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화

[스크랩] 조선 회화사 - 오원 장승업 작품 모음

회기로 2009. 7. 19. 13:11

 


“그림에 취한 신선”이란 뜻의 영화 <취화선>의 주인공 장승업을 여러분은 아직도 기억하실 거에요. 실제 인물보다 더 리얼한 연기를 해준 배우 최민식 덕분에 강렬하게 다시 태어난 화가 장승업. 이번 주에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기량이 뛰어났다는 평을 듣고 있는 화가 장승업에 대해 소개하겠습니다.

영화에서 소개되었던 것처럼 장승업의 생애의 시작과 끝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홍수와 흉년, 돌림병 그리고 민란으로 인해 혼란했던 조선 시대의 말기에, 고아로 태어나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다가 한양에서 머슴으로 일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그의 인생 초기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그리고 영화에서처럼 한 양반의 도움으로 그림과 글을 공부하게 되죠.

남달리 그림에 조예가 깊었던 문인 이응헌은 일개 종이파는 집의 일꾼이었던 장승업의 재주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고, 그를 자기의 집으로 데려와 그림과 글을 가르칩니다. 주인이 소장한 휼륭한 그림을 보면서 솜씨를 익혔지만, 무엇보다도 타고난 천재적 소질과 한번 본 것은 절대로 잊지 않는 귀신 같은 눈썰미는 장승업을 금새 장안에 유명한 화가로 만듭니다.

만약 장승업이 그림으로 돈을 벌고자 하였다면 그는 금방 부자가 되었을 겁니다. 그에게 그림 부탁을 하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과 마차가 골목을 가득 메웠다고 하니까요. 하지만 그에게는 그림 자체가 그의 인생이었기에 결코 돈과 명예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때는 술동이를 이고 나타나 그림을 청하면 금새 붓을 들기도 했다죠.

장승업은 술을 목숨처럼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림 값으로 받은 돈은 죄다 주막에서 술을 마시는 데 사용하고, 또 돈이 얼마나 들어왔는 지는 계산하지도 않았구요. 주막에서 돈이 떨어졌다고 하면 "나에게 술대접이나 할 따름이지, 돈은 물어서 무엇 하느냐" 고 하기도 하고, 심지어 주막에서 그림을 그린 적도 많았답니다. 게다가 그는 여색(女色)을 좋아하여 늘상 미인을 옆에 두고 그림을 그렸구요.

한 번은 그의 그림에 반한 고종 황제가 장승업을 궁에 불러들여 병풍 그림을 그리도록 주문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답답한 궁중 생활이 싫고, 술을 먹고 싶다는 생각에 장승업은 궁궐을 탈출하였습니다. 그것도 세 번이나 말이죠. 그리고 그 때마다 주막에서 술을 먹다가 잡혀왔구요. 장승업은 벌을 받아야 했지만, 그를 아끼는 민영환의 간청으로 간신히 그의 집에 머물면서 그림을 그리라는 왕의 허락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 병풍은 완성되지 못했답니다.

그렇듯 한군데에 속박되길 싫어하는 장승업이었기에 결혼을 해도 남들과 같은 단란한 가정생활을 꾸려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마흔이 넘어 결혼을 하고도 하룻밤을 보낸 후 부인을 남겨둔 채 또 다시 방랑의 길을 떠났습니다. 한 여자의 남편이기보다는 화가였던 장승업의 가슴에는 이성으로도, 사회적 도덕관념으로도 구속할 수 없는 그림에 대한 강한 열정이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귀신이 그의 손을 빌려 그림을 그린다”는 말을 들을 만큼 장승업이 그리는 산수화, 인물화, 동물화 등은 어느 것 하나 빠지는 분야가 없었습니다. 책을 만 권 읽어야 올바른 그림이 나온다며 그림 속에 선비의 고매한 정신을 담고자 하였던 당시의 사대부들과 장승업의 생각은 좀 달랐습니다. 그는 아름다움 속에 무언가를 담기 보다는 그 아름다움을 그대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었죠. 아름다움이란 그 자체 만으로도 예술가에게는 진리나 신과 같은 절대적 가치가 될 수 있었으니까요.

