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찬요『東史纂要』를 집필한 큰 선비 죽유(竹牖) 오운(吳澐)
김태환 / 영주향토사연구소 소장
함안(咸安)에 자리 잡은 고창 오씨(高敞吳氏).
고창(高敞) 오씨가 이곳 영주에 자리를 잡고 살기 시작한것은 선조때 진사(進士), 문과(文科)로 임진왜란에 공헌하고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지낸 죽유(竹牖) 오운(吳澐, 1540 ~1617)에서 비롯된다.
고려 문종(文宗)때 한림태학사(翰林太學士) 오학린(吳學麟: 최충의 문인)을 시조로 하는 고창 오씨는 고려이래로 벼슬을 이어왔으니, 거세(巨世)가 민부상서(民部尙書), 그 아들 계유(季儒)가 모양군(牟陽君)에 봉해지고, 손자 육화(六和)가 조선 초에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냈다. 육화의 아들 엄(淹)이 숙천도호부사(肅川都護府使), 오엄의 아들 오영(吳榮)은 나주 판관(羅州判官)을 지냈으니 그가 바로 오운의 고조이다.
오운의 증조 오석복(吳碩福)은 중종 대의 원종공신으로 직산 전의(稷山全義)와 의령 현감(宜寧縣監)을 역임하였는데, 말년에는 함안 모곡리에 퇴거하여 이황·주세붕 등과 더불어 종유(從遊)하였으며 당대에 시로서 그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사후에 통훈대부 통례원 좌통례(通訓大夫 通禮院左通禮)에 추증되었다.
오운의 조부 오언의(吳彦毅)는 이황의 숙부였던 송재(松齋) 이우(李堣)의 사위이면서 그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그는 전의 현감(全義縣監)을 지냈으며, 사후에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겸 경연참찬관(通政大夫 承政院 左承旨兼 經筵參贊官)에 추증되었다. 이로 볼 때 중종·명종 대에 이르러 오운의 선대는 이미 영남사림파에 속했던 것 같다.
오운의 아버지 오수정은 벼슬을 지내지 않았으나 사후 가선대부 이조참판겸 동지의금부사(嘉善大夫 吏曹參判兼 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다. 오운의 어머니는 순흥안씨 부호군(副護軍) 안관의 딸로 고려시대 말 유명한 성리학자였던 근재(謹齋) 안축(安軸)의 후손이기도 하다.
죽유가 영주에 입향하게 된것은 영천(榮川) 허사렴(許士廉, 퇴계의 처남)의 사위로, 그가 벼슬에 있으면서 임진왜란을 만나 그 가족이 처가 고장인 영천(榮川, 영주)에 피란해 있다가 그대로 눌러 살게 된 것이다.
명문가에서 태어나다.
죽유(竹牖) 오운(吳澐)의 자는 태원(太源)으로 1540년(중종 35) 9월 28일 함안(咸安) 모곡리(茅谷里)에서 태어났다. 생부는 참봉 오수정(吳守貞)이고 어머니는 순흥안씨(順興安氏) 부호군(副犒軍) 안관(安灌)의 딸이다. 그는 어릴때부터 재능이 특출하고 머리가 영리하여 이을 기특히 여긴 조부 승지공(承旨公) 오언의(吳彦毅)가 힘써 가르쳤다. 1557년 18세에 허사렴(許士廉, 퇴계의 처남)의 딸과 혼인하였다.
1561년(명종 16) 생원시에 합격하고 5년 뒤인 1566년(명종 21)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성균관 학유(學諭)가 되고, 이어 학록(學錄)과 학정(學正)에 승진되었다. 1572년(선조 5) 호송관으로 동래에서 일본 사신을 호송했으며, 1576년(선조 9) 박사(博士) 그 이듬해 전적과 호조좌랑겸 춘추관기사관을 거쳐 겨울에 명천 현감(明川縣監)이 되었다.
1580년(선조 13) 직강(直講)이 되고, 가을에는 어명을 받아 황해도에서 말의 수를 조사하는 일을 하였다. 다음해 정선 군수(旌善郡守), 2년 뒤에는 충추목사겸 춘추관 편수관을 역임하였다. 당시 목사로 재직하면서 명쾌한 판결을 내리니 아전이 두려워하였으며 백성이 은혜롭게 여겨 도내의 모든 송사가 그에게 돌아왔다고 한다.
1585년(선조 18) 겨울 오래도록 끌어온 결단하기 어려운 송사에 대해 판결을 내렸으나, 그 일로 관찰사에게 미움을 사 파직을 당하자 의령과 함안으로 퇴거하였다.
