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도 아들도 없는 것이 중과 비슷하고
정 우 락 남명연구원 상임연구위원/영산대 교수
지금 우리는 재난의 시대를 살고 있다. 어떤 사람은 자동차를 타고 다리를 건너다 그 다리가 무너져 한강에 떨어져죽고, 어떤 사람은 애인에게 줄 선물을 사기 위하여 백화점에 갔다가 그 백화점이 무너져 건물더미에 깔려 죽고, 어떤 사람은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학교에 등교하다가 지하에서 갑자기 가스가 폭발하여 화염에 휩싸여 죽었다. 죽고, 죽고 또 죽었다.
그야말로 삼경(三更)에 만난 액(厄)이며, 챈 발에 곱챈 격이며, 맑은 하늘의 날벼락이다. 연일 일간신문의 1면에 등장하는 대형사고들, 이제 우리는 거기에도 감각이 무뎌져서 웬만한 사고에는 놀라지도 않는다. 내 옆을 지나가는 저 미친 자동차가 언제 나를 덮칠지 모르고, 누가 나의 카드를 빼앗기 위하여 칼을 들이댈지 모르며, 내가 행복하게 살고 있는 이 건물이 또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닥쳐오는 재난에는 옥석(玉石)이 없다. 옥과 돌은 함께 타서 착하게 산 님이나 나쁘게 산 넘이나 모두 그렇게 죽어가고 있다. 문명의 그늘진 곳에서 우리는 이렇게 음울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2002년 4월 15일, 김해시 신어산 부근 돗대산(해발 237m)에서 중국 민항기 추락, 탑승자 166명 가운데 119명 사망, 9명 실종, 39명 생존! 중국 국제항공공사 소속 CCA-129편 보잉 767 항공기가 돗대산에 떨어지는 엄청난 재난사고였다. 사고 비행기는 15일 오전 8시 40분 중국 베이징을 떠나 오전 11시 35분쯤 김해공항에 도착할 예정이었으나 김해공항의 기상악화로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하다가 다시 김해공항으로 돌아와 착륙을 시도, 오전 11시 45분쯤 추락했다. 이날 공군은 바람방향이 바다쪽에서 육지쪽으로 불었기 때문에 사고 비행기가 착륙지점을 잡기 위해 활주로 서쪽을 이용, 신어산으로 선회하다가 돗대산 정상에 부딪혀 사고가 난 것으로 추정했다.
신어산은 남명의 산해정이 있는 곳이며, 돗대산은 조차산(曺次山) 혹은 차산등(次山嶝)이라고도 하는데 남명이 아들 차산을 묻었던 곳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 김해부읍지(金海府邑誌)에 '조차산은 부의 동쪽 20리에 있다. 차산은 조남명선생의 아들 이름인데 이 산에 묻었다. 이로 인하여 이름을 삼아 후세에 전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저간의 사정을 알 수 있다. 이 때 남명의 나이 44세였고 차산은 9세였다.
차산의 죽음과 관련한 문헌설화부터 살펴보자. 남명집 [편년]에는 이렇게 적어두었다. 선생이 44세 되던 해 6월에 아들 차산을 잃었다. 차산은 어려서 뛰어나게 총명하였다. 일찍이 기르는 개가 먹이를 다투어 으르렁대는 것을 보고 탄식하면서, "옛날 진씨(陳氏)의 개는 백 마리가 한 울안에 살았는데 우리 집 개는 그렇지 못하니 실로 마음에 부끄럽구나." 라고 하였다. 또한 산해정에서 글을 읽고 있는데, 하루는 초헌을 타고 길을 지나가는 행차가 있어 매우 거창하였다. 함께 배우던 아이들은 모두 다투어 구경하고 부러워했지만 차산은 홀로 태연히 글을 읽으며 조용히 말했다. "장부의 할 일이 어찌 거기에 있겠는가?" 선생이 기특하게 여겨 사랑하였으나 불행히도 일찍 죽었다.
