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들(羅州本貫姓氏)
나주는 지역이 광활하고 우리나라 서남부의 행정, 군사상 요지로 큰 고을이었기 때문에 나주를 관향으로하는 성씨가 많이 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나주관향 성씨의 문중내력을 기록한 비석으로 성향공원을 꾸며 놓았을 정도이다. 나주를 관향(貫鄕)으로 하는 씨족 중 시조 등 연원이 분명한 씨족의 연원을 간략하게 알아 본다.
나주시 대호동(동신대학교 앞)에 위치한 나주성향공원(羅州姓鄕公園)
1. 나주김씨(羅州金氏)
시조 김운발(金雲發)은 신라 경순왕의 둘째 아들인 김굉의 맏아들이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의 기록에 의하면 김굉은 신라(新羅)가 망하자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가 삭발을 하고 법명을 범공(梵空)으로 하여 불가로 귀의하였는데, 그가 입산하기 전에 고려에서 두 아들을 예우하여 첫째 아들 김운발은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나주군에 봉하고, 둘째 아들 김우발(金雨發)은 경주군(慶州君)에 봉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운발을 시조로 하고 나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 오며서 누대에 걸쳐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하여 명문(名門)의 긍지를 심었다.
2. 금성나씨(錦城 羅氏)
당 태종때 상서 좌복야 나지강이 고구려 정벌을 반대하고 우리나라에 망명하여 발라현(나주)에 정착한 후 신라 때에 벼슬이 좌승상에 이르렀다. 그 후 신라 효공왕 때에 나경이 나주사손으로 봉해지고 나주를 본관으로 하였으나 후손의 기록이 없어져서 고려 초에 삼한벽상 일등공신인 나총례(羅聰禮)를 시조로 하였다. 그러나 영조 때에 무신흉변의 화를 면하려고 나주의 옛이름인 금성으로 본관을 바꾸었다. 그러나 나총례의 후손이면서 아직도 본관을 옛 본관인 나주를 바꾸지 않고 나주를 본관으로 하는 계통도 있고 안정, 군위, 수성 등으로 본관을 하는 계통도 있다.
3. 나주나씨(羅州 羅氏)
당 태종 때에 수선관을 지낸 나부(羅富)가 정난을 피해 우리나라에 들어와 나주에 살면서 그의 후손들이 나부(羅富)를 시조로 하고 여황(艅?)나씨로 하였으나, 고려 성종 때 여황(艅?)이 나주로 바뀌면서 나주를 본관으로 하였다. 그러나 후손의 기록을 알 수 없어 나득규(羅得?)를 중시조 1세조로 하고 있다.
4. 남평문씨(南平文氏)
시조 문다성(文多省)은 신라 자비왕(20대)때의 사람으로 문다성의 출생에 대한 전설이 전해 온다. 남평현(현 전남 나주시 남평읍)에 장자지(長子池)라는 연못가에 큰 바위가 있다. 472년(신라 자비왕 15년) 2월에 군주가 바위 아래에서 놀고 있는데 그 바위 위에서 오색기운이 감돌면서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하게 여긴 군주가 사다리를 가져오게 하여 올라가 보니 돌로 된 함안에 피부가 백설같이 맑고 용모가 아름다운 갓난아이가 있었다. 그래서 군주가 데려다 키웠는데 5살에 글을 저절로 깨우치고 무략이 뛰어나며 사물의 이치를 스스로 깨닫는 등 총기가 있어 성을 문이라고 하고 이름을 다성이라고 했다(돌로된 함에 '문'자가 새겨져있어 성을 문이라고 했다고도 한다).
그 후 500년(지증왕1년)에 중시아랑이 되고, 540년(진흥왕1년)에 대국사, 577년(진지왕2년)에 대아랑 대국사가 되었다.
지금도 나주시 남평읍에 장자지라는 연못과 6미터쯤 되는 바위가 있고 바위위에 '문암,이라는 비석을 세워 놓아 문씨 시조의 탄생지임을 말해주고 있다. 장자지는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5. 나주박씨(羅州朴氏)
시조(始祖) 병묵(炳默)은 나주에 토착(土着)해온 사족(士族)의 후예로 고려에서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했고, 그의 아들 덕영(德瑛)은 호군(護軍)으로 연성군(蓮城君)에 봉해졌다.