특히 김홍도의 신선도를 보면서 장승업은 어지러운 세상을 떠나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그 속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 뿐이었습니다. “사람의 생사는 뜬 구름과 같은 것이오. 그러니 어디 경치 좋은 곳을 찾아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 마땅하지 요란스럽게 앓는다, 죽는다, 혹은 장사를 지낸다, 번거롭게 할 필요가 무에 있겠소?” 라며 말하던 것처럼 어느 날 문득 장승업은 사람들 사이에서 사라졌습니다. 죽었다고 말하기도 뭣한 장승업의 사라짐을 두고, 그과 친구로 지내던 일본기자는 “그가 신선이 되어 갔다”고 말하였습니다.

[ 황학산초가 그린 가을강의 모습을 본뜬 그림 (1879) ]
황학산초란 중국 원나라의 유명한 화가인 왕몽의 호입니다. 장승업은 그가 그린 그림을 무척 좋아했고, 또 본뜨기를 즐겨 했습니다. 하지만 왕몽 그림의 특징은 배우되, 장승업 나름대로의 스타일이 살아난 그림으로 그려내었지요. 그림 속 산과 나무 그리고 강의 구도가 짜임새있게 배치되어 있구요, 강 위에서 낚시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림을 생기있게 만들고 있습니다.

 

[ 호취도 (1880) ]
우리나라에 있는 매 그림 중에서 가장 완벽하다는 평을 듣고 있는 작품입니다. 사람들은 이 그림을 보면서 “귀신이 그의 손을 빌려 그린 것 같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언뜻 보아서는 호방한 필치로 일시에 그린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매의 깃털 하나 하나부터 나무결 하나하나까지 섬세하게 표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매서운 매의 눈초리와 날렵한 몸짓이 화가가 얼마나 많은 정열을 쏟아 부었는 지 짐작케 하고 있구요.

 

[ 세 사람이 시간을 묻는 모습 (1890) ]
이 그림의 내용은 세 사람이 모여서 “바다가 변하여 뽕나무 밭이 될 때마다 나뭇가지를 하나씩 놓아 두었는 데 지금 그 나뭇가지가 열 개가 되었다” 며 나이 자랑을 하고 있는 중 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나이의 노인인 듯한데요, 그런 노인들이 모여 있는 곳이 구름이 내려다 보이는 산 위입니다. 아마도 장승업이 그린 이 세 사람은 신선인가 봅니다. 그리고 그 신선들은 그가 꿈꾸는 또 다른 자신일 것입니다.

 

[ 솔바람 소리와 폭포 (1890) ]
그림 중앙에 세 그루의 소나무가 기품있게 서 있고, 그 위로는 폭포가 떨어지면서 안개가 계곡에 가득한 모습입니다. 그리고 위의 그림은 작아서 잘 안보이시겠지만 소나무 아래에 두 남자가 부채질을 하면서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그려져 있답니다. 한가로운 여름날의 조선 산수의 정취가 화면 가득히 담겨 있습니다.

 

[ 귀거래도 (1890) ]
이 그림은 중국 진나라 때의 시인 도연명이 왕의 부름을 받고도 80일 만에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에서 평생을 은거하며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다는 이야기를 그린 것입니다. 당시 조선 사회는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매우 혼란했습니다. 그런 사회를 떠나고 싶은 마음 뿐이었던 장승업은 세상사를 초탈한 도연명을 바라고 그리워하며, 가슴 속 바램을 그린 것이겠죠.

 

[ 대나무와 닭 (1890) ]
장승업의 그림에는 조선땅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닭이 많이 등장합니다. 당시에 닭은 귀신이나 질병 같은 악한 기운을 쫓아낸다는 의미를 가졌기 때문에 그림으로 많이 그려졌습니다. 장승업은 문인화의 주된 소재인 대나무는 잘 그리지 않았는 데요, 여기에선 눈부신 장닭의 품위를 높이려는 듯 배경의 장식으로 운치있게 그려져 있네요.

 

 

[ 붉은 매화와 흰 매화 병풍 (1890) ]
매화 나무의 한 둥치만을 클로즈업 해서 화려하게 그려낸 이 작품은 10폭짜리 병풍입니다. 위에선 오른쪽 4폭 만을 보여드리는 것이구요. 매화는 차가운 바람을 이기고, 피어나는 세 벗이라 하여 소나무, 대나무와 함께 세한삼우(歲寒三友)라 불리고 있습니다. 장승업이 어려운 사회상을 바라보며, 어떻게든지 조선이 이 역경을 이겨내길 바라는 마음을 보이고 있는 듯 하네요.