이 이야기는 전아한 유학자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산이 지녔음을 보여준다. 즉 자기집 개들이 먹이를 다투는 것을 보면서 부끄러워 했다든가, 출세하는 것에 자신의 뜻이 있지 않다는 것을 명확히 한 점 등이 그것이다.
특히 남명이 이같은 아들을 사랑하였다는 것을 적고 있다.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은 남명에게 실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 아들이었기에 그 충격은 더욱 컸을 것이다. 남명 역시 아홉 살 때 병으로 위독한 적이 있었으니, 아홉 살이 남명부자에게는 커다란 고비였다. 남명은 그 고비를 슬기롭게 극복하였으나, 차산은 그렇지 못했다. 차산이 죽자 남명은 다음과 같은 슬픈 시를 짓기도 하고, 뒷날 조카를 매개로 죽은 아들을 그리워하기도 했다.
(가) 집도 없고 아들도 없는 게 중과 비슷하고, 뿌리도 꼭지도 없는 이내 몸 구름 같도다.
한 평생 보내자니 어쩔 수 없는 일, 여생을 돌아보니 머리가 흰 눈처럼 어지럽도다.
靡室靡兒僧似我,
無根無我如雲.
送了一生無可奈,
餘年回首雪紛紛.
(나) 수많은 근심에도 눈은 멀지 않았지만, 만사엔 조금도 관심 없다네.
생질이 천리 밖으로 떠난 지, 열두 성상의 세월이 흘렀구나.
궂은 장마에 석달 동안이나 어둡고, 외로운 꿈은 오경에 쓸쓸하구나.
방장산(方丈山)을 혹 저바리지는 않았는가?
소식 전하기는 다시 어렵겠구나.
百憂明未喪
萬事寸無關侄一千里 星霜十二還窮三月晦
孤夢五更寒方丈如毋負
音書亦復難
(가)는 아들을 잃고 쓴 [상자(喪子)]이다. 여기서 남명은 아들이 죽고 난 다음의 슬픈 심경을 중과 구름에 견주고 있다. 집도 아들도 없는 것이 중과 비슷하다고 했다. 김해에서 처가살이를 하였기 때문이었고, 또 차산이 죽었기 때문이었다. 외로운 삶에 대한 단면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구름을 떠올리며 더욱 절망한다. 남명은 장자(莊子)처럼 '한 조각 구름이 뭉게 뭉게 일어나는 것은 나는 것(生)이요, 한 구름이 멸하는 것은 곧 죽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없었다. 아들의 죽음은 그에게 엄청난 절망감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절망 속에서 한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데 있었다. 그 고뇌에 머리카락이 흰 눈처럼 어지럽다고 하면서 남아 있는 암흑같은 생애를 돌아본다. 우리는 여기서 의식을 칼날같이 곧추 세운 대사상가로서의 남명이 아니라, 아들의 죽음 앞에 슬퍼하는 자상한 아버지로서의 남명을 만나게 된다.
