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6. Renee de Blonde Oil on canvas. 61 x 38 cm
이 작품의 모델인 로롯트라고 불렸던 파리잔느는 얼마간 바람끼가 있는 용모를 띠고 있으며,
양가집의 처녀 같지는 않다.
필경 술집 같은 데서 활달하지만 내던지듯 인생을 살아가는 여성이었는지도 모른다.
모딜리아니의 여성상인 깊고 우수에 찬 표정은 이 모델의 경우 어디에도 없다.
1916. Lalotte 이 작품의 모델인 르네는 키슬링의 처이며 모딜리아니의 미술을 진심으로 이해했던 모델 가운데의 한 사람이었다.
키슬링은 폴란드 출신의 유태인 화가였으며 나중에 프랑스 국적을 얻게 되지만 모딜리아니는 이 무렵 키슬링의 아틀리에에서 자주 제작했었다
이 작품은 점차로 무르익어 가는 모딜리아니의 원숙한 기량을 나타내고 있으며 모델을 포근하게 포용하는 표현력이 넘쳐 흐르고 있다.
1917. Woman with red Hair
1914. 디에고 리베라의 초상
현재 상파울루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작품은 본격적인 유화는 아니며 두꺼운 종이 위에 그려진 초벌 그림 형식의 작품이다.
아직 완성되지 못한 작품이지만 리베라의 인물이 매우 인상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누르퉁퉁한 살갗과 몽유병 환자인 리베라는 어렸을 때 걸린 멕시코의 열병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유명한 여류화가이자 제자였던 '프리다'의 남편이다.
그는 사회의 도그머를 극도로 혐오했던 맥시코의 화가였다
Portrait of the Painter Moise Kisling
Oil on canvas. 37 x 28 cm
에콜 드 파리는 프랑스인이 아닌 미술가들이 파리로 모여들어서 각자의 자율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던 화가들의 모임을 이름한다.
고향을 떠나 온 미술가들이 객지인 파리에서 오직 자신들의 예술적 잠재력만을 밑천삼아 그 내용을 신장하던 그룹을 뜻한다.
따라서 에콜 드 파리는 하나의 유파로서의 미술 사조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 미술에 대한 견해라든가 주장은 다른 것이었지만 고향을 등졌다는 이방인이라는 데서 이들은 하나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키슬링은 폴란드에서 온 유태인이며, 모딜리아니는 이탈리아에서 온 유태인이었다.
이들은 그래서 모태의 혈연처럼 가까운 사이였다. .
1915. 파블로 피카소의 초상
1916 The Sculptor Jacques Lipchitz & his wife Berthe Lipchitz
Oil on canvas. 80.2 x 52.5 cm
이 작품은 모딜리아니가 파리에 정착한지 꼭 십년이 되는 해에 제작한 것이다.
전하는 말로는 이들 립시즈 부처가 자신들의 초상화를 부탁했을 때 모딜리아니는 한 번에 10프랑을 요구했다고 한다.
다음날 모딜리아니가 찾아와서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와 정확도로 이들 부처의 데생을 여러 장 그렸고 마지막으로 이 작품과 같은 구도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모딜리아니의 붓을 놀리던 손이 자주 술병 있는 곳을 더듬었다고 한다.
1915, Madam Pompadour(Portrait of Beatrice Hestings)
Oil on canvas. 61 x 50.4 cm
이 퐁파두르 부인은 본인을 모델로 해서 그린 게 아니라 모딜리아니와 동거했던 (1914~16) 비아트리스를 대용으로 그린 것이다.
영국 여성인 비아트리스가 몽파르나스에 나타난 건 제1차 대전이 발발하던 해였으며, 사람들은 그녀를 런던의 시인이라고 불렀다.
결코 미인은 아니었지만 모딜리아니의 진가를 발견하고 그의 천재성을 개화시킨 숨은 공로자이다. 모딜리아니보다 5살이나 연상인 그녀는 그의 기질을 잘 참아 주었다고 한다.
