 동반하였다는 점을 이해하더라도) 구체적인 현실 세계의 사회 경제적 조건이 달라지면 바로 거기에 맞춰 이데올로기를 바꿨다. 그래서 같은 유학이라도 명나라 때에는 양명학(陽明學)으로 변하고 청나라 때에는 고증학으로 변한다.

다시 조선을 보자. 조선은 1392년에 건국하면서 성리학을 이데올로기로 채택한 후 사상 논쟁의 핵심은 모두 누가 더 성리학의 원래 모습을 철저히 지키느냐에 집중되었다. ‘순수 집착’에 빠진 조선의 엘리트들은 사회 경제적 조건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중국에서 들어온 ‘진리’로서의 ‘성리학’을 손톱만큼도 바꾸려 하지 않았다. 모름지기 한 나라가 발전한다는 것은 이데올로기 혹은 아젠다나 비전 같은 것들이 그 사회가 처한 요구와 일치하였을 때에만 이루어진다. 그 사회가 처한 현실적 요구와 비전이 일치하지 않을 때는 바로 비효율이 쌓이기 시작한다. 비효율이 쌓여가면서 국가는 허약해지고, 길을 잃는다. 조선은 이데올로기를 현실에 맞춰 바꾸는 대신, 현실을 이데올로기에 맞추려는 노력만 했다. 세계에서 이론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정해진 이론에 꿰맞추려 한 것이다. 진리를 지키려는 순수한 집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물론 여러 가지 효율적이며 실재적인 일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큰 틀에서는 이 흐름을 줄곧 유지하였다. 이런 식으로 이론에만 집착하는 일을 장장 200년 동안이나 한 것이다. 200년 동안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변함없이 지키려고 노력한 결과 국가는 극단적인 비효율에 빠져 허약해졌다. 결국 1592년 일본의 침략 앞에 맥없이 당하는 치욕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중국은 어떻게 이론 틀에 세상을 맞추려 하지 않고, 세상이 달라짐에 따라 대담하게 이론을 바꾸는 일을 할 수 있었을까? 간단하다. 중국은 그 이론을 생산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론을 생산한 나라는 이론이 현실이라고 하는 밭에서 생산된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들은 시선의 무게 추를 이론에 두지 않고, 직접 현실에 둔다. 구체적인 세계와 현실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지, 이미 정해진 이론을 금과옥조로 여기지 않는다. 이론은 그저 현실에서 생산된 부산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이론을 수입한 나라는 이론이 생산되는 그 과정을 경험하지 못한 채, 이미 생산된 이론만을 수입해서 쓰기 때문에 이론을 불변하는 진리로 여기기 십상이다. 이런 경우에는 이론이나 이데올로기를 바꾸면 바로 정의롭지 않은 변절자로 취급받기 십상이다.

그러나 세상의 진화는 현실에 기반을 둔 변절자(혁신가)가 해내지, 이념이나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근본주의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지적인 완결성은 구체적인 현실에 시선의 무게 추를 두고, 거기서 사유의 밭갈이를 하는 우직함에서 드러날 뿐이다. 그 밭갈이의 완성은 또 이 세상에서 가장 구체적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생명 앞에 좌우된다. 지식의 원심력을 극복하고, 실재의 중력을 항상 느껴야 한다. 그것이 독립적이고 창의적으로 사는 길이다.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건명원 원장〉

 

[최진석의 老莊的 생각]② 이룬 공(功)을 차고앉지 말라

‘성공 기억’에 갇히지 말고 끊임없이 혁신하라

성공한 사람의 발목을 잡는 가장 큰 적은 무엇일까? 한 번 성공을 해 본 사람이라면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또 다른 성공을 이루고 싶어할 텐데, 그것을 못하도록 하는 가장 쎈 요인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성공 기억’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한 번 강력한 성공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대개 성공할 때 사용하였던 그 방법과 섬광 같았던 결정의 순간을 짜릿한 신화의 중심 줄기로 붙잡게 된다.

하지만, 그 신화의 줄기가 다시 자라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세월이 그리도 무정하기 때문이다. 세월은 원래 있던 환경을 지우고 전혀 다른 환경을 세워가며 질주해 나간다. 이 동작은 한 번도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성공할 때 발을 딛고 있던 그 상황과 조건은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는다. 한 번 더 성공을 꿈꾸는 그 사람이 마주해야 할 상황은 언제나 새롭고 처음 직면하는 것이다.

