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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저헌 이석형(樗軒 李石亨)의 묘

회기로 2009. 7. 18. 11:11

 

저헌(樗軒) 이석형(李石亨)선생의 묘

 

  나는 포은 정몽주선생의 묘소를 찾기 전에는 조선 전기의 문신 저헌(樗軒) 이

  석형(李石亨, 1415∼1477) 선생에 대하여 그다지 깊이 알지 못했다. 포은 정몽

  주선생의 묘역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저헌선생과 연안이씨에 대하여 새롭게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묘역에 들어서자 마자 왼쪽으로 경기도 지방문화제 제1호인 포은 정몽주선생

  의 표지석이 있었다. 묘역 가운데 돌길을 따라 올라가 중앙의 소나무 옆을 지

  나쳐 옆을 보니 지방문화제 제171호인 저헌(樗軒) 이석형(李石亨)선생 묘소

  표지석이 보였다. 이 비석을 보면 왼쪽이 포은(圃隱)선생의 묘이고, 오른쪽에

  위치한 묘가 저헌(樗軒)선생의 묘임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저헌(樗軒) 이석형(李石亨)선생 묘소 표지석

   저헌(樗軒) 이석형(李石亨)선생 묘소

 

   저헌선생은 세종 23년(1441)에 생원과 진사, 그리고 문과에 장원을 했을 뿐만

   아니라 초시에서도 장원을 했다. 이는 조선시대 최초의 사례로, 그 누구도

   기록을 깨지 못했다. 그 후 저헌선생은  집현전에서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면

   서, 세조 2년(1456) 사육신 사건을 전해 듣고 그들의 절의를 상징하는 시를 지

   어 익산동헌에 남겼는데, 다른 관리들이 들고 일어나 죄를 물어야 한다고 하

   였으나 세조가 막아주었다.

   그 후에도 그는 세조의 총애를 받아 황해도 관찰사·사헌부 대사헌 등의 요직

   을 거쳤으며, 성종대에는 손성좌리공신으로 연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저서로

   는『대학연의』,『대학연의집략』,『저헌집』등이 있다.

   묘역 안에는 묘비. 문인석. 향로석. 상석 등의 석물이 잘 갖추어져 있다.

   풍수지리를 연구하는 분들이 저헌 선생의 묘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그 이유는 선생의 후손들 가운데 8 명의 정승, 6명의 대제학, 42명

   의 판서가 배출되어 조선왕조시절 3대 명문가의 반열에 올라섰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후에 들어와서도 2명의 장관, 1명의 차

   관 을 배출되었다.

 

                 저헌 선생의 17대 후손 이경희(李慶熙)씨 

 

                  나는 이날 운 좋게도 저헌 선생의 17대 후손 이경희(李慶熙)씨를 만나 귀한 이야기

                  를 많이 들었다. 그분은 연안이씨의 중시조인 저헌공파 대종회 총무로서 마침 묘소

                  를 돌보기 위해 와서 땀을 흘리며 일을 하고 있었다.

                  이경희씨의 말에 의하면 묘소가 있는 문수산 일대의 땅은 168만평이나 된다고 하며

                  포은 정몽주 선생을 비롯하여 정씨 문중의 묘소가 63기, 저헌선생의 묘를 비롯하여

                  연안이씨 문중의 묘가 282기가 있었는데 일제 때 양 가문에서 땅 소유권 분쟁이 일

                  어 재판을 한 결과 정씨가문이 승소를 했다고 한다. 옛날에는 토지 등기 개념이 지

                  금처럼 분명하지 못하였고, 양가문이 가깝게 지내 소유권 개념이 없이 지내다가 시

                  대가 변해 그런 일까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일대는 저헌선생 묘소만 빼 놓

                  고 전부 정씨가문의 묘뿐이며, 연안이씨 가문의 묘소는 같은 문수산내 뒤편인 레이

                  크싸이드 컨트리클럽 쪽에 많이 있다고 하였다.

     저헌선생 묘소에서 바라 본 전경

      

    저헌(樗軒)선생 묘택에는 재미있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장능충신(莊

    陵忠臣)으로  추앙받는 설곡(雪谷)  정보(鄭 保)선생이 유배지인 진주에

    서 순절하여 그곳에 우선 묘를 썼다. 그러나 초라하기 그지없어 후손된

    자 부끄 러워 하던중 그가 복권이 되어 포은선생묘 옆인 지금의 저헌공

    묘소 자리로 천장(遷葬)을 하기로 결정되어 면례(緬禮) 전날 광중(壙中)

    을 지었다. 그런데 지술관이 그 자리가 천하제일 명당이라고 했다는 말

    을 전해들은 저헌(樗軒)公의 부인(설곡선생의 따님)이 명당 자리를 찾이

    할 요량으로 포은묘소아래 연못에서 밤새 물을 길어다가 지어놓은 광중

    에 부어 마치 물이 나는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이를 모르는 영일정씨문

    중은 하필이면 물이 나는곳에 묘를 쓸수없다하여 포은선생묘소 우측으

    로 갑자기 변경하여 천장하였다 한다.

    천장 면례행사가 끝나고 설곡선생 따님(저헌공의 부인)은 천연덕스럽게 

    "물이나서 못쓴 아버지의 산소자리나마 장차 저의 시댁이 쓸수있도록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정씨문중에서는 어짜피 물이나서 못쓰는자리 이기

    도 하고, 묘를 쓸만한 선산이 마땅치않은 딸이 시댁을 위하는 마음을 가

    상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포은선생묘소 좌측 바로 옆자리인데도 타성(他

     姓)인 저헌 이석형선생 묘소가 들어서게 된것이라고 영일정씨문중과 연

    안이씨 중에 사실같은 설화로 전해온다.

    또 다른 설이 있는데 이것은 설곡 정보(鄭 保)선생이 자신의 딸이 집에 와

    서 해산을 한후 산후증으로 죽자 자신의 자리로 정해진 자리를 내 주었는데,

    지금은 엉뚱한 이야기 로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 천장(遷葬)- 이장(移葬)을 말함. 이미 썼던 묘를 다시 파서 다른 곳으로

                          옮겨 장사하는 것.

    * 광중(壙中)- 시체가 놓이는 무덤의 구덩이 부분을 이르는 말.

    

[찾아가는길]

용인 수지에서 대지고개, 성남 분당에서 태재고개를 넘어 능원리

로 진입하여 광주방면을 향해가다보면 이정표가 나온다.

 

동림리 "한국등잔박물관"간판 뒤쪽으로 작게 만들어 꼽아 놓은

포은 정몽주, 저헌 이석형 선생 묘소 및 신도비 안내 표지판을 따

라 400여 미터 들어가면 된다.

 

 

출처 : 반석 같은 친구
글쓴이 : 푸른빛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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