그로 인하여 후손들이 병묵을 시조(始祖)로 하고 나주(羅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잇게 되었으며, 그의 선조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병묵의 손자 숙(璹)이 조선이 개국(開國)된 후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올라 아들 선문(瑄文: 호조 정랑을 지냄), 손자 제창(濟昌: 사복시정을 역임)과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그밖의 인물(人物)로는 판관(判官)을 지낸 한성(漢城: 제창의 손자)과 무신(武臣)으로 유명했던 덕명(德命)이 뛰어났으며, 장사랑(將仕郞)에 오른 순영(淳英)은 의관(議官)을 역임한 순택(淳澤)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6. 반남박씨(潘南朴氏)
시조 박응주(朴應珠)는 박혁거세의 후손으로 선조를 알 수가 없으나 반남현(나주)에서 대대로 살아오던 선비집안의 후손으로 호장을 지냈고 그의 6세손 박은(朴?)이 조선 초기 왕자의 난 때 태종을 도와 익대동덕좌명공신(翊戴東德佐命功臣)으로 좌의정에 이르렀고 반남군에 봉해졌다가 금천부원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박응주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반남으로 하였다.
박은(?), 박숭질(崇質), 박세채(世采), 박종악(宗岳), 박종훈(宗薰), 박회수(晦壽) 등의 상신, 박태상(泰尙), 박규수(珪壽) 등의 대제학, 박세당(世堂), 박지원(趾源) 등의 뛰어난 학자가 있으며, 박소(紹), 박응남(應男), 박응복(應福), 박태보(泰輔) 등의 인물이 있다.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215명, 상신 7명, 대제학 2명, 왕비 2명과 조선 후기에 판서급 인물을 많이 배출하여 박씨 중에서 벼슬이 가장 화려하다.
7. 금성범씨(錦城范氏)
시조 범승조(范承祖)는 원래 원나라의 예부시랑으로 고려충렬왕비인 제국대장공주를 배종하여 우리나라에 와 나주에 터를 잡은 것이 우리나라 범씨의 시초이다. 그의 아들 범유수(有?)는 문하시랑으로 여진의 난에 참가하여 평한 공으로 공훈 1등에 금성군에 봉해졌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금성으로 하였다. 범씨의 본관은 금성, 광주, 안주 등 3본이 문헌에 전해지나 모두가 동원(仝原)이므로 현재는 금성범씨 단본(單本)으로 하고 있다.
8. 남평서씨(南平徐氏)
시조 서호(徐灝)는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으로 남평에 대대로 살아왔고 그의 손자인 서지(徐祉)가 조선 10대 왕인 연산군때 문과에 급제하여 중종 때 이조판서에 올랐다. 그래서 이천 서씨에서 본관을 나누어 남평을 본관으로 하였다.
9. 나주양씨(羅州梁氏)
나주양씨 시조는 양열(梁悅)의 아들로 조선 중종조에 문과출신으로 도사(都事)를 역임한 양인(梁認)이다. 이 성본의 연원 등은 접할 수 없고 다만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남한에 514가구 1,67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10. 나주오씨(羅州吳氏)
나주 오씨의 시조 오숙규(吳淑珪)는 고려 중엽 진사를 지냈으며 도시조 오첨의 24세손 오현보(해주 오씨의 시조)의 아들 5형제 중 다섯째 아들이다. 그 후 3대에 걸친 후손이 분명하지 않으므로 오숙규를 시조로 하고 오숙규의 5세손 오언(吳偃)을 1세 조상으로 하였다. 오언은 고려 때 중랑장을 지내고 그의 5세손 오자치(吳自治)가 조선 세조 때에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나주군에 봉해지자 본관을 나주로 하였다
11. 나주이씨(羅州李氏)
시조 이철우(李哲祐)는 누대에 걸쳐 나주에 토착 세거한 사족(士族)의 후손으로 조선 세조 때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지냈고 평남 개천군 마장으로 이거하였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선조의 전세거지인 나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무술보(戊戌譜)에 의하면 그는 고려시대에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를 지낸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 한산이씨)의 7세손이라고 했다.