이러한데도 ‘성공 기억’에 갇힌 사람은 새롭게 나타나는 조건마저도 과거에 했던 그 성공의 기억으로 다루려 한다. 움직이는 세상을 자신의 기억 속에 가두려는 무모한 시도와 다르지 않다. 한 번 더 큰 성취를 이루고 싶다면, 우선 그 짜릿한 기억에서 벗어나야 하리라. 기억은 과거이고, 한 번 더 해야 할 성공의 결정적 순간은 이미 과거를 벗어난 환경 앞에 있다. 문제는 이 새로운 조건 앞에서 어떻게 새로운 결정을 새로운 방식으로 할 수 있는가이다. 노자는 말한다. “공이 이루어지면, 그 공을 차고앉지 말아야 한다.”(功成而不居) 공을 차고앉았다는 말은 바로 성공 기억에 갇혔다는 뜻이다.

노자는 처음에 이 말을 정치적인 의미에서 주로 사용하였다. 정치인이 지속적인 지배력을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백성들의 마음 속에 영원히 살아남는 생명력 있는 권위는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 우선 자기가 이룬 공, 바로 그것에 함몰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이룰 때 사용하였던 방법에 고착돼서는 안 된다. 에리히 프롬은 말한 적이 있다. 어떤 혁명가가 자신이 타도하려고 하는 대상을 타도하고 나서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으면 그것은 이미 혁명가가 아니라 반항아에 불과하다고…. 왜 진실한 표정을 지은 채 혁명가로 자처하며 목숨을 불사하던 헌신적인 사람들이 혁명을 이룬 후에는 쉽게 비판받고 버림받는가.

그것은 혁명 대상을 타도하고 나서 그 자리를 차고앉으려 시도하면서 이미 자신이 타도하려던 그 대상과 부지불식간에 닮아 버리기 때문이다. 정치 자체를 상승시키지 못하고, 정권만 교체한 형국이다. 혁명의 기운이 감돌 때, 백성들이나 국민들이나 시민들은 모두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꿈꾼다. 다른 세상은 다른 정치로만 가능하다. 혁명가들은 대개 다른 정치를 제공하겠다고 선동하지만, 결국 타도 대상이 앉았던 자리에 자신이 앉음으로써 다른 정치의 길은 요원해져 버린다. 정치가 상승하는 길은 사라지고, 권력만 교체된다. 이 정권이 저 정권으로 바뀐 것에 불과하다. 더 좋은 세상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정치의 발전이지 정권이나 권력의 교체가 아니다.

당연히 혁명이라는 공을 이룬 후에는 그것을 차고앉으면 안 된다. 왜 아직도 현대의 유일한 혁명가로 체 게바라를 드는지 알 수 있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체 게바라는 쿠바를 혁명시키고 나서 쿠바의 권좌에 눌러앉지 않았다. 바로 다음 혁명지인 볼리비아를 향해 떠났을 뿐이다. 체 게바라에게는 혁명만 있었지 권력이라는 의자에 앉으려는 정주(定住)의 욕구가 없었다. 그래서 혁명을 또 혁명하며 비로소 유일한 혁명가로 남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 주위에서 들리는 익숙한 혁명가의 이름들은 사실 반항아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사회가 진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은 혁명가가 아니라 반항아가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반증이다. 지금의 대한민국 현실에서도 정권 교체를 강조하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서는 권력의 교체는 있을지 몰라도 정치의 상승을 기대하기란 어려울지도 모른다.

이런 반항아들은 스스로를 혁명가라 자처하고, 자신들이 했던 반항의 활동을 혁명적이었던 것으로 포장한다. 진실한 혁명가는 스스로를 혁명가(革命家)라고 말하지 않는다. 부단한 혁명만 있기 때문에 자기를 어떤 집안(家)에 앉혀 둘 수 없기 때문이다. 특정한 집안(家)의 의자에 앉아 혁명을 말하려 하는 순간 그는 바로 반항아로 전락하지 않을 수 없다. 반항아들은 모두 무엇인가를 타도하고 난 후, 바로 그 자리를 차고 앉아 바로 정주(定住) 형태의 집안(家)을 이루어버린다. 혁명이 성공한 그 순간을 차고앉는다. 혁명의 기억에 갇힌다. 이렇게 하여 앞으로 일어나는 어떤 일들도 이 혁명의 기억을 가지고만 재단한다. 그 기억에 맞으면 선이고, 그 기억에 맞지 않으면 반동이다. 혁명의 ‘깃발’이 바로 ‘완장’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모든 혁명의 과실은 역사 속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조작된 기억으로 담장을 친 이 집안으로 흘러들어가 버린다.

