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거사(玉泉居士) 식암(息庵) 황섬(黃暹)
- 김 태 환 / 영주향토사연구소 소장.
풍기의 명문 창원 황씨다
식암(息庵) 황섬(黃暹, 1544 ~ 1616)은 창원 황씨로 자는 경명(景明)이고 호는 식암(息庵)으로 시호는 정익(貞翼)이다. 1544년(중종 39) 10월 30일 한양 이현동(지금의 동대문 근처)에 있는 집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려시대에 대상(大相)을 지낸 황석주(黃石柱)의 후손이며 처음에는 창원에 살고 있었다. 증조부인 황희성(黃希聖)때 부터 이곳 풍기(豐基)로 옮겨와 살기 시작하였다.
조부는 우찬성겸 이조판서(右贊成兼吏曹判書)를 지낸 황사우(黃士祐)이고, 아버지는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를 역임한 황응규(黃應奎)로 당대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어머니는 여주 이씨(驪州李氏) 의빈도사(儀賓都事) 이수려(李壽旅)의 딸로 증조부는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계손(李繼孫)이다. 소북파의 영수로서 영의정을 지낸 유영경(柳永慶)은 그의 매부이다
약포(藥圃) 정탁에게 학문을 수학하다.
식암은 어려서부터 재치와 사고력이 뛰어났으며 장성하여서는 학문에 힘썼다. 8세가 되던 해인 1651년(명종 6)에 이황(李滉)의 제자로서 이웃 마을에 살고 있던 약포(藥圃) 정탁을 찾아가 그에게서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슬기롭고 총명하였으며 나이에 비해 깨우침이 빨랐다.
정탁의 사상과 학문은 식암에게 계승되었다. 그가 임진왜란 때 군사 문제와 관련한 상소를 자주 올린 것 역시 병법의 중요성을 역설했던 스승 정탁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또한 신도비문에 적힌 “경전을 통해 학문을 닦았으며, 궁격(窮格)을 근본으로 삼았다.”는 기록을 통해 성리학 본연의 수양론과 인식론을 중시하였던 그의 일면을 살펴 볼 수 있다.
사헌부 대사헌 남태저(南泰著)는 신도비에서 “임금을 존중하고 백성을 어루만져 40여 년이나 조정에 나아가 전곡갑병(錢穀甲兵)과 형상(刑賞) 및 교화(敎化)에 많은 공을 세웠으며, 특히 임진왜란 이후 유학을 부흥하는데 기여한 바가 크며 은퇴하여서는 도서(圖書) 연구에 침잠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언관으로 활동하다.
식암은 1564년(명종 19) 성균관 유생이 되었고, 1570년(선조 3) 문과에 급제한 뒤 한성부 참군과 해운 판관이 되었다.
1573년(선조 6) 황해도사로 나갔다가 봉상시 주부(奉嘗寺主簿)가 되었으며, 이어 호조 좌랑·예조 좌랑·형조 좌랑 및 정랑·성균관사유겸춘추기주관(成均館師儒兼春秋記注官) 등을 역임하였다. 1577년(선조 10)에는 서천 군수(舒川郡守)로 나갔는데 고을 사람들이 그의 선정을 기리고자 송덕비를 세워주었다.
이후 1581년(선조 14)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어 강연(講筵)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지금 서울 각 관청의 노비와 조세는 형조에서 수납하여 각 관청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형조가 안된다하면 각 관청으로 가는 물건들이 막혀버립니다. 따라서 각 읍으로 하여금 도회관(都會官)에게 보내도록 하고 감사(監司)의 관원이 서울에서 받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라는 계를 올려 조세 배분의 폐단을 지적하여 이를 성사시켰다.
이듬해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과 사헌부 헌납(司憲府獻納)을 거쳐, 1583년(선조 16) 사헌부 장령이 되어 신덕왕후(神德王后) 복위 문제와 관련한 계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어 사간원 사간이 되어서는 이이(李珥)를 논핵한 죄로 유배를 가게 된 허봉(許葑)·송응개(宋應漑)·박근원(朴謹元) 및 이와 연루되어 좌천된 김응남(金應南)의 죄를 사해줄 것을 청하였다.
임진왜란을 헤쳐나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임금을 모시게 된 식암은 평안도 모운사로 뽑혀 군량 수운에 큰 공을 세웠다. 또한 때가 때이니 만큼 그는 군사 문제와 관련된 상소를 왕에게 자주 올렸다.
그것은 모군(募軍)과 식량공급에 관한 정책을 건의하는 내용들이었으며, 그 유명한「팔조소(八條疏)」도 이때에 올린 것이다. 그 이듬해에도 소를 올리니 왜란 당시 군공이 있음에도 합당한 대가를 받지 못한 이들에게 수령으로 추천하거나 후한 상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596(선조 29)년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된 그는 병조와 호조 참의를 거쳐 안동 부사를 거쳐 이조와 호조 및 예조와 병조의 참의를 지냈으며, 1602년(선조 35) 주역교정청당상(周易校正廳堂上)에 뽑혔다. 이후 홍문관 부제학·사간원 대사간·도승지·사헌부 대사헌 등 주요직에 연이어 임명되었다.
