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성대는 천문대 아닌 선덕여왕 상징물" [연합뉴스] 2009.09.20
"여왕의 시조 박혁거세와 석가모니 탄생 형상화"
정연식 서울여대 교수 논문 발표
신라시대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건립된 첨성대(瞻星臺)는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천문관측대로 일반에 알려졌다.
첨성대란 말 자체가 '별을 바라보는 대'라는 것으로 일본인 기상학자 와다 유지는 1917년 첨성대 위에 목조 건물이 있었고 그 안에 혼천의가 설치돼 있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그러나 1960년대 들어 첨성대가 꼭대기 공간이 너무 좁아 천문을 관측하기에 불편하다는 반론이 제기되면서 천문대설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첨성대의 기능과 외형에 대해 최근까지 여러 가지 주장이 제기돼왔다.
4계절과 24절기를 정확하게 측정하기 위해 세운 규표(圭表)라는 설, 수학적 원리와 천문현상을 상징한 것이라는 설, 불교에서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수미산의 모양을 본떠 만든 제단이란 설, 우물을 형상화했다는 설 등으로 다양하다.
이러한 설을 반박하면서 첨성대가 선덕여왕의 상징물이라고 분석한 새로운 학설이 제기됐다. 정연식 서울여대 사학과 교수는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선덕여왕의 성조의 탄생, 첨성대'라는 논문을 22일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분과 발표회에서 발표한다.
정 교수는 이 논문에서 첨성대가 천문대나 규표, 제단이 아니라 선덕여왕의 즉위를 기념하고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상징물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선 기존에 제기된 우물설이 일리가 있다고 하면서도 우물은 일반적으로 풍요, 생명, 다산, 신성을 의미하지만, 첨성대에서 우물의 더 큰 의미는 성스러운 시조의 탄생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신라의 우물 가운데 일부는 단순한 우물이 아니라 성스러운 조상의 탄생을 상징하는 신성한 곳으로 여겨졌다"면서 "첨성대 우물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성조황고(聖祖皇姑) 선덕여왕의 성스러운 조상의 탄생"이라고 말했다.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와 알영부인의 탄생설화에 우물이 나오듯이 첨성대는 박혁거세와 알영부인의 탄생을 의미하는 우물이라는 것이다.
정 교수는 "선덕여왕은 김씨이므로 시조 박혁거세의 후손이 아니라는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라면서 "박혁거세는 혈연개념에 입각한 단순한 성씨집단의 시조가 아니라 신라 전체의 관념적, 신화적 시조신이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어 선덕여왕의 성스러운 조상은 박혁거세만이 아니라 석가모니도 있으며 석가모니가 더 중요하다면서 "동륜태자 계열의 혈족 집단은 진평왕 때부터 자신들이 석가족의 후예라는 뜻으로 성골임을 자처했다. 여왕은 왕위계승의 정당성을 주장하려고 자신이 성골, 즉 석가족의 후예라는 것을 강조해야했다"고 말했다.
즉 선덕여왕은 정치적인 시조와 종교적인 시조 둘을 가졌고 첨성대는 박혁거세의 탄생과 석가모니의 탄생을 동시에 표현하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선덕여왕의 아버지인 진평왕은 신라왕실이 성스러운 석가모니의 혈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이름을 석가모니의 아버지 라자 슈도다나를 뜻으로 번역한 정반왕(淨飯王)이라 했고 왕비는 석가모니의 어머니 이름을 따서 마야(摩耶)라고 했다고 정 교수는 설명했다.
정 교수는 싯다르타가 마야부인의 오른쪽 옆구리로 태어났다는 이야기에 주목해 "첨성대의 불룩한 아랫부분은 마야부인의 엉덩이이고 가운데 남쪽으로 난 창구는 싯다르타가 태어난 마야부인의 오른쪽 옆구리"라고 말했다. 즉 첨성대는 박혁거세가 태어난 우물과 석가모니를 낳은 마야부인의 몸을 결합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정 교수는 "신라사에서 유일하게 선덕여왕의 즉위와 함께 성조황고(聖祖皇姑), 즉 성스러운 조상의 피를 이어받은 여자 황제라는 뜻의 존호가 올려졌다"면서 "신라역사상 처음으로 여자가 왕위에 올랐다는 것에 대한 귀족세력의 반감과 민심의 이반을 막고 왕권을 안정시키려고 왕을 종교적으로 신성화하는 작업을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신성화 작업의 첫 번째는 여왕에게 성조황고란 존호를 올리는 것이고 그다음으로는 즉위 이듬해인 633년에 첨성대를 건립한 것이었다면서 "첨성대를 왕궁이 있는 월성과 선덕여왕의 시조 김알지의 탄생지인 계림 근처의 탁 트인 평지에 9m 높이로 우뚝 세워놓은 것은 여왕이 박혁거세와 석가모니의 혈통을 이어받은 성스러운 존재임을 모든 백성과 신하들에게 알리고자 했던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는 첨성대의 몸통돌이 27단인 것은 선덕여왕이 제27대 왕이라는 것을 상징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 교수는 "첨성대는 선덕여왕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여왕의 표상이다. 그래서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첨성대가 선덕여왕 때 지은 것이라고만 밝혔던 것"이라면서 "첨성대는 상설 천문대가 아니며 신라인은 정치적, 종교적인 의미에서 하늘의 뜻을 묻고자 첨성대에 올랐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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