1588년(선조 21) 다시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에 오른 뒤 재상경차관으로 평안도를 순수했고, 겨울에는 사재 감정이 되었다. 이듬해 광주 목사(光州牧使)가 되었으나 병으로 인해 곧 의령으로 돌아갔다.
남명과 퇴계를 스승으로 두다.
조부의 가르침을 받다가 19세에 남명 조식(曺植)을 찾아가 학문을 배웠다. 또한 퇴계 이황(李滉)과 친분이 두터웠던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25세 때에는 퇴계의 문하에 들어가 학업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문과에 급제하면서 벼슬에 몸이 묶여버린 그는 스승을 자주 방문하지 못하게 되었다. 죽유는 조식·이황의 학문적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러나 김종직·김성일 가문과도 인척 관계를 맺고 또 유성룡·정구 등 당대의 큰 인물들과도 넓은 교유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학문은 영남사림의 정맥을 이어받았다고 볼 수 있다.
말년에 영천(榮川, 영주)으로 퇴거한 그는『주역(周易)』과 『주자대전(朱子大全)』을 탐독하였으며, 특히 주자를 존경하여「주자감흥시(朱子感興詩)」를 직접 쓰기도 하고, 주자서 가운데 애군우국(愛君憂國)의 뜻이 담긴 소차(疏箚)를 뽑아 『주자문록』3책을 완성하였다.
그의 주자에 대한 존경은 날이 갈수록 깊어져서 76세에는 호를 ‘죽유(竹牖)’라 지었는데, 이는 주자의 ‘죽유향양개명(竹牖向陽開明)’의 말에서 취한 것으로 ‘어둠이 가고 밝음이 오는 것을 기뻐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하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으로 부근 여러 고을이 연달아 무너졌다. 그는 의령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낙동강 부근에서 여러차례 적을 무찔렀으나 관찰사(觀察使) 김수(金睟)와 불화하여, 도둑의 누명을 입고 지리산에 피해있다가 초유사(初諭使) 김성일(金誠一)의 장계(狀啓)로 무죄함이 밝혀진 곽재우(郭再祐) 장군이 어느 날 죽유를 찾아왔다.
죽유는 곽 장군의 거의(擧義)를 기려 격려하고, 함께 일하기로 뜻을 같이했다, 죽유는 가산(家産)을 기울여 군수물자며, 전마(戰馬)와 그리고 부리던 종 가운데서 건장하고 날랜 7·8명을 냈으며, 또 마을사람을 권하여 날랜 장정을 모아 곽 장군을 장수에 추대하고, 모병(募兵)과 군량 조달을 죽유가 맡기로 했다.
이 때 김성일은 초유사(初諭使)로 의령에 와서 죽유로 하여금 소모관(召募官)을 삼았다. 죽유는 수 천 명의 군사를 모집하여 영산(靈山: 지금 창녕 땅) 지경의 아래 위 여울목을 지켜, 영산·창녕(昌寧)· 현풍(玄風)을 왕래하는 적을 막고 힘을 다해 적을 무찌르자 초유사(招諭使) 김성일이 그 공을 조정에 알려, 7월에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에 임명되었다.
그 해 10월에 김성일이 경상관찰사(慶尙觀察使)가 되어 산음(山陰) 고을에 주재했는데, 죽유는 그 막하에서 조종도(趙宗道)·창원부사(昌原府使) 장의국(張義國)· 산음현감(山陰縣監) 김낙동(金洛同) 등과 더불어 고락을 같이했다.
이듬해 4월 관찰사 김성일이 진주(晉州)성에서 숨을 거두니 죽유는 조종도·박성(朴惺)·이노(李魯) 등과 함께 염습하여 장사했다.
9월에 왕이 환도(還都)하고, 죽유는 상주목사(尙州牧使)에 부임했으나 얼마 아니하여 병으로 물러와 영천(榮川)의 초곡(草谷)에 있었으니, 그 가족이 거기에 피란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그가 난리에서 체험한 바를 정리하여 『용사난리록(龍蛇亂離錄)』을 지었다 하나 전하지 않는다.
이듬해 합천 군수(陜川郡守)로 나가게 되었는데, 당시 합천군은 원수(元帥)를 비롯하여 많은 병사들이 머물면서 소란을 일으켜 피해가 발생하고 있었다. 그는 그러한 상황을 잘 무마하여 고을을 안정시켰고, 이에 순찰사 서성(徐渻)이 그의 공을 기록한 계를 2~3번 올려 승진시키라는 명을 받았다.