 

[ 오동나무를 닦고 있는 모습 (1890) ]
장승업은 중국에서 전해오는 고사를 그림의 소재로 많이 이용하였습니다. 위의 그림도 그 중 하나입니다. 중국의 한 학자였던 예찬이란 사람이 있었는 데요, 그는 결벽증이 무척 심했다고 합니다. 어느날 찾아온 손님이 무심코 뱉은 침이 오동나무에 묻었는 데요, 손님이 돌아가자 마자 예찬은 시동을 시켜 그 것을 닦도록 했다고 하네요. 그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려낸 것입니다.

 

[ 여덟 마리의 말 (1890) ]
많은 학자들이 말하기를 그림으로 그리기가 가장 어려운 동물은 말과 개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늘상 보아온 동물이라서 조금만 잘못 그려도 금방 알아차리게 되기 때문이거든요. 위의 그림은 어떠세요? 말에게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자세가 한 그림 속에 모두 담겨 있네요. 잘 보이시지 않겠지만 네 명 중 맨 앞 사람의 어깨 위에는 매가 한 마리가 있답니다. 이제 막 매사냥을 떠나려는 것 같네요.

 

 

 

수탉



지본담채 / 140.2x43.2cm / 서울개인소장

 

 




 

 

 

<풍림산수도(楓林山水圖)> 자본담채, 40x211.5cm, 서울대박물관


 

장승업의 산수화 중 가장 이른 양상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원래는 횡권 형식이었으나 현재는 액자로 표구되어 있다. 가을철 단풍이 물든 숲과 이를 감상하는 인물의 모습을 그렸다. 화면 오른쪽 끝에 동자가 미는 수레를 탄 고사(高士)가 그려져 있으며, 화면의 나머지 대부분은 숲과 산으로 채워져 있다. 중국풍의 인물표현이나 호분(胡粉)을 바른 동자의 얼굴 모습, 그리고 수지법(樹枝法) 등 일부에서 장승업의 특징적인 면이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초기적인 양상이 드러나 있다.즉 세부 필치에서 특유의 호방함이 전혀 보이지 않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일관되어 있는 점, 다양하기는 하나 다소 부조화된 나무들의 형태, 화면 중앙과 좌측 아래의 숲의 비례상 부조화 등에서 화보식(畵譜式) 남종산수화풍을 조심스럽게 익혀나가는 초기 습작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화면 왼쪽 끝 아래에 '장승업인(張承業印)'이란 백문방인(白文方印)이 있다.




 

 

<세산수도(細山水圖)> 자본수묵, 16x21cm , 서강대박물관


 

장승업이 당시 유행하던 정형화한 남종산수화풍을 완벽하게 습득하였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아름다운 강변의 누각에 두 사람이 마주앉아 담소하고 있고, 강 위에는 이들을 태우러 오는 듯한 배 한척이 접근하고 있다. 때는 가을인 듯 강 건너에는 갈대가 우거졌고, 이 쪽 나무들 중 일부도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있다.

원 말 사대가 중 예찬식의 구도와 필묵법을 사용하여 깔끔하고 투명하며 쓸쓸한 가을의 정취를 잘 표현하였다. 화면 가운데 접힌 자국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더 작은 화첩이었던 것 같다.

 




 

 

전(傳)<산수도(山水圖)> 자본담채, 16.6x21.7cm, 국립중앙박물관


 

동원 기증품인 이 <산수도>는 나무와 가옥의 표현법 등에서 기본적으로 화보식 남종화풍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필치가 좀더 자유분방해졌으며, 원산(遠山)에는 바탕 면을 이용한 연운(煙雲)을 두어 화면 전체에 생기를 주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남종화법을 완전히 습득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점차 특유의 호방한 필묵법과 과장된 산형(山形) 묘사로 변모해가는 과도기적 면모를 보여준다.  