(나)는 조카 이준민(李俊民, 1524-1590)에게 준 [기자수질(寄子修侄)]이다. 이준민은 남명의 자형인 이공량의 아들인데 자수(子修)는 그의 자다. 이 작품의 수련에서 보듯이 자하(子夏)가 아들을 잃고 너무 슬피 울어 눈이 멀었다는 고사를 떠올리며, 아들을 잃고 난 다음의 여러 가지 고난을 말하고 있다. 이는 바로 이준민을 통해 죽은 차산을 생각하고 있음에 다름 아니다. 생질은 천리밖에 있으나 소식을 전할 수 있지만 죽은 차산에겐 어떤 방법으로도 그 안부를 물을 수 없다. 남명은 이 때문에 '생질이 천리 밖으로 떠난 지, 열두 성상의 세월이 흘렀구나'라고 노래했을 것이다. 남명은 조카 이준민을 특별히 사랑했다. 이준민은 원래 진주에서 태어났지만 문과급제 후 벼슬살이를 위해 서울로 이사한다. 이 때문에 이준민은 서울과 진주사이를 오가며 남명에게 서울 소식을 전하기도 한다. 성운의 편지를 전하거나([與成大谷書]), 김우옹의 벼슬살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 것([與吳御史書])에서 이러한 사정을 알 수 있다. 남명은 또한 이준민에게 옛 병풍에 글을 써주기도 하고([題古屛贈子修姪), 두 번 과거에 급제 하여 거듭 승지가 된 것을 칭찬하기도 하였으며([永慕堂記]), 인편이 어어지지 않아 소식 전할 수 없는 것을 몹씨 안타까와([與吳子强書]) 하기도 했다. 특히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지나친 효행으로 병이나자 생질의 병을 걱정([又答子强書]) 하였다. '자수(子修)의 증세가 오래도록 낫지 않고 있다는데, 거리가 워낙 멀다보니 더한지 덜한지 계속 들을 수 없어, 단지 날마다 근심 속에 탄식만 할 따름입니다.'라면서 오건(吳健, 1521-1574)에게 토로한 것에서 저간의 사정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지리산 유람길에서 진주의 말고개(馬峴)에서 우연히 아버지를 뵈러 가는 이준민을 만나기도 하고([遊頭流錄]), 이준민의 사위 조원(趙瑗, 1544-?)이 장원을 하자 칼자루에 시를 써 주기도 하는([書劒柄贈趙壯元瑗]) 등 생질과 외숙의 따뜻한 정이 넘치고 있음을 우리는 본다.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슬픔은 예나 지금이 다르지 않다. 자식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며 부모는 그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고 했다.
김광균은 문학(1946. 4)이라는 잡지에 [은수저]를 발표하며, 저녁 밥상에 아이는 없고 아이가 앉던 방석에 한 쌍의 은수저만 있다고 하면서 뜨거운 아버지의 정을 토로했다. 다음은 김광균의 [은수저] 전문이다.
산이 저문다.
노을이 잠긴다.
저녁 밥상에 애기가 없다.
애기 앉던 방석에 한 쌍의 은수저 은수저 끝에 눈물이 고인다.
한 밤중에 바람이 분다.
바람 속에서 애기가 웃는다.
애기는 방 속을 들여다 본다.
들 창을 열었다 다시 닫는다.
먼 들길을 애기가 간다.
맨발 벗은 애기가 울면서 간다.
불러도 대답이 없다.
그림자마저 아른거린다.
▲ 김 광 균 경기 개성 출생. 송도상고 졸업.
《중앙일보》에 시 《가는 누님》(1926)을 발표한 뒤
《동아일보》에 시 《병》(1929) 《야경차(夜警車)》(1930) 등을 발표했으며,
《시인부락》(1936) 동인, 《자오선(子午線)》(1937) 동인으로 활동했다.
T.E.흄, E.파운드, T.S.엘리엇 등 영국 주지주의 시운동을 도입 소개한 김기림(金起林)의 이론과 시작에 영향을 받고 “시는 회화(繪畵)다”라는 모더니즘의 시론을 실천했다.
도시적 소재와 공감각적(共感覺的) 이미지를 즐겨 사용했으며,
이미지의 공간적인 조형(造形)을 시도한 점 등에서 크게 주목받았다.
시집으로 《와사등(瓦斯燈)》(1939) 《기항지(寄港地)》(1947)가 있다.
6·25전쟁 후에는 실업계에 투신, 문단과는 거의 인연을 끊었으며, 제2시집 이후 10여 년 만에 문단 고별 시집 《황혼가(黃昏歌)》(1969)를 출간했다.
