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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1986년 8월 9일 토요일 국제신문의
<한음록>이라는 고 이병주 칼럼에서 발췌,정리합니다.
조선 명종 때 동인의 괴수 김효원과 서인의 괴수 심의겸은 우리의 상상으로는
이 두사람은 같이 하늘 아래 머리를 둘 수 없는 앙숙이며 어느 한편이 앉았으면
분연 그 자리를 피해 앉을 원수지간이었지만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계급적인 이해대립도 아니고 이데올로기에 있어서의 갈등도 아니고
그저 개인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대립이 차츰 커져 나라의 대사를 병들게 하는
폐단이 되어 버린 사건에서 화합의 의미를 찾으려는 글이라 생각됩니다.
긴 글이고 한자가 많은 관계로 제가 대충 요약합니다.
김효원-조식의 제자
중년에는 이황의 문하에서 배움
소시엔 경망하고 날카로와 일을 꾸미길 좋아하고 논의가 과격함
이 후 이조 '전랑' 이란 인사책임을 맡아 공명정대하게 인사 처리
(역량있는 후진 양성의 앞길을 터서 신진 사류의 존경 받음)
심의겸과 맞서 당의 괴수로 지목되어 외직으로 밀려남
49세에 죽음.
*집은 낙산 아래 (서울의 동쪽)-여기서 '동인'이 유래
심의겸-청백한 인격
세도가 영의정 윤형원의 집에서 김효원을 발견 소인이라 칭함
장래 유망한 청년을 아끼는 마음이 컸음
(신진들 분격하여 김효원을 옹호하는 세력으로 결집)
개성유수로 있을 당시 동서의 분쟁에 말리지 않도록 조심과 신중을 다함
집은 돈의문 밖(서울의 서쪽)
사건-심의겸의 친척을 왕실의 외척이라 김효원이 등용 거절
외직에 밀려난 김효원의 태도-깊이 반성하고 맡은 책임 다함
조정의 득실엔 언급하지 않았음
김효원의 한탄의 말-
상상이나 했던 일인가? 나는 죽어도 그 책임을 벗어 날 수 없다.
전관으로 있을 때 오직 나라를 생각하고 한 짓이 분규를 일으켰다.
심의겸이 죽었을 때의 태도-
"아아 친구를 잃었구나"하며 이틀동안 식음을 전폐함.
둘의 교의-개성 유수로 있을 당시
김효원의 아버지가 영유현령의 자리에 있었으므로
개성을 지날 일이 잦아, 심의겸의 집에 자주 드나들 때마다 극진히 대접.
두 사람의 교의는 서로 위하고 존경하는 사이였음.
*이병주의 끝맺는 말*
인생에서 가장 바람직한 것은 화(和)이다.
화해 화합 화평. 우리에게 바랄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 아닌가.
동시대인이란 사실 이것이야말로 기막힌 인연이다.
출처 : 언제나http://blog.chosun.com/eggbadung/4437601
출처 : 풍류하회
글쓴이 : 류세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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