 





 

 

 

<산수인물도(山水人物圖)>


 

견본담채, 30.9x23.8cm, 서울대박물관

  

산간의 개울가에서 두 인물이 서서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그렸다. 나뭇가지의 일부가 화면 경계에 걸린 것으로 보아 원래는 더 큰 그림이었는데 가장자리가 잘려나간 것으로 보인다. 원래 어떤 고사인물화였는지 지금 상태로는 잘 알 수 없다. 화법상 장승업의 특징적인 수지법

(樹枝法)인 옹이가 많은 줄기나 손바닥을 편 것 같은 가지의 모습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중년기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무림촌장도(茂林村庄圖)>1884년(42세) 이전,


자본수묵, 26.8x160.5cm, 선문대박물관

 

이 산수도는 제목 그대로 무성한 활엽수림 속에 감싸인 시골마을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넓은 강과 멀리 율동적으로 펼쳐진 산수 등이 전형적인 남종화풍으로 그려졌으나, 세부를 살펴보면 당시의 형식화한 화풍이 아니라, 붓질 하나 하나에 모두 생기와 활력이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중간 강변의 바위 표현에는 서울대박물관 소장 <방황학산초추강도>와 유사한 표현을 볼 수 있다.

화면 위의 제문을 통해 중국 원대의 화가 방종의(方從義)를 방(倣)하여, 민태호(閔台鎬;1834∼1884)에게 주었음을 알 수 있다. 민태호는 민영익(閔泳翊;1860∼1914)의 생부로서 사대당의 핵심 인물이었다.

 




 

<산수도(山水圖)>


 

견본담채, 148.5x35cm, 서울대박물관

(도 26 10첩 병풍 중제9폭)

 

산수도 1폭과 화조영모 9폭으로 이루어진 〈산수영모 10첩 병풍〉(도36) 중 제9폭이다. 지금은 액자로 표구되어 있다.

이 산수도는 양식상 장승업이 40대 말경 가장 원숙한 경지에 도달했을 때의 작품으로 보인다.

전경 바위에 보이는 풍부한 먹빛, 손가락을 펼친 것 같은 특이한 나뭇가지, 빳빳한 가시잎을 가진 소나무 등에 보이는 힘차고 생기 있는 필선, 그리고 원산 허리를 휘감은 백면을 이용한 연운 효과 등에서 장승업의 뛰어난 필력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이 산수도의 원산에 보이는 뭉툭한 산의 형태와 생략적인 필묵법은 만년의 걸작인 최남선 구장〈산수인물도 8첩 병풍〉에서 한층 더 진전되어 나오게 된다.




 

 

<누각산수도(樓閣山水圖)>


 

견본담채, 143.5x35cm, 호암미술관

 

근경에 큰 나무숲과 정자가 있고, 중경에는 작은 나무숲과 건물들, 그리고 원경에는 주봉이 솟아 있는 전형적인 구도의

산수도이다. 같은 소장처의 〈방황자구산수도〉에 비해 수묵선염을 많이 구사하여 전체적으로 차분한 느낌을 준다. 세부

표현에서 장승업의 깔끔하고 생동감있는 필치를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방황공방 산수도[ 倣黃子久 山水圖 ]


조선 19세기 후반 비단.수묵담채 / 151.2×31.0cm

오원(吾園) 산수도(山水圖)의 전형(典型)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吾園은 화첩의 소폭(小幅)보다도 병풍이나 종축을 많이 사용하였다.화면(畵面)을 지그재그식으로 구성하여 近*中*遠景을 구분하고 遠景의高山은 黃公望(子久)의 필법을 본받아 피마준으로 부드럽게 표현했으나中景의 나무에서는 그의 힘찬 筆力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약간의 과장이 있으나 그 깔끔함이 돋보인다.

조선 말기 화단을 풍미했던 천재 화가로 유명한 오원 장승업은, 일자무식의 비천한 신분이었지만 어깨 너머로 중국의 명화(名畵)들을 구경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신들린 듯 그림을 능숙하게 그리게 되었고, 임금에게 그림을 바칠 정도로 이름을 얻었다. 산수, 인물, 화조, 영모, 기명절지 등 거의 모든 화목(畵目)에 정통했던 오원은, 산수에 있어서도 각종의 남. 북종화법을 혼합한 개성 있는 산수화풍을 구사하였다. 중국 원말 사대가에 속하는 황공망(黃公望)의 필의(筆意)를 따른 이 작품도 그러한 경향을 반영하고 있는 전형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오원은 자신이 즐겨 사용하였던 좁고 긴 화면에, 경물을 짜임새 있게 구성하여 감상자의 시선이 화면 아래에서 위로 단계적으로 옮겨가도록 하였다. 꼼꼼하고 차분한 필묵법을 사용하여 전.중.후경의 어느 한 곳이라도 소홀함이 없이 완벽하게 그려내었는데, 정교한 선묘와 깔끔한 담채가 그림의 웅장함을 돋보이게 해주고 있다.