12. 남평이씨(南平李氏)
시조는 이동말(李東?)이다. 조선조에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라 병조판서를 역임한 후 보조공신(輔助功臣)으로 녹훈(錄勳)되어 남평군(南平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동말(東?)을 시조로 삼고 본관을 남평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13. 나주임씨(羅州林氏)
시조는 고려의 대장군 임비(林庇)이다. 임비는 1281년(충렬왕 7년) 왕과 함께 원나라에 다녀온 공으로 시종보좌공신 2등에 책록되고 대장군(大將軍) 충청도도지휘사판사재시사(忠淸道都指揮使判司宰寺事)에 이르렀다. 임비의 9세손 임탁(林卓)이 해남감무(海南監務)를 지내다가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관직을 버리고 회진으로 돌아가 살면서 본관을 회진으로 하였으나, 회진현이 나주에 속해짐에 따라 본관을 나주로 바꾸었다.
14. 나주장씨(羅州張氏)
시조 장세동(張世東)은 장정필의 후손인 장유의 22세손이며 부호군을 지낸 장호채의 둘째 아들이다. 장세동(張世東)은 조선 인조 때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나주에서 살다가 황해도 장연으로 이사하였는데 고향인 나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15. 나주정씨(羅州鄭氏)
시조 정해(鄭諧)는 고려 때 벼슬을 했고 군기감에 추증(追贈)되었다. 그의 후손들은 나주에 정착 세거하면서 호족을 이루어 해(諧)를 1세조로 하고 본관을 나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대표적인 인물로 시조 정해(鄭諧)의 증손자 정가신(鄭可臣·1224~1298년)은 나주 사람으로 자는 헌지(獻之), 호는 설재(雪齋),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정가신은 나주 동강면 시중동(지금의 인동리)에서 향공진사(鄕貢進士) 정송수(鄭松壽)의 아들로 태어나 금안동에서 자랐다. 어려서 승려 천기(天琪)를 따라 상경하여 1259년(고려 고종 46년) 문과에 급제하여 충열왕 3년(1277년) 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가 되고 정녕공(貞寧公)에 봉해졌다. 이어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를 거쳐 비서윤(秘書尹)으로 필적이 되고 1280년(충열왕 6년) 승지가 되었다. 1284년(충열왕 10년) 밀직학사(密直學士)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원(元)에 다녀 왔으며, 1287년 감찰대부·판삼사사를 역임한 후 1290(고려 충렬왕 16년)년 정당문학(政當文學)으로 사의(師儀)가 되어 세자를 따라 재차 원에 들어갔다. 그 후 성절사(聖節使)로서 3차례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첨의시랑(僉議侍郞)찬성사(贊成事), 세자이사(世子貳師)가 되었으며 그 후로 벼슬이 여러번 승배되었는데 특히 그는 명문장가로서 "천추금경록(千秋金鏡錄)"을 저술하기도 했으며 청렴결백하였다.
삼불의헌공(三不義軒公) 정초(鄭初. 1344~1423년)는 정가신의 증손으로 태종 5년(1405)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교리, 호조판서를 지냈다.
조선 시대에 와서는 정가신의 5세손 정식(鄭軾. 1407~1467년)이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함길도 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로 야인정벌(野人征伐)에 공을 세워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그 밖의 인물로는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낸 정국(鄭菊)과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지낸 일헌(逸軒) 정심(鄭諶. 1520~1602년). 부사(府使)를 역임한 정상(鄭詳. 1533~1609년) 등이 이름났고, 임진왜란 때 용맹을 떨쳐 비장군(飛將軍)으로 일컬어진 정여린(鄭如麟. 1564~1640년)이 뛰어났다. 또한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라 사정(司正)과 용양위부호군(龍 衛副護軍)을 지낸 정기수(鄭麒壽)와 수군방어사를 지낸 정봉수(鄭鳳壽),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된 정응(鄭應), 죽우당(竹友堂) 정란(鄭瀾. 1583~1656년), 묵재공(墨齋公) 정눌(鄭訥) 등이 가문을 대표하는 후손들이다.