어쩔 도리가 없이 혁명의 동네는 이 집안의 지배를 받는다. 역사가 더 흐르고 싶어도, 동네가 더 진보하고 싶어도, 혁명을 지속하고 싶어도, 혁명 시기 쌓인 증오를 벗어버리고 싶어도, 화해하고 싶어도, 다른 새 세상을 만들어보고 싶어도, 혁명의 그 기억에 갇힌 집안에 발목이 잡혀 있는 한, 한 발짝도 떼지 못한다. 혁명이란 지속적으로 혁명 될 때에만 혁명이 된다. 권력의 교체에 머무르지 않고, 정치의 상승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진보적 혁명도 결국은 보수화되고, 혁명가들은 또 다른 권력자로 남을 뿐이다. 그래서 공이 이루어지고 난 후에는 그것을 차고앉지 말자고 말하는 것이다.

혁명의 기억에 갇히지 않음으로써 정치 발전을 이루고 새 세상을 펼친 예로는 중국의 유방(劉邦)을 들 수 있겠다. 유방은 항우와의 치열한 전투를 거쳐 승리자가 된 후, 한(漢)이라는 이름을 단 새로운 정치 마당을 펼친다. 황제가 되어 새 정치를 펼치고 있는 유방에게 육고(陸賈)라는 신하가 말한다. “황제께서는 이제 경전을 공부하십시오.” 여기서 경전은 철학이나 문학 혹은 역사 등 경세의 근본에 관한 학문을 가리킨다. 그러자 유방이 화를 내면서 말한다. “나는 경전 공부 없이도 말 잔등에 올라탄 채 천하를 차지하였다. 이런 경전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러자 육고가 차분한 어조로 대들며 재차 주장한다. “말 잔등에 올라탄 채로 천하를 차지했다고 해서, 말 잔등에 올라탄 채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유방의 위대한 점은 육고의 이 충고를 그 즉시 알아들었다는 데에 있다. 육고의 지도아래 유방은 바로 경전 공부에 들어가는데, 이런 경청(傾聽)의 능력으로 유방은 천하를 차지할 때의 기억에 갇히지 않을 수 있었다. 만약 혁명의 그 기세와 기억에 사로잡혀있었다면 유방도 분명히 말 잔등에 올라탄 형상으로 국가를 다스리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방은 공이 이루어질 때의 그 기억에 갇히지 않고 바로 변신을 감행하였다. 혁명가에서 국가 경영자로 변신함으로써 오히려 혁명을 완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통치자들은 모두 권력을 잡는 데까지는 성공하지만, 결국 권력을 잡을 때의 그 기억에 갇혀 국가 경영자로 변신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정치인에서 국가 경영자로 진화하지 못한 것이다. 바로 공이 이루어지고 난 다음에 그것을 꿰차고 앉은 결과다.

통치자들이 연이어 정치인에서 국가 경영자로 변신하는 데에 실패하면, 나라의 진보나 진화는 어느 단계에서 멈출 수밖에 없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신생 독립국으로 출발한지 70년 만에 한계에 갇혀 긴 시간 새로운 출로를 찾지 못함으로써 탄력을 상실하고 낡아버렸다. 한계에 갇혀 늙어버린 형편의 내용은 무엇인가. 공을 이룬 후에 그것을 꿰차고 앉은 결과다. 늙었다는 평가를 받기 전까지의 우리는 세계가 주목할 만한 직선적 발전을 구가하였다. 바로 해방 후 건국, 건국 다음의 산업화, 산업화 다음에 민주화를 시대적 요구에 맞춰 잘 해낸 것이다. 건국-산업화-민주화의 직선적 역사발전은 국가에 효율을 가져다주어 사회 각 부문이 모두 탄성 있고 탄력 있었다. 풍모가 젊고 싱싱하여 도전적이었다.

그러나 민주화까지 내달리고 난 다음에 우리는 그 다음의 목표를 설정하지 못하고 있다. 다음 목표가 설정되어야만, 그 목표를 새로운 사명으로 삼아 나아가면서 이미 이룬 공을 꿰차고 앉는 퇴행적 탐욕을 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 다음의 새로운 목표가 서지 않고 있으니, 민주화 세력은 민주화의 공을 꿰차고 앉아 있고, 산업화 세력은 산업화의 공을 꿰차고 앉아 있으며, 심지어는 건국 세력까지도 건국의 공을 꿰차고 앉아 있다. 꿰차고 앉아서 자신이 세운 공(功)이 진리라고 주장하며 싸우는 모습이 지금 우리의 민낯이다. 화려했던 그 성공의 기억을 붙들고 해왔던 얘기를 계속 해대며 자신의 입장을 권력화하려고만 한다.