(기타해설)
 

장승업의 산수도 중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또한 가장 뛰어난 작품 중 하나

이다. 장승업은 세로로 긴 화폭을 즐겨 사용하였지만 이 작품은 비례상 특히 더 길다. 그래서인지 흔히 전경(前景)에 있던 무성한 숲을 중경(中景)에 배치하고전경에는 수면과 작은 언덕, 다리를 배치하였다. 또 전경과 중경 사이도 다리로

연결하여 멀리 후경(後景)까지 시점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특히 아름다운 곳은 후경의 주산(主山)이다. 안개에 싸인 높은 산의 모습을 아주 섬세한 필치로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다. 화면위에 "방황자구묵법 오원 장승업(倣黃子久墨法 吾園 張承業)"이라는 관서가 있고, 화면 아래에 다시 "오원의황자구의(吾園擬黃子久意)"라는 제문이 있다.






송풍유수 [松風流水]


   족자 비단에 담채   137*32.2cm 

장승업이 활동하던 조선 말기는 추사 김정희가 길러낸 중인 계급의 지식층 문인들이 추사 예술의 지극히 조선적인 핵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외형적인 형사에 급급하여 맹목적인 중국풍의 호상이 유행하던 시기였고, 자연 그의 그림풍은 중국 취향이 농후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의 그림이 단순한 중국풍으로 외형만을 모방한 것이었던 것에 비하면, 비록 같은 중국풍이긴 하지만 그는 이응헌의 사랑방에서 어깨 너머로 보던 그림을 어느 날 갑자기 배우지도 않고 신들린 듯 그려낼 수 있었던 천재의 기질이 있었기에 그림 속에 번득이는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었다.
수백 길 벼랑 위에서 입을 열어 팔방으로 부딪치며 꺾어져 내리다가 마침내 아득히 쏟아져 내리고 마는 거폭 아래, 이에 맞서듯 창연히 솟아올라 검붉은 송린을 자랑하는 장송의 모습은 임금마저도 묶어 놓을 수 없었던 장승업의 호방불기한 기질을 말해 주는 듯하다.

소나무 밑 너럭바위에 마주 앉아 잠방이 차림에 가슴을 드러낸 채 폭포의 굉음을 들으며 찻물 끓기를 기다리는 선객들의 소탈 간략한 모습은 용트림하며 치솟은 소나무와 거폭에 압도당한 눈의 긴장감을 풀어주기에 충분하다.

  오원 장승업의 그림에서는 이처럼 화면에 숨막힐 듯 번득이는 박진한 생동감이 항상 넘쳐 흐르니, 이 점은 세간에 살면서 시속을 거부한 그의 대오한 자취일 것이다.

  장승업의 작품은 현재까지 많이 전해내려 오고 있다.
  웅장한 스케일의 구도에 고도로 숙달된 치밀한 화법이 돋보이는  중국풍의 산수화다.  이는 장승업이 조선시대를 통틀어 웅장한 스케일을 화폭에 집약시켜 소화할 수 있는 몇 안되는 화가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그림에서 참으로 아쉬운 점은 탁월한 기량에도그 화풍이 중국풍이라는 취약점이 있다.






영모도 대련 [翎毛圖 對聯]

 

쌍치도(雙雉圖)

호취도(豪鷲圖)


 종이.수묵담채 / 各 135.5×55.0cm

    두 마리의  독수리가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모습의 우측 그림은한 마리가 화면 위쪽에 그려지고 나뭇가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자세를 취하고 있고 또 한 마리는 나뭇가지에서 한 발로 앉아 뒤를 돌아다 보고 있다.

독수리의 형태와 움직이는 자세가 매우 자연스럽고 생동감이 넘친다.

진한 먹과 엷은 먹을 자유롭게 구사하며 속도감있게 그어 나간  필선의 자신에 찬 움직임이 형상과 어울려 이루 말할 수 없는 시각적 쾌감을 느끼게 한다. 그림 전체에 흐르는 숙달된 대가의 기운이 흘러 넘치고 있다.