그가 광분하면 '모딜리아니, 명심해요, 당신은 신사라는 걸. 당신의 어머니는 상류 사회의 부인이라는 것을 .'하며 타일렀다는 것이며, 이 말은 주문처럼 모딜리아니의 광기를 가라앉혔다고 한다.
그럴 듯하게 모자를 쓰고 마치 귀족처럼 차린 이 그림을 퐁파두르 부인이라고 명명한 것은 이들의 사랑이 무르익을 무렵의 정경을 암시하는 것도 같다.
1919. 레오폴드 즈보로우스키
즈보로우스키는 폴란드 귀족의 후예이며 문학 공부를 위해 파리의 솔본느 대학으로 온 시인이었다.
나중엔 화상이 되지만 당시 화가들을 등쳐 먹는 화상들이 우글거리던 몽파르나스에서 즈보로우스키 부처만은 진실로 모딜리아니의 예술을 이해했고 그의 예술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의 생애를 걸다시피한 진실한 인품이었다.
1916년에 서 1919년까지의 모딜리아니의 작품의 대부분은 즈보로우스키의 원조 밑에서 제작된 것이었다.
'이것은 모딜리아니의 가장 성공한 작품의 하나이다.
즈보로우스키가 실제로 가지고 있었던 정신과 영혼의 고귀함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이 그림이야말로 진실된 우정의 표시이다. 늘어진 콧수염이며 정돈된 턱수염 그리고 유연하게 기운 어깨의 키 큰 우아한 사람..' -웨르나의 그림 해설.
1917, Anna Zborovska
폴란드의 옛 귀족인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 난 안나 즈보로스카는 1914년 유럽 대전이 발발하던 해에 파리로 피신했으며, 그후 파리쟝들은 그녀를 프랑스 식으로 안나라고 불렀다.
모딜리아니의 최상의 이해자였던 레오폴드 즈보로스키를 알게 된 그녀는 이 동포에게 시집 가게 되며 앞으로 모딜리아니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부부가 된다.
이 작품은 이들 부부가 모딜리아니를 알게 된 일년 후에 그려진 것으로 병약한 몸매의 즈보로스카였지만 그녀의 마음씨 고운 자태가 모딜리아니의 심상을 통해 불가사의할 정도로 우아하게 표현되어 있다.
기품 있게 흐르는 목의 사선과 맑게 가라앉은 얼굴 표정이 검은 의상과 검은 머리의 대비를 통해 긴장된 구도로써 표현되어 있다. 펌
1918. 야외복을 입은 붉은 머리의 여인 1918, 소년 1918. The little Peasant
Oil on canvas. 100 x 65 cm
가난한 시골의 농부와 소년 소녀들을 깊은 애정을 가지고 모딜리아니는 그렸다.
이 작품은 그 가운데의 하나이며, 소박하고 건강하며 사랑스러운 농부 아들의 모습이 밝게 그려져 있다.
이 밝음은 당시 모딜리아니 삶의 건강성을 바로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되겠다.
한편 이 화면에서 세잔의 기법과 매우 유사한 터치를 발견하게 된다.
세잔을 존경했던 그는 남 프랑스의 적막한 전원 속에서 세잔의 농부 그림을 회상했는지도 모른다. 펌.
1917. Portrait of Chaim Soutine seated at a Table
남 프랑스의 세레라는 지방에 일시 정착하여 강렬한 원색만으로 뭉개듯 그리는 그의 광열적인 감정의 독자적인 작풍은 당시의 파리의 화단을 놀라게 한다.
이러한 그의 화면과는 정반대로 그는 투박하리만큼 순정의 사람이었다고 하며, 모딜리아니는 이러한 그의 순심에 깊은 애정과 우정을 느꼈다고 한다.
'포즈는 조용하게 가라앉아 있으며, 높은 코와 두터운 입술은 두드러 지지만, 고뇌로 차 있는 눈길이 모델을 비극적일 만큼 고독하게 표현하고 있다.' - 딸 쟌느 모딜리아니의 아버지 그림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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