1597년(선조 30) 가을 정유재란이 발발하였다. 이 일로 대부분의 병사들은 모두 달아나기에 바빴으나, 오운은 군을 떠나지 않고 병사와 장수를 모아 적군의 목을 베니 그 수가 매우 많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도원수 권율(權慄)이 큰 상을 내리라는 장계를 올렸고, 그 결과 통정대부가 더해졌다.
이듬해 병으로 사직한 그는 그해 겨울 명나라 장수 진제독(陳提督)의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호남 지방에 머물게 되었다. 이어 첨지중추부사와 판결사를 역임한 그는 1599년(선조 32) 가을 선영은 개장하는 일로 영천 초곡으로 돌아왔다.
영천(榮川)에서 자연을 벗하며 저술 활동에 전념하다.
1600년(선조 33) 영천(榮川) 초곡에 있으면서 김늑(金玏), 배응경(裵應褧) 등과 더불어 퇴계년보(退溪年譜)를 교정했으며 이산서원에서 『소고문집(嘯皐文集)』을 교정했다.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상을 당하여 조정에 올라가서 오위장에 배명되었으나 이듬해 사직하고 영천(榮川)으로 돌아왔다.
영천(榮川)으로 돌아온 오운은 구천(龜川) 강가에 집을 짓고 ‘율계(栗溪)’라는 호를 썼다. 7,8년을 거기 숨어 세상 생각을 잊고 글을 읽으며 벗과 어울려 산천에 거닐었으니 함께 한 이들이 대개 김늑(金玏)·권두문(權斗文)·박록(朴漉)·권춘란(權春蘭)·금응훈(琴應薰) 등 고장의 명류들이었다. 그는 좌우에 도서를 두어 독서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주역 및 주자서를 매우 좋아하였다고 한다. 또한 손수 상소문과 차자(箚子)를 쓰면서 먹고 자는 일을 잊어버릴 정도였으나 피곤하다 여기지 않았으며, 동국의 여러 사서를 모아 7권의 책을 완성하였으니 그것이 바로『동사찬요』이다.
유생들은 그 책을 서로 다투어 보면서 기뻐하였고,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도 크게 감탄하면서 ‘사가(史家)의 뜻을 얻었다.’ 고 하였다 한다. 또한 임금께 드릴만하다고 하며 1권을 올리니, 선조는 ‘유림에게 모범이 된다.’ 라는 하교를 내리기도 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봄 선조의 장례에 참여하였으며, 그 해 7월 경주 부윤(慶州府尹)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사직하였다. 1616년(광해군 8) 공조참의에 제수된 그가 병든 몸을 이끌고 소를 올리니 임금을 사랑하고 국가를 걱정하는 말이 수백 자에 이르렀다.
그 내용인즉 “기강을 진작하고 군정을 엄하게 하며 백성의 힘을 펼치고 궁금을 엄히 하소서. 또한 사사로운데 치우치지 말며 간언을 받아들이소서.” 라는 것이었다. 그의 우국충정에 감동한 광해군도 “소를 살펴보니 나라를 위하는 정성이 갸륵하다. 마땅히 유념하여 의논하여 처리하겠다.” 고 답하고는 승정원에 전하기를 “이 상소 가운데 거행할 만한 일을 뽑아서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그 해 8월 청송 부사(靑松府使)에 제수되자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감격하여 어명에 따라 부임하였다. 하지만 부임 후 평소 앓고 있던 위병이 심해진 까닭에 이듬해 2월 집으로 돌아왔다.
병이 더욱 심해진 오운은 돌아온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1617년(광해군 9) 3월 3일 결국 향년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 소식을 들은 광해군은 예조좌랑(禮曹佐郞)을 보내어 사제(賜祭)하였다고 한다. 그해 6월 3일 영천군(榮川郡) 남쪽 첩석리(疊石里) 에 장사지냈으며 사후 병조참판(兵曹參判) 에 추증되었다.
오운은 3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오여은(吳汝檼)은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이 되었고, 2남 오여벌(吳汝橃)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지냈다.
3남 오여영(吳汝煐)은 통덕랑(通德郞)에 올랐으며, 딸은 군수 조형도(趙亨道)에게 출가하였다.
그의 2남과 3남이 각각 김성일과 김종직(金宗直)의 후손을 아내로 맞이하면서 영남사림의 현달한 가문들과 인척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의 첫째 부인은 김해 허씨로 생원(生員) 허사렴의 딸이며 진사 허찬(許瓚, 퇴계의 장인)의 손녀이다.