16. 금성정씨(錦城鄭氏)
시조(始祖) 정 성(鄭 盛)은 1314년(고려 충숙왕 1) 문과에 급제하여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에 오르고 금성군(錦城君)에 봉해져 금성(錦城 : 나주의 별호)으로 이거(移居)하였으므로 하동정씨(河東鄭氏)평장공파(平章公派)에서 분관(分貫)하여 본관을 금성(錦城)으로 해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성(盛)의 아들 이(履)가 판군기시사(判軍器寺事)를 지내고 도첨의사(都僉議事)에 증직되었으며, 손자 지(地)는 문하평리(門下評理)가 되어 요동정벌 (遼東征伐)에 안주도 도원수(安州道都元帥)로 출전했다가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 회군을 도와 이등공신(二等功臣)에 책록되었다.
한편 윤(倫)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증직되었고, 윤(倫)의 아들 충신(忠信)은 1623년(인조 1) 안주 목사(安州牧使)로 방어사(防禦使)를 겸하고 이듬해 이 괄(李 适)의 난이 일어나자 전부대장(前府大將)으로 출정하여 공을 세웠으며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와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를 지냈다. 뿐만아니라 천문(天文), 지리(地理), 의술 등에 능통했고 청렴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그 밖의 인물로는 부호군(部護軍)을 지낸 우직(友直). 우현(友賢). 태석(泰石). 상로(相老) 등과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지낸 기홍(基鴻)이 유명했고,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 재실(在實)과 금부도사(禁府都事)를 역임한 광로(光老)가 가문을 빛냈다.
17. 나주정씨(羅州丁氏)
시조 정윤종(丁允宗)은 고려시대에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을 지냈다.
나주정씨는 조선 숙종과 경종 때 까지는 본관을 압해로 써오다가 영조 때 압해가 나주에 속하게 되자 본관을 나주로 고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는 압해를 더 중요시해야 한다는 인식이 새롭게 대두되어 더러는 압해정씨 또는 나주압해정씨 등으로 혼용하고 있다. 정씨종회에서는 공식적으로는 본관을 나주정씨로 쓰고 있다. 한편 중국 당나라에서 대양군에 봉군되어 승상(丞相)을 역임하다 압해도에 정착한 정덕성(丁德盛)을 시조로 한 압해정씨가 존재한다.
18. 나주최씨(羅州崔氏)
나주최씨는 동성동본이면서도 계보를 달리하는 두 계통이 있다. 첫째계통은 탐진최씨 계파의 중조로 조선 세종 때 진의부위(進義副尉)에 올랐던 최정원(崔井元)을 시조로 받드는 청양파(靑陽派)이며 다른 한계통은 조선 명종 때 진사였던 최택(崔澤)을 시조로 하고 가선대부에 오른 최논금(崔論金)을 일세조로 하는 보령파(保寧派)이다. 그러나‘탐진최씨세보’에 의하면 최정원은 탐진최씨 강진파의 중조인 최준량(崔浚良) 계에 합보된 것으로 나타나 있고‘나주최씨세보’에는 정원의 손자 금남공(錦南公) 부(溥)가 나주출신으로 후손들이 충남 보령과 청양 등지에 세거하면서 금남공 출신지인 나주를 본관으로 하고 있다. 한편 ‘한국성씨총감’탐진최씨조에는 최부는 탐진최씨 13세손으로 금남파의 중조라 기록되어 있다.
19. 이외의 성씨
나주강씨(姜氏), 나주노씨(盧氏), 나주문씨(文氏), 남평반씨(潘氏), 나주배씨(裵氏), 금성배씨, 나주백씨(白氏), 나주서씨(徐氏), 나주성씨(成氏), 나주손씨(孫氏), 나주송씨(宋氏), 나주신씨申氏), 나주엄씨(嚴氏), 나주염씨(廉氏), 나주유씨(柳氏), 남평윤씨(尹氏), 나주임씨(任氏), 나주전씨(全氏), 나주조씨(趙氏), 남평조씨(曺氏), 나주주씨(朱氏), 나주차씨(車氏), 나주추씨(秋氏), 나주한씨(韓氏), 나주홍씨(洪氏), 나주황씨(黃氏) 등이다.
'역사자료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첨성대는 천문대 아닌 선덕여왕 상징물 (0) | 2009.09.23 |
---|---|
[스크랩] 천년의 금서(김진명) (0) | 2009.09.23 |
[스크랩] 박근혜는 웃고 정동영은 울다 (0) | 2009.08.13 |
[스크랩] 기억햐야 할 역사자료들 (0) | 2009.07.21 |
[스크랩] 국보 51호~100호 (0) | 2009.07.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