자식 잃은 비통한 심경을 간결한 언어로 표현하고 있어 더욱 가슴이 저리다. 은수저는 장수, 행복, 건강, 안녕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때문에 자식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자식은 없고 은수저만 놓여있으니 은수저와 자식의 죽음은 팽팽한 반어적 의미를 조성하기에 충분하다. 자식의 부재와 은수저에 고인 눈물, 죽은 자식에 대한 환상, 안타까운 부정(父情)으로 이 시의 시상은 전개되고 있다. 화자는 저녁 밥상에 놓인 주인없는 은수저를 통해 아이의 부재를 확인한다. '저무는 산'과 '잠기는 노을'을 통해 소멸 내지 하강의 이미지를 제시하며, 아이의 은수저를 통해 부정(父情)을 강하게 확대시키고 있다. 이어서 한 밤중에 창으로 불어드는 바람을 통해 아이의 부드러운 웃음과 방긋 웃는 얼굴을 감지하는 환상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먼 들길'로 표현되는 죽음의 세계로 아이는 '맨발'로 울면서 가고, 아버지가 그 아이를 불러보지만 아이는 대답이 없다. 아이는 이제 이승에서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화자는 깊은 절망 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김광균의 이 시에 앞서 정지용 역시 1930년 조선지광 89호에 [유리창1]을 발표하여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애상적 정조(情調)를 드러내고 있다. 남명의 [상자(喪子)]나 김광균의 [은수저]보다 감정이 더욱 절제되어 있어 또 다른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유리(琉璃)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치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肺血管)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山)새처럼 날아 갔구나!
▲ 정 지 용 충북 옥천(沃川) 출생.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귀국 후 모교의 교사, 8·15광복 후 이화여자전문 교수와 경향신문사(京鄕新聞社) 편집국장을 지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순수시인이었으나, 광복 후 좌익 문학단체에 관계하다가 전향, 보도연맹(輔導聯盟)에 가입하였으며, 6·25전쟁 때 북한공산군에 끌려간 후 사망했다.
1933년 《가톨릭 청년》의 편집고문으로 있을 때, 이상(李箱)의 시를 실어 그를 시단에 등장시켰으며, 1939년 《문장(文章)》을 통해 조지훈(趙芝薰)·박두진(朴斗鎭)·박목월(朴木月)의 청록파(靑鹿派)를 등장시켰다.
섬세하고 독특한 언어를 구사하여 대상을 선명히 묘사, 한국 현대시의 신경지를 열었다.
작품으로, 시 《향수(鄕愁)》 《압천(鴨川)》 《이른봄 아침》 《바다》 등과, 시집 《정지용 시집》이 있다.
정지용의 시풍은 참신한 이미지의 추구와 절제된 시어의 선택에 있다. 이 시에서는 죽은 자식에 대한 그리움을 극도의 절제된 감정을 비정하리 만큼 차갑게 표현하고 있다. 유리창에 가까이 서서 죽은 아이를 생각하는 화자는 창 밖 어둠의 세계로 날아가 버린 어린 생명의 모습을 한 마리의 가련한 '새'로 형상화하여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고 말하고 있다.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는 어둠'은 화자의 어둡고 허망한 마음과 조응(照應)이 되고, '물먹은 별'이라는 표현은 별을 바라보는 화자의 눈에 눈물이 어려 있음을 나타낸다. 특히, 이 시에서 '외로운 황홀한 심사'와 같은 관형어의 모순 어법은 독특한 표현이다. '외로운' 심사는 자식이 죽은 정황에 비추어 볼 때 당연하거니와 '황홀한' 심사는 유리창을 닦으며 보석처럼 빛나는 별에서 죽은 아이의 영상을 볼 수 있다는 데 기인한 것이라 하겠다.
다시 남명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차산의 죽음과 관련한 구비설화도 있다. 구비설화는 앞서 제시한 문헌설화와 달리 민중의 의식을 반영하고 있어 중요하다. 민중은 이들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관심사와 그들의 삶을 말하고자 한다. 이를 염두에 두면서 차산의 이야기를 검토해보자.
남명에게는 차산(次山)이라는 도술(道術)을 잘 부리는 아들이 있었다. 이 차산의 도술은 바람과 비를 부를 뿐만 아니라 신출귀몰하여 서산대사(西山大師)도 차산의 도술을 능가하지는 못했다. 이처럼 아들이 도술에 뛰어난 것을 보고 남명은 차산이 혹시 도술을 남용하여 세상을 그르칠까 염려하여 산해정 뒷산에 굴을 파고 감금하였다. 굴에 갇힌 차산은 때에 맞춰 먹을 것을 주는데도 불구하고 굴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온갖 꾀를 다썼다. 그가 탈출하기 위하여 힘을 쓸 때마다 산이 부풀어 올랐다고 한다. 차산이 죽자 그가 묻힌 산을 그의 이름을 따서 조차산(曺次山), 혹은 차산등이라고 하며, 돗대산이라고도 한다. 이는 조차산이라는 이름이 어떻게 해서 불려지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있으니, 지명유래전설이라 하겠다.