그러나 1608년(광해군 즉위) 광해군 즉위 후 자신의 자형인 유영경이 죽으면서 황섬은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때 이이첨이 연달아 큰 송사를 일으켜 영창대군의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식암은 지난 조정의 옛 신하로서 질책하는 기록에 이름이 들어 있어 말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우울해서 스스로 상심하여 ‘부운탄(浮雲歎)’ 한 절구를 지어 뜻을 부치니 거기에 “밝은 해의 광명은 원래 스스로 있으나 뜬구름은 모였다가 사라지니 매우 덧없구나.” 하였다.
말년에 학문과 후진양성에서 온 힘을 쏟았던 그는 ‘양몽재(養蒙齋)’를 지어 자제들을 가르쳤으며, ‘옥천정사(玉泉精舍)’를 짓고 스스로를 ‘옥천거사(玉泉居士)’라 칭하며 자연속에서 생을 즐겼다.
식암은 관직에서 물러난 지 8년 만인 1616년(광해군 8) 4월 19일 향년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묘소는 풍기군의 묵동(墨洞)에 있다.
그의 부인은 풍성군 이전의 딸로서 부녀자의 도리를 행하는데 흠이 없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식암 보다 31년이나 앞서 죽고 말았다.
식암은 3남 4녀를 두었다. 장남은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 좌랑이 되었고, 2남은 해주 판관이 되었으며, 3남은 생원이었다. 장녀는 왕자의 사부 송효작에게, 2녀는 금부도사 김중겸에게, 3녀는 정랑 심관에게, 4녀는 윤상원에게 시집을 보냈다.
1623년(인조 즉위년) 호종의 공이 참작되어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1705년(숙종 30) 유생들에 의해 풍기 우곡서원(愚谷書院)에 배향되었다.
『식암집(息庵集)』
『식암집(息庵集)』은 1709년(숙종 35) 2월 황섬의 후학인 신경준(申景濬)에 의해 간행되었는데, 모두 5권 3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권1과 2에는 각각 시 200여 수가 수록되어 있어 상당히 많은 양의 시가 전해진다. 권3은 비답(批答) 1편과 소 5편이 실려 있는데, 「논팔조(論八條)」가 유명하다. 권4에는 서 10편과「식암명의(息庵名義)」를 비롯한 잡저 10편·서 1편·기 1편, 이황의 향약과 창원황씨 족보에 쓴 발 2편·명찬 3편·전문(箋文) 1편·책문(冊文) 1편·축문제문(祝文祭文) 20편·행장 등이 있다. 권5는 부록으로 행장·묘지·제문·우곡서원 봉안문·상향축문·만사·신도비명 등이 실려 있으며 책의 끝부분에 식암선생 연보가 있다.
식암의 시는 특히 임진왜란을 겪는 동안 전쟁의 체험을 반영한 작품이 많다. 「임진사월회일기사(壬辰四月晦日記事)」는 7언체의 장편시로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의 참담한 심경을 그린 것이다. 「과연안유감(過延安有感)」은 임진왜란 다음해에 지은 것으로 연안성(延安城)에서의 승리를 찬양한 시이다.
이밖에 「을사관동수재(乙巳關東水災)」는 1605년(선조 38) 강원도 지방에서 폭우로 인하여 큰 수재가 발생한 데 대한 우민(憂悶)을 나타낸 것이다. 「아중가비사어호(阿中家碑死於虎)」는 그의 집 노복이 호랑이에 물려 죽는 것을 슬퍼한 내용이다. 「비파녀(琵琶女)」 등 서정과 낭만을 노래한 것도 있으나 그의 시 대부분은 시대적인 상황을 반영한 어두운 색조를 띠고 있다.
서의「예조답대마도주평조신서(禮曹答對馬島主平調信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1591년 예조에서 대마도주와 교환한 서신이며, 「여소수서원원장분의도감서(與紹修書院院長奮義都監書)」는 정유재란이 끝난 뒤 의병에 대한 포상문제에 관하여 언급한 내용이다.
소의「차사은사장부경걸근친소(差謝恩使將赴京乞覲親疏)」·「해주주가시소(海洲駐駕時疏)」·「논팔조소(論八條疏)」·「근친후환경상소(覲親後還京上疏)」·「논군무소(論軍務疏)」 등은 임진왜란을 치르는 동안 모운사와 병조 참의 등으로 있으면서 국방과 시사문제 등에 관하여 올린 상소문으로 그의 활약상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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