죽원양계(竹園養鷄)


 술 좋아하고 무엇에도 얽매이기 싫어하던 활달한 장승업의 성격에 꼼꼼한 사실풍의 그림이 선뜻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양극은 서로 통한다는 진리를 생각해 보면 그가 이 같은 세밀화를 그린 것이 수긍이 간다.


이러한 세밀화는 주로 그의 후반기 작품에서 주로 나타난다.
실제 그의 산수화에서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변화를 보이는 주도 면밀한 채색법을 발견해 낼 수 있고, 수목의 표현에서도 송린 한 점 까지도 그려내는 치밀함을 찾아볼 수 있다.


대나무와 괴석이 있는 마당 가에서 닭들이 한가로이 모이를 쪼는 모습이다.어미닭이 병아리를 거느리고, 빛깔도 현란한 수탉이 무슨 기척을 들었는지 일가를 수호하려는 듯 꿋꿋한 기상으로 사방을 살피고 있다.

 

가장으로서 손색 없는 태도이다.맨드라미와 냉이, 개미취 등 풀꽃과 잡초들이 마당 가에 가득 돋아나 있어 닭들이 놀기에는 마땅한 공간인 듯하다.

 

장승업(張承業), 족자비단에 채색, 74.9 x 31㎝, 간송미술관 소장





쌍마인물도(쌍馬人物圖)


견본담채, 124x33.6cm, 고려대박물관

장승업이 그린 그림 분야는 산수, 도석, 인물, 영모, 사군자, 절지 등 두루 미쳤으며, 전래된 작품은 대소를 불문하고 가작이 상당량에 이른다.
<쌍마인물>에는 장승업의 관서나 인은 없고 다만 뛰어난 화격과 화면의 오른쪽 상단에 있는 묵서에 의해 장승업의 그림으로 인정되는 작품이다.

세로로 긴 화면의 상단에 소방하고 거친 나무와 하단의 성근 풀을 배경으로 해서 중앙에 쌍마와 풍채가 예스럽고 고아한 인물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의 그림에서 낯익은 얼굴이다.
좁고 긴 화면은 오른쪽 상단을 비운 변각 구도이다.
수묵이 중심이 된 유려한 필선과 채색에 있어 선염이 뛰어나며, 특히 갈색과 옅은 자주색에 흰점이 박힌 말은 색 배합에 있어 독특한 효과를 보여준다.
도석과 영모의 기량을 아울러 살필 수 있는 그림이다.
단 한 점만의 독립된 그림이 아닌, 여러 폭으로 이루어진 고사인물도 병풍의 한 폭으로 생각된다

(기타 해설)

한 인물이 말 두 마리를 데리고 서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인물의 얼굴 모습은 눈이 가늘고 턱이 풍성하며 입술이 두터운데, 장승업의 인물화에서 자주 보이는 모습이다.

인물의 상반신이 풍선처럼 부푼 듯이 보인다. 말도 가슴과 둔부가 통통하게 살이 쪄서 역동적으로 보이는데, 이것도 역시 장승업이 즐겨 그리던 모습이다. 말의 콧잔등과 둔부에 흰색을 칠해 재미있는 강조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인물과 말의 생김새가 모두 내부적 생명력이 가득 찬 듯한 느낌을 준다.

위쪽의 힘찬 필묵으로 이루어진 잡목도 장승업의 작품에 자주 등장한다. 화면 위에는 호정(湖亭) 노원상(盧元相)이 김윤보(金允輔)의 찬문을 썼다.

 

"오원 선생의 진적은 세간에 드물다.

원하건대 안목이 있는 사람들은 서로

전하여 썩지 않기를 바란다."  





계도(鷄圖)


세로로 긴 화폭 중앙에 고목같으면서도 괴석 같기도 한 그루터기 위에 수탉 한 마리가 좌측을 향해 왼발로 서 있다.
화폭 우단의 벼랑에서 뻗어 올라갔을 나뭇가지 하나가 담묵으로 꺾이면서 휑한 공간을 적절하게 메우고 있다.

바위 오른쪽에서 또 하나의 절지가 예리한 필선으로 간략히 묘사되고, 맨드라미나 영지 같은 것이 바위 뒤로 화폭을 가로 지른다.
장승업의 예사 기법과는 상당히 다르게 차분하면서 담묵에 주묵을 엷게 섞어 닭과 꽃, 나뭇잎 등을 같은 필치로 묘사해 나간 것이, 영모도 에서 동물과 식물간의 기법의 차이가 보이는 전통적인 화법과는 다르다.
하단의 왼쪽 구석에 "오원 장승업이 임양거사법을 따른다."라고 써 있다.