그러나 여기에는 자식에 대한 남명의 엄격한 교육, 차산의 대단한 능력, 차산의 요절에 대한 안타까움 등이 두루 나타난다는 측면에서 중요하다. 남명의 엄격한 교육은 감금을 통해 알 수 있다. 바람과 비를 부를 뿐만 아니라 신출귀몰한 도술을 부리니 남명이 세상에 잘못 쓰일까를 걱정한 조처였다. 차산의 대단한 능력은 도술로 알 수 있다. 당대 도술로 가장 이름이 있었던 서산대사와 견주어 결코 뒤지지 않았다는 데서 알 수 있다.
그리고 차산의 요절에 대한 안타까움은 전승 민중이 산 이름과 관련한 전설을 만들어냈다는 그 자체에서 알 수 있다. 조차산 설화는 기본적으로 다음에서 제시하는 아기장수 이야기에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아기장수 이야기의 의미단락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① 옛날 어느 곳에 한 평민이 살았는데, 산의 정기를 받아서 겨드랑이에 날개가 있고 태어나자 이내 날아다니는 장사 아들을 낳았다. ② 그런데 부모는 이 아기장수가 크면 역적이 되어서 집안을 망칠 것이라고 하여 아들을 돌로 눌러 죽였다. ③ 아기장수가 죽을 때 유언으로 콩 닷섬과 팥 닷섬을 같이 묻어 달라고 하였다. ④ 얼마 후 관군이 와서 아기장수를 내놓으라고 하여, 부모가 이미 죽였다고 하면서 무덤을 가르쳐 주어서 가 보았더니, 콩은 말이 되고 팥은 군사가 되어 아기장수가 막 일어나려고 하는 것을 관군이 성공 직전에 다시 죽였다. ⑤ 그 후 아기장수를 태울 용마가 근처의 용소에서 나와 주인을 찾아 울며 헤매다가 용소에 빠져 죽었다. ⑥ 지금도 그 흔적이 있다.
아기장수는 태어나 며칠이 되지 않아 두 번 죽임을 당한다. 첫 번째 죽음은 무정한 보모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②'가 그것이다. '역적이 나면 집안이 망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③'과 같이 재기를 시도해보지만 관군에 의해 두 번째 죽음을 맞이한다. '④'가 그것이다. 관군이 아기장수를 다시 죽인 것은 역적으로부터 통치 질서를 보호하고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해서 죽은 아기장수 이야기와 관련된 흔적이 '⑥'과같이 지금도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아기장수 이야기는 '대단한 능력을 가진 아이를 낳은 부모가 나라를 어지럽힐 것을 염려하여 그 아이를 죽였는데, 이와 관련된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것은 조차산 이야기와 일치되는 부분이다. 즉 도술에 뛰어난 차산을 남명이 장차 나라를 어지럽힐 것을 염려하여 감금해 죽였는데, 그 흔적이 조차산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같이 두 이야기의 기본구조가 같다고는 하나 조차산 이야기는 아기장수 이야기와 같이 극적으로 성장할 수 없었다. 그것은 '①'에서 보듯이 부모가 평민이 아니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아기장수 이야기는 통치자와 평민이라는 상, 하의 계층적 구조로 이루어졌지만 조차산 이야기는 그렇지 못하다. 따라서 '③', '④', '⑤'가 생략될 수밖에 없었고, 용마의 이야기도 없어 '⑥'이 있기는 하나 산이 되고 말았다.