그러나 정권이나 세력에 묻지 않고 역사에게 묻는다면,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이제 건국 세력도 과거이고, 산업화 세력도 과거이며, 민주화 세력도 과거이다. 각 세력 집단들은 우선 자신이 벌써 과거가 되었음을 인식해야 한다. 과거가 되었음을 인식해야만, 자신의 공을 꿰차고 앉지 않을 각성이 가능하고, 이 각성이 있어야만 새로운 탄력과 탄성이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새 정치라 하고, 새 역사라 하는 것이다. 과거가 미래의 발목을 잡으면 안 된다.

“공이 이루어져도 그것을 차고앉지 않는 일”(功成而不居)은 노자 철학의 핵심인 ‘무위’(無爲)의 한 형태이다. 노자에 의하면, ‘무위’로만 위대함을 이룰 수 있다. ‘무위’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無不爲) 독일의 문호 괴테는 스스로를 뱀과 같은 존재로 생각했다. 허물을 벗고 항상 새로운 시작을 시도한다는 뜻이다. 괴테만큼의 성취를 이루고 간 사람이 몇이나 될까. 괴테의 성취는 부단한 허물벗기의 결과다. 허물을 벗는 뱀은 살고 허물을 벗지 못하는 뱀은 마침내 죽을 수밖에 없다. 공(功)이라는 허물에 갇히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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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1월 02일(월) 00:00

광주일보는 새해부터 인문학적 통찰로 인간과 삶을 해석하고 있는 철학자 최진석 교수의 칼럼을 게재합니다. 노장(老莊)의 철학적 바탕에 독특한 최 교수의 시각을 녹여낸 칼럼은 혼탁한 세태를 올바로 읽어내고 혜안을 제시하는 길라잡이가 될 것입니다.

중국에 명나라 말엽부터 청나라 초기까지 활동한 고염무(顧炎武)라는 사상가가 있다. 명나라의 멸망과 청나라의 건립을 목도한 그는 ‘일지록’(日知錄)이라는 책에 세상사 흥망에 관한 글을 남기는데, 나중에 양계초(梁啓超)가 그것을 “천하흥망 필부유책”(天下興亡 匹夫有責)이라는 여덟 글자로 개괄하였다. 뜻인즉슨, 천하의 흥망은 필부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여덟 글자에서는 흥하고 망하는 일을 한꺼번에 말하고 있지만, 개괄되기 이전의 전체 문장을 보면 주로 망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고염무는 나라가 망하는 것과 천하가 망하는 것을 구분하여 말한다. 그것을 우리 사정에 맞춰 이해하면 정권이 망하는 것과 나라가 망하는 것을 구분한 것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그에 의하면, 정권이 망하는 것은 그 정권을 맡았던 엘리트들의 책임이지만, 나라 전체가 흔들린다면 이는 보통 사람들 모두의 책임이다.

정권이 망하는 것과 나라가 흔들리는 것은 다르다. 정권은 나라 안에서 통치권만 장악하는 집단이므로, 그 정권이 흔들린다고 해서 나라 전체가 흔들리는 일은 없다. 오히려 정권이 바뀌는 과정을 거치면서 나라는 역동적인 생태 환경을 유지할 수 있다. 다수의 필부들에게 선택받지 못한 정권을 망한 정권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이 경우에는 분명히 그 정권을 지탱하던 정치 엘리트들만 책임지고 물러난다. 그러나 나라가 흔들리는 일은 심각하다. 고염무도 글에서 말했듯이 나라가 망한다는 것은 그 나라를 받치고 있던 공통의 가치관이나 법질서가 믿음을 상실하고 흔들리는 일이다. 구성원 일부가 동요하는 경우와는 다르다. 구성원 전체가 중심을 잡기 어려워하며 비틀거린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박근혜 국정농단 사태는 바로 구성원 전체가 동요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가치관이나 법질서가 중심을 잃었다는 점에서 나라가 흔들리는 정도의 큰일이다.