장승업(張承業), 족자 종이에 담채, 140 x 43.5㎝, 한국 개인 소장




초원지록(蕉園芝鹿)



장승업은 학자들의 내면세계를 표출한 문인화까지도 형사로 모방해 내려는 대담성을 보였는데 이런 치기에 가까운 걸림 없는 태도가 오히려 천진과 상통하여 독특한 화격을 갖게 하였던 것이다.

천진 무구한 그의 성격은 유사한 성정을 가진 새나 동물에게 쉽게 감응되었던지, 그가 그린 영모화에는 천진함이 가득하다.

  다만 정식으로 묘사 수련을 거치지 않았던 만큼 그의 영모화는 간간 적확성이 결여되기도 한다.
파초 한 그루가 괴석 곁에 높이 자라 있는 동산에 사슴 한 쌍이 한가롭게 노니는 장면이다.

수컷은 새 뿔이 한창 돋아나기 시작한 듯 가지 친 두 뿔이 탱탱하게 솟아있고, 암컷은 영지를 뜯으려는 자세이다.

괴석 아래에는 장미꽃이 만발하여 더욱 감미로운 분위기를 조성한다.

장승업(張承業) ,족자비단에 채색,
74.9 x 31㎝, 간송미술관 소장




 

인물영모(人物翎毛) 10첩 병풍


 

(1879년(37세), 지본수묵, 각 100.5I27cm, 고려대박물관)

 

  

이 10첩 병풍은 매폭에 안중식의 화제가 있는데, 마지막 폭에 기묘년(1879) 여름 신라산인(新羅山人)을 본떠서 그렸다는

관서가 있어서 장승업의 37세 작임을 알 수 있다.

장승업의 작품 중 30대 후반의 인물화, 화조영모화의 양상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다. 또 이 당시 장승업의 능숙한 파묵법과 생략적인 표현도 잘 보여준다.

그런데 신라산인이란 중국 청대 18세기 양주(揚州) 지방에서 화명(?名)을 날리던 소위 양주팔괴에 속하는 화암(華암;1682~c.1765)을 말한다. 화암은 장승업의 관서나 화제에

자주 등장사지만, 화풍상 뚜렷한 연관점은 없다. 병풍의 소재는 다음과 같다.

 

제1폭 사슴(鹿), 제2폭 오동나무, 새와 매미,

제3폭 죽학(竹鶴), 제4폭 묘작(猫雀),

제5폭 노자 축관(老子出關), 제6폭 연지수금(蓮池水禽),

제7폭 파초와 국화, 제8폭 노안(蘆雁),

제9폭 왕희지 득아도(王羲之得鵝圖),

제10폭 매화, 수선화와 괴석.  




 





 

수탉



지본담채 / 140.2x43.2cm / 서울개인소장

 

부분확대도





어해(魚蟹) - 8곡병풍중에서



지본담채 / 145x35cm / 서울대박






 

어해(魚蟹) - 10곡병풍중에서



지본담채 / 11





 

전(傳)<인물도(人物圖)>


 

자본담채, 36.9x16.7cm,

국립박물관

 

 

동원 기증품인 이 소품은 장승업의 초기 인물화의 양상을 잘 보여준다. 인물의 균형 잡힌 자세나 속도감 있는 필선에서 능숙한 표현력을 볼 수 있으나 아직 장승업의 특징적인 면모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관서 외에도 빠르고 수직적인 필선을 평행으로 잇대어 표현한 의습선을 통해 장승업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의습선은 중국 청대 양주팔괴에 속하는 황신(黃愼)의 인물화법과 통하는 것인데, 장승업도 이런 표현법을 자주 사용하였다.  

 





 

황희지(王羲之),노자(老子)


1879년(37세), 지본수묵,

각 100.5x27cm, 고려대박물관

 

이 작품들은 <인물영모 10첩 병풍>(도22) 중 두 폭(제9·5폭)이다. 매폭에 안중식의 화제가 있다.