그녀는 어질고 식견과 사려가 깊었으며 언행은 사군자와 같았다고 한다. 오운이 죽은 지 3년 만에 세상을 떠났으며 남편의 묘에 부장되었다. 저서는 대개 난리에 없어지고 『율계난고(栗溪亂稿)』 2책이 전한다. 조형도(趙亨道)가 행장을, 김응조(金應祖)가 갈명을 지었다. 영주의 산천서원(山泉書院), 한천서원(寒泉書院), 남계(南溪) 세덕사(世德祠)에 제향되었다.
『동사찬요』를 저술하다.
『동사찬요』가 처음 간행된 것은 1606년(선조 39)이었다. 당시에는 7권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이후 개찬되어 1614년(광해군 6) 총 8권으로 간행·반포되었다. 이 책은 오운이 말년에 영천에 내려가 은거생활을 할 때 지은 것으로 단군조선부터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우리나라 역사를 담고 있다.
그는『동국통감(東國通鑑)』·『동국사략(東國史略)』·『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고려사(高麗史)』등의 역사서를 비롯하여 『천운절통(天運紹統)』·『동문선(東門選)』·『퇴계문집(退溪文集』·『남명문집(南冥文集)』·『죽계지(竹溪志)』·『동국명신행적(東國名臣行跡)』등 총 21종의 책을 참고하여『동사찬요』를 저술하였다 하니 실로 그 양이 방대하다고 하겠다.
『동사찬요』는 옛것을 통해 현재를 이해하려는 현재적 시각을 유지하는 한편 권선징악의 교훈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의 구성을 살펴보면, 권1과 권2가 각각 상·중·하로 나누어져 있으므로 실제로는 8권이 아닌 12권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권1의 상에는 단군조선(檀君朝鮮)·기자조선(箕子朝鮮)·위만조선(衛滿朝鮮)·사군이부(四郡二府)·삼한삼국기(三韓三國紀)의 순으로 서술되고 있으며, 중은 신라기(新羅紀)와 고려기(高麗紀) 하는 고려기를 담고 있다.
권2의 상 역시 고려기에 관한 내용이며, 중은 신라·고구려·백제·고려의 지리지(地理志)에 관한 것이다. 권2의 하부터 열전(列傳)이 시작되는데, 이는 권7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각각 삼국명신(三國名臣)·신라충의전(新羅忠義傳)·여제의열(麗濟義烈)·고려명신(高麗名臣)의 순으로 적혀 있다. 마지막 권8은 부록으로서 반적(叛賊)과 권흉(權凶)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렇게 본기(本紀)·지(志)·열전(列傳)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형식상 기전체(紀傳體)의 특징을 지녔다고 볼 수 있으며, 내용적으로 특기할 만한 것은 삼국 중 신라를 주류로 서술하고자 한 점이다. 예컨대 지리지의 순서가 신라에서 시작하고 있으며, 삼국명신전에 실린 인물들 역시 신라인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죽유집』을 남기다.
오운의 문집인『죽유집』은 모두 6권 3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말년에 영천에서 퇴거 생활을 하는 동안 다양한 벗들과 교유하며 많은 양의 시를 지었다는 이야기를 증명이라도 하듯, 그의 문집에는 다수의 시가 실려 있다. 난리 통에 많은 부분이 소실되었다는 행장의 기록을 고려한다면 본래의 시작(詩作) 편수는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 전해지는 오운의 시는 권1과 권2에 걸쳐 소개되고 있으며, 그 수는 약 200여 편에 이른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문장력을 자랑했던 오운의 작품세계를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좋은 자료라 생각된다.
권3에는 소(疏) 2편·서(序) 3편·기(記) 2편·발(跋) 12편을 비롯하여 오운이 교분을 맺었던 이들과 주고받은 편지 25편이 실려 있다. 권4는 행적(行蹟) 3편, 이황의 부인 것을 비롯한 묘갈명(墓碣銘) 2편, 아버지의 묘지(墓誌) 1편, 잡저(雜著) 7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5와 권6은 부록인데, 권5에는 오운의 세계도와 연보 및 사림제문(士林祭文) 8편과 만사(輓詞) 40편이 있고, 권6에는 가장과 행장 및 묘갈명, 서원상향문 등이 실려 있다.
이밖에도 1587년(선조 20) 고향 함안에 퇴거해 있는 동안 정구와 함께 『함주지』를 편찬하였는데, 이 책은 왜란을 겪은 후 1600년(선조 33)에 등사되어 전란으로 피폐화된 함안군을 복구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한다. 또한 말년에 영천으로 퇴거한 뒤에는 주자서 가운데 애군우국(愛君憂國)의 뜻이 담긴 소차(疏箚)를 뽑아 『주자문록』3책을 완성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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