나라가 흔들리는 경우를 당하여 분노한 필부들은 촛불을 든 채 광장으로 모여든다. 그 분노는 썩은 최고 권부를 향해 있다. 썩어빠진 권부를 향해 정의의 분노를 발산하는 필부들에게 “당신들 모두에게 책임이 있어!”라고 고염무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정의로운 이 필부들에게는 얼마나 황당한 말인가. 열심히 산 죄밖에 없는 필부들이 기득권 상층부의 부패로 흔들리는 나라의 운명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니 황당하지 않겠는가. 부패하고 무능한 기득권층을 어떻게든 잘라버리고, 당장 위로를 받아도 시원찮은데 말이다.

여기서 마음을 내려놓고 차분히 앉는다.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에게서 들었던 얘기를 기억해본다. “정치는 그 사회의 얼굴이다.” 정치의 수준은 그 사회의 수준을 그대로 반영한다. 듣기 싫어도 이것은 사실이다.

청와대에서 ‘박근혜-최순실’이 벌였던 한심한 일들이 규모나 깊이는 다를지 몰라도 필부들의 세상에서 유사하게 벌어지고 있지는 않을까? 필부들까지 내려오지 않더라도 지금 정치적 공격권을 가지고 있는 야당에서는 이런 유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지 않을까? 장담하기 어렵다. 박근혜 국정농단의 핵심은 국민이 마련해준 국가의 공적 시스템을 사용하지 않고, 사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권위를 주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오히려 국가 시스템을 임의적으로 사용하게 함으로서 국기(國紀)를 문란하게 한 것이다. 핵심은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사적인 관계로 공적인 구조를 무력화시켜 버린 것이다.

우리 정치권에서는 내내 당을 사적으로 운용하는 것이 큰 문제가 되어 왔다. 그래서 항상 사당화(私黨化)라는 비판을 주고받는 것이다. 당의 공적 의사 결정이 왕왕 대표자 주위의 몇몇 사적인 인사들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는 일은 비일비재 하다. 역대 대통령들은 모두 권력을 사적인 맥락에서 운용한 것으로 호된 홍역을 치르곤 했다. 권력을 사적으로 사용한 적이 없는 대통령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보다 더 밑으로 내려와 보자. 최순실의 딸 정유라의 성적 조작과 같은 일들이 이화여대 외에는 정말 없을까? 그렇지 않다. 최근 광주의 S 여고에서는 수시를 통한 대입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특정 학생들의 생활기록부를 임의로 수정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다른 학생들이 받지 못한 면접 관련 도움을 특정 학생은 여러 번 받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일이 그 학교에서만 일어났겠는가. 부산의 K 방송국에서는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하루아침에 임기가 아직 많이 남은 사장을 전격 교체해버리고, 전 사장이 했던 사업들을 모두 축소하거나 취소해버렸다. 정책의 일관성보다도 소유자의 입맛대로 하루아침에 사람을 교체해버리는 일은 어디서나 어렵지 않게 목격된다. 문체부 국장이 대통령 맘에 들지 않는다고 졸지에 쫒겨나는 일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 방송국 소유주하고 박근혜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신분의 높낮이 외에 차이가 없다. 그렇다고 이런 일이 그 방송국에서만 일어났겠는가.

고염무가 볼 때, 나라 자체가 흔들리는 일은 단순한 정치적 사건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그런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도록 이미 조성되어 있는 나라 전체의 문화에 이유가 있다. 정치적인 개별 사건에 의해서는 겨우 정권이 바뀔 뿐이다. 그런데 어떤 사건이 나라의 틀을 흔들 정도라면 이는 이미 전체적인 문화적 행태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화 구조에는 모든 필부들이 참여하고 있다.

‘박근혜-최순실’ 국정 농단의 유형이 사회 어디서도 일어나지 않고, 오직 청와대에서만 벌어진 사건이었다면 문제는 오히려 간단하다. 문제가 엄중한 이유는 필부들이 살고 있는 사회 도처 어디서나 이런 유형의 일들이 언제나 목도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고염무는 나라가 흔들리는 일에 대해서 필부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다. 그럼 분노에 빠진 이 필부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답한 일이다.