이 중<황희지>에는 1879년(37세) 연기(年記)가 있어 중기의 인물화 양식을 판단하는 데 좋은 참고가 된다. 왕희지가 산음(山陰)의 도사에게 황정경(黃庭經)을 써 주고 거위를 얻었다는 고사를 표현하였다. 황희지가 동자에게 거위를 안긴 채 수염을 쓰다듬으며 흐뭇해하는 장면이다. 인물의 모습과 의습선이 유려하고 자연스러운 필치로 그려져 있고, 진한 필선 위에 옅은 묵선을 잇대어 강조하는 수법도 볼 수 있다.

 

이런 인물화의 묘법은 나중에 조석진과 안중식에 의해 계승되어 현대에까지 이르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아직 장승업의 원숙기 인물화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기이한 안면, 신비로운 미소, 과장된 날카로운 의습선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노자>는 노자가 청우(靑牛)를 타고 함곡관을 넘어갔다는 고사를 그린 것이다노자가 소를 탄 도상은 중국에서는 송대 이전에 이미 형성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조선 후기와 말기의 작품이 많이 남아

있다. 이 작품은〈왕희지〉에 비해 아주 생략된 필묵법으로 그려져서 마치 선종의 감필체(減筆體)도석인물화를 연상시킨다.

 





 

산수인물도(山水人物圖)>


 

2폭 견본담채, 각 137.5x28.3cm,

서강대박물관

 

앞의 고려대박물관 소장 병풍 중 두 폭의 인물화와 양식적으로 유사한 작품들이다. 그런데 이 두 폭은 인물의 기본적인 도상이 중국 청 말 상해(上海)에서 간행된화보인《시중화(時中畵)》에서 본떠온 것이다. 인물들은 유려한 선묘로 자연스럽게 표현되었는데, 나중에 안중식, 조석진에 의해 계승된다. 그리고 특히 이 두 폭에 사용된 도상과 동일한 것이 안중식의 작품에서도 남아 있어 흥미롭다. .

 

 





 

도연명애국도(元亮愛菊圖)


 

자본채색, 128x37.7cm, 개인소장

 

  

이 작품은 국화를 사랑했던 시인 도연명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하늘색 옷을 입은 도연명이 책이 수북이 쌓인 책상 앞에 앉아 있는데, 동자가 소담스럽게 핀 노란 국화 화분을 보여 주고

있다.

도연명의 얼굴은 광대뼈가 두드러졌고 턱이 넓으며 입술이 두터운데 만면에 미소를 가득 머금고 있다. 이런 인물의 용모는 장승업이 즐겨 그리던 것이다. 또한 옆모습으로 그려져 있는 동자는 더벅머리에 가는 눈매, 꼭 다문 입술의 재미있는 모습인데, 역시 장승업이 즐겨 그리던 인물상이다.

한편 도연명 옆에는 마른 나무, 혹은 괴석과 같은 기이한 받침대가 있는데, 그 위에는 대나무와 난초를 심은 화분이 얹어져 있다. 이런 기이한 괴석, 혹은 나무 등걸은 중국 명대 진홍수의 그림에서 자주 등장하며, 이후 청 양주팔괴나 해상파 화가들에 의해서 계승된다그리고 당시 중국이나 조선에 퍼져 있던 일종의 서화금석(書畵金石) 수집과 골동취미와도 관련된다.

 




 

송하노승도(松下老僧圖)


 

견본담채, 136x35.1cm, 서울대박물관

 

<송하노승도>는 《고씨화보》중 장승요(張僧繇)의 인물화를 방한 것으로 장승업의 인물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큰 소나무 아래 한 노인이 앉아 있는데, 오른손으로 표범의 등을 어루만지고 있는 듯하다. 노승 뒤에는 선장을 든 사미승이 서 있고, 앞쪽으로는 작은 개울이 흘러내린다. 화면 한쪽을 가로막다시피 한 소나무 줄기는 비상하는 용처럼 힘차게 위로 뻗었고, 위에는 무성한 가지가 아래로 드리워 있다. 소나무 뿌리 쪽에는 장승업의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더부룩한 잡목이 우거져 있다.

 

화보에 나오는 딱딱한 도상을 이처럼 생동감 있게 탈바꿈시킨 데에서 장승업의 놀라운 회화적 기량을 엿볼 수 있다. 한편 소나무 아래 노승을 그리는 구도는 도석인물화에서 오래된 전통적인 것이다.

 

 

 

 

 

 

출처 : 이쁘고 고운 마음으로
글쓴이 : 맘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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