결국 아기장수의 죽음이 관군으로 상징되는 통치질서에 근원하고, 조차산의 죽음이 나라를 그르칠 것을 염려한 때문이니 이들의 죽음은 개인적인 것이라기 보다 국가적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조차산의 아버지 남명이 처사라고는 하나 양반계층에 소속되어 있으며, 차산 역시 병을 얻어 요절한 역사적 인물이니 그 이야기가 왜소해 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차산의 죽음을 아쉬워 한 민중의 뜨거운 가슴은 이 이야기를 통해 충분히 감지하게 된다. 차산은 남명과 그의 아내 남평 조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남명은 조씨 부인과 1522년에 혼인하게되는데, 당시 그의 나이 22세 부인의 나이 23세였다. 부인은 충순위(忠順衛) 조수(曺琇)의 따님이었는데, 남명은 그의 아내를 공경하여 손님처럼 대하였다 한다.
그러나 제자들의 기록에 의하면 남명은 아내 남평 조씨와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던 것 같다. 하항(河沆, 1546-?)이 '아내가 눈을 흘리고 뜻을 거스르므로, 마침내 떠나서 몇 해를 떠돌아다니다가 비로소 측실을 얻어 토동에 살았다'고 하거나,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이 '선생이 비록 아내와 사이가 좋지 못했으나 종신토록 은의(恩義)를 끊지는 않았다'는 기록을 통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남명은 조씨 부인과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게 되는데 늦게 본 외아들은 위에서 보았듯이 그가 44세 되던 해에 9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딸은 만호(萬戶) 김행(金行)에게 시집을 가서 두 딸을 낳는데, 이들은 각각 김우옹(金宇, 1540-1603)과 곽재우(郭再祐, 1552-1617)에게 시집을 간다.
남명의 아내 남평조씨 부인의 묘소는 산해정의 안산(案山)이 되는 조차산 기슭 오미등에 그의 딸의 묘와 나란히 있다. 부인은 남명보다 3년 앞서 죽게 되는데, 그 때 그녀의 나이 69세였다. 장지를 정하고 남명의 명으로 비를 세웠으나 왜란에 부숴졌다. 그 후 300여년이 흐른 뒤 조용상(曺庸相)이 김택영(金澤榮, 1850-1927)에게 '증봉정경부인남평조씨묘갈명(贈封貞敬夫人南平曺氏墓碣銘)'이라는 글을 받아 1915년에 새로 세웠다. 그러나 이 비마저 사라져버린다.
이는 조유인(曺由仁)으로부터 남평 조씨가 창녕 조씨 창평파(昌平派)에 편입되는 등 문중의 사정에 말미암은 것으로 전해진다. 김택영은 조씨 부인의 묘갈명에서 창녕 조씨와 남평 조씨는 그 본관이 다르다는 것을 밝혀 당시 논란이 되었던 남명의 동본혼인설(同本婚姻說)을 일축하는 한편, 남명이 벼슬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부인의 음덕이었다는 것도 힘주어 말했다.
남명의 산해정 시절은 산과 같이 높고 바다 같이 넓은 학문을 구축하고자 하였으나 그의 삶은 대단히 고달팠다. 그야말로 재난의 시대를 살았다. 사랑하는 외아들 차산이 여기서 죽었고, 아내와도 불화를 거듭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아내의 도움으로 산해정을 짓고 사는 이곳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집도 없고 아들도 없는 게 중과 비슷하고, 뿌리도 꼭지도 없는 이내 몸 구름 같도다.'며 슬퍼하였던 것이다. 집이 있으나 자신의 집이 아니고 아들마저 죽었으니, 그의 의식은 떠돌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45세(1545년)되는 10월에는 을사사화가 일어나 절친했던 친구 이림, 성우, 곽순, 이치 등의 부음을 듣게 된다. 또한 11월에는 어머니마저 돌아가신다. 어머니를 제대로 모시기 위하여 김해에 왔으니 남명은 더 이상 여기에 머물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그는 아버지의 묘소 동쪽에 어머니를 안장하고 고향인 합천에서 혁신적인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과거의 무거운 껍질을 벗어던지고 싶었던 것이다. |