장자의 ‘인간세’편 첫 대목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제자 안회가 스승인 공자를 찾아와 국권을 남용하며 난폭한 정치를 하는 독재자 때문에 도탄에 빠져 허덕이는 위(衛) 나라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그곳으로 가겠다고 한다. 그러자 공자가 말한다. “너는 거기에 가 봤자 처벌이나 받고 말겠다. 원래 그런 일을 할 정도의 훌륭한 사람이라면 자기에게 먼저 도(道)를 갖추고 나서 남도 갖추게 한다. 너는 갖추고 있어야 할 것을 갖추지 못하여 아직 불안정한데, 어찌 가능하겠느냐?” 그러자 안회는 자신이 그 일을 하려고 얼마나 높은 경지까지 수양을 했는지 구구절절 이야기 하며 스승을 설득하려 애쓴다. 그러자 스승이 한마디 한다. “그래가지고 어떻게 상대방을 감화시킬 수 있겠느냐? 너는 아직도 자기 생각에 갇혀 있다.” 안회는 갈수록 더 이해가 안 되었다. 결국 자신은 도저히 어찌해야 가능한지를 알 수 없으니 방법을 알려달라고 간청한다.

그러자 스승이 말한다. “심재(心齋)하라!” 이 말을 그대로 풀면 마음을 재계하라는 뜻이다. 자기 마음에 출입문을 세우지 말고, 보루도 쌓지 말며, 오직 자신 본바탕의 음성을 듣도록 자신을 준비시키라는 말이다.

스승은 심재의 방법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준다. “잡념을 없애고 마음을 통일하라.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듣도록 하고,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氣)로 듣도록 하라. 귀는 소리를 들을 뿐이고 마음은 밖에서 들어 온 것에 맞추어 깨달을 뿐이지만, 기란 공허하여 무엇이나 다 받아들인다. 그리고 참된 도는 오직 공허한 상태에서만 모인다. 이 공허의 상태가 바로 심재이다.” 귀로 듣는 일, 마음으로 듣는 일 등에는 아직 제한적인 자기 관점이 강하게 적용되는 단계이다. ‘기’(氣)의 단계는 아직 이념이나 가치가 개입되기 이전으로서 세계의 가장 원초적 상태이다. 어떤 가치나 관념이 자리 잡기 이전 혹은 자기만의 생각에 갇히지 않은 단계이다. 이 단계에 도달해야만 순수 절정으로서의 자신으로 존재하게 되어 감화력을 갖는다.

자기만의 생각에 갇혀 있는 사람이 하는 정의로운 활동은 대개 자기만의 생각에 갇혀 있는 또 다른 정의로운 사람과의 충돌일 뿐이다. 그러니 충돌만 존재하고 감화력은 생기지 않는다. 그러면 충돌에서 설령 이기더라도 정치적 승리로 그치고 만다. 정치적 승패는 상황을 같은 층위에서 반복하거나 뱅뱅 돌게 만든다. 승패의 교환만 계속되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 자체는 발전하지 않고 순환만 한다. 심재하여 자신 만의 생각에 갇히지 않게 되어 감화력이 발동하면 우리는 정치적 승리에 그치지 않고, 문화적 승리로 나아갈 수 있다. 필부 한 사람 한 사람이 심재하여 달라진다면, 필부들의 삶 자체에 진보적 방향성을 심어줄 수 있는데, 필부들의 삶이 이루는 구조와 방향성을 우리는 문화라고 하지 않는가. 필부들이 삶을 꾸리는 일상의 현장에서 작은 ‘박근혜-최순실’들이 사라져야, 청와대의 ‘박근혜-최순실’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형태의 ‘박근혜-최순실’이 또 등장할 수밖에 없다. 필부들이 채우는 삶의 현장이 바로 그 나라의 문화이고, 한 나라는 그 문화적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분명하다. 답은 필부들이 활동하는 일상의 공간에 있다. 일상의 정의가 나라의 정의를 결정하는 것이다.

필부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문화에 책임을 묻는 것과 같다. 문화를 구성하는 필부가 심재하는 것은 또 폐쇄적인 생각에 갇히지 않게 된다는 것과 같다. 심재한 필부는 폐쇄적 생각을 벗어났기 때문에 다른 폐쇄적 생각과 싸움을 벌이는 대신에 개방된 태도로 시대의 흐름과 접촉할 수 있다. 비로소 우리는 과거와 벌이는 투쟁을 통해 시대의식을 포착하여 미래를 기약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박근혜 국정농단’과 같은 퇴행적 사건과 투쟁하면서 잘못하면 덩달아 퇴행할 수 있다. 필부들의 각성이 특히 필요하다. 우리는 어쨌든 전진해야 하기 때문이다.

​2014.6.1 黃龍풍경구"五彩池"


출처 : 즐거운 여행
글쓴이 : 즐거운 여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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